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안동능동재사

안동권씨 시조 태사공묘 정해(2007)년 추향

죽재권혁무 2007. 11. 30. 18:50

** 안동권씨 시조 태사공묘 정해년 추향 ** (安東權氏 始祖 太師公墓 丁亥年 秋享)

 

안동 능동재사에서 2007년 11월 29일 음 10월 20일丁卯日(매년10월中丁)에

전국에서 수백명의 참배객이 모인 가운대 추향을 성대히 거행 하였다.

<前日저녁에는 대종회총회를 열었다.>

+공성재
+보판각(譜板閣)

 추원루 

 

** 능동재사(陵洞齋舍) **

중요민속자료 제183호(1984. 1. 10)로 지정된 안동권씨 능동 제사는 총 4동 49간의 구(口)자형 와가이다.
고려 삼태사중의 한 분인 권태사의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사인데, 처음 효종 3년(1653)에 관찰사 우( )공이 종중(宗中)의 사람들과 의논해서 마루, 고방, 등 16간을 지었고, 그 뒤 숙종(肅宗) 9년(1683)에 관찰사 시경(是經)공이 누각 일곱 간을 추가로 건립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753년에 불이 나서 건물이 전소된 것을 중건(重建)했는데, 1896년에 다시 화재가 나서 당시 안채, 안사랑채, 사랑채, 대문간채, 별당, 곳간채 등 총 70여간의 건물이 모두 타버리고, 다만 임사청(任司廳)과 전사청(典祀廳)등 몇 칸만 남기고 모두 없어진 것을 건양(建陽) 1년(1899)에 다시 중건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사(齋舍) 건물로는 규모가 매우 커서 그 유래를 다른 대서는 찾기가 어렵다.
매년 한식과 10월 중정일(中丁日)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24세 세손 인(寅)공께서 쓴 재사기(齋舍記)를 보면 재사(齋舍)의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시조 태사공의 의관을 갈무리한 곳은 안동부(安東府) 서쪽 천등산(天燈山)에 있으며, 안동 시내에서 불과 20리 가량 되는 가까운 곳이다.

처음 묘(墓)에 표(表)가 없었으니, 세대가 멀어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자손 된 도리로 심히 송구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하던 바, 성화(成化) 연간(1470년경)에 16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해서 찾은 결과, 지석(誌石)을 찾아 바른 위치를 알게되니 곧 봉분을 가토(加土)하고, 자식에게 유언하기를 자신을 그 아래 묻어라 명하니, 이는 자신의 몸으로 시조의 묘역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매년 향불이 끊기지 아니하고, 멀고 가까운데 사는 많은 자손들이 모여들어 경건하게 성묘하며 정성을 다하니, 지나간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그리고 광해군(光海君) 때의 후손 영의정(領議政) 철(轍), 부사(府使) 소(紹)와 응정(應挺), 판서(判書) 극지(克智)와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서로 번갈아 가며 감사(監司)나 부사(府使)가 되어, 혹은 묘우(廟宇)를 신축 또는 중건하고, 혹은 묘정(廟廷)에 비석을 세우고, 혹은 묘역(墓域)을 넓히고, 혹은 제례(祭禮) 의식(儀式)을 제정(制定)해서 영구히 후손들에게 전할 방도를 정성을 다해서 도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잘 이루기 위해서는 재사(齋舍)가 마땅히 있어야 하므로 오래 도록 걱정하던 끝에, 효종(孝宗)4년(1653) 원손(遠孫) 우( )가 본도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성묘(省墓)하고 잔을 올리며, 종인(宗人)들과 상의해서 묘소 오른 쪽 빈터를 닦아서 재사(齋舍)를 창건하게되었으니, 그 일을 감독한 사람은 중정(中正)과 정(鋌)이었다.
그때 처음 지은 재사(齋舍)의 규모는, 마루 4칸에 좌우 협실(夾室)을 각각 2칸으로 하고, 협실(夾室) 아래 3칸 집을 세우니, 위에 한칸은 출입하는 길을 통하게 하고, 아래 두간은  방과 마루로 하고 그 앞에 또 4간을 세워 곳간(庫間)을 만드니 모두 합해서 16칸이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묘역을 지킬 집이 있고, 제관이 밤을 지낼 방이 있고, 기구와 기물을 거두어 둘 곳이 있게되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장한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크지 못해서 매양 전회 때마다 협소해서 제관을  편안하게 수용하기 어려운 한이 있더니, 금상(今上) 8년(1682)에 원손(遠孫) 시경(是經)이 또한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묘소를 참배한 뒤 상석(床石)을 개조하고 향로석과 석인(石人), 망주석(望柱石) 등 석물을 더 세우기로 결정하고, 종인 중에서 인( )과 시망(時望)과 석우(錫禑) 등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게 하여, 다음해 봄에 친히 경내(境內)에 사는 종인(宗人)들을 인솔하고 고유(告由)한 다음 입석(立石) 했다.
일을 마친 뒤에 종인(宗人)들과 의논하기를 재사(齋舍)가 협소해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가 매우 불편하니, 누각을 지어 제사 때 모인 제관(祭官)들이 편안하고 질서 있게 앉을 자리를 만들자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찬성해서, 곧 종인 가운데 호(灝)와 담( )과 두영(斗英)등으로 감독하게 해서 산중에서 재목(材木)을 배고 관비(官費)를 주어 보조하니, 그 역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가 후손이었다.
그해 가을에 착수해서 그 다음해인 갑자년에 준공을 하니, 누각(樓閣)이 약 7칸으로 위에 무려 100여명이 앉을만하고, 아래에는 좌우에 곳간을 만들어 양곡을 저장케 하고 중간의 한간을 비워 통행하는 길을 만들고, 재사(齋舍) 동쪽에 신주(神廚) 3칸을 만들어 원장(垣墻)을 둘러치니 그 면모가 더욱 새로워 졌다.

듣는 자는 달리 듣고, 보는 자는 고쳐 보게되니 선조를 위한 성의와 용의 주도함을 어찌 다 말로 칭찬하리.
그리하여 일가 모두가 두인(斗寅)에게 그 사실을 소상히 기록하기를 부탁하니, 사냥할 수 없어 문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시조의 위대한 업적은 이미 나라에 나타났고, 혜택은 백성에 미쳤으며, 향토에서 향사(享祀)를 받든지 800여년이 되도록 변함이 없음은 거듭 말 할 것 없으나, 그 평생의 덕의(德義)에 대한 상세한 것은 세대가 멀어서, 듣고 본 바가 없으니 어디에서 밝힐 것인가.
생각하건대 자신(自身)에 쌓아놓은 덕(德)이 크므로 경사(慶事)가 후손(後孫)에게 나타나며, 고려조(高麗朝)에서 이조(李朝)에 이르기까지 자손의 번성함과 관면(冠冕)의 성대함이 빛나고, 대단하여 세상에 비할 대가 없으니, 고관대작이 끊길 때가 없음은 물론이요, 때로는 문장도덕의 선비가 무성하게 나타나, 하나 둘로는 가히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아래로는 자손들 가운데 벼슬아치와 서민들까지 많고, 외손(外孫)된 자도 또한 많아서, 나라 안에 골고루 퍼져서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뿌리가 깊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셈의 근원이 멀면 흐르는 강줄기가 깊고 넓지 아니하겠는가.
아아! 훌륭한 일이로다.
그런데 이 분묘를 오래도록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되고, 자손가운데 감사(監司) 혹은 부사(府使)가 된 사람이 대를 이러 성심껏 제사를 융숭하게 모셨으니, 이 모두가 하늘이 음으로 도울 것이며, 우리 시조의 선행(善行)에 두텁게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나.
문득 두인(斗寅)은 이 일에 대해 느낀바가 있으니, 무릇 우리 안동 권씨가 시조이래 여러 파로 갈라지고, 많은 지손(支孫)이 생겨나서 여러 세대가 되고, 전국에 흩어져 천만인이 되어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나, 나무에 비유하면 비록 천가지 만 잎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있지만 한 개의 뿌리에서 나지 않은 자 없으니, 무릇 우리 종인(宗人)들은 다 각기 한 조상을 생각해서 서로 돈목(敦睦)함에 힘쓰고, 각자가 분수를 지키며 타고난 천성(天性)을 욕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신도(神道)에 예전에 비가 없었는데, 효종(孝宗) 여간(1659)에 원손(遠孫) 성원(聖源)이 영주 군수로 있을 때, 태사묘를 참배하고 마땅히 자기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풍기(豊基)에서 돌을 캐서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나 곧 관직을 떠나게되어 그 일을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뒤, 선산(善山) 부사(府使)로 부임하자 못 마쳤던 그 일을 마무리 지었고, 기묘(己卯)년 여름에 부사(府使) 성후이(成後 )가 재사(齋舍) 오른 쪽에 세우고, 제문을 지어 고유(告由)하니 성(成) 부사도 또한 외손이었으므로, 함께 기록한다.

                                     금상(今上) 13년 정묘(丁卯:1687) 7월.    24세손(世孫) 두인(斗寅) 기록함.]
 
 ** 정해년 추향 이모저모 **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권행묘(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권행묘)

 

  왼쪽부터 대종회장 권정달, 축관 권기덕, 종헌관 권영목, 아헌관 권태영, 초헌관 권헌조

 

 초헌례

 집례 권영창

 

 후식경(侯食頃) - 신위께서 잡수실때까지 기다린다.

 

 권영길 대통령후보(2007년12월19일선거)

 

 전국에서 버수5대와 많은 승용차

 

 부산에서 오신 부녀회원 권영길 대통령후보와 함께

 

  시조묘소연역

 

 묘소에서 내려오면서

 

 

 권혁무 본인 추원루 앞에서 <파록개좌중 사진촬영 핑게로 살짝 내려왔어 이모저모 촬영 하였습니다.>

 

** 능동(陵洞)의 묘역(墓域) **

시조 권행(權幸)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파곡리에 있으며, 천등산 봉정사 뒤 조화곡(造花谷)의 자좌(子坐)이다.
묘가 있는 마을의 이름은 금계(金鷄)이며 속칭 검제(黔堤) 또는 능동(陵洞)이라 한다. (慕齋藏原記에서) 자좌(子坐)란 묘 자리의 방향이 정남향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시조의 묘역(墓域)은 천하에 비길 대 없는 명당이며, 풍수지리학을 조금만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감히 그 빼어난 지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조(始祖)의 묘역이 천하의 명당이라는데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제비원 미륵불의 머리 부분은 지금부터 약 350여년 전, 땅에 떨어져 있던 것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한다.
그것은 이여송이가 미륵불의 머리부분을 칼로 처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청병(請兵)으로 명나라에서 온 이여송(李如松)은 난이 평정되자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훌륭한 인물이 날 자리를 골라 혈(穴)을 끊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여송이가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큰 미륵불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필경 저 미륵불 때문이라 생각한 이여송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서 미륵불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때서야 말발굽이 떨어져서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칼로 잘린 까닭에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러내린 피 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고 한다.

당시에 떨어진 머리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 모양으로 볼록볼록 나오게 다듬어 놓았는데, 지금 보면 이은 자리는 마치 염주를 목에 걸어놓은 것 같다.
그때 이여송이가 서쪽을 바라보니, 멀리 서후면 능동(陵洞)에 천하의 명당이 있으므로 부장(副將)을 불러서, 자신의 목을 쳐서 그 명당자리에 묻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부장(副將)은 [그곳이 명당이기는 틀림이 없으나, 이미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있다면 공연히 목숨만 잃게 되니, 일단 그 명당에 가보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이여송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니, 과연 그곳에는 우리 시조(始祖)의 묘가 들어서 있었다.
그 것을 본 이여송은 [아깝도다. 천하의 명당인데, 나와는 인연이 없구나.]하며 한탄했다 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하는 듯 남악기(南岳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공(公)의 묘는 안동부 서후면 검제, 천등산에 있는데, 안동부에서의 거리는 약 20리이다. 정유년(丁酉年: 1592) 겨울에 희(憘)가 명나라 장수 부총병(副摠兵) 이방춘(李芳春)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공의 묘에 성묘하고 참배하니, 묘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권성(權姓)을 갖인 선비 십 여명이 와서 함께 자리를 하며 참배했다. 묘 부근에 큰집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봉정사(鳳停寺)이다.]

천등산(天燈山)은 안동부에서 서쪽 20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비롯되어 여러 고을을 연이어 내려오니 그 줄기와 굽이를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태백산에서 내려온 봉오리가 영남 북부지역에 이르러 한 크고 우뚝한 봉우리를 이르니 이른바 학가산(鶴駕山)이다.
안동, 영주, 예천의 삼각분기점에 위치한 이 산은 학(鶴)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어 졌다고 한다.
해발 882m로 동쪽에 일월산(日月山) 서남쪽에 팔공산(八公山) 멀리 북쪽으로는 한 줄 소백산맥이 아련히 보이고, 산기슭마다 명문취락(名門聚落)을 항성하고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학가산의 줄기가 남으로 달려가서, 봉정사(鳳停寺)의 뒷산인 천등산(天燈山)으로부터 재기 (再起)한 여러 봉우리 가운데 한 가지가 남쪽으로 굽어 내려와, 흩어져 여러 갈래를 이루었는데, 그 작은 한 가지가 서쪽으로부터 동쪽 가지와 더불어 둥글게 돌아 간 산중에, 바로 고려 때의 태사(太師) 권공(權公) 행(幸)을 안장한 묘역(墓域)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 태사공을 장사하고 모신 이래 4,5백 년이 되도록 자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매년 책임지고 제사를 이어 받은 자가 없었고, 산소와 산 역시 황폐하니 그 묘역을 분별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부끄럽게도 시조(始祖)의 묘가 어디 있는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성화(成化) 연간에 태사(太師)의 18세손인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충주(忠州)로부터, 안동 출신인 이조정랑(吏曹正郎) 배소(裵素)의 따님을 처로 맞이하여 안동부의 땅인 풍산현하회촌(豊山縣河回村)에 거주하게 되었다.

하루는 여지승람(興地勝覽)을 펼쳐보다가 시조 태사공의 묘소가 있는 곳을 책 속에서 알게되었다.
그러나 그 묘는 너무나 오래 실전(失傳)되어, 비석(碑石)도 없고 산도 황폐하였으며, 세월 또한 오래 흘러갔으므로 쉽게 찾을 만한 표식이 없었다.
그래서 술사(術士)와 더불어 산과 능선에 올라가, 오랫동안 여러 곳을 두루 답사한 끝에 비로소 묘 곁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그 곳이 오래도록 많은 자손들이 찾던 태사공의 묘역(墓域)임을 발견하고 또한 확인했다.
그래서 평창공은 흙을 모아 봉분(封墳)을 쌓고 장차 비석을 세우려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卒)하게 될 때, 태사공(太師公) 묘 밑에 장사해 줄 것을 유언하고 떠났다.

자신이 태사공 발아래 묻힘으로서, 다시는 시조의 묘를 실전(失傳)되지 않게, 몸으로 지키려한 충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인 배씨가 공의 생존시에 먼저 졸(卒)하여 태사공 묘소 계하(階下) 몇 걸음 되는 곳에 이미 매장했으므로, 공의 분묘는 그 묘 아래에 모셨다가 뒤에 비위 묘와 공의 묘를 합장하여 모시니, 지금 태사공 묘 아래에 있는 제이의 무덤이 곧 평창군사 부부의 묘이다.
그 뒤 평창공의 아들 유(裕)와 작(綽) 등이 평창공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세계(世系)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부모의 뜻을 받들어 태사공의 묘에도 작은 비석을 세우고, 사실을 묘갈(墓碣) 뒤에 소상하게 적었는데, 글은 곧 유(裕)의 사위 이종준(李宗準)이 짓고 썼다.

뒤에 유(裕)와 작(綽) 등은 전에 살던 평창(平昌)으로 돌아갔고, 그 사위인 호군(護軍) 증사복시정 (贈司儀寺正) 유소(柳沼)의 부처를 태사공이 계신 남쪽 산기슭에 합장하니, 그때부터 류씨가 이곳을 대대로 지키며 수호하게 되었다.
만력(萬曆) 무자년(戊子: 1588)에 관찰사(觀察使) 권극지(權克智)가 남방을 다스릴 때, 순시길에 안동에 와서 墓所를 참배하고 경내에 사는 종인(宗人)들과 함께 제사를 올렸을 때, 일하는 관속(官屬)들이 잘못 하여 비석에 부디 쳐서, 비석이 깨지니 관찰사가 곧 종인(宗人)들과 의논해서, 돌을 사서 깍고 다듬어 좋은 날을 택해서 고쳐 세우려 할 때, 류성룡(柳成龍)이 또한 공(公)의 외손이라 하여, 그에게 그 사실을 기록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공(公)의 훈업(勳業)은 사책(史冊)에 실려 있고, 자손은 보첩(譜牒)에 갖추어져 있으며, 혜택은 일국(一國)에 미쳤으니 다시 거듭 말할 바가 없으며, 삼가 입석(立石)한 전말을 대강 기록하여 후세들에게 상고할 바 있게 한다.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건대 공(公)을 태사(太師)라 하였으나, 예전 각자(刻字)에 실려 있지 아니하므로 의심스러워 감히 가입(可入)하지 못한다.
만력16년 무자월(서기 1588). 자현대부 예조판서 류성룡이 짓고, 22세손 권오(權晤)가 쓰고, 만력16년 윤6월 초3일에 세우다.
시조 묘소에 관한 외손(外孫) 류운룡(柳雲龍)이가 쓴 한문의 글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다.

[天燈山 在安東府西二十餘里. 其源 始於太白山 數郡 不能悉 其條委, 自鳳停寺後岳 再起爲峯中 一枝南俯 而下散 爲諸派支 一枝 自西回環 與東枝 俱抱高麗時 太師 權公幸 葬于山中. 歷六七百年 子孫甚盛 然而無繼葬者 山亦蒸廢 不辨兆域. 成化年間 太師十六代孫 平昌郡事 諱雍 自忠州 娶府人 吏曹正郎 裵素女 居府地 豊山縣 河回邨 一日 拔與地勝覽 知始祖太師墓所在 而無碑碣 歲月迷味 無從標識 與術士  登山麓 求誌石以見, 於是 聚土封之 將立石未及 而卒. 臨終 命托葬 于其下 而夫人裵氏 先卒公存時 卽已葬 太師階下數步 故公瑩 相次以葬.其後 平昌之子 裕綽等 旣立石 平昌墓前 詳錄世系 又承先志 立短渴 太師墓. 語在碣後面 卽裕  李宗準 所撰寫也. 後裕綽等 還故居平昌 女  護軍 贈司僕寺正 柳諱沼夫妻 合葬于南麓. 自是 柳氏 世守焉. 護軍公子 謙子溫 贈參議夫婦 合葬于山中北麓之 上距太師墓 四百步而遠云云, 其後 監司 柳公仲  葬于平昌墓穴下 一節云. 外裔 柳雲龍 記]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분묘가 많으나, 왕의 분묘가 아니고 일반 사족(士族)의 묘 가운데 천 년을 넘도록 잘 보전되고 지켜져 내려온 묘는, 우리 시조 묘 이외에 그 유래가 드물다.
같은 삼태사(三太師)인 안동 김씨와 안동 장씨의 시조의 묘만 해도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어언 실전(失傳)되어, 단(壇)을 모아 분묘(墳墓)를 대신하고 있는 실정만 봐도, 우리 집안이 시조(始祖)의 묘소를 잘 모시고 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운 일임을 능히 잘 알 수 있다.

<시조 태사공 묘지도. 안동부 천등산 조화곡>

청남 권영한 글 인용하였습니다 감사함니다.

36世 權赫武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