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씨자료.행사/문중행사

권근 3대묘소

죽재권혁무 2014. 5. 17. 04:02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陰城 權近 三代 墓所 神道碑)

2014년5월3일(토)아침8시에 수안보에서 능암계 계원을 실은 관광버스는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가 있는 방축리로 향하였다.

 

소재지: 충북 음성군 생극면 능안로 377-15 (방축리)

소유자: 안동권씨문충공파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양촌(陽村) 권근(13521409)과 선생의 아들 권제, 손자 권람의 3대묘이다.

선생은 공민왕 17(1368) 성균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공민왕(재위 13521374)이 죽자 정몽주·정도전과 함께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고 창왕 2(1389)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태조 7(1398)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에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대제학을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문장이 뛰어나동국사략등 조정의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권제(13871445)는 권근의 둘째 아들로 우찬성의 벼슬에 올랐고고려사편찬에 참여 했으며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권람(14161465)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단종 1(1453) 계유정란 때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는 등 여러 차례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덕으로 좌의정의 벼슬까지 올랐다. 3기의 묘앞에 모두 각각 묘비,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고, 봉분은 모두 원형이다.

도착하여 하차하니 처음 보이는 곳이 재실(추원재: 묘향을 올릴 때 숙박하는곳)이다.

안동권씨 문충공종중

 

 

 

 

 

 (權根)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

준비한 제물을 올려놓았다.

 (權根)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비

  (權根)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부인경주이씨의 묘비(합폄) 

 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에 참배준비중

 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뒤

 

 

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에 대표자 권영세씨 헌작하고있다.

 

 

 

 양촌묘소에서 내려다 보면서 촬영

 

 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 개절에서 기념촬영

 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 개절에서 기념촬영 (뒤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양촌묘 개절에서 

 양촌묘 문관석

 양촌의 묘

 양촌의 묘 문관석

 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 자명등, 상석 2좌

 문충공文忠公 양촌陽村의 묘

문경공文景公 지재止齋의 묘

(權제)문경공文景公 지재止齋의 묘

문경공文景公 지재止齋의 묘비

문경공文景公 지재止齋의 묘 (위로는 양촌의묘)

문경공文景公 지재止齋의 묘 전에서 권혁성씨 무엇인가 설명하고있다.

(권제)문경공文景公 지재止齋의 묘

(권제)문경공文景公 지재止齋의 묘

 익평공翼平公 소한당所閑堂의 묘 (권람)

 익평공翼平公 소한당所閑堂의 묘 (권람)

유명조선국

홍치 을묘 10월18일

좌의정길창부원군권익평

公영원군부인이(固城)씨지묘

丙辰正月初三日

 

유명조선국

홍치 을묘 10월18일

좌의정길창부원군권익평

公영원군부인이(固城)씨지묘

丙辰正月初三日

유명조선국

홍치 을묘 10월18일

좌의정길창부원군권익평

公영원군부인이(固城)씨지묘

丙辰正月初三日

 

도통사(道統祠)

삼성(三聖)구현(九賢)(공자를 주벽으로 주자(朱熹)와 안자(안향安裕)선생 및 문하 9현)인 국재 권보(菊齋 權溥), 역동 우탁(易東 禹卓), 동암 이진(東庵 李瑱),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덕재 신천(德齋 辛蕆), 노당 추적(露堂 秋適), 근재 안축(謹齋 安軸), 경재 안보(敬齋 安輔)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9월10일에 향사하고 있다.

 

도통사복원중건사적비

 

 

도통사

도통사

 

도통사

 

 

 

문경공신도비각

문충공신도비각

익평공신도비각

 

 

충견총

권람이 야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野火가 일어남에 충견이 몸에 물을 뭍처 뿌리기를 반복하여 주인을 구하고 세조10년에 권람이 죽자 충견은 단식을 하여 주인의 뒤를 따라 죽었다는 기록이다.

 

 

 

 

안숙공부조묘

문충공부조묘

[문학] 조선 초기, 권근() 지은 경기체가(). 모두 5장으로, 사헌부() 집무 광경 집무 마친 연락(樂) 노래하였다. 《악장가사()》 가사 실려 전한다.

다음 답사지 도산서원道山書院로 갈 버스가 대기하고있다.

뒤 돌아보고 갑니다.

 

도산서원道山書院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1693년(숙종 19)에 이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권득기(1570~1622)와 그의 아들이 권시(1604~16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1711년(숙종 37)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원래 사우(祠宇) 3칸, 묘문(廟門) 3칸, 강당(講堂) 4칸, 서재(西齋) 3칸, 남재(南齋) 3칸, 전사청(典祀廳) 3칸 등 모두 23칸 규모였다.

만회(晩悔) 권득기는 4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으나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도학(道學)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낸 절개가 굳은 선비였다. 그 아들인 탄옹(炭翁) 권시 또한 높은 학행(學行)으로 대군사부, 한성부좌윤 등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낙향하여 탄방동에 서원을 짓고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에 더욱 정진하였다. 도산(道山)이라는 지명도 그가 이곳에 정착하여 도학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었으나 1921년에 다시 단(壇)을 조성하고 제향을 계속하여 오다가 1968년과 1973년 2차례에 걸쳐 안동권씨 종중에서 전체를 복원하였다. 정문인 향직문(向直門)과 내삼문(內三門), 함덕사(涵德祠), 명교당(明敎堂), 시습재(時習齋), 지선재(止善齋),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수호사(守護舍) 등으로 유지되다가 1987년 숭모각(崇募閣)이라는 장판고를 증축하였다.

사우인 함덕사에는 권득기와 권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강당인 명교당은 유생들의 학업을 위한 회합장소, 시습재와 지선재는 제관들의 제향을 위한 숙소와 회합장소, 수호사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庫直)의 주거용으로 각각 사용되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中丁: 두 번째 丁日) 제향하며 《독서잠의(讀書潛疑)》10권, 《만회집(晩悔集)》《탄옹집(炭翁集)》 등의 문집 10여 권이 있고 숭모각에 만회집탄옹문집판목(대전시유형문화재 제17호)이 소장되어 있다.

 

 

 

 

 

 

 후손(    ) 설명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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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육영수 생가(沃川 陸英修 生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