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안동태사묘

안동태사묘의 유래

죽재권혁무 2007. 4. 7. 10:33

숭보당 

< 안동태사묘(安東太師廟)의 유래(由來) > 

태사묘는 안동시 북문동24-1에 소재하여 대지 1229평, 지상에 태사묘우(太師廟宇),숭보당(崇報堂),경모루(景慕樓),동재(東齋), 서재(西齋), 주사(廚舍), 전사청(典祀廳), 안묘당(安廟堂),보물각(寶物閣),차전각(車戰閣) 등 기념물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안동 왕건세트장 관광)을 도와 신라를 공략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퇴치한 삼태사는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휘(諱) 김선평(金宣平), 휘 권행(權幸), 휘 장정필(張貞弼), 즉 안동김·권·장씨 시조를 보시고 춘추중월중정일(春秋仲月中丁日)에 향사(享祀)하는 사당(祠堂)이다.
권태사공은 원래 신라 종성김씨(新羅宗性 金氏)였는데 기미(機微)에  밝아 권도(權道)로서 왕건 태조를 도왔으니 권도권(權道權)으로 사성(賜性)을 하니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이다.

 고려 성종 2년 983년에 부사내(府司內) 삼공신묘를 창건하였다.  삼공신위판(三功臣位版)은 부사에서 객사로 옮겨 모시다가 중종 37년(1542년) 강릉인 김광철이 안동 부사로 재임시 처음으로 묘우(廟宇)를 이 자리에 세웠다.
당시(當時) 정조,단오,추석,동지의 사절사를 봉행하였으나 1585년 당시 도유사(道有司) 송암 권호문의 주창으로 춘추향사(春秋享祀)키로 결정, 지금에 이르며 1608년 11월 유사 권중상,권함,김태,장흥효께서 삼공신 위판을 개제주(改題主)하였으며 권오(權晤)가 쓰셨다.
1613년 7월에 경상감사 권반 경주부윤 권태일이 구묘(舊廟)를 증축하고, 삼공신묘를 태사묘로 개칭하고 태사묘 현판은 권복흥이 서(書하)다. 경종 원년1721년 3월 16일 안동서문에서 일어난 대화재시에는 부사(府司)도 탔으나 묘우만은 보전되어 있었다. 즉후 삼태사공 후손과 향당(鄕黨)의 덕망있는 자와 공논(公論)하여 중건공사를 착공 1년 만에 옛모습으로 완공하였다.
1950년 경인난(6.25동란)때는 묘역이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후손의 성력으로 13년에 걸쳐 1963년에 완전복원하였다.

임진란때 묘직(墓直)인 안금이(安金伊)가 후손도 하지 못한 삼태사위판을 길안면 국란 계곡 깊은 동굴에 모시고 3년이나 봉안(奉安)하다가 평란(平亂)후 환안(還安)하니 나라에서 그 뜻이 갸륵하다 하여 첨지(僉知)의 벼슬을 내리고 경내 일각에 안묘당(安廟堂)을 세우고 봉안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경인란시에는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별유사(別有司) 장봉섭이 삼태사 위판을 성곡동 장씨 광풍정(光風亭)에  이안(移安)하였다가 익년 8월13일에 능동 안동권씨 재사 보판각으로 이안하고 매년 춘추 향예를 봉행하여 오다가 1953년에 3성 후손이 중건 위원회를 발족하여 후혼들의 겅금으로 새로 중건하니 묘우 숭보당(崇報堂), 전사청(典祀廳), 동서재(東西齋), 안묘당(安廟堂), 주사(廚舍),공사(工事)를 마치고 1958년 9월에 삼태사공 위판을 환안봉안(還安奉安)하고 고유(告由)하였다.

그 후 1963년에 보물각(寶物閣), 경모루(景慕樓)도 이어 준공하였다.
중건 후 수 십여년 간에 퇴락으로 삼성후손들이 걱정하여 오던 중 도유사(道有司) 김중한이 입재(入齋)하여 묘우 및 경내 건물 보수관계를 태사묘관리위원들과 협의하여 관계기관과 절충한 결과 국가 보조금으로 1993년부터 3년에 걸처 묘우를 비롯하여 경내건물과 담장을 깨끗이 일신하였다.

서재

 

동재

 

태사묘

 

안묘당

 

 삼태사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보물각

 

전사청(典祠廳) - 제사를 맡고 있는 부속건물

典(전) : 법; 책; 벼슬; 맡다; 바르다; 저당잡히다 

           여기서는 '맡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祠(사) :사당;신사(제사지내는 신); 제사(를 지내다)

즉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부속 건물입니다.

음식을 보관하고 , 글을 쓰고 , 준비를 여기에서 합니다.
대부분의 서원에는 전사청이 사당옆에 있습니다.

<36世 權赫武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