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복흥(權復興): 1555년(明宗10)~ 1592년(宣祖25).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본관은 안동, 자는 중원(仲元), 호는 오모재(五慕齋),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의 5세손, 아버지는 참봉 권평(權平), 경주 출신이다. 부인 서산유씨(瑞山柳氏)는 참봉 희춘(希春)의 여이다.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기계가 곧고 효성이 지극하며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하고 선유(先儒)의 맥을 이어 학업에 전념하였으며 후학양성으로 자족하며 참 선비로 성실히 살아오던 중에 1592年(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백의로 창의 모병하여 족병(足病)으로 부자유한 일신이지만 선천적인 강개지심을 억제할 수 없어 주위의 극진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말하되 “우리 집은 대대로 충(忠)과 의(義)를 생명처럼 소중히 지켜 왔는데 차제에 왜구를 토벌하여 나라에 보답함이 신하의 도리이거늘 어찌 생사와 이해로서 몸을 돌볼 수 있겠는가” 하고 수제 검상마(遂提劒上馬)하여 동지의병과 곳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마침내 부산 다대포(多大浦) 격전에서 혈전을 거듭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동년 4월28일 권복흥공(權復興公)은 장렬히 순절하셨다. 부인 서산유씨(瑞山柳氏)는 부군의 전사통보를 접하고 즉시 가인을 동원하여 격전지에서 수일동안 누볐으나 끝내 부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 만 부득 유의(遺衣)로 초혼(招魂)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하고 근친과 노비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신 부군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부출아낙이 무슨 면목으로 살 것이요” 하고 구일불식(九日不食)으로 자진한 청사에 빛나는 열녀이시다. 1737年(英祖13) 영조대왕(英祖大王)께서 “충신의사 권복흥지려(忠臣義士權復興之閭)̓”라 정표로 1740年(英祖16) 경주 강동 다산리 단계사(丹溪祠: 현 丹溪書堂)에 제향하다. 1794年(正祖18)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열녀의사 권복흥 처 서산유씨 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 정표하셨다.《오모재 실기(五慕齋實記)》가 있고, 경상북도 문화재 464호로 지정되었다.
오모재(五慕齋) 12세손 혁무(赫武)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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