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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安東 權氏)의 자랑스러운 사시(四始)

죽재권혁무 2012. 8. 1. 16:13

1. 안동권씨(安東 權氏)의 자랑스러운 사시(四始)

사시(四始)란 ‘우리 나라 역사상 권문(權門)에서 가장 먼저 비롯된 네 가지 업적(業績)’을 말하며, 그것은 다른 어떤 가문(家門)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며, 매우 자랑스러운 일인 동시에 우리 일족(一族)의 영예(令譽)이며 긍지(肯志)이기도 하다.

(1) 기로소(耆老所)에 최초로 입소(入所)

기로소(耆老所)란 조선시대에 연로(年老)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親睦) 및 예우(禮遇)를 위해 설치한 기구인데, 처음에는 경로당과 같은 친목 기구의 성격을 띠었으나 1765년(영조 41)부터는 독립관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왕도 참여하였으므로, [대전회통]에는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하였다.

원칙적으로는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인 전ㆍ현직의 고관(高官) 출신으로 70세 이상의 원로(元老)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들을 ‘기로소 당상’이라고 하였으며 인원 제한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통틀어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에 불과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한 기로소에 가장 먼저 입소한 분이 바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서예가이셨던 우리 권문(權門)의 14세손인 권중화(權仲和)공을 비롯해서 15세손인 권희(權僖), 17세손 권진(權軫), 20세손 권홍(權弘), 21세손 권철(權轍), 24세손 권대운(權大運) 등 총 21명이었다.

(2) 우리 나라 최초로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우리 권문(權門)

대제학(大提學)은 조선시대 때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수장(首長)인 정2품 벼슬이다. 조선 건국 이전에는 없었으나, 조선 초기에 이르러 문물과 관직을 정비하고 보완할 목적으로, 예문관에만 대제학을 두었는데, 1420년(세종 2년)에 이르러서는 집현전(集賢殿)에도 대제학을 두었으며, 1456년(세조 2년)에는 집현전을 홍문관으로 고쳐 대제학을 두었다. 이러한 대제학이 되려면, 전임 대제학이 조정의 공론(公論)을 모아서 학식과 경륜(經綸)이 가장 높은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을 선발하여 추천하면, 전ㆍ현임 정승과 이조판서 등이 투표로 가부(可否)를 결정해서 왕의 재가를 얻어 임명했다. 대제학은 대개 한 번 임명되면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終身)토록 그 직책(職責)을 지켰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당대 최고의 학식과 경륜(經綸)으로 상징되던 대제학(大提學)에 가장 먼저 오르신 분이 바로 우리 권문(權門)의 16세손 양촌(陽村) 권근(權近)이셨다.

★ 조선조에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분

16세(世) 양촌(陽村) 권근(權近)
17세(世) 지재(止齋) 권제(權蹄)
18세(世) 소한당(小閑唐) 권람(權擥)
27세(世) 하계(霞溪) 권유(權愈)

(3) 호당(湖堂/독서당)에 최초로 입소

호당(湖堂)이란 조선시대에 국가의 인재(人材)를 길러 내기 위해 건립한 전문 독서 연구기구를 말하며, 일명 ‘독서호당’ 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호당이 처음 설치된 것은 1426년(세종 8년)인데, 그 뒤에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의 청(請)을 받아들여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여 인재를 길러 내었다.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507년에 다시 부활되었으며, 중종은 1517년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인재 양성과 더불어 학문 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호당, 즉 독서당은 학문과 국정에 대한 연구기관으로서 역대 제왕들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았는데, 호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입소자의 자격과 규정을 엄격히 심사하여 입소하는 인원을 소수로 줄여서 선발하기도 했다. 1426년부터 1773년까지 약 350년 동안 총 48차례에 걸쳐서 선발된 인원은 겨우 320명에 불과했는데, 권문(權門)에서는 권채(權採)를 비롯해서 권건(權健), 권경유(權景裕), 권달수(權達手), 권운(權雲), 권중경(權重經) 등 6명이나 호당(湖堂)에서 재직하였다.

(4)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族譜)인 [성화보(成化譜)]의 편찬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종족(種族)의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계보(系譜)를 족보(族譜)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족보는 우리 권문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이다. 일찍이 안동 권문(安東權門)에서는 족보를 통하여,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간의 단결과 화목(和睦)을 도모하며, 후손(後孫)으로 하여금 뿌리 의식을 고양(高揚)하는 기풍을 이루게 하였다. 1476년(성종 7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족보인「성화보(成化譜)」는 자랑스럽게도 우리 나라에서 현전(現傳)하는 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니, 우리 나라 족보는 안동 권문(權門)에서 가장 먼저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빛을 남긴 안동 권문의 선조님들


(1) 왕비(王妃)가 되신 분


17세(世) 현덕왕후(顯德王后) : 16世 권전(權專, 부정공파)의 따님으로, 조선 제5대 문종(文宗) 임금의 비(妃)가 되었다. 1441년 단종(端宗)을 낳으시며 모후(母后)가 되셨으나 요수(夭壽)하셨다. 능(陵)은 양주(楊洲)의 현릉(顯陵)이며, 시호는 현덕(顯德)이시다.

(2) 부마(駙馬)가 되신 분

① 17세(世) 화성위(花城尉) 권상검(權尙儉, 복야공파) : 태조의 부마(신숙옹주)
② 17세(世)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 추밀공파) : 태종의 부마(경안공주)
③ 18세(世)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 추밀공파) : 태종의 부마(숙근옹주)
④ 24세(世) 길성군(吉城君) 권대임(權大任, 추밀공파) : 선조의 부마(정선옹주)
⑤ 24세(世)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 추밀공파) : 선조의 부마(정화옹주)

(3) 정승(政丞)에 오른 분(8분)

① 14世 동고(東皐) 권중화(權仲和, 복야공파) : 영의정(태종)
② 17世 경재(敬齋) 권진(權軫, 좌윤공파) : 좌의정(세종)
③ 18世 소한당(小閑唐) 권람(權擥, 추밀공파) : 우의정(세조)
④ 20世 정경(正卿) 권균(權鈞, 추밀공파) : 우의정(중종)
⑤ 21世 경유(景由) 권철(權轍, 추밀공파) : 영의정(명종)
⑥ 24世 석담(石潭) 권대운(權大運, 추밀공파) : 영의정(숙종)
⑦ 27世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시중공파) : 좌의정(숙종)
⑧ 31세 경희(景羲) 권돈인(權敦仁, 시중공파) : 영의정(헌종)

※ 증직 정승(贈職政丞): 증직(贈職)이란 어떤 사람이 생전에 국가적으로 큰 공적을 세우고 죽으면, 국가에서는 그 사람이 죽은 뒤에라도 관직을 내려서 명예를 높여 주던 것을 말함인데, 안동권문의 증직(贈職) 정승(政丞)은 총 39명에 이른다.

「뿌리깊은 안동 권씨」.전원문화사(177쪽)」
※ 정2품 이상인 찬성(贊成), 참찬(參贊), 판서(判書), 판사(判事), 유수(留守),

 

판윤(判尹) 등을 지낸 분이 총 145명 이었음.

「뿌리깊은 안동 권씨」.전원문화사(230쪽)」

(4) 봉군(封君)을 받은 분

봉군(封君)이란 왕자 및 공신(功臣)을 군(君)으로 봉하는 것을 말하는데, 왕비의 부친 및 2품 이상의 종신(宗臣), 공신(功臣)의 사속자(嗣續子)를 군(君) 또는 부원군(府院君)으로 봉(封)했다. 안동 권문(權門)에서 봉군(封君)을 받은 분은 총 70명이다.

(5) 시호(諡號)를 받은 분


시호(諡號)란 재위(在位) 임금이 돌아가신 선왕(先王)의 공덕(功德)을 기리거나, 현신(賢臣)이나 유현(儒賢)이 죽은 후에 이들의 업적을 기릴 목적으로 추증(追贈)하는 호(號)를 말한다. 권문(權門)에서 시호(諡號)를 하사(下賜) 받으신 분은 총 51명이다.

(6)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인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분

16세(世) 양촌(陽村) 권근(權近)
17세(世) 지재(止齋) 권제(權蹄)
18세(世) 소한당(小閑唐) 권람(權擥)
27세(世) 하계(霞溪) 권유(權愈)

(7) 청백리(淸白吏)

나라에서는 청렴결백하고도 훌륭한 관리를 뽑아서 세인들의 귀감(龜鑑)으로 삼았음.
18세(世) 전한(典翰) 권빈(權璸), 중조조(中宗朝)의 청백리(淸白吏)

그 외에도 대제학이셨던 양촌 권근(權近)의 둘째아들인 권제(權蹄)는 세종대왕 때에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정인지, 안지와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은 대제학이었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은 임진왜란 때의 명장으로 도원수(都元帥)를 지냈으며, 백사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婿)이기도 하다. 또한 광해군 때에 명(明) 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친 대문장가로 권필(權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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