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계보 (장희빈과 최동이)
태정태세문단세=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
예성연중인명선= (예종-성종-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
광인효현숙경영= (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
정순헌철고순 = (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
*종이 붙은 임금은 덕이 많은 임금
*조가 붙은 임금은 업적이 많은 임금.
代 |
王命 |
재위 기간 |
약 사 |
1 | |||
태조(太祖, 1335~1408) |
1392~1398 |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1392년 조선왕조를 세움. | |
2 |
정종(定宗, 1357~1419) |
1398~1400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1369~1422) |
1400~14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 (왕자의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4 |
세종(世宗, 1397~1450) |
1418~1450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 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5 |
문종(文宗, 1414~1452) |
1450~1452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1441~1457) |
1452~1455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7 |
세조(世祖, 1417~1468) |
1455~1468 |
휘는 유.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
8 |
예종(睿宗, 1441~1469) |
1468~1469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1457~1494) |
1469~1494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
1494~1506 |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11 |
중종(中宗, 1488~1544) |
1506~1544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
12 |
인종(仁宗, 1515~1545) |
1544~1545 |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1534~1567) |
1545~1567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
14 |
선조(宣祖, 1552~1608) |
1567~1608 |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1575~1641) |
1608~1623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1595~1649) |
1623~1649 |
|
17 |
효종(孝宗, 1619~1659) |
1649~1659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1641~1674) |
1659~1674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1661~1720) |
1674~1720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1688~1724) |
1720~1724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1694~1776) |
1724~1776 |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22 |
정조(正祖, 1752~1800) |
1776~1800 |
휘는 산.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
23 |
순조(純祖, 1790~1834) |
1800~1834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24 |
헌종(憲宗, 1827~1849) |
1834~1849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1831~1863) |
1849~1863 |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26 |
고종(高宗, 1852~1919) |
1863~1907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일어남. |
27 |
순종(純宗, 1874~1926) |
1907~1910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사화가 엄청 많군요.
중국 같으면 왕조가 바뀌었을텐데 한국은 임금만 바뀌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내 어릴적 부터의 의문점 이었습니다.
하여튼 장옥정(희빈)의 씨는 경종에서 4년만에 끊어지고
최동이(숙빈)의 영조로 이어집니다.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 1701년 음력 10월 10일)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이자 왕비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본명은 옥정(玉貞)으로 전하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후실인 윤씨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으로서, 흔히 장희빈(張禧嬪)으로 불린다.
생애
입궐과 출궁
옥정이 몸을 의탁하고 있던 종숙부인 장현(張炫)이 경신환국에 휘말려 죽은 이후 가세가 기울자, 장옥정은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여 남인들의 후견자 자의대비(장렬왕후, 인조의 계비)를 웃전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장옥정은 인경왕후 김씨와 사별한 20세의 청년 숙종과 연을 맺고 정인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의 대표 격으로,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는 남인이 입궁시킨 장희빈을 싫어해 궁에서 쫓아내었다. 이에 자의대비가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崇善君)에게 부탁해 갈 곳이 없는 신세는 면하였다.
기사환국
1683년 현렬왕대비(명성왕후)가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자의대왕대비(장렬왕후)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설득하여 장옥정을 재입궐시킨다. 장옥정이 남인이라는 것을 아는 서인들은 장옥정의 당숙 장현을 비난하면서까지 격렬히 반대했지만, 숙종은 장옥정을 내명부 종4품 숙원의 후궁으로 봉하여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창경궁의 취선당(就善堂)을 처소로 내주었다.
남인인 숙원 장씨는 서인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대립하였는데, 인현왕후는 기본적으로 숙원을 후덕한 성품으로 감쌌으나 교만한 숙원의 훈계를 위해 회초리를 드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1688년 당시 소의(昭儀 ; 내명부 정2품)였던 장옥정은 드디어 왕실이 그토록 고대하던 장남 ‘윤’(昀)을 낳았고, 이 왕자가 후에 조선 왕조 제20대 왕 경종(景宗)에 오르게 된다. 숙종은 크게 기뻐하여 소의 장씨의 품계를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키고 희빈(禧嬪)으로 봉하였으며 아들인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 당시 집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과 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숙종 15년) 정월에 원자를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禧嬪)으로 봉했다.
한편, 서인 세력은 남인인 희빈의 아들이 원자, 나아가 세자가 되었을 때의 후일을 염려해, 책봉을 극렬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서인들의 반대는 오히려 서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던 숙종의 진노를 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니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분노하자,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에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케 하였으나 중로 정읍(井邑)으로 이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 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치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로써 경신대출척 이후 밀려난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이 정권 교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곧, 환국의 여파로, 이해 음력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얼마 후, 중전 장씨의 아들인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장비(張妃)의 부모인 장형(張炯)과 윤씨, 장형의 정실 고씨는 각각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되었고, 장비(張妃)의 오빠인 장희재는 포도대장, 총융사, 한성부 좌윤 등 고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갑술환국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김만중이 자신이 폐비 사건의 옳지 못함을 깨우치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읽고 결국 폐비 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 20)에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 등은 다시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결국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장옥정의 부모인 장형과 윤씨·고씨는 부원군과 부부인의 호를 박탈당했다. 희빈의 처소 또한 대조전이 아닌, 과거에 사용하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겨졌다.
무고의 옥(巫蠱-獄)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희빈이 평소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신당을 왕에게 고하였고, 마침내 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때 장희빈은 취선당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씨가 죽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이 일로 장희재는 처형되었고, 취선당의 궁인(宮人)·무녀(巫女)등도 참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巫蠱-獄, 여기서 무고란 무술 (巫術)이나 방술 따위로 남을 저주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이라 하는데, 이때에 희빈의 처우에 대해 관대하게 처우하자는 당시 영의정인 최석정은 부처되고, 같은 이유로 남구만·유상헌(柳尙憲)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장희빈이 사사된 때는 1701년 음력 10월 10일의 일로, 향년 43세였다. 그러나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과의 장희빈의 죽음 묘사가 달라서 (연려실기술이나 인현왕후전에는 사사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자진했다고 씌여져 있다) 장희빈이 사사되었는지, 자진했는지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후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왕의 생모이고 이미 5년간 중전의 자리에 있었기에 왕후로 추존될 수 있었으나 경종이 연산군의 전철을 밟을 것이 염려가 되었고 또한 숙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죄인인 그녀에 대한 발언을 일체 금지하였으며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엄명을 내렸기에 왕후로 추존될 수 없었다.
무덤은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60년대 도시화개발로 옮겨졌다. 그녀의 사당은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이며, 궁정동 칠궁 경내에 존재하고 있다. 대빈궁은 왕가에서만 사용하는 원형 기둥 등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희빈이 한때나마 국모의 위(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그녀는 한때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조사석과 내연 관계에 있어 아무 공적도 없는 조사석이 정승이 될 수 있었다는 서인의 주장때문이다. 하지만 조사석이 기사환국때 서인의 역성을 들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났던 점과 1690년 6월 세자책봉식에 일부러 불참하여 유배당해 사망했던 점은 소문의 진실성에 의혹을 제기한다.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희빈 장씨가 어릴 때 사망했다.
최동이
조선 후기 우리 역사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영조의 어머니는 놀랍게도 그 신분이 천민이었다. 그러나 비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린, 누구보다 현명하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이 동화는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복잡했던 숙종 시대를 배경으로, 천민 출신의 여자아이 ‘최동이’가 임금의 어머니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장악원 관노로 들어가게 된 동이는 영특한 기지를 발휘해 윗사람을 모함에서 구한 뒤 마침내 궁녀가 된다.
후궁의 자리에 오르지만 숙종의 눈 밖에 난 동이는 아들 연잉군(영조)을 데리고 나가 사가에서 지낸다. 하지만 언제나 긍정적인 동이에게 이것은 또 다른 자녀 교육의 시작이었다. 동이는 자신의 아들을 천민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고 잘잘못을 가려 왕족임을 한시도 잊지 않게 했다. 인현왕후의 부름으로 다시 궁궐 생활을 시작한 동이와 연잉군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왕위에 올라서도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배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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