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예천노봉서원 7

노봉서원 경자2020년 추향

경자2020년 10월 31일(토) 노봉서원 추향에 다녀오다. 코로나로 인하여 춘향을 추향으로 연기하여 9월 중정으로 변경하므로 운곡서원은 9월 초정일에 치루고 임원 다수가 노봉서원 추향에 참석 초헌관이성호 아헌관장사언 종헌관신동영 찬자박헌서 축박동균 이하생략 경주에서 8명 참석 권한욱(대구) 권 욱(대구) 권혁근(국당) 권용호(포항) 권혁무(대구) 권오신(포항) 권기완(국당) 권세열(부산) 상이당 소의재 녹포와 조기 즉 목기1개와 죽기1개를 바꾸었다

[스크랩] 노봉서원 이야기

명 칭 : 노봉서원(魯峯書院) 소 재 지 : 호명면 내신리 341 (원소재지 : 예천군 호명면 내신리 341) 건축시기 : 1794년 중건시기 : 1921년(권산해 제향) 훼철시기 : 1866년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1985. 08. 05. 지정 건축 이야기 노봉서원(魯峯書院)은 내신마을의 신당초등하교 옆 노사봉 아래 서향으로 좌정하고 있는 5동의 건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사주문을 통하여 강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강당 뒤편에 전사청이 있다. 그 오른쪽에 내삼문과 사당(숭의사)이 위치한다. 강당 왼쪽 협문 밖에는 관리사가 있고, 담장 바깥 울창한 송림 앞에는 연못이 있다. 건축 배경 노봉서원은 1794년(정조 18) 단종을 추모..

권산해 증직(조선왕조실록 참조)

정조 32권,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4월 12일(병진) 5번째기사 고 첨정 권산해에게 정문을 세워주고 증직하기를 명하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경기·경상·충청 세 도의 유생 송문기(宋文箕) 등이 상언하여 고 첨정 권산해(權山海)에게 정문을 세워 주고 증직하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산해는 병자년5161) 에 순절하였는데 누각에서 투신 자살하여 충절이 뛰어나니, 마땅히 드러내 빛내주는 조처가 있어야겠습니다.” 하고,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산해가 누각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은 비록 뚜렷이 드러난 일이긴 하나 전가 사변(全家徙邊)과 자손 금고(子孫禁錮)가 된 것으로 추측해 볼 때 그가 육신의 무리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 장릉(莊陵)에 절의를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높..

권산해 관직회복(조선왕조실록 참조)

통합국역원문 Home > 열람(왕대) > 정조실록 > 정조 13년(1789년) > 정조 13년 5월 > 정조 13년 5월 7일 정조 27권, 13년(1789 기유 / 청 건륭(乾隆) 54년) 5월 7일(계해) 3번째기사 경주의 유학 권종락의 청으로 고 첨정 권산해의 관직을 회복시키다 고 첨정(僉正) 권산해(權山海)의 관직을 회복하였다. 경주(慶州)의 유학(留學) 권종락(權宗洛)이 격쟁(擊錚)하고 말하기를,“12대조 고 첨정 산해는 장릉(莊陵)4941)의 이부(姨夫)가 되는 신하로 평소부터 지조가 굳어 사류(士流)의 추앙을 받았으며 호를 죽림(竹林)이라 하였습니다. 문묘(文廟) 경신년에 녹사(錄事) 및 주부(主簿)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단묘(端廟) 갑술년에 비로소 종부시 첨정으로 나아갔으나..

권산해 (절의 충민공 죽림선생과 노봉서원)

節義 忠愍公 竹林先生과 魯峰書院(종보 제447호 2012.9.1) 죽림공 휘 산해(山海, 19世 佐尹公派)는 중문지후(中門秪候) 이조참판을 지낸 영가군(永嘉君) 휘 혁(奕)의 5세손이며 문하시랑(門下侍郞) 증 좌참찬 희경공(僖敬公) 휘 용일(用一)의 고손이며 문정공(文靖公) 증좌의정 휘 희정(希正)의 증손이며 감사(監事) 송고공(松皐公) 휘 초(軺)의 손자이고 경력공(經歷公) 휘 관(寬)의 아들로 태종 3년(1403년) 예천군 용궁읍 대죽리에서 출생하였다. 송고공은 이태조가 북백(北伯)과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 하였으나 받지 않고 염송산에 은거하여 송도를 생각하는 일념으로 산 이름 중 염(廉)자를 생각 염(念)자로 고치고 호를 송고(松皐)라 하니 충효를 전승하는 전래가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종조부(從祖父..

노봉서원 / 죽림 권산해

충민공(忠愍公) 죽림선생(竹林先生) /휘 권산해(權山海) 약력 公은 조선초기의 의인(義人) 휘 산해(山海, 19世 佐尹公派)는 字는 덕보(德甫), 호 죽림(竹林)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을 지내셨다. 증 이조판서(吏曹判書) 시호는충민공(忠愍公)이다. 혁(奕)의 5세손이며 문정공 증좌의정 희정(希正)의 증손이며 염송산에 은거한 송고공(松皐公) 초(軺)의 손자로서 태종3년 예천군 용궁읍 대죽리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종조부 좌의정 문경공(文景公) 진(軫)에게서 수학하였으며 공이 어릴 때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지조가 매우 굳고 곧아서 백이전(伯夷傳)을 읽으시다가 책을 덮고 탄식하시되 〝이런 사람(백이숙제)이 있은 연후에 만고강상을 부지할 수 있다〞하니 상신 종조부 문경공의 칭찬을 받으셨다 하오며 재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