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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의 繁榮期

죽재권혁무 2013. 6. 2. 18:13

文學繁榮期

 

漢文學 下

第四編

Ⅳ. 文學의 繁榮期

   이時期는 李朝 五百十九年의 동안을 統稱함이었다. 왜 이 時期를 繁榮期라 하는가? 그것은 漢文學이 高麗時代에 比하여 高度로 旺氣를 發揮하였다는 거기에만 局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李朝에서는 오로지 右文의 治를 主眼으로 하여 性理學과 功令學이 어깨를 마주 걸고 伴行함에서 文學上 作品이 보다 더 많이 나왔다는 것으로써 그렇게 繁榮이란 指稱을 준다는 것이 아니다. 그 繁榮은 朝鮮사람의 思想을 그 語音대로 自由表現할 만한 『訓民正音』의 制定에 實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은, 이제 『正音(훈민정음)』의 制定의 本意가 어디에 있었던가를 살펴보자.
  『正音(훈민정음)』이 制定되던 世宗 二十五年 十二月 즉, 公歷 1443年으로부터 『正音(훈민정음)』의 解例가 完成되던 同 二十八年 九月까지의 進行된 事業이 그것을 歷歷히 說明하여 준다.
  첫째는 世宗의 『訓民正音』 序言에 「國之語音 異乎漢土, 與其文字, 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라 하여 그 本意가 刑獄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崔萬理(최만리) 等 反對疏에
  「刑獄의 事件은 吏讀로 적어도 넉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刑獄의 公平 不公平은 獄吏의 人物如何에 달린 것이요, 言文一致로 訴狀을 잘 꾸미는 거기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諺文이 刑獄의 公平에 아무런 補益도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둘째는 世宗 二十六年 二月에 ‘『東國正韻』의 編成을 前提로 하고서 申叔舟(신숙주)·崔恒(최항)·朴彭年(박팽년) 等을 命하여 韻會의 翻譯을 開始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音韻의 矯正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崔萬理(최만리) 等 反對疏에
「事業의 成功에는 近速을 貴重視할 것이 아니라, 그 百年大計인 如何를 살피며 또 그것이 歷代 政敎에 어그러지지 않고, 中國에 比하여 부끄럽지 않으며, 百世聖賢에게 疑惑되지 않고, 全國民의 群意에 應合되는 것이라야 眞重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先代로부터 使用하던 韻書를 고치고 無稽의 諺文을 附會하여 工匠 數十人으로 하여금 이것을 새기게 하고 吏輩 數十名에게 이것을 訓習시키어 장차 널리 廣布하려는 것은 實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셋째는 世宗 二十六年에 『三綱行實』을 諺解하였는데, 讀者에게 印象을 더 깊이 주기 爲하여 그 題材에 關聯되는 그림을 揷入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儒敎의 傳統的 道德인 忠孝貞烈의 大義를 勸奬함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넷째는 世宗 二十七年 四月에 權踶(권제)·安止(안지)·鄭麟趾(정인지) 等으로 하여금 一百二十五章의 『龍飛御天歌』를 諺漢文의 交作으로 撰進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太祖創業의 盛德神功을 讚頌하며 後世子孫의 繼述保守를 規戒함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다섯째는 『正音(훈민정음)』의 頒布와 함께 公文書類에 『正音(훈민정음)』使用令을 내리며, 吏科 및 吏典의 取材에 『正音(훈민정음)』를 試驗科目으로 定하였으니, 그 本意가 또한 公文處理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崔萬理(최만리) 等 反對疏에
  「薛聰(설총)의 吏讀가 비록 鄙陋하나 또한 中國文字에 類似하고 또는 吏胥奴隷의 무리라도 數卷의 書籍을 배우고, 그것을 익히면 能히 다 通하여 自己의 思想을 疏通하게 된다. 더군다나 吏讀는 벌써 數千年동안 모든 公私文牒에 通用되면서 아무 不便을 느끼지 않게 하는바, 이런 弊害없는 낡은 文字를 버리고서 鄙陋하고 無益한 文字를 創作하는 것은 學問硏究를 너무나 쉽게 하여 吏胥輩에게 立身의 길을 막 열어 놓는다」란 말까지 있었다.
  위에 提示한바 그 다섯 가지를 보면 누구든지 『正音(훈민정음)』制定의 本意를 다 알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儒書·佛書·兵書·醫學·農學 等의 諺解·諺譯이 나온 그것으로써도 『正音(훈민정음)』란 普通으로 漢學硏究에 關한 一種 補助物에 지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證明할 수 있다. 그러나 宮廷用의 樂章으로 된 것이지만, 自家의 創業難·守成難을 爲해서 지은 것이지만, 그래도 正音歌曲의 百花頭인 『龍飛御天歌』가 出現한 것은 『正音(훈민정음)』, 그 自體에 文學的 素質이 內包된 것과 그 素質에는 漢學을 能히 壓倒하고서 朝鮮 將來의 民族的 文化를 創建하려는, 그렇게 偉大한 可能性까지 갖추어 있다는 것이 다 表示되었다.
  그러한 素質에 對하여서는 『正音(훈민정음)』 制定에 參劃하였던 鄭麟趾(정인지)·成三問(성삼문) 等 一世 名儒의 眼光으로 發見하지 못한 듯하며, 燕山主의 權威로도 防止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燕山主는 李朝 朝鮮의 第十一世 王인데 그 어머니 尹氏가 非命의 奇禍를 當한 것은 諺文으로 그의 非行을 暴露한 거기에 있었다 하여 卽位하던 처음에 諺文禁止令을 내렸다. 이제 「燕山實錄」에 실린 그 禁止令의 內容을 分析한다면

1. 諺文을 行用하는 者는 制書法을 毁棄한 罪로써 處理할 것;
2. 알고도 告發하지 않는 者는 同一한 條律로 論罪할 것;
3. 만일 朝官·士大夫의 집에 諺文混用의 書籍이 있다면 그것을 모조리 불 질러 없애야 할 것;
4. 諺文은 候籍이나, 外語書類의 翻譯에만 쓸 것이라 하였다.
  이 禁令이 얼마나, 嚴酷하냐? 그럼에도 不拘하고 『月印千江之曲』의 釋譜라든가, 『初學字會』의 諺釋이라든가, 『永嘉集』·『明皇誡鑑』 等의 諺解라든가 그러한 것들이 다 남기어 있었나니, 이것은 『正音(훈민정음)』의 生命이, 浩遠하다는 것을 말함이며, 또는 燕山朝에 燒酒陶瓶이라는 月旦評까지 받은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漁父詞’」가 있어서 從來에 純漢文이었던 詞體가 一變하였고, 壬辰·丙子(임진왜란 1592·병자호란 1636)의 兩亂을 겪으면서 漢文小說보다 諺文小說이 漸次 優勢를 잡게 되었으니, 이것은 『正音(훈민정음)』의 大衆性을 말하는 것이다.
  甲午更張(1894年)이라 하면 實로 눈물나는 일이었다. 中國으로 더불어 同文同軌의 길을 꼭 밟아야 慕華主義의 精神에 合致되는 것으로 國是를 삼아오던 李朝의 君臣上下가 外勢에 부대끼어서 그런 일이지만, 어쨌든 獨立國으로 宣布하고 皇帝라 稱한 것은 痛快한 일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外勢에 부대껴온 그것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을 禁할 수 없으되, 그래도 獨立(實地에는 虛名이지만)이란 그 名義에 있어는 痛快를 부르짖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國文使用令이 아울러 내렸으니 그렇지 않아도 時勢의 要求로서 『正音(훈민정음)』는 더욱더 새 活氣를 昻揚할 터인데, 말하자면 正音(훈민정음)文學은 그러한 經路를 踏破하면서 成長한 것이다.

1. 歌曲
  위에서 말한바 高麗 以前에도 朝鮮사람의 情調를 그 語音대로 그려낸 歌曲이 量的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많았지만, 金富軾(김부식)과 鄭麟趾(정인지)같은 作史家의 손에서 다 削除를 當하고 말았다. 金富軾(김부식)의 當時에는 正音(훈민정음)文字를 가지지 못하였음에, 그것을 記入할 可能이 아주 없었거니와 『高麗史』의 完成은 『訓民正音』를 制定한지 九個年되는 文宗 元年의 일이니 그것을 記入할 可能이 넉넉히 있었다. 하물며 鄭麟趾(정인지)는 『正音(훈민정음)』制定에 參劃하였던 사람 中에 가장 有力한 한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純漢文의 歌曲이 아니라면 다 鄙俚하다 하여 削除하였다. 생각하면 그 心事가 어디에 있었을까? 아무리 寬大한 사람이라도 容忍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입과 입이 서로 傳하여 오던 百濟의 「井邑詞」, 高麗의 「苽亭歌」·「處容歌」 等이 『樂學軌範』에 記入되고 李朝 以來의 歌曲을 撰輯한 書類가 많이 있게 된 것은 그 功을 『訓民正音』의 制定에 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 歌曲에 關한 書類를 든다면 이러하다.
『樂學軌範』. 成俔(성현)
『靑邱風雅』. 金宗直(김종직)
『昭代風謠』. 南龍翼(남용익)
『歌曲源流』. 張友璧(장우벽)
『海東歌謠』. 金壽長(김수장)
『海東樂府』. 沈光世(심광세)
『靑丘詠言』. 金天澤(김천택)
『鄕歌律髓』. 作者未詳
『女唱類聚』. 作者未詳
『南薰太平歌』. 作者未詳
『大東風雅』. 作者未詳
『歌曲選』. 崔南善(최남선)
『新撰俗曲集』. 李尙俊(이상준)
이 밖에 營利的으로 되어진 『新舊流行雜歌集』 等 小冊字가 市肆에 多數히 나왔으니 그것은 다 晩期의 現象이었다.

一. 打令
  打令은 普通으로 雜歌라 하는데, 그것이 「판소리」라 하는 短歌의 따위를 對立한 名稱인가 한다. 다른 歌曲도 그 大部分이 그러하거니와 더욱이 打令에 있어서는 年代와 作者를 알아볼 길이 茫然하고 그 中에서 或 어떤 것은 알 수 있으나, 그런 것은 두셋에 지나지 못한다.

「놀양」
초목이 다 성림한데 구경하기도 즐겁도다.
마를네야 에야 아야라 찌여라 네월네가 네로구나 마리에헤 에헤루지-아 네월네로구나 에 에헤루지-에 에헤루지 이에에에야 네월네로구나 에라듸여, 에에야 네월네로구나.
녹양벋은 길로 북향산 들어를 간다.
에 에야 네월네로구나
춘수는 낙락, 기러기는 훨훨, 낙락장송이 와자찌끈 뚝닥 부러지고, 마른 가지만 남아,
지와자쟈 절시구나, 지와자쟈 절시구나, 얼시구 좋다, 말 들어들 보아라, 인간 하직하고 천산에 들어를 간다.
에 에이에 에에야 네월네로구나.
황혼을 거지 검쳐 잡고, 성황당에 궁뻐꾹새야, 한 마리는 나무에 앉고, 또 한 마리는 들에 앉아 네 어디로 갈라느냐, 네 어디로 갈라느냐, 이산 넘어가도 궁뻐꾹새야, 저산 넘어가도 궁뻐꾹새야, 에 어린 양자, 고운 태도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임 생겨달라고 비나이다, 삼월이라 육구낭자 대사뭉구리 얼시구나 절시구나.
담불담불이 생긴도 사랑, 사랑사랑, 사랑사랑 남창북창에 열고나보니 담불담불이 생긴도 사랑, 층암절벽에 기어나 올라, 홰홰츤츤이 감긴도 사랑, 사랑초 다방초 홍두깨, 너출너출이 박너출이 소고 자루로 다 나간다.
에 네월네로구나

「긴山打令(사거리)」
나지나 에헤이나노, 에헤에헤에헤에헤로 산하지로구나.
1. 천(과천이란 말), 관악산 염불암 연주대요, 도봉불사, 삼막으로 에헤이 둘렀구나.
에―에헤루지-지로구나, 마를네야 에헤에헤에헤루 산하지로구나.
2. 추야공산 다 저문 날에 모란 황국이 다 붉는구나.
에― 경상도라 태백산은 상주 낙동강이 더듬어 있고 전라도 지리산이 해동뒤쳐 자빠라진 김에 에헤이 둘렀구나.
3. 백마는 가자고 네 굽을 땅땅 치는데 정든 님 날 부여잡고 낙루만 한다.
에― 울지를 말아라, 울지를 말아라, 네가 진정하고 울지를 말아라, 너무 울기만 하여도 정만 떨어진다.
4. 저산 곧 돌아를 가면 우리의 정든 님을 보련마는.
에― 삼척 울릉도 우리 조선 수구막이 성황인데 열두제 섬으로 에헤이 둘렀구나.
5. 저 달아 보느냐 임 계신데 명기를 빌려라, 나도 잠깐 보자,
에― 한량노릇을 마저 하고서 가리각신 마음을 먹더니만, 새 장고 치는 대로 발림춤만 나간다.
6. 탁자 밑에 늙은 장승이 활대장삼을 입고 굽으럭 굽석어려서 춤만 춘다.
에― 동헌은 지척이요, 사포님 계신 곳에 울음이란 말이 아이고 웬 말이냐.
7. 백구는 펄펄 대동강상 비하고, 장송낙락 청류벽상취라.
에― 장성일면 용용수요 대야동남은 점점산인데 능라도 백운탄으로 놀러나 가세.

「자진 산타령(중거리)」
나지나 산이로구나 에라 두게나요, 나나지로만 산이로구나.
1. 여초목이 동남풍에 거리심액 우는 소리, 대장부 열네 촌의 간장 다 녹여낸다.
에―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에 백운간으로 달이 뭉깃뭉깃 솟아만 온다.
2. 산진이냐, 수진이냐, 해동청 별볼애매는 두 죽지 옆에 끼고 고문장줄령을 안고만 돈다.
에― 아하 저것이 무엇이냐, 아하 저것이 무엇이냐, 금이냐, 옥이냐, 옥이냐 금이냐, 금생려수가 아니어던 금이란 말이 웬 말이며, 옥출곤강 아니어던 옥이란 말이라도 당치를 않소.
3. 열려거던 열려무나, 말려거던 말려무나, 남의 집 딸 너뿐이며, 남의 아들이 나뿐인가.
에― 아하 예 보아라, 말 들어라, 야하 예 보아라 말 들어라. 너는 어떤 년의 계집애완대, 장부 장따지를 새장고 변죽같이 와싹 바싹에 다 녹이며, 나는 어떤 놈의 귀동자완대 사람 년의 열네 촌의 간장을 다 녹여낸다.
4. 우수연의 기생들아, 저배를 타고서 선류를 하자, 선류는 하지마는 사공이 없어서 어찌를 하나.
에― 바람이 장차 부시려는지 나뭇가지는 밤춤 추고, 악수 장마가 지려는지 만수나 천산에 구름이 펑퍼졌다.
5. 영천수라 맑은 물에 귀를 씻고서 앉았으니, 연잎은 숙어지고, 방초는 우거졌는데, 물찬 제비 한 쌍이 왕래만 한다.
에― 나무잎만 뚝뚝 떨어져도 한병인가 의심하고 새만 좌르륵 날아들어도 자룡의 사모창만 여겨 의심을 한다.
6. 엄지장가락은 다 물어빠지고 새끼손가락은 삼동이 났네.
에― 어머니 알면 매 맞겠네, 재전 깊은 정을 생각하면 죽으면 죽었지 못 놓겠네.
7. 갈까보다, 말까보다, 임을 따라 갈까보다, 자룡이 월강하던 청총마 칩더타고 이날이시라도 한양을 갈까나.
에― 널로 하여 얻은 병은 무슨 약을 쓰잔 말고, 형방패독산도 저버리고, 곽향정기산도 저버리고 살뜰한 님의 말씀으로 날 살려내게.

「경발림」
1. 천지변방이요, 이수는 요란한데 삼산반락 모란봉이요, 이수중분 능라도로다.
에― 어디로 가자고 나만 졸라, 어디로 가자고 지그렁 직신, 일하기 싫고 낮잠 자기 좋으면 나만 졸졸 조리조리 따라 안성의 청룡 가세.
2. 수락산 폭포수에 중구재 만리재며, 약잠재 누에머리, 용산 삼개로에 둘렀구나.
에― 예산의 김덕선이 수원의 북문 지어, 나라의 공신되어 수성옥이와로 감투 눌러쓰고, 어주삼배 마신 후에 앞에는 모흥갑이, 뒤에는 권삼덕이, 소동옥이, 십만여겹의 쌍화동 세우고 어전풍악 꽝꽝치면서 장안 대로상으로 갖은 신래만 청한다.
3. 바람이 불려는지 나무중동 반춤 추며, 악수장마 지려는지 만수나 청산에 구름이 솟아온다.
에― 관동팔경 구경 가자, 강릉의 경포대·양양의 낙산사·울진의 망양정·삼척의 죽성루·고성의 삼일포·통천의 총석정·평해의 월송정·간성의 청간정이란다. 놀기 좋기는 남원의 광한루로다.
4. 강원도 금강산 유점사 법당 뒤에 느릅나무 가지마다, 서천 서역국서 나오신 불상 오십삼불이 분명하다.
에― 서도팔경 구경 가자, 삼등의 황학루·성천의 강선루·개천의 무진대·영변의 약산대·강계의 인풍루·의주의 통군정·안주의 백상루·평양의 연광정이란다. 놀기 좋기는 부벽루 대동강이란다.
놀양·사거리·중거리·경발림은 그 調의 名稱을 이름인데, 그 中에 놀양은 꽤 오랜 年祚를 가진 듯하다. 왜 그러냐 하면 그 結束에 「너출너출 박너출이 소고자루로 다 나간다」라는 말이 있는 까닭이다. 曲項葫蘆(호로박)에 金鈴을 綴하고 彩帛을 飾하여서 拊擊進退함은 打令의 本色이니 手鼓로써 그것을 대신하기 前에 「놀양」이란 노래가 벌써 있었다는 것을 알린다.

「육자백이」
산하지로구나―
1.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서 내려온다, 우장을 허리에다 두르고 거름 매러 갈까나.
2. 천년을 살까나 만년이나 살으란 말이냐, 죽음에 들어서 노소가 있을까나, 살아생전에 마음대로만 노자.
3. 춘산에 지는 꽃은 지고 싶어서 제가 지나, 사세 만부득 하여서 지는 꽃이로구나.
4. 진국명산 만장봉이 바람이 분다고 제 쓰러지면 송죽 같이 굳은 절개 매 많이 맞는다고 훼절을 할까나.
5. 백운청산 놀던 토끼, 동해 유수 흐르는 물에 목욕차로만 내려 왔다 우연히 별주부 따라서 수궁에 완경 가누나.
6. 저 건너 초당 앞에 백 년 언약 화초를 심었더니, 언약 화초는 아니 나고 금년 이별 화초가 만발하였네.
7. 만리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월색은 만정한데, 임이 저리 다정하면 이별한다고 잊을쏘냐, 이별 말자고 지은 맹세, 태산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이, 무너질 줄 거 뉘가 알까나.
8. 저 달은 떴다 대장이 되고 견우직녀는 전군후군이 되어 청천에다가 유진을 하고 은하수로만 건너갈 제, 동자야 행군취타를 하여라, 저 건너 해 떨어지는 곳으로 승부결단을 하리라.
9. 방안이 컴컴 어둡다 하고 길 옆으로 창도질 말며, 임이라고 속에 있는 말 다하지 마라, 일후에 남되고 보면은 후회막급이라.
10. 예보아라 동무들아, 이내 말을 들어를 보아라, 춘향이가 중형을 당해 거의 죽게 되었구나, 아이고 이 말이 웬 말인고, 어서 바삐 삼문거리로 나가보세.
11. 임 잃고 임 생각하니 주야장천에 꿈 몽자요, 생각사, 탄식탄하니, 베개 넘어서 눈물 루라, 누었으니 잠이 오며, 앉았으니 임이 오랴. 임도 잠도 다 아니오고, 요 내 심장만 썩는구나, 우리도 언제나 허공 달린 저 달을 따라서 임의 창전에 빛될까나.
  傳說에 依하면 우리 時代의 名唱 宋萬甲(송만갑)의 祖父가 이 노래를 作曲하여 내었다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 年代는 줄잡아도 純祖의 때인가 한다.

「수양산가」
1. 수양산에 고사리 캐고, 우수빈에 고기를 낚아, 이적의 빚은 술, 이태백 밝은 달이, 등왕각 높은 집에, 장건이 승사하고, 달구경 가는 말녕을 청하자, 바람 불고 눈비가 오려는지, 동녘을 바라보니, 자미봉 자각봉과 청전 밝은 달이 벽수벽운이 층층방곡에 절로 감아 흔들흔들.
네에루 호세이의네루 호노네니, 나네루 이루허고 나이루 이루허고, 네루나니 나루나루허고, 너루네헤이 너니나노, 노너니 나이루, 나너니나노 너니나노 노너니나.
2. 목왕은 천자로되 요지 연락하고, 항우는 장사로되 만영추월에 강개비가 하고, 명황은 영주로되 양귀비 이별 후에 마외역에 울었나니, 한벽당 청풍월에 만고천하 영웅호걸이 오늘같이 좋고 좋은 날 만나 아니 놀고 무엇을 하자느냐.

「매화타령」
좋구나 매화로구나.
1. 안방 뒷방 가르닫이 완자문에가 제격이라.
에야 데야 에헤야 에에 에헤루여라 좋구나 매화로구나.
2. 네 귀 번뜩 장판방에 살진 큰아기 게 누었거라.
에야 데야 에헤야 에에 에헤루여라 좋구나. 매화로구나.

「도화타령」
에헤 도화로구나.
1. 도화로다, 도화로다, 도화 점점이 안주나 되고, 녹수 잔잔에 술이나 부어라 에헤 도화로구나.
에헤 나 돌아를 간다, 에헤 나 돌아를 간다, 에헤- 에에 루 지루 에에루지루 에헤 지여루 도화로구나.
2. 사당년아, 사당년아, 어두운 골목으로 가지를 말아라, 속옷 밑에 돌들어가면 거사놈 앞 길이 다 틀어진다. 에헤 도화로구나.
3. 뒷마당에서 여사당 놀고 앞마당에서 남사당 논다, 사랑궁 속에서 골가보 놀아라 피천을 쓰라고 관자가 나렸다, 당백전 쓰라고 별관자 내렸다. 에헤 도화로구나.
이 노래는 高宗 二年 즉 公歷 1865年의 前後에 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경복궁을 건축하는 역사에서 재정부족으로 피천(淸國小錢)과 당백전을 통용한 까닭이라. 「관자」는 지금에 이른바 상부기관의 명령서와 같은 것이다.

「큰아기타령」
1. 애오개 큰아기는 망건 뜨기로 나간다.
에― 인모앞살 전주당에 공단 뒷막이 제격이라.
2. 신재녕 큰아기는 올베 훑기로 나간다.
에― 달대 갈대 훑개를 만들어 죽죽 소리가 제격이라.
3. 수양산 큰아기는 풋나물 장사로 나간다.
에― 고비 고사리 두릅나물일세 용문산 취가 제격이라.
4. 함경도 큰아기는 명태장사로 나간다.
에― 명태 동태 떼를 묶어 전라도 상고선이 제격이라.
5. 임진강 큰아기는 월천꾼으로 나간다.
에― 이 양반 업고 저 양반 업고 돈 두 푼 받기가 제격이라.

「개골이타령」
1. 개골 개골 청개골이야.
에― 에헤에 나헤에야.
2. 청개골이 찾으려면 미나리골로 가거라.
에― 에헤에 나헤에야.
3. 양류 천만산들 가는 춘풍을 잡아매.
4. 흰 백자 붉은 홍자 고물고물이 단청.
5. 남원 옥중 춘향이는 이도령 오기만 기다려.
6. 푸릇 푸릇 봄배추는 찬이슬 오기만 기다려.
7. 충청도 당대추는 방긋방긋이 열었네.
8. 녹엽이 낙화된들 어느 나비가 돌아와.
9. 따라 가거라, 따라가 여필의 종부라니 임을 따라서 가거라.

「날개타령」
1. 한량 중에 멋 알기는 고창의 신오위장이 날개라.
에― 에헤에 나헤에야.
2. 기생중에 멋 알기는 앵무 비취가 날개라.
3. 사당중에 멋 알기는 영산홍이 날개라.
4. 양반 중에 멋 알기는 대원대감 날개라.

「乞僧타령」
  일심정념 극락세계 나무아미로다. 야하에― 아등이면 도사님, 금상여래 금상마마 무량손님 여래만보살 염불동참, 서방에도 어진세존님, 평생원이 발원이오, 가자복록 효자충신 열녀절부 발원이오, 자손 곱게 길러, 부귀영화 명복백년 울려 가을마데, 자미공덕 금상마마, 선심 없이 남자 되며 공덕 없이 여자 되오, 고대광실 높은 댁에 금의옥식을 노적하고 남종여종을 부리실제, 태평성대로 잘 사옵다가 어느 후세에 돌아가서 착한 성현의 남자로 되리로다, 남자여자 원을 마오, 선심 없이 남자 되며, 공덕 없이 극락 가오, 주야장천 염불하오, 노는 입에 염불하오, 염불이면 불법이오, 불법이면 염불이라, 어서 바삐 시주하오.
  이 노래는 경기도 풍덕 백룡산 흥교사의 중이 지은 것이다. 적어도 두 個의 男僧이 짝을 지어 乞粒할 때에 꽹과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놀양으로부터 걸승타령에 이르기까지는 佛系에 屬한 것으로 보게 되나니 그것이 居士寺黨의 놀음에서 나온 까닭이다. 居士라 하면 僧侶로서 還本한 사람을 이름인데, 元曉(원효)의 小性居士가 곧 그것이요, 또는 俗人으로서도 佛法을 嗜好하여 居土로 自稱한 일이 있는데 白樂天(낙천 백거이)의 白蓮居士가 곧 그것이다. 그 놀음에는 居士가 「모갑이」로 되고 寺院을 中心으로 하여 모든 것을 準備하느니 그래서 「자진山打令」에도 「慶尙道 해동문거리, 京畿 安城 利川 용인대, 黃海道 文化 九月山 佛堂에 거사사당년이 많이 모여…」가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寺黨이란 名稱이 생기어진 것이다.
  丁茶山(다산 정약용)의 列擧한 八般雜流의 첫째는 優婆인데 方言으로는 舎堂이라(『牧民心書』 第三 禁暴條)하고 『朝鮮語辭典』(總督府 編纂) 寺字條에는 寺黨으로 적혔으니, 첫째의 것은 方言의 音을 漢字로써 그렇게 적은 것이며, 둘째의 것은 그 根本義를 잘 解明하였다.

「성조(成造)풀이」
에라 대신이야―
1. 성조본이 어디메야,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이 본일이라, 제비원의 솔씨를 받아 소평대평에 던졌더니, 그 솔이 나서 점점 자랄 적에 밤이면 찬이슬 받고 낮이면 햇발을 받아, 소부등이 되었구나, 소부등이 점점 자라 대부등이 되었구나, 대부등이 점점 자라 청장목이 되었구나, 황장목이 되었구나, 에라하면 만신이야, 에라하면 대신이야 억만 대신이 나리만소서.
2. 그 재목을 고이 길러 옥도끼를 둘러메고 영평가평에 들어가서 소산에 올라 소목을 찍고 대산에 올라 대목을 찍고 원근산천의 칡을 끊어 한 개 두 개 떼를 묶어, 양구양천 흐르는 물에 둥덩실 띄었구나. 이 물의 이 사공아, 고물의 고사공아, 허릿간의 화장아야, 물때 늦고 시 늦어간다.
3. 고개 이쪽에 이 편수야, 고개 저쪽에 저 편수야, 곧은 나무는 곧 다듬고, 굽은 나무는 굽 다듬어, 삼각산 제일봉이라 자좌 오향 터를 닦아, 고대광실 집을 짓고 네 귀에 풍경을 달아라, 동남풍이 건듯 불기만 하면 웽가당 뎅가당 하네.
4. 이 집을 지은 지 삼년 만에 아들이 나면 효자가 나고, 딸이 나면 열녀가 나고, 개가 나면 사자가 나고, 말이 나면 용마가 나고 소가 나면 우황이 든다.
5. 하늘이 울었다 천둥대신, 땅이 울었다 지동대신, 우직근 작근 벼락은 대신, 삼대신이 내릴 적에 죄 있는 마누라는 가슴이 떨렁한다.
6. 이 넋이 뉘 넋이냐, 동북간 지어머니 왕소군의 넋도 아니오, 공양미 삼백 석에 어둔 눈을 뜨단 말가, 심낭자의 넋이로다.
7. 왔구나 왔구나, 천리라도 제가 오고, 만리라도 제가 오고 경상도 아기무당, 제일 경성으로 오입장 걸립을 왔네.
8. 마누라, 마누라, 어디로 가시오, 만수산 넘어서 송림을 가오, 오백예단 장옷에 솔잎이 돋아 청청하기로 하월이라 하노라, 마누라 오시는 길에 거문고로 다리 놓고 가야금·양금으로 둥가 둥당실 내리소서.
9.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아,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도 죽어를 지면 저기 저 모양 되리로다, 살았을 제 먹고 쓰고 거들어 거리고 놀아보자.
이 노래는 경상도 무당에게서 나온 것인데, 어떤 사람이 집을 成造한 後에 巫女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굿한 것이다. 그래서 이 굿의 이름을 成造풀이라 한 것이다.

「무녀(巫女)의 노래가락」
1. 유자도 나무이려만, 한 가지에 둘씩 세씩, 광풍이 건듯 불어, 떨어질 줄 왜 모르나, 우리도 좋은 님 만나, 저 유자 같이.
2.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하니, 산수간에 나도 절로, 어려서 병없이 자란 몸이, 늙기라도 절로절로.
3. 월중명 월중명하니, 배를 타고 금릉에 내려, 물아래 하늘이요, 하늘 가운데 명월이라, 동자야 잠긴 달 건져라, 완월장취.
4. 용산삼개 공덕리하에, 늙은 돌이 있답데다, 아이야 거짓말 마라, 늙은 돌 어디 있니, 옛 노인 하신 말씀이, 노돌이라 하옵데다.
5. 대천바다 한가운데, 뿌리 없는 나무가 나서, 가지는 열둘이요, 잎은 삼백예순이라,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으니, 일월인가.
6. 어려서 글 못 배운 죄로, 순령수(巡令手)의 몸이 되어, 백사장 너른 뜰에, 영기(令旗) 꽂고 누었으니, 밤중에 긴 대답소리, 가슴이 덜렁덜렁.
7. 친구가 남이었마는 어이 그리 유정한고, 보면은 반가옵고, 못보면 그리워서, 아마도 유정무정은, 사괴인 탓이라.
8. 길나랍이 훨훨 다 날아나고, 임의 소식 뉘 전하리, 수심은 첩첩한데, 잠이 와야 꿈을 꾸지, 내게는 꿈조차 야속하니, 그를 슬퍼.
9. 자룡아 말 놓고 창 쓰지 마라, 만인장졸이 다 놀란다, 장창은 어디다 두고, 두르나니 장검이라, 아두를 품에 품고 돌아든다고 장판교라.
이 노래는 시조體로 된 것인데 서울 巫女들이 놀이굿 할 때에 부르는 것이다.

「넋들이」
1. 넋이로다, 혼이로다, 녹양심산에 초넋이야.
나니나노 나니나노나 노나니가 산이라.
2. 넋이라도 네나오고 혼이라도 네오나라.
나니나노 나니나노나 노나니가 산이라.
이 노래는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죽은 사람의 혼을 좋은 곳으로 가게 한다 하여 다리를 갈라주고 또는 친척으로 하여금 둠우에 담은 물속에 나타난 그 혼을 보게 한다는데, 그 굿을 함흥 이남에서는 「망묵」이라 한다.

「산(山)念佛」
1. 백팔염주를 목에다 걸고 향산사루만 돌아든다.
나무아미 타불이라.
2. 백화운림에 강산 두룸히 높이 떴다.
이나누나요 나니난실나요 나도나니가 산이로다.
3. 산에 올라서 옥을 캐니 이름이 좋아서 산옥이라.
나무아미 타불이라.
4. 심불로라, 심불로라. 백수한산에 심불로라.
나무아미 타불이라.
5. 저산 넘어 파를 심어 그 파 이름이 경파로다.
나무아미 타불이라.
6. 뜨어간다, 뜨어간다, 배뱅이 영안이 떠나간다.
나무아미 타불이라.
7. 성산에 최일 장군 마누라, 왕림하는 길에 무엇으로 다리 놓노
돌다리 놓자하니 돌다리 가라 앉고, 흙다리 놓자하니 흙다리 풀어지고, 나무다리 놓자하니 나무다리 뜨네, 무엇으로 다리 놓을고, 오현금 탄일성에 기치창검으로 다리 놓게.
나무아미 타불이라.
  이 노래는 평안도 무당들이 놀이굿을 차리고 乞粒하는 때에 부르는 것이니 그 命題만 보아도 佛敎의 影響을 무던히 感受하였다. 括論에서도 말하였거니와 우리 조선에서 「샤머니즘」이 原始時代로부터 一種의 宗敎的 形態를 가지고서 近代에까지 내려 온 것이다. 三國時代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高麗時代에도 「簫管家家盡事神」이라는 安裕(안유)의 詩가 있었고, 李朝時代는 「大內로부터 群邑에 이르기까지 다 主巫가 있다는 李睟光(이수광)의 『芝峰類說』이 있었으니, 이것으로써 샤먼의 勢力이 傳統的으로 一般社會에 얼마나 伸張하였던 것을 可히 想像하겠다. 그런데도 「山念佛」은 샤먼의 領域에서 멀리 떠나서 佛敎와 合流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欺瞞과 搾取에 對한 巫·佛의 本質이 同一하므로만 說明할 바가 아니요, 事實上, 샤먼이 佛敎의 勢力에 눌려서 種種의 璄遇에는 그런 假面을 쓰게 되었다는 것으로써 說明하여야 된다. 여기에 對한 例證으로는 咸南 巫女들의 「도랑선비」굿을 드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도랑선비굿」
홑 일곱 살에 도랑선비, 어머니와 아버지 죽고, 외삼촌 집에 가서 열다섯 먹고 청청각시에게 혼사되고 장가가서 삼 년 만에 병들어 백약이 무효하고 죽게 될 적에 집에 돌아와서 오일 만에 죽었다. 청청각시 그 소식을 알자고 고대하다가 삼일 만에 문을 열어 놓고 앞의 길만 보는데, 한 사람이 올라오더니, 청청각시 집을 찾거늘 마주 나가 그 사람을 모셔 들여다 방안에 앉혀놓고 무슨 일로 내 집을 찾는가고 물었다. 그 사람이 옆차개에서 편지 일 장을 내어주거늘 받아보니 편지 속에 부고 일 장 있다. 그 부고 펼쳐보니 만단사정 다 적었다. 그 부고 받아 쥐고 고비·고사리·왕고비 같은 손으로 구름 같은 머리를 발발이 풀어 헤치고 울었든지 말았든지, 베개 너머 강수되고 베개 이쪽에 늪이 되고 보고지다, 보고지다, 내 남편 한번 다시 보고지다, 그렇게 탄식하는 때에 안의산 금산절 중이 동냥을 왔거늘 그 중과 청청각시 말하기를 동냥쌀은 달라는 대로 드릴 것이니 내 남편 도랑선비를 한번 보게 함이 어떤가, 그 중이 바랑 안에서 표주박을 내어 놓으면서 이 됫박에 한 됫박을 채워주면 네 남편 도랑선비를 다시 보게 하여 주마, 그러니 그 바가지에 쌀을 채워도 차지 않거늘, 내 남편 도랑선비를 먹이자던 쌀독에 거미줄을 휘휘 층층 끌어 던지고 세 독을 모두 퍼내어 와도 그 바가지에 차지 않거늘 할 수 없이 악발하니 그 중이 엵씨 한쌍을 내어주면서 이 엵씨를 심어서 열흘 말미를 주는 것이니 이 엵씨가 나서 자라거던 껍질 벗겨 삼 삼아서 우리 절 중이 삼천이니 고깔 삼천 개와 장삼 삼천 개를 만들되 꼭꼭 맞게 하여 주면 네 낭군 도랑선비를 보게 하여 주마, 그래도 뵈지 아니하고 또 그 중이 말하기를 청청각시 손에 기름을 발라 말리고 말리고, 닷새를 말리고 우리 부처님 앞에 불을 열 손가락에 켜들고, 물구리만 남아도 뜨겁다는 말 아니하면 네 남편 보게 하마, 그 불을 켜들어 거의 손이 타게 되는 때에 그 중이 말하기를 그 남쪽 벽상을 보라 하거늘 벽상을 바라보니 그때 보던 도랑선비 완연히 뵈거늘 깜짝 보고 말았다.

「방아타령」
1. 노자 좋구나, 노들강변 비둘기 한 쌍이 푸른 콩 한 알을 입에다 물고 암놈이 물어 수놈을 주며, 수놈이 물어 암놈을 주며, 암놈 수놈 어르는 소리, 늙은 과부 한숨 쉬고, 소년 과부는 에라 반보짐 싼다.
에 에 에헤이야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이렁숭 저렁숭 흩어진 근심, 만화방창에 에라 궁글려라.
2. 엣다 좋구나, 이십오현 탄야원에 불승청원 저 기러기, 갈순 한 대를 입에다 물고 부러진 죽지를 좔좔 끌며, 점점이 날아드니, 평사낙안이 에라 이 아니냐.
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지면 에라 못 놀겠네.
3. 엣다 좋구나, 뽕따러 가세, 뽕따러 가서, 뒷집 후원으로 뽕따러 가세, 뽕도 따고 임도 보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겸사겸사로 에라 뽕따러 가세.
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절반이나 늙었으니 다시 젊지 에라 못할너라.
4. 노자 좋구나, 춘추절이 적막하여 개자취의 넋이로다, 면산에 봄이 드니, 불탄 잔디는 새파랗게 새 속잎 난다.
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너는 뉘며 나는 뉘냐, 상산 땅에도 에라 조자룡이라.
5. 노자 좋구나, 치어다 보니 만학은 천봉, 내려 굽어보니 백사지로다, 허리 굽고 늙은 장송, 광풍을 못 이겨 반춤 추고, 주란화각이 벽공에 걸렸다, 앵무 공작이 펄펄 날아든다.
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진국명산 만장봉이, 청천삭출이 에라 금부용이라.
6. 노자 좋구나, 뒷동산 노송지에, 자고 가는 저 화조며, 후원초당 백화중에, 놀고 가는 저 봉접아, 그립던 임 소식을 에라 전하여 주게.
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세월아 네월아 가지 마라. 청춘소년이 에라 다 늙는다.
7. 노자 좋구나, 강남서 나온 제비 한 쌍 박씨 하나를 입에다 물고 허공중천 높이 떠서, 이 집 저 집 다 버리고, 흥부의 집으로 에라 날아든다.
에 에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푸른 것은 버들이요, 누른 것은 에라 꾀꼬리라.
8. 노자 좋구나, 하늘천자 따지땅에, 집우자로 집을 짓고, 날일자 열창문을 달월자로 달아놓고, 밤중이며 낮이며 만나, 별진 잘숙에, 거드러 거리고 노자.
에 헤 에헤이요오 에라 욱여라 방아로구나, 삼산은 반락 청천외요, 이수중분은 에라 백로주라.
이 노래는 新羅의 때, 百結(백결 박문량)先生의 「碓樂」으로부터 생기었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양산도」
1. 에헤이에― 차문주가 하처재요, 목동이 요지 살구나무촌이라.
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
2. 에헤에헤- 창포 밭에 금부어 논다, 금실금실이 생선국이라.
에라 놓아라, 잡아 당겨라, 끄들어라, 그래도 못 놓겠네. 열네 번 죽어도 못 놓겠네.
3. 에헤이에― 북망산천아 말 물어보자, 임 그리워 죽은 무덤이 몇몇이냐.
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죽으면 죽었지 못 놓겠네.
4. 에헤이에― 너는 뉘며 나는 뉘냐. 상산 땅에도 조자룡이라.
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칼침을 주어도 못 놓겠네.
5. 에헤이에― 가던 님은 잊었는지, 가고 영천 아니 온다.
에라 놓아라, 나 못 놓겠네, 열네 번 죽어도 못 놓겠네.
  이 노래의 名稱만은 그 本源이 新羅의 「陽山歌」에서 흘러 나온가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양산도」가 漢譯으로는 陽山徒로 되는 까닭이다. 陽山 一戰에서 郞幢大監 金歆運(김흠운), 大監 穢破(예따), 少監 狄得(적득), 少騎幢主 寶用郡(보용나) 等 四人이 다 節死한 거기로부터 그 노래가 생겼는데, 後人이 그 歌名의 尾末에 「徒」字를 더 添付한 듯하며, 또는 그들이 다 花郞徒에 屬하였을지니 그것으로써도 「徒」字를 더 添付할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지금 이 노래의 內容이 歌名의 本義에 背馳된 그것은 時代를 따라서 여러 번 變轉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농부가」
1.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사농공상 직업 중에, 우리 농부가 제일일세.
에헤 에 에헤에로 상사지야.
2.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교민화식 하온 후에, 농사밖에 또 있는가.
에헤 에 에헤에로 상사지야.
3.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봄에 밭 갈아 씨뿌린 후에, 우순풍조가 제일이라.
4.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춘하추동 순환함은 우리농부를 위함이라.
5.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거두어, 부모처자를 봉양하세.
6. 예봐라 농부야 말 들어라, 예봐라 농부 말 들어, 저 남 제비 묻어온다, 우장 두르고, 김 매세.
  이 노래는 三南地方의 農夫들이 두레를 지어 農作하는 때, 揷秧 또는 除草하는 그 때에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부르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볼 때에 原始的 氏族社會에서 共同耕作하던 그 餘風을 다시 想像하게 된다.

「咸北농부가」
1. 농부 일생에 무한 일하니, 춘경추학은 연년사라.
얼널널, 얼널널이 상사나 지야 우리 집 농부는 상농부라.
2. 우순풍조 백곡 등하니, 격양가 절로 난다.
얼널널, 얼널널이 상사나 지야 우리 집 농부는 상농부라.

「경복궁타령」
1. 을축 삼월 초 사흩날, 경복궁 역사가 시작이라.
에 에헤이 에야 얼널널 널이고 방아홍에로다.
2. 도편수란 놈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 갈팡질팡한다.
에 에 에헤야 에헤야, 얼널널 널이 만화방창에 궁굴려라.
3. 남문을 열고 바라를 치니, 개명산천에 날이 살짝 밝았네.
4. 남문 밖에 이탁주 장사년아, 탁주 한 잔 못 사먹어도 탁탁이만 걸러라.
  경복궁은 임진倭亂(임진왜란, 1592)의 때, 掖隷와 亂民의 손에서 燒燼되었는데, 高宗 二年 즉 公歷 1866년에 다시 改建하게 되었다. 그 當時의 工事에 義務的으로 服役하는 人民들의 속에서 이 노래가 생겼다.

「화포타령」
1. 화약 염초 내 담당할게, 화포나 도영장 신다지만 시켜라.
아하아 둥둥, 어허허 둥둥, 만판 멋으로 짓족여만 달라네.
2. 사영가세, 사영가세, 구월산 밑으로 큰아기 사영을 가세.
3. 은가락지 끼던 손에 호미자리가 아이고 웬 말인가.
4. 구경 가세 구경 가세, 정반산 위로 달구경 가세.
5. 모시수건 쓰던 머리에 물빵구리가 아이고 웬 말인가.
  이 노래는 公歷 1894年 東學亂 한창 熾盛하는 그 때에 생겼는데, 그 調는 「오독떼기」처럼 부른다.

「닐리리 타령」
1. 비가 온다, 애고나 비고 온다, 아산의 둔포서 애고나 비가 온다.
닐 닐 닐닐 느리고 전사 말 말아라, 서서섬마 둥둥 애고나 성화로다.
2. 간다간다 애고나 나 돌아간다. 떠떨떨거리고 애고나 나 돌아간다.
이 노래도 公歷 1894年에 생겼는데, 그때, 東學亂의 關係로서 日淸戰爭(청일전쟁)이 牙山에서 일어남에, 그 戰爭의 狀態와 避亂民의 情景을 그려낸 것이 곧 닐리리 타령이었다.

「오독떼기타령」
1. 오독떼기 중추월에 달도 밝고 명랑하다.
지두나 덩실, 지두나 덩실, 던져 버리고 여기도 경사로다.
2. 만첩청산 물소리 수루룩, 까마귀 펄펄 날아든다.

「긴난봉가」
1. 난봉이 났네, 난봉이 났네, 남의 집 외아들 또 난봉이 났네.
에 에 에헤이야, 어러마 둥둥 내 사랑이라.
2. 슬슬 동풍에 궂은 비 오구요, 시화나 연풍에 임 섞여 노세.
3. 정방산성에 초목이 무성하고나, 밤중에 울 닭이 대낮에 운다.
4. 담안에선 잡년 잘 가라고 울고, 담밖에선 잡놈 잘 있으라고 운다.
5. 간 곳마다 정들여 놓고서, 이별이 잦아서 나 못 살겠네.
6. 갈 적에 보고 올 적에 보니, 보기만 하여도 정이 든다.

「자진난봉가」
1. 넘어간다, 넘어간다, 잦은 난봉가 넘어간다.
에 에 에헤헤 에에에헤이야 어라마 둥둥 내 사랑아.
2. 깔낏깔낏 보지만 말고 속내를 풀어 말 좀 하렴.
에 에 에헤에 에 에헤이에야 어야듸야 내 사랑아.
3. 임의 집은 성안이요, 요내 집은 성 밖이라.
4. 성 넘어 갈적에는 개가 짖고, 품안에 들적엔 닭이 운다.
5. 원수로다, 원수로다, 닭·개 짐승이 원수로다.
6. 나는 좋아, 나는 좋아, 총각의 낭군이 나는 좋아.
7. 영감 잡놈을 보면 성이 버럭 나도, 총각아저씨 보면 입이 헤벌적하누나.

「신난봉가」
1.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임을 따라서 나 돌아간다.
에 에 에헤이 에헤에 에야 어라마 둥둥 내 사랑아.
2. 녹아지 향나무에 쌍그네 매고, 너와 나와 쌍그네 뛰세.
3. 오르며 내리며 잔기침 소리에, 맑숙한 냉수가 내 목이 메누나.
4. 간다하면 아주 갈까, 아주 가면 잊을쏘냐.
5. 남산이 고아 바라를 볼까, 임 계신 곳이니 바라를 보지.

「개성난봉가」
1.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연시 돌아든다.
에헤에 에라 좋고 좋다 어화나 둥둥 내 사랑아
2. 길나랍이 훨훨 다 날아가고 주렴주렴 내 사랑아.
3. 간다 간다 내가 돌아간다, 떠떨거리고 내가 돌아간다.
4. 산도 설고, 물도 선데, 누구를 바라고 여기를 왔나.

「숙천난봉가」
1. 인생 백 년이 여주마로다, 아니나 노지를 못하리라, 나무라도 고목되면 오던 새도 아니 오고, 꽃이라도 십일홍되면 오던 나비도 아니 오고, 임이라도 늙어지면 오던 정판도 아니 온다.
에 에 에헤이야아 어라마 둥둥 내 사랑이라.
2. 우투룩 두투룩 저기 저 남산 보게, 우리도 죽으면 저 모양이라, 살은 썩어 물이 되고, 뼈는 썩어서 진토 되고, 삼혼칠백이 흩어질 제, 어느 마누라가 날 불쌍하다 할까.
3. 내 돈 없으면 은행돈·전당돈·백전·은전·지전을 다 낼지라도 족집게 석 경을 내 사다줄게, 이마나 눈썹을 여덟 팔자로만 지어라, 이마나 눈썹을 지을 줄 몰라, 속의 속눈썹 다 뽑아놓고 물독을 안고서 그림자만 본다.
4. 물동이는 움물 금정 귀틀에다 놓고 수수밭 속으로 기어기어만 든다. 너도 기는데 나도 좀 기자, 자주자주 걸어라, 이마 벗어질라, 작은 삼대 쓰러지고, 굵은 삼대는 밤 출제, 오장육부는 순력을 돌고, 삼백육십사흘에 초단 풀러 맺혔구나.

「개타령」
1. 개야 개야 검정얼룩의 수캐야, 밤사람 보고 네가 함부로 짖느냐. 에 에히에야 에에헤이에 요개, 방정맞은 개, 망망, 앙앙, 밤사람 보고서 함부로 짖다가는 개미허리가 두 동강 나고, 네 각 떠서 솥 안에 넣고 솟뚜껑을 덮고서 비지땀 내리라, 앗아라 말아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2. 앵두나무아래 병아리, 한쌍 노는 것, 총각의 낭군에 에라 몸보신감일세.
에에히에헤이야 에에히에헤야, 수리 후려, 쥐 닭다 차갔다, 차가다니 무엇이 차가서, 저 남산 솔개가 다 차갔다. 한 마리는 쥐똥구멍을 파먹기, 갖다가 술안주 했지, 맛 좋지, 쌉쌉하더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3. 놀양의 대가리 배채밑구멍 상투, 언제나 갓과서 내 낭군 삼을까.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나는 가겠소 얘 가단 말이 무슨 말인가, 눈 꼭 감고 삼년만 참아라, 삼년이 낼 모레만 말이오, 나는 가겠소, 닥채는 바람에 코집이 터져서 당홍물 나온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4. 시집의 살이는 트자에 니을을 했네. 시아비 잡놈 다리고 술추렴이나 가세.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그 집안 잘 되었다, 시아비 먹고 며느리 먹고 막 먹누나, 잘 되었지 부어라 먹자,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5. 영감 잡놈을 보면 통골이 쑥쑥 아파도, 총각의 아저씨 보면 배속이 시원하구나.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영감의 김치는 목침이만큼 썰어서 양잿물을 뿌리고, 총각낭군의 김치는 숙지로 살살 갈겨서 설탕을 가입하여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6. 족집게 석경은 내가 사다가 줄게, 이마나 눈썹은 여덟의 팔자로 지어라.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저런 흉물 보았나, 이마눈썹을 지을 줄 몰라, 속의 속눈썹 다 뽑아놓고 물독을 안고서 그림자만 보누나, 잘 되었다 속눈썹 없어 남경 잘 보겠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7. 조앙문 밖에 백지 한 장 걸린 것, 총각낭군의 혼백상이라.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열남은 식구는 다 굶어 죽어도, 혼백상은 똥집만 꾸쳐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8. 섣달이라 그믐날 시집의 장가를 갔더니, 정월이라 초하룻날 맹간이 한 죽을 낳았네.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몇 마리냐 돼지처럼 한 죽을 낳더라, 그렇게 많이, 세낱이만 낳더라,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9. 뒷문소리가 더덜석 나더니, 아기씨 숨결이 장단 맞춰 높았네.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원앙금침은 중솟음하고 삼팔이불은 꼽장춤 추고 양다리 두짬에는 호나팔 부누나, 호병대 불러서 보초를 세우고 발뒤축에 다 흰댕기 드리고 반고수 머리에 파망을 씌우고 맞상자 불러서 발상을 시켜라, 아이고, 아아고 너는 왜 우니, 중동이 시큰시큰해서 운다, 너는 왜 웃니, 나는 좋아서 웃는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10. 놀앙의 대가리 물렛줄 상투, 은동곶 사달라고 발버둥이만 친다.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너 멋들었구나, 멋들었기 은동곶 사달라지 어디서 사니, 저 안동상점에서 샀다, 얼마, 조금 주었네, 백동 삼환 주었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11. 푼돈 열 냥을 얻어서 민며느리를 얻었더니 십년 만에 시아범 이마에 칼 꽂기만 하누나.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야, 작작 꽂아라, 시아범 번대멀 이마에 썩살이 박힌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12. 새벽동자를 하려면 바가지 싸움만 붙이고, 물 길러 가라면 엉덩이세만 쓴다.
에에히에헤야 에에히에헤야 야, 작작 둘러라, 시아범 털휘양 쓰고서 귀 날아난다, 얼싸 좋다 둥둥 내 사랑아.

「몽금포타령」
1.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둥둥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에헤이에헤야 임 만나 보겠네.
아하아 에헤 에헤이 에헤야 나 혼자 살라나.
2. 임도 보구요, 술도 먹구요, 몽금이 개암포 들러나 가겠나.
3. 갈 길은 멀고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
4. 돈 실은 배거던 들러나 가구요, 임 실은 배거던 바루나 가시오.
5. 사공의 아저씨 요내 말 들어보, 오늘밤 꿈에도 사곰님 보았지.
6. 앞강에 뜬 배는 임 실은 배구요, 뒷강에 뜬 배는 낚시질 배로다.
7. 임 실러 갈 적엔 반돛을 달더니, 임 실어놓고서 찬 돛을 다누나.
  「난봉가」로부터 「몽금포타령」까지는 黃海道의 産物이다. 人間의 性的 關係는 秘密이 아니건마는, 그러나 秘密에 돌리는 것은 社會道德으로 보아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打令」은 傷風敗俗에 이르도록 너무나 露骨化하여 우리로 하여금 『毛詩』三百에서 鄭·衛(정나라·위나라)의 淫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얻게 한다.

「풀무타령」
1. 쩍물은 흘러서 한강수 되고, 동쇠는 녹아서 천태산이 된다.
에이 얼싸 방 걸어 놓고 네 불고 나가자.
2. 십육사 골품기 처녀동자 논다.
에에 에헤야 신선품기로다.
3. 이번 성녕 잘되면 만대작이 낸다.
4. 저 건네 종종바위 우선우선한다.
5. 강게칠평 몽통다리 네-날- 살려라.
6. 이번 성녕 잘되면 환고향을 한다.
7. 토수래 저고리 자지고름 자리야 네-날- 살려라.
  이 노래는 甲山 고진동 銅店의 노동자가 지어낸 것이다. 이것이 생기어진 年代에 있어는 詳言할 수 없으나 생각건대 英祖 十七年 後의 일이겠다. 그때에 吹煉法을 解得지 못하여 遂安·寧越의 銅鑛을 廢棄하였다 하니, 孝宗의 때, 李義立(이의립)의 發明한 鐵의 吹煉法이 後世에 傳하치 못하였던가? 高麗 末年의 靑기와처럼 그 發明法도 秘密에 묻히고 말았던 모양이다.

「애원성」
1. 노자 노자 저-젊어서 놀자, 나이 많고 병들면 네가 못 노리라.
에 에라 절싸 네로다, 아무리 보아도 널과 내로다.
2. 오르며 내리며 발구주 소리에 물만 차리밥이 목이 깡깡 멘다.
3. 갈적에 보니까 청-청산이더니, 올적에 보니까 황산이로다.
4. 우수경칩에 대동강 풀리고, 정든 님 연설에 아내 속이나 풀린다.
5. 세월아 네월아 네 가지를 말아라, 알뜰한 청춘이 다 늙어간다.
公歷 1890년頃에 端川 梁基鳳(양기봉)이 이 노래를 지었다는데, 그 調는 「景福宮打令」의 變體인 듯하나, 甚히 悲哀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怨訴를 느끼게 한다.

「흥타령」
1. 저녁을 먹고-흥, 썩 나서니 흥, 겨묻은 손으로 날 오란다.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구나 흥.
2. 오르며 내리며 흥, 잔기침 말아라 흥, 물만 이밥이 목이 메누나.
3. 성화성화 흥, 황주월편에 흥, 체다리 성화라.
4. 저 년의 입은 흥, 꿀단지지 흥, 이놈도 빨고, 조놈도 빠누나.
5. 이년의 손목은 흥, 대동문 걸쇈지 흥, 네놈도 당기고 저놈도 당긴다.
  내가 어렸을 때, 公歷 1888年頃에 이 노래를 처음 듣게 되었는데 그 때에는 그 調가 매우 素朴하였으니 아마 江原道에서 비로소 생기어진 그 形態를 그냥 가지고 있었는 듯하다. 그 後에 점점 洗鍊을 받으면서 서울調 또는 宋萬甲(송만갑)調가 있게 되었다.

「서울 흥타령」
1. 너는 누구며, 흥, 나는 누구냐 흥, 상삼 땅에도 조자룡이로다.
엣다, 짓다 흥, 경사가 났네 흥.
2. 천안 삼거리 흥, 능수버들은 흥, 제멋에 지쳐서 넘늘어졌나네.
3. 은하작교가 흥, 꽉 무너졌으니 흥, 건너갈 길이 난감이로다.
4. 달은 밝구요 흥, 명랑한테 흥, 임의 생각이 절로 나누나.

「아리랑타령」
1.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노다 가게.
2. 뒷동산의 고목 나무 나와 같이만 속 썩는다.
3. 뒷동산의 박달나무 지르마 가지로 다 나간다.
4. 아리랑타령을 정 잘하면 가는 아씨가 돌아선다.
5. 저기 가는 저 마누라 나를 오라고 손질한다.
6. 너 오라고 손질했나 내 길이 바빠서 활개 쳤네.
이 노래도 강원도에서 생기어진 것인데, 흥타령과 同時에 流行하였다.

「긴아리랑」
1. 기차는 가자고 고등을 트는데 친구는 비어잡고 낙루락루만 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속에서 노다노다 가게.
2. 인생이 살면은 한 백년 사나뇨, 살아서 생전에 마음대로 놀까나.
3. 날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를 못 가서 발탈이 나네.

「오호타령」
1. 한강수라 맑고 깊은 물에 풍덩실 빠져 애고 내가 못 죽어.
에야 에야 에야 어야 어야 얼사마 중기지둥에 내 노던 사랑아.
2. 문영석자 잃었다고 야단이 벌커덕 났는데, 새 버선 신고 애고 왜 왔다가나.
3. 옥사장아 문 열어라, 옥중에 갇힌 춘향이 내가 잠깐 보련다.
4. 장롱 안에 옥양목 버선 있는 것, 총각의 낭군에 에라 선사감일세.
5. 세월아 네월아 오고 가지마라, 우리네 인생 다 늙는다.

「도라지타령」
1. 도라지 캐러 간다고 핑계핑계를 하더니, 총각낭군 죽은데 삼우제 지내러 간다.
응 응 으흐야 에에에헤야 어야란다 듸여라 네가 내 사랑이라.
2. 석탄백탄 타는데 연기가 물석 나더니, 요내 가슴 타는덴 연기도 아니난다.
3.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나는 참말 좋데, 총각의 낭군이 나는 좋아.
4. 우리 나 두 사람이 요렁을 하다가 아이나 들면은 어찌를 하나.
5. 아이가 들든지 영감이 들든지 실근실근 눌러만 주게.
이 노래는 公歷 1908年頃에 새로 流行되었다.

「양류가(楊柳歌)」
1. 양류간에 앉은 꾀꼬리 제비만 여겨서 후린다.
에 후려쳐 더덤석 안고서 허허 이것이 내 사랑.
2. 양류가 천만사인들 가는 춘풍을 못 잡아매.
에 후려쳐 더덤석 안고서 허허 요것이 내 간간.
3. 나라 나라 네 오나라, 네가 와야 나를 보지.
4. 널로 인해 병 들었으니, 네 수단으로 날 살려라.
4. 천리로다 만리로다. 임 계신 곳이 천리라.
이 노래는 「興夫傳」이 世上에 널리 流行되고 「박타령」과 「제비歌」가 생기어진 그 後에 되었을 것이다.

「구운밤타령」
1. 중아 오냐, 대사 중아 옳다, 네절 뒷산이 허허 모두 다 명산이란다, 오냐, 옳다.
구운 밤이오― 삶은 밤.
2. 너도 병정 오냐, 나도 병정 옳다, 두 병정이 허허 모두 다 조련을 하누나, 오냐, 옳다.
구운 밤이오 삶은 밤, 삶은 밤 밑에는 맘밤, 맘밤 밑에는 자짝밤, 자작밤 밑에는 도톨밤이로다. 오냐, 옳다.
  이 노래는 公歷 1900年頃에 流行된 것인데, 서울에서 구운 밤 장사가 목청 좋게 부르던 것이다.

「담바구타령」
담바구야, 담바구야, 동래나 울산에 담바구야, 너의 나라는 어떻길래, 대한의 나라로 나왔느냐, 금을 주려 나왔느냐, 은이나 주려고 나왔느냐, 금도 아니오, 은도 아니오, 담바구씨를 가지고 왔네…
  담바구란 말이 아메리카 土人에게 있어는 「다박고」란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流入되기는 光海主의 時代인데, 그 流入한 歷路를 말한다면 애初에는 아메리카로부터 유럽에, 거기로부터 南洋에, 또 거기로부터 日本에, 또 거기로부터 우리나라에, 그리고 滿洲를 거쳐서 中國에까지 그런 順次를 밟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流行되기는 公歷 1900年頃이었으나, 그 씨가 日本으로서 우리나라에 건너온 事實을 歷歷히 說明하여 준다. 그 名稱이 漢譯으로는 「淡巴菰」로 적히우고, 또 다시 一轉하여 「담배」로.

「길군악(길軍樂)」
1. 추야(秋野) 空山 저문 날에, 황국단풍 다 늦는다.
지야 지야 지야자쟈, 얼싸 좋다 좋은 경개.
2. 구경가세 구경가세, 강릉 경포대로 달구경 가세.
3. 달은 밝고 명랑한데, 고기 낚아서 술 바꾸네.
4. 백일청천 뜬 기럭아, 임의 소식을 전하고 가게.
황해도 地方의 風流男女가 늦은 가을의 黃菊丹楓을 구경하기로 山놀이를 갔다가 夕陽이 되면 半나마 취한 걸음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 노래를 서로 唱和한다.

「신고산타령」
1. 우루루, 우루루 기차 가는 소리, 신고산 큰아기들이 에루와 반봇짐 싼다.
어항 어항 어허 어러마 듸여루 내 사랑.
2. 이 산 너머로 가야 할까, 저 산 너머로 가야 할까. 총각낭군 데리고 숲을 놀음을 할까.
3. 신작로가 넓어서 몸에 횡횡 도나, 동남풍 바람 불어 궁덩이 살살 돈다.
4. 자동차 바퀴는 서양기계로 놀고, 우리 님 사랑은 이내 품에서 논다.
5. 자동차, 기차는 구라파(유럽) 기계로 놀고, 맛나까 기계는 자연적으로 논다.
6. 네 잘 났나, 내가 잘 났나, 양신이 정들면 모두 일색이라.
7. 울타리 꺾으면 제가 나온다더니, 한 모퉁이를 흔어도 꼼짝이 없다.
  이 노래는 京元線을 敷設하던 公歷 1914年頃에 생기어진 것이다.

「이팔청춘가」
1. 이팔은 청춘에 홀과부 되구요, 설움의 사정을 누구에게 말할까.
2. 눈물은 지어서 한강수 되구요, 한숨은 쉬어서 동남풍 되누나.
3.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구요, 인생이 늙기는 꿈결이로다.
4. 날 데려 가게요 날 모셔 가게요, 한양의 낭군이 날 데려 가게요.
5. 날 데려 가면은 제비똥 되구요, 안 데려 가면은 전막난이로다.
6. 조부님 산소에 화산이 터져서, 우리나 삼동세 떼난봉 났구나.
이 노래는 公歷 1915年頃의 前後에 생기어진 것이다.

「선류가(船遊歌)」
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 놀러 가세, 지둥덩기어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
1. 앞집이며 뒷집이라 각위각집 가인들은 장부간장 다 녹인다.
동삼월 게삼월아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에남아 에일손이 돈 받소.
가던 님은 잊었는지, 꿈에 한번 아니 온다, 내 아니 잊었거던, 전들 설마 잊었으랴.
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 놀러를 가세, 지둥덩기여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
2. 이별이야 이별이야, 이별 리자 내신 사람, 나와 백년 원수로다.
동삼월 게삼월아,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에남아 에일손이 돈 받소.
살아 생전 새이별, 생초목에 불이 나니, 불꺼줄 이 뉘 있는가.
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서 놀러를 가세, 지둥덩기여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
3. 나는 죽네 나는 죽네,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 나 죽는 줄 알양이면, 불원천리 하련마는.
동삼월 게삼월아,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에남아 에일손이 돈 받소.
박랑사중 쓰고 남은 철퇴, 천하장사 항우를 주어, 깨치어라 깨치어라, 이별 두 자를 깨치어라.
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러를 가세, 배를 타고서 놀러를 가세, 지둥덩기여라 둥게둥덩덩시루 놀러 가세.

「배떠나기」
1. 좌우산천을 바라를 보니, 안개는 자욱하고, 동서남북이 다 보이지 않네, 사공영좌님 쇠 놓아보쇼, 평양의 대동강 어디로 붙었나, 지와차.
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
2. 천생 만민에 필수지직으로 벌어먹는 꼴이 각각 달라, 우리는 굳해서 선인이 되어 먹는 밥은 사자밥이요, 자는 잠은 칠성판이라 하길래, 옛말 삼아 들었더니, 이번 길 연파만리, 수로창파를 불려를 갈 제, 우리도 언제나 부모동생을 또 다시 만날까, 지와차.
에헤헤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
3. 배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물소리는 출렁출렁 태산 같애여 놀 떠는데, 치는 빠져 두엉치배 되고, 바다에 취하는 것은 돌보다도 더한 것이라, 배는 취에 지끈 받히어 배쌈은 쪼개져, 검은 물은 콸콸 솟아들고, 돛대는 부러져 삼동강 나고, 깃발은 찢어져 산산이 헤어질 제, 사십여 명 동무를 다 잃어버리고, 단 세 인간이 남아 돛대 찾고, 물에 뛰어 들어가니, 갈매기란 놈은 잔등을 파고, 상어란 놈은 발목을 잡아 다닐 제, 세상에 사람이라고 생겨를 났다가 강호의 어복중 장사를 나 어찌하리오 지와차.
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
4. 돛대 차고 물에 들어가 망망대해 중에 단 세 인간이 살아를 나서 널조각을 타고, 이리저리 불려를 다닐 제, 마침 고향 배를 만나 건저주기로 살아를 나서, 그리 한참 들어를 갈 제, 산이라도 예보던 산이요, 물이라도 예보던 물이라, 북을 두리둥둥 울리면서 또 한참 들어를 갈 제, 중추팔월 십오야에, 광명 좋은 달이 둥두러저 밝은데, 청천에서 울고 가는 외기러기, 짝을 불러 슬피만 울 제, 아무 생각도 다 아니 나고, 동정식하던 동무의 생각에 콧물이 쪼루룽 나누나 지와차.
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
5. 몇 날 몇 달을 불려를 가서 고향이라고 찾아를 가니, 부모 동생이며 일가친척 백명 척권이 일시에 내달아라, 날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하며 하는 말이 임자가 살았나 죽었나, 죽었나 살았나, 혼이 왔나 넋이 왔나, 넋이 왔나 혼이 왔나, 임자 나간 날을 생각하니, 오늘이 꼭 대상날이올세, 그리 한참 슬피 울제, 백일이 무요(無曜)하고, 산천초목이 다 슬퍼하는데, 황릉여산에 두견이 울고, 창파녹암에 잔나비 휘파람 소리에 장부의 비회간장이 다 녹아나누나 지와차.
에헤에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
6. 윤화윤생을 다 겪고 나니, 황국단풍이 다시 돌아오누나 지와차.
에헤헤 어긔야-하 듸야차 어허 어긔야차 좋다.
  「船遊歌」와 「배떠나기」의 생기어진 年代는 알 수 없으나, 그 發生地에 있는 分明히 平安道라고 指摘하겠다. 그리고서 또 더 깊이 생각한다면 平安道의 中에도 平壤地方이라는 信念이 저절로 일어난다. 어째서 그렇다고 할까? 平安道에서 船遊라면 먼저 大同江을 聯想하게 되고, 배 떠나기에는 「平壤의 大同江 어디로 붙었나」의 말마디가 있는 까닭이다. 그뿐 아니라, 그 두 개의 노래 속에는 地方語가 特히 섞이어 있다. 例를 든다면
「오쇼」. 회양도 봉봉 돌아를 오쇼 (船遊歌)
「님자」.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 (船遊歌)
「보쇼」. 사공영좌님 쇠 놓아보쇼 (배떠나기)
「올세」. 오늘이 꼭 대상날이올세 (배떠나기)
「님자」. 임자가 살았나 죽었나 (배떠나기)
「휘파람」. 잔나비 휘파람 소리에 (배떠나기)
  휘파람이란 말은 平安道에서뿐 아니요, 함경도에도 또한 慣用하는 것이지만, 南方에서는 그와 달라서 「수파람」이란 말을 共通히 使用한다. 例하면
수파람 큰 한소리에 [金宗瑞(김종서)의 時調]
잔나비 수파람할 제 [鄭澈(정철)의 「將進酒」]

「장타령」
왔소― 설이가 설이가 각설이, 얻어먹는 각설이, 어제 장에 올라다, 볼 일이 있어서 못 오고, 오늘 장에 왔소, 무슨 타령으로 들어가나, 장타령으로 들어간다.
올랐다, 내렸다, 사다리장 올라나려다 못 보고
깡장 뛰었다 노루장 오금이 꺾여서 못 보고,
와싹 바싹 담배장 부서져서 못 보고,
와깍 데깍 사기장 깨어져서 못 보고,
애고 대고 곡산장 제복이 없어서 못 보고,
칼로 찔렀다 피난장 절린에 잡혀서 못 보고,
제 어미 붙고 대명장 법률이 중해서 못 보고,
품배, 품배 잘한다, 네 못하면 내 할나, 이 대문을 다 버리고 또 한 대문 들어간다, 무슨 대문으로 들어가나, 투전풀이로 들어간다.
일자 한 장 들고 보니, 일월이라 일일 날은 일년중 제일이요, 남녀노소 오락가락, 신년례가 장관이오.
이자 한 장 들고 보니, 이월이라 한식날은, 개자추의 넋이 왔다, 찬밥에 게워 못 살고,
삼자 한 장 들고 보니, 삼월이라 삼일 날, 연자새끼 날아들어, 옛집을 다시 찾고,
사자 한 장 들고 보니, 사월이라 초팔일 날, 이집 저집 등불일세, 낮보다도 밝고나,
오자 한 장 들고 보니, 오월이라 단옷날은, 천중지 가절이라, 녹의홍상 이이들은, 오락가락 노니면서 추천장을 보는구나.
육자 한 장 들고 보니, 유월이라 유두날, 홍로 중에 덥고 덥다, 할 일은 별로 없고, 밀전병이나 하여라,
칠자 한 장 들고 보니, 칠월이라 칠석날은 견우직녀가 그리워 살다, 일 년 일차를 상봉하여, 만단설화 다 하누나,
팔자 한 장 들고 보니, 팔월이라 추석날은, 백곡이 새로 나고, 세월이 풍등하니, 우리 같은 각설이, 마음대로 놀아보세.
구자 한 장 들고 보니, 구월이라 구일 날은 천리타향 고객들은, 집생각이 간절하다.
장수 한 장 들고 보니, 시월이라 십오일에 이산 저산 바라보니 등산하던 날이로다.
투전풀이 다하고 또 한 대문 들어간다, 무슨 대문으로 들어가라, 귀타령으로 들어간다.
외발 가진 돌쩌귀, 두발 가진 까마귀, 세 발 가진 퉁노귀, 네 발 가진 당나귀.
어엉 얼싸 잘한다, 이 대문을 버리고, 덕타령으로 들어간다.
산에 올라 곰의 덕, 둘우에 나려 원두의 덕, 밥 잘 먹기는 하느님 덕, 돈 잘 쓰기는 부모의 덕, 옷 잘 입기는 처권의 덕, 술 잘 먹기는 친구의 덕.
이 대문을 버리고, 첨지타령으로 들어간다.
거년 첨지는 구첨지, 금년 첨지는 신첨지, 새빨갛다 홍첨지, 바가지 뚝뚝 박첨지, 물 가운데 이태백이.
한푼 주―
여러 대문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파 못하겠소, 우리 같은 각설이, 돈을 많이 주어야, 자손이 창성하고, 부귀는 영원하리라.

二. 詞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漁父詞」
  聾巖 李賢輔(농암 이현보)는 燕山朝에서부터 오랫동안 宦海에 出沒하였다. 中宗 三十七年(1542年)에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를 效嚬하여 노래를 짓고 故鄕에 돌아왔다. 그렇게 錦衣로 還郷한 後에 「聾巖歌」와 「生日歌」를 지어서 自身의 榮光을 자랑하였다. 여기에 말하는 「漁父詞」와 「漁父短歌」는 明宗 四年(1549年)에 지었나니, 그 때는 그의 逝世하기 바로 六年 前이었다. 이 「漁父訽」의 完成에 關하여는 退溪 李滉(퇴계 이황)과의 書信往復이 數次 있었는데, 그래서 同春(동춘 송준길)은 그것을 退溪(퇴계 이황)의 作으로 하여 冊中에 謄置하고, 善歌者 洪柱石(홍주석)을 시키어 노래한 일까지 있었단다.(『同春別集』)
1. 雪鬢漁翁住浦間하니, 自言居水勝居山을, 배 띄어라, 배띄어라, 早潮纔落晩潮來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倚船漁父一肩高라.
2. 靑菰葉上에 凉風起하고, 紅蓼花邊에 白鷺還을 닻 들어라 닻 들어라, 洞庭湖裏 가귀풍을.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帆過前山 忽後山을.
3. 盡日泛舟煙裏去하니, 有時搖棹月中返을, 이어라 이어라, 我心歸處自忘歸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鼓枻乘流無定勢라.
4. 萬事無心一釣竿하니, 三公不換此江山을, 돛 지어라 돛 지어라, 山雨溪風捲釣絲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一生蹤迹이 在滄浪을.
5. 東風西日에 楚江深하니,一片靑磯萬柳陰을, 어으라 어으라, 綠萍身勢白鷗心을.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隔岸漁村兩三家라.
6. 濯纓歌罷주정장하니, 竹徑紫門 猶未關을, 배 띄어라 배 띄어라, 夜泊秦淮近酒家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하니, 臥久篷底獨寢時라.
7. 醉來순간무인환하니, 流下前灘也不知라, 배 매어라 배 매어라, 桃花流水鱖魚肥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滿江風月을 屬漁船을.
8. 夜靜水寒魚不食하니, 滿船空載月明歸라, 닻 지어라 닻 지어라, 罷釣歸來係短篷을.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風流來必재세시라.
9. 自持竿上釣舟하니, 世間名利盡悠悠라. 배 붙여라 배 붙여라, 係舟猶有去年㾗을.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하니, 款乃一曲山水綠이라.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司』
  孤山 尹善道(고산 윤선도)는 歌謠의 大作家이었다. 光海朝에 奸臣 李爾瞻(이이첨)이 國政을 擅弄하여 淸流를 竄逐할 때에 抗疏를 들이었다가 慶源에 귀향을 가서, 「遺懷謠」 五篇을 지으니 이것이 그의 처음 作品이었다. 仁祖가 反正한 後에 召還되어 鳳林(後日의 孝宗)·麟坪 兩大君의 師傅로 되었다. 孝宗이 卽位함에 있어는 禮曹參議 除拜를 받았는데, 그러나 讒訴를 입고 故里에 돌아와서 八十一歲에 歿하였다.
  일찍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의 때에는 海南에 있다가 統營舟師로써 來救하려 하였는데, 南漢山城에 白旗가 꽂히었다는 情報를 듣고 濟州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다가 金鎖洞과 芺蓉洞의 勝景을 사랑하여 隨意逍遙하면서 多數한 歌謠를 지었나니 말한다면 金鎖洞에서는 『山中新曲』(滿興謠 六首, 朝霧謠一首, 夏雨謠 二首, 日暮謠 一首, 饑寒謠 一首, 五友歌 六首의 聯合體로 된 것)과 「山中續新曲」(秋夜操, 春曉吟, 古琴詠 等 各 一首의 聯合體로 된 것)을 지었으며, 芺蓉洞에서는 『漁父詞』을 지었고 그밖에도 「雨後謠」, 「夢天謠」, 「初筵曲」, 「罷宴曲」 等을 또한 지었다.
  그런데 「漁父詞」는 春夏秋冬에 나누어 各히 十章으로 되었는 까닭에 「漁父四時詞」라는 指稱을 얻게 되었다. 이제 그 속에서 봄노래만 뽑아서 아래와 같이 提示하겠다.
1. 앞 내에 안개 걷고, 뒷 뫼에 해 진다, 배 띄어라 배 띄어라, 밤물이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江村 온갖 곳이, 먼 빛이 더욱 좋다.
2. 날이 덥도다, 물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고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낚대를 쥐었느냐, 濁酒瓶 실었느냐.
3. 東風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東湖를 돌아보며, 西湖로 가자스랴.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앞 뫼가 지나가고, 뒷 뫼가 나아온다.
4. 우는 것이 뻐꾹인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이어라 이어라, 漁村 두어 집이, 내 속에 날락들락.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맑아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5. 고은 볕이 쪼야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이어라 이어라, 금을 주었느냐, 낚시를 놓을릴가.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濯纓歌에 興이 나니, 고기도 잊을노다.
6. 夕陽이 비꼈으니, 그만하여 돌아가자, 돛 지어라 돛 지어라, 岸柳汀花는 구비구비 새롭고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三公을 부를쏘냐, 萬事를 생각하랴.
7. 芳草를 바라보며, 蘭芝도 등떠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一葉扁舟에, 실은 것이 무스것고.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갈제는 내이요, 올제는 달이로다.
8. 醉하여 누었다가, 여울아래 내리려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落紅이 흘러오니, 桃源이 가깝도다.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人世紅塵이, 언제나 가렸나니.
9. 낚시를 걷어놓고, 篷窓의 달을 보자, 닻 지어라 닻 지어라, 하마 밤 든게야, 子規소리 맑게 난다.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남은 興이 無窮하니, 갈길을 잊었도다.
10. 來日이 또 없으랴, 봄 밤이 몇 덧새랴,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대를 막대 삼고, 紫扉를 찾아보자.
至菊公 至菊悤 於思臥, 漁父生涯는 이러구러 지낼노다. (『孤山集』)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가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그것은 效嚬하였다는 데에 있어서 봄노래의 한 首만 보아도 다 짐작할 것이다. 이제 그 效嚬 例證을 든다면
ㄱ. 早潮纔落晩潮來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一章
밤물이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一章
ㄴ. 帆過前山忽後後山.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二章
앞 뫼가 지나가고, 뒷 뫼가 나아온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三章
ㄷ. 盡日泛舟煙裏去, 有時搖棹月中返. 李龍巖(농암 이현보)의 第三章
갈 제는 내이요, 올 제는 달이로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七章
ㄹ. 萬事無心 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李礱巖(농암 이현보)의 第四章
三公을 부를쏘냐. 萬事를 생각하라.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六章
ㅁ. 竹徑紫門猶未關.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六章
紫扉를 찾아보자.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十章
ㅂ. 隔岸漁村 兩三家. 李礱巖(농암 이현보)의 第五章
漁村 두어집이.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四章
ㅅ. 濯纓歌罷주정장. 李礱巖(농암 이현보)의 第六章
濯纓歌에 興이 나니.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五章
ㅇ. 醉來순간무인환하니, 流下前灘也不知.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第七章
취하여 누었다가 여울아래 내리려다. 尹孤山(고산 윤선도)의 第八章

「竹枝詞」
  成宗 十九年에 許琮(허종)이 明使 董越(동월)의 館伴으로 되어 詩를 唱和하는 中에서 「斜日竹枝歌」의 句를 吟詠한 일이 있었다(『皇華集』). 그러면 그것을 지금 우리가 보는 「竹枝詞」라 할까? 그렇지 않으면 明末·淸初의 戲曲家로 著名한 尤侗(우통)의 「朝鮮竹枝詞」처럼 七言 漢詩體로 된 것일까? 그 內容을 알 수 없으나, 생각건대 그 當時의 樂府에도 이런 이름을 가진 딴 形式의 노래가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는 두 個의 理由를 들 수 있으니 첫째는 詞에서 本章과 分章의 區別이 생기기는 李聾巖(농암 이현보)의 「漁父詞」에서 始하였다면, 그 當時에 이런 形式의 「竹枝詞」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둘째는 魚叔權(어숙권)의 말인데, 그 말에 依하면 內宴用이었던 觀音讚이 佛家語로 되었다 하여 名臣碩輔의 多年間 諫諍으로서 마침내 斥逐를 當한 것이 可歎이라 하였으니(『增補文獻備考』, 樂考) 그 當時에 이런 佛家語의 分章을 갖춘 「竹枝詞」가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본즉 이 「竹枝詞」는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가 出現한 後, 洪國榮(홍국영)의 「白鷗詞」가 出現하기 前, 그 中間時代 즉 肅·英(숙종·영조)時代에 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1. 乾坤이 不老 目長在하니, 寂寞江山이 今百年이라.
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 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2. 騎鯨仙子浪吟過하니, 魍魎秋色迷長天이라.
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 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3. 冊보다가 窓 퉁탕 열치니, 江湖에 둥덩실 白鷗둥 떴다.
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 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4. 洛東江上에 仙舟泛하니, 吹笛歌聲이 添遠風이로구나.
어이오이 이오이히 오이아에 一心正念은 極樂나하무하하무하 阿彌像이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世界로구나 나니나노 나니나.

「黃鷄詞」
  이 노래는 西浦(서포 김만중)의 『九雲夢』이 一般社會에 무던히 波及된 後, 즉 英祖時代에 생기어진 것인가 한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本詞 第六章에 「육관대사 제자 성진이 팔선녀를 희롱한다」가 있으며 또는 「竹枝詞」와 같이 그 分章이 一律로 된 까닭이다.
1. 一朝郞君離別後에, 消息조차 頓絶하다.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2. 어찌어찌 못 오던고, 일정 자네가 아니 오던가?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3. 春水滿四澤하니, 물이 깊어 못 오던가, 夏雲이 多奇峰하니, 山이 높아 못 오던가? 어디를 가고, 날 아니와 본고?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4. 屛風에 그린 黃鷄, 두 날개를 둥둥 치며, 四更一點에 날 새라고, 꼬끼요 울거던 오려는가?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5. 저 달아 보느냐 임 계신데, 명기를 빌리렴, 나도 보게, 나는 죽어 黃河水 되고, 너는 죽어도 大船되어, 밤이나 낮이나, 낮이나 밤이나, 어화 둥실 떠서 노세.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6. 한 곳을 들어가니, 육관大師 弟子 性眞(성진)이는 八仙女를 희롱한다.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7. 竹冠簑笠 저겻쓰고 十里沙場 내려가니.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8. 玉容이 寂寞 淚闌干하니, 梨花一枝春帶雨라.
어허야하자 좋을시고.
좋은 좋은 좋은 景을 얼싸 좋다 景이로다

「白鷗詞」
  洪國榮(홍국영)은 正祖가 東宮으로 있을 때에 百方으로 擁護하여 洪麟漢(홍인한)·鄭厚謙(정후겸)의 危害를 避하게 하였다. 그래서 正祖가 卽位한 後에 그에게 大將을 拜하여 禁旅를 거느리고 宮中에 直宿케 하며, 아울러 政權을 附予하니, 이것이 이른바 世道이었다. 世道란 말은 이때에 처음 생기었는데 곧 政權을 잡았다는 그 代名詞이었다.
  國榮(홍국영)이 世道를 잡은 後에 權勢를 專擅하기 鄭厚謙(정후겸)보다 더 甚하므로 世人에게서 大厚謙이란 指稱까지 들었다. 그러다가 廢黜을 當하여 湖中天地에 淪落하여 春景을 感傷한 것이 곧 「白鷗詞」이었다.
  「白鷗야 훨훨 나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聖上이 버리시니, 너를 좇아 예 왔노라, 五柳春光 景 좋은데, 白馬金鞭 화류가자, 雲沈碧溪 花紅도 柳綠한데, 萬壑千峰이 非天鎖라, 湖中天地에 別乾坤이 여기로다, 高峰萬丈 청게울하니, 綠竹靑松이 늙어를 가누나, 바위 巖上에 다람쥐 기고, 시내 溪邊에 金잘애 긴다. 조팝나무에 핏죽새 소리며, 함박꽃에 벌이 나서, 몸은 둥글고 발은 적으니, 제 몸을 못 이기어, 東風 건듯 불 적마다 이리로 접두적 저리로 접두적, 너울너울 춤을 추니, 근들 아나 景일러냐, 黃金같은 꾀꼬리는 楊柳間에 往來하고, 白雪같은 흰 나비는, 꽃을 보고 반기어서, 날아든다 떠든다, 두 나래를 펼치고 까맣게 별같이, 둥그렇게 달같이, 아주 훨훨 날아드니, 근들 아니 景일러냐.」

「惜春詞」
  이 노래는 정다운 임을 이별하고 밤낮으로 그리던 어떤 花柳男子의 지은 것이겠다. 그가 半나마 지난 春光을 아까워서, 그 보다도 임 그린 생각을 하마 잊을 양으로 西園에 들어갔다가 버들 속의 꾀꼬리, 珠簾 밖의 제비, 꽃 사이의 나비, 그것들이 다 짝을 지어 노래하며, 춤추는 그 光景을 보고 도리어 深刻한 느낌을 받아 長相思을 그린 모양이다.
  「어화 아깝도다, 요지에 봄이 간다. 이 몸이 多事하여, 철가는 줄 몰랐더니, 强忍하여 창을 여니, 花草가 爛熳하다. 忽然히 일어 걸어, 西園에 돌아드니, 楊柳千萬絲에 鶯歌聲이 浪藉하고, 珠簾繡幕에, 鷰語가 喃喃하다. 芍藥白花間에, 蝴蝶이 雙舞하더니, 西風昨夜雨에, 殘紅이 다 盡하니, 성상에 西施(서시)마음, 곳곳이 葬사로다. 漁陽의 少年들은 惜春을 모르는가, 林間宿不歸는, 나는 잠깐 들었더니, 千山萬樹에, 두견이 슬피 운다. 一枝香 牧丹花는, 담 안에 피었더니, 太陽이 初出하니, 도리어 잠겨서라. 月下에 美人같이, 綽約한 고운 빛이, 西王母(서왕모)의 蟠桃會요, 處士家의 운명회라, 東風에 휘날리니, 鬱金香 振動한다, 水晶같은 잎 사이에, 거울같이 비췄으니, 靑春美人들이, 새 丹粧을 고르는 듯, 天上의 月宮姮娥, 상면산에 걸렸는 듯, 春到門前增當貴는, 이를 두고 이름이라. 夭夭婷婷 저 氣像이 花中王이 分明하다. 六宮粉黛三千中에 뉘 아니 無色하리. 風前에 蝴蝶舞는 香氣좇아 노니는 듯, 나비야 가지마라, 韶光과 緣分이라, 和風도 전교한데, 봄소식 물어보자. 아마도 봄 다 가면, 이 꽃이 이울리라, 九十韶光이 半나마 지났으니, 四時長春 아니어던, 길이 어이 보잔 말가, 東君의 造化로되, 길이 볼 길 바이 없다. 自古로 옛 말이라, 今人이 못 되거던, 龍眼의 妙한 手段, 금환을 들였다가, 一幅花牋紙에, 前生마음 기록할제, 富貴榮華를 宛然히 그려내니, 나 앉은 書案 위에, 屛風같이 둘러두고, 不出門前으로, 三春이 한 가지라, 미끈히 누었으니, 꽃가지 볼 양이면, 三春이 다진토록, 떠날 날이 없건마는, 그리고 또 그린들, 임 그리기 어려워라. 이 몸도 나비되어, 숭구리고 우뚝 앉아, 花不衰春一場은, 이 또한 소회로다. 제아무리 잘 그린들, 못 그릴 것 임이로다. 잘 그리는 毛延壽(모연수)는, 王昭君(왕소군)의 원수되어, 千古의 남은 恨을, 曲中에 議論커늘, 그리긴들 어이하고, 생각인들 어이하리. 愁心으로 붓을 잡고, 한숨으로 彩色하니, 임의 모양 그려내고, 내 모양 그려내니, 임 없는 이내 그림, 長相思만 그렸구나. 그리고 또 그리니, 長相思만 또 그렸구나. 이 붓도 원수같이, 그림도 名手로다. 그리던 이내 그림, 언제나 다 마쳐서, 華帳衾裏에, 그림같이 마주 앉아, 그리던 長相思와 태우던 내 간장을, 春節의 氷雪같이, 다 쓸어 버리리라.」

「怨夫詞」
  이 노래는 靑樓殘燈에 눈물로 벗을 삼는, 참으로 孤寂을 느끼는 어떤 佳人이 임의 薄情을 원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一名을 靑樓怨別曲이라고도 한다.
  「엊그제 젊었더니, 하마 아희 다 늙었다, 평생에 원하기를, 君子好逑하려더니, 三生에 원수런가, 月下에 緣分인지, 長安花柳中에, 輕薄子 걸어두고 살뜰한 임의 생각, 肝腸만 다 썩는다.
  「惜春詞」와 「怨夫詞」는 그 作者에 있어 비록 알 길이 없으나, 그 出現年代에 있어는 「白鷗詞」가 流行된 그 後의 作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三. 別曲
  이제 李朝의 別曲類를 적음에 있어서 遺感스럽게도 「霜臺別曲」·「西京別曲」·「關西別曲」의 原本을 볼 수 없는 것이 藝苑의 큰 損失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霜臺別曲」은 陽村 權近(양촌 권근)의 作인데, 憲府 燒尾宴에 工人으로 하여금 그것을 부르게 하였다는 記錄만 있을 뿐이요, 後世에 傳하지 못하였다. 「西京別曲」은 『高麗史』 樂志에 없던 것인데, 李朝 世祖 때에 撰한 『大樂後譜』의 俗樂에서 비로소 보게 되었다. 말한다면 거기에 「西京別曲慢」과 「西京別曲」이 아울러 記入되었으니, 그런즉 그것이 李朝 初期에 되어진 作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成宗 때에 이르러 「雙花店」·「觀音讚」과 함께 斥逐을 받았나니, 成宗 十八年 敎에
  「宗廟之樂…俗樂 如西京別曲, 男女相悅之詞, 甚不可也, 樂譜則 不可卒改, 宜依其曲調, 別製曲調라」 하여 우리 後人으로 하여금 그것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關西別曲」은 玉峰 白光勳(옥봉 백광훈)의 作이었다. 그는 當時 文士界에 가장 著名한 宋翼弼(송익필)·李山海(이산해)·崔慶昌(최경창)·崔岦(최립)·李純仁(이순인)·尹卓然(윤탁연)·河應臨(하응림)으로 더불어 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되었었다. 그런 中에 詩에 있어는, 崔孤竹(고죽 최경창)·李蓀谷(손곡 이달)과 함께 三唐의 하나로서 더욱 書畫에까지 能하여 月沙 李廷龜(월사 이정구)의 이른바
  「白玉峰者 以詩 鳴於湖中, 又工於絶句 深得盛唐風格. 又以量妙擅盛名, 咸謂長吉復生, 逸少再生 片言隻句皆 膾炙人口」라가 곧 그것이다.
  그래서 盧蘇齋(소재 노수신)가 明使의 館伴으로 되었을 때, 그를 奏請하여 製述官을 삼은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白衣로써 推薦을 받았지만, 그 時代는 門閥을 尙하는지라, 그의 出身이 寒微한 까닭에 겨우 北評事라는 이름만 띠고 말았다. 이로부터 그는 不遇才子를 벗하여 南으로는 嶺南樓·廣寒樓와 西으로는 練光亭·浮碧樓에서 痛飮과 浪吟으로써 花朝月夕을 보내는 中에 「關西別曲」을 지은 것이다. 그가 夭逝한 後에도 西京의 妓女叢中에는 그 別曲이 그냥 流行되었던 모양이다. 그의 단짝 親舊 崔孤竹(고죽 최경창)이 거기에 갔다가 妓女들의 노래하는 것을 듣고 玉峰(옥봉 백광훈)을 追憶하여 지었다는
  「錦繡煙花依舊色, 綾羅芳草至今春, 仙郞去後無消息, 一曲關西淚滿中」이라는 詩뿐이 지금에 남기어 있다.

「華山別曲」
  春亭 卞季良(춘정 변계량)은 麗末의 擧子로서 李氏를 臣事하여 世宗 七年, 大提學으로 있을 때에 이 노래를 지었는데, 王命으로 樂府에 실어 宴饗에 쓰게 하였다.
  이 노래는 『正音(훈민정음)』가 制定되기 前에 된 것이다. 다른 記錄에는 純漢文으로 載在하였으나 『鄕歌律髓』에는 國漢文의 木刻으로 쓰이었으며, 여기에는 그것을 移本하였다.
1. 華山南 漢水北 朝鮮勝地, 白玉京 黃金闕 平夷通達, 鳳峙龍翔 天作形勢, 經緯陰陽,
에 都邑景其 어떠하니 잇고.
太祖太宗 創業貽謨,
太祖太宗 創業貽謨,
에 持守景其 어떠하니 잇고.
2. 內受禪 上稟命光明正大, 禁草竊 通高賈 懷服倭邦, 善繼善述 天地交泰 四境宇一
에 太平景其 어떠하니 잇고.
至誠忠孝 睦隣以道,
至誠忠孝 睦隣以道,
에 兩得景其 어떠하니 잇고.
3. 存敬畏 戒逸欲 躬行仁義, 開經筵 覽經史 學貫天人, 置集賢殿 四時講學 春秋製述,
에 右文景其 어떠하니 잇고,
天縱之聖 學問之美,
天縱之聖 學問之美,
에 古今景其 어떠하니 잇고.
4. 訓兵書 敎陣法 以習坐作, 順時令 擇閑曠 不廢蒐狩, 萬騎雷驚 殺不盡物 樂不極盤,
에 講武景其 어떠하니 잇고,
長慮却顧 安不忘危,
長慮却顧 安不忘危,
에 預備景其 어떠하니 잇고.
5. 懼天災 憫人窮 克謹祀事, 進忠直退姦邪, 欽恤刑罰, 考古論今 夙夜圖治 日愼一日,
에 無逸景其 어떠하니 잇고,
天生聖主 以惠東人,
天生聖主 以惠東人,
에 千歲世.
6. 慶會樓 廣延樓 崔嵬敞豁, 軼煙氛納灝氣遊目天表, 江山風月 景槩萬千, 宣暢鬱堙,
에 登覽景其 어떠하니 잇고.
蓬萊·方丈·瀛洲三山
蓬萊·方丈·瀛洲三山
에 何代可覔.
7. 止於慈 止於孝 天性同歡, 止於仁 止於敬 明良相得, 先天下憂 後天下樂 樂而不淫,
에 侍宴景其 어떠하니 잇고.
天生聖主 父母東人,
天生聖主 父母東人,
에 萬歲世.
8. 勸農祭 厚民生 培養邦本, 崇禮該尙忠信 固結民心, 德澤之光 風化之洽 頌聲洋溢,
에 長治景其 어떠하니 잇고.
華山·漢水 朝鮮王業,
華山·漢水 朝鮮王業,
에 竝久景其 어떠하니 잇고.

「不憂軒曲」
  不憂軒 丁克仁(불우헌 정극인)은 太宗 元年에 崔孤雲(고운 최치원)의 桑梓라고 傳하는 泰仁地方에서 낳았다. 그 때의 임금이 寵愛하는 妖僧「行乎(행호)」를 諫斥하다가 濟州로 귀향을 가서 數十年을 있다가 成宗 때에 비로소 召還되었었다. 그는 歌曲의 著作에 많은 興味를 붙인 모양인데 그 著作한 中에는 「不憂軒曲」·「不憂軒歌」·「賞春曲」 等이 있다. 그런데 「不憂軒曲」은 高麗 「翰林別曲」의 音節을 依倣하여 지은 것이다.
1. 山四回 水重抱 一畝儒宮, 向陽明 開南窓 名不憂軒, 左琴書 右博奕 隨意逍遙,
에 樂而忘憂 景 어떠삿다.
平生立志 師友聖賢(再唱)
에 遵道而行 景 어떠삿다.
2. 晩生員 老及第 樂天知命, 再訓導 三敎授 誨人不倦, 家塾三間 鳩聚童蒙 詳說句讀,
에 諄諄善誘 景 어떠삿다.
不亦樂乎 負笈書生(再唱)
에 自遠方來景 어떠삿다.
3. 再上疏 闢異端 依乎中庸, 進以禮退以義 守身爲大, 備員霜臺 具臣薇垣 引年致仕,
에 如釋重負 景 어떠삿다.
一介孤臣 濫承天寵(再唱)
에 再參原從 景 어떠삿다.
4. 耕田食 鑿井飮 不知帝力, 賞良辰 設賓筵 兄弟朋友, 談笑之間 不遑他及 孝悌忠信,
에 樂且有儀 景 어떠삿다.
舞之蹈之 歌詠聖德(再唱)
에 祈天永命 景 어떠삿다.
5. 尹之任 惠之知 我無能爲, 聖之時 顔之樂 乃所願也, 上不怨天下不尤人 心廣體胖,
에 不懼不憂 景 어떠삿다.
不伎不求(脫落)(再唱)
에 古訓是式 景 어떠삿다.
6. 壬辰歲 四月初 抑有奇事, 降諭書 至衡門 閭里觀光 廉介自守 不求聞達 敎誨童蒙,
에 過蒙褒奬 景 어떠삿다.
特別三品 時致惠養(再唱)
에 聖恩深重 景 어떠삿다.
7. 樂혼저 不憂軒이여, 樂혼저 不憂人이여-
에 作此好歌 消遣世慮 景 어떠삿다.

「騎牛牧童歌」
  이 노래는 世祖 때의 중 末繼智訕(말계지산)이 지은 것인데, 그 全篇이 專혀 다 佛의 敎化를 頌한 것이다.
1. 生生世世 頓脫邪見 遠離邪魔, 世世生生 絶貪嗔癡 除滅我慢,
爲 回向三處 景幾何如爲尼伊古.
回向三處 實相圓汸(再云)
爲 度諸迷淪 景幾 好下同 阿彌他佛(再云)
2. 頓悟妙用 本是靈源 一念不生, 前後際斷 參見趙州 常住道場,
爲 自然天堂 景幾何如爲尼伊古.
自然天堂 頓敎法門(再云)
爲 自照元明 景幾好下同 阿彌他佛(再云)

「花田別曲」
  自菴 金絿(자암 김구) 二十歲에 魁科에 登하고 二十七歲에 弘文博士로 되었다. 그 때에 靜菴 趙光祖(정암 조광조)와 손을 잡고서 儒家의 見地로써 政治를 改革하려다가 奸臣 南袞(남곤) 等의 嫌忌를 받아 三十二歲에 南海絶島로 流竄되니 이것이 이른바 己卯士禍였다. 그는 約 十二年 동안이나 南海 花田에서 過去의 得意한 生活을 追憶하며 또는 政治的 理想이 泡花에 돌아간 것을 感憤하여 近境의 風流老少를 벗하여 一觴一詠의 間에 萬般愁心을 잊으려 한 것이 이 別曲을 지은 理由였다.
1. 天之涯 地之頭 一點仙島, 左望雲 右錦山 巴川(봉내) 高川(고내),
山川奇秀 鍾生豪俊 人物繁盛,
에 天南勝地 景기 어떠하니 잇고.
風流酒色 一時豪傑,
風流酒色 一時豪傑,
에 날조차 몇 분이신고.
2. 河別侍 芷芝帶 齒爵兼尊, 朴敎授 손저니 醉中빼탓, 姜綸雜談 方勳鼾睡 鄭機飮食,
에 品官齊會 景幾 어떠하니 잇고,
河世涓氏 발버훈 風月,
河世涓氏 벌버훈 風月,
에 唱和 景기 어떠하니 잇고.
3. 徐玉非 高玉非 黑白頓殊, 大銀德山銀德 老少不同, 姜今歌舞 綠今長鼓 번린學非 소졸玉只,
에 花林勝美 景기 어떠하니 잇고.
花田別號 名實相符,
花田別號 名實相符.
에 鐵石肝勝이라도 아니 끊기리 없더라.
4. 漢元琴 以文歌 鄭韶草笛, 或打鉢 或叩盤 間擊盞臺, 搖頭轉目 備諸醉態,
에 發興 景기 어떠하니 잇고.
姜允元氏 스라랭딍소리,
姜允元氏 스라랭딍소리,
에 듣고야 잠 드오리라.
5. 綠波酒 山麴酒 麥酒濁酒 黃金鷄 白文魚, 柚子杯 貼匙臺에 가득 부어
에 勸觴 景기 어떠하니 잇고.
鄭希哲氏 過麥田大醉,
鄭希哲氏 過麥田大醉,
에 어느 제 슬플 적이 있을꼬.
6. 京洛繁華야 너는 부르냐, 朱門酒肉이야 너는 좋으냐, 石田茅屋 時和歲豊 鄕村集會야 나는 좋아하노라.

『武陵雜稿』에 실린 別曲類
  愼齋 周世鵬[신재 주세붕, 一號는 武陵(무릉)]은 宋學崇拜로 著名한 분이었다. 일찍 豊基郡守로 있을 때에 性理學의 輸入者로 有名한 文成公 安珦[문성공 안향, 一名은 裕(안유)]의 遺址인 白雲洞에 書院을 設立하였으니, 이것이 朝鮮人民에 弊窟로 되던 多數 書院의 鼻祖이었다. 그의 著作한 『武陵雜稿』의 卷八에 記入된 歌詞篇을 보게 되면 그 一字一句가 道學에 根據하지 않은 것이 조금도 없다. 그 歌辭篇은 「道東曲」 九章, 「六賢歌」 六章, 「儼然曲」 七章, 「太平曲」 五章으로 構成되었는데, 表現形式에 있어 全部가 別曲體의 分章과 비슷한 點이 있을 뿐이다.

ㄱ. 「道東曲」
1. 伏羲·神農 黃帝堯舜(再唱)
에 繼天立極 景幾 어떠하니 잇고.
2.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에 주거니 받거니 聖人의 心法이 다만 이뿐이니다.
3. 禹·湯·文·武 臯(고요)·伊(이윤)·周(주공)·召(소공)(再唱)
에 君臣相得 景幾 어떠하니 잇고.
4. 下土茫茫하거늘 上帝是憂하사, 圩頂大人을 洙泗 위에 나리오시니,
에 萬古淵源이 끊길 뉘 없사삿다.
5. 顔生(안연)三勿 曾氏(증자)三省 仰高鑽堅 瞻前忽後,
에 聖人忘勞 景幾 어떠하니 잇고.
6. 率하니 天命之性, 養하니 浩然之氣(再唱)
에 至誠無息이아 本이니라.
7. 光風霽月 瑞日祥雲(再唱)
에 그 처지 긴 날 어떠하여 아신고.
8. 人欲이 橫流하여 浩浩滔天일새 一千五百年에 晦翁(주희)이 나섰다, 敬으로 本을 세워 大防을 막으라시니,
에 繼往開來아 仲尼(공구)와 다르시리니까.
9. 三韓 千萬古에 眞儒을 나리오시니, 小白이 廬山이요 竹溪가 濂水로다, 學術街道는 小分네 일이어니와 尊禮晦菴(주희)이 그 功 크삿다,
에 吾道東來景幾 어떠하니 잇고.

「六賢歌」
1. 規圓矩方 繩直準平, (再唱)
에 程伊川(정이)의 展也大成 貴한 줄을 뉘 알 리 잇고.
2. 早脫孫·吳(손자·오자) 晩逃佛 老, (再唱)
에 張橫渠(횡거 장재)의 一變至道 力踐 景幾 어떠하니 잇고.
3. 手探月窟 足躡天根, (再唱)
에 卲堯夫(요부 소옹)의 駕風鞭霆 歷覽 景幾 어떠하니 잇고.
4. 篤學力行 淸修苦節, (再唱)
에 司馬公(사마천)의 事神不欺, 獨樂 景幾 어떠하니 잇고.
5. 安靜詳密 雍容和豫, (再唱)
에 韓魏公(한기)의 端嚴謹重 어느 제 밟우시리 잇고.
6. 居廟堂則 憂其民 處江湖則 憂其君, (再唱)
에 范文正(범중임)의 進退有憂 어느 제 즐거우시리 잇고.

「儼然曲」
1. 儼然端坐 如對聖賢, (再唱)
에 一點邪念이 어대로서 나리닛고.
2. 仲尼·顔子(공구·안회) 所樂何事, (再唱)
에 찾고야 마오리이다.
3. 溫溫安安 어리우니, 亹亹翼翼 있다마오, (再唱)
에 敬으로 丘隅를 삼았는데 안다 마옵세.
4. 높으나 높으신 하늘에, 두터우나 두터우신 땅에, 밝으나 밝으신 日月에, 春夏秋冬은 눌로하여 흘러가는고,
에 一元循環 悠久 景幾 어떠하니 잇고.
5. 動하되 天을 보오, 靜하되 地를 보오, (再唱)
에 俯仰에 부끄럽지 아닌 景幾 어떠하니 잇고.
6. 謙遜自牧 和敬待人, (再唱)
에 萬福無疆 景幾 어떠하니 잇고.
7. 北窓淸風 南軒霽月, (再唱)
에 羲皇적 사람과 어니 아더니 잇고.

「太平曲」
1. 몸에란 允恭하시고, 사람에란 克讓하시니 (再唱)
에 唐堯聖德이 하늘과 같으셨다.
2. 伯禹가 居左, 臯陶가 在右, (再唱)
에 帝舜無爲 무슨 일이 있으시리 잇고.
3. 內修七敎 外行三至, (再唱)
에 太平 景幾 어떠하니 잇고.
4. 齊有鮑叔 鄭有子皮, (再唱)
에 進賢 景幾 어떠하니 잇고.
5. 滿하면 損하나니 益한들 謙하소서, (再唱)
에 江海能下 百川朝宗 景幾 어떠하니 잇고.

鄭松江(송강 정철)의 別曲
  松江 鄭澈(송강 정철)은 西人의 領袖로서 五十四歲 己丑에 領相으로 되었던데, 北人 崔永慶(최영경)을 冤殺하였다는 反對黨의 口實下에서 江界로 귀향간 일까지 있었다. 그 까닭에 器量이 狹窄하다거니, 심지어 小人이라거니의 惡評을 듣게 되었다. 黨爭의 판국에는 正論이 없나니 그런 批評을 누가 遵信할까보냐? 李判書 尙吉(이상길)의 手記에 依하건대
  내가 督運使로 海西(황해도)에 있었는데, 하루는 監司 李德泂(이덕형)과 함께 南以恭(남이공)의 謫所에 찾아가서 從容히 會話하게 되었다. 南(남이공)이 묻기를 鄭澈(정철)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대답하기를 淸忠峻節이 近代의 賢相이라 하였다. 南(남이공)이 또 李德泂(이덕형)에게 물으니 李(이덕형)가 말하되 鄭某(정철)가 小人이 아닌 줄을 아노라. 令公이 어떻게 그런 줄을 아시오? 내가 일찍 黃思叔[思叔은 秋浦 黃愼(추포 황신)의 字]에게서 들었노니 思叔(황신)이 늘 말하되 鄭某(정철)는 疎脫하고 邪慮는 없은즉 決하고 小人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思叔(황신)은 나의 敬信하는 사람임에 그러므로 鄭某(정철)가 小人이 아닌 줄 아노라(「秋浦傳」 拾遺).
  이 세 사람의 問答이 松江(송강 정철)의 性格에 對한 그 當時의 物論을 曲盡하게 解明하였다. 또 月沙(월사 이정구)는 그의 風度를 評하였는데,
  「豪風이 灑落하고, 爽氣가 人에게 襲하여 거의 神仙 中의 사람이라」 하고(『月沙集』),
  白沙(백사 이항복)는 그의 儀彩를 欽服하여
  「半醉한 松江(송강 정철)이 抵掌談論할 때에는 天上人과 같다」고 하였다(「遲川遺事」).
  그러한 風度·儀彩·言論에다가 詞人的 素質을 調合하여 歌曲의 大作家로 된 것이겠다. 그의 作品 中에는 「思美人曲」·「續思美人曲」·「將進酒」·「訓民歌」 十六篇, 時調 六十一首 또는 여기에서 말하려는 「關東別曲」·「星山別曲」이 있다.
  나는 이 두 個 別曲의 全篇을 얻어 보지 못하고 다만 金台俊(김태준)氏의 「別曲의 硏究」에서 殘鱗片爪를 收拾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遺憾스러운 일이다.

ㄱ. 「關東別曲」
  「江湖에 病이 깊어, 竹林에 누었더니, 關東 八百里에, 方面을 맞이시니어니와, 聖恩이야 가지로 罔極하다. 延秋門 들어달아, 慶會南門 바라보며, 下直고 물러가니, 玉節이 앞에 섰다. 平丘驛 말을 갈아, 黑水·昭陽 나린 물이 어드러루 드단 말고…」
  이 노래는 京城을 出發하여 內外金剛을 巡覽하는 그 經路에까지 大自然의 美를 自由스럽게 雄大한 筆致로 그린 것인데, 『東國樂譜』에는
  「關東別曲…歷擧關東山水之美하며, 說盡幽遐詭怪之觀하며, 狀物之妙와 選語之奇가 信樂府之絶調也」라 하고, 同春(동춘당 송준길)은 이것을 絶唱이라 하여 善歌者 洪柱石(홍주석)으로 하여금 노래하였다는 것을(『同春集』) 보면 이 別曲이 우리 藝苑의 珍品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ㄴ. 「星山別曲」
  「어떤 지날 손이, 星山에 머물면서, 棲霞堂 息影亭主人아, 내말 듣소, 人生世間에, 좋은 일 하기마는, 어떤 한 江山을, 가지로 나히 녀겨, 寂寞山中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松根을 다시 쓸고, 竹牀에 자리 보와, 져근덧 올라 앉아, 어떤고 다시 보니, 天邊에 뜨는 구름, 瑞石을 집을 삼아, 가는 듯 드는 양이, 主人과 어떠한고…」
  이 노래는 星山의 景致를 稱美하고 仙翁과 같이 閑寂한 風月主人의 山水間 趣味를 갖가지로 描寫한 長篇歌이다.
  「思美人曲」은 憂時戀君의 丹衷에서 流出한 것인데, 淸陰 金尙憲(청음 김상헌)은 그것을 가장 愛讀하고 또 漢詩로 翻譯하여 家族과 奴婢로 하여금 誦習하게 하였으며(『北軒集』), 諺文小說의 作家로 有名한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은 그것을 小冊子에 手寫하여 「諺騷」라 하고서 말하되,
  그 忠心, 그 潔志, 그 貞節, 그 雜辭가 可히 日月로 光을 爭하리라」 하였으며,
  北軒 金春澤(북헌 김춘택)은 濟州에 가서 이 두 篇의 美人曲을 追和하는 뜻으로 「別思美人曲」을 지어 州妓에게 주었다 하니 이것만 보아도 松江(송강 정철)의 歌曲이 社會一般에게 어떤 큰 影響을 주었다는 것을 알리운다.
  「訓民歌」는 그가 江原監司로 있을 적에 民間에 頒布한 것인데, 그 後에 韓相翼(한상익)이 國柄을 잡고서는 全鮮에 頒布하였다고 한다.
  「將進酒」는 李白(이백)의 그것과 伯仲을 다투는 것인데, 詞旨가 通達하고 句法이 悽惋하여 비록 木石이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몇 잔의 술이든지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노래를 보인다면:
  「한 잔 먹사이다, 또 한 잔 먹사이다, 꽃 꺽어 籌를 놓고, 無窮無盡 먹사이다, 이 몸 죽은 後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수풀 우에 메어가나, 流蘇寶帳에 百夫緦麻 울어 예나, 우억새·덕욱새·더까나무·白楊 속에, 가기 곧 가량이면 누른 해, 흰 달빛과 굵은 눈, 가는 비에, 蕭蕭히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 하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수파람할 제 뉘우친들 어떠리.」

「江湖別曲」
  이 노래의 作者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 內容을 考察한다면 世上功名을 꿈 밖으로 보는 사람이거나 或은 紅塵萬丈의 속에서 厭症이 생기어 急流中 勇進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疑心도 있게 된다.
  그리고 「綠波記」에 依하면
  “「六香歌」·「傷春歌」·「江湖別曲」 等 斷腸諸作이 江上에 播在라」
하였으니 이것의 出現年代는 꽤 오랜 모양이다.
  「世上功名 浮雲이라, 江湖漁翁 되오리라. 一葉扁舟에 흘려저어, 任其所之하올 적에, 萬頃滄波 너른 곳에, 浩浩蕩蕩 떠나간다, 舟輕하니 산사주요, 波急하니 야여주라, 銀鱗玉尺 펄펄 뛰는데, 白鷗翩翩 비껴난다, 淸風은 徐來하고, 水波는 不興이라, 左右山川 바라보니, 景槪無窮 좋을시고, 隔岸前村兩三家에, 저녁煙氣 일어나고, 半照入江 半石壁에, 거울 낯을 열었더라, 언덕 위에 樵童이요, 石壁아래 漁翁이라, 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嚴陵여울 다다랐다. 景槪無窮 좋을시고, 千尺斷崖 높은 곳에, 蒼松綠竹 푸르렀고, 七里淸灘 고요한데, 雙雙 오리 높이 떴다. 兩個漁翁 흘림낚시, 巨口細鱗 낚아내어, 고기 주고 술을 사서, 醉케 먹기 맹서한다, 嗚鳴라 世上事 如夢이라, 擧匏樽而相屬하니, 壼裏乾坤 되었구나. 日落黃昏 되었으니, 月出東嶺 솟아 온다, 배를 저어 돌아갈 제, 倒着接罹 좋을시고, 縱一葦之所如하여, 凌萬頃之茫然이라, 船壓水中天與月하니, 於焉間 作天上人을, 無窮하다. 이내 興味, 世上알까 두리노라.」

「相思別曲」
  이 노래는 郞君을 이별한 空房美人이 밤이나, 낮이나 長相思를 그리면서 郞君과 歲月의 無情함을 哀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著作年代는 詳言할 수 없지만, 「黃鷄詞」가 出世한 그 後가 아니면 或 그 前에 있었으리라고 推測하게 된다. 왜 그러냐 하면 그 詞說의 中에 「黃鷄詞」의 第一章 즉
  「一朝郞君離別後에, 消息조차 永(頓)絶하다」가 있는 것으로써 이렇게 말하여 둔다.
  「人間離別 萬事中에, 獨守空房이 더욱 섧다, 相思不見 이내 眞情을, 뉘라서 알리, 맺힌 설움 이렁저렁이라, 흩어진 근심, 다 후리쳐 던져 두고, 자나 깨나, 깨나 자나, 임을 못 보아 가슴이 답답, 어린 양자 고은 소리, 눈에 黯黯 귀에 錚錚, 보고지고 임의 얼굴, 듣고 지고 임의 소리, 비나이다. 하느님전, 임 생겨라 하고 비나이다, 前生此生이라 무슨 罪로, 우리 둘이 생겨나서, 죽지 마자하고 百年期約, 萬疊靑山으로 들어가니, 어느 우리 낭군이 날 찾으리, 山은 疊疊하여 고개 되고, 물은 충충 흘러 沼이로다, 梧桐秋夜 밝은 달에, 임 생각이 새로워라, 한번 이별하고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千金珠玉 귀 밖이요, 世上일 不關係하니, 根源 흘러 물이 되어, 깊고 깊고 다시 깊고 무너질 줄 모르더니, 끊어질 줄 어이 알리, 造物이 새우는지, 鬼神이 희지는지, 一朝郞君離別後에, 消息조차 永絶하니, 오늘이나 들어올까, 來日이나 奇別올까, 日月無情 절로 가니, 玉顔雲鬢 空老로다, 梧桐夜雨 성긴 비에, 밤은 어이 더디 가고, 綠楊芳草 저문 날에, 해는 어이 쉬이 가노, 이내 相思 알으시면, 임도 나를 그리리라, 寂寂秋夜 혼자 앉아, 다만 한숨 내 벗이라. 一寸肝腸 구비 썩어, 피어나니 가슴 답답, 우는 눈물 받아내면, 배도 타고 아니 가랴, 피는 불이 일어나면, 임의 옷에 단기리라, 사랑 겨워 우던 울음, 생각하면 목에 메고, 嬌態 겨워 웃던 웃음, 헤아리니 더욱 섧다. 咫尺東西 千里되어, 바라보니 눈이 시고, 萬疊相思 그려낸들, 한 붓으로 다 그리랴, 날개 돋힌 鶴이 되어, 날아가다 아니 가랴, 山이 어이 고개 있고, 물은 어이 사이 진고, 天地人間 離別 中에, 나 같은 이 또 있는가, 해는 돋아 저문 날에, 꽃은 피어 절로 지니, 이슬 같은 이 人生이, 무슨 일로 생겼는고, 바람 불어 궂은 비와, 구름 끼어 저문 날에, 나며 들며 빈 房으로, 오락가락 혼자 서서, 기다리고 바라보니, 이내 相思 虛事로다, 空房美人 獨相思는, 예로부터 이러한가, 내 혼자 이러한가, 남도 아니 이러한가, 날 사랑하던 끝에, 남사랑 허이는가, 無情하여 그러한가, 有情하여 이러한가, 山鷄野鶩 길을 들여, 놓을 줄을 모르는가, 路柳墻花 꺾어 쥐고, 春色으로 다니는가, 가는 꿈이 자최되면, 오는 길이 무디리라, 한번 죽어 돌아가면, 다시 보기 어려우니, 아마도 네 정이 있거던, 다시 보게 생기소서.」

四. 短歌
  短歌의 定義는 括論에서 이미 詳密하게 解明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말할 것은 歌와 曲이라는 名稱을 가진 것, 그런 名稱도 가지지 못하고 다만 진양이니, 중머리이니 하는 調名을 가진 것, 그 어느 것이든지 情이나 景을 敍述한 長篇의 노래라면 다 短歌의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의 歌曲에 다른 것도 가다가 訛誤處가 없지 아니하나 短歌에서처럼 訛誤處가 많은 것은 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 거기에 對하여는 몇 가지의 理由를 들 수 있다. 말한다면 첫째는 『春香傳』와 같이 文字로 記傳되지 못하고 그 大部分이 口傳된 까닭이다. 名唱(그 當時에 이른바 廣大)이라면 적어도 十年의 長歲月을 두고서 목청을 鍊鍛하기 爲하여 山中에 들어가서 瀑布의 소리와 競爭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움 속에 앉아서 그 소리가 땅을 뚫고 碧空에 사무치게 하든지 그렇게 功塔을 쌓은 後에야 萬壑千峰의 高수강이니, 斜風細雨의 모환갑이니 하는 好評을 비로소 얻게 되는데, 그들의 사이에는 口傳으로 서로 學習하는 것이 惟一의 鐵則이었었다. 事實上, 그들은 音調에만 注重하고 그 노래의 內容意義에는 關心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訛傳이 많이 있게 되었다. 둘째는 「南薰太平歌」의 따위 또는 近來에 流行하던 『新舊雜歌集』 等에 記傳된 것이 있기는 하나 그것을 編輯하는 사람에게 그 內容을 考究할 만한 常識이 없었던 까닭이다. 能改齋의 이른바 善歌者는 內裏聲을 貴히 하여 「聲中無字하고 字中有聲」인 그것을 다만 聽覺에 依하여 함부로 記入하였으니 여기에서 訛傳이 많이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하여 나에게는 그런 常識이 있다는 것은 決코 아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아는 데에까지는 間間이 修正하고 能히 解得할 수 없는 것은 그 原本대로 그냥 두면서 漢字를 많이 섞이었나니, 그리면 幸여나 讀者에게 얼만큼의 便益이라도 供할는가? 將來에는 訛誤를 다시 거듭하지 아니할런가? 그런 志望에서 손을 대게 된 것이다.

「春眠曲」
  이 노래의 出現 年代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이 別曲의 化身인 노래로서 英祖 以前에 벌써 流行하였던 것이라고 論斷하게 된다. 그 理由는 어디에 있는가? 英祖 때의 肚元郞인 石北 申光洙(석북 신광수)가 率倡을 治送하는 자리에서
  「桃紅扇打汗衫飛, 羽調靈山絶世稀, 唱罷春眠歌一曲, 落花三月渡江歸」의 詩 一首를 贈與하였으니, 이 詩를 보면 그 年代는 어슴프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春眠을 늦어 깨어, 竹窓을 半開하니, 庭花는 灼灼하여, 가는 나비 머무는 듯, 岸柳는 依依하여, 성긴 내를 띄어서라, 窓밖의 들괸 술을, 一二三杯 醉한 後에, 浩蕩하고 미친 興을, 부질없이 자아내어, 白馬金鞭으로, 冶遊園을 찾아가니, 花香은 襲衣하고, 月色는 滿庭한데, 狂客인 듯 醉客인 듯, 興을 겨워 노니다가, 徘徊顧眄하여, 有情히 섰노라니, 翠瓦朱欄 높은 집에, 綠衣紅裳 一美人이, 紗窓을 半開하고, 玉顏을 暫間 들어, 웃는 듯 반기는 듯, 嬌態하여 맞아들여, 秋波를 暗注하고, 綠綺琴 비껴 안아, 淸歌一曲으로, 春意를 자아내니, 雲雨襄臺에, 楚夢이 多情하다, 사랑도 그지없고, 緣分도 깊을시고, 이 사랑 이 緣分은 비길 데 전혀 없다,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되어, 三春이 다 盡토록, 떠나시지 마자더니, 人間에 말이 많고, 造物조차 샘하여, 新情이 未洽하여, 애달플손 이별이라, 淸江에 노던 鴛鴦, 울고예고 떠나는 듯, 狂風에 놀란 蜂蝶, 가다가 돌치는 듯, 夕陽은 다 저가고, 征馬는 자주 울제, 羅衫을 부여잡고, 黯然히 여윈 後에, 슬픈 노래 긴 한숨을 벗을 삼아 돌아오니, 어제 이 임이야, 생각하니 원수로다, 肝腸이 다 썩으니, 목숨인들 保全하랴, 一身에 病이 되니, 萬事가 無心하여, 書窓을 굳이 닫고, 섬서히 누었으니, 花容月態는, 眼中에 삼연하고, 粉壁紗窓은, 枕邊에 如舊로다, 荷葉에 露積하나, 別淚을 뿌리는 듯, 柳幕에 煙籠하니, 遺恨을 머금은 듯, 空山夜月에, 杜鵑이 슬피 울 제, 슬프다 저 새 소리, 내 말 같이 不如歸라, 三更에 못 든 잠을, 四更末에 빌어드니, 相思하던 우리 임을 꿈 가운데 暫間 보고, 千愁萬恨 못 다 일러, 一場蝴蝶 흩어지니, 아름다운 玉鬢紅顔, 곁에 얼핏 앉았는 듯, 어화 怳惚하다. 꿈을 상시 삼고지고, 撫枕噓唏하여, 바삐 일어 바라보니, 雲山은 疊疊하여, 千里眼을 가리웠고, 皓月은 蒼蒼하여, 兩鄕心에 비추었다. 어제 내 일이야, 나도 모를 일이로다. 이리저리 그리면서, 어이 그리 못 보는고, 弱水三千里 멀단 말을, 이런 데를 이르도다, 佳約은 杳然하고, 歲月은 如流하여, 엊그제 二月꽃이, 綠岸邊 붉었더니, 그덧새 倐忽하여, 落葉이 秋景일다, 새벽 달 지샐 적에, 외기러기 울어옐 제, 반가운 임의 소식, 幸여 올까 바라보니, 滄茫한 구름밖에, 빈 소리 뿐이로다. 支離하다 이 이별은, 언제 만나 다시 볼까, 山頭의 片月되어, 임의 낯에 비추고져, 石上의 梧桐되어, 임의 무릎 베어보랴, 屋上雕樑에, 제비되어 날고 지고, 玉窓櫻桃花에, 나비되어 날고지고, 華山이 平地되고, 錦江이 다 마르나, 平生 슬픈 懷抱, 어디를 가을하리, 書中有玉顔은, 나도 暫間 들었더니, 마음을 고쳐먹고, 强氣를 다시 내어, 丈夫의 功名을, 아로조차 알리로다.」

「긴중머리」
  이것은 申光洙(신광수)가 魁科에 中하던 「關山戎馬」를 『大東樂府』에 실은 그 後의 作品이겠다. 그 詩에 「靑袍一上萬里船, 洞庭如天波是秋」의 句가 있으니, 그러므로 이 노래가 英祖 末年이나, 正祖 初期에 出現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杲杲天邊一輪紅, 扶桑에 둥실 높이 떠, 양곡의 잦은 안개, 遠峰으로 돌고, 漁場村 개 짖고, 호연봉 구름이 떴다. 蘆花는 다 눈되고, 浮萍 물에 금실 떠 魚龍은 잠자고, 子規새는 날아든다, 洞庭如天에 波是秋, 금수추파가 이 아니냐, 앞 팔로 碧波를 찍어 당기며, 뒷발로 滄浪을 탕탕, 요리조리 조리요리, 앙금 당실 높이 떠, 東南을 바라 봐, 地廣은 七百里, 波光은 天一色, 天外巫山 十二峰은, 구름 밖으로 멀고, 霞外瀟湘의 一千里, 眼下의 景槪로다. 岳陽樓 높은 집에, 杜子美(두보) 앉아 지은 글은, 洞庭으로 爭雄하고, 北方消息 저 기러기는, 瀟湘江으로 들고, 千峰萬壑을 바라봐, 萬景臺 구름 속에, 鶴聲이 울어 있고, 七寶山 검은 구름, 虛空에 둥실 높이 떠, 稽山罷霧에 鬱嵯峨, 山은 層層 높고, 鏡水無風에 也自波, 물은 슬렁 깊었는데, 이 골목 물이 쭈루룩, 저 골목 물이 꽐꽐, 열의 열골물이, 한 대 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언턱저, 방울저 방울저 언턱저, 자주 울려 두당거려, 저 건너편 언덕에 마주 꽝꽝 솨르렁 꼴꼴, 흐르는 물은, 사양수로 돌아든다, 萬山은 鬱鬱, 菊花는 접접, 벽수는 뚝뚝, 長松은 落落, 해오리 舞罷에, 綠樹秦京 남난 두루미 날아든다. 쳐다보느냐, 萬壑은 千峰, 나리 굽어보느냐, 白沙地 땅이라, 허리 굽고 늙은 長松, 狂風을 못 이겨, 우줄우줄 반춤 춘다.」

「자진 중머리」
  이 노래는 위에 있는 「긴 중머리」의 副産物로서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 頭尾에 딴 色彩의 冠履을 갖춘 것뿐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도 그 尾末에 春景을 군더더기처럼 添付한 것은 缺點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가자 어서 가, 二水 건너 白鷺가, 白露橫江을 함께 가, 笑指蘆花 月一船, 楚江漁父 가변 배, 騎鯨仙子 간 然後에, 空秋月之團團, 고래 등에다, 저 달을 실어라, 우리 故鄕을 함께 가, 고고 천변 일륜홍, 부상에 둥실 높이 떴다, 魚龍은 잠자고, 子規새 펄펄 날아들 제, 洞庭如天波是秋, 금수추파가 이 아니냐, 앞 팔로 碧波를 찌어다리며, 뒷발로 창浪을 탕탕, 이리저리 앙금당실 떠, 洞庭 七百里, 四面을 바라봐, 稽山罷霧에 鬱嵯峨하고, 鏡水無風에 也自波, 山은 층층 높고, 물은 슬렁 깊은데, 이골 물이 쭈루룩, 저골 물이 솰솰, 열의 열골 물이, 한데 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지방저 천방저, 언턱저 방울저, 방울저 방울저 언턱저, 자주 울려 두당거려, 건너편 언덕에, 마주 꽝꽝 솨르렁 골골 흐르는 물은 자양수로 돌아든다, 치어다 보니 萬壑千峰, 나려 굽어보니 白沙地라, 허리 굽고 늙은 長松, 狂風을 못 이기어, 우줄우줄 춤만 춘다. 綠陰은 우거지고, 芳草는 숙어져, 앞내 버들은 柳綠帳, 두르고, 뒷내 버들은 靑布帳 늘여처, 한 가지 찌어저, 한 가지 늘어저, 春悲春興 못 이기어, 흔들흔들이 노일 적에, 三月 삼짇(일)날에, 鷰子 펄펄 날아들어, 옛집을 다시 찾아들고, 蝴蝶은 紛紛, 나무 나무 속잎 나, 가지가지 꽃 피어, 아마도 네로구나, 이런 景致가 또 있는가, 아니 놀고 무엇하리오.」

「遊山歌」
  이 노래는 위에 있는 「긴 중머리」의 詞說을 그대로 移本한 것이 있으니, 늦어도 正祖 時代에 되어진 作品인가 한다.
  「花爛春城하고, 萬和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山川경개 구경가세, 竹杖芒鞋 單瓢子로, 千里江山 들어를 가니, 滿山紅綠들은, 一年一度 다시 피어, 春色을 자랑노라, 色色이 붉었는데, 蒼松翠竹은 蒼蒼鬱鬱하고, 琪花瑤草 爛熳中에, 꽃 속에 잠든 나비, 자취없이 날아든다, 柳上鶯飛는 片片金이요, 花間蝶舞는 粉粉雪이라, 三春佳節이 좋을시고, 桃花滿發點點紅이로구나, 漁舟逐水愛山春이라던, 武陵桃源이 예 아니냐, 楊柳細枝 絲絲綠하니, 黃山谷裏 當春節에, 淵明(도연명)五柳가 예 아니냐, 제비는 물을 차고, 기러기 무리지어, 거진 中天에 높이 떠서, 千里江山 머나먼 길에, 어이 갈꼬 슬피 운다. 遠山 疊疊, 近山은 주춤하여, 奇巖은 層層, 長松은 落落, 허리 구부러져, 狂風에 興을 겨워, 우줄우줄 춤을 춘다. 層巖絶壁上에 瀑布水는 콸콸, 水晶簾 드리우듯이, 이골 물이 주루룩, 저골 물이 솰솰, 열의 열골 물이, 한데 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솟구라지고 펑퍼져, 너울지고 방울져, 저 건너 屛風石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銀玉같이 흩어지니, 巢父(소부)·許由(허유) 問答하던, 箕山穎水가 예 아니냐, 주각 啼禽은 千古間이요, 적다 鼎鳥는 一年豊이라, 日出落照가, 눈앞에 버려나, 景槪 무궁히 좋을시고.」

「處士歌」
  나는 「天生我才 쓸 데 없어」의 句를 읽고서 두세 번 長歎하다가 星湖(성호 이익)의 말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그의 말에 依하면 「天下에 가장 可惜한 것은 有用으로써 無用에 돌리는 것이라, 저 山野가 枯槁하는데 川流가 空然히 海에 注하니, 어찌 可惜지 아니하냐?」 하고, 그 註에 「萬姓이 塗炭에 있는데 賢人이 空然히 늙어지니 어찌 可惜지 아니하냐?」라고 하였다. 試問하노니 天下古今에 處士와 같은 사람이 몇몇이나 되는가?
  그런데 이 노래는 「黃鷄詞」가 流行된 그 後에 되어진 것이라 하노니 詳言하면 「黃鷄詞」의 第七章을 그대로 移本한 그것이 實證으로 된다는 것이다.
  「天生我才 쓸 데 없어, 世上功名을 하직하고, 養閑守命하여, 雲林處士되오리라, 九승葛布 몸에 걸고, 三節竹杖 손에 쥐고, 落照紅蓼 景 좋은데, 芒鞋緩步로 나려가니, 寂寂松關 닫았는데, 寥寥杏園에 개 짖는다, 경개무궁 좋을시고, 山川草木 푸르렀다, 蒼巖屛風 둘렀는데, 白雲深處 집을 삼고, 江湘漁父 같이하여, 竹冠簑笠 젓겨쓰고, 十里沙場 나려가니, 白鷗飛去뿐이로다, 一葦片帆 높이 달고, 萬頃滄波 흘려 저어, 數尺銀鱗 낚아내니, 松江鱸魚 비길러라, 日落滄江 저물었다, 泊舟蒲渚 돌아오니, 南隣北村 두세 집에, 落霞暮煙 잠겨서라, 箕山穎川이 아닌가? 別有天地 여기로다, 淵明(도연명)五柳 심은 곳에, 千條細柳 늘어졌다, 子陵澤畔 낚던 臺인가? 白頭金鱗 뛰노누나, 二個家僮 벗을 삼아, 반향기와 바라보니, 牛背牧童 閑暇하다, 壽春山도 일삼노라, 東林子規 슬피 우니, 醉中회포 돋으는 듯, 酒醒否아 일어나니, 逸興風景 그지없다, 回還麋鹿 벗이 되어, 萬壑千峰 오며 가며, 石路蒼苔 막혔으니, 塵世消息 끊어서라, 아마도 事無閑身은 나뿐인가 하노라.」

「瀟湘八景」
  우리 朝鮮에서 瀟湘八景이란 말이 언제부터 起因되었는가? 記錄上에 나타난 것으로 實證을 삼는다면 高麗 明宗의 때, 李光弼(이광필)의 「瀟湘八景圖」가 처음인가 한다. 그리고 그것을 詩로써 表現하기는 李朝 成宗 때의 翰林 鄭希良(정희량)인가 한다. 그의 詩를 提示한다면 첫째는 「瀟湘夜雨」이니
  「九疑嵯峨楚雲碧, 鷓鴣啼雨湘江夕, 寒聲浙瀝何悽悽, 竹間哀淚懸餘滴, 楚些爲招帝子魂, 月恨風愁天亦泣, 孤帆一夜滯未歸, 遠客蕭蕭生白髮」
  둘째는 「平沙落雁」이니
  「秋鬼濃淡雨復晴, 海波不動含深綠, 平沙若剪雲嵯峨, 雁背斜光斷還續, 西風吹影落漁磯, 字字新出臨池墨, 稻梁離離網弋多, 急向蘆花深處宿.」
  셋째는 「洞庭秋月」이니
  「渡頭楓林霜初結, 海風吹滴猩猩血, 秋光上下鏡面平, 淸光一片琉璃徹, 沙頭眠鷗忽驚起, 客帆飛去波明滅, 煙水滄茫野牧歸, 數聲短笛吹新月.」
  넷째는 「漁村落照」이니
  「靑山影空釣石寒, 海門秋色濃可掬, 漁人帶簑臥不驚, 沙鳥欲起還相逐, 一聲款乃及暮歸, 南隣喚酒酒初熟, 絲絲細雨急收網, 一抹斜陽掛古木」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에 「뒷 뫼가 지나가고, 앞 뫼가 나아온다」는 聾巖(농암 이현보)의 「帆過前山忽後山」을 依倣한 것이지만, 遠浦歸帆의 보아 알 든 못하여도, 다만 앞에 섰던 山이, 문득 뒤로 옮아가니」는 孤山(고산 윤선도)의 그것보다 오히려 淸絶한 맛이 있으며, 聲巖(농암 이현보)의 그것보다도 더욱 詳明하여 朝鮮 냄새가 가지록 무르녹았다.
  「江湖別曲」에서는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村 두어 집이, 내 속에 들락날락」을 引用하여 「隔岸漁村兩三家에, 저녁 煙氣 일어나고」로 修正하였다면 「漁村落照」에는 「江湖別曲」의 그것을 또 얼만큼 修正한 것으로 볼 것이오. 그리고 「漁村落照」의 「고기 주고 술을 사서, 醉토록 먹은 後에」는 「江湖別曲」의 그것을 또한 얼마큼 修正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江湖別曲」이 孤山(고산 윤선도)의 「漁父詞」보다 뒤떨어져 된 것과 같이 「瀟湘八景」이 「江湖別曲」보다 멀리 뒤떨어져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時代의 作品이라 할까? 우리의 先人들은 나의 것보다 남의 것을 더 愛好하였다. 嶺東八景은 그림에나, 노래에나 讚美한 자취가 別로 없으되, 瀟湘八景만은 慕華主義의 表徴으로 壁畫와 屛畫에 常用하다가 畢竟, 노래로써 讚美하기는 正祖의 時代인가 한다.
1. 山岳이 潛影하고, 陰風이 怒號하여, 樹邊에 우는 새는 千兵萬馬 서로 맞아, 鐵騎刀鎗이 이었는 듯, 簷下 끝에 急한 形勢, 百尺瀑布 쏟아오고, 대수풀에 흩뿌릴 제, 皇靈의 깊은 恨을, 잎잎이 呼訴하니, 瀟湘夜雨라 하는대요.
2. 七百平湖 맑은 물은, 上下天光 푸르렀다, 구름 밖에 문득 솟아, 天空에 徘徊하니, 桂宮姮娥 淡粧하고, 새 거울을 열었는 듯, 寂寞한 魚龍들은, 勢를 얻어 出沒하고, 楓林에 歸鴉는 빛을 놀라 사라지니, 洞庭秋月 이 아니냐?
3. 煙波萬頃은 하늘에 닿았는데, 오고 가는 商賈船은, 북을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닻감는 소리, 보아 알든 못하여도, 다만 앞에 섰던 山이, 문득 뒤로 옮아가니, 遠浦歸帆 이 아니냐?
4. 水碧沙明兩岸苔에, 不勝淸怨却飛來라, 날아오는 저 기럭기, 갈순 하나를 입에다 물고, 一點二點 點點이 날아, 行列지어 떨어지니, 平沙落雁 이 아니냐?
5. 湘水로 울고 가니, 愁雲이 寂寞하고, 黃陵으로 울고 가니, 옛 祠堂이 荒凉하다, 南巡 皇帝 魂이라도, 應當히 설으려던, 새소리 눈물지니, 黃陵哀猿 이 아니냐?
6. 隔岸漁村兩三家에, 밥짓는 내가 있고, 罷釣歸來 배를 매고, 고기 주고 술을 사서, 醉하도록 먹은 後에, 款乃聲 부르면서 달을 띄고 누었으니, 漁村落照 이 아니냐?
7. 天地는 자욱하여, 紛紛霏霏 내리나니, 粉蝶에 다투는 듯, 유세는 척광하여, 유공의 성낸 가지, 鹽虎가 엎드린 듯, 江山이 變化하여, 銀世界가 되었으니, 江村暮雪 이 아니냐?
8. 山村에 지는 煙氣, 무르녹아 빚어내니, 情다운 魚龍들은 여러 萬個 戲弄하고, 진천의 젊은 계집, 깁을 지어 버렸는데, 巫山에 노던 仙女, 六綃山裙 떨쳐 입고, 발맞게 陣을 쳐, 秋寂寂 雨霏霏하니, 山市靑嵐 이 아니며, 江山을 다 구경할 양이면, 몇 날일지 모르겠다, 洞庭湖 一區域에 瀟湘八景뿐이로다.

「寒松亭」
  이 노래는 「瀟湘八景歌」가 充分히 播傳된 그 後의 産物이겠다. 이렇게 斷言하는 것은 여기에 遠浦歸帆의 後半部를 그냥 引用한 까닭이다.
  「寒松亭 솔을 베어, 조그맣게 배를 묶어, 漢江에 띄어놓고, 술이며 안주 많이 싣고, 거문고·가야금·笙簧·洋琴·細피리·젓대·나는 북장고 넌짓 싣고 長安의 一等名妓, 左右로 늘여 앉혀, 소리名唱, 歌客이며, 風流郞 豪傑男子, 한 배에 넌짓 싣고, 밤이면은 月色 따라, 童子야, 네― 노를 나루 저어, 슬렁슬렁 배 띄어라, 江陵 鏡浦臺로 달맞이 가자, 다만 앞에 섰던 山이, 보아 알든 못하여도, 문득 뒤로 옮아가니, 遠浦歸帆 이 아니냐, 等狀가자, 等狀가자, 하느님전 等狀가자, 무슨 緣由로 等狀가리, 늙으신 어른은, 궂기지 말고, 젊은이란 늙지 마라, 그만 緣由로 等狀가자, 아서라! 모두 다 醉談이다, 멀고 먼 黃泉길을, 어이하여 가단 말가? 살았을 적 먹고 쓰고, 쓰고 먹고, 거들먹 거리고 놀아보자, 路柳墻花를 꺾어 쥐고, 淸風明月에 놀아보세.」

「진양」
  이 노래는 要路에 失脚한 어떤 사람이 山水를 따라 逍遙하면서 지은 것인데, 그 가운데에 「白鷗詞」의 첫 머리를 引用하였으니 그 處地가 洪國榮(홍국영)과 비슷한 點이 있은 듯하다. 또는 「江湖別曲」에서도 摘用한 것이 있으니 「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가 곧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에는 過去 朝鮮人의 淸貧主義가 다 表現되었다. 漢土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一切로 欽慕하되 高尙하게 여기는 人物로는 「沮·溺(장저·걸익)의 耕田, 許由(허유)의 洗耳, 四皓(동원공·기리계·하황공·각리선생)의 圍碁, 嚴子陵(엄자릉)의 垂釣, 諸葛亮(제갈공명)의 午睡, 竹林七賢의 集會, 甯戚(영척)의 飯牛, 李謫仙(이백)의 騎鯨, 孟浩然(맹호연)의 騎驢, 赤松子(적송자)의 騎鶴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壁畫와 屛畫에서도 자주 보게 되었고, 이렇게 노래에서도 또한 보게 되었다. 이 노래의 作者가 그런 人物을 장차 提示하기 爲하여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서 누었으니, 大丈夫 살림살이, 요만하면 넉넉하지」를 먼저 말하였겠다.
  「夏四月 初八日날, 南風之薰兮하고, 解吾花之慍兮로다, 三角山 第一峰에 鳳凰이 앉아 춤을 추고, 漢江水 맑은 물에, 河圖龍馬가 나단 말가? 百工相和景星歌는 오늘이야 알리로다, 이형 이목이 암암한데, 夢中에나 만나 볼까? 打起黃鶯 아이들아, 莫敎枝上에 恨을 마라, 꾀꼬리 탓이 아니로다, 黃金甲옷 떨쳐 입고, 細柳營 넘어가니, 喚友聲 켜는 소리, 겨우 든 잠 다 깨운다, 長安萬戶 燈을 달아, 山呼萬歲를 부를 적에, 光風霽月 너른 天地, 鳶飛魚躍 뛰놉는다. 그 달 그믐 다 보내고, 五月이라 端午日은, 天中之佳節이요, 月遲遲 窓外로다, 蒼蒼한 수풀 속에, 百舌이 漸漸 잦았으니, 時哉時哉 聖賢이요, 山陽雌雉 우는고나, 白鷗야 펄펄 나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聖上이 버리심에, 너를 좇아서 예 왔노라, 江山에 터를 닦아, 構木爲巢 하여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서 누었으니, 大丈夫 살림살이, 요만하면 넉넉하지, 一寸肝腸 맺힌 설움, 父母님 생각뿐이로다, 松柏垂楊 푸른 가지, 높다랗게 그네 매고, 綠衣紅裳 아이들은 오락가락 鞦韆을 하는데, 우리의 父母님들은, 어디로 가고, 鞦韆時代를 모르는고? 그 달 그믐 다 지내고, 유월이라 流頭날은, 乾坤이 有意하여 양심에 잠겨서라, 중염이 미곤하여, 洪爐流金이 되단 말가? 나도 미리 避暑하여, 어디로 가잔 말가? 陶淵明(도연명) 千秋後에, 萬古江山이 묻혀서라, 竹杖 집고 풍월지취하여, 大觀江山을 하여 보세, 瀑布도 좋거니와, 廬山이 여기로다, 飛流直下三千尺은, 옛말 삼아 들었더니, 疑是銀河 落九天은 果然 헛말이 아니로다, 그 물아 有道하여, 塵衿을 씻은 後에, 은하 石逕 좁은 길로, 引導한 곳 내려가니, 沮·溺(장저·걸익)은 이리야 밭을 갈고, 四皓(동원공·기리계·하황공·각리선생)先生은 바둑 두네, 그 山을 썩 넘어서, 穎水로 내려가니, 許由(허유)는 어이하여, 팔을 걷고 귀를 씻노? 巢父(소부)는 무슨 일로, 소고삐를 붙잡았노? 滄浪一曲 반겨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嚴陵灘 여울물에, 고기낚는 漁翁들을, 羊의 갖옷 떨쳐 입고, 벗을 줄 몰라 있고, 嗚呼라 성현 기운 평하니, 미재 군평이 여기세라, 黃山谷 돌아드니, 竹林七賢 다 모였다. 甯戚(영척)은 소를 타고, 李謫仙(이백) 고래 타고, 赤松子(적송자) 鶴을 타고, 孟浩然(맹호연) 나귀탔네, 杜牧之(두목) 보려하고, 白樂天(백낙천)邊 내려가니, 呂동빈이 백락이라, 孟東野 너른 天地, 臥龍罔邊 내려가니, 鶴氅衣黑帶로다, 八陣圖 縮地法은 胸藏萬甲 하여 있고, 草廬에 깊이 든 잠, 大夢詩을 읊네그려, 그 山廣野 넓고 넓은 金잔디 좌르르 깔렸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흐늘거리고 놀아보세, 江山구경을 다 하려고 들면, 몇 날 몇 달이 될 줄 알리라.」

「梅花歌」
  이 노래의 發生地는 平壤인가 하면서 그 內容으로 보아 흐르는 물과 같은 情다운 사람을 義州에 두고 안타깝게도 歎息한 듯하다.
  「梅花의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온다, 春夢이 하 紛紛하니, 필지 말지도 하다마는, 잎 피었던 가지마다, 피엄직도 하마다는, 北京使臣 역관들아, 五色唐絲를 붙임하세, 매세매세 그물을 매세, 五色唐絲로 그물을 매세, 치세치세 그물을 치세, 浮碧樓下에 그물을 치세, 걸리소서 걸리소서, 情든 사랑만 걸리소서, 물아래 그림자 젓다, 다리 위에 중놈이 간다, 중아 중아 거기 暫間 섯거라, 너 가는 人便에 말 물어를 보자, 그 중놈이 白雲을 가리키며, 돈람 無心만 하는구나, 宣川이라 통義州를 이리루 접첩, 저리루 접첩, 저늬렴 접첩, 개어다 놓고, 한 손에는 박달망치, 또 한손에 물박 들고, 흐르는 川水, 드립더덥석, 이리루 솰솰, 저리루 솰솰, 출렁출렁, 안南山에, 밖南山에, 개암을 개암 심어 심거라, 못 따먹는 저 다람의 안이야.」

「小春香歌」
  이 노래는 그 名稱과 같이 「春香歌」의 한 場面을 簡拔하여 만든 것이다.
  「春香(성춘향)의 거동 보아라, 오른손으로 日光을 가리고, 왼손 높이 들어, 저 건너 竹林 본다, 대 심어 울하고, 솔 심어 亭子로다, 東便에 蓮塘이요, 西便에 우물이라, 路傍심에 오후다요, 門前학동 선생류 긴버들, 휘늘어진 늙은 長松, 狂風에 興을 겨워, 우줄우줄 춤을 추니, 저 건너 사립문 안에, 삽사리 앉아 먼 산만 바라보며, 꼬리치는 저 집이오니, 黃昏에 丁寧히 돌아오쇼, 떨치고 가는 形狀, 사람 뼈다귀 다 녹인다, 너는 웨한 계집애관대, 나를 종종 속이느냐? 너는 웨한 계집애관대, 丈夫의 간장을 다 녹인다, 綠陰芳草勝花時에, 해는 어이 더디 가고, 梧桐夜月 밝은 달, 밤은 어이 쉬이 간고. 日月無情 덧없도다, 玉鬢紅顔 空老로다, 우는 눈물 받아 내면, 배도 타고 가련마는, 咫尺東方 千里완대, 어허 그리 못 보던가?」

「토끼타령」(一名은 「토끼화상」)
  이 노래는 「兎의 肝(별주부傳)」에서 分化된 것인데, 다만 토끼의 생김생김을 그림으로 解剖한 것이다.
  「토끼화상을 그린다, 토끼화상을 그린다, 화공을 불러라, 화공을 불렀소, 토끼화상을 그린다, 李謫仙(이백) 鳳鳳臺, 鳳 그리던 환장이, 南宮天子 凌虛臺, 日月 그리던 환장이, 燕昭王의 黃金臺며, 그리던 환장이, 동정류리 靑黃硯, 금수추파 거북연적, 오징어 불러 먹을 갈려, 美頭畫筆 담북 풀어, 白菱雪花 簡紙上에, 이리저리 그린다, 天下名山勝地間에, 경개 보던 눈 그리고, 蘭草芝草 우거를 진대, 불로초 뜯던 입 그리고, 앵무공작이 짖어울 제, 소리 듣던 귀 그리고, 蓬萊·方丈 雲霧中에, 香내 맡던 코 그리고, 大寒嚴冬雪寒風에, 防風하던 털 그리고, 左便에는 靑山이요, 右便에는 綠水로다, 綠水靑山 깊은 곳에, 桂樹나무 그늘 속에 앙금조츰 뛰던 발 그리고, 두 귀는 쫑긋, 두 눈은 도리도리, 허리는 잘룩, 꽁지는 뭉툭,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 깡짱깡짱 뛰어가는 峨嵋山半輪兎를, 이에서 더할쏘냐? 아니었다, 별주부야, 네 가지고 가거라.」

「제비가」
  이 노래는 「興夫傳」에서 分化된 것인데, 심술궂은 놀부의 제비 후리는 狀態를 갖가지로 敷衍하였다.
  「萬疊靑山 늙은 범이, 살진 암캐를 물어다 놓고, 에리 궁글 놀린다, 狂風에 落葉처럼 碧海 둥둥 떠나간다, 日落西山에 해는 뚝 떨어지고, 月出東嶺에 달이 솟네, 萬里長天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제비를 후리려 나간다, 伏羲(복희)氏 맺은 그물을, 들쳐 메고서 나간다, 芒碣(망갈)山으로 나간다, 우여라 저 제비야, 네 어디로 向하느냐? 白雲을 박차고, 黑雲을 무릅쓰고, 半空中에 높이 떠서, 위여어 하고서, 저 제비 너 어디로 向하느냐? 내 집으로 훨훨 돌아오쇼, 楊柳間에 앉은 꾀꼬리를, 제비만 여겨 후린다, 아야 에야 너 어디로 向하느냐? 空山夜月 달 밝은데, 슬픈 소리 杜鵑聲, 슬픈 소리 杜鵑聲, 月到天心 夜三更에 어는 郞君이 날 찾나? 雲林飛鳥 뭇 새들은, 弄春和答 짝을 지어, 雙去雙來 날아든다, 말 잘하는 앵무새, 춤 잘 추는 鶴두루미, 文彩 좋은 孔雀새, 공기적다 공기 주루룩, 숙궁 접동새 수루룩, 호반새 날아든다, 기러기 훨훨, 방울새 떨렁, 다 날아드는데, 제비만 어디로 向하느냐? 江南으로 向하지 말고, 내 집으로 훨훨 날아드쇼.」

「새타령」
  一幅의 그림과 같은 朝鮮의 山水, 봄철이면 「以鳥鳴春」하는 朝鮮의 景槪, 이 나라의 사람으로서 누구가 興에 겨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랴? 거기로서 새타령도 흘러나온 것이겠다.
  「새가 새가 날아든다, 온갖 雜새가 날아든다, 南風 좇아 떨쳐나니, 九萬里 長天에 大鵬새, 文王이 나게시니, 岐山朝陽에, 鳳凰새…」

「原本孔明歌」
  이 노래는 朱子(주자)의 『通鑑綱目』과 金聖歎(김성탄)評의 『三國衍義』에 根本한 그 思想의 衝動을 받아서 되어진 것이다. 乙支文德(을지문덕)이나 李舜臣(이순신)보다 劉·關·張(유비·관우·장비) 三人과 諸葛亮(제갈공명)을 오히려 天神같이 崇拜하는 朝鮮사람에게서 孔明(제갈공명)歌나 赤壁歌가 나왔다는 것이 그리 異常한 일은 아니다.
  「孔明(제갈공명)이 葛巾野服으로 南屛山에 올라가 壇 높이 보고, 東南風을 빌 제, 東에는 靑龍旗요, 北에는 玄武旗요, 南에는 朱雀旗요, 西에는 白虎旗로다, 中央에는 太極旗 꽂고, 五方旗幟에는 東西四方으로 좌르르 벌려 꽂고, 발 벗고 머리 풀고, 鶴氅衣 黑帶 띠고, 壇에 올라, 東南風 비온 後에, 壇下를 굽어보니, 江上에 둥둥 떠오는 배, 徐盛(서성), 丁奉(정봉)의 밴줄만 알았더니, 趙子龍(조자룡)의 배가 分明하구나, 卽時 壇으로 내려오니, 子龍(조자룡)이 船隻을 等待하였다가, 先生을 뵈옵고 하는 말이, 先生은 佳候 一向하옵시며, 東南風은 無事히 빌어 계십니까? 東南風은 無事히 빌었으나, 뒤에 追兵이 올 듯하니, 어서 배를 돌리어 行船을 하소서, 子龍(조자룡)이 여쭈오되, 小將하나 있사오니, 무슨 念慮가 있사오리까? 즉시 배를 타고 夏口로 갈 제, 이때 周瑜(주유)―魯肅(노숙)더러 하는 말이, 孔明(제갈공명)은 제아무리 上通天文, 下達地理, 六韜三略을 無不通知할지라도 甲子年 甲子月 甲子日 甲子時에, 東南風 빌기는 萬無로구나? 말이 닷지 못하여 風雲이 大作하여, 東南風이 일어날 제, 검은 구름은 뭉게뭉게, 雷聲霹靂은 우루룩, 바람은 地動치듯, 번개는 번쩍, 빗방울은 뚝, 뚝, 뚝 떨어질제, 周瑜(주유) 肝膽 놀라, 北窓을 열고 南屛山 바라보니, 암성기암은 펄펄 나붙기어 西北을 가리웠거늘, 이때에 徐盛(서성)·丁奉(정봉) 兩將을 불러 分付하되, 孔明(제갈공명)은 天神같은 謀士니, 저런 謀士를 두었다가는, 日後 患이 있을 듯하니, 너의 두 장수는 不問曲直하고 南屛山 올라가, 孔明(제갈공명)의 머리를 베어 오라! 만약 베어 오지 못하면은, 軍法으로 施行하리라! 徐盛(서성)·丁奉(정봉) 分付듣고, 匹馬單騎로 長鎗을 높이 들고, 徐盛(서성)은 水路로 가고, 丁奉(정봉)은 陸路로 가, 南屛山 올라가니, 孔明(제갈공명) 先生은 간 곳 없고, 다만 남은 건, 겨우 壇지킨 軍士뿐이라, 軍士더러 묻는 말이, 孔明(제갈공명) 先生은 어디로 가시더냐? 軍士 대답하되, 이제 발 벗고 머리 풀고, 壇에 올라 東南風 비인 後에, 壇아래 내려가시더니, 어디로 가신 蹤迹을 알지 못하나이다, 徐盛(서성)이 그 말 듣고, 大驚하여, 山으로 층층 내려와 江口에 점점 당도하니, 人迹은 고요한데, 다만 남은 것은 左右 江지킨 守軍將卒뿐이라, 將卒더러 묻는 말이, 先生은 어디로 向하더냐? 將卒이 여쭈오되 이제 한 사람 발 벗고, 머리 풀고, 九節杖 짚고, 예 와 섰더니만, 江上으로 웬 扁舟 둥둥 떠오더니, 웬 한 장수 船頭에 선뜻 나서, 兩손으로 揖하고서, 先生을 맞아 모시고, 江上으로 向하더이다, 徐盛(서성)·丁奉(정봉) 그 말 듣고, 船隻을 재촉하여, 順風에 돛을 달아 따르다가, 앞에 가는 배, 돛 없음을 보고, 점점 따르다가, 船頭에 선뜻 나서 하는 말이, 앞에 가는 배, 孔明(제갈공명) 先生 타셨거든 暫間 닻 주고, 닻 놓고 머무르소서, 우리 都督께옵서 申申付托하오니, 말 한 마디 들으시고 行船하소서, 孔明(제갈공명)이 배머리에 선뜻 나서 하는 말이, 徐盛(서성)아, 말 들어라! 내 너의 나라에 가서 恩德도 많이 베풀고, 東南風까지 빌어 주었거던, 무슨 일로 나를 害코저 하느냐? 너희 두 장수는 부질없이 길을 따르지 말고, 빨리 돌아가 내말 갖다 너의 都督에게 傳하고 國事나 도와주어라! 徐盛(서성)이 들은 체 아니하고 따를 적에, 子龍(조자룡)이 선뜻 나서 하는 말이, 내 너를 죽일 것이로되, 兩國의 和氣가 傷할 듯하기로 죽이지 않고, 그저 보내거니와 手段이나, 暫間 비양하노라, 鐵弓에 왜전 먹여 깍지손 끼어들고, 左弓에 우거질까, 右弓에 좌저질까, 가는 살이, 徐盛(서성)·丁奉(정봉) 배돛대 맞아 물에 가 푹―덤벅 떨어지니, 돛은 좌르르, 처릉은 끊어져, 배머리 빙빙, 몰아를 갈제, 連하여 鐵弓에 왜전 먹여 깍지손 지끈 떼니, 江上 수루루 건너가 徐盛(서성)의 쓴 투구 물에 가 덤벙, 떨어지니, 徐盛(서성) 魂飛魄散하였다가, 겨우 人事차려, 沙工 불러 묻는 말이, 저기 저 장수 어떠한 壯士냐? 沙工 여쭈오되, 前에 長板橋 싸움에 阿斗(유선)를 품에 품고, 億十萬大兵을 瞬息間에 제쳐버리고, 長板橋로 돌아와도 後主 잠 들고 깨지 않던 常山 땅의 趙子龍(조자룡)이로소이다, 徐盛(서성)이 그 말 듣고, 할 일 없이 빈 배머리를 슬슬 돌리며, 本國으로 돌아가며 自歎하는 말, 漢宗室 劉皇叔(유비)은 德이 두터운지 저런 謀士·名將을 두었건만, 우리 陛下는 다만 仁慈할 뿐이로다, 생각을 하면 天時를 拒逆지 못하겠으니 自歎뿐이다.」

「別赤壁歌」
  「大丈夫 虛浪하여, 富貴功名을 하직하고, 三尺童 一匹驢로, 勝地江山을 遊覽할 제, 秦始皇 古國之墟와, 萬里長城 阿房宮이며, 漢武帝 千秋遺蹟 仙人掌과, 이러한 勝地를 어디어디 보았는고? 黃鶴樓 鳳凰臺며, 黃龍口 영귀塔과 順天府 영천府는 沃野千里 되어 있고, 燕·齊·楚·韓 魏·秦·趙, 吳·隋·唐·越 魯·蔡·宋, 다 본 後에 風景이 旣盡하고, 玉欄干에 비껴 앉아, 引壼觴而自酌하고, 不勝醉興하여, 邯鄲枕 돋우 베고, 萬疊靑山 들어가니, 山形地勢도 좋거니와, 楚山物色이 더욱 좋다, 東三江은 水戰이요, 赤壁은 鏖兵이라, 난데없는 火光이 沖天하니, 曹操(조조)가 大敗하여, 華容道로 行할 즈음에, 應砲一聲에 一員大將이 掩身甲옷에 봉투구 젓겨 쓰시고, 鳳眼을 부릅뜨시고, 三角鬚를 거스리시고, 赤兎馬를 비껴 타시고, 八十斤 靑龍刀, 눈 위에 선뜻 들어, 압다, 이놈 曹操(조조)야! 날다, 길다 하시는 소리, 精神이 散亂하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殘命을 살으소서, 小將의 命을, 將軍前에 비나이다, 前日을 생각하오, 上馬에 千金이요, 下馬에 百金이라, 五日에 大宴하고, 三日에 小宴할 제, 漢壽亭侯 封한 後에 高大廣室 높은 집에, 美女充宮하였으니, 그 精誠만 생각하오, 今日 曹操(조조)가 赤壁에 大敗하여, 말은 疲困하고, 사람은 주리어, 能히 寸步를 못하겠으니, 將軍厚德을 입사와지이다, 네 아무리 살려고 하여도, 살지 못할 말 듣거라! 네 精誠 갚으려고 白馬江 싸움에, 河北名將 범같은 天下壯士 顔良(안량)·文醜(문추)를 한 칼에 선뜻 베어, 네 精誠 갚은 後에, 漢壽亭 印兵符 끌러, 轅門에 걸고, 獨行千里 하였으니, 네 精誠만 생각하느냐? 이놈, 曹操(조조)야! 너 잡으려고 여기 올 제, 軍令狀 두고 왔다. 네 죄상을 모르느냐? 天命을 拒逆하고, 百姓을 殺害하니, 萬民塗炭을 생각지 않고, 너를 어이 容恕하리, 奸邪한 말을 듣고, 짧은 목 길게 늘여, 靑龍刀 받으라 하시는 소리, 一寸肝腸 다 녹는다, 小將을 잡으려고, 軍令狀 두었으나, 將軍의 命은 하늘에 달렸으며, 小將의 命은 今日 將軍前에 달렸소, 어지신 聖德을 입사와, 將軍厚德에 살아지이다, 關公이 들으시고, 殘忍히 여기사, 周倉(주창)으로 하여금 五百刀斧手를 한편으로 치우시고, 말머리를 돌으키시니, 曹操(조조)가 華容道 벗어나서, 曹仁(조인) 만나, 許都로 가단 말가?」

「老處女歌」
  國初로부터 婚嫁에 對하여는 法的으로 重視하였나니, 成宗 十六年에 頒布한 『經國大典』의 禮典 三十二項 婚嫁條에 「子女의 年이 滿十三歲가 되면 議婚함을 許한다」하고, 그 禮典의 拾遺 六十七項 惠恤條에
  「土族의 女가 三十에 近하되 婚嫁를 못한 者에게는 資材를 量給한다」하고,
  그 보다도 더 일찍이 成宗 六年 八月條(『成宗實錄』 卷 三十三)에
  「女年이 二十五歲가 되도록 婚嫁를 못하였다면, 그 父母를 罰하기로」에 對한 臣等의 願書가 있었다.
  老處女의 成婚問題는 이렇게 重大視하였는데, 이 노래에 나타난 그 父母는 貧乏한 것도 아니요, 다만 士族家門을 擇하는 거기에서 딸을 그렇게 늙게 하였다. 그것은 이 노래의 「검정 암소 살쪄 있고, 奉祀田畓 같건마는, 士族家門 가리면서, 이때도록 늙어간다」가 充分히 說明하고 있으니 그런 兵曹判書까지 지낸 兩班님에게는 婚嫁違時律도 쓸 데 없던가?
  그런데 이 노래의 作者는 한 方面으로는 그리 貧乏지 않은 兩班父母란 것을 말하면서, 다른 方面으로는 「가난한 좀 兩班이, 父親하나 半便이요, 가난한 私說뿐이로다」 等의 말로써 前後가 矛盾되게 하였으니 그 솜씨의 서투름을 스스로 告白하였다.
  「人間世上 사람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쇼, 人間萬物 생긴 後에, 草木禽獸 짝이 있다, 人間에 생긴 男女, 富貴子孫 같건마는, 이내  八字 헛궂을손, 나 같은 이 또 있는가? 百年을 다 살아야, 三萬 六千날이로다, 혼자 살아 千年살며, 貞女되어 萬年살까? 답답한 우리 父母, 가난한 좀 兩班이, 兩班인체 된체하고, 處事가 不敏하여, 驕慢을 일삼으니, 다만 한 딸 늙어간다, 寂寞한 빈 房 안에, 寂寂寥寥 혼자 앉아, 輾轉不寐 잠 못 들어 老妄한 우리 父母, 날 길러 무엇하리, 죽도록 날 길러 잡아 쓸까, 구워 쓸까? 人皇적 생긴 男女, 伏羲(복희)적 지은 嫁娶, 人間配匹 婚娶함은, 예로부터 있건마는, 어떤 處女 八字 좋아, 二十前 시집간다, 男女子孫 시집장가, 떳떳한 일이건만, 이내 八字 崎險하여, 四十까지 處女로다, 이런 줄 알았으면, 처음 아니 낳을 것을, 月明紗窓 긴긴 밤에, 寢不安席 잠 못 들어, 寂寞한 빈 房 안에, 오락가락 다니면서, 將來事를 생각하니, 더욱 답답 민망하다, 父親 하나 半便이요, 母親 하나 菽麥不辨, 날이 새면 새 날이요, 세가 쇠면 來年인가, 婚姻私談 全廢하고, 가난 私說뿐이로다, 어디서 손님 오면, 幸여나 仲媒신가, 아이 불러 詰問한즉, 風憲·約正 還上 재촉, 어디서 편지 왔네, 幸여나 請婚書인가, 아이더러 물어보니, 外三寸의 訃音이라, 애달프고 설움지고, 이 肝腸을 어이할꼬? 앞집의 아무 아기, 벌써 子孫 낳단 말가? 동편집 용골녀는, 今明間에 시집가니, 그 동무의 無情歲月, 시집가서 풀건마는, 친구 없고 血屬없다. 慰勞할 이 전혀 없네, 우리 父母 무정하여 내 생각 전혀 없다, 富貴貧賤 생각 말고, 人物風采 마땅커던, 處女 四十 나이 적소, 婚姻擧動 차려 주오, 金童이도 喪妻하고, 李童이도 棄妻로다, 仲媒할미 전혀 없네, 날 찾을 이 뉘시런고? 검정 암소, 살쪄있고, 奉祀田畓 같건마는, 士族家門 가리면서, 이때도록 늙어간다. 臙脂粉도 있건마는, 성적 丹粧 全廢하고, 검정치마 헌 저고리, 화경거울 앞에 놓고, 遠山같은 푸른 눈썹, 細柳같은 가는 허리, 아름답다 나의 姿態, 妙하도다 나의 擧動, 흐르는 이 세월에, 아까울 손 늙어간다. 거울더러 하는 말이, 어화 답답 내 八字여, 갈 데 없다. 나도나도, 쓸데없다 너도너도, 우리 父親 兵曹判書, 할아버지 戶曹判曹, 우리 門閥 이러하니, 風俗 좇기 어려워라, 아연듯 春節되니, 草木群生 다 즐기네. 杜鵑花 만발하고, 잔디잎 속잎 난다. 싹은 바재 짱짱하고, 종달새 돋우 뜬다. 春風夜月 細雨時에, 獨守空房 어이할꼬? 원수의 아이들아, 그런 말 하지 마라, 앞집에는 新郞오고, 뒷집에는 新婦왔네, 내 귀에 듣는 바는, 느낄 일도 하구 많다. 綠楊芳草 저문 날에, 해는 어이 쉬이 가노, 朝露같은 우리 人生, 飄然히 늙어가니, 머리태를 옆에 끼고, 다만 한숨뿐이로다, 긴 밤에 짝이 없고 긴 날에 벗이 없다. 앉았다가 누었다가, 다시금 생각하니, 아마도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원수로다.」

「寡婦歌」
  李朝 初에부터 男子의 再娶는 不問에 두고서 特히 婦女의 再嫁만을 嚴禁한 것은 그 意味가 어디에 있는가?
  太宗 八年(1408年)에 再嫁女의 子孫은 仕版에 두지 말기로 하고,
  太宗 十五年에는 徐選(서선)의 말을 從하여 庶孽子孫은 正職에 敍하지 말라 하고,
  成宗 八年(1477年)에 再嫁를 禁하여 그 所生에게는 授官赴擧를 許하지 말기로 하고, 曾孫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許하되 淸顯官은 되지 못한다 하고,
  成宗 十六年에는 再嫁女의 子孫은 東西班에 敍하지 말기로 하였다.
  이 禁令들은 다만 「忠臣은 不事二君이요, 烈女는 不更二夫라」는 儒家의 道德觀에 根據하였다는 것이요, 그 밖에는 意味가 없었겠다. 過年의 處女가 婚嫁을 못하였다면, 그것은 和氣를 感傷한다 하여 資材를 量給하느니, 그 父母를 罰하느니 그렇게 와자자 떠들면서 靑年 홀寡婦의 再嫁를 禁하는 거기에 있어 和氣가 感傷될 것까지는 채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五百餘年을 내려오면서 婦女의 怨冤이 얼마나 쌓이었으며, 人口의 生殘이 얼마나 減縮하였던가?
  婦女가 한번 不幸히 홀어미로 되면 그 將來가 悲絶慘絶 함에 對하여는 사위를 弔傷하는 어떤 詩 一首를 들어 두겠다.
  「爾生我女死면, 哭死不哭生인데, 爾死我女生하니, 哭死又哭生하노라.」
  「人生이 생겨날 제, 男女로 생겨나서, 글 배워 成功하고, 활 쏘아 及第하여, 猉獜閣 一片石에, 第一功臣 그려내면, 父母님께 榮華되고, 子孫에게 顯達하여, 丈夫의 快한 이름, 後世에 傳할 것을, 前生에 무슨 罪로 이내 몸 女子되어, 우리 父母 날 길러서 무슨 榮華 보려하고, 깊으나 깊은 房에, 千金같이 넣어두고, 外人去來全廢하니, 親戚도 稀疎하다. 歲月이 如流하여, 二十五歲 暫間이라, 百年佳約 定할 적에, 오며 가며 媒婆로다, 예장 온 지 보름 만에 벌써 新郞 오단 말가? 花燭이 다 지난 後에, 衾裏에 同枕하니, 繾綣之情이 比할대 전혀 없다, 衾裏에서 盟約할 제, 百年살자 굳은 언약, 生則同住하고, 死則同穴이라, 人間에 일이 많고, 造物이 샘하여, 一朝에 우리 郞君, 偶然히 得病하여, 百藥이 無效하고, 一分效驗 전혀 없다. 可憐한 이내 身勢, 胸膓痛 일어난다. 華陀(화타)가 更生하고, 扁鵲(편작)이 살아신들, 一朝에 우리 郞君, 죽을 밖에 전혀 없다. 出嫁한지 보름 만에, 靑春紅顔 寡婦로다. 萬事에 뜻이 없고, 一身에 病이 된다, 철없는 아이들아, 時節노래 하지 마라, 正月이라 보름날에, 뉠과 한양 翫月할꼬, 二月이라 寒食날에, 뉠과 함께 看山하리, 三月이라 삼짇날에, 踏靑할 이 전혀 없다, 四月이라 初八日에, 觀燈할 이 전혀 없다. 五月이라 端午日에, 씨름구경 뉠과 하리, 六月이라 流頭날에, 流頭노래 뉠과 하리, 七月이라 七夕날에, 牽牛織女 보려하고, 鴛鴦枕 돋우 베고, 烏鵲橋 꿈을 꾸니, 窓 앞의 櫻桃나무에, 지저귀는 雜鳥소리, 忽然한 相思夢은 孟浪하고 虛事로다, 八月이라 秋夕날에, 어느 郞君 祭祀하리, 九月이라 九日날에, 菊花구경 뉠과 하리, 이 달 그믐 다 지나고, 十月이 오는도다, 나뭇가지 여위기는 잎 떨어진 탓이건만, 이내 몸 여위기는, 郞君없는 탓이로다. 오동짓달 긴긴 밤에, 어이하면 잠을 들꼬, 넓으나 넓은 房에 홀로 못 자 원수로다, 남의 집 少年들은 섣달 그믐 날에, 오며 가며 벗을 불러, 新舊換歲 人事로다. 우리 郞君 어디 가고, 歲拜할 줄 왜 모른고. 벼슬로 外方 갔나, 他鄕에 興利 갔나, 去年 가고, 今年 가니, 생각하면 목이 멘다. 남 잘 자는 긴긴 밤에, 무슨 일로 못 자는고, 슬프다 可憐하다, 이내 八字 어이할꼬, 손꼽아 헤아리나, 오실 날이 漠然하다, 애고 애고 설움지고, 실낱같은 이내 목숨, 흐르나니 눈물이요, 지나니 한숨이라. 아연듯 봄이 가니, 가지마다 잎이 핀다. 江南서 오는 제비, 왔노라고 現身한다. 瀟湘江 뜬 기러기, 물을 보고 반기는 듯, 去年에 갔던 지승, 今年에 다시 왔네, 미천한 우리 郞君, 가고 올 줄 왜 모르노, 靑天에 뜬 기러기, 임의 소식 아리워라, 濸茫한 구름밖에, 비인 소식뿐이로다. 緣分도 갔고 갔고, 琴瑟도 없고 없다, 靑天明月에, 생각나니 임이로다. 이리저리 잊자하니, 아마도 원수로다, 暫間 좀 잊자하고, 花柳구경 가노라니, 淸風花柳場에, 벗 부르는 黃鳥로다, 間關하는 소리마다, 이내 肝腸 다 썩인다, 花柳구경 다 버리고, 빈 房으로 돌아오니, 夜月三更 깊은 밤에, 蟋蟀聲 더욱 섧다. 이리 가도 슬픈 소리, 저리 가도 슬픈 소리, 이 肝腸 둘 데 없어, 친구 벗을 찾아가니, 이 집도 家長 있고, 저 집도 男便 있네. 琴瑟을 잊자 하고, 削髮爲僧 하자 하니, 시집도 兩班이요, 내 집도 품관이라, 家門을 헤아리니, 중 되기도 어려워라. 아마도 모진 人生, 못 죽어 원수로다. 도리어 다 풀치고 다시 생각 마자하니, 영등을 높이 달고, 諺文古談 비껴 들고, 同현성錄 보노라니, 화씨 석씨 節行이라, 「烈女傳」을 들고 보니, 斑婕妤(반첩여)도 날과 같다. 梧桐秋夜 긴긴 밤에, 轉輾不寐 잠 못 일어, 欄干을 의지하여, 혼자말로 하는 말이, 靑春시절 늙어가니, 어느 시절 다시 볼꼬, 長長秋夜 긴긴 밤에, 洞內 할미 불러다가, 옛말로 벗을 삼아, 밤 새우자 언약하니, 그 할미 凶佞하여, 改嫁하라 하는 말이, 靑春少年 白髮되면, 다시 젊지 못하리라. 아무개네 맏딸아기, 改嫁하여 平安하지, 늙은 몸 잘애되어, 兎公先生 못 속인다. 世上事 생각하니, 夫妻밖에 또 있는가, 이내 말씀 책망 말고, 後日이면 待接하리, 無情歲月 如流하여, 玉鬢紅顔 절로 늙네, 할미년의 부동으로, 암만해도 못 참겠네.」

「悔心曲」
  이 노래는 어떤 沙門의 손에서 나온 것이겠다. 그 內容을 보면 一切衆生으로 하여금 佛法에서 歸依하도록 因果報應의 說을 縷陳하여서 노래하였으니 오늘에 있어 그것이 欺瞞이요, 誘惑임에 對하여는 더 苟苟히 解明할 것도 없는 일이다.
  「世上天地 萬物 中에, 사람밖에 또 있는가, 여보시오 施主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쇼, 이 世上에 나온 사람, 뉘 德으로 나왔는가? 釋迦如來 공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빌며, 어머님전 살을 빌고, 七星님전 命을 빌며, 帝釋님전 福을 빌어, 이내 一身 탄생하니, 한두 살에 철을 몰라, 父母恩功 알을손가, 二三十을 당하여도, 어이없고 애닯고나, 父母 은공 못 다 갚아, 무정세월 如流하여, 원수 白髮 돌아오니, 철통하고 애닯도다, 人生 七十 古來稀라, 없던 망녕 절로 난다, 망녕이라 흉을 보고, 구석구석 웃는 모양, 애닯고도 설움 지고, 철통하고 분통하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紅顏白面 늙어간다, 人間의 公道를, 뉘가 能히 막을 손가, 春草는 年年綠이나, 王孫은 歸不歸라, 우리 人生 늙어지면, 다시 젊지 못하리라, 人間百年 다 살으랴, 病든 날과 잠든 날과, 걱정근심 다 除하면, 단 四十을 못 살 人生, 어제 오늘 성하던 몸이, 저녁 낮우 病이 들어, 첩첩하고 약한 몸에, 泰山같은 病이 드니, 부르나니 어머니요, 찾나니 泠水로다. 人蔘鹿茸 약을 쓰니, 약 效驗이 있을 손가, 판수 불러 誦經한들, 經의 德을 입을 손가, 巫女 불러 굿을 한들, 굿德인들 입을 손가, 齋米쌀 쓿고 쓿어, 名山大川에 찾아가서, 상탕에 뫼를 짓고, 중탕에 沐浴하고, 하탕에 손을 씻고, 촛대 한 쌍 벌려놓고, 香爐香盒 불 갖추고, 燒紙三張 드린 後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느님전 비나이다. 七星님전 發願하고, 부처님전 供養한들, 어느 부처님이, 感動하여 應할 손가, 第一에 진광大王, 第二에 초관大王, 第三에 송제大王, 第四에 오관大王, 第五에 閻羅大王, 第六에 번성大王, 第七에 태산大王, 第八에 평등대왕, 第九에 도시大王, 第十에 보도전륜大王, 열시왕전 부린 使者, 열시왕의 命을 받아, 日直使者 月直使者, 한 손에는 鐵椎 들고, 또 한 손에 창검 들고, 쇠사슬을 비껴 차고, 활직같이 굽은 길로, 살대같이 날아와서, 닫은 門 박차면서, 天動같이 소리하여, 姓名三字, 불러낼 제, 어서 나오 바삐 나오, 뉘 分付라 拒逆하며, 뉘 令이라 머물 손가, 실낱같은 이내 목숨, 팔뚝 같은 쇠사슬로, 한 번 잡아 끌어내니, 魂飛魄散 나 죽겠네. 여보시오 使者님네, 路資돈 개고 가세, 萬端開喩 哀乞한들, 어느 使者 들을쏘냐, 애고 답답 설운지고, 이를 어이 하잔 말까, 불쌍하다 이내 一身, 人間 하직 망극하다. 明沙十里 海堂花야, 꽃 진다고 서러 마라, 明年 三月 봄이 되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人生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北邙山 돌아갈 제, 어찌 갈꼬 深山險路, 한정 없는 길이로다, 언제 다시 돌아오랴, 이 世上을 하직하니, 불쌍하고 可憐하다, 妻子의 손을 잡고, 萬端說話 다 못하여, 精神차려 살펴보니, 藥탕관을 벌려놓고, 至誠救護 극진한들, 죽을 목숨 살을손가, 옛 늙은이 말 들으니, 저승길이 멀다더니, 오늘 내가 당하여선, 大門밖이 저승이라. 친구 벗이 많다한들, 어느 친구 代身가며, 일가친척 많다 한들, 어느 일가 同行할까, 舊祠堂에 하직하고 新祠堂에 허배하고, 대문밖에 썩 나서니, 적삼 내어 손에 들고, 혼백 불러 招魂하니, 없던 哭聲 낭자하다. 日直使者 손을 끌고, 月直使者 등을 밀며, 風雨같이 재촉하여, 허방지방 몰아갈 제, 높은 데는 낮아지고, 낮은 데는 높아진다. 惡衣惡食 모은 세간, 먹고 자며 쓰고 가랴, 使者님아 使者님아, 내 말 暫間 들어주오. 시장한데 점심하고, 신발이나 고쳐 신고, 쉬어 가자 哀乞한들, 들은 체도 아니하고, 쇠뭉치로 등을 치며,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이렁저렁 여러 날에, 저승 轅門 다다르니, 牛頭나찰 馬頭나찰, 소리치며 달려들어, 인정 달라 하는구나. 인정 쓸 돈 반 푼 없다. 담배 끊고 모은 재물, 인정 한 푼 써볼쏜가, 저승으로 옮겨 올까, 換錢붙여 가져올까, 衣服 벗어 인정 쓰며, 열두 大門 들어가니, 무섭기도 끝이 없고, 두렵기도 측량 없다. 待令하고 기다리니, 獄司掌이 分付듣고, 男女罪人 등대할 제, 정신차려 살펴보니, 열시왕이 좌기하고, 崔判官이 文書잡고, 男女罪人 잡아들여, 다짐받고 봉초할 제, 鬼頭나찰 나졸들은, 前後左右 벌려 서고, 旗幟槍劍森列한데, 刑罰機具 차려 놓고, 臺上號令 기다리니, 嚴肅하기 측량 없다, 男子罪人 잡아들여, 刑罰하며 묻는 말이, 이놈들아 들어봐라. 善心하마 發願하고, 人世間에 나아가서, 무슨 善心 하였는가. 바른 대로 아뢰어라, 龍逄比干 본을 받아, 임금에게 極諫하며, 나라에 忠誠하며, 父母에게 효도하며, 늙은이를 恭敬하며, 배고픈 이, 밥을 주며, 기사功德 하였는가.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功德 하였는가, 좋은 곳에 집을 지어, 行人功德 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越川功德 하였는가. 목 마른 이 물을 주어, 汲水功德 하였는가. 病든 사람 약을 주어, 活人功德 하였는가. 높은 山에 佛堂지어, 衆生功德 하였는가, 좋은 밭에 원두 심어, 行人解渴 하였는가. 부처님께 공양 드려, 마음 닦고 善心하여, 念佛功德 하였는가. 무슨 功德하였느냐, 어진 사람 맞내어서, 不義行事 많이 하며, 貪財함이 極甚하니, 이 罪目을 어이하리, 萬事가 그러하니, 풍도옥에 가두어라, 착한 사람 불러들여, 恭敬하고 대접하며, 몹쓸 놈아 구경하라, 이 사람은 善心으로 極樂世界 들어가니, 이 아니 좋을손가. 所願대로 물을 적에, 네 願대로 하여줄나, 極樂으로 갈라느냐, 蓮花臺로 갈라느냐, 仙官弟子 될라느냐, 長生不死 할라느냐, 西王母(서왕모)의 侍童되어, 蟠桃소임 할라느냐, 男中의 絶色되어, 瑤池宴에 갈라느냐, 百萬軍中 總督되어, 장수몸이 되겠느냐, 어서 바삐 아뢰어라, 玉帝에게 奏文하여, 釋迦如來(석가여래)·阿彌他佛(아미타불), 지도하기 공부하자, 山神 불러 議論하고, 바삐 바삐 지도하라, 저런 사람 善心으로, 貴히 되어 나아가니, 大雄殿에 올린 後에, 酒饌으로 대접하며, 몹쓸 놈 잡아내어, 착한 사람 구경하라, 너희 놈들 罪重하니, 풍도옥에 가두어라, 男子罪人 處決한 後, 女子罪人 잡아들여, 嚴刑鞠問하는 말이, 너의 罪目 들어봐라, 시父母와 친父母께 至誠孝道 하였든가, 同生行列 友愛하여, 친척 和睦하였는가. 狡惡하고 奸毒한 년, 父母 말씀 대답하고, 同生間에 離間하여, 兄弟不睦 하게 하며, 世上奸毒 다 부리며, 열두 사로 마음變化, 못 듣는데 욕하는 년, 마주 앉아 웃음樂談, 군말하고 성내는 년, 남의 말을 일삼는 년, 씨앗하기 좋아한 년, 풍도옥에 가두리라. 罪目을 물은 後에 온갖 刑罰 하는구나. 罪之輕重 가리어서, 次列대로 處決할 제, 刀山地獄·火山地獄·寒氷地獄·검수地獄·拔舌地獄·毒蛇地獄·阿鼻地獄·거해地獄·석산地獄·지악地獄, 各處地獄 分付하여, 모든 罪人 처결한 後, 大宴을 排設하고, 착한 女子 불러들여, 恭敬하며 하는 말이, 所願대로 다 일러라, 仙女되어 갈라느냐, 瑤池宴에 갈라느냐, 男子되어 갈라느냐, 宰相婦人 될라느냐, 帝室皇后 되겠느냐, 諸侯王妃 되겠느냐, 富貴功名 하겠느냐, 네 願대로 하여 줄라, 하고픈 것 다 일러라, 仙女 불러 付托하여, 極樂으로 나아가니, 그 아니 좋을손가, 善心으로 마음 닦아, 不義行事 하지 마소, 悔心曲을 허수 알고, 善心功德 아니하면 午馬形狀 못 면하고, 구렁·배암 못 면하네, 조심하여 修身하라, 修身齊家 능히 하면, 治國安民 하오리니, 아무쪼록 힘을 쓰오, 積善功德 아니하면, 後生 길을 못 닦겠네, 바라노니, 우리兄弟, 慈善事業 많이 하여, 來生 길을 잘 닦아서, 極樂으로 나아가세.」

「秋風感別曲」
  내가 十八歲 되는 때에 이 노래와 「秋風感別回答歌」를 아울러 一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것을 다만 文章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俄領(러시아령)遠東에로 들어온 後, 어느 날 海港에 있는 東洋大學 圖書館 朝鮮部에 가서 자그마한 小說冊 모양으로 編成한 『秋風感別曲』을 다시 얻어 보게 되었다. 그것이 이미 二十餘年 前의 일이라. 作者의 姓名은 忘却하였으나, 平壤의 아전(營吏)인 것은 지금까지 記憶에 남기어 있다. 그가 妓生 金彩鳳(김채봉)에게 살뜰한 사랑을 던지고, 서로 百年 살자는 굳은 盟約까지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新任 監司의 勢力에 부대끼어 하는 수 없이 그 사랑을 빼앗기고, 忽然히 일어나는 秋風에 無限한 느낌을 받아 이 노래를 지은 것이다.
  咫尺東西에서 만나볼 길이 아주 끊기어서 作者로 하여금 「秦藏에 감춘 狐裘, 盜賊할 길 바이 없고, 金籠에 잠긴 鸚鵡, 다시 戲弄 어려워라」의 絶望的 感歎을 吐露하게 하던 監司의 色靡로도 이 노래의 感動을 받아서 彩鳳(김채봉)을 도로 作者에게 許還하였다 하니 이 노래의 傑作에 對한 評價는 이것으로써 論定하여도 좋겠다.
  「어젯밤 불던 바람, 金聲이 完然하다, 孤枕單衾에, 相思夢 훌쩍 깨어, 竹窓을 半開하고, 漠漠히 앉아보니, 萬里長空에, 夏雲이 흩어지고, 千年江山에 찬 기운이 새로워라, 心思도 悵然한데, 物色도 有感하다. 庭樹에 부는 바람, 離恨을 알리는 듯, 砌菊에 맺힌 이슬, 別淚를 머금은 듯, 殘柳南郊에, 春鶯이 已歸하고, 素月東嶺에, 秋猿이 슬피 운다, 임 어이고 썩은 肝腸, 하마터면 끊기리라, 三春에 즐기던 일, 예런가 꿈이런가, 細雨紗窓 寥寂한데, 洽洽히 깊은 情과, 夜月三更 私語時에, 百年 살자 굳은 언약, 丹峰이 높고 높고, 浿水가 깊고 깊어, 무너지기 意外어던, 끊어질 줄 斟酌하리. 良辰에 多魔함은, 예로부터 있건마는, 地邇人遐는, 造物의 탓이로다. 忽然히 이는 秋風, 花叢을 搖動하니, 雄蜂雌蝶이, 哀然히 흩단 말가, 秦藏에 감춘 狐裘, 盜賊할 길 바이 없고, 金籠에 잠긴 鸚鵡, 다시 戲弄 어려워라. 咫尺東西 千里되어, 바라보기 杳然하고, 銀河鵲橋 끊겼으니, 건너갈 길 아득하다. 人情이 끊겼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姿態擧動, 耳目에 每様 있어, 못 보아 病이 되고, 못 잊어 원수로다, 千愁萬恨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어라, 하물며 이는 秋風, 別恨을 부쳐내니, 눈앞의 온갖 것이, 전혀 다 시름이라. 바람 앞에 지는 잎과, 풀 속에 우는 짐승, 無心히 듣게 되면, 關係할 바 없건마는, 悠悠別恨 懇切한데, 소리소리 愁聲이라. 아이야 술 부어라. 幸여나 寬懷할까, 盞같이 가득 부어, 醉토록 먹은 後에, 夕陽石路로 乙密臺 올라가니, 風光은 예와 달라, 萬物이 蕭然하다. 綾羅島 衰한 버들, 성긴 가지 蕭瑟하고, 錦繡峰 꽃 진 나무에, 霜葉이 飄拂하다. 人情이 變化함은, 測量하여 이를 건가, 可憐히 눈을 들어, 遠迫을 살펴보니, 龍山의 늦은 景은, 蒼鬱함이 心思같고, 馬灘의 너른 물은, 蕩漾함이 懷抱같다. 普通門 送客亭에 離別 아껴 서러 마라, 世上離別 男女中에, 날 같은 이 또 있을까, 수레 문에 뜨는 배는, 向하는바 어디메요, 萬端愁懷 실은 後에, 千里弱水 건너가서, 우리 님 계신 곳에, 수이수이 풀고지고, 城頭의 늦은 景은, 견디어 못 볼러라. 長歎短吁로, 曲欄을 의지터니, 바람결에 오는 鍾聲, 묻노니 어느 절고, 草鞋를 떨쳐 신고, 석거이 일어걸어, 永明寺 찾아가서, 중더러 묻는 말이, 人間離別 내신 부처, 어느 塔上 앉았는고, 임 그린 一片丹心, 佛前에 發願하여, 임을 다시 못볼망정, 차라리 죽어져서, 白骨은 塵土되나, 靈魂은 높이 날아, 임 앉으신 欄干 앞에, 어루와 보리로다. 다시금 생각하니, 이 또한 天數로다. 竹杖을 고쳐 짚고, 浮碧樓 올라가니, 들밖에 點친 뫼는, 구름 속에 솟아 있고, 淸江의 맑은 물은, 秋天과 한 빛이라. 이윽고 돋는 달이, 皎皎히 빛을 펴니, 그린 相思 支離한 中, 玉面인 듯 반겼더니, 어이한 뜬 구름이, 光明을 가리웠네. 어화 이 어인 일고, 造物의 탓이로다, 언제나 구름 걷어, 밝은 빛 다시 볼꼬, 宋之問(송지문)의 明河篇을, 깊이 읊어 徘徊하니, 寒露霜風에 醉한 술 다 깨었다. 落葉을 깔고 앉아, 金樽을 다시 열고, 一杯一杯 復一杯에, 䑃朧히 醉케 먹고, 짧은 歎息 긴 한숨에, 발을 밀어 일어 걸어, 定向없이 가는 길에, 愛蓮堂 드단 말가. 芙蓉을 꺾어 들고, 有情히 돌아보니, 水邊에 피는 꽃은, 임이 나를 반기는 듯, 葉間에 듣는 비는, 내 事情 아리는 듯, 兩兩白鷗는 紅蓼에 往來하고, 雙雙鴛鴦은, 綠水에 浮沈이라, 이 人生 可憐함이 微物만 못하도다. 忽然히 다 떨치고, 白馬에 채를 던져, 山이냐 구름이야, 定處없이 가자하니, 내 마음이 현황하여, 갈 길이 아득하다. 噓唏歎息하고, 草廬로 돌아오니, 간 곳마다 보는 物色, 어이 그리 心亂한고, 울 밑에 피는 黃菊, 담 안에 섰는 丹楓, 임과 함께 볼 양이면, 景槪롭다 하련마는, 陶陶心思 鬱鬱한데 도리어 愁心이라, 無情歲月 如流하여, 나날이 깊어간다. 가기는 철을 찾아, 九秋에 늦어서라. 牀아래 우는 蟋蟀, 너는 무슨 나를 미워, 지는 달 새는 밤에, 暫時도 끊지 안고, 긴 소리 짧은 소리, 경경히 슬피 울어, 다 썩고 남은 肝腸, 어이 마저 썩이는고. 隣鷄가 더디 우니, 밤도 자못 길어서라, 霜風에 놀란 鴻雁, 雲霄에 홀로 떠서, 嗈嗈한 긴 소리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春風花月 저문 날에, 杜鵑聲도 느끼거든, 梧桐秋夜 斷腸時에, 차마 어이 들을건가, 네 아무리 微物이나, 事情은 날과 같다. 一幅花牋紙에 細細私情 그려내어, 외쳐 이르기를, 이내 事情 가져다가, 月明紗窓 寥寂한데, 임의 앞에 던져주렴, 人非木石이어니, 임도 應當 반기리라. 支離한 이 離別이, 생각사록 끝이 없다, 因緣없어 못 보는가, 有情하여 그리는가, 因緣도 없지 않고 有情도 하건마는, 一城中 함께 있어, 어이 그리 못 보는가. 吳洲明月 밝은 때와, 楚山雲雨 생길 적에, 說盡心中 無限事도, 怳然한 꿈이로다, 無盡長懷 强忍하여, 門을 열고 바라보니, 無心한 뜬 구름이, 끊겼다가 다시 잇네. 우리 님 계신 곳이, 저 구름 아래건만, 오며 가며 두 사이에, 무슨 弱水 막혔관대, 兩處가 漠漠하여, 消息조차 끊단 말가, 둘 데 없는 이내 心思, 어데다가 支接할꼬, 壁上에 걸린 梧桐, 강인하여 내려 놓고, 鳳求凰한 曲調를, 한숨 섞여 길이 타니, 餘音이 嫋嫋하여, 怨하는 듯 恨하는 듯, 相如(사마상여)의 옛 曲調는, 依然히 있다마는, 卓文君(탁문군)의 맑은 知音, 심심히 자취 없다. 缺然한 이 離別이, 느낄 일도 하구 많다. 前生此生 무슨 罪로, 우리 둘이 생겨나서, 人間百年 얼마관대, 各在東西 그리는고, 皇天厚土 이 뜻 알아, 離別없이 願이로다. 秦始皇 焚詩書할 제, 어느 틈에 숨었다가, 至今까지 流傳하여, 나의 一身 病이 된고, 首陽梅月 흠석 갈아, 黃毛筆 덥석 풀어, 月梅草竹 그리기는 옳건마는, 明月紗窓 앞에, 나는 무엇 그리는고, 相思 두 글字는, 날 爲하여 지었는가, 窓外月 嶺頭雲, 임 계신 곳 비취건만, 心中所懷 眼前愁는, 나 혼자뿐이로다, 가도록 心亂하여, 해는 어이 쉬이 가노, 잘 새는 깃을 찾아, 무리무리 돌아들고, 夜色은 滄茫하여, 먼 나무가 熹微하다, 耿耿히 흐르는 빛, 節期찾는 螢火로다. 寂寞한 빈 房안에, 울적이 홀로 앉아, 지난 일 다 풀치고, 오는 시름 생각하니, 山 밖의 泰山이요. 물 밖의 大海로다, 九疑山 구름같이, 바라도록 杳然하다, 長長秋夜 긴긴 밤에, 차마 어이 견딜쏘냐. 아무쪼록 잠을 들어, 꿈에나 보자 하니, 鴛鴦枕 서리 차고, 翡翠衾 冷落한데, 皓月殘燈에, 꿈 이루기 어려워라. 一柄殘燭 벗을 삼아, 轉輾不寐 앉았으니, 劍閣嶺 새벽달에, 五更인 줄 깨닫겠다. 앉았다가 누었다가, 다시금 일어 앉아, 이리 헤고 저리 헤니, 아마도 원수로다. 苦盡甘來는 그윽히 있건마는, 明天이 도우시고, 鬼神이 ●意하여, 藍橋의 굳센 풀로, 月姥繩 다시 이어, 瀟湘江 어느 날에, 故人을 다시 맞아, 봄바람 가을 달에, 거울같이 마주 앉아, 이런 일 옛말 삼아, 情懷中에 넣어 두고, 有子生女하여, 限없이 즐기다가, 人心이 狡詐하여, 어느 누가 是非커던, 秋風 五湖 저문 날에, 錦帆을 높이 달고, 가다가 아무데나, 山좋고 물 좋은데, 子坐午向 제 法으로, 數間草屋 지은 後에, 石田을 깊이 갈아, 草食을 먹을망정, 百年이 다 盡토록, 떠나 살지 마자하더니, 相思로 困한 몸이, 牀위에 暫間 누어, 죽은 듯이 잠을 드니, 蝴蝶이 나를 몰아, 그리던 우리 님을 꿈 가운데 暫間 만나, 悲喜가 交集하여, 別來事情 다 못하여, 誰家玉笛이, 秋風에 섞여 불어, 悽凉한 한 소리로, 잠든 나를 깨우누나. 두어라 離散이 有數하니, 後日 다시 볼까 하노라.」

五. 宮廷用의 樂歌
  李朝 時代에 있어 宮廷用의 樂歌는 高麗의 그것을 承襲하였다 함은 括論에서 이미 論及하였다. 그러나 그 初期에는 創作品이 많이 나오게 되었으니, 말할 것 같으면 太宗朝에는 河崙(하륜)의 「覲天庭之樂」·「受明命之樂」이 있었으며, 世宗朝에는 會禮宴에 쓰는 「降安之樂」·「休安之樂」·「受寶籙之樂」·「文明之曲」, 宴饗樂에 쓰는 卞季良(변계량)의 「華山別曲」, 「鶴蓮花臺舞」에 쓰는 尹淮(윤회)의 「鳳凰吟」, 廟祭에 쓰는 納氏歌, 朝祭와 公私燕享에 쓰는 『龍飛御天歌』가 있었다.
  「華山別曲」의 위에 있는 樂歌들은 다 漢文 四言體로 簡短하게 된 것인데, 여기에서 提示하려고 아니하며, 다만 鳳凰吟으로부터 아래의 것을 次第로 들려고 한다.

「鳳凰吟」
  尹淮(윤회)는 世宗朝의 文臣인데, 「處容歌」의 擬作으로서 이 노래를 이루었으니 그는 일찍부터 歌詞를 지을만한 素養이 있었던 모양이다. 「處容歌」는 高麗樂府에서부터 이미 採用하던 것인데, 李朝 世宗의 때에 와서 그것을 巫女들이 疫神을 물리치는 때에 쓰던 것이라 하여 畢竟에 斥逐하고 그 代에 「鳳凰吟」을 지어 「鶴蓮花臺舞」의 呈才歌詞로 쓰게 하였다.
  「山河千里固, 佳氣鬱葱葱, 金殿九重明日月, 群臣千載會雲龍, 熙熙世俗春臺上, 濟濟群臣壽域中, 濟濟群臣壽域中, 高厚無私未遑臻, 祝堯皆是太平人, 祝堯皆是太平人, 熾而昌, 禮樂光華邁漢唐.
金枝秀出千年聖, 綿瓞增隆萬歲基, 邦家累慶超前古, 天地同和卽此時, 天地同和卽此時, 豫遊淸曉玉輿來, 人頌南山薦壽杯, 人頌南山薦壽杯, 配于京, 十二瓊樓帶主城.
道與乾坤合, 恩隨雨露新, 千箱登黍稌, 庶彙荷陶勻, 帝錫元符揚瑞命, 滄溟重潤月重輪, 滄溟重潤月重輪, 風流楊柳舞輕盈, 自是豊年有笑聲, 自是豊年有笑聲, 克配天, 聖子神孫億萬年.
山河千里壯, 宮殿五雲高, 輝輝瑞日鳴螭陛, 冉冉香煙繞袞袍, 積德百年興禮樂, 垂衣一代煥文章, 雍熙至治邁漢唐, 慶雲淚處仰重瞳, 一曲南薰解慍風, 鳳凰來舞九成中, 大有年, 禾稼與雲連, 紅腐之粟貫杇錢.
陰陽順軌雨露均, 萬家煙火太平民, 撫五辰, 聖壽無疆千萬春.」

「納氏歌」
  이 노래는 納哈出을 戰勝한 李太祖(이성계)의 偉功을 讚美한 것인데, 作者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世宗朝의 音樂大家인 蘭溪 朴堧(난계 박연)이 雅樂을 整頓한 그 後에 나온 作品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노래는 廟祭하는 때, 干戚舞·弓矢舞·槍劍舞에 쓰기로 되었고, 그런 祭典에는 반드시 雅樂을 쓰는 까닭이다.
  「納氏恃雄强, 入寇東北方, 縱傲誇以力, 銳鋒不可當, 我后鼓勇氣, 挺身衝心胸, 一箭殺偏裨, 再射及魁戎, 裏槍不可救, 追奔星火馳, 風聲固可畏, 鶴唳亦堪疑, 卓矣莫敢當, 東方亦無虞, 功成在此擧, 垂之千萬秋.」

『龍飛御天歌』
  世宗 二十七年에 權踶(권제)·鄭麟趾(정인지)·安止(안지) 等이 創業의 盛德神功을 讚頌하며, 後世子孫의 繼述保守를 規戒하여 正音(훈민정음)本과 漢字本으로 一百二十五章의 노래를 撰進하니, 이것이 이른바 『龍飛御天歌』이었다. 그리고 崔恒(최항)·申叔舟(신숙주)·李賢老(이현로)·成三問(성삼문)·李塏(이개)·辛永孫(신영손) 等이 거기에 註解를 加하여 一般觀覽에 便利를 주게 하였다.
  이것을 朝祭의 樂歌로도 쓰게 하며 또는 公私燕享의 樂歌로도 쓰게 하였다. 그런데 公私燕享에는 「醉豊享」·「致和平」·「鳳來儀」 等의 樂歌로 나누었다.
1. 「醉豊享」에는 海東章·根深章·源遠章·昔周章·今我章·狄人章·野人章·千歲章·子子章·嗚呼章·漆沮章·商德章·太子章·奉天章·一夫章·虞芮章·五年章·獻言章·聖孫章·楊子章·逃亡章·赤爵章.
2. 「致和平」에는 『龍飛御天歌』 全篇.
3. 「鳳來儀」에는 海東章·根深章·昔周章·今我章·狄人章·野人章·千歲章·子子章·嗚呼章.
  그런데 여기에는 複雜을 避하여 그 原本의 表記法대로 몇 章만을 들려고 한다. 그것은 『正音(훈민정음)』를 創制한 그 當時의 記法이 이렇다는 意味에서 나온 것이었다.
海東 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
海東 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
右 第一章
불휘 기픈 남 매 아니뮐 곶 됴코 여름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출 내히 이러 바랭 가니
根深之木 風亦不抗 有灼其華 有蕡其實
源深之水 早亦不渴 流斯爲川 于海必達
右 第二章
뒤헤를 모진도 알 어드 길헤 업던 번개를 하이 발기시니
뒤헤 모진 쥼 알 기픈 모새 열 어르믈 하이 구티시니
後有猾賊 前有暗程 有爆之電 天爲之明
後有猛獸 前有深淵 有溥之氷 天爲之堅
右 第十九章
애 자거 밀므리 사리로 나거아 니이다
셤안희 자싫제 한비 사리로 뷔어아 니이다
宿于沙江 不潮三日 迨其出矣 江沙乃沒
宿于島嶼 大雨三日 迨其空矣 島嶼乃沒
右 第六十七章
 아니 말이샤 밀므를 마시니 하히 부러 뵈시니
한바 아니 그치샤 나므를 외오시니 하히 부러 우일 뵈시니
不禁江沙 迺防潮濤 彼蒼者天 示人孔昭
不止霖雨 迺迴潢洋 彼蒼者天 示我孔昭
右 第六十八章
마지막으로 여기에 添付할 것은 世祖 四年에 지은 學祖(학조)大師의 『月印千江之曲』이란 것이다. 이것이 만일 觀音讚처럼 宮廷用으로 되었더라면 排他에 成習한 儒臣輩의 諫爭으로서 必然 斥逐을 當하여 或 埋沒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月印釋譜』가 後世에 傳하였으니 그 內容과 또 그 表記法의 어떠함을 보이기 爲하여 그 一端만을 들어 둔다.

『月印千江之曲』
「부테 百億억世셰界계옝 化황身신야 敎굫化하샤미 리 즈믄 매 비최요미 니라」
  이것을 現行의 記法대로 적는다면
「부처 百億世界에 化身하여 敎化하심이 달이 즈믄 가름에 빛외임과 같으니라」
  이 노래와 『龍飛御天歌』에서 正音(훈민정음)字의 左傍에 點을 加한 것은 四聲의 標符인데, 一點은 去聲, 二點은 上聲, 點이 없으면 平聲, 入聲은 點이 같으나 促急한 것뿐이다. 그렇지마는 그 後來에는 四聲을 區別할 必要가 없이 되었다.

六. 時調
  다시 말하거니와 李朝 時代는 歌曲의 全盛期로 보는데, 特히 時調에 있어는 더욱 그러하다. 君主로부터 名公巨卿, 學者文人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吟詠하지 아니한 이가 거의 없으리만큼 그렇게 上層階級의 사이에 盛行風으로 되었었다. 그뿐인가. 女子界에서도 作家가 많이 있어서 善山 朴香娘(박향낭)의 「山有歌」, 咸安 沙斤驛 月明(월명)의 「望東京歌」가 나오는 그 一方에 笑春風(소춘풍)·黃眞娘(황진이)과 같은 時調作家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肅宗 때에는 金聖器(김성기)·金裕器(김유기)·朱義橫(주의횡) 等 時調名唱이 輩出하였으니 그것은 當時의 風潮라, 偶然한 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時調는 確實히 上層階級의 專有物이다. 그렇다 하여 文藝上 價値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價値를 寄與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括論에서 그 調를 따라서 大體를 提示하였음에, 여기에는 다만 몇 首의 노래를 들어두겠다.
1. 孟思誠(맹사성)의 노래
「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興이 절로 난다. 濁醪溪邊에 錦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閑暇하옴도, 亦君恩이삿다.」
2. 卞季良(변계량)의 노래
「治天下 五十年에 不知왜라 天下事를, 億兆蒼生이, 戴己를 願하느냐, 康衢에 聞童謠하니, 太平인가 하노라.」
  孟思誠(맹사성)과 卞季良(변계량)은 李太祖(이성계)와 함께 王氏를 臣事하다가 突然히 變節하여 李氏(이성계)를 推戴한 것이었다. 그리고 富貴를 누리는 것이 너무도 滿足하여 君恩과 太平을 노래하였겠다.
  雪中梅(설중매)는 그 當時에 賤視하는 妓女로되 그들의 變節을 嘲笑하였다. 말한다면
  「李太祖(이성계)가 開國한 처음에 政府諸臣에게 宴을 賜할 때, 雪中梅(설중매)가 行酒하게 되었다. 그 席上에서 政丞 하나가 醉中에 戲言하되 들은즉 네가 東家에서 朝食하고 西家에서 暮宿한다 하니, 또한 老夫와 薦枕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雪中梅(설중매)가 그 말에 應하여 東家食, 西家宿하는 賤軀로서 事王氏, 事李氏하는 政丞을 모시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아니리오 하였다. 그러니까 政丞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머리를 드리우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五百年奇譚』) 孟·卞(맹사성·변계량) 兩人도 勿論, 이 宴席에 參與하였을 터인데, 만일 沒廉恥漢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어찌 되었을까?
3. 朴樹年(박팽년)의 노래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夜光明月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向한 一片丹心이야, 變할 줄이 있으랴?」
4. 李塏(이개)의 노래
  「窓 안에 켜는 燭불, 누구와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저 燭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더라.」
  朴彭年(박팽년)·李塏(이개)는 成三問(성삼문)·河緯地(하위지)·柳誠源(유성원)·兪應孚(유응부)로 더불어 端宗의 位를 謀復하다가 誅刑를 當하였는데, 後世에 이른바 死六臣이 곧 그들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文宗의 申托을 받고서 幼主 端宗을 輔翼하였다. 그런데 端宗이 그 位를 首陽大君(世祖)에게 빼앗기고 壽康宮에 退處하게 되니 그 때에 悲憤慷慨한 이 노래들이 나온듯하다.
5. 李元翼(이원익)의 노래
  「綠楊이 千萬絲인들, 가는 春風 매어 두며, 貪花蜂蝶인들, 지는 꽃 어이 하리, 아무리 사랑이 重한들, 가는 님 어이하리.」
  光海가 奸臣 李爾瞻(이이첨) 等을 信任하여 國政이 날로 昏亂하니 그것이 仁祖로 하여금 反正을 遂行하게 하였다. 그러나 新舊兩君에게 對한 人心의 向背는 李元翼(이원익) 一人에게 달렸던 것이다. 그래 元翼(이원익)이 光海를 拜辭하고, 仁祖에게로 돌아오셨으니, 여기로서 이 노래가 생기어진 듯하다.
6. 笑春風(소춘풍)의 노래
  「梨花雨 흐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括論에 이미 記入되었음)
  笑香風(소춘풍)은 永興名妓로서 成宗이 群臣에게 宴을 賜할 대에 行酒하게 되었다. 領相과 兵判에게 술을 勸하면서 노래를 지어 부르다가 吏判에게 이르러서도 노래를 또한 지어 부르니
  「齊는 大國이요, 楚亦大國이라. 小小한 藤國이, 齊·楚에 間하였으니, 何事何否리오, 事齊事楚함이 진실로 好事로다」가 곧 그것이다.
  이 노래는 그들이 各히 戲言으로서 薦枕을 要하는 그 끝에 곧 應答한 것으로서 笑春風(소춘풍)의 名價가 全國을 傾動하였다.(『五百年奇譚』)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李朝 五百年間의 屈辱的 外交,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事大主義가 切實히 그리어진 것을 보게 된다.
7. 黃眞娘(황진이)의 노래
  「靑山裏 碧溪水야, 쉬이 간다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감이」
  黃眞娘(황진이)은 그 性이 倜儻하여 男子에 뒤지지 아니하고, 琴·歌·詩에 다 能하여 항상 山水間에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 當時에 花潭先生[徐敬德(화담 서경덕)]과 知足禪師(지족선사)는 道通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娘(황진이)이 春意로써 그들을 試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知足(지족)은 마침내 十年工夫 南無阿彌陀佛이라는 웃음거리를 世上에 남기게 되었지만, 花潭(화담 서경덕)의 마음은 能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娘(황진이)이 그의 道高함을 크게 欽服하면서 先生과 나와 朴淵瀑布는 松都의 三絶이라는 豪語를 吐하였다.(『五百年奇譚』)
  따라서 그의 數多한 作品 中에서 「初月」이란 詩 一首를 들어 두겠다.
  「누가 玉을 찍어내어, 織女 얼게 만드신고? 牽牛 가고 안 오시니, 虛空에다 던졌고나!」
  朴香娘(박향낭)의 山有花歌(메나리)는 다만 漢譯으로 남기어서
  「天何高遠, 地何曠漠, 天地雖大, 一身難托, 寧投此淵, 葬於魚腹」이란 그것이 있을 뿐이오. 또는 「節如霜雪義如山, 不去亦難去亦難, 回首洛東江水碧, 此身投處此心閑」이란 後人의 詩가 傳하였으며, 月明(월명)의 「望東京歌」는 傳하지 못하고 그와 그의 愛夫이었던 東京商人의 先後情死를 哀憐히 여기면서 지었다는 「月明塜上月惟明, 環佩無聲蜀魄鳴, 此是人間腸斷處, 街兒莫唱望東京」이란 後人의 詩가 只今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七. 「愁心歌」
  「愁心歌」가 上層階級의 專有物인 時調를 敵對로 하여 생겼다는 것은 括論에서 詳細히 말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그 調를 따라서 多少의 例를 더 들어 두겠다.
ㄱ. 平調(一名은 「긴 愁心歌」)
1. 人生 한번 죽어지면 만수청산의 운무로구나 아니 놀고 아니 쓰지는 못하리로구나.
2. 江草日日에 喚愁生하니, 江풀만 푸르러도 고향생각이 간절해 나 못 살리로다.
3. 山中은 險峻한데 귀곡성은 왜 이다지 슬피 울어 사람의 심사를 공연히 수심케 하느냐?
ㄴ. 羽調(一名은 「寧邊歌」 또는 「질림」)
1. 梧桐의 복판이로구나야 아하 거문고로다, 자동 다동 쓸기동 타면서 놀아만 보세.
寧邊의 藥山의 東臺야 하아 하아 에헤이야 아 부디 平安히 너 잘 있거라, 나도 明年 陽春은 佳節로 또 다시 보자.
2. 아사라 말렴은 아하 아하 사람의 人情에 괄시를 네 그리 말아라.
南山을 바라다 보니 야하 야하 에헤이야하 진달花草가 다 滿發한데 웃동 짧고 아래 아랫동 팡파짐한 아이들아 네가 날 살려라.
3. 노자-노자 노자 아하 아하 젊어서 청춘에 마음대로만 놉시다,
달아- 달아 달아 아하 아하 에헤이야아 半空中天에 뚜렷한 달아 님과 나와 만나던 窓前으로만 비추어 주게.
4. 세월아 네월아 아하 아하 오고 가지를 말아라, 우리 청춘소년들 다 늙는구나.
子規야 우지를 말아라 아하 아하 에헤이야하 울려거던 너 혼자 울겠지 旅館寒燈 잠드신 나그네를 왜 깨우느냐.
ㄷ. 編(一名은 「자진 愁心歌」 또는 엮음)
1. 乾坤이 有意하여 男子를 내이시고 무정세월 如流하여 우리 靑春을 다 늙히는구나. 大丈夫 늙을진대 옛날로 두고 말하면 소자첨·도연명·孔(공자)·孟子(맹자) 같은 분네들은 죽어 死後에 遺跡이나 있건마는 朝露같은 우리 人生은 아차 한번 失手하면 만수장림에 구름안개로구나.
2. 바람 불어 휘어진 나무가 봄이 온다고 늘어를 나며 임으로 말미암아 병든 내 몸에 藥을 쓴들 藥效驗이 있단 말가? 牛黃·熊膽으로 집을 짓고 蘇合丸·淸心丸으로 안토칠하고 人蔘으로 구들 놓고 鹿茸으로 불을 때며, 三神山 不老草로 미음을 다려 먹을지라도 이내 病 낫기는 만무로구나. 널로 하여 병난 몸이 扁鵲(편작)같은 名醫라도 막無可奈何로다, 생각을 하면 네 花容 그리워 나 못 살겠구나.
3. 나는 진정 말이지 三角山 居하던 범나비로 長安萬戶를 내려다 보니 五色이 玲瓏하기로 花開當節인가 春興을 못 이겨 내려를 왔다가 돌아가던 回路에 이 몸이 앗차 失手되어 仁王山 蛛絲에나 걸렸구나 에라 놓아라 못 놓겠구나 열 발가락 찌어저도 나 못 놓겠네.
4. 七月이라 初七日날에 牽牛織女가 그리워 살다가 烏鵲橋로 越江하여 一年에 一次를 相逢이 되고, 黑海바다의 밀물이라 하루 두 때는 潮水로구나, 나무라도 향자목은 陰陽을 分하여 마주 나 섰고 돌이라도 망두석은 左右를 따라서 마주를 섰는데 우리의 情든 님은 한 城中에 있건마는 어이 그리 못보단 말가? 千里弱水에 萬里長城이 두른 바 아니오. 三千 구비峰에 蜀道之難이 가리웠더냐 晝夜로 임 消息 끊어져서 나 못살겠네.
5. 데려 가거라 끌어 가거라 나를 두고선 못 가느니라. 女必은 從夫랬으니 그저 두고는 못 가느니라, 나를 버리고 가려 하거던 靑龍刀 잘 드는 칼로 腰斬이라도 하고서 가쇼, 못 가느니라 못 가느니라, 나를 버리고 못 가느니라 나를 버리고 가려 하거던 洪爐火 모진 불에 사룰터이면 사루고 가쇼, 못 가느니라 못 가느니라, 그저 두고는 못 가느니라 그저 두고는 못 가느니라 그저 두고서 가려 하거던 廬山瀑布 흐르는 물에 던지기라도 하고 가쇼,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五里를 못 가서 발病이 나고 十里를 못 가서 앉은뱅이 되리라, 참으로 임 생각 그리워서 나 못 살겠네.

八. 音樂과 舞踊
1. 音樂
  李朝 五百年間에 藝術新興의 時代는 곧 世宗의 時代이었다. 『訓民正音』도 이 時代에, 銅活字도 이 時代에, 測雨器 等 天文儀器도 이 時代에, 圖書의 撰輯도 이 時代에 그 大成의 功을 告하였다. 이러한 大功을 이룸에 있어 世宗만 있고 作者가 없어도 그 時代의 形便으로 可能하지 못하였을 것이요, 作者만 있고 世宗이 없어도 그 時代의 形便으로 또한 可能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世宗과 作者가 魚水際遇의 好機運을 얻게 된 것이 實로 千古의 稀事라 할 것이다. 그 作者의 中에 朴堧(박연)은 特히 音樂大家로서 空前의 英才를 發揮하였다. 만일 世宗으로 하여금 紅頭賊에게 埋沒되었던 池中 數枚의 磬을 얻지 못하였더면 그 英才를 어떻게 發揮하였을까? 夷則一枚에 限墨이 오히려 있어서 音律에 協지 못하는 것을 能히 發見하는 朴堧(박연)의 聰이 아니더면 그 雅樂을 어떻게 制定하였을까? 그 때에 世宗과 朴堧(박연)이 있다 하더라도 海州의 秬黍와 南陽의 磬石이 産生되지 않았더면 그 業을 어떻게 成就하였을까? 또는 秬黍와 磬石이 있다 하더라도 앉으나 누우나 心胸의 사이에 그 手를 交하여서 戞擊의 形을 試하며, 口吻의 가운데에 그 喉를 轉하여서 律呂의 聲을 驗하는 朴堧(박연)의 十餘年 積功이 아니더면 그 樂制를 어떻게 完成하였을까? 이와 저가 一時에 竝出한 것이 稀事 中의 稀事라 하겠다.
1) 樂制
  禮曹의 아래에 掌樂院이 있어 提調가 그것을 主하고 掌樂院의 아래에 典樂署가 있어 典樂이 그것을 主하고 典樂署의 아래에 左坊과 右坊이 있어 樂師가 그것을 主한다.
  樂人에는 樂生과 樂工의 區別이 있는데, 樂生을 試取함에는 雅樂中의 三成 및 登歌·文武舞를 主로 하고 樂工을 試取함에는 唐樂과 鄕樂을 主로 한다.
  樂人의 數는 大典通編에 據하면 左坊에 樂生 一百九十五人, 右坊에 樂師 五人, 樂工 四百四十一人이요, 特히 進宴時에는 各道로서 選上女妓 五十二人(이것은 隨時加減이 있음), 樂師·樂生·樂工 또 그 長番仕滿者까지를 竝하면 一千二百人이었다.
  左坊의 本業은 編鍾·編磬·琴·瑟·簫·笙·塤·篪·籥·篴 等의 各 十四宮인데, 그 十四宮은 곧 雅樂의 黃鍾·大呂·大簇·夾鍾·姑洗·仲呂·蕤寰·林鍾·夷則·南呂·應鍾宮과 送神의 黃鍾·夾鍾·林鍾宮이오. 그 밖에 또 歌曲 四十一章을 兼業하나니, 그 四十一章은 곧 社稷 四, 風雲雷雨 五, 文廟 十, 先農 四, 先春 三, 雩祀 八, 纛所 二이오.
  右坊의 本業은 唐樂의 唐觱篥·方響·唐笛·洞簫·唐琵琶·牙箏 等의 各 四十六聲이니, 그 四十六聲은 곧 宗廟祭樂 二十二, 靖東方典·維皇曲·洛陽春·步虛子 各一, 與民樂慢令 各十이오. 그 밖에 또 鄕琵琶 十一聲(登歌의 奠幣로부터 繹成에까지), 太平簫 三聲(昭武·奮雄·永觀), 塤篪 各三聲(熙文·昭武·順應), 笙 四聲(熙文·昭武·順應·與民樂令初章)을 兼業하고,
  鄕樂의 本業은 大笒·玄琴·奚琴·伽倻笒·杖鼓 各 四十六聲(唐樂과 同함)이요, 그 밖에 또 編鍾·編磬, 二十二聲(迎神으로부터 送神까지), 歌曲 二十七章(迎神으로부터 送神까지), 舞二變(文舞·武舞)를 兼業한다.
2. 樂器
一. 俗樂部
  朴堧(박연)이 樂制를 定할 때에 鄕樂과 唐樂을 竝하여 俗樂部라 하였다.
  鄕樂器에는 拍板·大鼓·玄琴·鄕琵琶·伽倻琴·大笒·中笒·小笒·鄕觱篥이 있다.
  唐樂器에는 方響·拍·敎坊鼓·月琴·杖鼓·唐琵琶·奚琴·大箏·牙箏·唐笛·唐觱篥·洞簫·太平簫가 있다.
ㄱ. 金의 屬
  方響. 이것은 鋼鐵로 만든 것인데 그 數는 十六이요, 그 十六聲은 十二律과 四淸聲에 分配하였다.
  響鈸. 이것은 鍮鐵로 만든 것인데 每個人이 左右手에 各 하나씩을 쥐고서 마주 친다.
  銅鈸. 이것은 鍮鐵로 만든 것인데 僧家의 鳴鈸보다 작은 것이다.
ㄴ. 絲의 屬
  玄琴. 이것은 方絃으로 된 것인데, 그 調에는 樂時調平調·羽調平調·邈調·樂時調界面調·嗺子調·啄木調 等이 있다.
  伽倻琴. 이것은 十二絃으로 된 것이다.
  月琴. 이것은 五鉉으로 된 것이다.
  奚琴. 이것은 奚契丹의 樂器이다.
  唐琵琶. 이것은 本히 胡樂인데, 柱는 十二요, 絃은 四로 되었고, 그 調에는 平調·界面調·上調·下調가 있다.
  鄕琵琶. 이것은 新羅 때에 비롯한 것인데, 그 制는 唐琵琶와 비슷하다. 그 調에는 樂時調平調·羽調·八調·邈調·河臨調가 있다.
大箏·牙箏·戞箏.
  大箏은 그 制가 瑟과 같은데, 다만 그 體가 작고 그 絃은 十五이며,
  雅箏은 그 制는 大箏과 같으나 다만 그 體가 더 작고 그 絃은 七이며,
  戞箏은 黜檀木에 松脂를 塗하여서 軋하는 것이다.
ㄷ. 竹의 屬
  唐笛. 이것은 年久한 黃竹으로 만드는데, 그 孔은 八이다.
  大笒·中笒·小笒. 이것은 新羅의 樂器에서 이미 말하였다.
  洞簫. 洞은 通이니 底面이 없고 上下가 서로 通하였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年久한 黃竹으로 만드는데 그 孔의 數는 九이다.
  唐觱篥. 이것의 一名은 笳管이라 하는데, 本히 羌胡龜玆의 樂이다. 그 前에는 九孔이었으나 至今은 八孔을 두었다.
  太平簫. 이것은 女眞의 樂器인데, 그 孔의 數는 八(上下端까지 合하여)이었다. 一說에 依하면 崔潤德(최윤덕)이 野人을 征服하던 그 때에 이 樂器가 流入되었다고 하나 이것에 對한 鄭夢周(정몽주)의 詩가 있으니 그 由來가 이미 오램을 可히 알겠다. 처음에는 이것을 純全히 軍樂에만 使用하였는데, 李朝에 이르러는 定大業의 樂에 쓰게 되고 또는 居士寺黨의 行樂에도 쓰이었다. 鄭夢周(정몽주)의 詩:
  「鳳管粧金口, 淸商自此生, 一聲高撼月, 六孔巧鑽星, 止作嚴軍令, 低昂動客情, 想看征北日, 吹徹虜王庭.」
ㄹ. 革의屬
  節鼓. 이것은 한갓 樂을 興止함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樂을 奏하는 때에도 間間히 친다.
  大鼓·小鼓. 이것은 木桶에다가 그 面에 牛皮를 씌운 것이다.
  杖鼓. 이것은 細腰鼓인데, 右는 杖으로써 치고 左는 手로써 拍하므로 그 이름을 杖鼓라 한다.
二. 雅樂部
ㄱ. 金의 屬
  編鍾·特鍾. 이것은 銅鐵에 鑞鐵을 和하여서 鑄成(錞·鐲·鐃·鐸의 類도 같음)하였다. 編鍾은 軒架 三面에 그 位가 모두 아홉인데, 그 九架에 各히 十二律의 鍾을 懸하니 그 合數가 一百八顆라, 그것은 本律의 中聲을 갖춘 것이오. 만일 四宮淸聲을 兼한다면 每架에 四顆를 添하느니 그런즉 그 數가 一百四十四顆에 이르며, 祭享에는 倍數를 하여 二百八十八顆가 된다. 그리고 特鍾은 登歌의 樂이 始作하는 때에 쓴다.
  錞. 이것은 文舞가 退하고 武舞가 進入하는 때에 쓴다.
  錿. 이것은 小鉦인데 柄中의 上下가 通하였다.
  鐸. 이것은 大鈴인데 그 舌은 金으로 만들었다.
  鐲. 이것은 자그마한 鍾과 같은데 그 소리가 濁하다.
ㄴ. 石의 屬
  磬. 이것에는 特磬과 編磬이 있는데, 다 南陽의 石으로 만든 것이다. 特磬은 그 소리를 黃鍾律에 들어맞게 한 것이요, 編磬은 黃鍾으로부터 淸夾鍾에 이르기까지 그 數가 十六이 된다.
ㄷ. 絲의 屬
  琴. 舜(순)의 五絃에다가 文王과 武王이 各히 一絃을 더하여 七絃으로 된 그것이다.
  瑟. 이것은 二十五絲으로 된 것이다.
ㄹ. 竹의 屬
  簫. 이것은 海竹으로서 만들었는데, 그 管은 十六이다.
  籥. 이것은 篴과 같이 三孔이 있으나 그보다 짧다.
  管. 이것은 烏竹으로 만들고 그 孔은 六인데 十二月의 音을 衆하여 兩管을 倂하여서 부는 것이다.
  篴. 이것은 黃竹으로 만드는데 前面에 五孔, 後面에 一孔, 尾兩傍에 各 一孔, 모두 八孔이다.
篪. 이것도 黃竹으로 만들고 그 孔은 五個인데 第一孔은 後面에 있다.
ㅁ. 匏의 屬
  笙·竽·和. 十九簧이 있는 것은 大笙이라 하고, 十三簧이 있는 것은 小笙이라 한다. 大笙은 衆管을 匏入한 것이 蜂窠와 같으므로 그 一名을 巢笙이라 하고, 大笙이 唱하면 小笙이 和하므로 小笙의 一名을 和라 하며, 竽는 三十六簧이니 中國工人도 能히 불지 못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그러하여 그것을 巢笙으로써 代한다.
ㅂ. 土의 屬
  塤. 이것은 瓦土로써 만드는데, 그 孔은 六이다.
  相. 이것은 鼙와 같은데, 樂을 輔하고 舞을 節하는 것이다.
  缶. 軒架에 十缶를 쓰는데 그것은 다 瓦土로 만들고 그 厚薄으로써 律을 定한다.
  土鼓. 이것은 瓦로서 그 匡을 만들고 革으로 그 面을 만든다.
ㅅ. 革의 屬
  晉鼓. 晉은 進이니 樂을 進케 한다는 말이요, 또 그것을 懸設하면 懸鼓라 한다.
  雷鼓·靈鼓·路鼓. 이것은 다 軒架에 쓰는 것이다. 天神을 祀함에는 雷鼓三架를 쓰는데, 그것은 馬革으로 만든 六面鼓요, 地祗를 際함에는 靈鼓三架를 쓰는데, 그것은 牛皮로 만든 八面鼓요, 人鬼를 享함에는 路鼓三架를 쓴다.
  雷鼗·靈鼗·路鼗. 鼗는 小鼓라, 거기에 木을 貫하여 柄을 만들고 그 傍에 兩耳가 있다. 雷鼗는 三, 靈鼗은 四, 路鼗는 二, 이것은 다 軒架의 樂이 始作할 때에 搖하는 것이다.
  建鼓. 이것은 殿庭軒架의 朝會宴饗에 쓰는데, 그 槌는 木으로써 만들고 높이 六尺六寸의 柱로서 鼓를 貫하여 植하므로 그 이름을 建鼓라 하였다.
朔鼓. 이것은 倡始의 鼓라, 그러므로 朔이라 하였으니 殿庭軒架에 쓰는 것이다.
  應鼓. 이것은 和終의 鼓라, 그러므로 應이라 하였으니 殿庭軒架에 쓰는 것이다.
ㅇ. 木의 屬
  拊. 堂下의 樂은 鼓로써 始하고 堂上의 樂은 拊로써 始한다.
  柷·止. 柷이 堂上에 있어서, 控하면 止라 하느니 三擊九聲이면 樂이 始作한다.
  敔·籈. 敔는 그 器狀이 伏虎과 같은데 樂을 止함에는 籈三木樂으로써 그 등을 세 번 긁는다.
  應. 그 形이 桶과 같은데 그 底에 連한 椎가 左右로 마주 치면서 柷을 應한다.
  雅. 그 狀이 漆桶과 같은데 舞를 節하는 것이다.
  相. 이것은 武舞가 進할 때에 쓰는 것이다.
  牘. 이것은 竹으로써 만드는 것인데 그 소리로 舞人步를 節한다.
  簴·簨·崇牙·樹羽. 鍾의 植한 것을 簴라 하고, 橫한 것을 簨이라 하고, 簨의 위에 崇牙가 있고, 簴의 위에 業을 設하고 業의 위에 羽를 樹한다.
  우리에게는 樂譜의 記法이 現下의 洋譜와 같이 그렇게 完美치 못하여 年代의 久遠함을 따라서 訛傳 또는 遺失의 歎을 免치 못하였다. 朴堧(박연)의 上疏에 據하면 「우리나라의 樂은 그 器物·制度·歌詞의 曲折이 매우 繁密한데, 예로부터 비록 譜法書本이 있었으나, 訛傳도 되고 遺失도 되어 至今까지 流傳된 것이 겨우 四十餘聲에 지나지 못한지라, 오직 玄琴의 屬으로 말하여도 그 彈法을 알되 그 歌詞를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嗺子·啄木·憂息·多手·喜淸率·居士戀의 類가 곧 그것이오. 또는 譜法은 있으나 急慢의 節을 解得치 못하며 兼하여 그 歌詞를 잃은 것이 있으니 露中仙·賞春光·望春天·樂春天·喜春苑·賞春曲·實相曲·杇木·狗墓等 篇이 곧 그것이오.
  또 伽倻琴의 屬으로 말하여도 嫩竹詞·河臨調는 그 이름만 있을 뿐이요, 그 聲은 傳치 못하였으니 그 따위의 遺亡諸篇을 다 記錄할 수 없는지라. 그러나 생각건대 譜法이 아직까지 있고 그 歌詞의 舊本을 傳寫私藏한 사람이 있을 터인즉 中外에 令하여 옛적의 歌曲을 求하되 詳細한 舊本을 進呈하는 者에게는 官爵으로써 賞하면 舊樂의 缺을 可히 塡補할 것이라, 하고 또 말하되 唐樂은 모두 百有餘篇인데 我朝工人은 다만 三十餘聲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理解치 못하는지라. 그러나 譜法이 分明하니 尋悟할 道가 있는데 다만 緩急의 節을 알지 못하는 것이 恨歎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또 添付할 것은 日本 宮內省 雅樂部長 田邊尙雄(전변상웅)의 朝鮮雅樂 視察談이다. 지난 二十六年인가? 『報知新聞』에 發表한 것인데 그 大要를 든다면 이러하다:
  「朝鮮에는 李王家의 樂과 民間의 樂이 있는데, 李王家의 樂은 매우 高尙하여 世界的 音樂에 列할 것이 많으니, 日本 音樂으로는 到底히 比較할 수도 없다. 雅樂은 宗廟와 文廟의 二種에 分하였는데, 거기에 軒架登歌와 文舞·武舞가 있으며, 俗樂에는 日本 宮中舞樂의 原形인 宮中宴舞樂 및 普通宴舞樂이 있다. 그리고 普通樂에는 劍舞·僧舞 等의 各種이 있는데, 그 中에 壯大한 것은 半鍾 十六式으로 列한 것, 十八坐와 雷鼓·管絃에 屬한 七百餘人의 合奏함과 같은 것은 城內를 떠나서 멀리 北漢山에나 南山에서 들어야 비로소 알맞은 音樂이라 할 만큼 무섭게 宏壯한 것이 있다. 特히 滋味 있는 것은 四尺假量의 큰 虎形인 그릇의 등을 竹策으로써 긁으면 그 소리가 그 宏壯한 中에도 能히 들리어 딱 끊기는 그것이다.
  그런데 李王家의 音樂이 이제 衰亡에 濱하여 樂工은 거의 淘汰되고 그것을 通한 者는 겨우 老樂工 한 사람만 있을 뿐이요, 七百餘人을 要하던 그 音樂은 지금에는 五十餘人으로 減하였다. 音樂은 한번 亡하면 다시 復活할 餘望이 없는 것이다. 이제 興亡의 境에 있는 世界的인 朝鮮雅樂에 對하여 어디에까지 保存의 道를 講하려 하노니 이것은 그대로 亡케 함은 世界의 損失이라」 하였다.
  나는 이 記事를 보고 이런 노래를 불렀다.
  「景福宮 노랫소리, 그침도 그치리라, 管絃은 依舊컨만, 朴堧(박연)은 어디간고? 海外에 彷徨하는 客이, 눈물 겨워하노라.」
三. 大樂前後譜
  世宗 때에 撰한 것은 『大樂前譜』라 하는데 그 目錄에는 雅樂·雅歌. 定大業·醉豊享·致和平·鳳凰吟·與民樂慢·步虛子·洛陽春·前引子·後引子·與民樂絃·與民樂管·步虛子管·桓桓曲·水龍吟·憶吹簫·憂雲峰·小拋毬樂·五雲開瑞朝·會八仙·千年萬歲·折花衆仙會.
  世祖 때에 撰한 것은 『大樂後譜』라 하는데 그 目錄에는
  俗樂. 圜丘樂·創守曲·時用保太平·時用定大業·維皇曲·靖東方曲.
  時用鄕樂. 致和平·醉豊享·鳳凰吟·眞勺·履霜曲·滿殿春·納氏歌·橫殺門·感君恩·西京別曲慢·大業感君恩·翰林別曲·西京別曲·雙花店·步虛子·靈山會相·北殿·動動·井邑·紫霞洞.
  『大典通編』에 據하면 樂工을 取才할 때에 唐樂 三十一調와 鄕樂 三十一調를 試하는데, 唐樂 三十一調는 곧 三眞勺譜·與民樂令·與民樂慢·洛陽春·五雲開瑞朝·萬葉熾瑤圖·嗺子·步虛子令·步虛子急拍·破子·桓桓曲·太平年慢·保太平十一聲·定大業十一聲·進饌樂·豊安曲·前引子·後引子·班賀舞·靖東方·還宮樂三臺·折花急拍·小拋毬樂令·淸平詞·水龍吟·憂雲峰·憶吹簫·白鶴子·獻天壽·衆仙會·金殿樂·賀聖朝·會八仙·天壽嗺·千年萬歲引子·聖壽無疆引子. 鄕樂 三十一調는 곧 三眞勺譜·與民樂令·與民樂慢·眞勺四機·履霜曲·洛陽春·五冠山·紫霞洞·動動·保太平十一聲·定大業十一聲·進饌樂·豊安曲·前引子·後引子·靖東方·鳳凰吟三機·翰林別曲·還宮樂·致和平三機·維皇曲·北殿·滿殿春·醉豊享·井邑二機·鄭苽亭三機·獻仙桃·金殿樂·納氏歌·儒林歌·橫殺門·聖壽無疆·步虛子.
2. 舞踊
ㄱ. 鄕樂의 舞踊
  「保太平舞」. 이것은 祭樂의 舞인데, 妓 三十六人이 丹粧과 服飾을 갖추고 籥과 翟을 쥐고서 樂節을 맞추어 추는 춤이다.
  「定大業舞」. 妓 七十一人이 一齊히 五色段의 甲과 靑段의 冑를 着하고서 그 中에 三十五人은 各히 儀物을 쥐고 三十六人은 劍槍弓矢를 쥔다. 그리고 樂의 節과 拍의 聲을 따라서 曲陣도 되고 直陣도 되고 銳陣도 되고 圓陣도 되고 方陣도 되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鳳來儀舞」. 妓 八人이 四隊를 지어서 樂의 節을 따라 對舞도 하고 背舞도 하며, 또는 다른 諸妓와 함께 歌詞를 竝唱하는 때도 있고 回旋換隊하여 北向舞하는 때도 있다.
  「牙拍舞」. 妓 兩人이 各히 牙拍을 쥐고서 諸妓가 詞를 唱하고 樂이 奏함을 따라 北向舞하다가 對舞하고 다시 北向舞하다가 背舞하며 或은 進退하면서 舞하기도 한다.
  「響鈸舞」. 妓 八人이 各히 左右手의 母指와 長指에 響鈸을 係하고서 舞하되 拍을 擊한즉 每腔에 鈸을 擊하면서 서로 그 位를 換하여 背舞도 하고 面舞도 한다.
  「舞鼓舞」. 舞鼓는 高麗 忠宣王 때의 侍中 李混(이혼)이 寧海에 謫宦하던 그 때, 海의 浮査를 얻어서 만든 것이니, 소리가 宏壯하고 그 舞가 變轉하여 翩翩然 雙蝶이 花에 繞하는 듯, 矯矯然 二龍이 珠를 爭하는 듯하여 樂府에 가장 奇妙한 것이다.
  이것은 妓 八人이 各히 左右手에 槌를 쥐고 서로 連하여, 左旋하면서 鼓를 繞하여 舞하되 杖鼓의 雙聲과 鼓聲를 따라서 그 舞鼓를 친다.
  「鶴舞」. 靑鶴·白鶴 한 쌍이 날개를 너울거리면서 蓮筒이 있는 池塘을 向하여 두 걸음씩 나아간다. 다시 後面으로 向하여 두 걸음씩 나아가기도 하여 그렇게 몇 번 重複하다가 乃終에 蓮筒을 啄開하면 그 속에서 兩童女가 나온다.
  「教坊歌謠」. 沈香山과 池塘具를 路中에 設하고 沈香山의 앞에 花甎碧을 펴고 諸妓가 沈香山의 左右에 分立하였다가 大駕가 이르면 函에 담은 歌謠軸을 跪進하고 鶴舞·蓮花臺의 呈才를 興行한다.
  「文德曲舞」. 처음에 妓 一人이 呈才致語를 올리고 다음에 妓가 文德曲의 開言路章을 唱하고, 그 다음에 妓 四人이 保功臣章을 唱하고 그 다음에 妓 四人이 正經界章을 唱하고, 또 그 다음에 壯妓 二人과 少妓 二人이 定禮樂章을 唱하고서 樂의 節次를 따라 서로 다니면서 춤을 춘다.
  鶴·蓮花臺·處容舞의 兼設. 十二月 晦前 一日에 儺을 驅하고 그 다음에 二度의 處容舞를 興行하게 된다. 第一度에는 靑黃紅白黑의 옷을 입은 五方處容의 舞만 있게 되고, 第二度에는 鶴舞·蓮花臺의 呈才와 假面舞童의 舞가 있고서 五方處容의 舞가 또한 있다. 그러한 行程에서 諸妓가 奏樂을 따라서 鳳凰吟·井邑調·北殿·處容歌·彌陀讚·觀音讚·本師讚을 次第로 부른다.
ㄴ. 唐樂의 舞踊
  「獻仙桃」. 이는 西王母(서왕모)의 事를 引用하여서 樂에 侑한 것이니, 또한 仙呂調의 類라. 이것은 唐으로부터 高麗에 流入하였는데, 高麗 崔忠獻(최충헌)이 群妓로 하여금 蓮葉仙娥의 來賀를 狀한 것이 곧 이러한 類라. 妓 二人이 王母(서왕모)의 左右挾이 되어 舞하다가, 仙桃盤을 王母(서왕모)에게 跪進하면 王母(서왕모)는 그 盤을 奉하여 卓上에 두고 이런 致詞를 올린다.
  「邈在鰲臺, 來朝鳳闕, 奉手年之美實, 呈萬福之休祥, 敢冒宸顏, 謹進口號, 斂霞裾而少退, 指雲路而言旋, 再拜階前, 相將好去.」
  그리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에는 獻天壽·金盞子·瑞鷓鴣가 있다.
  「壽延長」. 壽延長이란 것은 어느 때에 始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高麗 成宗의 때, 崔承老(최승노) 疏에 奉佛의 失을 論하되 唐德宗妃의 父 三景과 駙馬 高怡(고이) 等이 聖壽의 延長을 爲하여 佛像을 鑄進하였다 하니 생각건대 거기에서 비롯한 듯하다.
  妓 八人이 每隊에 二人씩 東西南北의 四隊로 分하여 對舞 背舞 또는 回舞 等 各樣의 춤을 추면서 「中腔急拍詞」와 「破子詞」라는 노래도 부르고 아래와 같은 致詞도 올린다.
  「流虹繞殿布禎祥, 瑞氣雲霞映聖光, 萬邦歸順來拱手, 梨園樂部奏中腔, 太平時節好風光, 玉殿深深日正長, 花雜壽香薰綺席, 天將美醁泛金觴.」
  「五羊仙」. 唐 李群玉(이군옥)의 「菖蒲澗詩」에 「五仙騎五羊, 何年降兹鄕」이라 하고 그 註에 寰字記를 引用하였는데, 高固(고고)가 楚相이 되었을 제 五仙人이 五色羊을 타고 와서 穀穗를 州人에게 주므로 그들을 五羊仙이라 하였다」하고 또 『南越志』에 菖蒲澗은 熙寧縣에 있는데 姚成甫(요성보)가 그 澗側에서 丈人을 만남에 그가 말하기를 이 菖蒲는 安期生(안기생)의 심은 것이라 하였으니 모든 것을 綜合하여 보면 五羊仙의 戲는 반드시 거기에서 생기었을 것이다.
  妓 五人이 하나는 王母(서왕모), 넷은 그의 左右挾이 되고 五仙에 擬하여 各樣의 춤을 추면서 「步虛子詞」와 「破子詞」를 부르고 또는 이러한 致詞를 올린다.
  「雲生鵠嶺, 日轉鰲山, 怳逢鶴駕之眞仙, 竝結鸞驂之上侶, 雅奏値於儀鳳, 華姿妙於翩鴻, 冀借優容, 許以入隊.
  式歌目舞 聊申頌禱之情, 俾熾而昌 用贊延洪之祚, 妾等 無任激切屛營之至.
  歌淸別鶴, 舞妙面鸞, 整環佩於言歸, 指蓬瀛而都步, 百和沈煙紅日晩, 一聲遼鶴白雲深, 再拜階前, 相將好去.
  寰海塵淸, 共感昇平之化, 瑤臺路隔 遽回汗漫之遊, 未敢自專, 伏候進止.」
  「拋毬樂」. 拋毬樂이란 것은 沈存中(심존중)의 『筆談(몽계필담)』에 일렀으되 海州 士人 李愼(이신)이 夢中에 水殿中 어떠한 곳에 이르러 宮女들이 毬로써 戲하는 것을 보았다 하는데, 山陽 蔡純(채순)이 그 事實을 仔細히 傳敍한 中에 「拋毬曲」 十餘闋은 그 詞가 淸麗하다고 하였으니 至今에 이 戲가 반드시 거기로부터 생기었을 것이오. 宋의 敎坊樂에 拋毬樂이 그 第三에 있다.
  妓 十六人이 兩隊에 分하여 毬門의 左右에 立하였다가 左右隊에서 各히 한 사람씩 次例로 進하여 彩毬를 쥐고서 風流眼에 拋하되 그것을 맞히면 賞布를 주고 맞히지 못하면 그 左腮에 墨點을 찍는다. 그렇게 賞布와 墨點의 多少로써 左右隊의 勝負를 判定하는데 그 中間에 여러 번의 舞進舞退도 있고 또는 「折花詞」·「小拋樂詞」도 부르게 되고 아래와 같은 致詞도 올린다.
  「雅樂 鏗鏘於麗景, 妓童, 部列於香階, 爭呈綽約之姿, 共獻蹈躚之舞, 冀容入隊, 以樂以娛.
七般妙舞 已呈飛燕之奇, 數曲淸歌 且冀貫珠之美, 五音齊送, 六律相催, 再拜階前, 相將好去.」
  「蓮花臺」. 蓮花臺란 것은 그 本이 拓拔魏에서 나온 것이다. 二童女가 鮮明한 衣와 㡌를 着하고 거기에 또 金鈴을 施하여 抃轉한즉 소리가 나게 하였다. 그 童女들이 올 적에는 二朶의 蓮花中에 藏하였다가 그 꽃이 터진 뒤에 나타나게 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花神踏歌」와 「採蓮曲」의 類를 取材로 하여 만든 것이다.
  兩 童女가 蛤笠을 쓰고서 舞進舞退하되 或 서로 面하고 或 서로 背하여 跳躍하면서 춤을 춘다. 그런데 그 行程의 中間에 「微臣詞」도 唱하고 또는 아래와 같은 致詞를 올린다.
  「住在蓬萊, 下生蓮蘂, 有感君王之德化, 來呈歌舞之歡娛, 雅樂將終, 拜辭華席, 仙軺欲返, 遙指雲程.」
  「六花隊」. 처음에는 竹竿子를 奉한 妓 二人이 左右에 分하여 一人은 「問花心詞」를 唱하고 다른 一人은 「花心答詞」를 唱한다. 그리고 보면 이미 妓 六人으로 兩隊에 分하였던 紅衣隊와 藍衣隊가 次第로 興行하는데, 먼저 紅衣 第一人이 花를 奉하고 進하여 紅頭 第一念詩를 唱하고, 다음에 藍衣 第一人이 花를 奉하고 進하여 藍 第一念詩를 唱한다. 그렇게 紅衣人과 藍衣人이 서로 엇바꾸어 花를 奉하고 進하여 第二·第三의 念詩를 다 唱한 後에 對舞도 하고 背舞 或은 回舞도 한다. 花心問答은 呈才致語로 되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新花右手 呈綽約之春光, 寶帶圍腰 學六宮之裝束, 幸預在庭之樂, 願陳詣闕之由.」(問花心詞)
  「竹枝調美 殊非治世之音, 桃葉情多未合正人之聽, 採新聲於上國,追古事於前修, 賦以篇章, 第其名品.」
  「顧慚微品, 願助陳歡, 金縷聲催 想行雲而可駐, 華駰影過 知回雪之將飄, 未敢自專, 伏候宸旨.」(花心答詞)
  「嫩綠嬌紅 競爭姸於麗景, 淸歌妙舞 俱效技於華筵, 雅樂垂成, 拜辭以退.」
「曲破」. 妓 兩人이 첫 번에는 面舞·背舞 或은 前舞하고 두 번째에는 「惜奴嬌詞」를 唱하고 세 번째에는 舞進하여 面舞 或은 背舞하고 네 번째에는 面舞 或은 背舞 하다가 東西로 서로 가면서 交舞하고 그 다음에는 舞進舞退하되 그렇게 다섯 번을 거듭한다.(音樂으로부터 舞踊까지는 『增補東國文獻備考』, 樂考에 據함)
  鄕樂과 唐樂의 舞踊은 西人의 이른바 「오페라」式으로서 純全히 宮廷의 娛樂에 供하던 것이다. 그것이 劍舞(黃昌舞)나 法鼓舞(僧舞) 보다는 그 儀節이 매우 複雜한데, 特히 唐樂의 舞踊은 一種의 演戲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게 보느냐 하면 場所·人物·背景도 그 가운데에 있으며, 幕과 幕의 連結이 또 있으니, 樂을 奏하면 開幕으로, 樂이 止하면 閉幕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 題材와 內容을 考察한다면 人生의 實生活에는 一毫의 關與도 없는, 다만 君主를 爲하여 頌德·祝壽·競技하는 거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階級的이요, 古典的이라 하여 아무 價値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藝術로 보아서는 너무 적게 評價하여도 옳지 못하다. 우리는 그것을 遺産으로 承受하여 勞動者와 勤勞大衆에게 適合하도록 增刪의 能手로서 잘 修正한다면 보다 多大한 價値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小說
  漢大에서는 元의 時代에부터 戲曲과 小說의 作風이 竝行하였다. 그래, 戲曲으로는 南曲과 北曲의 區別이 있어서 南曲에는 高則誠(고칙성)의 「琵瑟記」, 北曲에는 王實甫(왕실보)의 「西廂記」와 같은 傑作이 連出하였으며, 小說로는 施耐菴(시내암)의 『水滸傳』과 같은 奇書가 그 踵을 繼하였다. 그 流風이 明代에 傳하여는 더욱 速度로 躍進하여 沈靑門(심청문)·陳大聲(진대성) 等 戲曲作家와 『西遊記』·「後水滸」·『三國衍義』 等 各種 小說이 出現하는 거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는 그 事態가 달리 되었다. 高麗로 말하여도 元宗의 때로부터 元의 勢力에 눌리어서, 百年餘의 긴 歲月을 經過하면서 文化上으로 오직 性理學을 輸入하였을 뿐이요, 戲曲과 小說에 對하여는 全혀 度外視하였다. 李朝 朝鮮으로 말하여도 高麗로부터의 傳統的 思想을 그냥 承襲하여 그 初期에는 또한 그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性理學의 害毒이 軟文藝에까지 미쳤다는 말인데, 그렇지마는 成宗의 때에 小說家가 비로소 그 머리를 들고서 完全히 活氣를 띠기는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을 겪은 그 뒤의 일이라 하노니, 漢人의 小說까지 批評한 大作家 許筠(허균)이 世上에 나오게 된 것은 實로 偶然이 아니었다. 그가 『西遊記』 跋을 지으면서 말하되,
  「余得戲家說 數十種, 除三國·隋·唐外, 兩漢齬, 齊·魏拙, 五代殘, 唐率, 北宋略, 水滸則 姦驕機巧」라 하였으니, 이에 關하여는 그의 超凡한 文章才와 絶世한 判別力으로써 小說이 가장 盛行하던 明末에 立脚하였다는 것도 또한 말하여야 되겠다.
  그리고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으로 말미암아 南漢의 羞恥는 當하였지만, 肅宗으로부터 正祖에 이르는 그 동안은 康熙·乾降 兩代의 淸文化를 相當히 吸取하고서 李朝 五百年을 通하여 軟文學의 全盛時代를 形成하였다. 肅宗 當年의 創作家로는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을 첫 가락에 꼽아야 할지니 그는 東坡(동파 소식)『志林』을 引用하였는데
  「閭巷에 說書家가 있어서 三國事를 말할 제, 玄德(현덕 유비)이 負하였다고 하면 洛淚하는 이가 있으며, 曹操(조조)가 敗하였다고 하면 痛快히 여기어 雀躍하나니 이것이 『羅(나관중)氏 衍義』의 楷輿인지 알 수 없다. 이제 陳壽(진수) 『三國志』와 溫公(사마광) 『通鑑』과 같은 것으로는 涕泣할 이가 없으니 이것이 通俗小說을 쓰는 理由라」
하여 『九雲夢』·『南征記』의 著成에 對한 動機를 指明할 뿐만 아니라, 장차 『春香傳』·『沈淸傳』 等 多數 作品이 나올 그 前路를 열어 놓았다.
  그런데 高宗의 甲午更張은 小說界에 큰 轉換을 주었다. 그 前에는 諺文小說과 漢文小說의 區分이 있었으나, 이때에는 舊小說과 新小說의 界限이 嚴正히 있게 되면서 表現形式도 勿論 그렇거니와 그 名稱까지 舊殻를 벗어 버리고 새 面目을 또한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一方에는 舊小說은 그 名稱을 고치어 『春香傳』은 『獄中花』로, 『沈淸傳』은 『江上蓮』으로, 『興夫傳』은 『燕의 脚』으로 되어지고 다른 一方에는 『雉岳山』·『雙玉淚』 等 西洋風의 小說體가 優勢를 잡게 되었다.
  위에서 論及한 그것들은 李朝 時代의 小說이 어떻게 進展되며 또는 어떻게 變遷된 것을 大槪나마 提示한 것인데, 만일 그것을 時期別로 본다면
第一期 成宗―明宗
第二期 宣祖―光海
第三期 仁祖―哲宗
第四期 高宗―隆熙末年
ㄱ. 第一期의 小說
  이 時期에 있어 軟文藝의 價値를 賦與할 만한 小說이 있었다면 오직 東峰 金時習(동봉 김시습)의 『金鰲新話』, 秋江 南孝溫(추강 남효온)의 『六臣傳』, 四佳 徐居正(사가 서거정)의 「滑稽傳」을 指摘하여야 될지니 그들은 다 成宗朝의 文士이었다. 그 後에는 그런 作家가 더 없이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士人치고는 三次의 士禍에 거의 殺戮을 當한 것도 큰 理由로 되려니와 退溪(퇴계 이황)·花潭(화담 서거정)·龜峰(구봉 송익필)·孤靑(고청 서기)과 같은 性理學者가 서로 繼續하여 一國을 風靡한 것이 더욱 큰 理由로 되었겠다.
『金鰲新話』 五篇
  「萬福寺樗蒲記」. 이것은 老總角이 佛前에 訴하여 佳緣을 얻은 이야기다.
  「李生窺墻錄」. 이것은 得意치 못한 太學生이 流浪하다가 崔家娘을 만나 異緣을 맺은 이야기다.
  「醉遊浮碧樓記」. 이것은 富商이 廢塘에서 죽은 지 오랜 箕女를 만나 서로 盡歡하던 이야기다.
  「南炎部州志」. 이것은 佛을 믿지 않던 書生이 地獄 炎部州에 갔다가 돌아와서 宇宙를 達觀하였다는 이야기다.
  「龍宮赴宴錄」. 이것은 어떤 文士가 龍宮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구경한 이야기다.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는 東峰(동봉 김시습)의 이것이 『剪燈新話』의 影響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만일 宣祖 때의 사람 林芑(임기)가 燕京에 赴하였다가 瞿佑(구우)의 著 『剪燈新話』를 가지고 온 것이 그 처음이라면 東峰(동봉 김시습)은 그것을 依仿할 수 없으니 年代로 보아 林芑(임기)와 東峰(동봉 김시습)의 相距가 서로 差遠한 까닭이다.
ㄴ. 第二期의 小說
  이 時期는 小說의 新興期라고 말하게 된다. 小說의 種類를 든다면 『元生夢遊錄』·『壽聖宮夢遊錄』·『江都夢遊錄』·『金角干實記』·『柳淵傳』·『桂旬傳』·『紅白花傳』·『壬辰錄』은 宣祖 때에 나온 作品이요, 『洪吉童傳』·『田禹治傳』·『徐花潭傳』은 光海 때에 나온 作品이다.
『元生夢遊錄』. 白湖 林悌(백호 임제)
  이것은 南秋江(추강 남효온)의 人格을 題材로 하여 지었는데, 그의 境遇를 애닯게도 歎惜하였다.
『花史』. 白湖 林悌(백호 임제)
  이것은 花類에 托하여 當時의 政治를 批評한 一種의 史論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壽聖宮夢遊錄』(一名은 「雲英傳」)
  이것은 安平大君의 冤殺된 實情을 그린 이야기였다. 말한다면 靑坡士人 柳泳(유영)이 宣祖 三十四年 봄에 安平大君 李瑢(이용)의 舊居인 壽聖宮에서 놀다가, 醉夢間에 安平(이용)宮女 雲英(운영)과 雲英(운영)의 愛人이던 金進士를 만났다는 그것을 憑藉로 하여 篡立을 陰謀하는 首陽大君(世祖)의 손에서 安平大君(이용)이 억울하게 誅殺된 그 事情을 敍述한 悲劇的 作品이다.
『柳淵傳』. 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
  이것은 大邱 士族 柳淵(유연)이 그 兄을 죽이었다는 誣獄으로 冤死한 이야기다.
『紅白花傳』
  이것은 桂公子 一知(일지)와 順小姐 纖素(섬소)가 드디어 成婚하여 八十年의 富貴를 누리던 이야기다.
『壬辰錄』
  이것은 固有한 歷史的 事實에 얼마큼의 英雄的 誇張과 空想的 異蹟으로써 潤飾한 作品이다. 그 中에 特히 四溟堂(사명당, 송운 유정)의 神通力을 各 方面으로 現示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집이 차면 「四溟堂(사명당, 송운 유정)이 낮참하고 갔다」를 格言처럼 通用하게 되었으며, 또는 倭놈에게서 人皮二百張을 해마다 받았다는 것이 마치 實事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小說은 僧侶의 손에서 되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疑心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洪吉童傳』. 許筠(허균)
  筠(허균)은 徐花潭(화담 서경덕)의 高足인 草堂 許曄(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文章才로 말하면 明의 尙書 錢牧齋(전목재)는 「筠(허균)이 그 兄 筬(허성)과 篈(허봉)으로 더불어 文으로써 海東을 鳴하였다(『列朝詩集』)」라 하였으며, 奇荷潭은 「筠(허균)의 文章이 한 때에 獨步하였다(「荷潭錄」)」라 하였다. 그의 同情人物로 말하면 모두가 庶流인데, 昭陽江上에서 竹林七賢으로 自處하던 徐羊甲(서양갑)·沈友英(심우영, 筠의 妻三寸) 等으로 더불어 光海를 집어던지고 嫡庶의 區別이 없는 새 政權을 세우려 하였으며, 詩로써 李朝 三唐의 一人이던 蓀谷 李達(손곡 이달)에게서 詩를 배우고 또 그의 傳을 지어 그 不遇를 歎惜하였으며, 東人의 詩를 選함에 있어는 鄭道傳(정도전)의 詩를 으뜸으로 삼고, 沈友英(심우영)의 詩를 또한 거기에 加入하였다. 이런 것으로 보아 「洪吉童傳」은 許筠(허균)·徐羊甲(서양갑) 等의 自敍傳이요, 洪吉童(홍길동)은 庶流를 代表한 理想的 人物이라 하겠다.
『洪吉童傳』의 內容
  「世宗의 때 東大門 內에 洪政丞이란 이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仁衡(홍인형)과 吉童(홍길동)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 吉童(홍길동)은 侍婢 春纖(춘섬)에게서 난 것이라 하여, 嫡庶의 區別이 酷甚한 그 판에 갖은 驅迫과 虐待를 받았다. 그러다가 乃終에는 家族 全體의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죽을 變을 當한 일이 있었다. 聰慧가 非凡한 吉童(홍길동)은 儒書·兵書 그 무엇이든지 다 通達하였으나 집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며, 兄을 兄이라고 부르지 못함에 그렇게 敵國같은 家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四方으로 漂浪하다가 賊窟에 들어가서 行首로 되고 또는 活貧堂을 組織하여 八道守令의 不義한 財物을 빼앗아서 貧民을 구제하였다. 이것이 重大한 罪目으로 되어 國王의 捕捉命令이 八道에 내렸다. 그러나 人間의 凡技로서는 呼風喚雨의 術이 있는 吉童(홍길동)은 잡을 수 없음에, 國王도 할 수 없이 兵判을 주기로 하고 吉童(홍길동)을 說伏하였다. 그 後, 吉童(홍길동)은 故國을 떠나 南京으로 向하다가 芒碣山에서 妖怪를 退治하고 硉島國王이 되어 理想의 나라를 建設하였다.」
『田禹治傳』.
  田禹治(전우치)는 潭陽 사람으로서 松都에 와서 隱居하였다. 그런데 일찍 妖狐의 幻書를 얻어가지고 幻術에 能하였다고 한다.(『海東異蹟』·『大東野乘』·『松都志』)
『田禹治傳』의 內容
  「麗末에 田叔(전숙)의 아들 禹治(전우치)는 일찍 尹公에게서 道術을 배웠다. 그리고 竹林에 울고 있는 處女에게서 狐精을 빼앗아 九尾狐를 죽였다. 그 後로는 科業을 全廢하고 仙官으로 變하여 或은 闕內에 날아들기도 하며, 或은 들보를 空中으로 가져가고 五百金을 얻었다. 國王은 그것을 端緖로 하여 逮捕令을 내렸다. 마침내 田禹治(전우치)를 잡아다가 瓶속에 넣어도 죽지 않았는데, 그때에 各道로서 잡아들인 田禹治(전우치)의 總數 三百六十一名이나 되었다. 그는 그렇게 道術이 있지마는 寡婦의 關係로서 각림 道令에게 屈服한 그 後로는 母夫人을 모시고 山中에 숨어 버리었다.」
『徐花潭傳』.
  이것은 花潭(화담 서경덕)을 道術家로 하여 九尾狐와 神虎에 關한 異蹟을 傅會한 이야기다.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도 論及한바어니와 洪·田·徐(홍길동·전우치·서경덕) 三傳이 한 사람의 構想에서 나온 듯하다. 그 同一한 點을 든다면
  道術로 中心한 것은 洪·田·徐(홍길동·전우치·서경덕) 三傳이 다 같고;
  金錢說은 洪·田(홍길동·전우치) 兩傳이 같고;
  國王의 逮捕令은 洪·田(홍길동·전우치) 兩傳이 같고;
  九尾狐說은 田·徐(전우치·서경덕) 兩傳이 같다.
ㄷ. 第三期의 小說
  이 時期의 初期에는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을 치루고 나서 全國 上下의 北伐論이 한창 高調하던 그때이었다. 거기로부터 軍談類가 많이 나오게 되었나니 『蘇大成傳』·『趙雄傳』·『郭海龍傳』·『王將軍傳』·『張國鎭傳』 等이 곧 그것이다. 그 傳記의 가운데에 胡王이니, 가달이니 하는 그 人物은 滿洲를 對像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主人公되는 將軍마다의 最後成功은 北伐의 未來勝利를 暗示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三國衍義』로부터도 軍談類가 또한 나오게 되었으니 『赤壁大戰』·『魏王別傳』·『諸馬武傳』·『玉人記』 等이 곧 그것이다. 이런 軍談은 神通力과 兩性愛에 關한 이야기보다는 아주 달라서 國民一般의 尙武的 精神을 鼓吹함에 큰 效果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天君衍義』. 菊堂 鄭泰齊(국당 정태제, 1612~1669年)
菊堂(국당 정태제)은 光海 四年에 나서 顯宗 十年에 歿하였다. 그 當時의 人心이 物慾에 陷溺하여 花酒에 失身하는 일이 많은 까닭에 그것을 規戒하고 矯正하기 爲하여서 이 衍義를 짓게 되었다. 그 目次는 三十一回나 되는데, 內容의 槪例를 보인다면
  第一回 天官卽位分封官, 第二回 都督戰覇刺圍中, 第三回 五利將軍 蕩欲生, 第四回 惺惺翁來諫天君, 第五回 群邪交讒惺惺翁.
『九雲夢』.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 1637~1692年)
  西浦(서포 김만중)는 遺腹子로서 그 兄 瑞石 金萬基(서석 김만기)와 함께 母夫人 尹氏의 敎訓을 받았다고 한다. 말한다면 그 어머니에게서 『小學』·『十八史』·唐詩까지 다 배웠다는 것이다. 그의 政界生活이 西南人의 黨爭으로 因하여 竄逐을 當한 그때에 『九雲夢』를 지었다. 그때는 肅宗 十五年(1689年)이니 功名富貴는 一場春夢에 지나지 못하다는 뜻으로 母夫人의 憂慮를 慰釋하려는 것이 곧 『九雲夢』의 內容이었다.
  「閭巷間에 流行하는 것은 다만 『九雲夢』이 있는데, 그것은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이 지었으니 다른 것보단 얼만큼 意義가 있다. 世傳에 西浦(서포 김만중)가 竄荒하였을 때에 大夫人의 破閑을 爲하여 하룻밤에 그것을 지었다고 한다.」[李圭景(이규경)의 『五洲衍文』]
  「稗史에 『九雲夢』이 있는데 곧 西浦(서포 김만중)의 지은 것이라. 大旨는 功名富貴는 一場春夢이라 하여 大夫人의 憂思를 慰釋하려 하였으니 그것이 閨闔의 사이에 盛行한다.」(北泉筆譚)
『九雲夢』의 內容
  衡山 蓮花峰에 숨어 있는 六觀大師의 弟子 性眞(성진)이 師命을 받아 洞庭龍王에게로 가다가 그 途中에서 八仙女로 더불어 春情을 通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런 뒤로는 그가 禪佛의 學에 進就되지 못함에, 大師가 크게 怒하여 性眞(성진)과 八仙女를 地獄에 보내었다. 그러나 閻王이 그들을 憐惜히 여기어 特히 容恕하고 極樂世界로 보내었다. 그 날에 性眞(성진)은 淮陽 楊處士 夫人의 臨産에 當하여 才情이 煥發한 楊少遊(양서유)로 換生하여 간 곳마다 路柳墻花를 戲弄하며 八仙女의 後身으로 各處에 헤어져 난 華州 秦彩鳳(진채봉)·洛陽名妓 桂蟾月(계섬월)·江北名妓 狄驚鴻(적경홍)·京師 鄭小姐와 그의 侍婢 春雲·皇妹 蘭陽公主·吐蕃(티벳)刺客 沈裊煙(심요연)·龍女白綾波(백승파)를 娶하였다. 그리고 少年에 壯元及第하여 河北三鎭 吐蕃(티벳)의 亂을 平定하니 天子가 駙馬로 삼고 燕王으로 封하였다. 그렇게 少遊(양소유)는 富貴功名과 一世福樂을 마음대로 누리다가 그 八夫人은 胡僧의 說法에 頓悟하여 다시 옛날의 八仙女로 되어 極樂世界로 돌아갔다.
『南征記』. (一名은 『謝氏南征記』) 西浦 金萬重(서포 김만중)
  西浦(서포 김만중)가 『九雲夢』를 짓던 肅宗 十五年으로부터 그의 歿하던 肅宗 十八年 그 中間에 『南征記』를 지었다고 한다. 兩部의 小說이 本히 諺文으로 되었던 것인데, 그것이 그의 從孫 金春澤(김택춘)의 손에서 漢譯되었다.
  「西浦(서포 김만중)가 俗諺으로써 小說을 많이 지었는데, 그 中에서 이른바 『南征記』는 다른 것과에 견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文學으로써 翻하였다… 稗官小說은 荒誕하지 않으면 浮靡하나 오직 民彝를 敦케 하고, 世敎에 裨할 것은 『南征記』 뿐이라.」[金春澤(김춘택)의 『北軒雜說』]
  「『南征記』는 北軒(김춘택)이 仁顯王后 閔氏의 位를 回復하기 爲하여 肅宗의 마음을 悔悟시기려고 지은 것이라.」(『五洲衍文』)
  傳說에 『九雲夢』가 나오자, 畜妾의 風이 盛行하여 各 家庭의 紛亂은 쉴 날이 없었다. 그래서 『南征記』를 짓게 되었는데, 그것이 世上에 금방 流行하자, 妾을 집어던지는 波濤가 움직였다고 한다. 小說은 그렇게 人心을 左右하는 힘이 있으니, 北軒(김춘택)의 漢譯序에 民彝를 敦케 하고 世敎에 裨할 것은 오직 『南征記』 뿐이라 함은 這間의 消息을 傳하여 준다.
『南征記』의 內容
  明나라 嘉靖年間이다. 順天府 劉翰林(유한림)의 正室 謝氏는 淑德과 才行은 俱備하지만, 시집을 온지 九年이 되도록 子女가 없었다. 그래, 翰林(유한림)을 勸하여 妾 喬氏를 얻게 하였다. 喬氏는 極히 凶淫한지라, 門客을 私畜하고 正室을 讒毁하니 畢竟 謝氏는 쫓겨나서 南으로 또 南으로 定處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流浪하다가 懷沙亭·黃陵廟를 다 지나서 娥皇·女英(아황·여영)을 만나 괴로운 앞길에 對한 光明의 暗示를 보았다. 그리자, 喬氏의 노던 凶計가 一朝에 綻露됨에, 翰林(유한림)은 喬妾과 그 門客을 一時에 집어 던지고 謝氏를 다시 찾아다가 正室을 삼았다. 그리고서 翰林(유한림)은 丞相으로 榮進하면서 門戶가 繁榮하였다.
  夢字小說은 벌써 宣祖時代에 생기었다. 위에서 말한바 『元生夢遊錄』·『壽聖宮夢遊錄』·『江都夢遊錄』이 곧 그것인데, 肅宗時代에 이르러 『九雲夢』란 夢字小說이 또한 나오게 되었다. 그 뒤를 따라서 英·正(영조·정조) 兩代를 거치는 동안, 그 命題를 다시금 거듭하여 『玉麟夢』·『玉樓夢』·『玉蓮夢』 等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漢土에서는 夢字小說이 매우 늦게 나왔으니 世界的 傑作이라는 曹雪芹(조설근)의 『紅樓夢』은 우리의 『九雲夢』보다도 五六十年이나 뒤떨어진 作品이었다. 淸朝의 人士들은 그것을 다 模擬하여 南陽氏의 『紅樓復夢』, 曹塢(조오)의 『續紅樓夢』, 普山氏의 『紅樓夢圖詠』, 荆石山氏의 『紅樓夢散套』, 慕眞山人(모진산인 유달)의 『靑樓夢』, 그밖에 또 『紅樓幻夢』·『紅樓增夢』·『紅樓夢補』·『後紅樓夢』 等이 連出하였다. 이 夢字는 彼我間에 무슨 約束이나 있은 듯이 서로 通行하는 時代風이었던 모양인데, 여기에 對하여는 休靜(휴정)의 三夢詩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을 한번 읊는 것이 더욱 좋겠다.
「王郞返魂傳」.
  이것은 英祖 二十九年에 出版한 것인데, 佛說 「阿彌陀」의 附錄으로 되어 있다.
  그 內容의 大槪
  「吉州에 王思机(왕사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佛敎라면 絶對否認者이었다. 일찍이 妻 宋氏를 잃고 孤獨한 生活로 歲月을 보내더니 하루는 十年 前에 죽은 宋氏가 와서 勸告하되 「당신은 부처를 비방한 罪로 冥府의 미움을 받아서 來日 아침에는 上帝가 使者를 보내서 잡아가려 하니 반드시 佛像을 베풀고 佛經을 念讀하라」 하였다. 果然 그 이튿날 使者의 손에 잡혀 갔었다. 그런데 王郞은 그 날 아침에 熱心으로 念佛하였던 것이었다. 使者에게서 그런 報告를 받은 閻王은 기뻐서 그 罪를 容恕하고 그 妻 宋氏까지 人間으로 다시 보내었다. 그런데 죽은 지 몇 날이 안 된 王郞은 人間에 돌아와 다시 依接할 肉體가 그대로 있었지만, 宋氏는 죽은 지 十年이었다. 그 肉體가 어찌 남아 있었으랴? 하는 수 없이 月氏國 翁主의 肉體에 붙어서 世上에 更生하였다. 그리하여 彼此에 未盡한 因緣을 다시 이루고 熱心으로 信佛하다가 極樂往生하였다.」
『朴氏夫人傳』.
  그 內容의 大槪
  朴氏는 金剛山 朴處士의 愛娘이었다. 그가 漢陽 安國坊 李時白(이시백)에게 出嫁하였던데, 얼굴이 薄色이라 하여 渾家가 嘲弄하고 新郞도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朴氏는 北쪽에다가 避禍堂이란 집을 따로히 짓고 그 속에서 孤獨한 歲月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마는 元來 學術이 神奇하고 智謀가 深遠한지라, 하룻밤 사이에 緦父(李貴)의 朝服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三百金으로써 三萬金의 價値가 되는 龍馬를 사고, 碧玉으로 만든 硯滴까지 郞君에게 주어 壯元及第가 되게 하였다. 그 後, 郞君이 平安監司로 되어갈 제, 그는 밤사이에 허물을 벗어 버리고 훌륭한 美人으로 되어서 琴瑟이 서로 和合하게 되었다. 그 때에 胡王이 朝鮮에 神人 朴氏와 林慶業(임경업)이 있음을 무서워하여 一等刺客을 보내어 朴氏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明見萬里하는 朴氏는 道術로써 刺客을 退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胡兵이 漢陽에 侵入함에 朴氏는 道術로써 賊將을 죽였다. 龍骨大(용골대)가 그것을 알고 크게 怒하여 避禍堂을 襲擊하다가 그만 失脚하여 달아나고 말았다. 林慶業(임경업)은 南漢의 敗報를 듣고 淸兵의 回路를 扼하여 憤풀이를 하였으나, 大君과 여러 夫人은 볼모로 잡혀 瀋陽으로 가게 되었다. 그 後에 李時白(이시백)은 丞相에까지 榮進하여 夫婦間의 享樂을 다하였다.
『彰善感義錄』. 春洲 金道洙(춘주 김도수)
  春洲(춘주 김도수)는 英祖 때의 사람으로서 이것을 지었다는데, 十四回의 長篇에 善과 義를 中心으로 하였다.
  『南興記事』. 四卷 河濱 愼後聃(하빈 신후담)
河濱(하빈 신후담)은 星湖 李瀷(성호 이익)의 高弟인데, 十三歲에 『金華外篇』·『續列仙傳』을 짓고 그 後에 또 『續搜神記』·『太平遺記』·『龍王記』·『海蜃記』·『遼東遇神記』·『紅粧傳』·『南興記事』 等을 지었다.
  우리의 小說에는 動物―나는 놈, 뛰는 몸을 題材 삼아 一般的 童話로 閭巷間에 流行하다가 究竟, 小說化한 것이 적지 않게 있다. 그런 動物을 說話의 根本的 思想으로 取한 것은 그 本意가 어디에 있을까? 그 本意를 究明한다면 人間自體의 日常行爲로써 勸善懲惡하는 그것보단 動物을 人格化하여 寓語法으로 應用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效能을 준다는 것이었다. 여기로부터 固有의 童話를 敷衍하여 各種의 小說을 지었나니 이른바 『장끼傳』·『콩쥐팥쥐』·『鼠同知傳』·『두껍傳』·『토끼傳』·『金송아지傳』 等이 곧 그것이다.
『장끼傳』.
  이것은 노래의 形式으로 된 것인데, 장끼가 까투리의 諫하는 말을 듣지 않고 차끼의 콩 한 알을 貪하다가 죽은 이야기다.
『콩쥐팥쥐』.
  이것은 콩쥐가 心術궂은 그 繼母와 義妹 팥쥐에게서 온갖 苦役을 겪어오다가 乃終에는 蓮塘의 冤魂으로 된 이야기다.
『鼠同知傳』.
  이것은 富한 서대쥐가 貧한 다람쥐를 자주 救恤하다가 도리어 背恩忘德한 다람쥐의 誣訴를 받은 이야기다.
『두껍傳』.
  이것은 獐先生의 宴會席에서 토끼·여우·두꺼비의 무리가 자리다툼을 하다가 乃終에는 두껍이란 놈이 年長者로 된 이야기다.
『토끼傳』.
  이것은 龍王이 그 딸의 心病으로 因하여 鼈主簿를 시키어 토끼의 肝을 求하던 이야기다.
『金송아지傳』.
  이것은 波利國 太子 如來가 처음에 송아지로 되었다가 高麗王의 딸 微妙公主와 因緣을 맺은 後, 仙果를 얻어먹고서 그 被毛와 頭角을 다 벗어버리고 마침내 波利國王으로 된 이야기다.」
  括論에서도 말하였거니와 『興夫傳』·『沈淸傳』·『春香傳』은 著名한 歌劇이었다. 그것이 本히 오래 前부터 傳說로 되어 오다가 文章才子의 손을 거쳐서 小說化하고, 名唱廣大의 입을 지내어서 世上에 더 없는 絶調로 되었다.
『興夫傳』.
  그 內容의 大槪
  「兄 놀부는 富하나 心術이 궂고, 아우 興夫는 가난하나 마음이 착하것다. 하루는 興夫가 먹을 것을 얻으려고 兄의 집에 갔다가 兄과 兄嫂에게 큰 溥待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처마의 둥이에서 제비새끼가 떨어졌다. 興夫의 夫婦는 그 제비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보고서, 五色 실로 동이어 주었다. 이듬해 봄인데 그 제비가 박씨 한 개를 물고 왔다. 그래 興夫는 그 씨를 심어 커다란 박을 얻었다. 夫婦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박을 타니 그 속으로서 온갖 寶貨가 쏟아지면서 갑자기 큰 富者로 되게 되었다. 농부는 그 사실을 알아가지고 제비의 다리를 일부러 꺾고서, 五色 실로 동이어 보내었다. 果然 그 이듬해에 제비가 박씨를 물고 왔다. 놀부는 그 씨를 심고 열리는 박이 굳기를 기다리어 바삐 타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寶貨가 나오기는커녕 별별 잡것이 다 쏟아지어서 놀부는 猝地에 못 살게 되었다.」
蒙古(몽골)에도 이와 같은 傳說이 있는데,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는 착한 處女요, 하나는 心術이 궂은 處女이며 또는 박 속에서 뱀이 나와서 심술궂은 處女를 죽였다는 그것뿐이다.
『沈淸傳』
  그 內容의 大槪
  「黃海道 黃州郡 桃花洞에 沈鶴圭(심학규)라는 盲人이 있었다. 그의 賢妻 郭氏는 아름다운 딸 沈淸(심청)을 낳은 後, 즉시 重病을 얻어 이 世上을 버렸다. 鶴圭(심학규)는 어린 沈淸(심청)을 안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젖과 밥을 빌어 먹였다. 그렇게 열다섯 살까지 고이 길렀다. 이때부터는 沈淸(심청)이 밥을 빌어다가 아버지를 孝養하며, 餘暇만 있으면 裁縫과 孝行을 오로지 배웠다. 그러므로 絶世의 天女라는 名聲이 世上에 喧藉하여 武陵洞에 사는 張丞相의 夫人이 養女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沈淸(심청)은 盲父의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그것을 拒絶하였다. 하루는 그 아버지가 供養米 三百石만 佛前에 提供하면 盲眼이 밝아진다는 夢運寺 主持僧의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뒤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勸善帳에 「三百石 沈鶴圭(심학규)」라고 記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근심 중에 잠기어 있었다. 마침 그 때에 서울로서 數十名의 商賈가 十五歲의 處女를 求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런 處女를 臨堂水에 生贄로 던지고야 船路가 安全하다는 까닭이었다. 沈淸(심청)은 商賈들에게 팔리어 供養米 三百石을 夢運寺에 부쳤다. 그리고서 約束한 그 날에 몸을 臨堂水에 던지게 되었다. 벌써 上帝는 四海龍王을 命하여 大孝 沈淸(심청)을 玉蓮花에 싸서 臨堂水 물위에 返魂케 하였다. 船人들은 大利를 얻어가지고 돌아오다가 물위에 뜬 天上蓮花를 天子에게 드리니 實은 蓮花가 아니요, 사랑스러운 處女 沈淸(심청)이었다. 天子가 즉시 皇后를 삼음에, 皇后는 盲父를 찾으려고 盲人宴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 동안에 鶴圭(심학규)는 뺑덕의 어미라는 凶惡한 계집을 얻어 살림을 하는데, 盲人宴으로 가려는 路費까지 그 계집에게 다 빼앗겼다. 그래서 鶴圭(심학규)는 빌어먹으면서 가장 늦게 그 宴席에 참여하였다. 그 날에 沈淸(심청)은 盲人들을 또한 낱낱이 點考하다가 그 末席에 앉은 이가 자기의 아버지임을 알고서 아버지! 크게 부르짖었다. 鶴圭(심학규)는 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눈이 열리었다.」
  『沈淸傳』과 비슷한 傳說은 印度의 『專童子』와 日本의 『小夜姬』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國外의 일이라, 번거히 말하려고 아니한다. 여기에서는 다만 우리 國內에 예前부터 있어 오던 傳說의 두어 가지를 들어서 沈淸(심청)의 그것과 對照하여 보기로 한다.
ㄱ. 蟾石에 對한 傳說
  「新羅 時節의 일이다. 新羅가 한참 全盛하던 그 時節에는 地方이 五十五里, 戶數가 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三國遺事』卷一, 辰韓條)에 達하던 그 서울에, 서울의 막다른 어느 골목 한 모퉁이에 오막살이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에는 소경 아버지 하나와 간난 딸아기 하나 모두 두 인구가 살았다. 소경의 아내는 그 딸을 낳고 重病으로 앓다가 그만 世上을 떠난 것이었다. 그래서 두 인구만 남게 되었는데, 소경은 한 손으로는 어린 딸을 품에 품어 안고, 또 한손으로는 막대를 짚고서 그 크나큰 서울의 어느 집에든지 안가는 집이 없이, 젖을 빌고 밥을 빌어, 그날그날의 목숨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해, 이태를 지내다나니 그 딸은 여덟 살이 넘었다. 이때부터는 딸이 밥을 빌어다가 아버지도 供養하고 저도 먹었다. 異常한 일도 있지, 하루는 아침을 먹노라니까, 생각지도 않던 두꺼비 하나가 조왕 밑의 쥐구멍으로 기어 나와서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는다. 딸은 그 먹는 것이 하도 貴해서 밥 한술을 떠 주었더니 그놈이 넙적- 넙적 다 먹고서는 구멍으로 도로 들어간다. 그 後로는 그놈이 끼니마다 참여하니 그 집에는 남모르는 食口 하나가 더 불었다. 삯바느질·삯방아로 生活하여 그렁저렁 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의 孝行과 才色은 欽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勸善하는 중 하나가 와서 「부처님에게 供養米 三百石을 드리면 눈먼 사람은 눈이 밝아진다.」고 말하였다. 마침 그 때에 어떤 洞里의 사람들이 열다섯 살 되는 處女를 사려고 다닌다. 그 洞里에는 神詞가 있는데, 해마다 處女 하나씩을 生贄로 祭하고야 平安히 지낸다고 한다. 딸은 그들에게 팔리고 供養米 三百石을 佛前에 보내었다. 約束한 날은 당진하였다. 소리 없는 눈물로 두꺼비의 등을 만지어 주고서 떠나는 때, 아버지는 그 딸이 어디로 삯일하러 가거니 하고 그 衣食을 이웃집에 부탁한 것도 또한 모르고 있었다. 딸은 그 洞里에 당도하여 祭官들의 引導대로 祭物牀에 들어누었다. 祭官들은 祭禮를 畢한 後, 祠門을 굳게 잠그고 다 흩어지었다. 밤은 바다같이 깊었는데, 天井위의 단골로서 우직-우직 하는 소리가 나더니, 보기만 해도 눈이 뒤집히는 큰 구렁이가 한해 한 번씩 한밥 잘 먹던 버릇으로 꼬리는 단골에 붙이고 두 가닥의 혀끝을 祭物에 점점 가까이 닿인다. 그 때에 牀밑으로서 一條의 파란 기운이 바로 구렁이의 입을 直射한다. 그러자 祭物은 情神을 잃었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祭官들은 祠門을 열고서 祭物의 有無를 살피어보는 그 前例에 依하여 그리로 들어가려 하다가 엄청난 큰 구렁이의 죽어 자빠진 것을 보고 다 뒤저참하면서 놀랐다. 자, 그러면 祭物은 어찌되었나 하고 살피어본즉 가슴에서 피가 그냥 뛰고 있다. 이로부터 딸은 다시 蘇生하고 또 두꺼비는 그의 養하던 것이요, 그 두꺼비의 毒氣에 구렁이 죽은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은 온 서울판을 휩싸고서 闕內에까지 들리었다. 王은 그의 孝行과 姿色에 感服하여 王后를 삼게 되었다.
  그 동안에 아버지는 그 딸의 팔린 事情을 들어 알고서 밤낮 슬퍼하다가 갑자기 入侍하라는 王后의 命令을 받아 闕內로 들어갔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라, 아버지! 부르는 그 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눈이 열리었다. 그 後에 두꺼비가 죽음에, 王과 王后는 그 恩義를 잊지 않기 爲하여 돌로써 두꺼비를 만들어 두었다.(慶州 古蹟博物館 蟾石의 傳說)
ㄴ. 全南 玉果縣 聖德山 觀音寺의 緣起에 關한 傳說
  1. 忠淸道 大興縣에 元良(홍원량)이란 盲人이 있었다. 일찍 妻를 잃고 洪莊(홍장)이란 예쁜 딸 하나를 依賴하여서 生活하였다. 하루는 元良(홍원량)이 밖에 나아갔다가 弘法寺 중 性雲(성운)을 만나서 눈이 열리고 그 밖의 어떤 일이든지 祝願하는 대로 되는 法을 들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自己의 한 家族이요 愛女이던 洪莊(홍장)을 팔아 주기로 하였다. 洪莊(홍장)은 나이 十六歲이었다. 그는 어쩔 줄을 모르고 蘇浪浦의 岸頭에서 쉬고 있는 때, 碧海에서 나타나는 中國船人들이 그 아름다운 姿態에 끌리어 사가지고 가서 皇帝에게 드리었다. 때는 晉惠帝 永康 丁亥 五月이었다. 帝는 皇后를 방금 잃고 孤寂한 눈물이 袞衣를 적실 때에 자주 새 皇后가 있다는 吉夢도 있었었다. 實狀, 이 船人들은 惠帝가 보낸 使臣이었다. 洪莊(홍장)은 새로 皇后가 된 後에 本國을 잊지 못하여 배 세 척에 觀音을 실어서 本國으로 건너 보내었다. 그 배가 漂浪하여 到着한 곳이 卽 玉果縣 聖德山 觀音寺의 基址요, 元良(홍원량)은 功德에 依하여 눈이 열리었다.[權相老(권상로) 先生의 藏本을 引用한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
  이 緣起文은 雍正 七年에 지었고 이것을 쓴 白梅子(백매자)가 그런 말을 長老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緣起와 같은 이야기가 오래 前부터 傳하여 오다가 文字로써 나타나기는 雍正 七年 以後의 일이겠다. 雍正 七年은 英祖 五年(1729年)에 當하고 申在孝(신재효)가 「沈淸歌」를 불렀다는 것은 純祖 初期의 일이니[曺雲(조운)氏의 考證] 이렇게 따지고 보면 「沈淸傳」은 英·正(영조·정조) 兩代의 사이에 생기었다는 것이 아무 틀림도 없겠다.
『春香傳』.
  『春香傳』의 起源과 作者 및 年代는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 依하여 그 大要만을 들어두겠다.
  ㄱ. 『春香傳』은 玉溪 盧槇(옥계 노전)의 事實을 小說化하였다.(『溪西野談』) 玉溪(옥계 노전)는 南原 사람인데, 中宗 十三年에 나서 宣祖 十一年에 歿하였다.(『玉溪集』) 일찍 宣川府使로 되어간 叔父를 찾아가서 退妓의 딸인 童妓와 因緣을 맺고서 서로 헤어진 일이 있었다. 그 後에 玉溪(옥계 노전)가 御史로 되어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畢竟에는 그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서 偕老하였다. 玉溪(옥계 노전)가 宣祖 때에 吏判에까지 昇進하여 그 名望이 一世에 높던 人物인즉 그만큼 그 實話가 그의 故鄕인 南原地方에 美談으로 되어 頌傳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頌傳하는 동안에 針小棒大로 原型보다 훨씬 小說化하였을 것이라 하여 金台俊(김태준)氏는 事實의 起源과 主人公의 年代를 指明하였다. 南原에 梁進士란 이가 있어 科擧에 及第한 後, 倡優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서 遊街하였다. 그런데 집이 赤貧하여 그 費用을 辦償할 수 없으므로 노래를 지어 倡優와 함께 불렀다. 이것이 『春香傳』의 古本이오. 純祖 十四年頃(1814年)에 高敞人 申在孝[신재효, 一名은 百源(신백원)]란 이가 才藝도 많고 歌唱에도 善하므로 그 古本을 敷衍하고 潤色하며 今俗의 「春香歌」로 되었다 하여 金台俊(김태준)氏는 作者와 由來를 指明하였다.
  그리고 본다면 『春香傳』의 古本은 肅宗 以後, 純祖 以前에 되어진 것이겠다.
  丹齋 申埰浩(단재 신채호)의 말에 依하면 「『春香傳』는 高句麗의 韓珠(한주)를 演述한 것이요, 놀부傳은 新羅의 房色을 演述한 것이요, 토끼傳은 高句麗의 龜兎說을 演述한 것이라(由來 朝鮮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 하니 龜兎說은 勿論 그렇거니와, 그 밖의 것은 어떠한 考據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充分한 考證을 얻을 때까지 이만큼 말하여 둔다.
  傳說에 依하면 『春香傳』에 對한 申在孝(신재효)本이 出現하던 그 同時에 金海人 裵此山(배차산)本이 또한 있었다는데, 申(신재효)本보다 裵(배차산)本이 오히려 長點이 많아서 廣大의 가운데에서 그것이 秘傳品으로 되다가 湮沒되고 말았다고 한다.
『春香傳』의 內容
  아름다운 山과 맑아한 물이 左右짝으로 된 거기에다가 무르녹는 봄빛으로 웃짐을 친 廣寒樓의 風景 속에서 才子와 佳人이 짝을 묶게 된 것도 또한 奇緣이었다. 才子는 廣寒樓에서 物色을 玩賞하는 本官使道 子弟 李夢龍(이몽룡)이요, 佳人은 廣寒樓의 맞은편 垂楊 사이에서 추천을 戲弄하는 退妓 月梅(월매)의 딸 成春香(성춘향)이었다. 그 두 사람이 서로 만난 것은 그야말로 三生緣分이었다. 사랑의 情은 날로 깊어가고 굳은 盟約은 變할 수 없었다. 그런데 夢龍(이몽룡)은 그 아버지가 同副承旨로 榮轉함에,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서 上京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이별할 날이 닥치어 왔다. 石鏡과 玉指環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은 어느 때에나 잊지 마자는 言約이요, 流浪眼看流淚眼, 斷腸人送斷腸人은 送別하던 그 當時의 光景이었다. 그런 後, 夢龍(이몽룡)은 文科에 壯元及第하고 湖南 暗行御史로 南原의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그 동안 南原에는 色이면 精神 잃는 卞府使란 者가 새로 到任하여 春香(성춘향)의 才色이 俱美하다는 말을 듣고 卽時, 불러다가 수청 들라고 督促하였다. 春香(성춘향)은 죽기를 決心하고 松竹같은 절개를 主張하면서
  「禮儀는 士大夫의 집에만 있고 娼女의 賤家에는 없어야 옳으냐?」고 痛論하였다.
  卞府使는 그 말에 성이 나서 春香(성춘향)을 獄에 던지었다. 그리하여 春香(성춘향)의 앞에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이튿날 卞부사는 生日宴을 열었다. 벌써 春香(성춘향)의 事情을 探知한 李御史(이몽롱)는 乞人으로 假裝하고 그 잔치에 대들어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라는
  詩로써 四筵을 驚動시키었다. 잔치가 끝나자, 부사는 春香(성춘향)의 死刑을 執行하라는 命令을 내렸다. 그와 함께 暗行御史 出道라는 소리가 벼락 치듯 일어났다. 잔치에 참여하였던 各邑 守令들은 남 먼저 다 달아 버리고 부사는 封庫罷職을 當하고 刑場으로 나가던 春香(성춘향)는 多年만에 그리던 郎君을 만나서 一場의 喜劇이 興行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서 一生의 榮光을 누리었다.
  括論에서도 『三說記』와 『熱河日記』는 小說의 叢書란 것을 말하였다. 그렇다해서 『熱河日記』의 全部를 小說로 본다는 것은 아니다. 『三說記』에는 六篇의 小說이 있고, 『熱河日記』에는 九種의 小說이 內包되었다.
『三說記』. 三卷
ㄱ. 『三士誤入黃泉記』
  洛陽 東村에 사는 세 선비가 白岳山 놀음을 하다가 閻羅大王에게 잡혀간 일이 있었다. 崔判官은 生死置簿帳을 考覽하고서 十年後에야 잡아올 사람이란, 報告를 閻王에게 올리었다. 그래 閻王은 그 魂을 어떤 宰相家에 點指하기로 하였다. 그 때에 세 선비는 王에게 號訴하여 그 所願을 말하였다. 그 中에서 한 선비는 兵曹判書·驃騎將軍을 願하고, 한 선비는 壯元及第로 八道御史·大司成 되기를 願하니 王이 그 두 사람을 極樂淨士로 보내었다. 마지막의 한 선비는 人間生活의 모든 幸福을 願하니 王이 怒해서 그런 곳이 있으면 나도 閻王의 職을 던지고 그리로 가겠다」라고 하면서 꾸짖었다.
ㄴ. 『五虎大將記』
  그 전에 武勇으로 名望이 높은 大將 한 분이 있었는데, 左右奸人들은 그를 五虎大將에 比하였다. 그 部下에 直言하는 砲手 하나는 그 말을 極히 反對하여 「將軍의 무슨 行蹟이 足히 關羽(관우)·張飛(장비)·趙雲(조운)·馬超(마초)·黃忠(황충)에 比肩할 수 있느냐?」고 肉迫하였다. 大將은 그제야 阿諛하는 部下들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直言하는 砲手를 擧薦하여 大將의 地位를 讓與하고 奸人들을 處罰하였다.(이上은 第一卷)
ㄷ. 『楚伯王記』
  그전에 豪氣있는 선비 하나가 四方에 流浪하다가 虞美人(우미인)의 廟宇에 들어갔다. 美人(우미인)의 곁에 楚伯王(초백왕 항우)이 나서면서 「家宅侵入」이라고 꾸짖는다. 그 선비가 대답하되 拔山蓋世의 氣力으로 天下를 다투던 當年 英雄이 어찌 數間草屋을 다투느냐?고 抵抗하니 伯王(초백왕 항우)이 부끄러워서 달아나 버렸다.
ㄹ. 『三子遠征記』
  松都 서울 시절에 한 道士가 弟子 셋을 가르치고 있었던데 하루는 弟子들의 所願을 물었다. 그러니 한 아이는 「少年登科 翰林學士로 平安·全羅監司」 되기를 願하고, 그 다음 아이는 「名山勝地에 집을 짓고, 花朝月夕에 杜牧之(두목)의 生活로 보내기를」 願하고, 마지막 아이는 「一生에 巨富로 지내기를」 願하였다. 道士가 그 말을 다 듣고 장차 너희들의 所願대로 될 터이니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그 後에 세 사람이 果然, 그 所願대로 되었는데, 平安監司된 사람은 神仙되어 다니는 學友를 三十年만에 서로 만났다. 그와 半日 동안 閑談하였더니 그 半日은 人間 八十年의 긴 光陰인줄 몰랐었다. 집으로 돌아온즉 아들도 白髮이요, 四方에 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 王에게 上疏하니 王이 奇異히 여기사 다시 平安監司로 보내었다.(以上은 第二卷)
ㅁ. 「黃州牧使戒」
  예전 東村 梨花井에 사는 尹賢壽(윤현수)란 이가 龍弼(윤용필)·寶弼(윤보필)·貴弼(윤귀필)이란 세 아들을 두었었는데, 그 中에 龍弼(윤용필)은 거만하고, 寶弼(윤보필)은 怜悧하나 동무의 忠告를 듣지 않고, 貴弼(윤귀필)은 뒤숭숭한 도령님이었다. 黃州牧使인 賢壽(윤현수)은 警戒하여 말하되 龍弼(윤용필)·寶弼(윤보필)은 將來에 失敗하고 貴弼(윤귀필)은 成功하리라 하였다. 그 後에 그 말이 果然 符驗하였다.
ㅂ. 「老處女歌」
  옛날 今身에 갖은 病으로 因하여 마흔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간 處女가 있어서 밤낮 悲憤한 노래만 吟詠하였다. 그러다가 그 近處에 있는 金道令에 結婚한 後에는 먹은 귀가 밝아지고 病身이던 발을 能히 쓰게 되었다. 成婚한지 十朔만에 玉童子를 낳고 다음 나는 아들까지 다 ●●●●다.(以上은 第三卷)
小說. 燕巖 朴趾源(연암 박지원)
  ●●● 나서 六十九歲(1737-1805年) ●●● 때에 妻叔 李校理의 주는 信陵●●이 閉門 三年의 동안에 諸子百家를 다 涉獵하였다. 四十四歲에 布衣學者로서 從兄 明源(박명원, 入燕正使)을 따라 北京으로부터 熱河에까지 갔었다. 그 동안에 보고 들은 것을 記錄한 것이 卽 『熱河日記』 二十六卷이니 實로 先生의 得意作이었다. 그 속에는 磈礧不平의 氣가 充滿되고 또는 當塗貴人 및 欺世僞學의 流를 譏斥한 것이 더욱 可觀이다.
『許生傳』
  許生은 墨積洞에 사는데, 十年을 爲限하고 讀書하다가 七年만에 妻의 꾸중을 받고서 책을 덮어 놓고 卞富豪의 집에 가서 萬金을 빌렸다. 그 돈으로써 처음에는 果類를 榷하고 다음에는 말초리를 都沽하여 三十萬金을 얻었다. 또 그 다음에는 邊山의 群盜를 거느리고 島中에 들어가서 農作한 餘穀을 長崎(나가사키)에 往糶하여 銀 百萬의 利를 보았다. 그러나 銀 百萬은 朝鮮이란 작은 나라에 容할 바 아니라 하여 五十萬은 바다에 던지고 또는 貧民을 찾아다니면서 救濟하고 그 나머지 十萬은 卞氏에게 올리었다. 卞氏는 什一의 利만 받으려 하였으나 그는 소매를 떨치고 간다. 그래 卞氏가 그 뒤를 따라간즉 南山 밑 오막살이로 들어간다. 老嫗에게 물어서 姓이 許氏인 것을 안것 뿐이었다. 그 때는 朝廷에 北征의 冤議가 있어서 人材를 傍求하던 때이었다. 李政丞 浣(이완)이 卞氏의 말을 듣고 許生을 찾아갔었는데, 許生은 時事三難을 論하여 可能性의 有無를 물으니 李政丞(이완)은 대답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 이튿날에 李政丞(이완)이 다시 찾아가니 許生은 간 곳이 없었다.
  時事三難은 첫째로 臥龍(제갈량) 先生을 擧薦할 터이니 임금으로 하여금 三顧草廬시킬 것, 둘째는 理髮胡服하고 子弟를 中國에 留學케 하며, 商賈를 江南에 보내어 中原의 虛實을 搜探하고 中原의 英雄을 交結하여 丙亂의 羞恥를 갚을 것, 셋째는 南蠻椎結의 상투와 文弱의 象徵인 廣袖白衣를 廢止할 것이다.
『虎叱文』
  하루는 山君으로 이름 높은 大虎가 궁금한 생각이 나서 人肉을 가리는 판이었다. 醫는 「疑」라, 자세치 않은 것으로써 사람을 죽이며, 巫는 「誣」라, 惑世誣民으로써 職業을 삼으니, 그것은 다 不義의 腥肉이며, 罪惡의 葷肉이라, 잡아먹을 것이 없다. 그 다음에는 儒者의 肉을 먹을 討論이 나서게 되었다. 그 村中에는 學文과 道德이 높은 北郭 先生(북곽선생)이 있는데 그이는 일찍 天子의 表彰도 받은 분이었다. 또 그 곁에는 東里子(동리자)라는 少年寡婦가 守節하고 있어서 天子의 表彰을 또한 받았다. 그러나 그 寡婦는 각각 姓 다른 여섯 아들을 두었다. 北郭 先生(북곽선생)이 東里子(동리자)와 私通하다가 그 다섯 아들에게 쫓기어 거꾸로 걸어서 도망하는 中이었다. 그렇게 달아나다가 選肉會議를 열고 있는 大虎를 만나서 「寬大하신 陛下여! 살리어 주옵소서」하고 哀乞하였다. 범은 當場에 北郭 先生(북곽선생)을 꾸짖는 말이 「儒는 諛라, 平時에는 범을 가지가지로 嘲罵하다가 形便이 急해지니까 아첨하여 목숨을 求하며, 平時에는 人間에 있어서 모든 暴惡한 일을 敢行하고도 罪名을 전혀 범에게 돌리느냐?」고 하였다. 그리자 해가 붉으스레히 뜨니 범은 어디로인지 가버리고 말았다.
『兩班傳』.
  이것은 어떤 賤富가 어떤 가난한 兩班의 犯한 郡稅千石을 代償하여 兩班權을 사던 이야기다.
『閔翁傳』.
  이것은 閔翁의 逸話奇辯을 點綴하면서 間間히 諧謔과 傳說을 더하여 墮落한 社會의 一生을 그린 것이다.
『馬駔傳』.
  이것은 世俗의 虛僞一面을 論하여 交友의 難을 말한 것이다.
『穢德傳』.
  이것은 穢德의 貧窮에 對하여 窮하면 똥도 먹지만 입은 매우 깨끗하다 하여 그 純眞한 天性과 不遇한 環境을 깊이 同情한 것이다.
『金神仙傳』.
  이것은 不遇한 金弘基(김홍기)의 굶주림이 곧 神仙辟穀이라는 말이다.
『廣文傳』.
  이것은 乞人 廣文(광문)의 性行을 말한 것이다.
『虞裳傳』.
  이것은 博學能詩한 虞裳 李彦瑱(이언진)의 日本行에 經過한 이야기다.
  英·正(영조·정조) 兩代의 間에는 諺文小說이 가장 많이 出現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林慶業傳』·『朴泰輔傳』과 같이 男子를 中心한 小說은 그리 흔치 않고, 女子를 中心한 小說이 가장 多數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對하여 한번 생각해 볼 必要가 없지 아니하다. 말할진대 諺文은 內書라 하여 女子들의 專有物로 다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되어진 作品이면 女子들이 반드시 愛讀하였다. 그 까닭에 小說作家의 눈은 그리로 돌리면서 女子로써 命題한 作品임을 많이 내어 놓았나니 女子의 性行을 矯正함에 적지 않은 效能을 주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沈淸傳』도 그러하고, 지금 말하려는 『申金夫婦傳』·『薔花紅蓮傳』·『玉娘子傳』·『淑英娘子傳』·『玉丹春傳』도 또한 그러하다.
『申金夫婦傳』 李德懋(이덕무)
  이것은 年晩한 金道令과 申處女가 朝家의 特典을 입어서 成婚한 事實이다.
『薔花紅蓮傳』.
  이것은 鐵山 裵座首의 두 딸 장화·홍련이 繼母 許氏의 凶險한 手段에서 非命의 冤魂이 되었다가 府使 鄭東祐(정동우)에게 哀訴하여 冤怨을 갚은 事實이다.
『玉娘子傳』.
  이것은 永興 金座首의 딸 娘子가 殺人罪로 死刑宣告까지 받은 獄中의 郞君 李時業(이시업)을 내어놓고 그 代身에 갇히었다가 貞烈夫人으로 된 事實이다.
『淑英娘子傳』.
  이것은 天上仙女 淑英(숙영)娘子가 慶尙道 安東 白仙(백선)君과 奇緣을 맺은 後, 失寵을 원망하던 侍婢 梅月(매월)에게 暗殺을 當하였다가 壯元及第한 仙(백선)君이 돌아오자, 다시 살아나서 榮華를 누리던 事實이다.
『玉丹春傳』.
  이것은 平壤妓 玉丹春(옥단춘)에게 知人鑑이 있다는 것이다.
  純祖로부터 哲宗에 이르는 동안에는 小說의 作風이 아주 沈滯狀態에 돌아가고 말았다. 말한다면 英·正(영조·정조)時代에는 淊天의 勢로 高潮되었던 그것이 왜 이렇게 日落千丈의 느낌을 우리에게 주게 되는가? 벌써 正祖 末年에부터 小說作家에게 큰 打擊을 준 일이 있었다. 이를테면 燕巖(연암 박지원)의 族孫 朴南壽(박남수)가 『熱河日記』의 朗讀을 듣고서
  「先生이 文章에 아무리 能하나 稗官雜書를 좋아하니 무엇하랴?」하고 그 原稿를 불에 태우려 하였으며,
  正祖 十五年에 내린 敎旨에
  「近來 俗習이 다 學을 바라고 新書를 좋아하는 趨向이 있는지라. 나는 小說에 있어는 한 번도 펼쳐보지 아니하며, 內藏雜書를 다 버렸노라」하였으며,
  純祖 八年에 있은 南公轍(남공철)의 狀啓에
  「稗官雜書는 一切嚴禁하고 아울러 經史까지 購入함을 아직 말게 하라」고 하였다.
  이것을 綜合하여 본다면 그 本意가 燕京으로부터의 邪書(天主敎 書類)購入하는 그것에만 있는 듯하나, 小說界에 미친 影響도 實로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 時代의 小說로는 二三種에 지나지 못하나니 『天君本紀』·『晩香傳』·『後唐遺事』가 곧 그것이다.
『天君本紀』.(一名은 心史) 鄭琦和(정기화)
  鄭琦和(정기화)는 純祖 때의 사람인데, 本紀의 內容을 본다면 그 構思와 筆致가 菊堂(국당 정태제)의 『天君衍義』와 恰似한 것이다.
『晩香傳』.
  晩香(김만향)은 咸興 退妓의 딸로서 그 몸이 아직 童妓의 名簿에 있는 때이었다. 監司의 아들 冊房도령님 黃直綱(황직강)이 晩香(김만향)의 才色에 醉하여 「一自結緣, 待以正妻, 生則同居, 死則同穴」이라는 誓約文까지 쓰고서 彼此間 따뜻한 情을 通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職年의 苽滿으로 上京할 날이 當面하였다. 「兩班의 집에 妓生을 正室로 한다는 것이 웬 말이냐?」의 아버지 호통에 다시 말붙임도 못하여 보고 直綱(황직강)은 그 뒤를 따라서 간 것이었다. 새로 도임한 監司의 冊房은 有名한 色魔이었다. 晩香(김만향)을 불러 수청 들라고 强迫하였다. 晩香(김만향)은 죽을지언정 貞操를 빼앗기지 않기로 決心함에, 冊房은 그를 夾室에 가둬두고 威嚇과 勸誘로 밤낮 졸라대는 판이었다.
  直綱(황직강)은 上京한 지 며칠이 안 되어 아버지의 强壓的 命令下에서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본 집으로 돌아오던 길인데, 馬夫더러 暫間 서서 기다리라 하고, 自己는 三角山의 後麓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줄달음하여 咸興에까지 向하였다. 晩香(김만향)의 집에 찾아갔다가 그 어미에게 갖은 薄待를 받았다. 눈이 막 쏟아져 오는 밤에 쫓기어나서 그 前, 부리던 由吏를 찾아보고, 서러운 事情을 다 吐하였다. 그 이튿날 새벽인데, 直綱(황직강)은 由吏의 시키는대로 掃除夫의 假裝을 하고 冊房의 門庭에 들어가서 눈을 쓸었다. 晚香(김만향)은 귀에 익은 기침소리에 놀라서 미닫이를 열고 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과 눈이 한참이나 서로 마주 서고 있었다. 그러다가 直綱(황직강)은 晩香(김만향)의 눈짓을 따라서 도로 由吏의 집으로 간 것이었다.
  그 날 밤이었다. 晩香(김만향)은 아버지의 忌日祭라는 口實로서 冊房의 許可를 겨우 얻어 가지고 집으로 나오게 되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는 三十六計에 달음질이 上策이란 것이다. 晩香(김만향)은 成田江의 얼음판에서 물구멍을 찾아 신 한 켤레를 놓고 들어갔던 발자국을 뒷걸음질로 감쪽같이 밟으면서 나왔다. 그렇게 魚腹의 魂이 되었다는 것을 表示하고 두 사람은 黃草嶺을 껑정 뛰어 넘어서 目的地인 平壤城內에까지 無事히 다다랐다. 거기에 貰房 한 칸을 얻어 가지고서 晩香(김만향)은 刺繡와 裁縫으로 生活만 維持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써 가끔 冊子를 바꾸다가 郞君에게 올리었다. 그렇게 書籍이 생기는 대로 直綱(황직강)은 熱心으로 밤낮 讀習하여 한 해, 두 해를 지났었다. 그런데 直綱(황직강)은 本宅의 消息은 알 수 없었다. 또는 알려고도 아니하였다. 그적에 本宅에서는 馬夫의 여쭙는 말을 듣고서 三角山의 後麓을 죄죄 뒤집어 보아도 直綱(황직강)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仁王山 호랑이란 놈이 삼키었거니 하고 假形을 만들어 棺에 넣어서 葬事를 지내었다. 그리고 그 緣由를 祠堂에 告하는 同時에 임금에게까지 上奏하였다. 直綱(황직강)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느날 直綱(황직강)은 科擧보려 上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三試官 中의 한 사람이었다. 글을 뽑아가지고 御前에 들어가서 먼저 壯元及第의 글封를 떼고서 四祖와 姓名을 보니까, 分明히 自己의 아들 黃直綱(황직강)이었다. 이에 伏奏하되 「直綱(황직강)은 臣의 아들이온데 그는 君父를 속인 罪가 莫重하오니 마땅히 罷科하여지이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는 이미 죽은 줄 알았던 直綱(황직강)이 이제껏 살아 있는 것이 너무도 奇異하여 直綱(황직강)을 곧 불러서 물어 보았다. 事實의 顚末을 들은즉 晩香(김만향)의 節操와 德行이 特히 갸륵하다 하여 直綱(황직강)에게 紅牌를 내어주고 晩香(김만향)으로 正室을 삼으라 하였다. 따라서 「女中貞烈 金晩香(김만향)」이란 旌門을 내려 그것을 咸興에 세우게 하였다. 그 後에 두 夫婦는 갖은 富貴를 누리면서 榮光스럽게 이 世上을 마쳤다.
『後唐遺事』. 錦城 朴奉錫(금성 박봉석)
  錦城(금성 박봉석)은 哲宗 때의 사람인데, 十八歲부터 才子란 名聲이 喧藉하였었다. 이 遺事는 五季의 때, 後唐의 遺事를 演義化한 四卷, 八十八回의 巨作이다.
ㄹ. 第四期의 小說
  高宗의 卽位 後, 近四十年까지에는 小說의 作家가 한 사람도 없은 듯하다. 그 동안에 小說의 題材로 取用할 만한 大事變이 한두 번만 있지 않았다. 말한다면 外國과의 關係로는 丙寅(병인양요 1866年)·辛未(신미양요 1871年)의 洋亂과 日淸戰爭(청일전쟁 1894年)이 있었고, 國內의 情勢로는 壬午(1882年)軍亂·甲申(1884年)政變·甲午(1894年)東學亂이 있었다. 그러나 多種多樣의 그 事實을 描寫한 小說은 나온 것이 한 篇도 없었다. 그러다가 小說이란 새 作品이 비로소 나오기는 「是日夜 放聲大哭」이란 韋菴 張志淵(위암 장지연)의 痛告가 『皇城新聞』에 실린 그 後이었다. 被保護條約(을사늑약 1905年)에 五賊大臣이 調印한 그 날 밤(을사늑약 1905年)에 이 哭聲이 全國을 驚動시키었나니 이것은 國權喪失이란 哭聲이요, 그 條約은 將來合倂의 初步이었다. 이렇게 國亡의 地頭에 立脚한 그 때에야 丹齋 申埰浩(단재 신채호)의 作, 『乙支文德傳』·『李舜臣傳』·『崔都統傳』·『夢見諸葛亮』 等이 連出하였고, 또는 『伊太利(이탈리아)三傑傳』, 『葛蘇士(헤수스)傳』 等 譯本이 나타났었다. 이것을 時勢의 必然으로 보아야 할까? 그 當時에는 國權恢復에 熱中하였으며, 그런 偉大한 人物을 憧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밖에 『金山寺夢遊錄』과 『弄球室主人』 安國善(안국선)의 『禽獸會議錄』, 六堂 崔南善(육당 최남선)의 『洪景來實記』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 舊小說體에 屬한 것이요, 西洋風의 新體小說 또는 菊初 李人稙(국초 이인직)의 『雉岳山』과 春園 李光洙(춘원 이광수)의 『無情』이 처음 인 듯하고, 新聞에 小說欄을 두기는 『萬歲報』가 처음인 듯하다. 그 中에서 文體를 評한다면 丹齋(단재 신채호)의 文은 長槍大劍의 將軍과 같이, 雄毅한 風이 있으니 그러므로 煽動에 能하며, 春園(춘원 이광수)의 文은 淸歌妙舞의 美人과 같이, 纖巧의 態가 있나니 그러므로 描寫에 能하다.

3. 演戲
  우리가 아는바 李朝 時代에 歌曲 및 小說의 作家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그들이 演戲에 對하여는 손을 대고 건드려 볼 생각도 둔 것 같지 않다. 實狀, 學者와 文士가 덕놀음이나, 탈놀음을 꾸민다면 世上에서 容納을 받지 못할 羞恥거리로 될 것이다. 이러한 關係에서 어떤 사람은 劇作家의 素質이 있어 가지고도 劇本의 按出에는 生心을 못하였을지니 이 時代의 事情은 그렇게 寒心하였다. 廣大·蕉蘭伊의 놀음과 같은, 그런 演戲는 물을 것도 없는 일이요, 眞正한 意味의 劇으로는 비록 적기는 하나 「東廂記」와 「滿江紅」을 指摘하여야 되겠다.
「東廂記」. 汶陽山人(문양산인)
  이것은 金道令과 申處女의 成婚을 題材로 하여 꾸며낸 情劇이었다. 道令 金禧集(김희집)은 二十八歲, 處女 申德彬(신덕빈)의 딸은 二十一歲[李德懋(이덕무)의 『雅亭集』], 그때의 國定婚法으로서는 매우 晩婚이라고 볼만한 老總角, 老處女의 結婚이 그나마 朝家의 盛德에 依한 것이다.
  正祖 十五年 二月 봄의 일이었다. 그때에 京城內 士庶의 貧窮한 子女가 適當한 時期에 婚姻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正祖가 그것을 憫憐히 여기고 特히 國命을 내려, 그 宴費補助로 金五百, 布二段씩을 주어 一般에게 婚姻을 勸하니 그때, 結婚者의 數가 百五十名에 이르렀다. 그러나 金道令(김희집)과 申處女만은 여러 가지의 事情으로 因하여 그 좋은 特典에 參與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同年 六月에 正祖가 그 두 사람을 勸하여 約婚시키고 戶判 趙鼎鎭(조정진)과 宣惠堂上 李秉模(이병모)에게 分付하여 서로 雙方의 父母처럼 되어 下賜한 宴費로써 慶華스럽게 婚禮式을 맞치었다. 그 後에 國命을 받아서 이 空前絶後의 奇事佳傳을 記錄한 것이 李德懋(이덕무)의 「申金夫婦傳」이요, 또는 塡詞一日, 讎校一日, 謄校一日 그렇게 三日의 閑을 가지고서 劇을 만든 것이 곧 汶陽山人(문양산인)의 「東廂記」란 것이다.
「滿江紅」
  이것은 李鍾麟(이종린)의 作인데 그 內容을 얻어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時期에 劇場 비슷한 團成社·光武臺란 것이 京城 內에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朴春載(박춘재)·宋萬甲(송만갑) 等의 名唱이 흔히 出演한 모양이다.

4. 漢文學
  우리가 漢文學이란 어떤 것이냐를 考究하자면, 敎가 무엇이냐를 알아야 한다. 또는 儒敎가 封建制에 어떻게 有利하였다는 것까지도 알아야 된다. 儒敎 그 本質은 封建制의 擁護物로 되어진 것이다. 從來의 封建的 魔王이 一體로 그것을 適用한 것은 그런 見解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李朝의 封建制는 가장 發達된 封建制의 國家이었다. 그 發達은 勝朝에서처럼 佛敎를 依賴한 것이 아니요, 純全히 儒敎를 根據하여서 된 것이다. 封建的 國家는 本히 農民을 壓迫하는 機具로 된 것임에, 對內政策에 있어는 구태여 말하려고 아니한다. 그러나 對外政策에 關해서는 그저 黙過할 수가 없다. 外國은 可히 親近할지언정 信賴치는 못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儒敎의 李朝는 明國을 絶對로 信賴하였다. 말한다면 「大明天子, 賜國號曰 朝鮮이라」를 큰 榮光으로 하여 幼年 敎科用의 『童蒙先習』에다가 記入하였으며, 또는 明國이 亡한 後에도 大報壇을 쌓고 崇禎年號를 그냥 使用하였던 것이다. 儒敎人物은 果然, 沒人性한 人物이었다. 그따위의 人物에게 自存自立의 精神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을 것도 없는 일이다. 만일 李朝 五百年間에 그런 精神이 있는 사람을 헨다면 몇 사람이나 될까?
  첫째로는 宣祖 때의 사람, 白湖 林悌(임제)를 헤야 할지니 그는 臨終時에 아들을 불러 놓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四海의 各 나라에 皇帝로 일컬으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예로부터 그러지 못하였다. 이런 더러운 나라에 나서 죽는 것을 어찌 아까워하랴? 너희는 내가 죽은 뒤에 울지 마라」고 하였다.(『星湖僿說類選』)
  둘째로는 英祖 때의 사람, 正言 金若行(김약행)을 헤야 할지니 그는 나라에 이렇게 疏請하였다.
  「지금 中原에 帝統이 없으니 本朝에서 마땅히 帝號를 稱하고서 天子의 禮樂을 쓰자」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의 말이 비록 말로나마 그렇게 悲憤慷慨를 吐한 것이 얼마만한 快絶壯絶의 일이냐? 앉은 놈은 무덤 같고, 누운 놈은 주검 같은 그 人叢의 속에서 이런 不羈獨立의 산 사람이 나온 것도 奇異하지 아님은 아니었다.
  大體, 儒敎는 異己者를 排擠하는 데에는 能한지라, 그래서 서로의 물고 뜯고 죽이고 하는 士禍와 黨爭을 釀成하였다. 儒敎는 聖學만을 急務로 하여 武備를 輕視하는 데에는 能한지라. 그래서 全國의 經濟를 거의 衰退시키는 壬辰亂(임진왜란 1592)·丙子亂(병자호란 1636)을 招致하였다. 그러면서도 儒敎文學은 그 前에 보지 못하던 繁榮에 躍進하여 著作物이 많이 出現된 것만은 實로 可觀이었다. 어떤 記錄에 依하여 著作書類의 統計를 본다면 그 數字는 꼭 正確한지는 모르지마는, 그래도 相當한 考據에서 나온 것으로 肯定하면서 아래와 같이 그 數字를 보인다.
類別    種別
農學類    3種
醫學類   15種
語學類   11種
字書類   19種
兵學類   15種
圮誌類   36種
象緯類   14種
故實類   59種
文章類   40種
典章類   47種
儒家類   249種
官撰類   196種
御製類   107種
史記類    17種
  이렇게 書類로는 十四, 種目으로는 八百四十八에 達한 것은 前代에 比하여 實로 놀랄만한 數字이었다. 그 數字의 가운데에는 漢文學이 어느 程度에까지 繁榮되었다는 것이 다 包含되고 있다.
  그러나 高宗 末年에 가서는 아주 崩壞되고야 말 封建制, 그와 運命을 함께 할 漢文學은 一時的 繁榮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替代할 새 文學은 벌써 『正音(훈민정음)』製定의 當時에 脴胎하여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直後에는 歌曲·小說의 두 方面에서 큰 旺氣를 漸次 發揚하였다. 이것은 다만 物盛則衰의 定理로써 解明할 것이 아니요, 마땅히 新陳代謝의 公例로써 解明하여야 된다.
一. 散文
  李朝 時代의 古今의 文을 蒐集編纂한 것이 三種이 있는데, 그것을 提示한다면 이러하다.
『東文選』. 徐居正(서거정)
  徐居正(서거정)이 新羅로부터 李朝까지의 詩文을 抄出하여 一部를 만들고 그 이름을 『東文選』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東方文章의 炳然可觀할 것이 많다는 成宗의 命을 받아서 撰한 것이다.
  「東文粹」. 金宗直(김종직)
  「大東文粹」. 張志淵(장지연)
  그런데 抒情文에 屬한 漢文小說은 위에서 이미 論擧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敍事文·議論文·儀式文·騈體文에 屬한 文學的 作品을 例示하겠다.
ㄱ. 敍事文
  敍事文에는軍記類·史傳類·談話類·諧謔類·隨筆類의 다섯 가지로 區分하여 말하려고 한다.
1. 軍記類
  여기에는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에 關한 것과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 關한 것이 있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에 關한 것으로는 柳成龍(유성룡)의 『懲毖錄』, 釋南鵬(석남붕)의 『奮忠紆難錄』, 金良器(김양기)의 『少爲浦倡義錄』, 李萬能(이만능)의 『唐山義烈錄』, 鄭琢(정탁)의 『龍灣見聞錄』.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 關한 것으로는 「丙子錄」·「丙子湖南倡義錄」·「南漢日記」·「江都日記」.
2. 史傳類
『東國史略』 二卷 權近(권근)·李詹(이첨) 等의 共撰
『朝鮮史略』 十二卷 權近(권근)
『高麗史』 一百三十卷 鄭麟趾(정인지)
『朝鮮史略』 六卷 申叔舟(신숙주)
『海東諸國記』 申叔舟(신숙주)
『東國通鑑』 五十六卷 徐居正(서거정)
『東國纂要』 八卷 尹吳雲(윤오운)
『東史補編』 九卷 申翌聖(신익성)
『東史補遺』 四卷 趙有道(조유도)
『麗書』 七十卷 崔某
『東史提綱』 洪汝河(홍여하)
『麗史提綱』 十二卷 兪棨(유계)
『東史會綱』 十三卷 林象德(임상덕)
『東國文獻備考』 二百五十卷 英祖時
『東史綱目』 二十二卷 安鼎福(안정복)
『海東繹史』 六卷 韓致奫(한치윤) 光文會版
『燃藜室記述』 六卷 李肯翊(이긍익) 光文會版
『歷史輯略』 二卷 金澤榮(김택영)
『東國史略』 二卷 玄采(현채)
3. 談話類
  李陸(이륙)의 『靑坡劇談』, 成俔(성현)의 『慵齋叢談』, 晉山 姜希孟(진산 강희맹) 『村談解頤』, 徐居正(서거정)의 『太平閑話』, 南孝溫(남효온) 『秋江冷話』, 曺偉(조위)의 『梅溪叢話』, 適菴 曺伸(적암 조신)의 『謏閒瑣錄』, 柳夢寅(유몽인)의 『於于野談』, 李命源(이명원)의 『東野彙輯』, 李羲準(이희준)의 『溪西野談』.
4. 諧謔類
  宋寅(송인)의 『古今笑叢』, 醉隱 宋世琳(취은 송세림)의 『禦眠盾』, 雙泉 成汝學(쌍천 성여학)의 『續禦眠盾』, 作者未詳의 『靑邱笑叢』.
5. 隨筆類
『大東韻府群玉』. 二十卷 權文海(권문해)
  이것은 元의 陰時夫(음시부) 著 『韻府群書』를 依倣한 것인데, 檀君으로부터 李朝 宣祖까지의 數千年間 事實을 韻字로 分類하여 編述한 一種의 辭書이었다. 本書 編撰에 引用한 書籍으로 말하면 朝鮮의 것이 一百七十五種, 中國의 것이 十五種이며, 그 分類法은 地理· 國號· 姓氏·人名·孝子·烈女·守令·仙名·木名·花名·禽名 等 十一個의 種目으로 하고 거기에 各히 說明을 내리었다.
『芝峰類說』. 二十卷 李睟光(이수광)
  本書는 그 全卷을 天文·時令·災異·地理·諸國·君道·兵政·官職·儒道·經書·文字·文章·人物·性行·身形·言語·人事·雜事·技藝·外道·宮堂·服用·食物·卉木·禽蟲 等 項目으로 나누어 合計 三千四百三十五條로 編述하였다.
『類苑叢寶』. 四十七卷 金堉(김육)
  本書는 著者가 兵火로 因하여 모든 文獻의 燒滅됨을 慨歎하여 本國 또는 中國의 書籍을 參考로 하고서 編述한 것이다. 全篇을 天道·天時·地道·帝王·官職·吏部·戶部·禮部·刑部·兵部·工部·人倫·人道·人事·文學·筆墨·璽印·珍寶·布帛·器用·飮食·冠服·米穀·草木·鳥獸·蟲魚·四夷·鬼神 等 項目으로 나누었다.
『潘溪隨錄』. 二十六卷 柳馨遠(유형원)
  이것은 法制書類로 볼 수 있는데, 全篇을 田制·田制後錄·田制考說·田制後錄考說·敎選之制·敎選考說·任官之制·任官考說·職官之制·職官考說·祿制·祿制考說·兵制·兵制考說·兵制後錄·兵制後錄考說·續篇 等으로 나누고 이에 關한 沿革을 各 方面으로 敍述하였다.
『增補山林經濟』. 十六卷 柳重臨(유중림)
  本書는 政治生活에서 失脚한 어떤 窮士가 山林에 隱居하면서 自己의 物的生活의 온갖 方面을 隨錄한 것인데, 柳重臨(유중림)이 그것을 增補하여 完成하였다. 이제 그 內容을 말한다면 人君·治農·種樹·養花·牧養·治圃·攝生·治膳·救荒·家政·求嗣·救急·四時纂要·雜方 等 十六篇으로 되었다.
『星湖僿說』. 十一卷 李瀷(이익)
  本書는 本히 五篇으로 되었는데, 그 後에 順菴 安鼎福(순암 안정복)이 讀者의 便覽에 供하기 爲하여 分門類選하여 그 이름을 星湖僿說類選이라 하였다. 말한다면 天地篇을 天文·地理·鬼神의 三門으로, 人事篇을 人事·論學·論禮·親屬·君臣·治道·服食·器具·技藝의 九門으로 經史篇을 經書·論事·聖賢·異端의 四門으로, 萬物篇을 禽獸·草木의 二門으로, 詩文篇을 論文·論詩의 二門으로 나누고 그 各門에 그와 關聯되는 모든 事項을 類聚하였다.
『考事新書』. 十五卷 徐命膺(서명응)
  本書는 그 全篇을 天道·地理·紀年·典章·儀禮·行人·文藝·武備·農圃·牧養·日用·醫藥 等으로 分類하였으며, 特히 行人部에는 各國과의 使節來往에 關한 記事까지 쓰이었다.
『才物譜』. 八卷 李成之(이성지)
  本書는 全篇을 天譜·地譜·人譜·物譜로 나누고 自然界 또는 人事界의 온갖 現象에 對한 說明을 더하였다.
  이 밖에 作者未詳의 『新編玉叢』 四卷, 『萬家叢玉』 十二卷이 있는데, 그것들도 그 編法이 前書들과의 特別한 差異가 없다.
ㄴ. 議論文
「首陽山辨」. 徐命膺(서명응)
  徐命膺(서명응)은 純祖 때의 사람인데, 그 號는 保晩齋(보만재 서명응)이다. 「海州 有首陽山. 山下, 有伯夷叔齊二子之祠, 成於肅宗卒已, 賜額曰 淸聖廟. 於是, 朝之薦紳大夫, 或碑或板, 各有表章, 然 要皆以爲山名偶同, 而俎豆享之, 如南康武侯祠者. 嗚呼 豈其然乎, 吾嘗以爲中國, 無首陽而爲有, 以文勝也, 我國 有首陽而爲無, 以文不足也. 何哉, 中國, 稱首陽凡四, 在蒲坂者 馬融之說, 而以蒲坂 有雷首之山也, 隴西者 曹大家之說, 而隴西有首山也, 洛陽東北者 戴延之之說, 而以二子, 自岐陽東北 至首陽也, 遼西者 許愼之說, 而以二子之歌, 有西山之稱也, 夫以一首陽而四之, 可見其本無此山, 而惟求必得, 因其近似, 爲之傅會也, 故曰無首陽而爲有, 以文勝也, 若我東之首陽則傳自古昔, 無文字緣飾, 但因古老相稱, 其事質, 其理直, 其爲名, 非出於傅會, 而唐裵矩云 高麗 本狐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李渤云, 朝鮮亦有陽山, 實夷齊隱處, 與箕子有往來之迹. 夫以中國之人能道外國之事, 此必有從古流傳之語. 而特我東, 自新羅後, 離合無常, 國無職方之紀, 野無傳記之述, 遂以二子 中國之人 必不能至外國, 仍自以爲冒稱也, 故曰 有首陽而爲無, 以文之不足也. 夫首陽之稱何始乎, 始於孔子之言, 孔子, 謂齊景公 有馬千駟, 死之日民無德而稱焉,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而不及首陽之在地, 故後之儒者求首陽於成周五服之內, 甚或以爲薇蕨, 亦周之草木, 霑周之雨露, 夷齊不當食, 以是爲二子去就之累, 至于今誚之不止. 然首陽之左何地, 但以孔子之言與二子之行, 而決之, 則蔑不定矣. 當二子之諫伐而逃也, 顧瞻四方求其所適, 則西至流沙, 南至于江漢, 北至于幽薊, 凡禹貢所載盡入周家之版圖, 以二子至潔之心, 與鄕人立其冠不正, 猶且望望然去之, 況能一日安於周家版圖之內乎. 故蹙蹙靡騁東還故國, 則梯航不通於豊水, 土地非周家之土地, 正朔不奉於王城, 雨露非周天之雨露, 當時, 二子之所通 惟我東之首陽而已, 舍乎此則無可往矣. 故夫子將言人之聲稱不在所處之位, 先擧貧富之極而對言之, 餓與千駟貧富之極也, 又擧外內之極而封言之, 首陽與齊外內之極也, 夫以所處之相反如此, 而一傳於後, 一無傳於後, 尤見其莫尙者德也. 若首陽處乎浦坂等地, 與齊同爲內服, 則孔子但取其餓而已, 不必復言其首陽之下也, 使中國有首陽, 而我東無之, 惟當以二子之行, 聖人之言, 推知其必在我東, 況我東首陽之名著於史, 述於雜記者, 又昭昭可徵乎.」(『保晩齋集』 六)
  世傳에 梅竹堂 成三問(매죽당 성삼문)이 燕京으로 가던 길에서 夷齊廟碑에다가 아래와 같은 詩 一首를 씀에, 碑에서 愧汗이 흘렀다고 한다. 만일 그로 하여금 夷·齊(백이·숙제)의 隱遯處가 海州의 首陽山임을 알았더면 이런 詩로써 나무렴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거기에 또 愧汗이란 말도 添加되지 않았을 것이다.
  「當年叩馬敢言非, 大義堂堂日月輝, 草木亦霑周雨露, 愧君猶食首陽薇.」
ㄷ. 儀式文
「誓海文」. 秋浦 黃愼(추포 황신)
  黃愼(황신)의 字는 思叔, 號는 秋浦(추포 황신), 牛溪(우계 성혼)門人이었다. 甲午에 朝命으로서 明國의 媾和使 沈惟敬(심유경)을 따라서 熊川 倭管에 留한 지 二個年이었다. 그 동안에 明使를 接遇하며, 倭酋를 酬應하면서 때로 賊情을 朝廷에 馳啓하였다. 丙申에는 國信使로서 明의 關酋冊封使 楊邦亨(양방형)과 함께 日本으로 渡往하게 되었다. 그때에 水路가 險惡하고 風濤가 어찌나 甚하였던지 舟人이 다 水疾로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公이 海神에 誓하는 文을 지었다.
  「豺虎叢中 旣持二年之節, 蛟龍窟上更乘八月槎, 捐軀是甘, 稽首自誓, 伏念某遭時板蕩, 許國驅馳, 雖險阻艱難備嘗之矣, 然州里蠻貊 可行乎哉, 賴有衷赤之不渝, 可質上蒼之無愧, 四千里行役何敢一毫憚勞, 三十年工夫正宜今日得力, 固王事之靡鹽, 抑臣職之當然, 直掛風帆, 遙指日域, 苟可安社利國死且不避, 如使辱命失身生亦何補, 伏願聖靈 鑑此誠沈, 幸斯言之不誣, 天有知也, 倘一念之或怠, 神其殛之.」
  公이 八月 四日에 乘船하였는데, 그 前夜에 이런 詩를 지었다.
  「丈夫不怕死, 怕死非丈夫, 白刃猶可蹈, 鼎鑊尙可趨, 所願全吾節, 安得全吾軀, 賢哉鵄述郞, 抵死心不渝.」(『秋浦集』)
  『芝峰類說』. 「黃檜原某於丙申年間, 以明使沈惟敬接伴官, 入釜山倭營久處賊中, 又以通信使赴日本危困極矣, 而少無怖色竟得全還. 其誓海文辭甚精工.」
  光海 癸丑에 李爾瞻(이이첨)이 國舅 金悌男(김제남)의 謀逆을 誣構하고서 淸流를 網打하려는 그때에 公이 月沙(월사 이정구)·淸陰(청음 김상헌) 等 諸賢과 함께 鞠問을 받다가 마침내 兌津에 귀향 가서 卒하니 象村 申欽(상촌 신흠)이 淸陰(청음 김상헌)에게 보낸 글에,
  「秋浦云亡, 蓋無人世之念, 行年五十經歷世變盡矣, 先死者未必非福, 但此公之死非惟私慟, 似此君子人何處得來, 欲作一文字抒余衷, 路遠恐未乘便尤用慨然.」
  月沙 李廷龜(월사 이정구)가 淸陰(청음 김상헌)에게 보낸 글에
  「去年, 哭思叔, 今年 又哭鼇老, 平生知舊, 零落殆盡, 存者 又落落晨星, 每一念之 忽忽不樂.」(『秋浦集拾遺』)
ㄹ. 騈體文
募粮檄. 鄭經世(정경세)
  鄭經世(정경세)는 宣祖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사람인데 그 號는 愚伏(우복 정경세)이다. 「醜虜 逞豺豕之毒, 有生 方憤於共天, 疲兵急庚癸之呼 相死敢望於詞志, 聽下風之慕義, 託簡書而傳情, 興言社稷之深羞, 罔極臣民之長痛, 腥煙燻染於鍾簴漂泊十三廟英靈, 殷血濺汚於衣冠 板蕩二百年文物, 金城失千雉之壯固, 玉輦困一隅之風霜, 戎疾不殄於讎邦傷心 四郊多壘, 皇天尙慳於悔禍瞥眼 三時已窮, 顧惟環海蒼生, 本是誰家赤子, 揮涕念行在 雖切少陵之忠誠, 仗劍出全師 奈無丞相之權力, 糾合摧山之, 健卒 額不滿千, 捕斬陸梁之凶徒 馘纔半百, 縱不能扶天傾而雪主辱, 亦庶幾有進死而無退生, 第此兵燹之彌年, 正値民産之掃地, 箕斂而餉 敢言居有積倉行有褁糧, 道包而炊, 其奈軍無見糧 士無生氣, 愁看楚卒之半菽, 願借周瑜之二囷, 竊聞諸君義不後君, 忠恩益國, 玆念秦飢, 幸物越視, 胡命其能久 是稔惡就誅之辰, 富人不愛錢 乃撥亂戡禍之策, 嗚呼, 一片葵薺誠悃 非緣食祿不食祿而有深淺, 七尺草芥身軀 當看除賊未除賊而爲生死, 未洩公私之積痛, 更立天地而何顔, 一膝難屈於讎庭 已分寧蹈東海, 萬鱗方困於涸轍 惟願急激西江.」(『愚伏集』 八)
「廣寒殿 玉樓 上樑文」. 許景樊(허경번)
  許景樊(허경번)의 字는 蘭雪인데, 그 兄 篈(허봉)·筠(허균)과 함께 文으로써 海東에서 鳴하였다. 그런데 이 上樑文은 그가 八歲에 지었다고 한다.
  「述夫 寶蓋懸空 雲輧超色相之界, 銀樓耀日 霞楹 出迷塵之壺, 雖復 仙螺運機 幻作璧瓦之殿, 翠蜃吹霧 噓成玉樹之宮, 靑城丈人 玉帳之術 斯殫, 碧海王子 金櫝之方 畢施, 自天作之 非人力也, 主人名編瑤籍, 職綴瓊班, 乘龍太淸 朝發蓬萊 暮宿方丈, 駕鶴三島 左挹浮邱, 右拍洪厓, 千年玄圃之棲遲, 一夢人間之塵土, 黃庭誤讀謫下無央之官, 赤經結緣, 悔入有窮之屋, 壺中靈藥纔下指於玄砂, 脚底銀蟾 遽逃形於桂宇, 笑脫紅埃赤日, 重披紫府丹霞, 鸞笙鳳管之遊 喜續舊會, 錦幙銀屛之孀宿 悔過今霄, 胡爲日官之恩綸, 俾掌月殿之牒奏, 官曹淸切 路踐八霞之司, 地望崇高 名壓五雲之閣, 寥生玉斧 樹下之吳質無眠, 樂奏霓裳 欄邊之素娥呈舞, 玲瓏霞佩 振霞錦於仙衣, 熠熠星冠 點星珠於人勝, 仍思列仙之來會, 尙乏上界之樓居, 靑鸞引玉妃之車 羽葆前路, 白虎駕朝元之使, 金綬後塵, 劉安轉經 捘雙龍於案上, 姬滿逐日 駐八鳳於山阿, 霄迎上元, 綠髮散三角之髻, 晝接帝女, 金梭織九紋之綃, 瑤池衆眞會南峰, 玉京群帝集北斗, 唐宗踏公遠之杖 得羽衣於三章, 水帝對火仙之碁, 賭寰宇於一局, 不有紅樓之高構, 何安絳節之來朝, 於是移章十洲, 馳檄九海, 囚匠星於屋底 木宿掄材, 壓鐵山於楹間, 金精動色, 坤靈揮鑿 騁巧思於般倕, 大冶鎔爐 運奇智於鍾範, 靑赮垂尾 雙虹飮星宿於河, 赤霓昻頭六鼇戴蓬萊之島, 璇題燭日 出彤閣於煙中, 綺綴流星 駕翠廊於雲表, 魚緝鱗於玉瓦, 雁列齒於瑤階, 微連捧旗 下月節於重霧, 鳧伯樹纛 設蘭幄於三辰, 金繩結綺戶之流蘇, 珠網, 護雕欄之阿閣, 仙人在棟氣吹彩鳳之香臺, 玉女臨窓 水溢雙鸞之鏡匣, 翡翠簾 雲母屛 靑玉案 瑞靄霄凝, 芙蓉帳孔崔扇 白銀牀 祥蜺盡鎖, 爰設鳳儀之宴, 俾展鷰賀之誠, 傍招百靈, 廣延千聖, 邀王母於北海 斑麟踏花, 接老子於西關靑牛臥草, 瑤軒張錦紋之幕, 寶簷低霞色之帷, 獻靈蜂王紛飛炊玉之室, 含果雁帝出入薦瓊之廚, 雙成鈿管 晏香銀箏 合鈞天之雅曲, 婉華淸歌 飛瓊巧舞 雜駮空之靈音, 龍頭瀉鳳髓之醪, 鶴背捧麟脯之饌, 琳筵玉席光搖九枝之燈, 碧藕氷桃 盤盛八海之夥, 獨恨瓊楣之乏句. 緊致上仙之興嗟, 淸平進詞 太白醉鯨背之已久, 玉臺摛藻長吉 笑虵神之太多, 新宮勒銘山玄卿之雕琢. 上界鐫璧 蔡眞人之寂寥, 自慚三生之墮塵, 誤登九皇之辟剡, 江郞才盡, 夢退五色之花, 梁客詩催 鉢徹三聲之響, 徐援彤管, 笑展紅牋, 河懸泉湧 不必覆于安之衾, 句麗文道 未應類謫仙之面, 立進錦囊之神語, 留作瑤宮之盛況, 置諸雙樑, 資於六偉,
抛樑東, 曉騎仙鳳入珠宮, 平明日出扶桑底, 萬縷丹霞射海紅.
抛樑南, 玉龍無事飮珠潭, 銀牀曉起花陰午, 笑喚瑤妃脫碧衫.
抛樑西, 碧霞零露彩鸞啼. 春羅玉字邀王母, 鶴馭催歸日已低.
抛樑北, 溟海茫洋侵斗極, 鵬翼擊天風力掀, 九霄雲垂雨氣黑.
抛樑上, 曙色微明雲錦帳, 仙夢初回白玉牀, 臥聞北斗回杓響.
抛樑下, 八堎雲黑知昏夜, 侍兒報道水晶寒, 曉霜已結鴛鴦瓦.
伏願上樑之後, 琪花不老, 瑤草長春, 曦舒凋光 鄕鸞輿而猶戲. 陸海變色 駕颷輀而尙存. 銀窓壓霞 下視九萬里 依微世界, 璧戶臨海 笑看三千年 淸淺桑田, 手回二霄日星, 身遊九天風露.」(『明人詩綜』)
明末의 戲曲大家 尤侗(우통)의 지은 「朝鮮竹校詞」
「柳花渡口杏花紅, 八道歌謠東國風, 叢憶飛瓊女道士, 上樑曾到廣寒宮.」
  여기에 이른바 飛瓊女道士는 許蘭雪(난설 허경번)을 가리친 것이니 그런즉 이 上樑文은 우리 海東에서뿐 아니라, 漢土에까지 그 聲價가 높았던 것을 넉넉히 알겠다.

二. 韻文(詩)
  李朝 時代에는 詩學에 直面한 風尙이 더욱 甚하여 漢學의 素養이 있다는 사람은 詩를 吟詠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흔히는 人生의 實生活에 別로 關與가 없는 것으로서 江南風月을 嘯弄함에 지나지 못하였음에, 아마 「齋狗三年에 能風月이라」는 웃음머리의 말까지도 있은 모양이다. 그러나 詩는 情에서 나오는 것이라. 自家의 情은 表現하고 景을 敍述함에 있어는 많은 評價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浮華纖巧만을 힘 쓰라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實生活에서 떠나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떤 個人의 文集에나, 그 他 書類에나 詩가 重要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여기로부터 아래와 같은 詩의 撰集이 또한 있게 되었다.
『大東詩林』. 七十卷 柳希齡(유희령)
『國朝詩刪』. 七十卷 權韓(권한)
『海東遺珠』. 一卷 洪世泰(홍세태)
『海東遺珠』는 閭巷間 詩律의 刊集되지 못한 것을 編한 것이오. 이 밖에 또 詩學의 論述이 있으니
『東人詩話』. 徐居正(서거정)
『惺叟詩話』. 許筠(허균)
文章篇. 李睟光(이수광)의 『芝峯類說』
文學篇. 金堉(김육)의 『類苑叢寶』
詩文篇. 李瀷(이익)의 『星湖僿說』
文藝篇. 徐命膺(서명응)의 『考事新書』
  李朝 五百年間의 詩學은 세 個의 時期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第一期는 李太祖(이성계)로부터 仁宗의 때까지를 이름이니 이 時期에는 詩人들의 大部分이 宋의 蘇·黃[蘇軾(소식)·黃庭堅(황정견)]을 尙하였다. 第二期는 明宗으로부터 光海의 때까지를 이름이니 이 時期의 詩人들은 다 崔·白[崔慶昌(최경창)·白光勳(백광훈)]을 尙하였는데, 崔·白(최경창·백광훈)은 唐을 學한 까닭이다. 第三期는 仁祖로부터 高宗의 때까지를 이름이니 이 時期의 特色은 功令의 詩體이었다.
ㄱ. 第一期의 詩學
登百祥樓. 趙浚(조준)
  趙浚(조준)은 일찍 「滌蕩東溟當有日, 居民拭眼待澄淸」의 詩로써 自負心을 表示하였겠다. 麗末의 大司諫으로서 累萬言의 疏書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그 中에 私田革廢疏는 가장 時宜에 砭切한 것이었다. 그런데 突然히 變節하여 李氏를 臣事하는 中에서 明使 祝孟(축맹)의 館伴으로 되어 百祥樓에서 이 詩를 지어 隋兵의 沒敗를 嘲笑하였다. 祝孟(축맹)은 그 嘲笑를 中國人의 羞恥로 하여 詩思까지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薩水蕩蕩漾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話, 不滿征夫一笑餘.」(『國朝人物志』)
「嗚呼島弔田橫」. 鄭道傳(정도전)
  鄭道傳(정도전)의 號는 三峰(삼봉)이었다. 麗末에 判三軍府事까지 되었다가 李氏를 推戴하는 功臣 中의 한 사람으로 되었는데, 그의 著書로는 『心理學三篇』·『經濟文鑑』·『經國大典』 等이 있었다.
  秦始皇이 田齊를 倂呑한 後에 田橫(전횡)이 東으로 走하여 우리의 西海島中에 그 몸을 던지었던데, 그가 漢太祖의 부름에 依하여 「薤露歌」로써 最後를 告한 後에 그 島名이 嗚呼로 된 것이다.
  「曉日出海東, 直照孤島中, 夫子一片心, 正與此日同, 相去曠千載, 嗚呼感予衷, 毛髮豎如竹, 澟澟吹英風.」(『明人詩綜』)
「和端宗 子規詩」. 曺尙治(조상치)
  端宗은 十二歲의 弱齡으로 王位에 올랐다가 그 叔父인 首陽大君(世祖)에게 그 位를 빼앗기고 寧越에 遷囚하였을 때, 바로 十六 歲되던 그 해의 봄에 子規소리를 듣고서 「一自冤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夜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胡乃愁人耳獨聰」의 詩 一首를 지었던 것이다. 그에 應하여 曺尙治(조상치)가 아래와 같은 詩를 읊조리었다.
  「子規啼, 子規啼, 夜月空山何所訴, 不如歸不如歸, 望裏巴岑飛欲度, 看他衆鳥摠安巢, 獨向花枝血謾吐, 形單影孤貌憔悴, 不肯尊崇誰爾顧, 嗚呼, 人間冤恨豈獨爾, 義士忠臣激不平, 屈指難孟數.」(『國朝人物志』)
「和鍾陵山居詩」. 金時習(김시습)
  東峰 金時習(동봉 김시습)은 난 지 八月에 能히 수시로 글을 쓰고 三歲에 詩를 지은 神童的 秀才이었다. 그의 著作 中에는 詩 萬餘篇(『師友言行錄』)이 있었다는데 지금에 傳하는 것으로 『梅月堂集』 十七卷 九冊뿐이다.
  栗谷(율곡 이이)云 「人體天地之塞, 以淸濁厚薄之不齊, 有生學知之別, 此以義理言也, 若於時習者於文天得, 則文字亦有生知矣.」
  「蛺蝶雙雙飛藥畦, 山禽饒語竹籬西, 一叢枸杞花初遍, 三椏人蔘葉已齊, 翠竹林中香麝睡, 紫荆枝上畫肩啼, 千峰昨夜疎疎雨, 泛濫南溪漲小溪.」(『列朝詩集』)
「登鳳山樓 次韻」. 許琮(허종)
  許琮(허종)은 明使 董越(동월)의 館伴으로서 서로 唱和하는 中에서 이 詩를 지었다.
  「獨倚雕欄㡌影斜, 客中衰鬢已非鴉, 不禁杜宇聲聲苦, 啼盡東風第一花.」
「所串館道中卽事」. 許琮(허종)
  「數株官柳野橋傍, 飛絮紛紛揆馬香, 工雨欲來龍氣黑, 水風吹作十分涼.」(『皇華集』)
  董越(동월) 許公詩序에 音律偕暢, 蕭然出塵.
「征野人凱旋」. 申叔舟(신숙주)
  申叔舟(신숙주)가 世祖 五年에 野人 李滿住(이만주)를 破하고 巢穴까지 獲하는 中에 이 詩를 지었겠다.
  「虜中霜落塞垣寒, 鐵騎縱橫百里間, 夜戰未休天欲曉, 臥看星斗正闌干.」
「鏡浦臺」. 崔澱(최전)
  崔澱(최전)의 字는 彥沈 인데, 八歲부터 詩에 能하여 十八歲에 進士에 登하고 二十二歲에 歿하였다.
  「蓬萊一入三千年, 銀海茫茫水淸淺, 鸞笙今日獨飛來, 碧桃花下無人見.」
  栗谷(율곡 이이)云 「彦沈詩 似丹穴鳳雛, 聲纔出穴已足駕人, 讀之, 風露爽然, 殆非食煙火人語.」
  愚伏 鄭經世(우복 정경세) 云 「信口吐詞, 皆成瓊屑.」
  疎菴 任叔英(소암 임숙영) 云 「服膺盛唐, 其詩 淸越俊逸.」
「春日」. 崔澱(최전)
  「楊柳依依江水生, 杏花如雪落無聲, 靑霞捲盡畫樓出, 中有玉人吹玉笙.」(『明人詩綜』)
  明 成祖의 妃는 朝鮮 權永均(권영균)의 妹로서 簫를 嬴吹한 까닭에 「璚花移入大明宮, 一樹凝香倚晩風, 贏得君王留步輦, 玉簫嘹喨 月明中」이라는 王彩司의 宮詞가 있었으니, 이 宮詞에다가 「中有玉人吹玉笙」을 비추어 보는 것도 趣味없는 일은 아니겠다.
「讀離騷經」. 金麟厚(김인후)
  金麟厚(김인후)의 號는 河西(하서 김인후)인데 仁宗 때의 사람이었다. 五歲부터 綴文에 能하여 그 名聲이 一世에 膾炙하였다.
  「靑楓江上未招魂, 白日何時得照寬, 荷蓋水車消息斷, 夕陽揮淚灑乾坤.」(『國朝人物志』)
ㄴ. 第二期의 詩學
「客懷」. 李達(이달)
  李達(이달)의 號는 蓀谷(손곡 이달)이요, 明宗 때의 사람이었다. 詩로서는 李朝 三唐의 한 사람이로되 庶流라는 名目下에서 一生을 不遇坎軻하였다.
  「此身所復計西東, 到處悠悠逐轉蓬, 同舍故人流落後, 異鄕新歲亂離中, 歸鴻影度千峰雪, 殘角聲飛五夜風, 惆悵水雲關外路, 漸看芳䒤思無窮.」(『明人詩綜』)
「紅流洞」. 李達(이달)
  「中天笙鶴下秋霄, 千載孤雲已寂寥, 明月洞門流水在, 不知何處武陵橋.」
  여기에다가 一蠧 鄭汝昌(일두 정여창) 紅流洞詩를 집어넣고서 對照하여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孟頭流千萬疊, 孤帆又下大江流.」
「海上詩」. 李達(이달)
  「碧海波空雲影涵, 白鷗無處上苔巖, 山花落盡不歸去, 家在石峰江水南.」(『國朝人物志』)
漁父. 朴文昌(박문창)
  朴文昌(박문창)은 明宗 때의 사람인데, 郭山 雲興館 畫屛에 이 詩를 쓰었다.
「萬頃滄波欲暮天, 穿魚換酒柳橋邊, 客來問我興七事, 笑指蘆花月一船.」(『明人詩綜』)
「花煎詩」. 白湖 林悌(백호 임제)
  白湖(백호 임제)는 俗離山에 숨어 있는 成大谷(성대곡)에게서 詩를 배웠으며, 벼슬은 評事에 지나지 못하였다.
  「鼎冠撑立小溪邊, 白粉淸油煮杜鵑, 雙箸執來香滿口, 一年春色腹中傳.」
「閨怨」. 白湖 林悌(백호 임제)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歸㯤掩重門, 泣向梨花月.」(『明人詩綜』)
  象村 申欽(상촌 신흠)은 매양 白沙(백사 이항복)로 더불어 白湖(백호 임제)를 論함에 「胸中에 凝滯가 없이, 蜃樓가 架空한 듯한 奇男이며, 詩는 三舍를 避하여야 되겠고, 建鼓登壇하며 狎主度盟하기는 白湖(백호 임제) 그 사람밖에 없다」고 하였다.(『白湖集』序)
「夜吟」. 李舜臣(이순신)
  忠武公 李舜臣(충무공 이순신)은 文武兼全한 大偉人이었다. 그러나 世上에서 李舞臣(이순신)이라면 空前絶後한 海軍界의 大戰略家로만 認定하고 空前絶後의 大詩人인 것을 아는 이가 적은 듯하다.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겠다. 그의 詩名은 武功에게 파묻히운 까닭이라 하노니 그의 詩는 悲壯沈鬱한 杜甫(두보)의 詩를 읽는 맛이 있다.
  「蕭蕭風雨夜, 耿耿不寐時, 懷痛如抽膽, 傷心似割肌, 山河猶帶慘, 禽鳥亦吟悲, 國有蒼黃勢, 人無任轉危, 恢復思諸葛, 長驅慕子儀, 經年防備策, 今作聖君欺.」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耿耿不寐夜, 殘月照弓刀.」
「贈宣居怡」. 李舜臣(이순신)
  「北去同勤苦, 南來共死生, 今夜一杯酒, 明日別離情.」(『忠武公全書』)
「言志詩」. 金德齡(김덕령)
  金德齡(김덕령)의 字는 景樹(경수)인데, 光州 石底村에 있었으므로 後日에 石底將軍(倭놈은 돌구멍에서 나왔다)이라는 稱號까지 얻었다. 自少로 儒를 業하여 甚히 謙恭한 까닭에 누구든지 그의 勇力이 絶倫한 것을 몰랐었다. 姊夫 金應會(김응회)가 起義하기를 자주 勸하였으나, 그는 어머니의 계심을 因하여 應하지 않았다. 癸巳에 어머니가 歿하시고 또는 그에게 孔明(제갈공명)의 智와 關羽(관우)의 勇의 있다는 李景麟(이경린)·李貴(이귀)의 力薦으로써 그는 마침내 義兵將으로 되었다. 그래서 倭賊은 그의 智勇을 무서워 湖南을 敢히 犯치 못하는 그 一方에 그를 嫌忌하는 者가 朝廷에서 생기게 되었다. 甲午에는 그가 犯法한 軍人 하나를 斬한 거기에 對하여 起兵한지 二年에 寸功을 세우지 못하고 人命만 殘酷히 殺害한다는 誣告를 받아, 拿囚되었던 일이 있었으며, 丙申 秋에는 鴻山 土賊 李夢鶴(이몽학)과의 聯絡이 있었다는 誣陷을 입어서 일찍 詩로써 表示하였던 素志를 이루지 못하고 杖斃의 魂이 되고 말았다.
  「絃歌不是英雄事, 劍舞要須玉帳遊, 他日功成歸去後, 江湖漁釣更何求.」(『東國名將傳』)
「三壯士詩」.
  三壯士는 金千鎰(김천일)·崔慶會(최경회)·黃進(황진)을 이름이니 그들이 死에 臨한 그때에 이 詩를 지었다.
  「矗石樓中三壯士, 一杯笑指長江水, 長江萬古流滔滔, 波不竭兮魂不死.」
  「癸巳六月, 倭圍晉州 八日而陷, 牧使 徐元禮, 判官 成守璟, 倡義使 金千鎰, 本道兵使 崔慶會, 忠淸兵使 黃進, 義兵復讎將 高從厚等 皆死, 死者 六萬餘人, 牛馬鷄犬不遺, 賊皆夷城, 塡壕, 堙井, 刊木以快前憤, 時癸巳 六月 二十八日也, 時外援不至, 又千鎰所率皆,京城市井召募之徒, 又與徐元禮不相能, 主客相猜, 號令乖迕是以甚敗…」(『牧民心書』 三, 禦寇條)
  「王辰亂에 晉州判官 金時敏(김시민)이 數千에 지나지 못하는 殘軍으로써 能히 十數萬의 大敵을 擊退하고서 城을 保全하였다. 그런데 丁酉再亂(癸巳의 誤)에는 牧使 徐元禮(서원례)와 倡義使 金千鎰(김천일) 等의 거느린 兵이 六萬에 이르렀으니 前에 比하면 十倍라. 사람마다 城을 지킴에 아무 걱정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州妓 論介(논개)는 혼자 근심하였다. 千鎰(김천일)이 그것을 알고 請하여다가 물으니 論介(논개)가 대답하되 前者에는 軍士가 비록 적으나 將卒이 서로 사랑하고 號令이 한 곳으로서 나온 까닭에 이기었거니와 지금에는 軍士를 統한바가 없어서 將이 兵을 알지 못하고, 兵이 將을 익숙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근심하노라 하였다. 千鎰(김천일)이 그것을 妖言이라 하여 斬하려 하다가 곁 사람의 勸告로서 그만 두었다. 城이 陷落됨에 미쳐 將士와 軍民이 다 屠戮을 當하였는데, 論介(논개)가 凝粧盛服으로 矗石樓의 아래, 峭巖의 위에 섰다가 敵將의 引進을 따라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潭水에 떨어지어 죽었다.」(『五百年奇譚』)
陪吳參軍 子魚 登義城. 許筠(허균)
  「平野垂天末, 長江接海流, 雨餘多牧笛 風急少舟行, 獨鶴穿雲去, 雙鳧就渚浮, 相憐無限意, 空憶仲宣樓.」(『明人詩綜』)
ㄷ. 第三期의 詩學
「登洲 次吳秀才韻」. 金尙憲(김상헌)
  金尙憲(김상헌)의 號는 淸陰(청음 김상헌)인데,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 斥和說을 極力主張하다가 瀋陽으로 잡혀 가서 拘囚까지 當하였다.
  「淡雲微雨小姑祠, 菊秀蘭衰八月時, 無限旅愁消不得, 因君好句重相恩.」
「寄友」. 金瑬(김류)
  金瑬(김류)는 仁祖 反正의 때에 大將으로 되었고, 丙子胡亂(병자호란, 1636)에는 崔鳴吉(최명길)과 함께 主和說을 堅執하였던 것이다.
  「楊花落盡草萋萋, 楚客傷離思轉悽, 佳節一年寒食過 亂山千疊子規啼, 虞翻去國身全老, 王粲登樓賦謾題, 想得天涯回白首, 昭陽江上夕陽低.」(『明人詩綜』)
「臨溟大捷歌」. 洪良浩(홍양호)
  洪良浩(홍양호)의 號는 耳溪(이계 홍양호)요, 二十九歲에 庭試文科에 登하여 翰林으로 選補되었다. 英祖의 器重함을 받아 顧問에 應하는 일도 많았는데, 正祖 初年에는 洪國榮(홍국영)에게 擯黜되어 慶源府使로 있으면서 「放雁辭」을 지었다.
  鄭評事, 奇男子, 微爾盡黔北人齒, 時有長鯨怒鬣閃㸌若火熾, 滄海爲沸東天紫, 三京焚燒八路崩, 翠華遙遙鴨水沚, 其酋淸正最黠鷔, 萬隊橫行遂北指, 快劍如霜彗日芒, 毒丸如雷洞人髓, 元戎旆折鐵嶺上, 三軍潮退未敢發一矢, 鳥言卉服滿朔野, 腥氛慘憺興王里, 磨天重險掉臂過, 九鎭諸郡望風跪, 桀奴叛吏爭倒戈, 處處飜成囚長吏. 王子大臣亦囚縛. 國何汝負乃忍爾. 箕封千里爲戎矣. 關北曾無一義士, 維時蓮幕隻身跳, 山行草伏形容㥓(毁), 彷徨岐路誰與歸, 邂逅同志崔姜李, 揮涕飮血仰天誓 一百義旅投袂起, 裂裳爲旂鋤爲兵, 白面將軍杖尺箠, 鳴鼓徐行入鏡城, 士女歡迎惟命俟, 南樓嶪嶪建牙纛, 磔斮鞠豎懸街市, 軍聲一朝震北路, 叛賊次第束身死, 蕃胡伺釁乍蠢動, 若崩厥角咸率俾, 蠻兒聞之捲甲來, 肉薄登埤如附蟻, 城上一鼓箭如雨, 僵尸盈壕不旋趾, 官軍追奔到吉州, 三戰三北皆離披, 長坪雙浦數百里, 提戈棄鉦何累累, 驕虜膽破若無骨, 蝸縮蛇盤土窟裏, 端川大兵自來迎, 半夜含枚將南徙 草山偃旗截歸路, 前有角分後有犄, 白塔之原臨溟野, 健兒賈勇如虎兕, 紛紛鼠竄與兎脫, 往往裂䐉而折臂, 髠頭祼足化京觀, 長繩簇簇貫左耳, 刳肚攉腸立如堠, 醜類狂顧那嚮邇, 倭酋大哭走踰嶺, 頭雖戴矣魂已褫, 陣雲初霽白楡社, 血刃浮洗靑海水, 朔方二十有三州, 寸地皆還我疆理, 可憐堂堂三壯士, 功成身殞馬前墜, 蠟紙遙飛奏行在, 至尊動容悲且喜, 璽書寵嘉進官秩, 賜齎便蕃及衣履, 藩臣擁兵但自衛, 君父蒙塵越人視, 奈何恥已無功嫌人, 有媒孽其短反掩美, 公議百年竟得伸, 贈誄輝煌邦人祀, 武溪之上禦亂里, 山川鬱鬱環古壘, 昔日金尹拓疆土, 國威兵力是憑倚, 公遭板蕩喬空拳, 屹若狂瀾障一砥, 不然不惟豆江以南非吾有, 荐食上國從此始, 如公樹立更卓然, 千載睢陽可幷擬, 生前落拓死時煩冤俱莫恨, 巍巍名與白山齊高峙, 我過戰地起感慨, 彈劍長歌爲變徵, 彈劍歌聲激烈, 邊風獵獵鳴不已. (『農圃集』 六)
  「大捷歌」에 對한 參考로서 『農圃集』의 記事를 이에 紹介하여 둔다.
  先生, 遂錄長坪·臨溟·端川·白塔四大捷, 鎭定六鎭之勳, 使崔配天 懷狀啓聞于行在, 以前後捷勳, 皆歸之於諸將佐, 等級有差, 專不爲己功.
  監司卓然, 怒先生擅自錄功啓聞, 移文詰責語多無倫. 先生, 卽馳報牒辨柝甚明, 卓然益大恚, 欲以軍法害先生, 遂拿致先生將佐, 酷加榜掠, 窮索先生過失, 而將士抵死, 不貳於先生, 卓然無所得, 乃作誣啓 構捏益甚, 而前後捷功 反其實而聞, 先生雖使配天啓聞, 而朝廷卓然 以道臣之啓 歸重敢實, 故先生前後奏捷, 一未朝家所知. 卓然恥以外藩重臣 未嘗一有擒一賊之功, 而嫉先生聲績掩己, 責勞其本一幕佐 , 不當自爲大將而違已節度, 且北道胡亂 不爲馳報, 四次推考, 先生據理辨析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而聞行在.
「閱地圖有感」. 鶴洲(학주 김홍욱)
  「曾聞楛矢貢明堂, 肅愼遺墟此一方, 雪立白山南走遠, 天連黑水北流長, 完顔偉烈呑遼宋, 大定豊功壓漢唐, 坐對地圖長歎息, 古來豪傑起窮荒.」
  나는 『鶴洲集』 第二卷을 얻어본 일이 있는데, 鶴洲(학주 김홍욱)란 그 號만 알게 되고 그의 姓名이 누구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年譜까지 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 年代의 사람인 것은 알게 되었다. 詩文이 실린 第二集에서 市南 兪棨(시남 유계)와의 唱和한 詩를 보고서 그가 孝·顯(효종·현종) 時代의 사람인 것을 알았으니 그것은 兪棨(유계)가 顯宗 五年에 歿한 까닭이다. 永春 龍穴灘에서 그와의 唱和한 詩가 二首인데 「雁塞當年勞夢想, 龍灘此日喜逢迎, 春江淥淨深無底, 不及平生爾我情.
  春風同泛木蘭舟, 洗盡胸中萬斛愁, 安得與君乘興去, 掛帆西下漢江流.
交河. 鶴洲(학주 김홍욱)
  長洲煙月泛扁舟, 萬古江聲入海流, 篷底不成孤枕夢, 荻花楓葉使人愁.
贈浮石寺僧廣敏. 二首 鶴洲(학주 김홍욱)
昔年曾宿西峰寺, 淸景如今尙記知, 山杏花間明月在, 子規啼到五更時.
崎嶇世路飽經過, 暫向林間一放歌, 明日尋僧扶杖去, 靑山何處白雲多.
金笠(김립)의 詩.
  金笠(김립)은 洪景來(홍경래)에게 投降한 宣川 防禦使 金益淳(김익순)의 孫子, 金炳翼(김병익)의 別名이었다. 益淳(김익순)은 純祖 十二年(1812年)에 叛逆罪로 死刑을 當하고 炳翼(김병익)은 그 兄 炳淵(김병연)과 함께 谷山에 退居한 世奴의 집으로 가서 依托하고 거기에서 공부하였다. 炳翼(김병익)은 二十歲가 금방 넘자, 弊衣被笠의 乞客으로 八道에 流浪하였다. 그렇게 乞食하는 中에서 詩를 짓게 되었는데, 口頭에서 나오는 말마디가 다 詩句이었다. 그의 作才로 말하면 韻을 부른즉 부르는 卽時에 곧 應對하였고, 느낌을 받은 즉 받는 그 瞬間에 곧 吟味하였다. 그럼에 五十이 넘어서, 同福(全羅道)의 客鬼로 되던 그때까지 三十餘年의 동안에 갖가지의 形式으로 表現한 그의 詩가 몇 수 몇 萬의 首로 되었을 터인데, 不幸히 口口相傳하다가 遺失된 것도 많고 지금까지 殘存되었다는 것도 訛傳이 또한 적지 않다. 하물며 그 時代의 사람은 그에게 對한 同情이 極히 薄弱하였다. 金삿갓이라면 平凡하게 乞食詩人인 줄만 알았고, 天日을 보기에 부끄럽다 하여 삿갓을 쓰고 다니던 그 內容은 전혀 몰랐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이름이 炳翼(김병익)인 것도 또한 몰랐던 모양이다. 지금의 우리로서 본다면 農民革命에 加擔하였던 사람의 孫子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건마는 그 當時의 國情이 그런 부끄러움을 그에게 지어주었다. 그는 一世의 棄物이었고 世人은 果然 魚目이었다. 그래도 간 곳마다 賤待를 받던 그의 詩句가 그만큼이라도 殘存된 것은 實로 萬幸이었다.
  나는 蘇東坡(동파 소식)의 詩―「生前富貴, 死後文章」을, 다시금 읊었다. 김삿갓의 生前에 누구가 推仰하였더냐? 그의 死後에, 實로 지금에 와서야, 그의 文章이 朝鮮의 大詩人인 것을 評定하게 되었다.
  「山名松岳豈無薪, 邑號開城何閉門, 黃昏逐客非人事, 禮義東方子獨秦.」
  金笠(김병연)이 開城의 어떤 집에서 하룻밤 자기를 要請하는 때, 그 主人은 客室에 擧火를 못하였다는 핑계로 門을 잠그고 許치 아니함에 이 詩를 지었다고 한다.
  「坐彼老人不似人, 何年天上降仙眞, 眠前三子皆爲賊, 偷得蟠桃善養親.」
  金笠(김병연)이 어떤 甲宴에 乞食하려 들어간즉 여러 來賓들이 晬宴詩를 한창 짓는 中이었다. 나도 文字를 粗解함에 한 首 짓는 것이 어떠냐고 金笠(김병연)은 물었다. 座中이 다 그의 行色을 보고 心中으로 冷笑하면서 겨우 應諾하였다. 그래 金笠(김병연)은 그들의 짓는 韻字에 따라 「坐彼老人不似人」의 第一句를 불렀다. 이것이 甲翁에게 얼마만한 侮辱이 되는가? 그래서 그의 子孫과 座賓들은 그를 怒目視하면서 다음의 句를 어떻게 맞추는가 하는 때, 金笠(김병연)은 「何年天上降仙眞」의 第二句를 부르니 그제야 滿座의 怒氣가 氷釋하였다. 그 다음에 金笠(김병연)은 「眼前三子皆爲賊」의 第三句를 불렀다. 이것이 甲翁의 三子에게 얼마만한 큰 恥辱이 되는가? 그래, 三子가 다 憤憿하는 때, 金笠(김병연)은 「偷得蟠桃善養親」의 第四句를 부르니 座中이 모두 그의 傑作을 驚歎하고 갖은 飮食으로써 그를 善待하였다고 한다.
  「四足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淸如許, 我愛靑山自倒來.」
  이 詩는 어떤 집에서 멀건 죽을 乞食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主人呼韻環目銅, 我不以音以鳥態, 정주一飯어서進, 今夜 내기 자네 蚣.」
  金笠(김병연)이 어떤 집에 들어가서 乞食한즉, 主人이 自己의 부르는 韻에 應하여 卽時, 詩를 지으면 飮食을 주기로 내기하고 「銅·態·蚣」의 三韻을 불렀다. 이것은 實로 强韻인데, 金笠(김병연)은 그 소리에 應하여 이렇게 詩를 지었다고 한다. 이 詩를 訓解한다면 「主人의 부르는 韻이 고리고 또한 구리니, 나는 音으로 아니하고 새곰(鳥熊)으로 하노라, 정주의 밥 한 그릇을 어서 내오라, 오늘 밤 내기에 자네가 지네(蚣).」란 말이다.
  「晉州元塘村, 人心天下不 朝鮮國於初, 慶尙道之一, 童來有病傳, 奴出無主曰, 虛閣長夜臥, 過客朝夕乙.」
  金笠(김병연)이 元塘村에서 留宿을 請하는 때, 어떤 집에서는 病患이 있느니, 어떤 집에서는 主人이 없느니 하면서 甚히 防客하였다. 그래, 金笠(김병연)은 할 수 없이, 어떤 집의 虛閣에서 굶어 자게 되었다. 잠도 이루지 못하고 悄然히 누워서 글을 읽었다. 主人이 글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이 그러는가 하고 나가서 보니 아무 보잘 것 없는 弊衣蘆笠의 乞人이었다. 그래, 이런 强韻을 불러 詩를 지으라 하였는데, 金笠(김병연)은 應口輒對로 이 詩를 지어 그 地方의 人心이 고약한 것을 痛罵하였다.
  「好在阿斯達, 明年四月來, 綠水聲中立, 白雲影裏回, 新詩多少軸, 濁酒二三杯, 更言今日事, 握手共徘徊.」
  이 詩는 金笠(김병연)이 九月山을 구경하다가 同伴에게 後約을 주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白石看看虎, 靑松立立神, 少鳥東出白, 萬象悉歸眞.」
  金笠(김병연)이 金剛山을 구경하다가 밤에 길을 잃고 헤매이던 것을 詩로써 그렸다고 한다.
  「項在胸中膝在肩, 世皆平直爾胡然, 臥如心字無三點, 立似彎弓絶一絃, 擧目不能觀白日, 側身纔始仰靑天, 痛哭千秋歸去路, 分明棺槨是方圓.」
이 詩는 曲背 姜進士를 두고 지었다는데, 곱장이의 몰골을 絶妙하게 그렸다.
  「二十樹下三十人, 四十家中五十飯.」
  이 詩는 어떤 집에서 쉰밥을 얻어먹고 스무 나무의 아래에 앉아서 지었다고 한다. 이 詩의 內容을 訓解한다면 「스무 나무 아래에 서른 사람이요, 마흔 집 가운데 쉰 밥」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三十人」은 섧은 사람이요, 「四十家」는 망할 놈의 집으로 알아야 한다.
  「吉州非吉州, 許家不許家.」
  이 詩는 吉州의 許氏家를 두고서 지었다고 한다. 그 뜻을 解釋한다면 「吉州非吉州」는 좋은 고을인데, 좋은 고을이 아니라는 말이요, 「許家不許家」는 許한 집인데 집을 許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疎飯蠅穿人, 塞羹魚浴去.」
  이 詩는 어떤 집의 疎飯寒羹을 乞食하고서 지었다는데, 그 뜻을 자세히 解釋한다면 밥을 얼마나 성글게 담았던지 밥알과 밥알의 틈으로는 파리가 드나들고, 국은 물고기의 국인데 물고기는 없다는 것이다.
  「飛來片片三春蝶, 踏去聲聲六月蛙.」
  金笠(김병연)이 雪後에 어떤 집으로 들어가려 한즉 그 主人이 門걸쇠를 붙잡고, 「蛙」韻를 부르면서 雪을 두고 詩를 지어야 드리어 놓는다고 하였다. 그래 金笠(김병연)은 그의 입에서 韻이 떨어지자, 곧 應하여 이 詩를 지었다고 한다.
  「今日偶來見, 人家不居有.」
  金笠(김병연)이 비를 그으려고 어떤 書齋에 들어갔다. 그런데 學究가 隣家로부터 돌아오더니만, 아이들에게 「비」라는 글題를 내어주면서 먼저 본보기로 이런 詩를 부른다.
  「今日雨來見, 隣家不去遊.」
  이것을 解釋한다면 「오늘 비오는 것을 보니, 이웃집에 가서 놀지 못하겠다」라는 말이었다. 金笠(김병연)이 보기에 너무도 幼稚함에, 그 詩의 音을 그대로 取하여 위의 詩를 壁上에 써놓고 갔다고 한다. 그것을 解釋한다면 「오늘에 우연히 와서 보니, 사람의 집에 살려두지 못하겠다.」라는 말이다.
「利原侍中臺詩」
  「百劫三韓國, 將軍獨此臺, 何年胡北走, 無限海聲來.」
  이 詩는 侍中 尹瓘(윤관)의 四十七代孫인 咸興선비가 지었다는데, 女眞을 쫓아내고 九城을 쌓은 將軍의 偉功을 追慕하는 詩로서는 보다 深長한 意味가 있다.

三. 不世出의 女詩人들
  前代에는 女詩人이란 말도 없었는데, 李朝에 이르러서야 壬辰亂(임진왜란, 1592)을 前後로 하고 그런 말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前에는 위에서 提示한 黃眞娘(황진이)뿐이 있었으나, 壬辰亂(임진왜란, 1592)의 後에는 많이 나타나섰다. 詳言한다면 우리의 軟文學이 全盛期로 昻上하던 그 前後에, 光海로부터 純祖에 이르는 그 中間에 著名한 女詩人이 輩出하였다는 것이다. 育兒·食事를 本職으로 삼던 婦人 中에서, 또는 勸酒·歌唱을 習性으로 알던 娼妓 中에서 女詩人이 出現하였다는 것은 漢文學이 極度로의 進展을 說明하는 것이다.
「望仙謠」.(二首中의 一) 許景樊(허경번)
  「王喬招我遊, 期我崑崙墟, 朝登玄圃峰, 遙望紫雲車, 雲車何煌煌, 玄圃路茫茫, 倐忽湊天漢, 翻飛向扶桑, 㧋桑幾千里, 風波路阻長, 吾欲捨此去, 佳期安可忘, 君心知何許, 賤妾徒悲傷.」
「次伯兄 高原 望高臺韻」. 許景樊(허경번)
  「層臺一柱壓嵯峨, 西北浮雲入塞多, 鐵峽覇圖龍已去, 穆陵秋色雁初過, 山迴大陸呑三郡, 水割平原納九河, 萬里登臨日將暮, 醉憑靑嶂獨悲歌.」
  明尙書錢牧齋云, 許筠與其兄筬, 筠, 以文鳴海東. 景樊其妹也.(『列朝詩集』)
「謾興贈郞」. 李淑媛(이숙원) [趙瑗(조원)의 妻]
  「柳色江頭五馬嘶, 半醒半醉下樓時, 春紅欲瘦臨粧鏡, 試寫纖纖却月眉.」
秋思. 同人
  「翡翠簾疎不蔽風, 新凉初透碧紗籠, 涓涓玉露團團月, 說盡秋情草下虫.」
「詠雪次韻」. 李淑媛(이숙원)
  「門閉何妨高臥客, 牛衣垂淚未歸身, 雲深山徑飄如席, 風捲長空驟若塵, 渚白非沙欺落雁, 窓明忽曉劫愁人, 江南此日梅應發, 傍水連天幾樹春.」
陳臥子云許氏與李氏之作有盛唐之風.
「別贈」. 兪汝舟(유여주)의 妻
  「恨別逾三歲, 衣裘獨禦寒, 秋風毆短鬢, 寒鏡入衰容, 旅夢風塵際, 離愁關塞重, 徘徊思遠近, 流歎滿房櫳.」
「送行」. 妓 德介(덕개)
  「琵琶聲裏寄離情, 怨入東風曲不成, 一夜高堂香夢冷, 越羅裙上淚㾗明.」(以上은 『明人詩綜』)
「送別」. 平壤妓 芙蓉(부용)
  「關西細柳綠如絲, 願以佳緣更結之, 情話在心徒脈脈, 離杯到手故遲遲, 生前無限相思日, 別後那堪獨處時, 爲雨爲雲知未易, 江南夜夜夢中隨.」
「相思詩」. 芙蓉(부용)
  이 詩는 다른 長短句體와 달라서 第一聯에 一字씩, 第二聯에 二字씩 그렇게 每聯에 一字씩 漸次 增加하여 末聯에는 十八字씩으로 되었다. 그런데 이 詩를 緋緞에다가 繡 놓아서 愛人에게 보냈다고 한다.
  「別, 思.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紈扇無期. 香閣鍾鳴夜, 練亭月上時. 依高枕, 驚香夢, 望歸雲 悵遠離. 日待佳期手屈指, 晨開情札泣支頤. 顔色憔悴對鏡下淚, 歌聲嗚咽撫胸含悲. 挈銀刀斷弱腸 非難事, 躡珠履 送遠瞬 更多疑. 昨不來 今不來 君何無信, 朝遠望 暮遠望 妾獨見欺. 浿江 成平陸後 鞭馬歸來否, 長林變大海初 乘船欲渡之. 好緣短惡緣長 世情無人可測, 別時多見時少 天意有誰能知. 一段香雲 楚臺雨 仙女之夢 在某, 數曲良簫 秦樓月 弄玉之情 屬誰. 不思自思 日上浮碧樓 可惜紅顔老, 欲忘難忘 更登牧丹峰 每難綠鬢衰. 孤處孀閨 然將欲舒 三生佳約寧有變, 獨守空房 淚縱如雨 百年貞心白不移. 攬香衣 推玉枕 送歌舞冶郞 總是無情客, 罷春夢 開竹窓 送花柳少年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 待人難 甚矣君子薄情胡如時, 三時 出門望 出門望 哀哉 賤妾苦心果何其. 惟願寬厚大丈夫 决意渡江 舊情燭下 歡共對, 莫使 軟弱兒女子 含怨歸天 哀魂 月中泣相隨.」
  大體로 娼妓의 詩는 怨別·相思 그 두 가지에 지나지 못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文章으로 보아서 詩 一首를 또 더 記入하는데, 作者를 모르는 것이 遺憾이다.
  「霧宿花叢去, 枝枝別淚㾗, 車遲知我重, 添載一人魂.」

四. 科詩
  科詩의 一名을 功令이라 하는데, 그것은 登斗出身을 專主한다는 意味에서 나온 것이다. 括論에서 그 詩體의 大槪를 말하였거니와 거기에 懸韻, 排●, 起頭, 敍目의 規定이 ●히 嚴正하여 專業者가 아니고는 可能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詩人에는 英祖 때의 申光洙(이광수), 正祖 때의 趙秉三(조병삼)·桂德海(계덕해) 『國朝人物志』, 純祖 때의 金炳翼(김병익), 羅변강이 가장 著名하였으니 그러나 그 詩가 世道時務에는 아무 裨益도 없는 一種의 浮華만을 尙하는 것이라 하여 性理學派의 排擊을 當하다가 甲午更張(1894年)의 前夜에 科制와 함께 埋葬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數百年의 사이에 士人을 거기에 編入하여 「堂上書生空白頭」의 歎을 하도 많이 發하게 하던 그 詩體임에, 이제 두어篇을 들어서 後人하게 보이려고 한다.
「登岳陽樓 歎關山戎馬」. 申光洙(신광수)
  이 詩는 石北 申光洙(석북 신광수)가 甲科에 登하던 ●●●데, 『大東樂府』에까지 실리어 ●●叢中에 오랫동안 流行하던 것이다.
  「秋工寂寞魚龍冷, 人在西風仲宣樓, 梅花萬國聽暮笛, 桃竹殘年隨白鷗, 烏巒落照倚檻看, 道北兵塵何日休, 春花故國濺淚後, 何處江山非我愁, 新浦細柳曲江路, 玉露丹楓夔子洲, 靑袍一上萬里船, 洞庭如天波是秋, 無邊草色七百里, 自古高樓湖上浮, 秋聲乍依落木天, 眼方初窮靑草洲, 西垣梧竹舊拾遺, 泣聽江南紅荳謳, 靑山白首寡婦哭, 苜蓿葡蔔胡馬啾, ●●斗酒不勝醉, 無限風●錦囊●…」
「●管帳中 問置妾何地」. 金炳翼(김병익)
「帳外起問劉郞家, 天地恢恢●●●, 任人一死萬古恨, 大王平生今日淚, 馬●靑上載去●, ●●三更●月四, 章草●燭問住約, 置妾中●●一地, 江山土幅好家居, 雲雨三上甘夢●, 銀●珠帳今, ●●●年王家歌舞侍, 英雄運去妾命薄, 紅淚孤城殘月●, 芳情●感九●簫, ●魂飜驚四面幟, 江東子弟盡散歸, 渠亦鄕●室家事, 靑油纔罷劍舞戲, 楚雁荆南寒語至, 君王別後寂寬魂, 男女生前慷慨觶, 乾坤窄窄楚今夜, 風雨殘粧何處寄, 輸嬴天下不幸運, 生死人間無限意, 寒衫九月妾無家, 楚小吳山如夢翠, 芳緣夜碎玉精神, 別恨春長花意思, 紅粧願成一男子, 潰圍中霄南出騎, 香魂若蹈劍頭節, 漠地靑山葬亦●.」

附言
  本書의 小說部門에 있어는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서 그 一般的 材料를 攝取하여 隨意分定한 것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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