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경주단계서당

[스크랩] 홍양호, 홍재, 홍술해, 이광정

죽재권혁무 2014. 7. 2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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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조판서(吏曹判書) 홍양호(洪良浩) - 충렬정려기명병서찬(忠烈旌閭記銘幷序撰)

 

홍양호(洪良浩)1724(경종 4)~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단양군수 중성(重聖)의 손자이며 진보(鎭輔)의 아들이다. 175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지평 수찬·교리를 지낸 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급제했다. 1777년(정조 1) 홍국영의 세도정치에 따른 횡포가 심해지자 경흥부사로 있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인 1781년 한성부우윤·대사간을 지내고 이듬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사헌·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1794년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가 되었고, 1799년 양관대제학을 겸임했으며, 1801년(순조 1)에는 판중추부사도 겸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국조보감 國朝寶鑑〉·〈갱장록 羹墻錄〉·〈동문휘고 同文彙考〉 등의 편찬을 주관했으며, 중국에 다녀오면서 수용한 고증학을 보급했다.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는 치산(治山)과 치수(治水)에 힘썼는데, 통신사 일행에게 부탁하여 들여온 일본의 벚나무를 서울 우이동에 심기도 했다. 문집인 〈이계집〉을 비롯하여 〈육서경위 六書經緯〉·〈군서발배 群書發排〉·〈격물해 格物解〉·〈칠정변 七情辨〉·〈해동명장전〉·〈고려대사기 高麗大事記〉·〈흥왕조승 興王肇乘〉·〈삭방습유 朔方拾遺〉·〈북새기략 北塞記略〉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글씨도 잘 써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특히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2). 경주부윤 홍재(자)(慶州府尹 洪榟) - 정려기명병서찬(旌閭記銘幷序撰)

 

 

 

 

 

본 교지는 홍재(洪梓)에게 통훈대부의 지위를 주고,

홍문관 교리지제교와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할 것을 임명한다는 내용의 교지이다. (건륭 19년 11월 28일) 

 

 

 

 

본 교지는 홍재(洪梓)에게 통정대부의 지위를 주고,

승정원 우부승지와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겸임할것을 임명한다는 내용의 교지이다. (건륭 27년 2월 18일)

 

3). 경주부윤(慶州府尹) 홍술해(洪述海) - 충렬정려기명병서서(忠烈旌閭記銘幷序書)

 

1774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를 지내다

1. 생몰 1722(조선왕조 2)~1777(정조 1) 55세 南陽

2. 급제 -1759년(영조 35) 정시(庭試) 병과1(丙科1)

3. 암행어사 연보 -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이 되고, 이어서 정언·지평·수찬 - 1761년 사간으로 임명 - 41세 1763년(영조 39) 1월 10일 북도 감진 어사병사 이방좌(李邦佐)의 탐학상을 보고하고 엄벌할 것을 건의하여 양양(襄陽)에 10년간 유배하게 하였다. - 부응교·응교를 거쳐, 1764년 교리가 되고, 그뒤 승지를 거쳐 - 42세 1764년(영조 40) 2월 14일 전라도 어사로 동복 현감(同福縣監) 임희교(任希敎)가 시종(侍從)의 반열에서 나갔는데, 탐욕과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 하여 임금이 잡아들여 핵실하라고 명하니, 임희교가 승복하매, 해도(海島)로 귀양보냈다. - 42세 1764년(영조 40) 5월 28일 오랜 가뭄으로 삼강에 억울한 일이 있을까 하여 어사를 보냄 - 집의·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774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를 지내다

4. 관련 기록 ≪영조 101 39/01/10(무진). 간원에게 신일청을 파면할 것을 아뢰다≫ 간원【대사간 홍자(洪梓)이다.】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신일청(申一淸)은 전 북병사(北兵使) 이방좌(李邦佐)가 부임하여 폐단을 고친 것을 크게 칭찬했습니다만, 신일청은 그 당시의 판관(判官)으로서 무릇 옛 곤수의 득실(得失)에 관계된 것을 진실로 마땅히 망령되게 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추포를 민간(民間)의 정포(精布)와 바꾼 것 때문에 어사(御史)가 사문(査問)하여 그 죄가 죄다 드러났으니, 신일청의 사정(私情)을 두어 아름다움을 과장하고 아랫사람에게 아부하여 윗사람을 속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관직을 삭탈(削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방좌가 여러 번 부유한 고을과 큰 곤직을 맡았지만 집에는 담석도 없었으니, 세상에서 무변(武弁) 가운데에서 청렴 결백한 자를 일컬으면 반드시 이방좌를 먼저 꼽았다. 조영순(趙榮順)은 종성 부사(鍾城府使)로서 이방좌에게 불평을 쌓아 왔는데, 홍술해(洪述海)가 어사(御史)로서 조영순의 뜻을 맞추어 이방좌를 탐오(貪汚)하다고 탄핵하자, 공의(公議)가 이미 만족하지 아니하였는데도, 홍자와 같은 사람까지 또한 그 투식을 답습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원전】 44 집 122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인사-관리(管理). *사법-탄핵(彈劾) ≪영조 103 40/02/14(병신). 전라도 어사 홍술해가 복명하다≫ 전라도 어사 홍술해(洪述海)가 복명하였다. 전 동복 현감(同福縣監) 임희교(任希敎)가 시종(侍從)의 반열에서 나갔는데, 탐욕과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 하여 임금이 잡아들여 핵실하라고 명하니, 임희교가 승복하매, 해도(海島)로 귀양보냈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김상묵과 장성 부사(長城府使) 정경순(鄭景淳)은 승서(陞敍)하였으니, 그 치적이 으뜸인 때문이었다. 【원전】 44 집 158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인사-관리(管理). *사법-탄핵(彈劾). *사법-행형(行刑) (자료 : 조선왕조실록, 원문번역 민족문화추진회)

정조가 노론 강경파와 외척들을 제거하자 노론도 반격했는데 첫 번째는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 중 한 명인 홍계희(洪啓禧 1703∼1771. 병조판서. 정조 즉위 전 1771년 사망) 집안으로 아들인 홍지해(洪趾海 1720-1777)와 손자 홍상범(洪相範)이 정조 즉위년(1776년 7월) 20여명의 암살단을 궁중 담을 넘어 궁궐에 난입 정조가 머무는 경희궁(慶熙宮) 존현각(尊賢閣) 지붕까지 올라가 살해하려 했다가 호위 무사에게 발각 도주했다. 이들은 대담하게 다음달 경계가 강화된 대궐 담을 재차 넘다가 포군에게 체포되었다.

두 번째는 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홍계희의 조카인 홍술해의 아내가 주술을 이용해 정조와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을 살해하려한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홍술해(洪述海)는 이전에 돈 4만 냥과 조(組) 2500석, 소나무 260그루를 도둑질하여 사형당할 위기에서 정조가 한 등급 감해 유배시킨 인물이었다.세 번째 사건은 정조를 쫓아내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정조의 이복 동생)을 추대하려 한 역모사건으로, 홍계희의 8촌 홍계능(洪啓能)과 홍상범의 4촌 홍상길이 주도하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오빠인 홍낙임(洪樂任 1741∼1801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봉한(鳳漢)의 아들)도 참여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렇듯 노론은 국왕이 자파가 아니면 국왕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금오산과 금오신화 - 최초의 한문소설을 쓴 홍술해 경주부윤시절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洪述海)가 당을 개축하여 위판(位板)을 봉안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후에 금령에 의하여 훼철되니, 고종 15년(1878)에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 유림(慶州儒林)이 기림사(祇林寺) 주지에게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肖像)을 봉안(奉安)하고, 여기에 딸린 논밭을 함께 넘겨주었다.

 

홍술해 - 영조44년(1768) 경주부윤, 몰- 1777년영조1년

홍양호- 1794년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가 되었다.

홍재- 경주부윤 英祖(영조) 42년(1766)에 이씨삼강묘비를

 

6). 李 光 靖

□ 位置 : 安東市 水上洞 820-67

□ 神主

 ○ 考位

   顯先祖考承議郞行司圃署別提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恭人聞韶金氏神主

□ 諱日

   考  位 : 7月 25日

   配  位 : 4月 20日

□ 略歷

  선생의 자(字)는 휴문(休文)이고 호(號)는 소산(小山)이며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다. 숙종 40년(1714)에 태어나 정조 13년(1789)에 몰(歿)하였다.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태화(泰和)이고 상정(象靖)의 동생이다.

  공은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진압군에 참여하였다. 영조 11년(1735) 증광향시, 1740년에 동당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에 불리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퇴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ꡔ근사록(近思錄)ꡕ, ꡔ심경(心經)ꡕ을 익혔으며, 조명천(趙命天)․이평중(李平仲)․조성여(趙聖與) 등과 교유하였다. 정조 7년(178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온릉참봉(溫陵參奉)․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정조 8년(1784)에는 다른 영남의 학자들과 함께 ꡔ초계문신강의(抄啓文臣講義)ꡕ를 검토하고 강의하는데 참여하였는데 정조의 인정을 받아 특별히 6품직에 임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저서에 ꡔ소산집(小山集)ꡕ이 있고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사는동안
글쓴이 : 권혁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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