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씨자료.행사/방계선조

귀봉 권덕린

죽재권혁무 2009. 6. 16. 12:59

龜峯先生遺集 權德麟(1526-1573)



목판본, 상하권1책, 갑인년(1854) 간행
자: 君瑞, 호: 龜峯, 본관: 안동
출생: 경주 安康縣
權幸…權 …權壽海-權忠孝-權命錘-權繼中-權德麟
어머니: 陽城李氏

귀봉은 어려서 재주가 영민했으나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어 엄훈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 이씨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어머님은 "남들은 과부집 아들을 잘 업신여기는데, 이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하고, 스승을 좇아 배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의 課業을 직접 독려하며 밤낮으로 그 곁에서 학문의 진척을 점검하였다. 귀봉은 이미 9세에 文義를 통달하고, 그 뒤에 회재 이언적 선생 문하에 나아가 속수의 예를 갖추고 배웠다. 회재는 그의 자질에 탄복하며 "이 사람은 남을 警發함이 많고 그와 더불어 학문을 논하면 매우 얻을 바 있다."라고 하며, 숙부의 딸을 보내 귀봉을 사위로 삼았다. 정미년(1547) 가을에 회재가 평안도 강계부로 귀양길에 오르자, 그는 노모가 계시었기 때문에 스승을 따라가지 못하고, 스스로 발분하여 옛 배운 바를 거듭 익혔다. 안강 楊月里 龜城 아래 작은 집을 지어 龜峯書社라 편액을 붙여두고 날마다 경사와 백가의 글을 탐독하였다.
귀봉은 25세 되던 계축년(155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사화의 여진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善類는 거의 쫓겨나 벼슬하기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이 해 겨울에 스승 회재의 부음을 접하고 길을 재촉하여 나가서 운구하여 돌아왔다. 병진년(1556)에 성균관 전적, 정사년(1557)에 예조 정랑으로 오르고, 경신년(1560)에 회덕 현감으로 나가 임기 만료하고 돌아왔다. 병인년(1566)에 하동 현감에 제수되었고, 경오년(1670)에 영천 군수로 부임하였다. 그가 영천으로 온 이유는 노모를 가까운 곳에서 시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관직을 버리고 향촌으로 돌아왔다. 신미년(1571)에 고을 동지들과 함께 안강 縣舍에 모여 옥산서원 창립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는 회재가 伸寃되었으나 오래도록 尸祝한 곳이 없었고, 아직 사화의 소지가 상존하고 있어서 누가 먼저 주창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귀봉은 단연 앞장을 서서 尊道의 지성을 다하였다. 임신년(1572)에 합천 군수로 나가서 백성을 사랑하고 악습을 혁파하였으며, 세금을 균평하게 부과하는 등 위민 시책을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재를 양성하고 예양으로 교화시키니, 온 고을이 크게 순화하여, 마침내 그곳 사람들이 遺愛碑를 세워 그의 덕을 찬미하였다. 계유년(1573)에 昆陽 군수로 임명되어 노모를 모시고 부임하다가 도중에서 병을 얻어 돌아가니, 향년 45세다.
회재 선생은 授受한데 없고 스스로 노력하여 높은 차원의 도덕을 닦았다고 퇴계는 그의 행장에서 밝혔다. 《東國文獻錄》에 회재의 스승으로  眞 金德守를 꼽고 있다. 이러한 연원은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회재의 제자 역시 거의 없다. 朴世采가 지은 《東儒師友錄》에 회재 문인으로 귀봉 한 사람뿐이고, 앞서 《동국문헌록》에는 귀봉과 함께 金磁, 安慶昌, 李全仁 등 네 사람을 기술하였다. 또한 《儒學淵源錄》에는 위의 네 사람 외에 裵 , 金世良 등 6명으로 기록하고, 회재의 연원은 없다고 밝혔다. 사실 회재는 도학과 명망에 비하여 문인을 양성하지 못했다. 더구나 거의 동시대 퇴계의 제자는 《陶山及門諸賢錄》에 의하면, 무려 368명에 이르고 있다. 회재가 퇴계와 달리 그의 나이 40대 초에 6년간 옥산에 머무른 것 외에 일생동안 官界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실제 문인들을 대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회재의 사상을 말할 때 經世哲學이라 운위하는 것도 실은 여기에 연유하고 있다.
許曄이 지은 옥산서원기 서두에 "합천 군수 권덕린은 회재 이 선생의 학도다. 융경 6년(1572) 늦가을에 그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회재 선생을 위하여 서원을 지었으니, 이 서원의 기문과 齋舍의 명칭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계축년(1553)에 회재가 귀양지에서 아우 농재 이언괄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권덕린이 名臣言行錄을 보고자 하니, 네가 찾아서 빌려 주도록 하라.'고 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글을 종합하면 회재는 제자 귀봉을 매우 아꼈고, 귀봉은 일생동안 스승 회재의 가르침을 따르고 숭모하며 유일한 高弟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요주고 있다.
서문은 李彙寧, 행장은 鄭重器, 묘지명은 孫德升, 묘갈명은 權相一과 李獻慶, 후서는 李鍾祥이 지었다.(趙喆濟, 경주문집해제, 경주시·경주문화원, 2004)    
權龜煥 棄庵集
權德麟 龜峯先生遺集
權  燾 慕庵逸稿
權復始 九思齋年譜
權復興 五慕齋先生實紀
權士敏 梅軒實紀
權士  梅窩先生實紀
權士毅 杜皐世稿
權山海 竹林先生實紀
權碩物 東隱逸稿
權宗洛 葛山集
權周郁 逋庵文集
權致奕 退密窩遺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