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경주운곡서원

운곡서원 팜플릿 1차

죽재권혁무 2010. 3. 3. 03:44

 운곡서원 팜플릿(pamphlet) 1차

 

운곡서원(雲谷書院)

 

운곡서원사적(雲谷書院事蹟)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안동권씨 시조(安東權氏始祖)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태사(太師) 휘 행(諱幸)을 주벽(主壁)으로 동배향위(東配享位) 죽림권공 휘 산해(竹林權公諱山海) 서배향위(西配享位) 귀봉권공 휘 덕린(龜峯權公諱德麟)을 숭봉(崇奉)하는 서원(書院)이다.

정조8년 갑진(甲辰)1784년에 창건(創建)하였다.

시조태사공(始祖太師公)을 숭봉(崇奉)하는 원사(院祠)를 신라고도경주(新羅古都慶州)에 창건(創建)함은 태사공의 충의(忠義)가 곧 종국(宗國 : 신라)에 대한마음 이였으므로 마땅히 서원례(書院禮)로서 천추숭보소(千秋崇報所)가 경주에 있어야 한다는 종중(宗中)의 중의(衆議)가 모아져 안동 능동재사(陵洞齋舍)에서 대당회 결의(大堂會決議)하고 전국후손(全國後孫)들의 성금(誠金)을 수합하여 추원사(追遠祠)를 창건하고 다음 해 을사(乙巳)1785년 10월에 봉안례(奉安禮)를 거행하였다.

 

정의당(正懿堂)

태사권공은 본시(本是) 신라종성(新羅宗姓) 김씨(金氏)이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신라를 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자살하게하고 그 뒤를 이은 경순왕 3년(서기929년)에 견훤이 또 다시 고창(古昌 : 현 안동)을 침략하여 고려태조 왕건(王建)과 상전(相戰)함에 당시 고창을 지키시던 시조께서는 김공 선평(金公宣平)과 장공 정필(張公貞弼)과 상의하여 “견훤은 신라의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니 왕건을 도와 원수를 갚자”하고 견훤을 토벌하니 이것이 태조가 왕업을 이룬 계기가 된 병산대첩(甁山大捷 : 경순왕 4년 930년 정월)이다. 태조는 三태사의 작위(爵位)를 높이고 특히 우리 시조 태사공의 공훈을 찬양하며 “신라의 신하로 고려왕을 도와 나라의 원수를 갚은 것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通達)하였다”하고 권씨(權氏)로 사성(賜姓)하고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 : 동쪽을 편안케 했다는 뜻)로 승격하고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안동시 북문동 태사묘(太師廟)에서 삼태사(三太師) 공덕(功德)을 기리고 있다.

 

견심문(見心門)

 

동배위(東配位)는 태사공의 18세손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며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고 휘는 산해(山海1403~1456)이다.

단종(端宗)의 이모부(姨母夫)로 병자사화(丙子士禍) 때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모의와 관련하여 사육신(死六臣)의 참사소식을 듣고 누상(樓上)에서 투신자결로 순절한 충신으로 영월 장능(寧越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配享)되고 증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예천 노봉서원(魯峯書院)에 봉향(奉享)하고 있다.

서배위(西配位)는 태사공의 22세손이며 충민공(忠愍公) 죽림선생의 종 현손(從玄孫)이고 호는 귀봉(龜峯)이며 휘는 덕린(德麟1529~1573)이다.

회재(晦齋)선생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정랑과 오군수령(五郡守令)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선정(善政)을 베푸신 명관(名官)으로서 귀향하여 유림(儒林)을 창도하고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창건하여 사도(師道)를 고양(高揚)한 명망 높은 학자이며 합천군에 유애비(遺愛碑)가 있다.

 

경덕사(景德祠)

 

경덕사의 유래 (景德祠의 由來)

경덕사는 처음에 추원사(追遠祠)라 하였다.

추원사 설향 후(設享後) 83년만인 고종(高宗) 무진(戊辰)1868년 국령(國令)에 의하여 훼철(毁撤)된 후 광무(光武)5년 신축(辛丑)1901년에 통도사, 불국사주지와 당시 경주부윤이 공모하여 이 터를 절터라 하여 차지하였으나 군부대신 권재형(權在衡 : 重顯)과 사림 및 배향위자손들이 협력하여 다시 찾아 광무7년 계묘(癸卯)1903년 이곳에 설단(設壇)을 하여 재사와 전사청을 지어 사림숭봉(士林崇奉)의 향례(享禮)를 올리면서 태사권선생(太師權先生)이라 축문을 개정하고 배양위도 죽림권공(竹林權公), 귀봉권공(龜峯權公)이라 하였다.

설단(設壇)한 지 73년만인 병진(丙辰)1976년에 일본거류 후손들의 성금으로 묘우(廟宇)와 신문(神門)을 중건하고 강당은 배향위(配享위) 양가에서 부담하고 동, 서재(東, 西齋)와 외삼문(外三門) 및 담장은 전국 후손들의 성금으로 완전 중건복원 하였으며 중건과 동시에 사림공의로 봉안행사를 거행하면서 운곡서원으로 승원게액(陞院揭額)하고 묘우(廟宇)는 경덕사(景德祠) 강당은 정의당(正懿堂)이라 하고 추원사(追遠祠) 옛 현판은 묘우(廟宇)안에, 영보당(永報堂) 옛 현판은 강당 안에, 돈교재(敦敎齋) 잠심재(潛心齋)의 편액 역시 강당 내 동서에 걸어두고 옛날을 기념하고 있다.

 

서원 묘우 당 비 재 정 대 수록

(書院 廟宇 堂 碑 齋 亭 坮 樹錄)

묘우는 경덕사(景德祠)5량6간, 신문(神門)은 3간, 강당은 정의당(正懿堂)5량10간이며 동실은 돈교재(敦敎齋) 서실은 잠심재(潛心齋), 동서재각(東西齋各)3간, 외삼문은 견심(見心)3간, 담장은 사구석(四口石), 경덕사 옆에 태사권공 신도비(太師權公神道碑), 폭포위에 유연정(悠然亭)5량6간, 정직실(亭直室)정침3간 협실2간, 전사청 및 별임실(典祀廳及別任室)4간, 재실(齋室)5간, 고자실정침(庫子室正寢)4간, 주소(廚所)5간, 견심문 앞에 반월대(半月坮), 대 남쪽에는 화장실3간, 압각수(鴨脚樹 : 행목), 압각수 앞에는 갈산공 기적비가 있다.

 

향례 시 태사권선생 신위전

 

향례(享禮)는 음력(陰歷) 삼월초정(三月初丁) 축시(丑時 : 새벽1시)에 세 일향(歲一享)한다.

태사권선생(太師權先生)과 배향 위 양공을 숭봉하기위하여 토지 임야 기타재산은 판관공 휘 철손(哲孫), 귀봉공 휘 덕린(德麟)후손들이 봉상하였으며 모든 재산을 관리하고 제향봉행을 목적으로 운곡서원 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관리운영하고 있다.

 

재실 . 전사청, 별임실 . 고직실 . 주소

 

高麗太師 權公 神道碑

(고려태사 권공 신도비)

 

태사권공의 신도비는 2005년 운곡서원 관리위원회에서 비(碑)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신도비 전면은 안동 능동에 있는 신도비를 탁본하여 새겼고 음기는 태사공의 33세손 헌조(憲祖)씨가 짓고 월성 최채량(崔埰亮)씨가 쓰고 2007년 춘향전일 수갈고유(竪碣告由), 낙성행사 때에 지역주민, 각계인사, 유림, 성손 등 300여명이 참배 추앙하였다.

 

葛山處士安東權公紀績碑

(갈산처사안동권공기적비)

공(公)의 호는 갈산(葛山)이며 휘(諱)는 종락(宗洛1745~1819)이고 태사공의 30세손이다.

공은 1784년 추원사 창건을 여러 종인들과 정성을 다하여 완수하였고 1789년 죽림선조 신원(伸寃)을 위하여 격쟁(擊錚)하며 원정초(原情草)를 올려 복작교지를 받아온 숭조정신과 금성단 압각수를 꺾어 와서 심은 유래 등 공적을 기념하기위해 운곡서원 관리위원회에서 기적비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비문은 종 후손 권헌조(權憲祖)씨가 짓고 월성 손장호(孫璋鎬)씨가 쓰고 종 후손 권시환(權時煥)이 대자를 쓰고 태사공 신도비와 같은 날 수갈고유하였다. 예천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추배향하고 있다.

 

정직사 . 유연정 . 압각수

 

압각수의 유래 (鴨脚樹의 由來)

압각수(은행나무)는 정조13년 기유(己酉)1789년 죽림공(竹林公) 복작시(復爵時) 공의 12세손 갈산공(葛山公)이 죽림선조 복작교지(復爵敎旨)를 봉수하여 오는 길에 순흥 금성단(錦城壇)옆에 있는 압각수 가지를 꺾어 와서 심은 나무이며 경주시 보호수 11-15-16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의 모수인 영주 순흥 금성단 압각수는 단종손위(端宗遜位)를 미리알고 죽었다가 사육신이 신원될 때 소생하였다고 하여 수목도 육신의 혼령이 깃든 영이(靈異)한 나무로 전하며 갈산공이 그 해 5월15일 가지를 꺾어 영주에서 예천의 죽림공 묘소를 거쳐 사백여리를 걸어 한 달 만인 6월16일 운곡에 도착하니 가지가 말라서 살 수 없는 지경이나 "우리선조 죽림공의 충절이 다시 빛나듯이 이 나무도 반드시 살아 날것"이라며 심었더니 과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2년 후 진사 윤기(尹愭)가 성균관에서 압각수 기문을 지어 보낸 것이 죽림실기(竹林實記)에 실려 전하고 있다.

 

유연정 측면(悠然亭 側面)

 

유연정의 유래(悠然亭 由來)

유연정은 순조11년(1811)에 이곳 운곡의 자연경관이 빼어나 유연은 당의 시인 도연명의 채국시(採菊詩)에 취한 것이고 건물은 송의 학자 주돈이의 광풍제월정(光風霽月亭)을 모방하여 동편계곡의 용추대위에 태사공과 배향위 양공의 유덕을 추모하기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건물구조가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1981년 비지정문화재등록하고 1998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운곡서원 홍보용 팜플릿을 편집하여 4,000장 발간하였습니다.

운곡서원내 및 경주 안동권씨 종친회관에 비치하여 배부합니다.

편집에 협조하여주신 운곡서원 관리위원회 위원님 감사합니다

2010년 1월 15 일

35세손(36세) 혁무(赫武)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