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에서 부석(浮石)쪽으로 1km 정도 되는 길 오른편에 유서깊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고 조금 지나면 죽계천(竹溪川)을 건너는 다리 제월교가 있는데 이것이 옛순흥의 청다리이고, 이 청다리 못미쳐 왼편 100m되는 곳에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위패를 봉안한 금성단(錦城壇)이 있다. 금성단 뒤 서쪽에 향토사(鄕土史)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숱한 사연을 간직한 압각수(鴨脚樹)한 그루가 우람차게 서 있다. 순흥면 내죽리 98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압각수(은행나무)는 경상북도 도나무(道木) 제 46호로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목(神木)으로 불리며 받드고 있는데 수령이 약 1,100년이고 높이는 30m나 되며 밑둥치 둘레는 현재 6m정도 되지만 남아 있는 뿌리 부분의 흔적으로 봐서 옛날에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형(樹型)은 위로 힘차게 높이 뻗어 일부분 고목이 되어 불타 없어지거나, 썩어 속이 비기도 하지만 수백년 묵은 가지들은 오랜 연륜을 느끼게 하고, 그 우람찬 나무의 모습은 순흥 어디서나 봐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위용이 대단하다. 이 압각수(鴨脚樹)는 이조 세종(世宗)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단종의 숙부)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 운동과 관련하여 파란많은 역사적 사실을 지켜 보거나 순흥(順興)의 흥망성쇄를 같이 해 온 역사적인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영주 향토지에 기술된 내용은, 1451년(文宗 1)때 이 나무가 스스로 고사한 것이 1629년(仁祖 7)에 불에 타고 일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한 술사(術士)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순흥)가 폐(廢)하니, 이 은행나무가 죽고, 이 나무가 살명 순흥부(順興府)로 다시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1643년( 仁祖 21)에 과연 이 나무에 생기가 돌아 껍질이 생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1682년(肅宗 8)에는 무성해지고 이듬해에 순흥부(順興府)로 환복(還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지금으로부터 531년 전인 1456년(세조 3)에 사육신의 단종복위(端宗復位)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으로 유배 당해 압각수로부터 서쪽 500m 되는 곳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 이듬해 금성대군은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한 관노의 밀고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 안동부사 한명진(韓明 한명회의 6촌)과 그 군졸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금성대군은 안동형무소에 감금 되었다가 서울 경회루에서 최후를 마쳤고 순흥은 역모지(逆謀地)라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처형, 살육되어 쑥 밭으로 변해 버렸다. 순흥부(順興部)는 폐부(廢府)되어 풍기군(豊基郡) 영천군(榮川郡) 봉화군(奉花郡)에 분활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수 많은 순흥부민(順興府民)들이 살육되어 그 흘린 피가 죽계천을 흘러 순흥에서 10여리나 떨어진 지금의 안정면 동촌 마을까지 흘렸다고 해서 그 마을을 지금까지 「피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금성대군이 세조(世祖)에 의해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난 그해부터 2백년 동안 죽은 듯이 있다가 1683년(肅宗 9)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고 순흥부로 다시 승격되어 금성대군의 위패를 봉안하는 금성단을 만들자 이 압각수도 새순이 다시 돋아나 지금에 이르는 거목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6.25동란 때도 텅 빈 둥치 속에 불이나 한 부분 타 버리기도 해서 수난을 겪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숱한 시련과 고난을 겪고 견디어 온 이 거목이야말로 순흥의 흥망을 함께 해와 향토사의 한 장(章)을 차지한 역사의 나무처럼 오늘도 굳건히 「피끈」마을을 바라보며 위용차게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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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곳 숨은 이야기-청다리, 압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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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 순흥 땅은 한국 유교의 본향(本鄕)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조선조 단종 복위를 모의한 조선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의 일화가 남아 있는 곳이다. 국내 처음으로 주자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말의 문인 회헌(晦軒) 안향(安珦)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소수서원은 국내 최초 사립대학.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원단촌(지금의 내죽리와 청구리) 마을에 단종 복위에 얽힌 사연을 고스란히 전하는 제월교(霽月橋·속칭 청다리)와 압각수(鴨脚樹)가 있다. ◇순흥 청다리 소수서원 입구를 지나 부석사 방향으로 150m가량 올라가면 속칭 청다리란 다리를 만난다. 어릴 때 어머니와 이웃 동네 어른들의 이런 놀림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청다리의 원조는 죽계제월교(竹溪霽月橋)다.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고을 군사와 선비를 모으고 삼남(三南) 유림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다 발각돼 죽임을 당하면서 당시 동조했던 이 지역 수백 명의 선비들과 그 가족들이 희생되었다(정축지변·1457년). 그때 어렵사리 살아 남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실 제월교(속칭 청다리)는 단종 복위사건으로 암울하고 참담했던 역사가 끝나고 훗날 선비들이 '개성 송도는 선죽교, 영주 순흥에는 제월교'라고 했듯이 충절이 배어 있는 다리로 기억돼 오고 있다. 그러나 청다리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과 마을 처녀가 정분이 나서 낳은 아이를 다리 밑에 버린 것에서 유래됐다는 잘못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박석홍(52) 영주시 학예연구원은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통치에 걸림돌이 된 유림들을 없애고자 유생들이 연애하여 낳은 자식들이라고 왜곡시켰다"며 "단종 복위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혁파될 때 군인들이 주민들을 살해하면서 살아남은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생부모를 몰라 청(菁:여성의 다리)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은유법을 사용했다"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지금은 그 청다리가 일반 다리와 별 차이 없는 시멘트 다리지만 당시엔 돌기둥에 나무 상판을 깔아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난 96년 죽계천 정비공사 도중 당시 교각과 좌대가 발굴돼 현재 소수박물관 노천전시장에 옮겨져 있다. ◇압각수(충신수) 금성단 서북 쪽에는 압각수(鴨脚樹)라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백 년 된 이 고목의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압각수는 정축지변 때 고사했다 순흥도호부가 다시 설치되자 되살아나는 등 순흥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이 나무는 주민들로부터 동신목(단종의 몸)으로 불린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제사를 올린다. 수령 약 1천100년, 높이 30m, 밑둥치 둘레 6m이나 뿌리 흔적으로 봐서 옛날에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분 고목이 되어 불타 없어졌거나 썩어 속이 비었지만 수백 년 묵은 가지들은 오랜 연륜을 느끼게 한다. 이 압각수는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 파란만장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며 순흥의 흥망 성쇄를 같이해온 역사적인 나무인 셈이다. 세조3년에 정축지변이 터지자 압각수는 말라 죽고 1629년에는 불에 타 일부분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전통문화' 등 영주향토지에는 "한 고승이 이곳을 지나면서 '흥주(순흥)가 폐하니, 이 은행나무가 죽고, 이 나무가 살면 순흥부가 다시 설치된다"는 말을 남겼는데 1643년 나무에 생기가 돌아 껍질이 생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해 순흥부가 다시 설치된 1682년 무성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금성대군은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돼, 순흥으로 유배당해 압각수에서 서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연금됐고 이듬해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안동에서 최후를 마쳤다. 그로 인해 순흥은 역모지라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고 순흥부는 없어지고 풍기군에 병합됐다. 그때 살해된 주민들의 피가 10여 리나 떨어진 안정면 동촌리 '피끝' 마을까지 흘렀다 해서 이 마을 이름이 '피끝'이라 불리고 있다.
매일신문(200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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