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경주단계서당

안동권씨 시조~ 22세까지 편집

죽재권혁무 2017. 11. 10. 23:07

 一世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諱 행(幸) 2
    太師公行狀 4
    太師公神道碑銘幷序 10
    太師公墓表 17
    陵洞齋舍記 20
    陵洞齋舍重修記 26
    安東府三功臣廟增修記31
    太師廟重修記事 40
    崇報堂重新記 50
    改撰祝文 55
    廟庭碑文 55
    慶州雲谷祠記事 60
    奉安祝文 61
    景德祠記 70
    始祖太師公雲谷書院神道碑陰記 73
    悠然亭記 90
  二世 아시조(亞始祖) 낭중공(郎中公) 諱 인행(仁幸) 92
    郎中公祭壇碑文 94
    亞祖高麗郎中公移壇碑銘幷序 96
  三世 諱 책(冊) 101
  四世 諱 균한(均漢) 102
  五世 諱 자팽(子彭) 102
  六世 諱 선개(先蓋) 102
  七世 諱 염(廉) 102
  八世 諱 이여(利輿) 102
  九世 호장공(戶長公) 諱 통(通) 103
  十世 좌윤공(佐尹公) 諱 지정(至正) 103
十一世 諱 세위(世位) 103
十二世 諱 양준(良俊) 104
十三世 諱 수(粹) 104
十四世 지후공(祗候公) 諱 혁(奕) 104
    高麗中門祗候贈嘉善大夫吏曹叅判永嘉君墓碣銘 105
    燕院齋舍重新記 109
十五世 희경공(僖敬公) 諱 용일(用一) 113
    高麗門下侍中贈議政府左叅贊諡僖敬公墓碣銘 114
十六世 문정공(文靖公) 諱 희정(希正) 121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諡文靖公墓碣銘 123
十七世 송고공(松臯公) 諱 초(軺) 128
    高麗判事松臯公墓碣銘 129
    麗末忠義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墓碣銘幷序 131
    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遺墟碑銘幷序 137
十八世 경력공(經歷公) 諱 관(寬) 143
    司直行朝散大夫義禁府經歷權公墓碣銘幷序 143
十九世 죽림공(竹林公) 諱 산해(山海) 148
    ?장릉지(莊陵誌)? 「열전(列傳)」 발췌(拔萃) 15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사 153
    竹林公行狀 154
    贈嘉善大夫吏曹叅判竹林先生墓碣銘 176
    墓碣後識 182
    碣陰後敍 184
    端廟忠臣宗簿寺僉正竹林權先生之墓 186
    竹林權公墓誌 257
    竹林權公旌閭記 260
    旌忠閣記 266
    旌忠閣重修後識 271
    旌忠閣上樑文 275
    竹林節士傳 285
    竹林權先生神道碑銘 290
    竹林權先生神道碑閣上樑文 296
    竹林先祖復爵時上言 303
    죽림선생 묘갈 후지 308
    鴨脚樹記 309
    鴨脚樹記  權永休 316
    竹林公遺墟碑文 325
    贈大冢宰忠愍公竹林權先生遺墟碑銘後識 329
    魯峯書院事蹟碑 331
二十世 판관공(判官公) 諱 철손(哲孫) 333
    判官權公祭壇碑銘幷序 333
二十一世 보공부장(保功部將) 諱 민(敏) 339
    保功部將安東權公墓碣銘 340
    禱蔭齋記 345
    禱蔭齋記 350
二十二世 諱 순경(舜卿) 354
    處士安東權公諱舜卿墓碣銘 354

시조 태사공 묘소
  一世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諱 행(幸)
본디 성은 김(金)씨니 신라 종성(宗姓)이다. 김선평(金宣平)공 · 장정필(張貞弼)공과 더불어 고창(古昌) 고을을 지키고 있을 때 고려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서기(西紀) 930년 1월에 병산회전(甁山會戰)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는 견훤이 신라 서울을 짓밟고 경애왕(景哀王)을 시해(弑害)하고 왕비를 능욕했기 때문에 공이 왕실의 종친(宗親)으로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이때 공이 두 공과 모의(謀議)하여 말하기를 “훤(萱)의 부도덕(不道德)함은 의리로 보아 더불어 한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데다 또한 반드시 전쟁을 해야 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왕건(王建)공에게 투귀(投歸)하여 역적을 섬멸함으로써 위로는 임금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는 주민(住民)의 생명을 살려 우리의 통분(痛憤)을 쾌히 씻지 않으리오”하고 마침내 항복하여 고려태조를 맞아들였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함에 고려태조는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를 밝혀 귀순(歸順)하였으니 권도(權道) 권도(權道):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임시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행위규범. 권도는 상황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하고 불변적인 행위규범을 가지지 못하며 그때마다 다른 행위양식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다. 유학에서 권도는 불변의 경상(經常)에 대해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권도는 결코 경상의 도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도는 경상의 도가 상황 속에 드러나는 다른 모습이며, 상호 대대적(對待的)인 것이다.
의 적절함에 통달한지라 가히 권도가 있다 하겠다”하고 권(權)씨로 성(姓)을 내리고 대상(大相)의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다시 고려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봉공수작(封功授爵)할 때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아보공신(亞父功臣)을 봉하고 태사(太師)를 삼았다. 한편 고창군(古昌郡)은 이름을 바꿔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키고 태사공의 식읍(食邑)으로 하니 자손이 이를 세습하게 되었다. 뒤에 안동고을 유민(遺民)이 공덕을 사모하여 부사(府司)에 사당을 세우고 김·장 두 공도 함께 모셔 해마다 절사(節祀)로 제향을 받들게 되니 이것이 지금까지 보전되는 안동의 태사묘(太師廟)이다.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성곡리(城谷里) 천등산(天燈山) 남쪽 조화곡(造火谷)에 자좌(子坐)로 있다. 중간에 실전되었다가 성화(成化, 1465 - 1487) 모년(某年)에 17세손 평창군사 옹(雍)이 심득(尋得)하였다. 묘비문은 선조 21년 무자년(1588)에 외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짓고 22세손 권오(權晤) 권오(權晤):1565~1649. 안동인(安東人). 자(字)는 자회(子晦), 호(號)는 연어정(鳶魚亭)이며 옥봉(玉峯) 위(暐)의 제(弟)이다. 관(官)은 의무랑(宜武郞)을 지냈으며 특히 글씨에 뛰어나 서성(書聖)이라 불렸다. 성묘위판(聖廟位版)과 향교(鄕校)의 편액(扁額) 및 태사묘위판(太師廟位版)을 썼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가 썼다. 현종 2년 신축년(1661)에 세운 신도비의 비문은 24세손 탄옹(炭翁) 시(諰) 권시(權諰):조선 후기 성남(城南) 지역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668년 송준길(宋浚吉)의 주청으로 한성부 좌윤(左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다. 저서로는 ?탄옹집? 7책이 있다. 사후 좌참찬에 추증되었으며,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케 하였다. 대전의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가 짓고 외손 참의(參議) 이경휘(李慶徽)가 썼으며 두전(頭篆)은 외손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쓰고 음기(陰記)는 외손 판서(判書) 조복양(趙復陽) 조복양(趙復陽):1609-167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형조판서로 돌아왔다. 우참찬·대제학·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臯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송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 짓고 외손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썼으며 24세손 성원(性源)은 공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외손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황(李滉):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도옹(陶翁)・ 퇴계(退溪)이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 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이는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도산서당을 설립,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작품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 등이 있다.
은 태사묘(太師廟)의 「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廟增修記)」를 짓고 후손 참판 응정(應挺)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정조 10년 1786년에는 경주 강동면(江東面) 운곡(雲谷)에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세워 공을 제향(祭享)한다. 고종 38년 1901년에 32세손 육군소장 중현(重顯) 권중현(權重顯):1854∼1934. 충청도 영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경농(經農)이다. 이름이 재형(在衡)이었으나 1903년 5월 중현(重顯)으로 개명하였다. 대한제국기에 농상공부대신, 의정부찬정, 군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조선사편수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 신도비를 개건(改建)하였고 32세손 영사(領事) 동수(東壽)가 글씨를 썼다. 태사묘는 1950년 전란(戰亂)으로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32세손 육군소장 중환(重煥) 등의 노력으로 중건되었다. 묘제(墓祭)는 한식(寒食)과 음력 10월 중정일(中丁日)이고 태사묘의 향례는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 경주 운곡서원 향례는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이다. 능동재사는 중요민속자료로서 지방문화재이고 태사묘는 그 유물과 함께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太師公行狀
    태사공 행장
公諱幸 姓本新羅宗姓 金氏也 羅季與金公宣平 張公貞弼 守古昌郡時 後百濟甄萱 入羅 弑王辱妃 高麗太祖 聞變赴救 屯於郡北甁山柵 與萱相持 太師謀於二人日 萱之不道 義不共戴天 吾儕兵少 力不能救 今又據 必爭之地 終當魚肉 盍投王公 殲彼逆萱 上雪君恥 下活民命乎 遂以郡 佐麗祖 有甁山之捷 義聲大振 王業已成 麗祖喜曰 幸也 能炳幾歸順 識達權宜 可謂有權矣 乃賜姓權 拜大相 陞郡爲安東府 所食邑 三韓壁上三重大匡 亞父功臣太師 及卒 葬于府西 天燈山鳳停寺後 造火谷 坎坐离向之原 子仁幸 官郎中 生冊 冊自求爲本邑吏 自此凡七代 有戶長焉將校焉 蓋麗祖 統合三國之初 豪傑之前 所割據者 使各仍守其地 長民者稱戶長 統兵者稱將校 遣王官監之 此外吏之始也 其後 子孫 益以蕃 歷麗以及本朝 珪組蟬聯赫世相望 且爲吏爲民 稱其苗裔 而居府內 每於享祀時 來助祭者 亦不可數計也 府司中 有三功臣廟 金公張公 皆與焉 而獨以權氏 主祀事 若金帶玉貫子之物 皆我太師公手澤之猶存 而民不忘其德 至今傳寶之 噫 羅運欲訖 逆萱肆凶 當是時其所籍 而爲援者 惟麗王之兵 太師樹風聲 歸厚德 謀與兩公 決策迎麗 討滅君父之賊 以弭楚氛之惡 此麗祖 以達權而賜姓 其豊功懿烈 遺後彌彰著 聖源守榮川 往進廟祠 又尋松檟 展省眞宅 諸宗多有來見者 示之以傳信之書 達城徐居正 敍世譜 府使權應挻 撰廟碑文 西崖柳成龍 識其陰之 公之德 大略可見 而但顧瞻墓垣 世所謂顯刻神道銘章者 蓋常闕焉 實欠事也 聖源慨然曰 往者 兆域堙廢 墓失所在者久矣 成化間 公十八代孫 平昌郡事雍 極意尋求 獲誌石於墓傍 就加封樹 臨沒遺命 自附葬同原 爲守護計 雍之子 立碣以標 然後始知此原 有太師公墓 若於墓道 有顯刻則 豈其子孫之繁衍若是 而莫有知其墓者乎 西厓之識陰有曰 權公克智 以旌節鎭南服 會宗人設祭之時 役隸誤觸石 仆地以壞 觀察使與宗人 買石鐫治而重建 此則碣也 非神道碑也 嗚呼 世代愈遠 廟祀不潔 殆無以慰先靈 稱民心 公外派金光轍 爲府使 卽其廟 闢而新之 遠孫轍爲觀察使 置祭田 給典守 權侯紹 亦以後裔 益置田給穀 俾首吏權姓者 委掌取息 以供粢盛 又治兆域 而祭之 其後 權公盼 重修廟宇 權監司堣構齋舍 前後措置 實備無憾 而獨於銘章 有所欠缺焉 則[五字缺] 非今日吾宗黨之責乎 聖源添莅傍郡 盍與諸宗圖之 僉曰諾 卽謀斲石之資 又屬余請辭于京師 聖源敢捃摭前志 又加搜訪闕遺 謹具顚末如右
  崇禎己亥四月日 二十四世孫 榮川郡守 聖源撰

공의 휘(諱)는 행(幸)이요 성은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이다. 신라 말년에 김선평(金宣平)공과 장정필(張貞弼)공과 더불어 고창(古昌) 고을을 지키고 있을 때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쳐들어와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왕비를 욕보이니 고려태조가 이 같은 변을 듣고 구원하고자 출병하여 와 고을 북쪽의 병산(甁山)에 영책(營柵)을 치고 주둔하여 견훤과 더불어 상지(相持)하게 되었다. 이에 태사공(太師公)이 두 사람과 모의하여 가로되, “훤(萱)의 부도덕(不道德)한 것은 의리로 보아 같이 하늘을 쓰고 살 수가 없는데 우리는 병사가 적어 능히 자구(自救)할 힘이 없는데다 지금 또 이 같은 필쟁지지(必爭之地)에 근거해 있고 보면 종당(從當)에는 반드시 어육(魚肉)이 되는 지경이 될 것이니, 어찌 왕공(王公)에게 투귀(投歸)하여 저 역적(逆賊) 훤을 섬멸하고 그로써 위로 임금의 치욕을 설해(雪解)하고 아래로 주민의 목숨을 살리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고을을 들어 고려태조를 도와 병산(甁山)의 승전(勝戰)이 있게 하니 의로운 소리가 크게 떨치고 왕업(王業)이 이미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고려태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행은 능히 기미에 밝아 귀순하고 권도(權道)와 의행(宜行)을 알아 통달하였으니 가히 권형(權衡)이 있다 하겠노라” 하고 곧 권(權)으로 성을 내리고 대상(大相)을 배(拜)하였으며 군(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삼한벽상 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아보공신(亞父功臣) 태사(太師)로 봉작(封爵)했다. 졸(卒)함에 안동부의 서쪽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뒤 조화곡(造火谷)의 북쪽을 등지고 남방을 향하는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 인행(仁幸)은 낭중(郎中)을 지내고 책(冊)을 낳았는데 책은 스스로 구하여 본읍(本邑) 안동 이원(吏員)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무릇 7대에 걸쳐 호장(戶長)과 장교(將校)를 이으니 이는 대개 고려태조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호걸(豪傑)로서 전부터 할거(割據)하고 있던 자로 하여금 각기 그곳을 지켜 다스리게 하여 백성의 장이 되는 자를 호장이라 칭하고 병사를 통어(統御)하는 자를 장교라 일컫게 하고 왕관(王官)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케 하니 이것이 외리(外吏)의 시초였다. 그 후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고려조를 거치고 조선에 이르는 동안 홀(笏)을 들고 인수(印綬)를 맨 인재와 군자가 연잇고 줄달아 앞뒤를 서로 바라보면서 대대로 빛냈다. 또 이서(吏胥)와 백성으로서 그 후예임을 일컬으며 부내(府內)에 거주하면서 매번 향사(享祀) 때에 와서 제사를 돕는 자의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다. 부(府)의 관청(官廳) 안에는 삼공신묘(三功臣廟)가 있어 김선평(金宣平)공과 장정필(張貞弼)공도 함께 모셔져 있는데 유독 권씨가 그 제사의 일을 주관하고 있다. 그리고 금대(金帶)와 옥관자(玉貫子) 등의 물건은 다 우리 태사공의 수택지물(手澤之物) 수택지물(手澤之物):손수 오래 사용하여 윤기가 나는 물건.
로서 아직도 보존되고 있는데 백성이 그 덕을 잊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보배로이 전하고 있다. 아아, 신라의 운이 마치려할 즈음 역괴(逆魁) 견훤의 방자(放恣)하고 흉포(凶暴)함을 당하여 그 백성으로 소적(所籍)된 자로서 이를 구원하는 자는 오직 고려왕의 군대뿐이었다. 태사공이 풍성(風聲)을 세워 후덕(厚德)한 이에게 귀부(歸附)하여 의모(議謀)로써 양공(兩公)과 더불어 결책(決策)하여 고려를 맞아들이고 군부(君父)의 도적을 토멸함으로써 고통과 재앙의 악이 그치게 하였다. 이에 고려태조가 권도(權道)에 통달한 것으로써 권(權)으로 성을 내리고 그 풍성한 공덕과 아름다운 열지(烈志)가 후손에게 미쳐서 널리 퍼지고 드러나게 한 것이다. 나 성원(聖源)이 영주군수(榮州郡守)가 되어 태사묘(太師廟)에 가서 진배(進拜)하고 또 묘소를 찾아 묘소(墓所)를 참배(參拜)할 때 여러 종인(宗人)이 많이 와서 보고 모든 전신지서(傳信之書)를 보여 주었다. 달성(達城) 서거정(徐居正)의 세보(世譜)에 쓴 서(敍)와 부사(府使) 권응정(權應挻)이 지은 묘비문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쓴 음기(陰記)로 태사공의 공덕과 덕망을 가히 볼 수 있으나 단지 묘원(墓垣)을 돌아보건대 세상에서 일컫고 있는 현각신도명장(顯刻神道銘章)이라는 것이 대개 상궐(常闕)되어 있었다. 이는 실로 흠이 될 일이었다. 성원이 개연(慨然)하여 가로되, “지난날에 묘소가 인폐(堙廢)되어 그 소재를 잃은 것이 오래 되었는데 성화(成化,1465-1487) 모년(某年)에 18대손[17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지극한 성의로 찾은 끝에 묘소 곁에서 지석(誌石)을 얻으며 봉분을 돋우어 올리고 몰(沒)하기에 이르러 자신을 같은 언덕에 부장(附葬)할 것을 유명(遺命)으로 남겨 수호할 계획을 삼았고 옹의 아들이 비갈을 세워 표지한 연후에 비로소 이 언덕에 태사공의 묘소가 계신 것을 알게 되었은즉 묘도(墓道)의 현각(顯刻)에 있어서야 어찌 그 자손의 번연(繁衍)함이 이와 같은데 그 묘소라는 것을 도무지 알 수 없게 할 수가 있으리오? 서애가 쓴 음기에 가로되 ‘권극지(權克智) 권극지(權克智):1538~1592. 자는 택중(擇仲),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검열(檢閱)ㆍ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ㆍ대사헌(大司憲)ㆍ예조 판서 등을 지냈다.
공이 경상도관찰사로 내려와 종인(宗人)을 모아 제사를 베풀 때에 역례(役隸)가 비석을 잘못 건드려 넘어뜨려 깨었기에 관찰사와 종인들이 돌을 사서 다듬고 새겨 다시 세웠다’ 하였는데 이는 곧 묘갈(墓碣)이지 신도비가 아니다. 아아, 세대가 더욱 멀리 내려와도 사당의 제사에는 불결함이 태무함으로써 선령(先靈)을 위로하고 백성의 마음에 부합하고 있는데 공의 외손인 김광철(金光轍)이 부사(府使)가 되어서는 그 사당에 나가 벽수(闢修)하여 새롭게 단장했고 먼 후손 철(轍)은 관찰사가 되어 와서 위토(位土)와 전수(典守) 전수(典守):제사를 관장하는 수직(守直).
를 공급하였으며 안동부사 권소(權紹) 또한 후예로서 전답을 더하여 두고 곡식을 지급하여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으로 권성자(權姓者)에게 위탁 관리시켜 그 이식으로 제수(祭需)를 받들게 하였으며 또한 조역(兆域)을 다스리고 제사하였다. 그 후 권반(權盼) 권반(權盼):1564~1631. 본관 안동(安東), 자 중명(仲明), 호 폐호(閉戶). 길천군(吉川君)에 봉해졌다.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영의정 윤국형(尹國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사위가 되었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628년(인조 6)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공이 사당을 중수하고 감사(監司) 우(堣)는 재사(齋舍)를 지었으니 전후의 조치가 실로 갖추어져 유감됨이 없었으나 다만 한 가지 명장(銘章)에 흠결(欠缺)이 있는 바인즉[원문 5자 결락] 오늘날 우리 종당(宗黨)의 책임이 아니리오. 성원이 이웃 고을을 욕되게 임하고 있는 수재(守宰)로서 어찌 여러 종인과 더불어 도모치 아니하리요?”하니 모두가 그렇게 하자고 하므로 곧 돌을 잘라 새길 자금을 의논케 되었다. 그리고 또한 서울로 올라와 있는 나에게 거기에 쓸 말씀을 촉탁하므로 성원은 감히 전지(前志)를 주워 모아 가지고 또 그 빠지고 누락된 것을 찾아 더하여 삼가 그 전말을 오른쪽과 같이 적는다. 효종 10년 기해년(1659) 4월 일에 24[25]세손 영천군수(榮川郡守) 성원(聖源) 지음

    太師公神道碑銘幷序
    태사공 신도비명병서

능동 태사공 신도비각
公諱幸 本金氏 與新羅同姓 羅季與金宣平 張貞弼 守古昌郡 甄萱入羅 君弑國覆 高麗太祖 赴救之 屯郡北甁山柵 與萱相持 公與金張二人謀曰 吾輩義不與萱共戴天 顧力不能報 盍投王公 共滅此賊 遂以郡佐麗祖 有甁山之捷 義聲大振 麗祖曰 金幸炳幾達權 可謂能權矣 乃賜姓權 拜大相 陞郡爲安東府 封食邑 位至三韓壁上三重大匡 亞父功臣太師 卒葬于府西天燈山造火谷 坎坐之原 子 仁幸 官郎中 生子冊 冊求爲本府吏 數世爲戶長將校 初豪傑割據郡縣 麗祖旣統合 使仍守其地 長民者稱戶長 統兵者將校 遣王官監之 此外吏之始也 其後子孫益大以蕃 珪組蟬聯 奕世相望 廟于府以祀公 金公張公亦與焉 權氏世主祀事 廟有玉笙 玉貫子 朝衣服 金帶 象笏 銀匙箸 皆我太師公 所服用之物 今七百餘年 世傳之 手澤猶宛然 成化間 十六世孫 平昌郡事雍 盡誠求之得 立碣以表之 萬曆戊子 二十二世 判書克智 觀察嶺南 合宗人祭之 墓碣之仆者 買石新之 嘉靖壬寅 外裔金光轍爲府使 卽其廟 闢而新之 二十一世 領議政轍 置祭田守戶 丙辰府使紹 增其田 給穀百碩 俾首吏姓權者 掌之以供粢盛 又治兆域 而歲一祭之 癸亥 府使應挺碑于廟 萬曆癸丑 二十四世 吉川君盼觀察 重修廟宇 祭春秋以中丁 癸巳 觀察使堣 創齋舍墓下 僦人戶守之 己亥 榮川郡守聖源 禮祠展墓 慨然曰 子孫雖多 向非平昌公 孰知太師墓之在斯 神道 早有銘者 何挈蕝之艱 以吾太師公 而尙闕顯刻 玆非吾宗人之責乎 盍圖之 僉曰 諾 凡後裔之遠近貴賤咸響臻 卽斲石 府使李侯 卽外孫 幹其事 聖源及宗人 屬諰記其事 噫 我始祖 當羅麗之際 大義較著 功烈卓然赫赫 在人耳目 名與天壤相敝 而前後爲方伯 太守 非姓孫則外裔也 皆盡力于廟祀 若邱墓創之修之 苗裔之在玆土者 典錢穀奉 俎豆不絶 今又立石墓隧 使千萬歲後 皆知爲太師公之墓 亦可見 積德之盛也 原上之墓 第一太師 第二平昌 第三則或稱 平昌夫人之葬云 其下西厓 柳相公成龍 先墓在焉 亦外裔也 遂爲之銘曰
量力達節 讎報恥雪 仁拯斯民 慶衍後人 麗祖賜姓 陞封錫號 丕視功載 靡德不報 有翼有廟 祀事孔明 手澤傳寶 金帶玉笙 誰其戶之 府中後裔 謹守迭掌 罔墜厥緖 有田有穀 有齋有碣 諸公相繼 創修罔缺 載修顯刻 亦與有光 其永有考 余言匪哤
  崇禎己丑 九月日 二十四世孫 漢城右尹 權諰 撰 外裔吏曹參議 李慶徽 書 外裔司憲府掌令 許穆 篆

공(公)의 휘(諱)는 행(幸)이고 본디 김씨(金氏)로서 신라(新羅)와 동성(同姓)이다. 신라말엽(新羅末葉)에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더불어 고창군(古昌郡)을 수호(守護)하는데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侵入)하여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나라를 뒤엎은지라,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구원(救援)코자 와서 고을 북(北)쪽의 병산책(甁山柵)에 둔(屯)치고 견훤(甄萱)과 서로 대치(對峙)하였다. 공이 김(金) ․ 장(張) 2인(人)과 모의(謀議)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의리상(義理上) 훤(萱)과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데 힘을 돌아보아서는 능히 보복(報復)할 수 없으니 어찌 왕건(王建)공에게 투귀(投歸)하여 함께 이 도적(盜賊)을 멸(滅)하지 않으리요?” 하고 드디어 고을을 들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병산(甁山)의 승전(勝戰)이 있게 하니 의로운 외침이 대진(大振)하였다. 이에 고려태조가 기뻐하며 이르기를, “김행(金幸)은 기미(幾微)를 밝혀 권도(權道)에 통달(通達)하였으니 가히 권도(權道)에 능하다고 할 것이다” 하고, 곧 권(權)으로 성(姓)을 내리고 대상(大相)을 제수(除授)하였으며 군(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키고 그 식읍(食邑)으로 봉(封)하니 지위(地位)는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아보공신(亞父功臣)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졸(卒)함에 안동부(安東府)의 서(西)쪽 천등산(天燈山) 조화곡(造火谷) 정남향(正南向) 언덕에 장사(葬事)지냈다. 아들은 인행(仁幸)으로 벼슬이 낭중(郎中)이며, 아들 책(冊)을 낳았는데 책(冊)은 스스로 구(求)하여 안동부(安東府)의 이서(吏胥)가 되었으며, 여러 대(代)에 걸쳐 호장(戶長)과 장교(將校)가 되었다. 처음에 호걸(豪傑)이 군현(郡縣)을 할거(割據)하다가 고려태조가 통합(統合)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각자(各自)의 할거지(割據地)를 지키게 하면서 장민자(長民者)를 호장(戶長)이라 하고 통병자(統兵者)를 장교(將校)라 일컫게 하며 왕관(王官)을 파견(派遣)하여 감독(監督)케 하니 이것이 외리(外吏)의 비롯됨이었다. 그 후로 자손(子孫)이 더욱 크게 번창(繁昌)하여 수많은 규조(珪組)가 연잇고 대(代)를 빛내며 서로 바라보듯 끊이지 않았다. 사당(祠堂)을 안동부(安東府)에 세우고 공(公)을 제사(祭祀)지내는데 김공(金公)과 장공(張公)도 더불어 제사지내며, 권씨(權氏)가 대대(代代)로 제사 일을 주장(主掌)한다. 사당(祠堂)에는 옥생(玉笙) ․ 옥관자(玉貫子) ․ 조의복(朝衣服) ․ 금대(金帶) ․ 상홀(象笏) ․ 은시저(銀匙箸) ․ 칠배우(漆盃盂)가 있는데 모두가 우리 태사공이 사용했던 물건이며 지금 7백여 년을 세전(世傳)해 내려왔는데도 수택(手澤)이 완연(宛然)하다. 성화(成化,1465-1487) 모년(某年)에 17세(世)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精誠)을 다해 묘소(墓所)를 탐구(探究)하여 찾아내서는 비갈(碑碣)을 세워 표시(標示)하였다. 선조(宣祖) 21년 무자년(1588)에 22세 판서(判書) 극지(克智)가 영남(嶺南)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종인(宗人)을 모아 제사를 지내면서 묘갈(墓碣)이 넘어진 것을 돌을 사들여 다시 세웠다. 중종(中宗) 37년 임인년(1542)에 외손 김광철(金光轍)이 부사(府使)로 와서 묘(廟)를 새롭게 지었다. 21세 영의정(領議政) 철(轍)이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제전(祭田)을 마련하였고 수호(守戶)를 두었다. 병진년(1556)에 20세 부사(府使) 소(紹)가 그 제전(祭田)을 더하고 1백 석의 곡식(穀食)을 공급(供給)하여 이를 수리(首吏)로서 권씨(權氏) 성(姓)을 가진 자가 관장(管掌)하면서 제수(祭需)에 공여(供與)토록 하고 또한 묘역(墓域)을 다스려 한 해에 한 번씩 제향(祭享)을 올리게 하였다. 계해년(1563)에는 22세 부사(府使) 응정(應挺)이 묘(廟)에 비(碑)를 세웠다. 광해군 5년 계축년(1613)에 24세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관찰사(觀察使)로 와서 묘우(廟宇)를 중수(重修)하고 봄가을로 중정일(中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게 하였다. 계사년(1653)에 24세(世) 관찰사(觀察使) 우(堣)가 묘소(墓所) 아래에 재사(齋舍)를 창건(刱建)하고 호구(戶口)를 들여 빌어 살면서 지키게 하였다. 기해년(1659)에 25세 영주군수(榮州郡守) 성원(聖源)이 사당(祠堂)에 참례(參禮)하고 묘소(墓所)를 전성(展省)하면서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자손(子孫)이 비록 많다 하나 지난날 평창공(平昌公)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태사(太師)공의 묘소가 여기 있음을 알 것인가? 신도(神道)에는 일찍이 지명(誌銘)을 지은 것이 있는데 이를 새겨 세움에 어떤 어려움이 있기에 우리 태사공(太師公)으로서 아직도 현각(顯刻)이 궐루(闕漏)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종인(宗人)들 책임(責任)이 아니겠는가? 어찌 이를 도모(圖謀)치 아니하리요?”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무릇 후예(後裔)로서 멀고 가까움과 귀(貴)하고 천(賤)함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메아리처럼 호응(呼應)하여 곧 돌을 자르게 되니 외손(外孫)인 부사(府使) 이인(李)이 그 일을 주간(主幹)하였고, 성원(聖源)과 종인(宗人)들이 시(諰)에게 그 일을 기록(記錄)할 것을 촉탁(囑託)하였다. 아아! 우리 시조(始祖)께서 고려와 신라의 교체기(交替期)를 당하여 대의(大義)가 교저(較著)하고 공렬(功烈)이 탁연(卓然)하여 혁혁(赫赫)한 것이 사람의 이목(耳目)에 있으며 이름이 천지(天地)와 더불어 서로 기릴 만한지라 전후(前後)에 방백(方伯)이나 태수(太守)는 그 후손(後孫)이 아니면 외손(外孫)이여서 모두가 묘사(廟祀)에 힘을 다하고 무덤을 일으키고 수치(修治)하였으며, 묘예(苗裔)로서 이 땅에 있는 자들이 전곡(錢穀)을 관리(管理)하여 조두(俎豆)를 받들기를 끊이지 않더니 지금 또한 묘수(墓隧)에 비석(碑石)을 세워 천만세(千萬世) 후(後)에도 모두가 태사공(太師公)의 묘소(墓所)를 알게 하니 또한 가히 덕(德)을 쌓은 것의 성대(盛大)함을 보겠다. 언덕 위의 묘소로 제일(第一)은 태사(太師)공이요, 제이(第二)는 평창(平昌)공이며, 제삼(第三)은 혹은 이르기를 평창공(平昌公)의 부인(夫人)이 장사(葬事)된 것이라 한다. 그 아래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상공(相公)의 선대(先代) 류중영(柳仲郢) 류중영(柳仲郢):1515(중종 10)∼1573(선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입암(立巖). 류소(柳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자온(柳子溫)이고, 아버지는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참의 이형례(李亨禮)의 딸이다. 선조 때의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의 아버지이다.
의 묘소가 있는데 또한 외손(外孫)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量力達節 讎報恥雪(양력달절 수보치설)
  역량을 헤아려 절도(節度)에 통달(通達)함으로써 원수를 갚고 치욕(恥辱)을 씻으니,

  仁拯斯民 慶衍後人(인증사민 경연후인)
  어짊은 백성(百姓)을 건지고 경사(慶事)로움은 후세 사람들에게 번졌네.

  麗祖賜姓 陞封錫號(여조사성 승봉석호)
  고려태조께서 성(姓)을 내리시고 식읍(食邑)을 높여 공호(功號)를 주시니,

  丕視功載 靡德不報(비시공재 미덕불보)
  크게 실린 공렬(功烈)뿐만 아니라 덕(德)이 아니면 받지 못함일러라.

  有翼有廟 祀事孔明(유익유묘 사사공명)
  훌륭한 사당(祠堂)에 제사(祭祀) 드림이 크게 밝고,

  手澤傳寶 金帶玉笙(수택전보 금대옥생)
  수택이 빛나는 전보(傳寶)는 금대(金帶)와 옥생(玉笙)이네.

  誰其戶之 府中後裔(수기호지 부중후예)
  누가 이를 주관(主管)하는가? 부중(府中)의 후예(後裔)로다.

  謹守迭掌 罔墜厥緖(근수질장 망추궐서)
  삼가 지키며 갈마들어 장악하되 전통을 실추시키지 않았네.

  有田有穀 有齋有碣(유전유곡 유재유갈)
  전토(田土)와 곡식(穀食) 그리고 재사(齋舍)와 비갈(碑碣)을,

  諸公相繼, 創修罔缺(제공상계 창수망결)
  제공이 서로 계승하고 수치(修治)하여 이지러짐이 없게 하네.

  載修顯刻 亦與有光(재수현각 역여유광)
  이제 현각(顯刻)을 세우니 이 또한 더불어 빛날지라,

  其永有考 余言匪哤(기영유고 여언비방)
  그 영구함이 오래일 터인즉 나의 말이 헛되지 않을진저.

  현종 2년 신축년(1661) 9월 일에 24세손 한성우윤(漢城右尹) 권시(權諰) 권시(權諰):1604(선조 37)∼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세자시강원자의 등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 공조좌랑에 이어, 경상도사 등을 역임하고, 집의·진선(進善) 등을 거쳐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찬선(贊善)에 오르고, 1659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1668년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해 공주(公州)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좌참찬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대전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탄옹집? 7책이 있다.
 짓고, 외손 이조참의(吏曹參議) 이경휘(李慶徽) 이경휘(李慶徽):1617(광해군 9)∼1669(현종10).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默好). 춘전거사(春田居士), 시호는 익헌(翼憲).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검열(檢閱), 지평(持平), 행(行)홍문관수찬 ·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을 역임하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 헌납(獻納)이 되었다. 1655년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 1669년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쓰고, 외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허목(許穆) 허목(許穆):1595~1682.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 이황ㆍ 정구의 학통을 이어 이익에게 전하였다. 기호 남인 실학파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전서(篆書)에 능하였고, 문집으로는 ?기언(記言)?이 있으며, 역사서 ?동사(東事)? 등을 편집하였다.
 전(篆)함


    太師公墓表
    태사공 묘표
安東府西十里 而遠有山 曰天燈 其中坎坐离向之原 實高麗 三韓壁上三重大匡 亞父功臣權公 冠履所藏也 公諱幸 本新羅宗姓 羅末公守古昌郡以地迎麗祖 有功賜姓權 金之爲權 自公始 其後子孫 益大以蕃 歷麗以及本朝 冠冕不絶 世之數名宗巨閥 必爲權氏爲首 其亦盛矣 始公旣葬 墓道闕顯刻 世代愈遠 兆域湮廢 莫有知其處者 成化年間 十八代孫平昌郡事雍乃極意尋求 於墓傍獲誌石 就加封樹 臨沒遺命 自祔葬其原 爲守護計 卽墓南第二塚是也 而雍之子裕綽等 承雍之志 立石標之 慵齋李公宗準 識其陰 萬曆戊子 公遠孫今觀察使君 克智以旌節 鎭南服 巡到于此 展省松檟合宗人之在一境者 以祭之 卽卒事 役隸誤觸石 仆地以壞 觀察使 卽與宗人謀 買石鐫治 將涓吉改封 以成龍 亦係公外派 屬記其事 余窃惟公之勳業 在史策 嗣息具譜牒 惠澤在一邦 無容更贅 謹略具 立石顚末 俾來者有考焉 按譜稱 公爲太師 而舊刻不載 故疑 不敢加焉.
  萬曆十六年 戊子月日 資憲大夫 禮曹判書 柳成龍撰
  二十二世孫 權晤書 萬曆十六年 閏六月初三日立
  舊碑年久頑缺 崇禎再丙寅 二十七世孫爀按察本道時 改立

안동부의 서쪽으로 10리 멀리에 천등산(天燈山)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감좌이향(坎坐离向)의 언덕은 실로 고려(高麗)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아보공신(亞父功臣) 권공(權公)의 묘소(墓所)이다. 공의 휘는 행(幸)이고 본디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신라말(新羅末)에 공이 고창군(古昌郡)을 지키다가 지역(地域)을 들어 고려태조를 맞이함으로써 공(功)을 세워 권씨로 성(姓)을 내리니 김씨로서 권씨가 된 것이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후로 자손이 더욱 크게 번성하여 여조(麗朝)를 거쳐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관면(冠冕)이 끊이지 않으니 세상에서 이름난 종중(宗中)과 큰 문벌(門閥)을 셀 때는 반드시 권씨를 수위(首位)에 놓았으니 그 또한 성대한 것이다. 처음에 공을 장사지냈을 때는 묘도(墓道)에 현각(顯刻)이 없었는지라 세대가 더욱 멀어짐에 따라 조역(兆域)이 인폐(湮廢)되어 그 있는 곳을 알 길이 없었는데 성화(成化,1465-1487) 모년(某年)에 18대손[16대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지극한 뜻으로 찾아 구하여 묘소 곁에서 지석(誌石)을 획득하여 나아가 봉분(封墳)을 더하여 세우고는 임종(臨終)에 유명(遺命)으로 스스로 그 언덕에 부장(祔葬)되어 수호(守護)할 계책을 삼으니 곧 묘소의 남쪽 제2총이 이것이며 옹(雍)의 아들 유(裕)와 작(綽) 등이 옹(雍)의 뜻을 받들어 비석을 세워 표지(標識)하니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이종준(李宗準):?∼1499(연산군 5).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출신. 아버지는 이시민(李時敏)이며, 어머니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고, 의서로는 ?신선태을자금단방(神仙太乙紫金丹方)?이 있다.
 공이 그 음기(陰記)를 지었다. 선조 21년 무자년(1588) 공의 원손(遠孫) 극지(克智) 군이 지금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경상도(慶尙道)를 진무(鎭撫)하면서 순시차(巡視次) 이곳에 당도하여 묘소를 전성(展省)하고 한 지경(地境)에 사는 종인(宗人)을 모아 제사를 올렸는데 이미 일을 마쳤을 때 하인이 잘못 비석을 건드려 땅에 넘어져 깨졌다. 관찰사가 곧 종인과 모의(謀議)하여 돌을 사서 새기는 일을 다스리며 고쳐 세울 길일(吉日)을 잡으려 하면서 성룡(成龍)이 또한 공의 외손(外孫)에 딸렸다 하여 그 일을 기록할 것을 촉탁하였다. 내가 그윽이 생각건대 공의 훈업(勳業)은 사책(史策)에 실려 있고 후손은 보첩(譜牒)에 갖추어져 있으며 혜택은 온 나라에 있어서 다시 췌언(贅言)을 용납지 않는지라 삼가 간략히 돌을 세운 전말을 갖추어 뒤에 오는 이로 하여금 참고하도록 한다. 보첩(譜牒)을 살펴보면 공을 태사(太師)라 일컫고 있는데 옛날 각석에는 실려 있지 않으므로 의심스러워 감히 더하지 않는다.
  선조 21년 무자년(1588) 월 일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류성룡(柳成龍) 지음
  22세손 권오(權晤) 씀. 무자년(1588) 윤6월 초3일 세움. 세월이 오래되어 옛 비가 무디고 깨졌으므로 영조 22년 병인년(1746)에 27세손 혁(爀)이 본도(本道)를 안찰(按察)할 때에 고쳐 세움


    陵洞齋舍記
    능동재사 기문

태사공 능동재사
惟我始太師公 衣冠之藏 在府西天燈山 距府二十里而近 始墓道無表 因世代寢遠 莫的其所 爲子孫痛恨者 久矣 成化間 十八代孫 平昌郡事雍 竭誠尋求 得誌石 卽加封築 仍遺命 從葬其下 盖爲守護計也 自是 香火不絶 子孫之居在遠邇者 莫不奔走 展省而致敬焉 粤在明廟 宣廟及光海朝 聞孫 有若領議政轍 有若府使紹 應挺 有若判書克智 有若吉川君盼 前後爲方伯地主 或重新廟宇 或立碑廟庭 或治恢兆域 或參定祭式 爲久遠計者 靡不用極 而顧於齋宇之建 有未遑焉 我孝宗四年癸巳 遠孫堣 出鎭南服 省墓奠獻 與宗人謀 得墓右隙地 闢而創之 董其役者 曰中正 曰鋌 凡爲堂四間 左右夾室各二間 夾室下爲間各三 上一間 以通出入 下二間爲房若廳 前立四間 以爲庫藏 合十六間 於是 典守有其居 齋宿有其所 器用品物有其藏 觀者 咸以爲盛 顧制度不宏 每當奠會 有狹隘難容之歎矣 上之八年壬戌 遠孫是經 爲觀察使 始至展省松檟 卽謀改造床石 增竪香爐石 石人望柱等物 使宗人曰鏔 曰時望 曰錫祐等 幹其事 越明年癸亥春 躬率宗人之在境內者 祭告立之 旣卒事 與宗人議曰 齋舍狹小 甚恐不足以容多人 盍創建樓閣 以爲宗會 序坐之地乎 咸曰諾 於是 使宗人 曰灝 曰 曰斗英等 監董之 卽山內 以取材 給官羨以助費 赴其役者 皆子孫僕隸 肇役於是年秋 訖工於明年甲子 爲樓凡七間 上可坐百餘人 下設左右庫間 以蓄穀 中虛一間 以通路 齋舍東 立神廚三間 繚以垣墻 規模鼎新 聞者易聽 見者改觀 其爲先之誠 用意之勤 豈不亦可尙也哉 宗人咸屬斗寅 記其事 辭不獲 遂諗于門曰 我祖勳業 著于邦 惠澤流于民 廟食鄕土 至于今八百年之久而不替 固無容贅 而至其平生 德誼之詳 則世遠 不少槪見 卽於何徵之哉 惟是積之身 大發慶于後 自麗朝以及本朝 其支裔之蕃 圭組之盛 赫赫乎 恍恍乎 世無有倫比 卽無論 鉅公名卿 磊落相望 往往 文章道德之士 蔚然間出 不可以一二數 下及吏胥小民 稱其子孫者 亦多有之 至其外裔者則殆遍國中 其麗不億 又何可勝道哉 玆非根深者 其枝葉茂 源遠者 其流派漫者耶 盛矣哉 矧玆遺墓 旣失之而復得 於久遠之後 使苗裔之 爲方伯地主 得有以世 增崇其祀事 又豈非天陰相之 以篤 我祖爲先之 報也歟 抑斗寅因是 而有感焉 凡我安東之權 自我始祖以後 分爲百支 衍爲幾世 散爲千萬 指不可僂歷 然苟求其初 則皆原於一人之身 譬之木焉 雖千柯萬葉彙分條別 而其有不本之 一箇根抵者哉 凡我宗人 盍亦各念爾祖 各勉敦睦 以庶幾無忝爾所生也哉 神道舊無碑 孝宗己亥 遠孫聖源 宰榮川 省謁于墓 慨然以爲己任 伐石于豊基 而始役焉 未幾去官 未克就 後爲一善守 完畢其役 癸卯夏 地主成侯後卨 始立于齋舍之右 爲文以祭之 成侯亦外裔也 幷書之爲記
  上之十三年丁卯 七月 日 二十四世孫 斗寅記


태사공 능동재사 전경
헤아리건대 우리 시조 태사공의 묘소는 부(府)의 서쪽 천등산(天燈山)으로 부에서 20리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처음에 묘도(墓道)에 표석(表石)이 없고 세대가 오래 됨에 따라 그 있는 곳을 알 길이 없게 되니 자손 된 자의 통한(痛恨)스러움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성화(成化,1465-1487) 모년(某年)에 17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하여 심구(尋求)하여 지석(誌石)을 얻어서는 곧 봉축(封築)을 더하였는데 인하여 유명(遺命)으로 자신을 그 아래에 좇아 장사케 하니 대개 이를 수호할 계책이었다. 이로부터 향화(香火)가 끓어지지 않고 자손으로서 멀고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자가 분주(奔走)히 와서 전성(展省)하고 공경을 드리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지난 명종 선조 및 광해조(光海朝)에 이름난 자손으로서 영의정(領議政) 철(轍) 같은 이와 판서(判書) 극지(克智)와 길천군(吉川君) 반(盼) 같은 이가 전후로 관찰사나 고을 수령이 되어 혹은 사당을 중신(重新)하고 혹은 태사묘의 뜰에 세운 비를 세우고 혹은 묘역을 넓혀 다스리고 혹은 제사의 의식을 참고하여 정하여 구원(久遠)의 계책을 삼은 것이 다 지극함으로써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재사(齋舍)를 건립하는 일에 있어서는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한 바 있었다. 우리 효종(孝宗) 4년 계사년(1653)에 원손(遠孫) 우(堣)가 경상도를 진수(鎭守)하러 나와서는 성묘(省墓)하고 전헌(奠獻)하면서 종인(宗人)과 더불어 모의(謀議)하여 묘소 우측에 자그마한 땅을 얻어 재사를 처음 열어 창건하니 그 역사(役事)를 감동(監董)한 것은 중정(中正)과 정(鋌)이라는 자인데 무릇 당(堂)은 4칸으로 하고 좌우에 협실(夾室:곁방)을 각기 2칸으로 했으며 협실 아래에 간을 만들어 각기 3개로 하되 위쪽 1칸으로는 출입시에 통용하게 하고 아래 2간은 방(房)과 마루로 하고 앞에 4간을 세워 곳간을 삼으니 합하여 16칸이었다. 이에 산지기는 그 거처할 곳이 있고 재숙(齋宿)은 그 장소가 있게 되었으며 기용(器用)과 품물(品物)은 그 갈무릴 곳이 있게 되니 보는 이가 모두 성대하게 여기되 그 제도를 돌아보면 굉장한 것이 아니어서 매양 제전(祭奠)을 위해 모일 때를 당하면 아무래도 협애(狹隘)하여 수용키가 어려운 탄식이 있었다. 지금 임금 숙종 8년 임술년(1682)에 원손(遠孫) 시경(是經)이 관찰사가 되어 처음 이르러 묘소를 전성(展省)하고 곧 도모하여 상석(床石)을 개조하고 향로석(香爐石)과 석인(石人) ・ 망주(望柱) 등물을 더하여 세우는 데 종인(宗人) 인(鏔) ・ 시망(時望) ・ 석우(錫祐) 등이 그 일을 주간(主幹)하게 하더니 이듬해 계해년(1683) 봄에는 몸소 지경 안에 사는 종인을 거느리고 그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는데 일을 다 마치고는 종인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재사가 협소하여 많은 사람을 용납하기에 부족할까 심히 두려우니 어찌 누각(樓閣)을 창건하여 종회(宗會) 때에 차례로 좌정할 곳을 마련치 않으리오” 하니 모두가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종인 호(灝)와 담()과 두영(斗英) 등에게 시켜 일을 감동(監董)케 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재목을 베어 취하고 관에서 남은 것으로 그 비용을 도와 지급하니 그 일에 부역(赴役)하는 자는 모두 자손과 그 하인이었다. 역사를 이해 가을에 시작하여 이듬해 숙종 10년 갑자년(1684)에 준공(竣工)하니 누각은 무릇 7간인데 위층에는 가히 1백여 인이 앉을 수가 있고 아래에는 좌우에 곳간을 베풀어 곡물을 비축케 하고 가운데는 1간을 비워 통로로 삼고 재사의 동쪽에는 신주(神廚) 신주(神廚):신에게 올릴 제수(祭羞)를 차리는 주방(廚房).
 3간을 세우고 담장을 두르니 규모가 정신(鼎新)된지라 듣는 이는 그 듣는 귀를 바꾸고 보는 이는 다시 고쳐 또 보니 그 선조를 위하는 성의와 마음씀의 힘들임이 어찌 또한 가상(嘉尙)할 바가 아닐 것인가. 종인이 모두가 두인(斗寅:필자)에게 그 일을 기록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마침내 다음과 같이 문중에 고하여 이른다. 우리 시조의 훈업(勳業)이 방역(邦域)에 무저(茂著)하고 혜택이 백성에게 유전(流傳)되어 향토에서 사당의 제향을 받는 것이 지금에 이르도록 8백년토록 오래인데도 바뀌지 않고 있으니 본디 췌언(贅言)이 필요치 않으나 그 평생 덕의(德誼)의 상세한 것에 이를 것 같으면 세대가 멀어 개괄적으로만 본 것이 적지 않지만 무엇으로 이를 징험하여 알 것인가? 오직 이처럼 덕을 쌓으신 몸이 후손에게 크게 여경(餘廛)을 발휘하여 고려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지예(支裔)가 번창함과 홀과 인끈이 성대한 것이 혁혁하고 황황(恍恍)하여 세상에 그 짝하여 비길 것이 없으니 곧 거공(鉅公)과 명경(名卿)이 뇌락(磊落)하게 서로 바라보며 나오고 왕왕(往往) 문장과 도덕의 선비가 그 사이에서 울연(蔚然)히 간출(間出)한 것을 한둘로 헤아릴 수가 없으며 아래로 아전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자손임을 일컫는 자가 또한 많으며 외손(外孫)에 이를 것 같으면 거의 온 나라 안에 두루 퍼져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또한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오? 이것이 어찌 뿌리가 깊은 자 그 지엽(枝葉)이 무성하고 근원이 먼 자 그 흐르는 줄기가 질펀함이 아니겠는가? 성대하도다. 하물며 이 유묘(遺墓)를 이미 실전(失傳)하였다가 다시 심득(尋得)하고 구원(久遠)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묘예(苗裔)로서 방백(方伯)과 안동부사가 된 이가 대대로 그 제사 받드는 일을 더하여 높일 수가 있게 되었으니 또한 이 어찌 하늘이 음으로 도와 돈독히 하며 우리 시조가 선행을 함에 응보(應報)함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나 두인(斗寅)은 이로 말미암아 느낌이 있는 것이다. 무릇 우리의 안동 권씨가 우리 시조로부터 비롯하여 이후로 백 갈래로 나뉘고 여러 세대를 걸쳐 퍼져서 들어져 천만이 되니 손가락을 거듭 구부려 헤아릴 수가 없으나 정녕 그 처음을 추구한즉 모두가 한 사람의 몸에 근원하고 있으니 나무에 비유한다면 비록 천 가지와 만의 잎이 떨기로 나뉘고 줄기로 달라져도 그 근본은 한 개의 뿌리에 근본한 것이 아닐 것인가? 무릇 우리 종인(宗人)된 자는 어찌 또한 각기 그 시조를 생각하여 각자 돈목(敦睦)에 힘씀으로써 그 태어난 바를 욕되게 아니하고자 하지 않을 것인가? 신도(神道)에는 옛적에 비가 없었는데 효종(孝宗) 기해년(1659)에 원손(遠孫) 성원(聖源)이 영주(榮州)군수가 되어 묘소를 성알(省謁)하고는 개연히 이를 자기가 할 일로 여기고 풍기(豊基)에서 돌을 벌채(伐採)해다가 일을 시작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관직을 떠나가니 능히 이를 진척시킬 수가 없다가 뒤에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어 와서 그 역사를 완전히 마쳤고 계묘년(1663) 여름에 안동부사 성후설(成後卨) 성후설(成後卨): 1615-167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허(子許).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51년(효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전적·함경도사를 거쳐 병조좌랑·사간원정언·경상도사를 지내고, 1656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올라 홍주목사로 내려가 크게 치적을 쌓았다. 그 뒤 안동부사를 거쳐 1665년(현종 6)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예빈시정(禮賓寺正)·영광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사성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강계부사·의주부윤·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671년 수원부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2년 후 파직되어 돌아와 곧 죽었으나 그 해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 비로소 재사의 오른쪽에 세우고 글을 지어 제사하니 성공(成公) 또한 외손(外孫)이기에 아울러 써서 기록한다. 지금 임금 숙종 13년 정묘년(1687) 7월 일에 24세손 두인(斗寅) 씀


    陵洞齋舍重修記
    능동재사 중수기문
物理之廢興 常關於氣數之消長 其廢也 固値閼塞之運 然 苟人事之修 則亦能起廢而爲興 是以 君子 務修人事 而不專諉於氣數也 我始祖太師府君 衣冠之藏 在天燈山 初因失傳 爲子孫之痛恨 久矣 後孫平昌公雍 竭誠尋求 得誌石 自是 香火不絶 其後 聞孫相繼 爲方伯地主 歷世增修 而成堂室兩序庫藏 後又刱樓閣神廚 於是 典守有其居 齋宿有其所 器用品物 有其藏 衆宗會集 恢恢有容焉 二去癸酉 値鬱攸之災 卽謀復建 規模間架 益增大宏闊 往在丙申 又失火 前人之積累成功 盡入於灰燼中 挽近 吾宗寢 不如古昔之盛時 而復値儻來之災孼 至於掃地無餘 將機運之行 撞着不佳而然乎 抑突薪之戒 有所懈弛而致乎 屢歲傳受 畀付我後人 而一朝蕩然 至於斯酷 不思所以繕修復故 則其能恝然無惕愧之心乎 遠近諸宗 合謀同心 經始於丁酉 粤三年己亥 功告訖 制度一依於前 而精緻 則殆過之 宛然 是昔日飮餕周旋之所也 山下諸宗 始終監董 其爲先之誠 用意之勤 可謂克繼前功 而無愧矣 噫 始之失傳與燒火 雖若未免於氣數之使然 而其尋求而得 繕修而完 實子孫誠力之致 則向所謂起廢而爲興 亶在於人事者 詎不信然矣乎 抑嘗聞之 古者 葬於野 而祭於廟 而不于墓 始者 吾祖之葬 世代寢遠 堂斧之形 莫能的知者 倘不由於不行上墓之致也歟 然則墓祭 雖非古 而揆之人情禮宜近厚 傳之久遠 保守無失 則春秋香火之需 不可無供辦之所 遠近布濩之宗 不可無萃聚之處 此 齋舍之所由設也 自玆以往 子孫之登壟展省者 仰天燈之祖于長白 而像想山巍之勳 臨洛水之宗于左海 而如見海蕩之功 山不騫 海不渴 吾祖之遺風厚澤 與之俱存矣 嗚虖 繼述之道 惟在肯構 而肯構之大 不專在於堂室奉先 而盡誠敬之心 處族而勉敦睦之道 霜露之原 陟降如臨 受胙之席 昭穆咸在 則雖百世之遠 卽無異於一家之內 同堂之親 孝弟之心 其不油然而生乎 凡我諸宗 各念爾祖 各思無忝 子子孫孫 勿替引之於肯構之道 庶乎其可也云爾
  光武三年己亥孟秋 三十世孫 幼學 經夏 謹記
  三十二世孫 主事 相鎬 謹書

사물(事物)이 흥(興)하고 폐(廢)하는 것은 항상 운수(運數)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폐(廢)하는 경우에는 진실로 막히는 운수(運數)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진실로 인사(人事)가 닦여지면 또한 폐(廢)해진 것을 일으켜 흥(興)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자는 인사(人事) 닦는 것을 힘써서 오로지 운수(運數)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우리 시조 태사 부군의 무덤이 천등산(天燈山)에 있다. 처음에는 실전(失傳)하여, 이로 인해 자손들이 마음 아파하며 탄식(歎息)한 지가 오래 되었다. 후손 평창공(平昌公) 옹(雍)이 정성을 다하여 조사하여 지석(誌石)을 찾았다. 이로부터 제향(祭享)이 끊이지 않았다.
  그 뒤에 이름난 자손들이 서로 이어 관찰사(觀察使)나 부사(府使)가 되어 여러 세대(世代)를 지나면서 증수(增修)하여 당(堂)과 실(室) 그리고 동서(東序)와 서서(西序) 및 고장(庫藏)을 완성하였다. 뒤에 또 누각(樓閣)과 주사(廚舍)를 창건(創建)하였다. 이에 보관(保管)함에 그 곳이 있게 되고 재숙(齋宿)함에 그 장소가 있게 되었다. 그릇과 물품(物品)에 그 보관하는 곳이 있게 되었고, 종인(宗人)들이 모임에 넓고 커서 모두 수용(受容)할 수 있게 되었다.
  지지난 계유년(1813)에 화재(火災)를 만났는데, 곧바로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여 규모(規模)와 구조(構造)를 더욱 늘려 키우고 넓게 하였다.
  지난 병신년(1896)에 또 실화(失火)로 앞 사람들께서 쌓으신 노력이 모두 잿더미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근년(近年)들어 우리 종중이 침체(沈滯)되어 예전의 성(盛)할 때와 같지 않아, 다시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재앙을 만나 완전히 없어져 남은 것이 없게 되는 지경(地境)에 이르니, 장차 기회(機會)와 운수(運數)의 운행(運行)이 좋지 않은 데에 맞부딪치려고 그러한가? 아니면 곡돌사신(曲突徙薪) 곡돌사신(曲突徙薪) :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를 옮기라고 권고한 사람의 은혜는 모르고 불에 덴 사람만 귀빈 대접을 받는구나[곡돌사신무은택(曲突徙薪無恩澤), 초두난액시상빈(焦頭爛額是上賓)]. 이 고사(故事)는 두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는 일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재해(災害)는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 경계(警戒)에 해이(解弛)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가?
  여러 해 동안 전(傳)해 받아 우리 후손들에게 넘겨주었는데 하루아침에 허물어 없어졌으니, 이러한 참혹(慘酷)함에 이르러 수선(修繕)하고 복구(復舊)하는 이유(理由)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며 걱정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원근(遠近)의 제종(諸宗)이 의견을 모아 한 마음으로 정유년(1897)에 짓기 시작하였다. 그 뒤 3년 기해년(1899)에 일을 마쳤다. 제도(制度)는 한결같이 이전 것을 따랐으나 정교(精巧)함은 거의 이전보다 더하여 분명(分明)하니 이는 지난날 음복(飮福)하고 행례(行禮)하던 곳이다. 산하(山下)의 제종(諸宗)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고 감독하니 그 조상을 위하는 정성(精誠)과 마음 쓰는 부지런함이 가히 앞의 공(功)을 잘 이어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만하다.
  아! 처음에 묘소를 실전하고 재사(齋舍)가 불에 타버린 것이 비록 운수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을 면(免)하지 못했지만 그 조사(照査)하여 지석(誌石)을 찾고 재사(齋舍)를 수선(修繕)하여 완성하였으니, 실로 자손들이 정성과 힘을 다한 것이니, 앞서 말한 ‘폐(廢)한 것을 일으켜 흥(興)하게 한다’는 것이 진실로 인사(人事)에 달려 있다는 것이 어찌 진실로 그러하지 않겠는가?
  한편 일찍이 듣건대, ‘옛날에는 들판에 장사(葬事)지내고 사당(祠堂)에서 제사지내며 묘소에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우리 시조의 묘소(墓所)가 세대가 멀고 오래되어 그 모습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혹시 묘소를 참배(參拜)하는 일을 행하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묘제(墓祭)가 비록 옛 제도가 아니나 사람의 마음과 예(禮)의 마땅함에 가깝고 두텁다는 것을 헤아려, 전(傳)함이 오래고 멀더라도 보호하여 지킴에 실수(失手)가 없다면, 춘추(春秋) 제향(祭享)의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장소가 없을 수 없고, 원근에 퍼져있는 종족(宗族)이 모이는 곳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재사(齋舍)를 설치하는 이유이다.
  이로부터 이후로 자손들 중에서 묘소(墓所)에 올라 성묘(省墓)하는 자는 장백산맥(長白山脈)에서 으뜸이 되는 천등산(天燈山)을 우러러보며 산처럼 높은 공훈(功勳)을 상상하고,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되는 낙강(洛江)에 임해보면 마치 바다의 파도(波濤)와 같은 공(功)을 보는 듯이 할 것이니, 산은 이지러지지 않고 바다는 마르지 않아, 우리 할아버지의 남기신 교화(敎化) 그리고 깊으신 은혜가 산과 바다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아! 계지술사(繼志述事) 계지술사(繼志述事) : 계지는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하며, 술사는 어버이의 일을 잘 따라서 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는 효자일 것이다. 효라는 것은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며, 어버이의 일을 잘 따라 행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하는 도리는 오직 긍구긍당(肯構肯堂) 긍구긍당(肯構肯堂) : 부조(父祖)의 창업을 자손들이 잘 계승함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에,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한 데서 유래하였다.
에 있으나, 긍구긍당(肯構肯堂)하는 큰 것은, 당실(堂室)에서 조상을 받드는 것에 오로지 있지 않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다하여 종족(宗族)을 대하고 돈목(敦睦)하는 도리를 부지런히 하는 데 있다.
  이슬[露] 내리고 서리[霜] 내린 묘소(墓所)에 오르내리기를 마치 임하는 듯하며, 음복수조(飮福受胙)하는 자리에 장유(長幼)・상하(上下)가 함께 있게 되면, 비록 백세(百世)의 먼 훗날이라도 곧 한 집안 내(內)와 동당(同堂)의 친척(親戚)에 다름이 있지 않아 효제(孝弟)하는 마음이 성(盛)하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무릇 우리 제종(諸宗)들은 각각 이 조상을 생각하고 각각 욕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을 생각하여 자자손손(子子孫孫) 대대(代代)로 긍구긍당(肯構肯堂)하는 도리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이어간다면 거의 옳다고 이를 뿐이다.
  광무(光武) 3년 기해년(1899) 7월, 30세손 유학 경하(經夏) 권경하(權經夏):1828-1905. 자(字) 제형(濟享), 호 정암(正庵). 류정재(柳定齋)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퇴계(退溪)와 한강(寒岡)과, 갈암(葛菴)과 밀암(密菴)과 대산(大山) 등 다섯 선생의 학설을 집합하여 ?경의류편(經義類編)?을 만들었고, 또한 ?언인록(言仁錄)?과 ?언경록(言敬錄)?이 있으며, 문집으로 ?정암집? 5책(冊)이 있다.
가 삼가 기록하고, 32세손 주사(主事) 상호(相鎬)가 삼가 쓰다.  <국역:권갑현(權甲鉉)>

 

    安東府三功臣廟增修記
    안동부 삼공신묘우 증수기
安東爲府 肇於麗初 而府司之中有廟 以祀麗太祖功臣三人焉 曰金公宣平 ・ 權公幸 ・ 張公貞弼也 府本新羅吉昌郡也 三公 羅人也 當太祖之討甄萱也 三公以郡佐太祖 太祖因之 而有甁山之捷 義聲由是大振 一境以全 而王業以成 斯可謂有大功於麗氏 而有大德於郡民 宜乎麗祖賞其功 而有大匡大相之拜 又陞郡爲府也 府民思其德而立廟虔祀 至于今七八百年而不替也 雖然 麗史旣不爲三公立傳 三公之事蹟見於史誌譜牒者 殊略而或有異同焉 史氏謂金公爲吉昌城主 則降麗之謀宜若出於金公 而反出於權公 勝覽記沿革 則謂三公皆爲郡人 而泛稱佐太祖有功而已 記人物則謂權公守吉昌而倡降麗 其不同有如此者 至如四佳徐公序權氏族譜 又謂降麗之事 在太祖與萱相持之後 若據史氏之文 則甄萱未圍吉昌之前 吉昌已降於高麗矣 況是役也 去萱入都麗祖赴救之日 已三年矣 徐公乃指爲一事 何耶 愚嘗合數說而反覆籌之 以爲三公皆是郡人 而爲城主者金公也 倡降麗則權公也 而二公與張公 皆有助戰之功 故麗王於此 賞投降則賜姓以寵權公 論戰功則從重而首金公 而其授功臣之號 則三公所同也 故就府地而錫土田 俾之世食其入焉 若其太師之授 獨見於權譜 未知何據 而權,張二公之名 廟版與史書不同 又不知其如何也 自是厥後 三姓子孫之在境內者 張氏未聞焉 金氏之冠冕於世者 固多有之 而惟權氏最爲繁衍 名公巨卿 奕世相望 間亦有爲吏爲民而稱其苗裔者 其所以祀於府司 而首吏掌之者 疑自太師之孫冊爲府吏之時始矣 歷世旣遠 寖不如初 屋宇庳湫 器服刓敝 牲酒瘠酸 殆無以稱邦人之心 嘉靖某年中 金公光轍來爲府使 慨然以是爲己責 迺卽其故處 闢而新之 會今刑曹判書權公轍 按行至府 甚善其事 爲之置祭田給典守 蓋金公太師之外派 而判書則其聞孫也 逮于丙辰冬 今府使權侯紹 亦以太師之聞孫來莅政 深有感於兩公之志 乃於臘晦 躬祀于廟 益置祭田 又給穀百石 俾首戶長姓權者掌之 取息以供祭 其三獻官 竝以子孫差定 每年正朝,端午,秋夕,冬至行事 越明年春 又治兆域於天燈山而祭之 子孫之來助祭者 無慮五十餘人 亦以子孫爲獻官 每年寒食一擧之 往者兩公所以樹風聲歸厚德之意 得侯措畫而纖悉備具 無遺憾矣 嗚呼 自古當國家潰亂之秋 守土之臣 有死無貳 正也 安有以地迎敵 因以爲功 而謂之權哉 今以此而論三公之事 不無可疑 而猶有少可諉者 以其所迎者非吾之讎 實乃救我者也 何也 當是之時 羅運欲訖 眞主龍興 而逆萱之勢滔天 卒之戕虐君父 瀆亂宮闈 極天下古今之惡 雖以麗王之奉辭伐罪 反不利於桐藪 憑陵兇威 列城莫抗 不降則走矣 羅朝君臣 坐待滅亡之不暇 而其所藉以緩須臾之命者 獨有麗王之捄兵耳 若是而爲三公者 膠守一節 拒麗而死萱 則是不共戴天之讎 終無以雪恥 而身與國偕亡 故決策降麗 以討君父之賊 蹙之於一戰 而羅都迤北 少弭楚氛之惡 此麗祖之所謂權 而愚所謂可諉者然也 所可恨者 事乃有大謬不然者 孟子曰 一人橫行於天下 武王恥之 而武王一怒而安天下之民 爲天吏者固如是也 麗王任天吏之責 而不恥賊萱之橫行 稽致天罰 凡幾年矣 及萱遭逆子之變而來奔 則尊以尙父 又爲之擧兵討逆 且麗王入羅都之日 秋毫無犯 行揖讓之禮於干戈擾攘之際 堯舜之德 蔑以加矣 而卒也墟其社稷而守置之 然則向之討賊之意安在 揖讓之美何歸 此由麗祖有王度而無聖學 爲義不終而動於小利故也 至於是 所謂有諉者 終歸於無可諉 愚恐三公之慮初未及此 而竟莫之如何 可勝痛哉 雖然 古稱本府風俗 勤儉惇朴 有唐魏之遺風 忠義之烈 爲南方最 故明宗之討南賊也 神宗之禦別抄也 恭愍之避紅巾也 皆能出死力 以效勞績 時君嘉之 自府而陞都護 自都護而陞大都護 由是言之 其始之以地降麗 雖未若守人臣之義於當日 其終之迎捄討賊 猶有以激忠義之心於後來 斯豈非古之所謂鄕先生沒而可祭於社者歟 或曰 旣云三功臣廟 則不專在於權氏 而獨以權氏之子孫主祠事 如之何 曰 觀夫彼一時事幾盡出於權公之斡旋 故遺民之不忘其德 尤在於權公 矧今增崇祠事者 又皆權氏之胄 主之以權 何害之有 自今其勿墜定規 而永世遵奉則善矣 後之人儻或不幸 而遭時之變 國非亡羅 賊非逆萱 師非麗正而曰 我欲行權而降敵 則王法之所不容 是又不可以不知者也 滉也亦忝於太師外派之裔 雖不能有與於增崇之事 於侯之徵記 又不可以無應 於是乎言
  嘉靖四十年歲在辛酉八月日 嘉善大夫前工曹參判眞城李滉 記

안동이 부(府)가 된 것은 고려 초이고 부(府)의 청사 안에는 사당이 있어 고려 태조의 공신 3인을 제사하는데 김선평(金宣平)공과 권행(權幸)공 ・ 장정필(張貞弼)공이다. 부(府)는 본디 신라의 고창군(古晶郡)이고 3공은 신라 사람인데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에 3공이 고을을 들어 태조를 도우니 태조가 이로 말미암아 병산(甁山)의 승전(勝戰)을 이루게 되고 의성(義聲)이 이로 말미암아 대진(大振)케 되었으며 일대의 지역이 보전되고 태조의 왕업(王業)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가히 고려조(高麗朝)에 대공(大功)이고 고을 백성에게 큰 덕망이라 하여 마땅했던 것이다. 고려 태조가 그 공을 상 주어 대광(大匡)과 대상(大相)을 배(拜)하고 또한 군(郡)을 승격하여 부(府)로 하니 부민(府民)이 그 덕망을 생각하여 사당을 세우고 정성으로 제사하는 것이 지금까지 7,8백 년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고려사(高麗史)에서 이미 3공을 사기(史記)의 기전(紀傳)으로 세워 싣지 않았고 3공의 사적(事蹟)이 사지(史誌)와 보첩(譜牒)에 나타나는 것이 매우 소략(疏略)하고 혹은 같지가 않아서 역사가(歷史家)가 말하기를 “김선평이 길창(吉昌)의 성주(城主)였으니 고려에 항복하는 모의(謀議)가 마땅히 김공에게서 나왔을 것인데 도리어 권태사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안동부 연혁(沿革)에는 “3공이 다 고을사람인데 무릇 일컬어 고려 태조를 도운 공이 있다”고 했을 뿐이고 인물을 기록한 데서는 권공이 길창을 수호하다가 창수(倡首)하여 고려에 항복하였다고 하여 그 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그리고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서거정(徐居正):1420(세종 2)∼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 ·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 ?경국대전? ·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 · ?동인시화(東人詩話)? ·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 ?필원잡기? ·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공이 쓴 권씨족보 성화보(成化譜)의 서문(序文)에서는 또 이르기를 “고려에 항복한 일이 고려 태조와 견훤이 서로 대치(對峙)한 후이다”라고 하기에 이르고 있다. 그런즉 만약 역사가(歷史家)의 글에 의거한다면 견훤이 길창을 포위하기 전에 이미 고려에 항복한 것이 되며 더구나 이 일이 견훤이 경주에 침입하여 고려태조가 구원하러 온 날로부터 이미 3년이나 지난 것이니 서거정(徐居正)공이 곧 지목한 일사(一事)가 어째서인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일찍이 몇 가지 설을 합하여 반복해 헤아려보니 3공은 다 고을 사람인데 성주(城主)인 것은 김공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수창(首倡)한 것은 권공이며 2공과 장태사가 다 같이 싸움을 도운 공이 있으므로 고려왕이 이를 포상하면서 투항(投降)한 것은 성(姓)을 내림으로써 권공에게 은총을 베풀고 전공(戰功)을 논하면서는 무거움을 들어 김공을 으뜸으로 하였는데 공신의 호를 줄 때는 3공을 한 가지로 한 고로 고을의 땅으로 나가 토전(土田)을 하사하여 대대로 그 수입을 받아먹게 한 것이다. 그 태사(太師)를 받은 것은 홀로 권씨의 보서(譜書)에만 보이는데 어떤 근거인지 알지 못하고 권 · 장 2공의 이름이 사당의 위판(位版)과 사서(史書)에 있는 것이 같지 않음 또한 어째서인지 알 수 없다. 이로부터 그 이후로 삼성(三姓)의 자손으로 이 지역 내에 있는 자로는 장씨는 소문나지가 않았고 김씨로서 세상에 나가 큰 벼슬이 된 자도 실로 많이 있으나 오직 권씨가 가장 번영해 퍼져서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대대로 크게 태어나 서로 바라보듯이 이었는데 그 사이에는 또한 아전이 되고 백성이 되어 그 먼 후손임을 일컫는 자가 있다. 그 제사를 부사(府司)에서 지내고 아전의 우두머리가 관장하는 것은 의심컨대 권태사의 손자 책(冊)이 부(府)의 아전이 되었을 때에 비롯된 것 같다. 역세(歷世)가 이미 오래되고 침격(寢隔)하여 처음과 같지가 않아 사당 건물은 낮고 비좁으며 기물(器物)과 제복(祭服)은 닳아 해지며 희생과 술은 파리하고 시어 방역(邦域) 사람들의 마음에 거의 들지 않게 되었는데 가정(嘉靖,1522-1566) 모년(某年)에 김광철(金光轍)공이 부사(府使)가 되어 와서 개연히 이를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고 곧이어 그 옛 자리를 개벽(開闢)하여 새롭게 수리하였다. 마침 지금의 형조판서(刑曹判書)인 권철(權轍)공이 안찰(接察)하며 순행하다가 고을에 이르러 “그 일이 심히 잘되었다” 하여 제전(祭田)을 설치하고 관리하며 지키는 하인을 지급해 두게 하였다. 대개 김공은 권태사의 외손이고 판서는 그 이름난 후손이다. 명종 11년 서기 1556년 겨울에 이르러 지금의 부사 권소(權紹)가 또한 태사의 문손(聞孫)으로 와서 다스림에 임해서는 김광철과 권철의 뜻에 깊은 느낌을 받고 섣달그믐에 몸소 사당에 제사하고 제전(祭田)을 더하였으며 곡식 백 석을 주어 우두머리 호장(戶長)으로서 권씨 성인 자가 이를 관장하면서 이식(利息)을 취하여 이로써 제물을 갖추어 공헌(供歌)케 하였다. 삼헌관(三獻官)은 다 자손으로 차정(差定)하고 매년 설고 단오 · 추석 · 동지에 행사케 하더니 이듬해 봄에는 또 천등산(天燈山)의 조역(兆域)을 치수(治修)하고 제사하니 자손으로서 와서 제사를 도운 자가 50여 인이고 또한 자손을 헌관으로 하여 매년 한식(寒食)에 한 번씩 제사를 거행케 하였다. 이에 지난날 김광철 ・ 권철 두 공이 교화(敎化)를 세워 두터운 덕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 뜻이 부사(府使) 권소(權紹)의 조처하고 획책함을 얻어 세심히 다 갖추어져 유감이 없게 되었다. 오호라, 자고로 국가가 궤란(漬亂)되는 시기를 당하여 땅을 지키는 신하는 죽음 이외에 두 가지가 없는 것이 정도(正道)인데 어찌하여 땅을 들어 적을 맞이한 것으로써 말미암아 공을 이룬 것이 되고 이를 권도(權道)라 하는 것인가? 지금 이것으로써 논한다면 3공의 일에는 의심스러울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또한 마땅히 핑계할 바가 조금 있으니 그 맞아들인 자가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실은 우리를 구하려는 자이니 어찌할 것인가? 이런 때를 당하여 신라의 운은 다하려 하고 진정한 주인은 용흥(龍興) 창업주가 일어나 임금이 됨.
하는데 역적 견훤의 형세가 하늘을 뒤덮어 졸지에 군부(君父)를 학대하여 죽이고 궁궐을 어지러이 더럽히며 천하의 고금에 없을 만큼 극악하였다. 비록 고려왕이 사명(辭命) 제후 사이에 왕래하는 서신.
을 받들어 죄악을 토벌하러 왔지만 도리어 동수(桐藪)의 싸움에서 불리하게 되니 흉적의 위세는 능가함을 믿어 [맹위를 떨치고] 열성(列城)은 항거할 길이 없어 항복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신라 조정의 임금과 신하는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에 겨를이 없고 그 믿을 수 있는 바로서 잠시라도 [급박한] 운명을 느슨하게 할 자는 오직 고려왕의 구원병일 뿐이었다. 이와 같은데 3공이 한 것이 한 가지 절개만을 굳세게 지켜 고려를 거절하고 견훤에게 죽는다면 이는 곧 하늘을 같이 쓰고 살 수 없는 원수인데 끝내 설치(雪恥)할 수가 없게 되고 몸과 나라가 다 같이 없어지므로 대책을 결단하여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군부(君父)의 도적을 토벌하고 일전(一戰)을 대질러 나가니 신라의 도읍 북쪽으로 연이은 곳에서 마침내 초분(楚氛) 거칠고 야만스런 재앙의 기운.
의 악이 그치게 되었다. 이를 고려태조가 이른바 권도라 하고 어리석음이 이른바 핑계할만한 것이라 한 것인데 가히 한스러운 것은 일에는 크게 잘못되어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한 사람이 천하를 횡행하니 중국 주(周)나라의 창업주 무왕(武王)이 수치로 여겼고 무왕이 한 번 노하니 천하의 백성이 편안케 되었다” 하였으니 임금이 되는 자는 본디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고려왕이 천리의 책임을 맡음에는 역적 견훤이 횡행하는 것을 치개(恥漑)치 않고 천벌이 이를 것을 헤아리기를 무릇 몇 년 동안 한 다음 견훤이 그 자식에게 반역을 당하는 변을 만나기에 이르러 도망쳐 오니 상보(尙父)로 존대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그 반역한 자식을 토벌하였다. 또 고려왕은 신라의 도읍에 들어가는 날 추호도 범함이 없이 방패와 창이 요란스레 싸워야 할 계제에 읍양(揖讓)의 예를 행하였으니 요순(堯舜)의 덕으로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더니 졸지(猝地)에는 신라를 병합하고 그 사직(社稷)에 근거하여 지키도록 배치하게 하였으니, 그런즉 지난날 역적을 토벌한 뜻이 어디에 있으며 읍양(揖讓)한 아름다움은 어디로 돌아가는 것이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고려 태조에게 임금의 도량은 있으나 성인의 학덕이 없어 의리를 끝까지 행하지 못하고 작은 이로움에 움직인 고로 여기에서 이른바 핑계라는 것이 끝내 핑계할 수 없는 것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3공의 염려가 처음에는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가 결국에는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을 터인즉 통탄함을 어찌 이길 것인가? 그러나 옛부터 본부(本府)는 풍속이 근검하고 돈박(惇朴)하여 당나라와 위나라의 유풍(遺風)이 있고 충의지열(忠義之烈)이 남방에서 가장 연고가 깊은 고로 명종(明宗)이 남적(南賊) 고려 명종 23년 서기 1193에 일어난 남방의 반적(叛賊)으로 2년에 걸쳐 토벌함.
을 토벌함과 신종(神宗)이 별초(別抄) 고려 신종 5년 서기 1202년 10월에 탐라에 이어 경주에서 삼별초가 난을 일으킴.
를 방어함과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誠) 원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반적(叛賊)으로 공민왕 10년 서기 1361년에 20만이 침구(侵寇)하여 개경(開京)을 유린하고 왕이 안동으로 몽진(蒙塵)함.
을 피함에 있어 모두 능히 사력(死力)을 내어 노적(勞績)을 발효함으로써 그때마다의 임금이 이를 가상(嘉賞)하여 부(府)를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하고 도호부를 올려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말하기로 하면 그 비롯함이 지역을 들어 고려에 항복함에 있었던 것이다. 비록 당일에 남의 신하된 의리를 끝까지 지킨 것만은 같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구원병을 맞이하여 도적을 토벌한 것이 오히려 후래인(後來人)에게 충의지심(忠義之心)을 격발(激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것이 어찌 옛사람이 이른바 향선생(鄕先生)으로 받들어 몰(歿)한 뒤에 가히 사당에 제사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이미 삼공신묘(三功臣廟)라 하였은즉 권씨에게만 오로지하는 것이 아닌데 유독 권씨의 자손만이 사당 일을 주장(主掌)함은 어째서냐고 하는데 관찰하건대 대저 그 일시(一時)의 일의 기틀이 모두 권공(權公)의 알선(斡旋)에서 나왔던 고로 남은 백성이 그 덕을 잊지 못하는 것이 권공에게 더욱 있었던 것이요 더구나 지금 제사 일을 증숭(增崇)하는 것 또한 모두 권씨의 주손(胄孫)이 하고 있으니 권씨가 주장케 함에 무슨 해로움이 있으리오? 지금부터도 정해진 규범을 떨어뜨리지 말고 영세토록 준봉(遵奉)하면 좋을 것이다. 가령 후인이 혹시라도 불행히 변란의 때를 만났으나 국가는 망하는 신라와 같지 않고 도적은 역적 견훤과 같지 않으며 군사는 고려의 정의(正義)의 대군과 같지 않은데 가로되 “내가 권도(權道)를 행하고자 한다” 하여 적에게 항복한다면 왕법(王法)이 용서치 않을 것인즉 이 또한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다. 나 또한 태사의 외손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니 비록 사당을 증숭(增崇)하는 일에는 능히 보탬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부사(府使) 권소(權紹)가 기문(記文)을 맡김에는 또 응답을 아니 할 수 없으므로 이에 말하는 것이다.
  명종 16년 신유년(1561) 8월 일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공조참판(前工曹參判) 진성(眞城) 이황(李滉) 기록하다

    太師廟重修記事
    태사묘 중수 기사
    후손 권행가(權行可) 권행가(權行可):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우(士遇), 호는 매호(梅湖). 아버지는 증 참의(參議) 권선문(權善文), 어머니는 거제반씨(巨濟潘氏)로 참봉 반숙(潘淑)의 딸이다. 숙부 권호문(權好文)에게 입양되었다. 1572년(선조 5)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그 뒤 김성일(金誠一), 권대기(權大器)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안동에서 의병대장 김해(金垓)를 도와 전향유사(典餉有司)로 활약하였다. 1599년에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고, 만년에는 이돈(李燉), 김집(金潗), 권기(權紀) 등과 함께 고을의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문집으로 ?매호일고(梅湖逸稿)?가 전한다.
 지음
權相國盼 我始祖太師 二十四世孫 萬曆四十一年癸丑夏六月日 出按嶺南 王事之暇 先謁太師廟 見庭除湫隘 棟宇將傾 與慶州府尹權泰一 及宗人之在一鄕者 謀擧重建之役 以行可 及鄕座首權晤 爲都監 武敎權皥 主簿權思道 爲監役有司 以廟有司 權克弘 兼掌供餉 工人之事 供具則皆出於巡相之措置 而又令府尹 通告于內外子孫之爲本道守令 使之收財補用 守令則 本府府使李順慶 仁同府使權暻 寧海府使李燉 興海郡守琴忭 咸安郡守嚴幌 榮川郡守李士遜 巨濟縣令黃廷說 盈德縣令韓汝沃 義城縣令李士修 三嘉縣監尹英賢 延日縣監趙認 丹城縣監崔挺豪 沙斤察訪金英石 兵馬使尹先正 亦與焉 或送綿布 或送海錯 姓孫之居在本府 及近邑者 亦皆隨力所及 各出米布 俟農務之隙 乃克始事 秋七月七日 三太師位板 移安于武學西齋 告辭云云 前佐郎權暐 爲獻官 生員權杠爲大祝 權宏權暘 權經生權㝘 權春蕙權英秀 權思進權重述 權思适權克載 權中正 分定諸執事 參祭姓孫 亦二十餘人 同月十日 撤舊廟 始付衆工 木手十八 石工二 瓦匠三 鐵匠二 役軍則一府姓孫 或起奴僕 或親執役 令首吏張自豪 金信凱董役 因舊趾築石列礎 高丈餘 分遣有司 使之鳩財 陶瓦於羊腸 伐石於燕院 不煩督令 而水運車輸 咸聚旬月之內 七月二十日立柱 二十二日上樑 仍盖瓦仰土 乃施丹雘 畵手六名 皆緇流也 十月初十日役畢 廟凡五架 而通爲三間 兩旁有光窓 中設正門 東西皆有夾門 揭太師廟三大字 姓孫權復興筆也 前立神門三間 門之東 又有一間門 出入必由是焉 神廚三間 一間則藏祭器 虛二間而備掌饌 齋室十八間 東西分設房寮 此則仍舊貫 少變其制而改施堊幔丹碧 行廊五間 第三間爲中門 門外立下馬碑 題刻三太師 內外子孫 過此者 皆下馬云云 寶上庫 有司廳 皆舊制也 卜而十月二十三日還安 二十一日 觀察使 先行祭于始祖墓 與弟議政府舍人 權盺 子正字儆凌晨偕發 至齋舍前 與外孫守令 及姓族等分行 席地而坐 參祭儀 令醴泉郡守黃立中進祭饌 學諭辛弘立撰祭文 觀察使行初獻 仁同府使暻 行亞獻 舍人行終獻 守令及姓孫 七十餘人 皆參祭焉 舍人適奉命南下 路經于此 正字新登文科 一枝丹桂 輝暎松檟 使觀者咨嗟興歎 毓德裕後 感懷如何 祭訖 觀察使親行后土祀 令執事酌奠 于平昌郡公墓 退與守令 及姓親飮福酒數巡 乘暝色及罷 越三日丑初 還安三太師位版 觀察使焚香 與內外子孫守令 及他孫等 皆再拜訖 權太師位版 權思道權詹 權弘克前導 首吏權富龍秉燭 金太師位版 金鋏前導 鄕吏金榮凱秉燭 張太師位版 張興孝前導 戶長張自豪秉燭 觀察使以下諸子孫 後擁而行 至新廟 奉安于交椅上 權太師當中 金太師在東 張太師在西 皆南面 仍舊位次也 質明行事 初獻觀察使 亞獻慶州府尹 終獻舍人 大祝都事金寭 執禮生員權終允 諸執事亦皆以姓孫分定 參祭則 尙州牧使韓述 靑松府使康復誠 大丘府使金允安 仁同府使權暻 前行僉知金繼信 草溪郡守李胤 永川郡守吳汝橃 醴泉郡守黃立中 咸安郡守嚴幌 蔚山判官辛義立 慶山縣令李忭 義興縣監李幼淸 延日縣監 權景中 軍威縣監任吉浚 高靈縣監柳稙 前縣監李明新 序立于獻官之後 爲二行 參奉權夢參以下 爲二行于守令之後 其他三百餘人 不得容內庭 立于神門外 名錄皆在廟見錄 今不盡記 諸執事 駿奔行事 少無差失 祭畢以次出 將設飮福宴 適爾雨下 是日不得行 二十四日 展席于客舍大門外 兼設正字慶宴 帳幕雲布 觀者如堵 觀察使辭北壁 主東席 不敢以爵位 加諸宗族之意也 舍人次之 都事次而少退 尙州牧使以下 堂上守令爲一座堂下則又爲一座 宗老權夢參 主西席年八十六 諸姓族 皆以齒爲序 重行列坐 至于鐘閣下 猶未能容 又分坐于守令之下 庶孼及鄕吏 至於下賤 遠近咸集 肩磨于鎭南門內 多不勝記 慶州提督李三省 學諭權省吾 學諭辛弘立 橫坐東西間 皆以回館 爲新鬼之戱也 新恩金是柱 亦與焉 自巡營 分給材料 于來參守令 定數分供 珍羞之列 衆樂之戱 極人間之盛矣 入夜乃罷 二十五日 觀察使與尙州 靑松 大丘 永川 草溪 義興等倅 及姓親二十餘人 餞別舍人於西郊慕恩樓 日晩還客舍 姓親又別設宴 諸守令皆參 奉常寺正金湧 亦來參 至午夜 盡歡而罷 觀察使仍與慶州府尹 及權晤權終允行可等 秉燭議定太師廟祭禮 及吾宗敦睦之規 訖府尹以下 各退散 祭禮則 以五節日行祀 實近煩瀆 且非正禮 故更卜春秋 仲月中丁 享用簠簋籩豆 凡節目皆在別錄規例中 嗚呼 三太師位版 舊藏于大廳北壁上 嘉靖辛丑 府使金光轍 通判權鯤 與鄕有司建議 始立廟宇 猶未盡其制 今至七十餘年 且將傾圯 故前用重新 廟貌翼翼 庭除浮潔 享儀悉備 皆觀察使相公 克盡追遠之誠也 後之爲有司者 恪勤護守 俾無旁風上雨之羞 香火春秋 永世不替 則我相公 惇宗將禮之意 垂無窮矣 行可承相公之命 亦管重建之事 粗解顚末 故敢識云

권반(權盼) 상국(相國)이 우리 시조 태사의 24세손으로 광해군 5년 계축년(1613) 여름 6월 일에 영남(嶺南)에 감사가 되어 다스리려 나와서 임금의 정사를 보는 여가에 먼저 태사묘(太師廟)를 배알하고 섬돌과 뜰이 낮고 비좁으며 기둥과 집채가 기울어지려는 것을 보고 경주 부윤(慶州府尹) 권태일(權泰一) 및 종인(宗人)으로서 안동 일대에 있는 자와 중건(重建)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나 행가(行可)와 향좌수(鄕座首) 권오(權晤)를 도감(都監)으로 하고 무교(武敎) 권호(權皞) ・ 주부(主簿) 권사도(權思道)를 감역유사(監役有司)로 하고 묘유사(廟有司) 권극홍(權克弘)이 공인(工人)에게 향식(餉食)을 제공하는 일을 겸장(兼掌)케 하였으며 공구(供具)는 다 감사(監司)의 조치에서 나오게 되었다. 또 부윤(府尹) 권태일로 하여금 내외 자손으로서 경상도의 수령(守令)으로 있는 이에게 통고하여 재물을 거두어 용도에 보충케 하니 수령으로는 안동부사 이순경(李順慶)과 인동부사(仁同府使) 권경(權暻) ・ 영해(寧海)부사 이돈(李燉) ・ 흥해군수(興海郡守) 금변(琴忭) ・ 함안(咸安)군수 엄황(嚴幌) ・ 영천(榮川)군수 이사손(李士遜) ・ 거제현령(巨濟縣令) 황정열(黃延說) ・ 영덕(盈德)현령 한여옥(韓汝沃) ・ 의성(義城)현령 이사수(李士修) ・ 삼가현감(三壽縣監) 윤영현(尹英賢) ・ 연일(延日)현감 조인(趙認) ・ 단성(丹城)현감 최정호(崔挺毫) ・ 사근찰방(沙斤察訪) 김영석(金英石)과 병마사(兵馬使) 윤선정(尹先正) 또한 참여하였는데 혹은 면포(綿布)를 보내고 혹은 해산물을 보내왔다. 성손(姓孫)으로서 안동부와 가까운 고을에 거주하는 자 또한 다 역량에 미치는 바에 따라 각기 미곡과 포목을 출공(出供)하고 농사에 힘쓰는 틈을 기다려 [역사를 도우니] 이에 능히 일을 시작하여 가을 7월 7일에 3태사의 위판(位板)을 무예를 가르치는 학당으로서 3학의 하나인 서재(西齋)로 옮겨 봉안(奉安)하고 사유를 고하는 말씀을 올림에는 전 좌랑(佐郎) 권위(權暐)가 헌관(獻官)이 되고 생원(生員) 권강(權杠)이 대축(大祝)이 되고 권굉(權宏) ・ 권양(權暘) ・ 권경생(權經生) ・ 권옹(權㝘) ・ 권춘혜(權春蕙) ・ 권영수(權英秀) ・ 권사진(權思進) ・ 권중술(權重述) ・ 권사괄(權思适) ・ 권극재(權克載) ・ 권중정(權中正)이 여러 집사(執事)를 분정(分定)해 받고 참제(參祭)한 성손(姓孫) 또한 20여 인이었다. 동월 10일에 옛 사당을 철거하고 비로소 여러 공인(工人)을 붙이니 목수가 18인, 석공(石工)이 2인, 와장(瓦匠)이 3인, 철장(鐵匠)이 2인, 일꾼은 부(府)의 성손(姓孫)이 혹은 노복(奴僕)을 일으켜 보내고 혹은 몸소 집역(執役)하여 충당하였는데 이를 수리(首吏) 장자호(張自毫)와 김신개(金信凱)로 하여금 감독케 하였다. 묵은 터에 돌을 쌓고 한 길이 넘는 초석(礎石)을 열정(列定)해 놓는 일변 유사(有司)를 나누어 보내 재물을 모으게 하여 기와를 굽는 것은 양장(羊腸)에서 하고 돌을 벌채하는 것은 제비원에서 하였는데 번거로이 독촉하고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물길로 운반하고 수레로 수송하여 열흘 정도 이내에 모두 모여들었다. 7월 20일에 기둥을 세우고 22일에 들보를 올렸으며 인하여 기와를 덮고 앙토(仰土) 앙토(仰土): 서까래의 사이나 산자 또는 고미 반자의 밑을 흙이나 회반죽으로 바름.
한 다음 단청(丹靑)을 시행하니 화공(畫工) 6명은 다 승려였다. 10월 초10일에 역사를 마치니 사당은 무릇 5가(架 : 도리)인데 통하게 하여 3간으로 하고 양쪽 곁에 광창(光窓)이 있으며 중간에 정문(正門)을 베풀고 동서에 다 협문(夾門)이 있으며 태사묘(太師廟)의 삼대자(三大字)를 게판(揭板)하니 성손(姓孫) 권복형(權復亨·興)의 필치였다. 앞에는 신문(神門) 3간을 세우고 그 동쪽에도 하나 사잇문을 만들어 출입할 때는 반드시 이 문으로 말미암게 하였다. 제물을 장만하는 주방(廚房)은 3간인데 1간은 제기(祭器)를 갈무리고 2간은 비워두어 찬물(饌物)을 관장함에 대비케 하였다. 재실(齋室)은 18간을 동서로 나누어 방료(旁寮)를 설치했는데 이는 옛것을 관습(貫襲)하되 그 제도를 조금 변경하여 백토를 바르고 채색을 입힌 것이다. 행랑(行廊)은 다섯 간인데 제3간을 중문(中門)으로 하고 문밖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삼태사(三太師)의 내외 자손으로서 여기를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말을 써서 새겼다. 보물각(寶物閣)과 유사청(有司廳)은 다 옛 제도이다. 택일(擇日)하여 10월 23일에 옮겼던 위판을 되돌려 봉안하는데 21일에 관찰사가 먼저 시조의 묘소에 제사를 행하고자 아우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흔(盺)과 아들 정자(正字) 경(儆)과 함께 새벽을 무릅쓰고 발행하여 [묘소의] 재사(齋舍) 앞에 이르니 외손인 수령(守令) 및 성족(姓族) 등이 나누어 도착하여 [묘소에] 자리를 깔고 앉아 제의(祭儀)에 참여하였다. 예천(醴泉)군수 황입중(黃立中)에게 제찬(祭饌)을 드리게 하고 학유(學諭) 신흥립(辛弘立)이 제문을 지었는데 관찰사가 초헌(初獻)을 행하고 인동 부사 경(暻)이 아헌(亞獻)을 했으며 사인(舍人) 권흔(權盺)이 종헌(終獻)을 행했고 수령과 성손 70여 인이 모두 제사에 참여하였다. 사인은 마침 왕명을 받들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곳을 경유케 되었고 정자(正字) 권경은 새로 문과(文科)에 올라 급제자가 꽂는 붉은 계수나무 가지 하나가 묘소를 밝게 비추어 보는 자로 하여금 자차(咨嗟)하는 탄성을 일으키게 하니 덕을 길러 후손을 여유롭게 함에 대한 감회가 어떠하였겠는가? 제사를 마치고 관찰사가 친히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행하고 집사(執事)로 하여금 평창군공(平昌郡公) 권옹(權雍)의 묘소에 전(奠)을 베풀고 술잔을 올리게하고 물러나와 수령(守令) 및 성친(姓親)과 더불어 음복주(飮福酒)를 몇 순배(巡杯) 마신 다음 어두운 밤 경치를 타고 파하기에 이르렀다. 사흘 뒤인 [23일] 축시(丑時) 초(初)인 밤 1시경에 3태사의 위판(位版)을 환안하였는데 관찰사가 분향(焚香)하고 내외의 자손과 수령 및 타성의 후손 등이 모두 재배(再拜)를 마치고 권태사의 위판을 권사도(權思道) ・ 권첨(權詹) ・ 권홍극(權弘克)이 전도(前導)하고 수리(首吏) 권부룡(權富龍)이 촛불을 잡았으며 김태사의 위판은 김협(金鋏)이 전도하고 향리(鄕吏) 김영개(金榮凱)가 촛대를 잡았으며 장태사의 위판은 장흥효(張興孝)가 전도하고 호장(戶長) 장자호(張自豪)가 병촉(秉燭)하였다. 관찰사 이하 제 자손이 뒤따라 옹위하며 가서 새 사당의 교의(交椅)위에 봉안하였는데 권태사가 마땅히 가운데이고 김태사가 동쪽에, 장태사가 서쪽에 자리하여 다 남면(南面)하니 옛 위차(位次)를 그대로 함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행사하여 초헌(初獻)은 관찰사가 하고 아헌(亞獻)은 경주 부윤 권태일이 하고 종헌(終獻)은 사인(舍人) 권흔(權盺)이 했으며 대축(大祝)은 도사(都事) 김혜(金寭)가 맡고 집례(執禮)는 생원 권종윤(權終允)이 하였는데 제집사(諸執事) 역시 다 성손(姓孫)이 분정(分定)하여 행하였다. 참제(參祭)한 자는 상주목사(尙州牧使) 한술(韓述)과 청송부사(靑松府使) 강복성(康復誠) ・ 대구부사(大丘府使) 김윤안(金允安) ・ 인동부사(仁同府使) 권경(權晴) ・ 전행 첨지(前行僉知) 김계신(金繼信) ・ 초계군수(草溪郡守) 이윤(李胤) ・ 영천(永川)군수 오여벌(吳汝橃) ・ 예천(醴泉)군수 황입중(黃立中) ・ 함안(咸安)군수 엄황(嚴幌) ・ 울산판관(蔚山判官) 신의립(辛義立) ・ 경산현령(慶山縣令) 이변(李忭) ・ 의흥현감(義興縣監) 이유청(李幼淸) ・ 연일현감(延日縣監) 권경중(權景中) ・ 군위(軍威)현감 임길준(任吉浚) ・ 고령(高靈)현감 유직(柳稙) ・ 전현감 이명신(李明新)이 헌관(歌官)의 뒤에 2행으로 서립(序立)하고 참봉(參奉) 권몽삼(權夢參) 이하가 두 줄로 수령(守令)의 뒤에 섰으며 기타 3백여 인은 사당의 안뜰에 수용되지 못하여 신문(神門) 밖에 서서 참제하였다. 그 명록(名錄)이 모두 사당의 묘현록(廟見錄)에 있으므로 지금 다 기록하지 않는다. 제집사가 바쁘게 움직이며 주선하여 행사에 작은 차질도 없었고 제사가 끝나자 차서로 나와 음복연(飮福宴)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마침 비가 내려 이날 행하지 못하고 24일에 객사(客舍)의 대문 밖에 자리를 펴고 겸하여 정자(正字) 권경(權儆)의 경연(慶宴) 문과에 급제한 것을 경축하는 연회인데 그 부친인 관찰사가 대구 감영에서 이곳에 출장 와 있으므로 여기서 겸하게 되었음.
을 행할 장막(帳幕)을 베푸니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꾼이 담을 이루었다. 관찰사가 북벽(北壁) 북벽(北壁):지위가 높은 이가 북쪽 벽을 등지고 남면하여 앉음.
을 사양하고 주동석(主東席) 동편에 차리는 주인석의 으뜸이 됨.
을 함은 감히 작위가 높다고 하여 이를 종족(宗族)에게도 적응치 않으려는 뜻이었고 관찰사 권반(權盼)의 아우 사인(舍人) 권흔(權盺)이 다음에 앉고 도사(都事) 김寭(金寭)가 다음에 앉고 조금 물러 상주 목사 이하 당상관(堂上官)의 수령이 한 자리를 이루고 당하관(堂下官)이 또 한 자리를 이루었다. 종족의 원로 권몽삼(權夢參)이 주서석(主西席) 객(客)의 자리인 서쪽의 주석이 됨.
을 하니 나이가 86세이고 여러 성족(姓族)이 모두 연치로 차서를 삼아 겹줄로 열 지어 앉으니 종각(鍾閣) 아래에까지 이르러도 오히려 수용이 안 되는지라 또 수령의 아래에 서자(庶子) 및 지방 아전을 나누어 앉히고 천민(賤民)에 이르기까지 원근에서 다 모여들어 어깨를 부비며 진남문(鎭南門)까지 닿으니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경주 제독(提督) 제독(提督): 조선 선조 때, 교육의 장려·감독을 위해 각 도(道)에 한 사람씩 둔 벼슬.
 이삼성(李三省)과 학유(學諭) 권성오(權省吾) · 학유 신홍립(辛弘立)이 동서의 사이에 가로질러 앉으니 이는 다 회관(回館) 위판이 관사(館舍)에 돌아와 입주함.
함에 따라 새 귀신을 위해 벌이는 희유(戱遊) 때문이었는데 새로 급제한 김시주(金是柱)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경상감영(慶尙監營)에서 내참(來參)한 수령에게 분급(分給)하는 재료로써 정한 수로 나누어 제공하는 진수성찬의 열(列)과 뭇 음악의 희유(戱遊)가 인간의 성대함을 극하였는데 밤이 들어서야 파하였다. 25일 관찰사와 상주 · 청송 · 대구 · 영천 · 초계 · 의흥 등의 원이 성친(姓親) 20여 인과 함께 사인(舍人) 권흔(權盺)을 서쪽 교외 모은루(慕恩樓)에서 전별(餞別)하고 해가 기울어 객사(客舍)에 돌아오니 성친(姓親)이 또 별도의 연회를 베풀고 여러 수령이 다 참석하였는데 봉상시정(奉常寺正) 김용(金湧) 또한 내참(來參)하여 자정(子正)에 이르도록 환락(歡樂)을 다한 뒤에 파하였다. 관찰사는 인하여 경주 부윤 및 권오(權晤) ・ 권종윤(權終允) ・ 행가(行可 : 필자) 등과 더불어 촛불을 잡고 태사묘의 제례(祭禮)와 우리 종족이 돈목(敦睦)할 규약을 의논해 정하기를 마치자 부윤 이하가 각기 퇴산(退散)하였다. 제례는 5절일(五節日: 설 · 한식 · 단오 · 추석 · 동지) 행사가 실로 번독(煩瀆)스러움에 가깝고 또 정례(正禮)가 아니므로 다시 복택(卜擇)하여 봄 · 가을의 중월(仲月) 중정(中丁) 중월(仲月)은 그 계절의 두 번째 달이고 중정(中丁) 그 달 중순에 정(丁)자가 드는 날을 말한다.
으로 하였고 제향에 쓰는 보궤(簠簋) 보궤(簠簋): 도량과 서직을 담는 그릇으로 곡식의 제물을 말한다.
와 변두(籩豆) 변두(籩豆): 실과와 포를 담는 대그릇과 김치와 식혜를 담는 목기로 반찬의 제물을 말한다.
의 무릇 절목은 다 별록(別錄)하는 규례 안에 있다. 오호라, 3태사의 위판이 전에는 대청의 북쪽 벽상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중종 36년 신축년(1541)에 부사 김광철(金光轍)과 통판(通判) 권곤(權鯤)이 향유사(鄕有司)와 더불어 건의하여 처음 묘우(廟字)를 건립하였으나 아직도 그 제도가 미진하였는데 지금 70여 년에 이르러 또 기울고 주저앉으려하므로 이로써 중신(重新)하여 사당의 모습이 익익(翼翼)히 빛나고 섬돌과 뜰이 넘치게 청결하며 제향의 의범이 다 갖추어지니 모두가 관찰사 상공(相公)의 극진한 추원지성(追遠之誠)인 것이다. 뒤에 유사(有司)가 되는 자가 각근(恪勤)히 수호하여 곁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위에서 비가 새는 부끄러움이 없게 하며 춘추로 올리는 향화(香火)가 영세토록 바뀌지 않게 한다면 우리 상공(相公)의 종족(宗族)을 돈목케 하고 예를 받들어 지키려는 뜻이 무궁토록 드리워질 것이다. 필자 나 행가(行可)가 상공(相公)의 명을 받들어 또한 중건하는 일을 관장하여 거칠게나마 전말(顚末)을 해득하는 고로 감히 짓는 것이다.

    崇報堂重新記
    숭보당 중신기
    후손 권두경(權斗經)이 지었다. 경종(景宗) 계묘년(1723) 6월의 일이다

안동 삼태사묘 숭보당
安東府治北 城內稍東 古有三太師廟 以祀勝國三功臣 事見退溪李先生修廟記 夫三太師 俱以鄕人 値羅麗之會 樹功德 受報祀 近千年而益虔 可謂盛矣 今上元年辛丑春 城中失火 衝風烈焰 電驟霆迅 闔城近北 大屋高棟 爇盡於俄頃 于時太師廟 亦入其圍熾中 左右前後 巨細俱燼 玉石同爛 及火息而視之 三間廟宇 烟熏不及 脂液不透 威靈所護 赫然驚人 庭砌灰堞之堆積 回飇捲去 砉若迅掃 不煩人力之輦除 其亦異矣 盖三太師 一體同功 而遺黎慕德 尤在於鼻祖 誠有如李先生之言者 德厚流光 聞孫之按本道 知本府者 前後相望 嘗卽廟前營建 崇報堂十數間 制頗宏偉 以爲祭享齋宿 任事興居之所 至是亦火焉 適者吾宗 屬權익權運泰 兩生爲重建都監 凡鳩財募貨立役 皆於權姓責之 遂先神門 次祭庖 次典穀之廳 以及廚庫雜舍 旣又斫材 將始崇報之役 익遭喪以去 先是廟事之任 吾宗專管稱都有司 盖不知所始 逮玆而家弟 斗緯當其任 迺採公議 草舊規 屬鄕黨推鄕員有風望者 安上舍老石 爲都有司 上舍旣莅事 密以綜理 敏以趨功 與運泰監督 堂齋之役 周年而屋成 左右夾以齋室 中闢廣堂 虹樑對騫 矢桷周布 通朗精緻 視昔改觀 幹治之功 於是而著 使嗣是而任事者 於凡起廢補弊 致美無墜 一視今日 重新之爲者 詎不韙歟 屬大浸 賑典僕 無一損瘠 役巨費殷 而庫藏猶充物 斯又難矣 工旣斷手 安君與權生 請余記其事 余惟三太師 同時而共事 一堂而幷享 德深故報崇 報崇故休羨 發揚焉 昭著焉 彌久而愈彰 彼騰空火焰 散延城壕之外 而斂避 接近之明宮 此堂重新 雖藉人力 而抑不由神謀之 陰相者乎 役之而不怨 計之而斯成 功懋于前 而事垂于後 誠不可以無藉也 請以是爲堂記 以示後之人

안동부의 치소(治所) 북쪽 성안에서 조금 동쪽으로 옛부터 삼태사묘(三太師廟)가 있어 고려(高麗)의 3공신을 제사한다는 일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묘우증수기(廟宇增修記)」에 보인다. 대저 삼태사는 다 같이 한 고장 사람으로서 신라가 고려로 바뀌는 기회를 만나 공덕을 세우고 그 보답의 제사를 받는 것이 거의 천년에 가까운데 더욱 정성스러우니 가히 성대하다 할 것이다. 지금 임금 경종(景宗) 원년 신축년(1721) 봄에 성중(城中)에서 실화(失火)가 일어나 매서운 바람이 화염을 몰아치니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온 성내에 번져 북문(北門) 일대의 큰 집과 높은 다락이 순식간에 다 불타버렸다. 이때 태사묘 또한 그 치열한 화염 가운데 에워싸여 전후좌우의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소진(燒盡)되고 옥과 돌이 함께 문드러졌는데 불이 꺼진 뒤에 보니 3간의 묘우(廟宇)에는 연기와 불길이 미치지 않고 화염을 촉발시키는 기름이 침투치 않았으니 위엄스런 영혼이 지키신 바라 혁연(赫然)히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들과 섬돌에 쌓인 잿더미가 성가퀴를 이뤘는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발라내듯 씻어가는 것이 마치 물을 뿌리고 씻어낸 것같이 하니 그것을 실어 날라 제거하는 사람의 힘을 번거롭게 할 것도 없는지라 그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대개 삼태사(三太師)가 일체(一體)로서 같은 공훈을 세웠으나 남은 백성이 덕을 숭모함이 우리 시조께 더욱 있는 것은 진실로 퇴계(退溪)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덕이 두터우면 그 흐름이 빛나는 것이다. 이름난 후손으로서 경상도를 안찰(按察)하고 안동부를 지사(知事)하는 자가 전후로 서로 바라보며 나와 일찍이는 사당 앞에 숭보당(崇報堂) 10수 간을 영건하니 제도가 자못 굉위(宏偉)하였고 이를 제향에 재숙(齋宿)하고 임사자(任事者)가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또한 불타버렸다. 저번에 우리의 종중에서 권익(權)과 권운태(權運泰) 두 사람에게 중건도감(重建都監)을 위촉하니 무릇 재화(財貨)를 거두어 모으고 역사를 집행하는 것을 모두 권씨 성이 책임으로 맡았다. 드디어 먼저 신문(神門)을 세우고 다음에 제포(祭庖) 제포(祭庖):제물(祭物)의 푸주란 뜻으로 전사청(典祀廳)을 이른다.
를 짓고 다음에 곡식을 저장하는 전곡청(典穀廳)을 지어 주방(廚房) ・ 곳간과 고직(庫直)의 집과 변소 등에까지 미쳤다. 그리고는 또 재목을 베어다 숭보당을 짓는 일을 시작하려 하는데 익()이 친상(親喪)을 당해 떠나갔다. 이보다 앞서 묘사(廟事)의 책임을 우리 종인(宗人)이 전관(專管)하였으나 도유사(都有司)라 일컫는 이가 대개 이를 시작할 바를 알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에 이르렀는데 아우 두위(斗緯)가 그 임(任)을 맡고 있었던지라 이에 공의(公議)를 채택하여 구규(舊規)를 개혁하고 향당(鄕黨)에 위촉하여 향원(鄕員)으로서 풍망(風望)이 있는 자를 추대케 하여 상사(上舍) 안노석(安老石)을 도유사로 앉혔다. 안노석이 일에 임하자 긴밀히 처리하기를 종합하고 민첩히 공역을 추진하면서 운태(運泰)와 더불어 감독하니 숭보당을 짓는 일이 일 년 만에 집채가 이뤄졌다. 그리하여 좌우의 [끝에 있는] 협방(夾房)을 재숙(齋宿)하는 방으로 하고 중간은 널리 터서 광당(廣堂)을 만들었는데 홍량(虹樑) 홍량(虹樑):무지개같이 반원형으로 굽은 인방에 얹은 들보.
이 마주보게 추어 올려지고 화살같은 서까래가 두루 펼쳐지면서 환히 트이고도 정치(精緻)하니 전일의 것에 비하여 보는 경관이 바뀌게 되었다. 이를 주간(主幹)하고 다스린 공이 이에 드러나게 되어 이 일을 이어받아 맡은 자로 하여금 무릇 폐한 것을 일으키고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아름다움에 이르되 실추시킴이 없이 한결같이 오늘의 중신(重新)된 모습을 보게 한 것이니 그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큰 흉년이 들었는데도 [역군으로 일하는] 복례(僕隸)를 잘 다스려 진휼(賑恤)하여 한 사람도 여위고 파리함이 없고 일이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데도 갈무리는 곳간에는 오히려 물자가 채워져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공사가 이미 끝나게 되자 안노석과 권운태가 내게 그 일을 기록할 것을 청했다. 내가 헤아리건대 삼태사가 같은 시대에 일을 함께 하였고 한 당사(堂祠)에서 아울러 제향을 받는데 덕이 깊은 고로 보답함이 높고 보답함이 높은 고로 아름답게 기려 사모함이 발양(發場)되고 밝게 드러나 더 오래갈수록 더욱 창연(彰然)히 빛나게 되었다. 저 허공에 치솟던 화염이 성 둘레에 판 연못의 바깥으로까지 흩어져 뻗치면서도 사당에는 접근하기를 피하였는데 이 당을 중신(重新)함이 비록 사람의 힘을 빌었지만 또한 영신(靈神)이 도모하여 음으로 도운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役事)를 벌였으되 [백성의] 원성이 없고 계획을 세운 것은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공역에 앞서서 힘쓰니 일은 후일에 드리워 전하게 되는데 이에 근거할 문적이 없을 수가 없는지라 이로써 당기(堂記)를 삼아 후인에게 보이기를 청하는 바이다.


    改撰祝文
    고쳐 지은 상향 축문
    [무술년(戊戌年 : 숙종 44년, 1718)에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지은 것이다]

炳幾運智 濟民雪耻 澤被一方 功存千祀 謹以粢盛醴齊 明薦歲事[權太師位]
기미(幾微)를 밝혀 지혜로써 움직이사 백성을 구제하고 치욕을 쾌설(快雪)하시니 혜택은 한 방역(方域)에 입히고 공덕은 천년을 가는지라 삼가 제물과 예주(醴酒)를 갖추어 밝게 시절 제사를 올리옵니다[권태사위(權太師位)]

三公協心 濟此一方 有恤揭虔 沒世不忘 謹以粢盛醴齊 明薦歲事[金張兩太師位]
삼공(三公)께서 협심(協心)하여 이 한 방역(方域)을 구제하시니 정숙한 사당에 경건히 게양(揭揚)하여 세상이 다하도록 잊지 못하는지라 자성(粢盛)과 예주(醴酒)를 갖추어 밝게 세사(歲事)를 드리옵니다[김・장 양태사위(金張兩太師位)]


    廟庭碑文
    묘정비문 [전서(篆書)는 ‘高麗太師權公廟碑’라 하였다]

삼태사 묘정비

安東爲府 肇自麗初 府司中有廟 祀麗祖功臣三人 曰金公宣平 權公諱幸 張公貞弼 太祖之討甄萱也 三公以郡佐太祖 有甁山之捷 義聲大振 王業以成 麗祖賞其功 有大匡太師之拜 陞郡爲府 就府地 錫土田 歲食其入 民思其德 立廟虔祀 至今不替  自是厥後 三姓子孫 在境內者 張氏無聞 金氏之冠冕於世者 頗夥 而惟權氏 最爲繁衍 名公鉅卿 奕世相望 爲吏爲民 稱其苗裔者 亦多有焉  所以祀於府司 首吏掌之 疑自太師之孫 冊爲首吏時 始矣  歷世旣遠 寢不如初 屋宇卑湫 器服不潔 牲酒瘠酸 殆無以慰先靈 稱民心 嘉靖壬寅 金公光轍爲府使 慨然是爲己責 卽其廟 闢而新之  會今右贊成 權公轍爲觀察 按行至府 甚善其事 置祭田 給典守焉 金公卽太師之外派 贊成聞孫也  丙辰冬 權侯紹 亦以後裔 深有感於兩公之志 迺於臘晦 躬祠宇廟 益置祭田 給穀百石 俾首吏姓權者 委掌取息 以供粢盛 三獻官 幷以子孫差定 每年正朝 端午秋夕 冬至行祀 越明年春 又治兆域 於天燈山而祭之 子孫助祭者 無慮百餘人 每歲寒食 一擧之  往者兩公 樹風聲 歸厚德之意 得侯措劃 纖實備具 竟無遺憾  當是時 羅運欲訖 眞主龍興 逆萱肆兇 戕虐君父 瀆亂宮闈 羅朝君臣 坐待滅亡之不暇 其所藉以緩 須臾之命者 獨有麗王之捄兵耳  若是而爲三公者 膠守一節 拒麗死萱 則不共戴天之讎 終無以雪恥 身與國偕亡 故決策降麗 以討君父之賊 羅都迤北 小弭楚氛之惡 此麗祖所謂 達權而賜姓者也  盖三功臣之廟 獨以權氏 主祀事者 彼一時事機 盡出於太師之斡旋 故遺民不忘其德 矧今 增崇祀事者 又皆權氏之胄 則主之以權 實繇於此 自今勿墜定規 永世遵奉 則善矣  應挺猥以孱孫 忝莅玆土 追感先祖 太師遺後之德 又嘉贊成諸公 奉先之誠 伐石勒碑 謹識大略 昭示于祀 永傳不朽云
  嘉靖癸亥 嘉善大夫 行安東大都護府使 兼兵馬節制使 權應挻撰 權應仁書

안동이 부(府)가 된 것은 고려 초에 비롯된 것이고 부사(府司) 안에 사당이 있어 고려태조의 공신 3인을 제사하니 김선평(金宣平)공 ・ 권행(權幸)공 ・ 장정필(張貞弼)공인데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에 고을을 들어 태조를 도와 병산(甁山)의 승전(勝戰)이 있게 하니 의성(義聲)이 크게 떨치고 왕업(王業)이 이루어지므로 고려태조가 그 공을 상(賞)을 주어 대광(大匡)과 태사(太師)를 배수(拜授)함이 있고 군(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하였으며 부(府)의 땅으로 나아가 토전(土田)을 내려 그 수입을 해마다 받아먹게 하니 백성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사당을 세우고 정성으로 제사하는 것이 지금에 이르도록 바뀌지 않고 있는데 이로부터 그 후에 세 성씨의 자손으로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자로서 장씨는 이름난 이가 없고 김씨는 세상에 높은 벼슬로 드러난 이가 매우 많으나 오직 권씨가 가장 번성해 퍼지고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대를 크게 빛내며 서로 나왔으며 아전이 되고 백성이 되어 그 묘예(苗裔)임을 일컫는 자 또한 많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부사(府司)에서 제사하고 수리(首吏:으뜸아전)이 관장(管掌)하게 된 소이(所以)는 태사의 손자 책(冊)이 수리(首吏)가 되었을 때에 비롯된 것 같다.
  역세(歷世)가 이미 멀어지면서 처음과 같지가 않아 옥우(屋宇)가 낮고 비좁으며 기물과 제복(祭服)은 불결하고 희생은 파리하고 술은 시니 거의 선령(先靈)을 위로하고 민심에 걸맞지 않게 되었더니 중종 37년 임인년(1542)에 김광철(金光轍)공이 부사(府使)가 되어서 개연(慨然)히 이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곧 사당을 벽신(闢新)하자 마침 지금의 우찬성(右贊成)인 권철(權轍) 권철(權轍):1503~157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셋째 아들이 의금부사 권순(權恂)이며, 넷째 아들이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도원수 권율(權慄)이다. 1556년(명종 11) 형조판서일 때 호남에 왜구가 침범하자 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어 왜구를 소탕하였다. 1558년 명나라의 책세자사신(冊世子使臣)이 올 때 원접사가 되어 마중하였으며, 1561년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 20)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좌의정에 이어 1571년(선조 4) 영의정에 올랐다.
공이 관찰사(觀寮使)가 되어 안행(按行)하는 길에 부(府)에 이르러 그 일이 심히 좋다 하고 제전(祭田)을 설치하고 전수(典守)를 지급하였다.
  김공은 곧 태사의 외손(外孫)이고 찬성은 이름난 후손이다. 병진년(1556) 겨울에 안동부사 권소(權紹) 권소(權紹):조선 명종(明宗)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권민수(權敏手)의 아들로, 숙부인 권달수(權達手)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가 역시 후예로서 김광철 공과 권철 공의 뜻에 깊이 감동하여 섣달그믐에 몸소 사당에서 제사하고 제전(祭田)을 더 설치했으며 곡식 백 석을 지급하여 수리(首吏)로서 성이 권씨로 하여금 관장을 위임받아 이식을 취하여 제물을 제공케 하고 세 헌관(獻官)을 아울러 자손으로 차정(差定)하여 매년 정조(正朝)와 단오(端午) ・ 추석 ・ 동지에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천등산(天燈山)에서 묘역을 치수(治修)하고 제사를 드리니 자손으로서 제사를 돕는 자가 백여 인이었는데 매년 한식(寒食)에 한 번씩 거행케 하였다. 이에 지난번 양공(兩公)이 풍성(風聲)을 세우고 두터운 덕이 돌아가게 한 뜻이 안동부사 권소(權紹)의 조획(措劃)을 얻어 다 섬세하게 갖추어져 필경에는 유감됨이 없게 되었다. 그 당시 신라의 운이 다하려 하고 진정한 주군(主君)이 용흥(龍興)하며 역적(逆賊) 견훤(甄萱)이 방자히 흉포하여 군부(君父)를 학대해 죽이고 궁중을 어지러이 더럽히니 신라 조정의 임금과 신하가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리며 겨를이 없을 때에 의지하면서 잠시나마 명운을 느슨하게 해볼 것은 유독 고려왕의 구원병뿐이었으니 만약 이러한 때에 3공이 하나의 절개만을 굳세게 지켜 고려를 거절하고 견훤에게 죽었더라면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를 끝내 설치(雪恥)하지 못하고 몸과 나라가 다 망했을 것이므로 대책을 결정하여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군부의 도적을 토벌하니 신라의 도읍 이북의 지역이 사납고 악한 기운에서 조금 풀려났는데 이것이 고려태조가 이른바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 하고 성을 내린 바인 것이다. 대개 삼공신의 사당에 권씨가 홀로 제사 일을 주장(主掌)하는 것은 그때의 일시(一時)에 일의 기틀이 모두 태사의 알선(斡旋)에서 나왔던 고로 유민(遺民)이 그 덕을 잊지 못하는 때문인데 더구나 지금 제사 일을 증숭(增崇)하는 것이 모두가 또한 권씨의 주손(胄孫)이니 권씨가 주장하는 것이 실로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지금부터는 정해진 규범을 실추시키지 말고 영세토록 준봉(遵奉)한다면 좋을 것이다. 나 응정(應挺)이 외람되이 잔약한 후손으로서 이 땅을 더럽히며 임하여 선조 태사께서 후세에 남긴 덕을 추감(追感)하고 또 찬성(贊成) 제공(諸公)의 선대를 받드는 정성을 가상(嘉尙)하여 돌을 벌채(伐採)해다가 비를 새겨 삼가 대략(大略)을 지어 밝혀 후년(後年)에 보여 영구히 전하여 이지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명종 18년 계해년(1563)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권응정(權應挺) 짓고, 권응인(權應仁) 씀

    慶州雲谷祠記事
    경주 운곡사 기사

正祖十年丙午 子孫之在慶州者 以爲太師忠義 乃心宗國 宜立祠羅都 以表其誠 遂建追遠祠 于慶州之雲谷 以竹林權山海 龜峰權德麟幷配享 至高宗戊辰 以朝令撤祠 辛丑設壇壝

경주 운곡서원

정조(正祖) 10년 병오년(1786)에 자손으로 경주(慶州)에 있는 자들이 태사공의 충의(忠義)가 곧 종국(宗國) 신라에 대한 마음이었으므로 마땅히 신라의 도읍(都邑)에 사당을 세워 그 성심(誠心)을 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경주의 운곡(雲谷)에 추원사(追遠祠)를 세우고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와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을 아울러 배향(配享)하였는데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으로 사당이 철거되니 신축년(1901)에 제단과 그 담을 베풀었다.


    奉安祝文
    봉안축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채제공(蔡濟恭):1720-1799.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의 재상(宰相).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본은 평강(平康). 오랫동안 정승(政丞)을 지내면서 정령(政令)의 득실(得失), 국가(國家)의 대계 등(等)에 깊은 관심(關心)을 가졌음. 정조 5년(1781)에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수함. 문집에 ?번암집(樊巖集)? 59권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지음]
有赫太師 惇忠履順 土以養人 害吾不忍 藉民以授 血不于刃 麗祖嘉乃 曰可與權 賜封錫姓 爲祖於人 瞻彼洛水 源流汪潏 有百其派 咸統於一 猗我太師 有孫盈國 簪黻旌纛 雲疊霧積 于千百年 餘慶郁郁 花山有祠 三師幷食 禮殷物昌 豈曰不慊 惟玆舊京 寔公遺蹟 後孫來過 每懷怵惕 於焉闕享 於禮或缺 樂彼雲臯 靈區嵽嵲 有湫湛湛 龍護絶境 雲旗風馬 允宜臨況 後昆之誠 實無窮竟 同聲建宮 位置宏靚 載簡穀朝 祠版以奉 俎豆嚴嚴 禮容咸悚 豈伊異人 百世雲仍 春秋二享 可期承承 尊靈是安 萬祀無斁 庇覆後人 永錫厥福 神之格思 歆我泂酌

혁혁(赫赫)하신 태사(太師)께서 도타운 충의(忠義)로 순리(順理)를 밟아 토지로써 사람을 기르고 우리를 해침을 차마 보지 못하여 백성을 빌어 이를 바침으로써 칼날의 유혈을 막으니 고려태조가 이에 “아름답다” 하고 가히 “권도(權道)와 더불었다” 하여 봉지(封地)를 주고 성(姓)을 내림에 사람의 조상이 되시었습니다. 저 낙동강을 우러러보면 원류(源流)가 많이 솟아 크게 흘러 그 갈래가 백 개이되 모두 하나로 통합이 되나니 거룩하신 우리 태사의 자손이 나라에 가득하여 높은 벼슬과 관찰사나 절도사의 깃발이 구름같이 겹치고 안개같이 쌓여 천백 년에 이르도록 여경(餘慶)이 욱욱(郁郁)히 빛나면서 안동에 사당이 있어 삼태사(三太師)가 아울러 제향을 받으니 예(禮)는 은성(殷盛)하고 제물은 창성(昌盛)한즉 어찌 흡족하지 않다 하오리까? 오로지 이곳 옛 서울 경주(慶州)는 바로 공의 유적(遺蹟)이니 후손이 와서 지나침에 매양 두려워 슬퍼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품되 어언간(於焉間)에 제향을 받들지 못하니 예에 혹 결함이 있을까 하였습니다. 즐거운 저 운곡(雲谷)의 언덕에 정령(精靈)의 신구(神區)는 우뚝이 높고 훌륭한데 계곡이 있어 물이 밝으니 용(龍)이 보호하는 절경(絶境)을 이루고 구름은 깃발이 되고 바람은 말이 되어 임하시는 상황이 마땅하고 훌륭하신지라 후곤(後昆)의 정성에 실로 다함과 끝이 없어 한 가지 소리로 사궁(祠宮)을 세웠습니다. 그 위치는 웅장하고 아름답게 치장한데 바야흐로 좋은 날을 가려 사당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니 제물은 엄숙히 갖추어지고 예용(禮容)은 모두 함께 삼엄한즉 어찌 이들이 다른 사람이리이까? 백세(百世)를 내려오는 먼 후손이온데 춘추(春秋)로 두 차례 제향을 올려 가히 이어 계승할 것을 기약하오니 존령(尊靈)께서는 이에 편안하시어 만년토록 물림이 없으시고 후인을 덮어 비호(庇護)하시어 길이 그 복을 내리시옵고 신께서는 내려 이르사 우리의 형작(泂酌) 형작(泂酌):본디는 제사에 쓰는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인데 밝은 술을 이름.
을 흠향(歆饗)하소서.

    慶州追遠祠奉安祝文
    경주 추원사 봉안축문 [판서(判書) 이헌경(李獻慶) 지음]

  權太師幸本金姓 新羅宗姓也 羅季守吉昌郡 時甄萱伐羅弑王 幸與金公宣平,張公貞弼謀曰 萱義不共天 盍歸王公以雪耻 遂迎降于麗太祖 助討萱 捷于甁山 麗太祖以爲炳幾達權 賜姓權 陞吉昌爲安東府 後人立祠安東 並祀權金張三太師 權公子孫之在慶州者 以爲太師忠義 乃心宗國 宜立祠羅都 以表其誠 遂建追遠祠于慶州雲谷 又竹林權公山海 仕端宗朝 及端宗遜位 與成公三問等 謀復王位 事覺 投閣而死 龜峯權公德麟 以晦齋門人 學行卓異 皆太師子孫也 以二公配食太師

  권태사(權太師) 행(幸)은 본래 김(金)씨로 신라 종성(宗姓)이다. 신라 말엽에 길창군(吉昌郡)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때 견훤(甄萱)이 신라를 정벌하고 왕을 시해하였다. 행(幸)이 김선평(金宣平)공 ・ 장정필(張貞弼)공과 함께 모의하여 말하기를 “훤(萱)은 의리상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어찌 왕건(王建)공에게 귀의(歸依)하여 치욕을 씻지 않으리오”하고 드디어 고려태조를 맞이하여 투항하고 훤(萱)을 토벌하는 것을 도와 병산(甁山)에서 승리하였다. 고려태조가 “炳幾達權[기미에 맑고 권도에 통달했다]”고 하여 성을 권(權)으로 하사하고 길창군(吉昌郡)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후인들이 사우(祠宇)를 안동(安東)에 세우고 권(權) ・ 김(金) ・ 장(張) 삼태사(三太師)를 함께 제사지냈다. 권공(權公)의 자손 중에서 경주(慶州)에 거주하는 자들이 태사(太師)의 충의(忠義)는 곧 종국(宗國) 신라를 마음에 둔 것이니 마땅히 신라의 수도 경주에 사우(祠宇)를 세워 그 정성을 나타내야한다고 여기고 드디어 추원사(追遠祠)를 경주 운곡(雲谷)에 세웠다. 또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공이 단종조(端宗朝)에 벼슬하였는데 단종이 손위(遜位)하기에 이르러 성삼문(成三問) 등과 왕의 복위(復位)를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누각(樓閣)에서 몸을 던져 순사(殉死)하였다.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공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문인(門人)으로 학행이 탁이(卓異)하였는데 모두 태사공의 자손이다. 두 공(公)을 태사에 배향(配享)하였다.

鷄林黃葉 羅運陽九 遙遙金枝 篤生賢胄 之屛之翰 吉昌之守 萱惡滔天 宗國蔑資 雖有忠義 弱不强支 友邦恤難 鋪敦厥師 桐藪失利 又南其旗 黃鉞翦商 啓猶抱器 矧玆蚍蜉 匪冠伊義 公曰我民 越我御事 爾鍜爾戈 爾機爾矢 我有强助 湔讎在此 扶服往歸 若良從漢 旣夾輔車 高驤大袒 或掎或角 甁山之戰 逆祲俄倦 鼎器重奠 炳幾達權 麗王嘉歎 錫姓陞府 大東乂晏 左張右金 三賢幷烈 量義旣審 降跡匪屈 敬順棄國 天命歸一 始絃歌魯 卒玄黃周 尊爲太師 名德俱休 保佑後人 如勸必酬 生賢孕哲 公相優優 緜緜胄裔 千億其儔 邦人立祠 花山之旁 肇禋迄今 報公以誠 咸曰公靈 如水洋洋 情所連蜷 奚直采鄕 瞻言宗祏 半月其城 姬公食魯 實睠鎬京 龍沈鮑石 鵑哭仙陵 生前忠憤 誓扶顚傾 歿後戀係 必來馳翔 盍又祀之 于彼舊都 卜諏雲谷 是度是圖 是基是築 是雘是塗 輪兮容豆 君子攸芋 咸曰廟享 必有配位 若考之仁 多藝之事 請質金滕 今古一理 賢不外索 求我氣類 永惟竹林 一節不貳 臨亂投閣 砥柱千禩 亦惟龜峯 紫溪衣鉢 德堪祭社 慨乎終撤 有祖有孫 宜以班腏 僉議允協 晟於斯擧 穀朝于差 段薦有序 靈來赫赫 有陪杖屨 祖巖如仰 兄巒如俯 故邦依然 禾黍翳翳 怳若仙輧 玉笙金帶 辟咡相詔 偕饗蕉茘 永妥以娛 歆于世世
경주에 낙엽이 지고 신라의 운세가 양구(陽九) 양구(陽九):양액(陽厄) 다섯과 음액(陰厄) 넷을 합한 재액(災厄).
를 만났을 때 머나먼 옛날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어진 왕손(王孫)이 독생(篤生)되니 담이 되고 주석(柱石)이 되어 길창(吉昌:안동)을 수호하였는데 견훤(甄萱)의 악함이 하늘을 뒤덮어도 종국(宗國) 신라에 재화(財貨)가 없으니 비록 충의가 있다 하나 약한 것을 억지로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우방(友邦) 고려가 어려움을 구휼(救恤)하여 그 군사를 진주(進駐)하여 진을 쳤으되 동수(桐藪)의 회전(會戰)에서 이로움을 잃었다가 다시 그 기치를 남쪽으로 하여 제왕이 정벌(征伐)에 쓰는 황금 장식의 도끼인 황월(黃鉞)로 주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상(商)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베듯 무도(無道)한 자를 치고자 계책을 열어 신성한 왕권을 감싸 안았거늘 하물며 그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는 것과 같은 무리가 도적이 아니고 무슨 의리를 지녔으리오? 공께서 가로되 “우리 백성아, 우리가 어거할 일이 저 건너에 있다. 투구를 쓰고 창을 들고 궁기(弓機)로 화살을 쏘아 우리가 힘써 도와 치욕을 씻어야 할 원수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포복하여 귀의(歸依)해 돌아기를 진나라에 망한 한(韓)나라 신하 장량(張良) 장량(張良):진(秦)이 한(漢)을 멸하자 그는 자객들과 사귀면서 한(漢)의 회복을 도모했다.  BC 209년 진에 반대하는 무리를 모아 유방(劉邦)과 합세했고, 이후 주요전략가가 되었다. 초(楚)·한(漢) 전쟁 기간에 그는 6국(六國)의 후예를 세우지 말고, 영포(英布)와 팽월(彭越)을 빼앗아오도록 했다. 또한 한신(韓信) 등의 책략을 중용하여, 항우(項羽)로 하여금 안팎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하라고 제안했다. 유방이 함양(咸陽)을 함락시킨 후 장량은 진의 보물창고인 부고(府庫)를 봉하여 보관하고 패강(灞水)상류로 철군하도록 건의했는데, 유방은 그의 모든 의견을 받아들였다. 201년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좇음과 같이 하여 이미 광대뼈와 잇몸과 같은 불가분의 관계로 같이 끼워지매 크게 웃통을 벗고 나서듯 분발하여 드높이 말을 채찍질하여 올라 협격(挾擊)하여 병산(甁山)의 싸움에서 독한 역도(逆徒)를 순식간에 석권(席捲)하니 국가의 기틀이 다시 안정되고 기미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함에 고려 임금이 아름답다 상탄(賞歎)하여 성(姓)을 내리고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키니 대동(大東)이 다시 편안해졌습니다. 왼쪽에는 장태사(張太師)요 오른쪽에는 김태사(金太師)로 세 분 현인(賢人)이 아울러 열렬(烈烈)하니 의리를 헤아림이 이미 심상(審詳)하고 항복한 자취가 굴종(屈從)함이 아니로되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버려 천명(天命)이 하나로 돌아가매 비로소 노(魯)나라가 현금(絃琴)의 노래를 부르고 마침내는 빛나는 천지가 주(周)나라같이 통일되었습니다. 존숭(尊崇)하여 태사(太師)를 삼으니 이름과 덕망이 다 같이 아름다운데 후인(後人)을 보우(保佑)하사 권면(勸勉)하면 반드시 보수(報酬)를 끼치시고 현자(賢者)를 낳고 철인(哲人)을 잉태케 하시니 공경과 재상이 우우(優優)히 줄을 잇고 주손(胄孫)과 후예가 면면(綿綿)히 퍼져나가 천억(千億)의 숫자와 짝이 되는데 방역(邦域)의 사람이 사당을 세우니 화산(花山:안동) 기슭에서 비롯한 제향이 지금까지 이르면서 공께 보답함을 정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말하기를 “공의 영령(英靈)은 물과 같이 양양(洋洋)하고 정회(情懷)는 굽이굽이 이어지는 바인즉 어찌 곧바로 식읍이 있던 지방에만 한하랴?” 하옵니다. 우러러 옛 신라의 종묘(宗廟)를 보면 반월(半月:경주)이 그 도성이고 주공(周公)이 노(魯)나라에서 제향을 받지만 실은 호경(鎬京) 호경(鎬京):주나라 옛 서울로 무왕(武王)이 처음 도읍했던 곳.
을 돌보는데 포석정(鮑石亭)에서 신라 임금 경애왕(景哀王)이 침몰하고 선릉(仙陵)에서 두견(杜鵑)이 우니 생전에 충분(忠憤)으로 기울고 엎어지는 것을 부축하기를 서맹(誓盟)하시었거늘 돌아가신 후에도 그리움에 매여 반드시 오시고자 달려 날으실 터인즉 어찌 여기에 제사하지 아니하리까? 저 옛 도읍의 운곡(雲谷)에 택지(擇地)를 꾀하여 이로써 헤아리고 또 도모하며 이로써 터를 닦고 또 축조하며 여기에 단청을 바르고 칠하여 꾸미니 덩실하게 솟아 제물을 용납하여 군자가 크게 이를 곳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이르기를 “사당의 제향에는 반드시 배위(配位)가 있어야 한다” 하는데 만약 어진 이를 고구(考求)한다면 예능(藝能)이 많아야 하는 일이라 금빛 등실(滕室)인 귀인의 묘소에 청하여 질의(質義)하되 고금이 한 가지 이치라 현자(賢者)를 밖에서 찾지 아니하고 같은 우리 핏줄의 후예에서 구하였습니다. 길이 헤아리건대 죽림(竹林) 권산해는 한 절개를 둘로 하지 아니하여 어지러움에 임해서는 누각에서 투신함으로써 천년의 지주(砥柱)가 되었으며 또한 헤아리건대 귀봉(龜峰) 권덕린은 주자(朱子)가 독서하던 자양(紫陽) 계곡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아 덕인(德人)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받들어 사당에 제사하기를 개연히 끝내 관철하였습니다. 선조가 있고 자손이 있어 마땅한 반차(班次)를 이루어 제향을 받게 함에 모든 의논이 윤협(允協)히 맞아 이 일을 밝혀 거행하니 길일(吉日)에는 차등이 있고 풍성히 올리는 제물에는 순서가 있는데 존령(尊靈)께서 오심은 혁혁(赫赫)하시며 그 장구(杖屨) 장구(杖屨):지팡이와 신발로서 귀인(貴人)의 여행 장구이다.
에는 배행(陪行)이 있으니 조암산(祖巖山)을 우러러보는 듯하고 형산강(兄山江)을 굽어보는 듯하옵니다. 옛 방역(邦域)은 의구(依舊)하고 벼와 기장 곡식들을 뒤덮었는데 신선의 거마 소리처럼 멍하고 아득한 속에 옥의 피리와 금대(金帶)를 띠고 강림하시니 모두가 입을 닫고 서로 알려 함께 제향을 드립니다. 길이 타안(妥安)케 하시어 이를 즐기시고 세세(世世)로 이어 흠향하소서.


  常享祝文
  상향축문 제향(祭享)에 항상 쓰는 축문.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達聖人權 爲生民祖 功流簡策 禮盛俎豆 豈無花山 所貴舊京 寔出報本 庶鑑微誠
성인(聖人)의 권도(權道)에 통달하여 생민(生民)의 조상이 되시니 공덕은 간책(簡策)에 흘러 전하고 예도(禮度)는 조두(俎豆:제물)에 풍성히 담겼나이다. 어찌 화산(花山:안동)에서 제향이 없으리오마는 옛 서울이 귀한바라 이에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이 나오나니 바라옵건대 미약한 정성을 감조(鑑照)하소서.

  雲谷壇所常享祝文
  운곡단소 상향축문 [신축년(1901)에 찬정(贊政) 권재형(權在衡)이 지었다]

於赫太師 德施普光 肇錫權姓 食邑古昌 高山仰止 維雲之陽 有祠翼然 俎豆斯將 公後二孫 吾道攸宗 忠表竹林 學推龜峰 旣崇祖祀 奉配爲從 肅肅家範 秩秩禮容 運否撤廟 感慨冞深 載築壇壝 慰我士林 克虔享儀 無古無今 神之思格 泂酌庶歆
오오, 빛나는 태사공께서 덕을 베풀고 빛을 넓히사 권성(權姓)을 받아 비롯하시고 고창(古昌:안동)을 식읍(食邑)으로 받으시니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 숭모하니 운곡(雲谷)의 양지쪽이라. 사당이 있어 익연(翼然)하고 제물을 여기에 받드는데 공의 두 후손으로 우리 유도(儒道)의 종장(宗匠)인바 충의(忠義)의 표상(表象)은 죽림(竹林) 권산해요 학덕(學德)으로 추중(推重)함은 귀봉(龜峰) 권덕린이라. 이미 선조의 제사를 높임에 배향(配享)으로 받들어 종사(從祀)하니 숙숙(肅肅)한 가범(家範)에 예용(禮容)이 질질(秩秩)히 정연하였는데 운수가 비색(否塞)하여 사당을 철거하니 감개가 더욱 깊어 이에 단유(壇壝)를 쌓으니 우리 사림(士林)이 위로(慰勞)되어 능히 향의(享儀)를 정성으로 받듦에 예와 지금이 다르지 않사오니 신께서는 이에 이르시어 바라옵건대 밝은 술을 흠향하소서.

이로부터 73년의 세월이 지난 1976년에 이 묘우(廟宇)를 다시 세우자는 거종적(擧宗的)인 의논이 일어나매, 이에 부응하여 일본 거류 자손들이 성금을 갹출해서 보내와 이 기금으로 묘우와 신문(神門)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묘우 앞의 강당은 배향위 죽림 ・ 귀봉 양가의 후손들이 부담하여 세웠으며 동서 양재(兩齋)와 외삼문(外三門) 및 담장은 전국 후손들의 성금으로 완전하게 복원하였다. 유연정(悠然亭)과 주사(廚舍) ・ 재사(齋舍) 등은 훼철되어 있지 않았던지라 이를 중수하기만 하여 오늘과 같은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10월 도회(道會)로 봉안행사(奉安行事)를 거행하였는데 70여 년 전의 단소향사 범절대로 사림이 숭봉하는 것으로 하여 운곡서원(雲谷書院)이라 게판(揭板)하고 묘호(廟號)는 경덕사(景德祠)로, 강당은 정의당(正懿堂)이라 하고 추원사(追遠詞) 옛 현판은 묘우 안에, 영보당(永報堂) 옛 현판은 강당 안에 붙여 옛날을 기념하고 있으며 향례일(享禮日)은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로 세일향(歲一享)한다.

    景德祠記
    경덕사 기문
慶州北三十里許 雲谷之坊 有景德祠 卽安東權氏 爲其始祖太師公 所誕之地 而設焉 配食竹林諱山海 龜峯諱德麟兩賢者 以兩賢之 嘗居于慶 而爲世庄也. 祠之創在我朝 正廟甲辰而間 遭邦禁 毁而壇之者 久矣 及今民國之丙辰 乃就舊址而新之 堂曰正懿 齋曰敦敎 曰潛心 門曰見心 臺曰半月 亭曰悠然 以至典祀之廳 庫直之所 靡不畢具 而有裕焉. 將落 安東居權在永 北走五百里 訪喆熙於冽館 請爲之記 喆熙辭不獲 遂斂袵而言曰 夫不能泯者 德也 不可掩者 誠也. 若太師公之嵬勳大業 在高麗開國 以炳幾達權 至于錫姓 則尙矣毋論 若竹林之淸操貞節 在端廟遜位 以宗簿正 不就外職 與成梅竹等 謀復事覺 遂投閣自盡 至有天官亞長之追贈 若龜峯之孝友篤行 在明宗初服 不惟有聲治郡 以終始懋學 拇屈於晦齋之門 所謂德之不能泯者非耶. 自粤昔 建祠之後 籩豆孔嘉 益完益美 溪山改觀 所謂誠之不可掩者又非耶. 抑又有一說焉 是祠也 雖創於一家之私 若論其崇奉之儀 景慕之道 不但在權氏爲然 在他人 亦靡不同其情矣 今環東土 衣冠之倫 有不爲太師公之外裔者乎. 况賢人之心 本無二視 於他本姓者乎. 夫祖先之於子孫 賢人之於後生 其愛而欲賢之心 亦猶夫子孫與後生 尊慕其祖先與賢人 而不窮已也 毋徒曰 廟儀之新 黍稷之馨 有足以盡其道 必夙夜祗栗 讀書明理 近而修諸身 遠而施諸人 窮不失義 達不離道 然後方可謂 景德之實矣. 詩云 赫赫師尹 民具爾瞻 斯非太師公之謂歟.
  歲丙辰 流頭月上旬 外裔順天金喆熙謹記

경주 북쪽 30리 쯤의 운곡 마을에 경덕사(景德祠)가 있으니 곧 안동권씨가 그 시조 태사공이 탄생한 곳에 건설한 바요 죽림(竹林) 휘 산해(山海)와 귀봉(龜峰) 휘 덕린(德麟) 두 분을 배향(配享)한 것은 두 분이 일찍 이 경주에서 거주하여 대를 이어오는 동산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사당을 처음 세운 것은 정조 갑진년(1784)인데 중간에 국가의 금지령을 만나 헐어내고 단소(壇所)를 만든 것이 오래이다가 지금 대한민국 병진년(1976)에 이르러 곧 옛 자리에 나와 새로이 닦아세우고, 강당(講堂)은 ‘정의(正懿)’라 하고 [강당 좌우변의] 재(齋)는 ‘돈교(敦敎)’와 ‘잠심(潛心)’이라 이름하고 외삼문은 ‘현심(見心)’이라 하며 대(臺)는 ‘반월(半月)’로 하고 정자(亭子)는 ‘유연(悠然)’이라 하면서 전사청(典祀廳)과 고직(庫直)의 거소(居所)에 이르기까지 다 여유롭게 갖추지 않음이 없게 되었는데 장차 이를 낙성하게 되어 안동에 거주하는 권재영(權在永)이 북으로 5백리를 달려와 서울 집으로 나를 방문하여 그 기문(記文)을 청하는지라 내가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마침내 옷깃을 여미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흐려서 없앨 수 없는 것이 덕이고 가려 막을 수 없는 것이 성(誠)이거니와 태사공의 높고 큰 훈업(勳業)으로 말하면 고려가 개국할 때에 기미를 밝혀 권도(權道)에 통달함으로써 사성(賜姓)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논할 것도 없는 바요, 죽림(竹林)의 맑은 지조와 곧은 절개는 단종이 폐위될 때에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서 외직으로 나가지 않고 성삼문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復位)를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결(自決)함으로써 뒤에 이조(吏曹)참판으로 추증(追贈)되기에 이르렀고, 귀봉(龜峰)의 효도·우애와 독실한 행위일 것 같으면 명종(明宗) 초년에 고을에 나가 잘 다스린 명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종 학문에 힘써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문하에서 첫손가락으로 꼽히니 이른바 덕을 흐려 없앨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적에 사당을 세운 이후로 비바람을 겪은 것이 수백 년에 이르면서 헐려 철거되고 설단(設壇)을 하였으니 비록 불행하다 할 것이나 또한 다행히 금일에 중신(重新)하여 향사(享祀)를 드림에 제물을 크게 훌륭히 올리고 더욱 완비되고 아름답게 갖출 수가 있게 되어 산과 계곡의 경관이 바뀌었으니 이른바 성(誠)을 가려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 또한 아니겠는가? 게다가 또 한 가지의 이야기가 있으니 이 사당이 비록 한 집안의 사사로움에서 창건되었지만 그 숭봉하는 의식과 경모(景慕)하는 도리는 다만 권씨에게만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고 지금 동토(東土) 경주(慶州) 일대에서 의관(衣冠)을 갖춘 서열에 있는 자로서 태사공의 외손이 아닌 자가 없으며 하물며 현인의 마음에 본디 타성과 본성을 두 가지로 보는 일이 없음에랴. 대저 조상의 자손에 대한 것이나 현인이 후생에 대한 것이나 그 사랑하며 어질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또한 같은 것이며 무릇 자손과 후생이 그 조선과 현인을 존모하는 것은 다하여 그만둠이 없을 것이다. 그런즉 헛되이 사당의 의모(儀貌)를 새롭게 중건하고 제물의 향기가 풍기게 한다고 하여 족히 그 도리를 다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글을 읽어 이치를 밝히고 가까이는 자기 몸을 닦으며 멀리는 남에게 베풀어 궁극에 이르되 의리를 잃지 말고 통달하되 도리에서 이탈하지 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덕을 크게 존모함의 실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혁혁히 빛나는 주나라 태사 윤씨를 백성이 갖추어 우러른다 하였으니 이것이 태사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병진년(l976) 음력 6월 상순 외손 순천(順天) 김철희(金喆熙)는 삼가 씀

    始祖太師公雲谷書院神道碑陰記
    시조 태사공 운곡서원 신도비음기

경주 운곡서원 태사공 신도비
於乎 我始祖太師公 本新羅宗姓 敬順王時 甄萱 入新羅 弑王辱妃, 公謀於衆曰 萱之無道 義不共戴天 與金張二公 迎麗祖 討萱雪恥 協贊眞主 統合三韓 偉勳懿績 山嵬海蕩 麗祖曰 金幸 能炳幾達權 賜姓權 食邑安東 拜大相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 卒 葬于府西天燈山造火谷負坎原 麗王 嘉尙其功 遂封陵 先系生卒及配位姓氏 幷無傳世遠而失傳 成化間 十六世孫平昌郡事雍 殫誠尋墓立碣表之 其子裕綽 遺命祔葬嘉靖壬寅 外裔金光轍 知府 太師廟闢新 二十世孫領相轍 爲觀察使 置祭田守護 丙辰 十九世孫紹 知府 益置祭田給穀百石 以供粢盛 又治墓域 癸亥 二十一世孫府尹應挺 知府 竪廟庭碑. 萬曆間 禮判克智 觀察嶺南循謀後孫祭之墓碣之仆者新之改碣 癸丑 二十三世孫吉川君盼 爲觀察 重修廟宇永曆癸巳 二十三世孫參判堣 創建齋舍 己亥 二十四世孫禮判是經 立始祖墓石物 建齋樓 府使贈贊成聖源 知善山時 峻發墓前神道碑之議而創建 二十三世孫漢城尹贈參贊諰 撰碑銘 外裔禮判趙公復陽 撰碑陰記 墓道略備無闕 至於雲谷 粤昔正廟甲辰 創建時 三十世孫宗洛 與二十九世孫相績 二十六世孫正欽 三十世孫龜煥 二十七世孫昌愈 二十九世孫奉銖 及諸宗 殫誠勞憊 丙午 事竟遂焉 至高廟戊辰 毁撤 辛丑 設壇 丙辰 重創陞院 于今三十餘年 尙未神道顯刻 自去年 諸宗合謀將擬伐石 純國赫文赫根寧夏赫光其外十餘人 來余曰 碑銘仍用舊文 碑陰記官啣代數或有相左 當入而或漏焉 不得已新構補完允合軆制 願勿辭肯諾焉 余雖不文 爲先之地 義不敢辭 質諸舊記而摭諸譜牒 曰 宗派守中 副戶長時中 樞密副使守平 左僕射守洪 同正棣達 左尹至正 別將英正 副正通義 侍中仁可 給事中衡允 中允叔元 軍器監思拔 正朝大宜 戶長樞 檢校倜 九世孫十五派派祖也
翰林韙 尙書子輿 十世孫也 福溪君貞 判書㫜 大相直成 平章事景輔 十一世孫也 政丞永嘉府院君溥 政丞醴泉府院君漢功 花山君漢有 判書育 十二世孫也 古昌府院君準 永嘉府院君臯 鷄林府院君煦 花原君仲達 領相仲和 贊成事祿 左司諫定 十三世孫也 判書端 玄福君衡 吉昌府院君適 判書儼 政丞永嘉府院君僖 密直司事重貴 醴泉君季容 都摠制邦緯 判書靷 福川君得侯 漢城尹伯宗 十四世孫也 玄福君鏞 贊成鉉 翊戴功臣鎬 花山君鈞 都平議鑄 判書敬 右使和 贊成衷 大提學世子貳師近 大提學遇 府尹肅 資憲贈領相花山府院君專 十五世孫也 議政府事弘 平昌郡事雍已見上 吏判世子左賓客贈領相吉昌府院君踶 慶安公主跬 安川君蹲 文湖堂採 節制使贈左相花山府院君復 左相軫 生員縣監以孝旌閭輊 文判事軺 禮判與六臣同被禍自愼 文副提學自弘 判書興 宣敎郞勻 十六世孫也 功臣贈贊成玄福君炟 孝子贈刑判烋 功臣福川君愷 左相吉昌府院君擥 功臣永嘉君擎 功臣禮判聰 淑謹翁主恭 判書復生 進文歷典五邑偲 魯陵節臣策 文大提學贈參贊始祖墓碑陰作參 進文出補金山成宗每稱吾家鳳凰選淸白璸 郡守贈贊成守中 十七世孫也 判書玄福君攢 文都承旨吉昌君孟禧 吉川君懽 福川君躽 文觀察使侹 吉昌君傑 進文湖堂提學贈左贊成健 安川君彭 世稱隱君子晏 文壯大憲景禧 文大憲景祐 文湖堂戊午禍景裕 與伯兄耈 廬墓盡禮耋 文持平政治第一 僉正丙子禍投閣自盡與六臣幷卓贈吏判山海 司正壽海 文兵馬評事殉于李施愛亂徵 文提學贈花山府院君克和 文大憲贈吏判敏手 文湖堂甲子禍贈都承旨達手 十八世孫也 進士以孝旌閭得平 文靖國功臣左相永昌府院君勻 司馬進壯除世子師傅不就璉 牧使贈大憲永嘉君愚 進府使贈領相勣 文知製敎福 文慶尹祺 司馬文壯重試壯大憲弘 生員時敏 壬亂殉節贈戶參旌閭恪 壬亂功臣贈參判克立 進縣監檥 進文右贊成贈領相橃 翰林贈副提學檣 壬亂知沃川殉節彦經 進文都承旨柱 郡守以六臣同議事貶金陵世豪 功臣兵判花山君贈領相瑊 進文戶判贈贊成纘 府使紹已見上 訓導廬墓伯麟 十九世孫也 司直贈領相花城君硡 生進文四爲領相轍已見上 文副提調五十年知製敎擘 生文副提學德輿 進蔭雲峯龍崗以孝同樞贈領相東興府院君常 進累辭徵辟好文 生員賢良科修撰坐趙靜庵禍磌 生文校理被趙靜庵禍希孟 文吏判輗 郡守扈從功贈吏參景虎 文扈從功贈都承旨斗文 二十世孫也 文承旨贈贊成慶祐 進士懷藏文學不求顯達好禮 敎授贈戶參處均 文兵判原從功贈領相徵 西賊夢亂白衣從軍贈吏判錄靖亂勳憑 郡守壬亂殉節贈吏判旌閭悰 同樞原從功贈參贊恂 文都元帥贈領相永嘉府院君慄 進文府使贈領相純 文吏判克禮 文禮判克智已見上 進凡五除逸仕不就克中 進都承旨仁祖改玉首拜左尹贈右相憘 文吉昌君禮判卞誣使功贈領相吉昌府院君悏 文典籍廬墓暐 壬亂知府義兵將有功錄券友直 進文慶尹應挺已見上 文吏參兄弟俱乙巳名流應昌 漢使學官應仁 生員薦洗馬以孝贈持平旌閭杠 文湖堂雲 生員縣令贈吏判以淸白聞淳 二十一世孫也 殉節贈永順君益慶 府使壬亂累立奇功贈兵判安昌君俊 文大提學侙 進文察訪贈吏參得己 文都承旨贈禮判盡己 縣監天地喪廬墓宣武功贈都承旨正中 縣監天地喪與兄正中廬墓宣武功贈領相謹中 進宣武功贈吏判偉中 文翰林鑊 進文大諫贈吏判濤 薦參奉編乙巳譜撰永嘉誌紀 生員薦參奉虎臣 生員學官有詩名尙遠 壬亂義兵將花山君工判贈參贊應銖 原從功贈兵判應平 文壯提學容 生員潫 文正郞歷典五郡德麟 生員王子師傅贈承旨宇 進文佐郞垕 二十二世孫也 文刑判吉川君盼已見上 進文翰林昕 壬亂白米八百斛運于餉所家僮三百人戰死柱 正憲安原君 生員廬墓孝文行薦縣監贈吏判 生文知中樞說 典籍贈吏判讓 漢尹贈參贊已見上 進江都殉節贈贊成一家十節順長 進歷典十邑原從一等功順昌 貞和翁主大恒 貞善翁主大任 生文領相大運 生進文戶判大載 文翰林禮判堣已見上 壬亂忠孝三變 修五禮輯略以時 僉正壬亂倡義復始 壬亂殉國旌閭復興 訓導壬亂樹功以忠孝旌閭贈承旨士敏 壬亂奮義討賊錄勳縣令士諤 文校理贈吏參春蘭 有孝行贈承旨璟 北亂義兵將贈吏判守經 進贈吏判霪 以孝三道薦贈持平用衡 二十三世孫也 著演易圖河洛演義業 進文判書 進己巳增廣試聞坤殿遜位不復擧業六拜再薦至文衡漢尹不應特贈吏判忭 文刑判贈文衡贊成 生文江伯贈贊成遂 文禮判是經已見上 生文繡衣都承旨瑍 進文大憲瑎 進正郞斗寅 生文修撰斗經 副摠管花原君贈工判喜學 司馬以孝薦縣監應生 文刑參泰一 壬亂知沃川殉國贈兵議希仁 薦縣監泰時 生奉事尙吉 進府使贈贊成聖源已見上 文歷典十九郡特除兵使丙亂盡忠贈工判井吉 二十四世孫也 進文大君師傅蹟 生員大君師傅趾 吉城君㝡 生員人稱倚馬之才浩 文判書導 文禮判樀 文戶判以鎭 文湖堂重經 生員六臣伸寃事倡館儒叫闕繼亨 通政以孝贈吏參龍見 文郡守聖鉅 僉樞戊申倡義贈吏判德秀 生文郡守正郞萬 生員纂喪祭輯略舜經 進文司諫迪 生文輯禮書萬斗 文執義選玉堂被沮贈領相格 二十五世孫也 文工刑禮判文衡愈 生縣監以文章名世櫶 進文設書贈直提學正忱 戊申錄贈持平渠 察訪贈兵判廬墓旌閭勃 司馬逸左相尙夏 文翰副提學吏判尙游 二十六世孫也 以下不盡錄 憲祖 素昧譜學 必多錯謬處 以俟後之高明家釐正詿誤 庶或免夫今日孤陋之宥也否
    丙戌季夏 三十三世孫憲祖謹記

아! 우리 시조(始祖)태사공(太師公)은 본래 신라(新羅) 종성(宗姓)이다. 경순왕(敬順王) 때에 견훤(甄萱)이 신라(新羅)에 들어와서 왕(王)을 시해(弑害)하고 왕비(王妃)를 능욕(凌辱)하니, 공(公)이 대중(大衆)에게 모의(謀議)해서 가로되, 견훤이 무도(無道)한 것은, 의리(義理)로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다고 하고, 김(金)․장(張) 두 공(公)과 더불어, 고려태조 왕건(王建)을 맞이하여, 견훤을 토벌(討伐)하고 수치(羞恥)를 씻고, 고려태조 왕건(王建)을 협찬(協贊)하여,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여, 위훈(偉勳)과 의적(懿績)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은지라,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이르기를, “김행(金幸)은 능히 병기달권(炳幾達權)하다”고 하고, 성(姓)을 권(權)이라고 하사(下賜)하고, 안동(安東)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대상(大相)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아보공신(亞父功臣) 태사(太師)에 제수(除授)하였다. 졸(卒)함에,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천등산(天燈山) 조화곡(造火谷) 정남향(正南向)에 장사(葬事)지냈으며, 고려왕(高麗王)이 그 공(功)을 가상(嘉尙)하게 여겨 마침내 능(陵)을 봉(封)했다. 선계(先系)와 생졸(生卒)과 배위(配位)의 성씨(姓氏)도 아울러 전(傳)하지 않으며, 세대(世代)가 멀어 실전(失傳)되었다.
  성화(成化,1465-1487) 모년(某年)에 16세손(世孫)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해 묘소를 찾아, 비갈(碑碣)을 세워 표시(表示)하고, 그 아들 유(裕)와 작(綽)에게 부장(祔葬)하라고 유명(遺命)하였다. 중종 37년 임인년(1542)에 외손(外孫) 김광철(金光轍)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赴任)하여, 태사묘(太師廟)를 새로 세웠고, 20세손(世孫) 영상(領相) 철(轍)이 관찰사(觀察使)로 와서 제전(祭田)을 두고 수호(守護)하라 하였고, 병진년(1556)에 19세손(世孫) 소(紹)가 안동부사로 와서, 더욱 제전(祭田)을 두고 곡식(穀食) 백석(百石)을 주어서 “자성(粢盛)을 공급하라” 하고, 또 묘역(墓域)을 다스렸고, 계해년(1563)에 21세손(世孫) 부윤(府尹) 응정(應挺)이 안동부사로 와서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다.
  만력(萬曆,1573-1619) 모년(某年)에 예조판서(禮曹判書) 극지(克智)가 영남관찰사로 와서 모의(謀議)를 좇아서 후손(後孫)에게 묘소에 제사지내게 하고 넘어진 비석을 새로 갈았고, 계축년(1613)에 23세손(世孫)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관찰사가 되어 묘우(廟宇)를 중수하였고, 효종(孝宗) 4년 계사년(1653)에 23세손(世孫) 참판(參判) 우(堣)가 재사(齋舍)를 창건(創建)하고, 기해년(1659)에 24세손(世孫) 예조판서(禮曹判書) 시경(是經)이 시조 묘소에 석물(石物)을 세우고, 재루(齋樓)를 세웠으며, 부사(府使) 증찬성(贈贊成) 성원(聖源)이 지선산부사(知善山府使)일 때, 묘소 앞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것을 발의(發議)하여 이를 창건(創建)하였고, 23세손(世孫) 한성윤(漢城尹) 증참찬(贈參贊) 시(諰)가 비명(碑銘)을 지었으며, 외손 예조판서(禮曹判書) 조복양(趙復陽) 공이 비음기(碑陰記)를 지으니 대략 갖추어 빠진 것이 없었다.
  운곡(雲谷)서원에 이르러서는 지나간 정조(正祖) 8년 갑진년(1784) 창건시(創建時)에 30세손(世孫) 종락(宗洛)이 29세손(世孫) 상적(相績) ․ 26세손(世孫) 정흠(正欽) ․ 30세손(世孫) 구환(龜煥) ․ 27세손(世孫) 창유(昌愈) ․ 29세손(世孫) 봉수(奉銖) 및 여러 종인(宗人)과 함께 정성을 다하고 애써 노력하여 병오년(1786)에 드디어 일을 완수하게 되었다.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이르러 훼철(毁撤)되고, 신축년(1901)에 설단(設壇)하였으며, 병진년(1976)에 중창(重創)하여 승원(陞院)하였다.
  지금에 이르도록 30여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못했더니, 지난해에 제종(諸宗)이 합모(合謀)하여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할 때에, 순국(純國) ․ 혁문(赫文) ․ 혁근(赫根) ․ 영하(寧夏) ․ 혁광(赫光)과 그 외 10여 인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비명(碑銘)은 이에 구문(舊文)을 사용하고자하나 비음기(碑陰記)는 관함(官啣)과 대수(代數)가 혹 서로 어긋남이 있고 마땅히 들어가야 할 사람이 혹 빠져있어서 부득이(不得已) 새로 지어서 보완(補完)하는 것이 체제(軆制)에 크게 합당(合當)하니, 원컨대 사양(辭讓)하지 말고 기꺼이 승낙(承諾)하라” 하니, 내가 비록 글을 못하지만 위선(爲先)하는 마당에, 의리상(義理上) 감히 사양(辭讓)할 수 없어, 옛날 비음기(碑陰記)를 바탕으로 하여 보첩(譜牒)을 채척(採摭)하여 가로되,
  종파(宗派) 수중(守中), 부호장(副戶長) 시중(時中), 추밀부사(樞密副使) 수평(守平), 좌복야(左僕射) 수홍(守洪), 동정(同正) 체달(棣達), 좌윤(左尹) 지정(至正), 별장(別將) 영정(英正), 부정(副正) 통의(通義), 시중(侍中) 인가(仁可), 급사중(給事中) 형윤(衡允), 중윤(中允) 숙원(叔元), 군기감(軍器監) 사발(思拔), 정조(正朝) 대의(大宜), 호장(戶長) 추(樞), 검교(檢校) 척(倜)은 9세손(世孫) 15파(派) 파조(派祖)이다.
  한림(翰林) 위(韙), 상서(尙書) 자여(子輿)는 10세손이다.
  복계군(福溪君) 정(貞), 판서(判書) 단(㫜), 대상(大相) 직성(直成), 평장사(平章事) 경보(景輔)는 11세손이다.
  정승(政丞)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부(溥), 정승(政丞)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한공(漢功), 화산군(花山君) 한유(漢有), 판서(判書) 육(育)은 12세손이다.
  고창부원군(古昌府院君) 준(準),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고(臯),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후(煦),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 영상(領相) 중화(仲和), 찬성사(贊成事) 녹(祿), 좌사간(左司諫) 정(定)은 13세손이다.
  판서(判書) 단(端), 현복군(玄福君) 형(衡),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적(適), 판서(判書) 엄(儼), 정승(政丞)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희(僖), 밀직사사(密直司事) 중귀(重貴), 예천군(醴泉君) 계용(季容), 도총제(都摠制) 방위(邦緯), 판서(判書) 인(靷), 복천군(福川君) 득후(得侯), 한성윤(漢城尹) 백종(伯宗)은 14세손이다.
  현복군(玄福君) 용(鏞), 찬성(贊成) 현(鉉), 익대공신(翊戴功臣) 호(鎬), 화산군(花山君) 균(鈞), 도평의(都平議) 주(鑄), 판서(判書) 경(敬), 우사(右使) 화(和), 찬성(贊成) 충(衷), 대제학(大提學) 세자이사(世子貳師) 근(近), 대제학(大提學) 우(遇), 부윤(府尹) 숙(肅), 자헌(資憲) 증영상(贈領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전(專)은 15세손이다.
  의정부사(議政府事) 홍(弘),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은 이미 위에 나왔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증영상(贈領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제(踶), 경안공주(慶安公主) 규(跬), 안천군(安川君) 준(蹲), 문과(文科) 호당(湖堂) 채(採), 절제사(節制使) 증좌상(贈左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복(復), 좌상(左相) 진(軫), 생원(生員) 현감(縣監)이며 효(孝)로 정려(旌閭)된 지(輊), 문과(文科) 판사(判事) 초(軺),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육신(六臣)과 더불어 함께 화(禍)를 입은 자신(自愼), 문과(文科) 부제학(副提學) 자홍(自弘), 판서(判書) 흥(興), 선교랑(宣敎郞) 균(勻)은 16세손이다.
  공신(功臣) 증찬성(贈贊成) 현복군(玄福君) 달(炟), 효자(孝子) 증형조판서(贈刑曹判書) 휴(烋), 공신(功臣) 복천군(福川君) 개(愷), 좌상(左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남(擥), 공신(功臣) 영가군(永嘉君) 경(擎), 공신(功臣) 예조판서(禮曹判書) 총(聰), 숙근옹주(淑謹翁主) 공(恭), 판서(判書) 복생(復生), 진사(進士)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오읍(五邑)을 역전(歷典)하여 수령을 지낸 시(偲), 노릉절신(魯陵節臣) 책(策), 문과(文科) 대제학(大提學) 증참찬(贈參贊)으로 시조묘비음(始祖墓碑陰)을 지은 참(參), 진사(進士)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외직(外職)으로 내보내 김산(金山)군수로 보임(補任)되고 성종(成宗)이 매번 ‘나의 봉황(鳳凰)이로다’ 라고 칭하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빈(璸), 군수(郡守) 증찬성(贈贊成) 수중(守中)은 17세손이다.
  판서(判書) 현복군(玄福君) 찬(攢), 문과(文科) 도승지(都承旨) 길창군(吉昌君) 맹희(孟禧), 길천군(吉川君) 환(懽), 복천군(福川君) 언(躽), 문과(文科) 관찰사(觀察使) 정(侹), 길창군(吉昌君) 걸(傑), 진사(進士) 문과(文科) 호당(湖堂) 제학(提學) 증좌찬성(贈左贊成) 건(健), 안천군(安川君) 팽(彭), 세칭(世稱) 은군자(隱君子) 안(晏), 문과(文科) 장원(壯元) 대헌(大憲) 경희(景禧), 문과(文科) 대헌(大憲) 경우(景祐), 백형(伯兄)구(耈)와 함께 무오화(戊午禍)를 입은 문과(文科) 호당(湖堂) 경유(景裕), 여묘(廬墓)와 예(禮)를 극진히 한 질(耋), 문과(文科) 지평(持平) 정치제일(政治第一) 예(), 첨정(僉正)으로 병자화(丙子禍)에 투각자진(投閣自盡)하고 육신(六臣)과 더불어 뛰어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산해(山海), 사정(司正) 수해(壽海), 문과(文科)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순절(殉節)한 징(徵), 문과(文科) 제학(提學) 증화산부원군(贈花山府院君) 극화(克和), 문과(文科) 대헌(大憲)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민수(敏手), 문과(文科) 호당(湖堂)으로 갑자화(甲子禍)를 입은 증도승지(贈都承旨) 달수(達手)는 18세손이다.
  진사(進士)이며 효(孝)로 정려(旌閭)된 득평(得平), 문과(文科) 정국공신(靖國功臣) 좌상(左相) 영창부원군(永昌府院君) 균(勻), 사마(司馬) 진사(進士) 장원(壯元)하고 세자사부(世子師傅)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한 연(璉), 목사(牧使) 증대헌(贈大憲) 영가군(永嘉君) 우(愚), 진사(進士) 부사(府使) 증영상(贈領相) 적(勣), 문과(文科) 지제교(知 製敎) 복(福), 문과(文科) 경주부윤(慶州府尹) 기(祺), 사마(司馬) 문과(文科) 장(壯元) 중시(重試) 장원(壯元) 대헌(大憲) 홍(弘), 생원(生員) 시민(時敏), 임란순절(壬亂殉節) 증호참(贈戶參) 정려(旌閭) 각(恪), 임란공신(壬亂功臣) 증참판(贈參判) 극립(克立), 진사(進士) 현감(縣監) 의(檥), 진사(進士) 문과(文科) 우찬성(右贊成) 증영상(贈領相) 벌(橃), 한림(翰林) 증부제학(贈副提學) 장(檣), 임란(壬亂) 지옥천(知沃川) 순절(殉節) 언경(彦經), 진사(進士) 문과(文科) 도승지(都承旨) 주(柱), 군수(郡守)로 육신(六臣)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모의(謀議)한 일로 폄하(貶下)되어 금릉(金陵) 땅에 금고(禁錮)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친 세호(世豪), 공신(功臣) 병조판서(兵曹判書) 화산군(花山君) 증영상(贈領相) 감(瑊), 진사(進士) 문과(文科) 호조판서(戶曹判書) 증찬성(贈贊成) 찬(纘), 부사(府使) 소(紹)는 이미 위에 나왔고, 훈도(訓導) 여묘(廬墓) 백린(伯麟)은 19세손이다.
  사직(司直) 증영상(贈領相) 화성군(花城君) 굉(硡), 생원(生員) 진사(進士) 문과(文科)로 네 차례 영상(領相)을 역임한 철(轍)은 이미 위에 나왔고, 문과(文科) 부제조(副提調)로 50년 동안 지제교(知 製敎)를 역임한 벽(擘), 생원(生員) 문과(文科) 부제학(副提學) 덕여(德輿), 진사(進士) 음사(蔭仕)로 운봉(雲峯)․용강(龍崗) 고을을 역전(歷典)하고 효(孝)로 동추(同樞) 증영상(贈領相)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인 상(常), 진사(進士) 누차(累次) 징벽(徵辟)하였으나 사양(辭讓)한 호문(好文), 생원(生員) 현량과(賢良科) 수찬(修撰) 조정암(趙靜庵)의 화(禍)에 연좌(連坐)된 전(磌), 생원(生員) 문과(文科) 교리(校理) 조정암(趙靜庵)의 화(禍)를 입은 희맹(希孟), 문과(文科) 이조판서(吏曹判書) 예(輗), 군수(郡守) 호종공(扈從功) 증이참(贈吏參) 경호(景虎), 문과(文科) 호종공(扈從功) 증도승지(贈都承旨) 두문(斗文)은 20세손이다.
  문과(文科) 승지(承旨) 증찬성(贈贊成) 경우(慶祐), 진사(進士)로 글과 학문(學問)을 감추고 현달(顯達)을 구하지 않은 호례(好禮), 교수(敎授) 증호참(贈戶參) 처균(處均), 문과(文科) 병조판서(兵曹判書) 원종공(原從功) 증영상(贈領相) 징(徵), 호서(湖西)의 적(賊) 이몽학(李夢學)이 난리(亂離)를 일으켰을 때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로 정란공신(靖亂功臣)에 녹훈(錄勳)된 빙(憑), 군수(郡守) 임란순절(壬亂殉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정려(旌閭) 종(悰), 동추(同樞) 원종공(原從功) 증참찬(贈參贊) 순(恂), 문과(文科) 도원수(都元帥) 증영상(贈領相)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율(慄), 진사(進士) 문과(文科) 부사(府使) 증영상(贈領相) 순(純), 문과(文科) 이조판서(吏曹判書) 극례(克禮), 문과(文科) 예판(禮判) 극지(克智)는 이미 위에 나왔고, 진사(進士)로 무릇 다섯 번이나 일사(逸仕)가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은 극중(克中), 진사(進士) 도승지(都承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수배좌윤(首拜左尹) 증우상(贈右相) 희(憘), 문과(文科) 길창군(吉昌君) 예조판서(禮曹判書) 변무사공(卞誣使功) 증영상(贈領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협(悏), 문과(文科) 전적(典籍) 여묘(廬墓) 위(暐), 임란(壬亂)에 부사(府使) 의병장(義兵將)으로 공(功)을 세워 녹권(錄券)된 우직(友直), 진사(進士) 문과(文科) 경주부윤(慶州府尹) 응정(應挺)은 이미 위에 나왔고, 문과(文科)이참(吏參)으로 형제(兄弟)가 모두 을사명류(乙巳名流)인 응창(應昌), 한사학관(漢使學官) 응인(應仁), 생원(生員)으로 세마(洗馬)에 추천되고 효(孝)로 증지평(贈持平)이 되고 정려(旌閭)된 강(杠), 문과(文科) 호당(湖堂) 운(雲), 생원(生員) 현령(縣令)이며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고 청백(淸白)으로 알려진 순(淳)은 21세손이다.
  순절(殉節) 증영순군(贈永順君) 익경(益慶), 부사(府使)로 임란(壬亂)에 여러 번 기이(奇異)한 공(功)을 세운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안창군(安昌君) 준(俊), 문과(文科) 대제학(大提學) 칙(侙), 진사(進士) 문과(文科) 찰방(察訪) 증이참(贈吏參) 득기(得己), 문과(文科) 도승지(都承旨) 증예조판서(贈禮曹判書) 진기(盡己), 현감(縣監)으로 부모상(父母喪)에 여묘(廬墓)한 선무공(宣武功) 증도승지(贈都承旨) 정중(正中), 현감(縣監)으로 부모상(父母喪)에 형(兄) 정중(正中)과 함께 여묘(廬墓)한 선무공(宣武功) 증영상(贈領相) 근중(謹中), 진사(進士) 선무공(宣武功)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위중(偉中), 문과(文科) 한림(翰林) 확(鑊), 진사(進士) 문과(文科) 대간(大諫)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도(濤), 참봉(參奉)에 추천되고 을사보(乙巳譜)를 편찬(編纂)하고 ?영가지(永嘉誌)?를 지은 기(紀), 생원(生員)으로 참봉(參奉)에 추천된 호신(虎臣), 생원(生員) 학관(學官) 시명(詩名)이 있는 상원(尙遠), 임란의병장(壬亂義兵將) 화산군(花山君) 공조판서(工曹判書) 증참찬(贈參贊) 응수(應銖), 원종공(原從功)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응평(應平), 문과(文科) 장원(壯元) 제학(提學) 용(容), 생원(生員) 연(潫: 淵의 古字), 문과(文科) 정랑(正郞) 다섯 군(郡)을 역전(歷典)한 덕린(德麟), 생원(生員) 왕자사부(王子師傅) 증승지(贈承旨) 우(宇), 진사(進士) 문과(文科) 좌랑(佐郞) 후(垕)는 22세손이다.
  문과(文科) 형조판서(刑曹判書) 길천군(吉川君) 반(盼)은 이미 위에 나왔고, 진사(進士) 문과(文科) 한림(翰林) 흔(昕),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백미(白米)팔백곡(八百斛)을 향소(餉所)에 갖다주고 가동(家僮) 삼백인(三百人)이 전사(戰死)한 주(柱), 정헌(正憲) 안원군(安原君) 완(), 생원(生員)으로 여묘(廬墓)하고 효(孝)와 문행(文行)으로 현감(縣監)에 추천되고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인 현(), 생원(生員) 문과(文科) 지중추(知中樞) 설(說), 전적(典籍)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양(讓), 한윤(漢尹) 증참찬(贈參贊) 시(諰)는 이미 위에 나왔고, 진사(進士)로 인조(仁祖)의 강도(江都)난리에 순절(殉節)하고 증찬성(贈贊成)으로 일가(一家)의 10 명이 사절(死節)한 순장(順長), 진사(進士) 십읍(十邑)을 역전(歷典)하고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인 순창(順昌), 정화옹주(貞和翁主) 대항(大恒), 정선옹주(貞善翁主) 대임(大任), 생원(生員) 문과(文科) 영상(領相) 대운(大運), 생원(生員) 진사(進士) 문과(文科) 호조판서(戶曹判書) 대재(大載), 문과(文科) 한림(文翰林) 예조판서(禮曹判書) 우(堣)는 이미 위에 나왔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충효(忠孝)한 삼변(三變), ?오례집략(五禮輯略)?을 지은 이시(以時), 첨정(僉正)으로 임란(壬亂)에 창의(倡義)한 복시(復始), 임란(壬亂)에 순국(殉國)하고 정려(旌閭)된 복흥(復興), 훈도(訓導) 임란(壬亂)에 공(功)을 세우고 충효(忠孝)로 정려(旌閭)된 증승지(贈承旨) 사민(士敏), 임란(壬亂)에 분의토적(奮義討賊)하고 녹훈(錄勳)된 현령(縣令) 사악(士諤), 문과(文科) 교리(校理) 증이참(贈吏參) 춘란(春蘭), 효행(孝行)이 있으며 증승지(贈承旨) 경(璟), 북란(北亂) 의병장(義兵將)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수경(守經), 진사(進士)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음(霪), 효(孝)로 삼도(三道) 추천(推薦)을 받은 증지평(贈持平) 용형(用衡)은 23세손이다.
  ?연역도(演易圖)?와 ?하락연의(河洛演義)?를 지은 업(業), 진사(進士) 문과(文科) 판서(判書) 성(), 진사(進士)로 기사증광시(己巳增廣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곤전(坤殿=仁顯王后)의 손위(遜位)사실을 듣고 다시는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여섯 번 배수(拜授)되고 두 번 추천되고 문형(文衡)과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이르렀으나 되었으나 모두 불응하고 특(特)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인 변(忭), 문과(文科) 형조판서(刑曹判書) 증문형찬성(贈文衡贊成) 업(), 생원(生員) 문과(文科) 강백(江伯) 증찬성(贈贊成) 수(遂), 문과(文科) 예판(禮判) 시경(是經)은 이미 위에 나왔고, 생원(生員) 문과(文科) 수의(繡衣) 도승지(都承旨) 환(瑍), 진사(進士) 문과(文科) 대헌(大憲) 해(瑎), 진사(進士) 정랑(正郞) 두인(斗寅), 생원(生員) 문과(文科) 수찬(修撰) 두경(斗經), 부총관(副摠管) 화원군(花原君) 증공조판서(贈工曹判書) 희학(喜學), 사마(司馬) 효(孝)로 현감(縣監)에 추천(推薦)된 응생(應生), 문과(文科) 형참(刑參) 태일(泰一), 임란(壬亂) 지옥천(知沃川) 순국(殉國) 증병의(贈兵議) 희인(希仁), 현감(縣監)에 추천된 태시(泰時), 생원(生員) 봉사(奉事) 상길(尙吉), 진사(進士) 부사(府使) 증찬성(贈贊成) 성원(聖源)은 이미 위에 나왔고, 문과(文科) 십구군(十九郡)을 역전(歷典)하고 병사(兵使)에 특별 제수(除授)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충성을 다한 증공조판서(贈工曹判書) 정길(井吉)은 24세손이다.
  진사(進士) 문과(文科) 대군사부(大君師傅) 적(蹟), 생원(生員) 대군사부(大君師傅) 지(趾), 길성군(吉城君) 최(㝡), 생원(生員)으로 사람들이 ‘의마지재(倚馬之才)’라고 칭한 호(浩), 문과(文科) 판서(判書) 도(導), 문과(文科) 예조판서(禮曹判書) 적(樀), 문과(文科) 호조판서(戶曹判書) 이진(以鎭), 문과(文科) 호당(湖堂) 중경(重經), 생원(生員)으로 육신(六臣)의 신원(伸寃) 문제로 성균관의 유생들을 창도(唱導)하여 대궐 문 앞에 가서 규소(叫訴)를 올린 계형(繼亨), 통정(通政) 효(孝)로 증이참(贈吏參) 용현(龍見), 문과(文科) 군수(郡守) 성거(聖鉅), 첨추(僉樞) 무신(戊申)에 창의(倡義)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덕수(德秀), 생원(生員) 문과(文科) 군수(郡守) 정랑(正郞) 만(萬), 생원(生員)으로 ?상제집략(喪祭輯略)?을 찬집(纂緝)한 순경(舜經), 진사(進士) 문과(文科) 사간(司諫) 적(迪), 생원(生員) 문과(文科)로 ?예서(禮書)?를 편집(編輯)한 만두(萬斗), 문과(文科) 집의(執義)로 옥당(玉堂)피선(被選)에 저희(沮戱)된 증영상(贈領相) 격(格)은 25세손이다.
  문과(文科) 공조‧형조‧예조판서(工曹刑曹禮曹判書) 문형(文衡) 유(愈), 생원(生員) 현감(縣監)으로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유명한 헌(櫶), 진사(進士) 문과(文科) 설서(設書) 증직제학(贈直提學) 정침(正忱), 무신록(戊申錄) 증지평(贈持平) 거(渠), 찰방(察訪)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이고 여묘(廬墓)하고 정려(旌閭)된 발(勃), 사마(司馬) 은사(隱士)로 좌상(左相)을 지낸 상하(尙夏), 문과(文科) 한(翰) 부제학(副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 상유(尙游)는 26세손이다. 이하(以下)는 다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헌조(憲祖)는 본래 보학(譜學)에 어두워, 반드시 잘못된 곳이 많을 것이므로, 훗날의 고명(高明)한 사람을 기다려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준다면 거의 혹 오늘의 고루(孤陋)한 허물을 면(免)할 수 있지 않을까?

  병술년(2006) 6월에 33세손 헌조(憲祖)는 삼가 기록함.  <국역:권갑현(權甲鉉)>

    悠然亭記
    유연정 기문
故郡北數十里 雲深谷邃 而有亭曰悠然 卽永嘉氏寓慕祖先之別業也 昔太師權公 著於麗朝 爲永嘉氏上祖 而遺風餘韻 垂裕後昆 有若竹林龜峯兩先生 乃其繼序之賢達 後人景慕之 正廟甲辰 立祠于此 而享三先生於一廟 以伸祭祀之義 後二十有八年辛未 裔孫達煥轍煥謀于諸族 建斯亭於廟宮之傍 名之曰悠然 蓋取陶靖節採菊詩句語 而又倣周夫子光風霽月亭之後孫追慕作也 今其畏疊變爲儀壇 斯亭巋然而存 每歲祀享之時 會士於斯 講禮於斯 俛仰往蹟於斯 爲景賢羹墻之所也 亭故無記 日龜翁之胄孫 驚述甫 請余爲之記 余居是鄕 而雅艶肯構之意 遂敬書于楣 若其林壑之美 巖臺之奇 煙霞景物之朝暮殊態 而供遊人之翫賞者 覽者自得焉
  乙巳暮春下澣 烏川鄭錫祜記

옛 고을 북쪽 수십 리, 구름이 깊고 계곡이 깊은 곳에 정자가 있어 유연(悠然)이라 하니, 곧 안동권씨가 그 조선(祖先)을 우모(寓慕)하는 별장이다. 옛적에 태사 권공(太師權公)이 고려조(高麗朝)에 드러나서 영가씨의 상조(上祖: 시조)가 되고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을 후손에게 넉넉히 드리우니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와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 두 선생 같은 이가 있어 그 차서(次序)를 이어 현달(顯達)함에 후인이 경모(景幕)하여 정조(正祖) 갑진년(1784)에 이곳에 사당을 세워 세 선생을 한 묘우(廟宇)에 배향(配享)하고 제사를 받드는 의(義)로움을 펼쳤다. 그 후 28년이 된 신미년(1711)에 후손 달환(達煥)과 철환(轍煥)이 여러 종족(宗族)과 모의(謀議)하여 사당 옆에 이 정자를 짓고 이름하여 유연(悠然)이라 하니 대개 도정절(陶靖節) 도연명(陶淵明): 365-427. 중국 동진의 시인이다. 자는 원량(元亮), 본명을 잠(潛), 자를 연명(淵明)이라고도 한다. 오류(五柳) 선생이라고 불리며,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의 채국시(採菊詩)에 있는 글귀에서 취한 것이고 또 주돈이(周敦頤)의 광풍제월정(光風霽月亭)을 모방하여 후손이 추모해 지은 것이다. 지금 그 두려움이 중첩된 절벽 위가 변하여 의례(儀禮)의 단(壇)이 되고 이 정자가 우뚝 서 있어 매년 제향(祭享)을 올릴 때에 선비가 여기에 모이고 여기에서 예도(禮道)를 강설(講說)하며 여기에서 멀리 지나간 자취를 우러르니 현인(賢人)을 드높이고 그리며 추모하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정자(亭子)에 기문(記文)이 없는 고로 하루는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 옹(翁)의 주손(胄孫)인 경술(驚述) 씨가 내게 기문을 짓기를 청했다. 내가 이 지방에 살면서 선대(先代)를 계승(繼承)하는 뜻을 밝게 부러워하였던지라 드디어 공경히 문미(門楣)에 쓰거니와 그 숲과 구렁의 아름다움과 암대(巖臺)의 기이함이며 자연 풍경이 아침저녁으로 모양을 달리 하면서 유람(遊覽)하는 사람이 완상(玩賞)하도록 제공(提供)하는 것들은 보는 이가 스스로 얻을 것이다.
  을사년(1905) 3월 하순 오천(烏川) 정석호(鄭錫祜) 정석호(鄭錫祜) : 1840년(헌종 6)∼1906년(광무 10).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하수(賀受)이고, 호는 자봉(紫峰)이다.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경주(慶州)이다. 부친은 정우재(鄭宇載)이다. 7세부터 조부에게 가학(家學)을 배웠는데,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잃은 채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였다. 6권 2책의 ?자봉문집(紫峰文集)?이 전한다.
 씀


  二世 아시조(亞始祖) 낭중공(郎中公) 諱 인행(仁幸)

아시조 낭중공 단소
휘는 인행(仁幸)이다. 시조 태사공의 독자(獨子)이며 모든 안동권씨가 이 자손으로서 아시조(亞始祖)라고도 높여 부른다. 그 휘자(諱字)가 어찌 부공(父公)의 휘를 저촉했을까 하는 것은 고려말의 학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일찍이 ‘신라사람들이 조손간(祖孫間)에 같은 이름자가 있는 것은 당시의 세속이었다’고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고려태조가 3대를 작제건(作帝建) ・ 용건(龍建) ・ 왕건(王建)으로 하여 ‘삼건(三建)이 삼한(三韓)의 주인이 된다’는 설에 부응했던 것처럼 왕공(王公)과 같은 지위의 인물이 부자간에 같은 자로 이름을 세습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부조(父祖)의 이름자를 자손이 이름에서 엄격히 피하게 된 것은 고려초기 이후부터이다. 관직(官職)은 낭중(郎中)을 지내서 후손이 낭중공(郎中公)으로 호칭한다. 낭중은 신라말에서 집사성(執事省)과 병부(兵部)・창부(倉部)에 둔 벼슬로 17관등의 13품인 사지(舍知)로부터 11품 내마(奈麻)까지가 보임되었다. 고려초에는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해 육조(六曹)에까지 거개의 관서에 둔 정5품관인가 하면 지방의 주부군현(州府郡縣)에 둔 향직(鄕職)으로서 성종(成宗)2년 983년에 호정(戶正)으로 고치기 전의 이름이다. 향직의 낭중은 신라의 촌주(村主)・촌장(村長)과 같은데 공이 경직(京職)의 낭중을 지냈는지 향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추정으로 당시 지방의 실제 영주인 촌주로서의 낭중이었을 수도 있다. 공의 생몰(生歿) 연대와 묘소의 소재를 모른다.
  배(配) 부인(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는 대광(大匡) 선문(宣文)의 따님이다.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은 신라말 지금의 서울 양천(陽川) 강서구(江西區) 땅 공암(孔巖)의 촌주였다. 경북 청도(淸道)의 운문면(雲門面)에도 댐으로 수몰되기 전 공암촌(孔巖村)이 있어 양천의 공암과 허선문의 선대와 연관이 있는지 의구되고 있다. 고려초에 허선문은 신라인으로서 곡식과 재물을 많이 지니고 한강(漢江) 남쪽에 웅거하였는데 왕태조(王太祖)가 신라의 원수인 견훤(甄萱)을 토벌하고자 출정할 때 도강(渡江)을 돕고 군량을 조달한 공으로 공암촌주가 되고 대광의 벼슬을 받았다. 고려태조를 군사로써 도운 허선문은 신라인으로서 의기가 같고 견훤에게 설분(雪憤)코자 한 행동도 일치했으며 신라종성 김씨인 태사공과 가락국성(駕洛國姓) 허씨는 혼반(婚班)이 되었는데 낭중공이 안동 영주(領主)의 자제로서 송도(松都) 볼모 유학 중일 때 혼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공이 송도에서 귀환한 후에 안동에서 부친의 식읍(食邑)을 세습한 확증이 없어 혹시 장인 허선문의 선향(先鄕)이 청도의 공암이어서 어떤 연고로 그곳에 가 처가의 촌주직을 계승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혹설에는 청도의 공암촌 정자동(亭子洞)에 대총(大塚)이 있는데 세인(世人)이 권릉(權陵)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어 영조 22년 1746년에 28세손 혁(爀)이 경상감사로서 비장(裨將)을 보내 두루 추적하였으나 증빙치 못했다. 40년 뒤 정조 12년 1788년에 인근의 최성인(崔姓人)이 비지(碑誌)를 파손하고 입장(入葬)하였다는 설이 나와 대구감영(大邱監營)에 들여다 추안(推案)했으나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고종 40년 1903년에 인근 자인(慈仁)고을 후손이 지석(誌石)을 찾았다 했으나 징신성(徵信性)이 없음이 드러났고 1935년에 종의(宗議)를 모아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亭上里) 구룡산(九龍山) 자록(子麓)에 있는 권릉 좌하(左下)에 설단(設壇)하고 봉하리(鳳下里)에 봉암재사(鳳巖齋舍)를 지으면서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음력 3월과 9월 하정일(下丁日)에 향사를 받든다. 재사 앞에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이 단소를 2010년에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능동 시조 묘소 아래 능동재사(陵洞齋舍) 위쪽으로 옮기고 향사일도 시조 춘추향과 같은 날짜 봄 한식일(寒食日)과 가을 음력 10월 중정일(中丁日)로 바꾸었다.

    郎中公祭壇碑文
    낭중공 제단비문
安東權姓 高麗太師公 寔始祖 再傳諱仁幸 爲郎中 配陽川許氏 孔岩村主諱宣文女 墓 淸道郡孔岩村北亭子洞 失傳 洞之後麓 有二大墓 世傳爲權陵 陵與蝦蟆類也 二十七世孫 大提學愈 論封土 旋寢 二十八世孫 吏曹判書爀 三十二世孫 領議政敦仁 皆嘗以道伯 遣幕裨 驗問無徵 天授紀元后一千一十六年甲戌 遭離餘生 慕先追本禮議峻發 設壇于大墓東 歲祀之 謹按 孔子曰 望墓爲壇以時祭 韓南塘曰 始祖設壇 乃是義起 李鏡湖曰 未能的知先墓 不得已設壇其旁 望祭者 有之 南塘所謂始祖設壇 果指此等而言耶 嗚呼 繼始祖爲宗 尊敬百世 冠履之藏 遂失其所 明誠感神 篤孝極天 天燈故事 至理昭昭 將以竢后人
  己亥五月下旬 三十五世孫 嘉善大夫 前行江原道觀察使 原任奎章閣待制 益相 謹撰

안동권성(安東權姓)은 고려(高麗) 태사공(太師公)이 시조(始祖)인데 휘(諱) 인행(仁幸)을 나았으니 벼슬이 낭중(郎中)이며 배(配)는 양천허씨(陽川許氏)니 공암촌주(孔岩村主) 휘(諱) 선문(宣文)의 따님이다. 묘소는 청도군(淸道郡) 공암촌(孔岩村) 북(北) 정자동(亭子洞)이나 실전(失傳)하였다. 동내(洞內) 뒷산에 두 기(基)의 커다란 묘소가 있으니 대대(代代)로 전(傳)하여 권능(權陵)이라 하며 그 두덩이 개구리 같이 생겼다. 27세손(世孫) 대제학(大提學) 유(愈)(호號 하계霞溪)가 봉분(封墳)을 수축(修築)하자는 발의(發議)를 하였으나 이내 결론(決論)이 나지 않았고 28세손(世孫) 이조판서(吏曹判書) 혁(爀)(諡號 靖簡)과 32세손(世孫) 영의정(領議政) 돈인(敦仁)(호號 이재彛齋)이 모두 일찍 본도감사(本道監司)로서 부하(部下) 사람들을 보내어 조사(調査)해보았으나 증거물(證據物)이 없었다. 고려기원(高麗紀元) 1016년 갑술년(1934)에 국난(國難)을 맞은 여생(餘生)들이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할 예론(禮論)이 준발(峻發)되어 커다란 묘소의 동쪽에 단(壇)을 쌓고 해마다 제사(祭祀)를 올린다. 조심스레 생각해보니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묘소(墓所)를 바라보고 단(壇)을 쌓아서 시사(時祀)를 지낸다” 하였고 한남당(韓南塘) 한남당(韓南塘):1682∼1751. 이름 원진(元震), 자 덕소(德昭), 본관 청주(淸州), 장령(掌令)을 지냈다.
은 “시조(始祖) 설단(設壇)은 곧 의리(義理)로 일으킨다”라 하였고, 이경호(李鏡湖) 이의조(李宜朝):1727~1805. 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맹종(孟宗), 호는 경호(鏡湖)·명성당(明誠堂)이다. 부친의 유명을 따라 13년 동안 ?가례증해(家禮增解)? 9권 10책을 완성하였다. 1799년(정조 23) 공릉참봉(恭陵參奉)을 제수하였지만 사양하였고, 다시 첨중추오위장을 제수하였다.
는 “선조의 묘소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면 부득이하게 그 곁에 설단(設壇)하고 망제(望祭)를 지내는 이가 있다”는 것이 과연(果然) 이러한 것을 말함인가? 오호(嗚呼)라! 시조(始祖)를 계승(繼承)하여 백세(百世)토록 존경(尊敬)해야할 묘소(墓所)를 실전(失傳)하였으나 지성(至誠)이 신(神)을 감동(感動)케 하고 독실(篤實)한 효성(孝誠)이 하늘에 다다른 것이 천등산(天燈山) 옛일에서 그 이수(理數)가 밝아진 것이니 장차(將次) 후인(后人)들을 기다릴 것이다.
  기해년(1899) 5월 하순에 35세손(世孫)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歷任)하고 규장각(奎章閣) 대제(待制)의 원임(原任)인 익상(益相)이 삼가 쓰다.


    亞祖高麗郎中公移壇碑銘幷序
    아시조 고려낭중공 이단비명병서
府君之壇於孔巖者已累世 而先人之述備矣 尙昧斧堂 麗億不明之罪 無所逃也 然有塚無徵而不祀 未的也 未的之地壇享 實無據也 未據之舊貫 曷勝兆域乎 是以移論之定於歲在戊子始祖秋享之席 累道爛商 或辯甲乙 衆寡懸殊 而移設歸一 移不移雖殊而孝思則無異也 越明年秋 移設於陵齋之左 魂返先山 千載之下 先蔭有光 追遠之道極 報本之義盡矣 且螭首龜趺等物 輸致完璧 前人信筆 一無失眞之肥 封壇之誌擬於陵 陳跡昭然 雲物換新 溪山動色 始亞竝日之享自今始矣 神人俱翕 霜露悽愴之感勝於前 祼將芬苾之誠詔於後 後之承武 姑不期而自期 流水之理也 啓東叔氏 賢勞工訖之日 責不似而敍事 自顧謬及 猥而誼不敢辭而記焉 銘曰
噫吾家乘 麗史所仍 太史遺徵。 始祖鴻儀 擧幹遺枝 亞祖毋詞。 年荒事昧 累涉顯晦 間有闕酹。 德蔭不斬 遺澤之濫 載深載湛。 往昔肖裔 慷慨作計 殊方闡翳。 許公倩蹤 無所顒顒 等薊堯封。 無主之壟 無緣之塚 繭足成腫。 眞膺莫鑑 千年古帆 焉知沈汎。 于彼孔巖 京西有劖 厥譜可監。 地名因循 就燕問豳 非訛所因。 前人心結 如斯切切 無奈壇設。 今乃兆域 奉靈奠牲 是亦常經。 移封指期 曾不踰時 有姓無之。 天氣降矣 地靈鍾只 不在斯徙。 源遠流長 瀲灩無疆 龜龍乃昌。 由是興祥 如日之昇 萬福是膺。 樹珉劘顚 鐫此銘焉 永億萬年。
  權紀一千八十年己丑仲秋 三十四世孫 奇甲 謹識

아조(亞祖) 부군(府君)의 단소(壇所)가 공암(孔巖)에 있은 지 이미 여러 대를 지난 사실은 전대(前代) 분들의 글에 자세하게 서술(敍述)되어 있다. 아직까지 묘소를 찾지 못했으니 많은 자손들이 불명(不明)한 죄 ?예기? 「제통(祭統)」에 “종묘사직을 지키는 자손이 그 선조에게 선행이 없는데도 칭찬한다면 이는 속이는 것이요, 선행이 있는데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밝지 못한 것이요, 알고서도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질지 못한 것이니, 이 세 가지를 군자는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子孫之守宗廟社稷者 其先祖無美而稱之 是誣也 有善而弗知 不明也 知而弗傳 不仁也 此三者 君子之所恥也]”라는 말이 나온다.
는 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총(古塚)이 있어도 고증(考證)되지 못해서 제사를 올리지 못한 것은 확신(確信)이 없기 때문이고, 확신이 없는 곳에서 설단(設壇)하고 행사(行祀)를 올리는 일도 사실은 근거(根據)가 없는 일이다. 근거가 없는 일을 예전대로 봉행(奉行)하는 것이 어찌 선대위(先代位) 곁에 옮겨서 모시는 것보다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단(移壇)하자는 논의가 무자년(2008) 능동(陵洞) 추계향사(秋季享祀) 때 확정되었고 그 후에 여러 번 진지한 토의를 거치면서 왈가왈부(曰可曰否)하였으나 대부분 이단(移壇)하자는 의견이어서 옮기는 쪽으로 의견일치(意見一致)를 보았다. 가부(可否)의 의견이 있었으나 모두가 효심(孝心)의 취지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다음해 가을 능동재사(陵洞齋舍) 좌측(左側)으로 이단(移壇)의 일을 마치고 선산(先山)으로 혼(魂)을 모시게 되었으니 천년이 지난 시조(始祖)의 음덕(蔭德)에 더욱 빛나는 일이고 조상에 추모하는 도리도 더 극진하고 조상에 보답하는 정성(精誠)도 다하는 일이었다.
  또 공암(孔巖)에 있었던 모든 비석(碑石)과 좌대(座臺)들까지도 하자(瑕疵)없이 옮겨다가 세워서 과거의 기적(紀跡)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으니 단(壇)에 대한 사적들은 왕릉(王陵)과 비등(比等)할 정도이고 주위의 풍경이 새롭게 바뀌어 산천(山川)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지금부터는 시조(始祖)와 아조(亞祖)의 향사(享祀)를 같은 날 모시게 되었으니 조상과 자손이 다 같이 흡족(洽足)한 일이고 향사를 올릴 때에 추모(追慕)하는 감정(感情)이 전(前)보다 더 생길 것이고 제사를 올리는 정성을 후손이 본받게 될 것이다. 후손이 이것을 이어가는 것이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이어지는 것은 물이 흘러가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계동(啓東) 족숙(族叔)께서 이단(移壇)에 노고(勞苦)를 아끼지 않으면서 일이 끝날 무렵 부족한 나에게 이단(移壇)의 연유(緣由)를 서술(敍述)하라고 책임을 지우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외람스럽지만 정의(情誼)상 사양(辭讓)할 수가 없어서 기록하게 되었다. 잇달아 명(銘)을 쓴다.

噫吾家乘 麗史所仍 太史遺徵(희오가승 여사소잉 태사유징)
아! 우리의 가승(家乘)은 고려사(高麗史)를 그대로 옮긴 것이니 고려사관(高麗史官)이 남긴 확실한 기록이지만,

始祖鴻儀 擧幹遺枝 亞祖毋詞(시조홍의 거간유지 아조무사)
시조(始祖)의 위대한 업적도 요점만 기록해서 자세하지 못하고 아조(亞祖)에 대한 내용이 없고,

年荒事昧 累涉顯晦 間有闕酹(년황사매 누섭현회 간유궐뢰)
세월이 오래되어 사실이 애매(曖昧)하고 난세(亂世)를 겪으면서 때로는 향사(享祀)도 올리지 못했다.

德蔭不斬 遺澤之濫 載深載湛(덕음불참 유택지람 재심재담)
하지만 조상의 음덕이 끊이지 않아서 자손에게 깊고 넓게 혜택이 넘쳐흘렀기에,

往昔肖裔 慷慨作計 殊方闡翳(왕석초예 강개작계 수방천예)
과거의 훌륭한 자손들이 분발(奮發)하여 공암(孔巖)까지 가서 조상의 자취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許公倩蹤 無所顒顒 等薊堯封(허공천종 무소옹옹 등계요봉)
아조(亞祖)의 자취를 찾는 것은 계주(薊州)에서 요(堯)임금 자손의 봉지(封地)를 찾는 것과 같은 격(格)이었다.

無主之壟 無緣之塚 繭足成腫(무주지농 무연지총 견족성종)
주인이 없는 산과 연고 없는 무덤에 발이 부풀도록 찾아 다녔으나,

眞贋莫鑑 千年古帆 焉知沈汎(진안막감 천년고범 언지침범)
진위(眞僞)를 알 수 없으니 천년전(千年前)에 돛배들이 어느 물에 빠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于彼孔巖 京西有劖 厥譜可監(우피공암 경서유참 궐보가감)
공암(孔巖)이란 지명(地名)은 서울 서쪽에 있는 공암혈(孔巖穴)의 기록이 허씨(許氏)의 족보에 있는데,

地名因循 就燕問豳 非訛所因(지명인순 취연문빈 비와소인)
지명이 같았기 때문에 서울의 공암을 청도(淸道)에서 찾은 헛고생이 아니었겠는가?

前人心結 如斯切切 無奈壇設(전인심결 여사절절 무내단설)
과거의 분들이 이렇게 간절한 심력(心力)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이 설단(設壇)하고 말았으니,

今乃兆域 奉靈奠牲 是亦常經(금내조역 봉령전생 시역상경)
이제는 시조의 조역(兆域)으로 모셔서 향사를 올리는 것 역시 당연하지 않겠는가?

移封指期 曾不踰時 有姓無之(이봉지기 증불유시 유성무지)
이단(移壇)의 공기(工期)를 정해놓고 기간 내에 마친 것은 우리 성(姓)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다.

天氣降矣 地靈鍾只 不在斯徙(천기강의 지령종지 부재사사)
천기(天氣)가 내리고 지령(地靈)이 솟는 곳에 옮긴 것이 바로 여기 이곳인 것이다.

源遠流長 瀲灩無疆 龜龍乃昌(원원유장 염렴무강 귀룡내창)
오랜 역사에 많은 자손들이 끝없이 번창하면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었고,

由是興祥 如日之昇 萬福是膺(유시흥상 여일지승 만복시응)
지금부터는 태양이 솟듯이 상서(祥瑞)로운 일이 생겨서 만(萬) 가지 복을 받을 것이다.

樹珉劘顚 鐫此銘焉 永億萬年(수민마전 전차명언 영억만년)
좋은 돌을 다듬어 세우고 이 명(銘)을 새기니 억만년(億萬年)이 지나도록 영원할 것이다.

  권기(權紀) 1080년 기축년(2009) 중추(仲秋) 34세손 기갑(奇甲)은 삼가 기록함.  <국역:권기갑(權奇甲)>


  三世 諱 책(冊)
관직은 호장정조(戶長正朝)이다. 호장은 백성의 장이고 정조는 고려 향직(鄕職)의 7품 위계이다. 아들은 균한(均漢) 광한(光漢) 겸한(謙漢)이다.


  四世 諱 균한(均漢)
관직이 우일품별장(右一品別將)인 것 외에 모두가 미상이다. 아들은 자팽(子彭) 좌섬(佐暹)이다.


  五世 諱 자팽(子彭)
호장정조(戶長正朝)이다. 아들은 선개(先蓋) 덕여(德輿)이다.


  六世 諱 선개(先蓋)
호장동정(戶長同正)으로서 행(行) 익아교위(翼牙校尉)이다. 아들은 염(廉)이다.


  七世 諱 염(廉)
호장동정(戶長同正)으로서 행(行) 배융교위(陪戎校尉)이다. 아들은 이여(利輿)이다.


  八世 諱 이여(利輿)
호장(戶長)이다. 아들은 백시(伯時), 중시(仲時), 취의(就宜), 통(通), 취정(就正), 융(融), 엄(嚴)이고, 사위는 흔적신(昕迪臣)이다.


  九世 호장공(戶長公) 諱 통(通)
보승별장(保勝別將) 부호장중윤(副戶長中允)이다. 아들은 지정(至正) 영정(英正)이다.


  十世 좌윤공(佐尹公) 諱 지정(至正)
  태사공(太師公)의 7대종손(代宗孫) 호장공(戶長公) 휘 이여(利輿)의 넷째아들 호장(戶長) 휘 통(通)의 장자이다. 호장(戶長)으로서 좌윤(佐尹)을 지냈기 때문에 좌윤공(佐尹公)으로 칭하며 10세 14대파(大派) 가운데 여섯 번째인 좌윤공파(佐尹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공은 별장공파(別將公派) 파조(派祖) 영정(英正)과 형제간이다. 아들은 정용위 별장(精勇衛別將) 세위(世位)가 있다.


十一世 諱 세위(世位)
정용위별장(精勇衛別將)이다. 파보(派譜)에 병조정랑(兵曹正郞)과 군기감(軍器監)을 행직(行職)한 것으로 나온다. 병조정랑은 고려관제(高麗官制)로 병부낭중(兵部郞中)이다. 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兼) 호장(戶長)으로 나온다. 이는 만년에 호장을 겸하였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가 된 것은 뒤에 자손이 귀히 됨에 따라 추봉(追封)된 것이 아닌가 한다.


十二世 諱 양준(良俊)
별장 부정(別將副正)이다. 파보에는 이 향직(鄕職) 외에 경직(京職) 병조정랑(兵曹正郞) 즉 병부낭중(兵部郞中)을 행직한 것으로 나온다. 배위 영가권씨(永嘉權氏)는 상서좌복야상장군(尙書左僕射上將軍) 수홍(守洪)의 따님이다. 아들은 문과공(文科公) 수(粹)이다.


十三世 諱 수(粹)
고휘(古諱)는 정(精)이다. 좌윤공의 독증손(獨曾孫)으로 별장 부정(別將副正) 휘 양준(良俊)의 아들이다. 일체의 기록이 미상이나 보서(譜書)에 문과 급제(文科及第)로 나온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의 아들 혁(奕)의 주기(註記)에는 호장(戶長)으로 나온다. 배위는 안동강씨(安東姜氏)로서 호장 정위(戶長正位) 효창(孝昌)의 따님이고, 아들은 중문지후(中門祿候) 혁(奕) ・ 낭장(郎將) 견(堅)이다.


十四世 지후공(祗候公) 諱 혁(奕)
좌윤공의 장현손(長玄孫)으로 별장부정(別將副正) 휘 양준(良俊)의 손자요, 수(粹)의 아들이다. 충렬왕 16년 1290년 5월의 방(榜)에 우탁(禹倬) 등과 함께 문과에 진사(進士) 제19인이었고, 응시 당시 신분은 국학(國學)의 면응재생(眠應齋生)이었다. 관직은 중문지후(中門祗候)에 이르렀다. 사후(死後)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또한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었는데 이는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그 증손 진(軫)이 정승(政丞)으로 귀(貴)히 됨에 따라서이다. 배위는 동종(同宗)의 영가권씨(永嘉權氏)로서 예빈동정(禮賓同正) 열(烈)의 따님이고 묘소는 안동부(安東府) 북쪽의 연미원(燕尾院) 오이동(烏耳洞)에 경향(庚向)으로 합폄(合窆)되어 있다. 아들은 낭장(郞將) 용일(用一)이다.


    高麗中門祗候贈嘉善大夫吏曹叅判永嘉君墓碣銘
    고려중문지후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영가군 묘갈명
故中門祗候永嘉君權公奕之藏이 在安東府北烏耳洞枕甲之原하니 舊有表에 漫漶不堪讀이라 後孫이 將治石改竪以顯刻할새 屬冶城宋浚弼하니 嗚呼라 公은 高麗人也라 距今五百有餘年에 出處行事는 史逸無傳하야 生卒表德이 亦未詳所據者라 公이 少에 博學能文章하야 忠烈王十六年에 登第하야 與禹祭酒先生倬으로 同榜하야 官至中門祗候하고 旣致仕에 優游田里하야 以令名으로 終後하니 贈嘉善大夫吏曹叅判하고 追封永嘉君하니 權氏는 東方著姓이라 始祖幸이 佐麗太祖하야 平甄亂하고 官至太師하다 十世而諱至正은 官佐尹이요 子諱世位는 樞密院府事오 子諱良俊은 兵曹正郞이요 子諱粹는 文科라 娶安東姜氏刑部尙書孝昌女하니 寔公皇考妣也라 配는 禮賓同正權烈의 女니 贈貞夫人이오 墓는 祔公하다 子用一은 門下侍中이오 贈左叅贊諡僖敬이요 孫希正은 監察이오 贈左議政諡文靖이니 是生七男三女하니 男轂은 版圖正郞이요 輿道는 監司요 軫은 右議政諡文景이오 輊와 軒은 皆縣監이요 軺는 判事요 輜는 縣令이요 女는 適司僕寺事裵尙志하고 副正李云侯하고 奉禮郞金革하다 以下는 不盡載하다 語에 曰 世或有無根而産芝하고 未有濬源而不流라하니 以是觀公之世컨대 子孫繁衍에 名位相承하니 如竹林公山海邃學淸節과 龜峯公德麟文行華秩과 松鶴公應時至孝治績과 洛濱公震翰과 鳩谷迪立朝謇諤이 皆卓然爲王國之藎臣이요 龍泉公鼎鉉은 雖未貴顯而淸名雅行이 亦爲世所重하니 是公積德遺澤之歷久彌彰이 盖有不加誣者矣라 舊表作에 不詳年代하고 今於改碣也에 始終彈誠者는 泰鴈·斗植二君也오 玆索余言者는 員外君正默也라 銘曰
猗公家世는 麟棷鳳穴이라 篤生偉人에 有學有烈이라 世代悠荒에 莫究顚末이라 推其顯者에 潛光可述이라 有隆其阜에 苔碑字沒이라 我最以銘에 垂示杳忽이라
  玄默敦牂小春節에 外後孫宋浚弼은 謹撰이라

영가군 휘 혁(奕) 묘소

고려(高麗) 중문지후(中門祗候)를 지낸 영가군(永嘉君) 권공(權公) 혁(奕)의 묘소가 안동부(安東府) 북쪽 오이동(烏耳洞) 갑좌(甲坐)의 산에 있는데, 비석이 오래 되고 글자가 마모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다. 후손이 새로 돌을 준비해서 글을 새기려고 나 송준필(宋浚弼) 송준필(宋浚弼):1869(고종 6)-1943. 조선 말기의 도학자. 경상북도 성주 출신.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순좌(舜佐), 호는 공산(恭山). 아버지는 기선(祺善)이다. 이진상(李震相)의 강학에 참석했고, 1886년(고종 23)부터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후에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영남의 석학들 문하에 폭넓게 왕래하며 수학하였다. 1919년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서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과 더불어 활동함으로써 의리정신과 민족의식을 발휘하였다. 만년에는 김천에서 살았다.
에게 부탁하였다.
  아! 공은 고려(高麗)시대 분이시고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어서 품행과 업적이 역사에 남아있지 않고 생졸년이나 자(字)도 고증할 수 없다. 공이 소년기에 학문이 깊고 문장력이 좋아서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등과(登科)해서 좨주(祭酒) 우탁(禹倬) 선생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벼슬이 중문지후(中門祗候)에 이르렀고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착한 명성(名聲)으로 세상을 뜨시었으니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이시고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셨다.
  권씨는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이고 시조(始祖) 행(幸)이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견훤(甄萱)의 난을 평정(平定)하고 태사가 되시었다. 10세 휘(諱) 지정(至正)은 좌윤(佐尹)이었으며 그 아들의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樞密院)부사(府事)요, 그 아들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그 아들 휘 수(粹)는 문과급제(文科及第)했으며 배위(配位)는 안동강씨(安東姜氏) 형부상서(刑部尙書) 효창(孝昌)의 따님이시다. 이 분이 공의 황고(皇考)시고 배위(配位)는 예빈동정(禮賓同正) 권열(權烈)의 따님이시니 증직(贈職) 정부인(貞夫人)이요 묘소는 공과 같이 부장(祔葬)되어있다. 아들 용일(用一)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증직 좌참찬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요, 손자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이요 증직 좌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니 이 분은 7남3녀를 두시었는데, 아들 곡(轂)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요, 여도(輿道)는 감사(監司)요, 진(軫)은 우의정(右議政)이며 시호는 문경(文景)이오, 지(輊)와 헌(軒)은 모두 현감(縣監)이요, 초(軺)는 판사(判事)요, 치(輜)는 현령(縣令)이요, 사위는 사복시사(司僕寺事) 배상지(裵尙志)와 부정(副正) 이운후(李云侯)와 봉례랑(奉禮郞) 김혁(金革)이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옛말에 ‘뿌리 없는 지초(芝草)는 혹시라도 있을 수 있으나 근원(根源) 없는 물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공의 가세(家世)에 훌륭한 많은 자손을 보면 명성(名聲)과 직위(職位)가 이어졌으니 죽림공(竹林公) 산해(山海)의 깊은 학문과 높은 절의와 귀봉공(龜峯公) 덕린(德麟)의 화려한 문행(文行)과 업적과 송학공(松鶴公) 응시(應時)의 지극한 효성과 치적과 낙빈공(洛濱公) 진한(震翰)과 구곡(鳩谷) 적(迪)이 조정에서 바른 말을 해서 다들 국왕을 위해 뛰어난 충신들이며 룡천공(龍泉公) 정현(鼎鉉)은 비록 높은 관직은 없으나 청렴한 명성과 아름다운 품행이 또 세상에 존경을 받았으니 이것은 공의 적덕(積德)과 은택(恩澤)이 오래도록 빛난 것이니, 여기에 무었을 더 과장해서 말하겠는가? 옛 비문에 연대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고, 지금 다시 비를 세우는 데 성력(誠力)을 아끼지 않은 태안(泰鴈) · 두식(斗植) 두 분이고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부탁한 분은 원외랑 정묵(正默)이다. 명(銘)을 쓴다.

  猗公家世(의공가세)
  공의 가세(家世)를 상고(詳考)하면
  麟棷鳳穴(인추봉혈)
  기린(麒麟)의 숲 같고 봉황(鳳凰)의 집 같아서
  篤生偉人(독생위인)
  걸출(傑出)한 위인(偉人)이 태어나서
  有學有烈(유학유열)
  학문도 깊고 공열(功烈)도 높아서
  世代悠荒(세대유황)
  끝없이 대대로 이어져서
  莫究顚末(막구전말)
  전말(顚末)을 다 궁구할 수 없으나
  推其顯者(추기현자)
  현달(顯達)한 분을 추구(追求)해 보면
  潛光可述(잠광가술)
  숨은 광채(光彩)를 서술(敍述)할 수 있다.
  有隆其阜(유융기부)
  산 같이 높은 무덤 비석에
  苔碑字沒(태비자몰)
  글자가 없어지고 이끼가 끼었기에
  我最以銘(아최이명)
  내가 이 명(銘)을 지어
  垂示杳忽(수시묘홀)
  먼 후일(後日)까지 전하게 한다.

  임오년(1942) 10월 외후손(外後孫) 송준필(宋浚弼) 삼가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안동군 북후면(北後面) 오산동(烏山洞) 연원(燕院) 잣밭골에 있다


    燕院齋舍重新記
    연원재사 중신(重新)기문

연원재사 현판
直永嘉治北十里而近 有燕尾院梧里洞 洞之東麓 庚向之阡 寔我二十一代祖參判府君衣履之藏也 貞夫人祔左 曾孫縣令公諱輜 亦繼葬焉 二十代祖參贊府君之藏 在其西麓丙向 而前後貞夫人先後祔焉 舊無冡人以守之 正廟庚子 族先龍泉公諱鼎鉉 詢及諸宗 置祭田若干塍 仍創建祭閣八樑 以爲齋宿之所矣 高宗丙申 災於鬱攸 因其燼餘 架漏牽補 誅茅以覆 苟且度了者 有年矣 至是 遠近宗盟 峻發重建之議 醵鍰貲 鳩材瓦 經始於丁丑春 而越明年春竣功 其制凡十間 中爲堂 而兩夾爲室 以適凉燠 厨竃庫藏 因舊貫焉 既落 首班一人 執爵而旅之曰 維我先齋 倡自龍翁 而至一百六十七年 而不幸及災 歷四十二年 而始克重新 玆事或庶幾籍手前修 而亦不禁人代 今昔之感焉 在龍翁之時 則適丁昭代 右文孝理之化 洽于群黎 士詠楚茨 女歌採蘋 莫不以反始報本爲重 宜祖考來格 而子孫受嘏矣 若今之世 則頽季也 狂潮震盪 桑海茫洋 先王文教 無復遺響 而綱淪法斁 人而獸矣 矧夫一種無神之論 汎濫天下 載胥及溺馴 而至焚屍毀宔 恬不爲怪 自今以往 孔聖所謂卜其宅兆而安厝之 春秋祭祀以時思之者 終歸於彌文剩語而已 然則吾輩將何修而爲善後之圖哉 惟願僉宗 一乃心膂教養兒孫 必須劑量新舊 而申之以孝悌之道 使知反始報本之爲何等所重 而克追先猷以敬其祭祀 俾吾先齋保不知巋然空閣 而永傳千祀之遠 此裔承今日第一義 詩不云乎 以似以續 續古之人 又云子子孫孫勿替引之 盍相與勉旃 僉曰唯唯 仍屬余爲記
  檀紀四二九三年 九月 日 二十一世孫 斗植 謹撰


연원재사 중수기
안동부(安東府) 치소(治所) 북쪽으로 10리 되는 제비원[燕院] 근처에 오리동(梧里洞)이 있고 오리동 동쪽기슭 갑좌경향(甲坐庚向)의 묘소는 나의 21대조 참판(參判)부군이시고 정부인(貞夫人)이 왼쪽에 부장(祔葬)되었다. 증손인 현령(縣令) 휘 치(輜)의 묘소도 이어져있다. 20대조 참찬(參贊)부군의 묘소는 그 서쪽기슭 병향(丙向)이며 전후취(前後娶) 정부인(貞夫人)은 앞뒤로 부장(祔葬)되었다. 과거에 묘소 지키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조(正祖) 4년 경자년(1780)에 선대 족친(族親) 용천공(龍泉公) 휘 정현(鼎鉉)이 여러 자손과 의논해서 제전(祭田)을 조금 사고 잇달아 재사(齋舍) 8칸을 창건해서 재숙(齋宿)으로 써다가 고종(高宗) 병신년(1896)에 화재를 당해서 타다 남은 몇 칸을 보수해서 띠[茅]로 덮어서 몇 해를 구차하게 지내다가 이제 와서 원근의 종친들이 중건하자는 의논을 하고 자금을 갹출(醵出)해서 목재와 기와를 준비하고 정축년(1937) 봄에 시작해서 다음해 봄에 준공하니 규모가 열 칸인데 중앙에 마루로 쓰고 양쪽에 방을 만들어 여름 ・ 겨울에 편리하고 주방(廚房)과 창고는 과거(過去)와 같게 했다. 낙성(落成)한 뒤에 어른 한 분이 술잔을 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재사는 용천공이 시작하시어 지금 167년 용천공이 처음 시작한 때는 1780년이고 화재를 만난 해는 1896년이며 중건한 해는 1937년이다. 그러므로 중건한 해는 용천공이 처음 시작하고 나서부터 157년 만이고 화재를 입은 때로부터는 42년째가 된다.
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화재를 보고 42년을 지나서 새로 중건했으니 이 일은 아마도 옛 분이 한 일을 후인이 이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으나 용천공 시대는 태평성대(太平
연원재사 전경

聖代)라 백성들에게 훌륭한 교화(敎化) 원문의 우문(右文)은 학문을 숭상한다는 뜻이고, 효리(孝理)는 효(孝)를 근본으로 삼는 도리. 또는 효의 도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가 이루어져서 선비는 초자가(楚茨歌) 「초자(楚茨)」는 ?시경?〈소아〉의 편명인데, 초자(楚茨)는 가시덤불을 뜻한다. 「초자(楚茨)」에 “무성한 찔레꽃 밭, 그 가시덤불 제거함은, 예로부터 무엇 때문이었는가, 우리가 곡식을 가꾸려 해서라오[楚楚者茨 言抽其棘 自昔何爲 我藝黍稷]”라는 구절이 나온다.
를 부르고 부인(婦人)들은 채빈곡(採蘋曲) ?시경(詩經)?「채빈(采蘋)」에 “남쪽 시내에서 마름 풀을 뜯노라[于以采蘋, 南澗之濱]”라고 하였다.
을 부르면서 조상의 음덕(蔭德)에 보답하고 조상이 돌보시어 자손이 복(福)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시대가 변하고 불미스런 풍조가 생겨서 세상이 달라졌으니 옛날 문화교육(文化教育)의 영향이 없고 윤리(倫理)가 무너져서 사람의 도리를 하지 않고 또 무신론(無神論)이 범람(氾濫)해서 모두가 무신론(無神論)에 빨려 들어서 묘소를 파서 화장(火葬)하고 신주(神主)를 없애면서도 태연(泰然)하게 괴이(怪異)함을 모르니 이대로 간다면 ‘묘소를 써서 편하게 모시고’ ?효경(孝經)? 「상친장(喪親章)제십팔(第十八)」에 “卜其宅兆 而安厝之”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같은 곳에 “春秋祭祀 以時思之”라는 구절도 나온다.
 ‘춘추로 제사지내면서 사모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은 결국 글로 남고 말만 전할 뿐이니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후일(後日)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오직 바라는 것은 온 종중(宗中)이 한마음으로 힘써 조손(祖孫)을 가르치는 데 반드시 고금(古今)의 형편을 참작하고 효도하고 공경하고 조상에 보답하는 뜻이 얼마나 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선대(先代)의 뜻을 따라 공손으로 제사를 올리게 하고 우리는 이 재사(齋舍)를 보존하는 일을 알 수는 없지만 높이 솟은 넓은 집이 천년이 되도록 오래 전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첫째 책무인 것이니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이같이 이어가면서 예전같이 계속하라’ ?시경? 「주송(周頌) 민여소자지십(閔予小子之什)」에 “以似以續 續古之人[이어서 계속하여 옛 사람을 이었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 했으며 또 ‘자자손손(子子孫孫) 끝없이 이어가라’ ?시경(詩經)? 「소아(小雅) 초자(楚茨)」에 “심히 순하고 심히 때에 맞아 극진하였으니 자자손손 중단하지 않고 길이 이어 나가리라[孔惠孔時 維其盡之 子子孫孫 勿替引之]”라고 하였다.
 했으니 어찌 같이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니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내가 그대로 기문(記文)을 썼다.
  단기 4293년[서기 1960년] 9월 일에 21세손 두식(斗植) 권두식(權斗植):1877-1962. 자(字)는 찬옥(贊玉), 호는 만률(晩栗). 생부는 덕수(德洙). 유고(遺稿)가 있다.
은 근찬(謹撰)이라.  <국역:권기갑(權奇甲)>

 

十五世 희경공(僖敬公) 諱 용일(用一)
좌윤공의 5대종손 지후공(祗候公) 휘 혁(奕)의 독자(獨子)이다. 관직은 낭장(郎將)을 지냈으나 보서(譜書)에는 고려조의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추밀원사(樞密院事)의 직함이 보이는데 이는 행직(行職)인지 증직(贈職)인지 알 수 없다. 또 사후 추증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받았는데 이는 조선조(朝鮮朝)에 손자 진(軫)이 귀히 됨에 따라서이며 희경(僖敬)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초배(初配)가 정부인(貞夫人) 야성 송씨(冶城宋氏) 광계(光啓)의 따님이고 재배(再配)는 정부인 영가권씨(永嘉權氏) 중문지후(中門祗候) 빈(份)의 따님이며, 묘소는 경북 안동시 북쪽 제비원 서쪽 언덕에 병향(丙向)으로 있다. 아들은 감찰(監察) 희정(希正)과 중랑장 희백(希伯)이 있다.

    高麗門下侍中贈議政府左叅贊諡僖敬公墓碣銘
    고려문하시중 증의정부좌참찬 시 희경공 묘갈명
公의 諱는 用一이니 安東之世는 高麗太師權幸之后也라 高祖諱는 世位이니 樞密院府事요 曾祖諱는 良俊이니 兵曹正郞이요 祖諱는 粹니 文科요 考諱는 奕이니 中門祗候贈吏叅이며 封永嘉君하고 妣는 貞夫人權氏禮賓同正烈之女라 公이 仕至門下侍中하고 入本朝에 贈左叅贊諡僖敬은 以孫左相文景公軫의 貴로 追恩也라 謹按文景公이 當麗末國初則公이 似是忠肅忠宣朝人而無世傳信蹟하고 永嘉誌에 居于城東門外云하고 葬于府西燕院坐壬하니 阡在永嘉君墓右麓이라 配貞敬夫人冶城宋氏니 父는 光啓라 祔後하고 繼配는 貞敬夫人永嘉權氏니 父는 中門祗候份이니 同堋이라 生二男하니 希正은 監察이요 贈左議政諡文靖이요 希伯은 中郞將이라 希正은 生七男三女하니 男轂은 正郞이오 輿道는 監司요 軫은 右議政諡文景號敬齋요 輊·軒은 皆縣監이요 軺는 文判事라 本朝에 除北伯해도 不赴하고 隱居于龍宮念松山下하야 自號를 松臯라하다 輜는 縣令이요 女에 裵尙志는 司僕寺事贈吏判이요 李云侯는 副正이요 金革은 奉禮郞이라 轂은 生三男二女하니 男에 處中은 郞將이요 處庸은 牧使贈副提學이요 處和는 司直이요 女에 潘詠은 節制使요 南得儉은 司直이요 軫은 生四男四女하니男에 孟慶은 兵使요 孟度는 郡守요 孟貞은 少尹贈戶判이요 七臨은 文正郞이요 女는李之誠이요 裵素는 文吏正이요 申自敬은 大護軍이요 宋守謙은 縣監이라 輊는 生四男四女하니 男에 若中은 司直이요 若經이오 若衡이오 若枰은 進士요 女는 金雨寶·權均·魯存禮·孫中和요 軺는 生一男寬하니 義禁府經歷이요 輜는 生三男一女하니 男에 致和는 司直이요 致順은 主簿요 致孫은 司直이요 女는 李材요 處庸은 生一男孝孫하니 萬戶贈右副承旨요 處和는 生一男係生하니 生員이오 孟度는 生一男準하고 孟貞은 生五男一女하니 男에 叔慄은 叅奉이요 叔惕이오 惶은 護軍이요 叔愷요 仲愼은 府使요 女에 沈貞源은 僉知오 七臨은 生一男琛하니 縣監이요 若中은 生三男三女하니 男은 用世·叔仁·季仁이요 女는 孫奉孝·權柔文이요 仲敬이요 若經은 生一女하니 李慶春은 錄事오 若衡은 生一男一女하니 男推는 生員이오 女林貴俊은 縣監이요 若枰은 生一男一女하니 男巽은 司直이요 女權成美는 叅軍이요 寬은 生六男二女하니 男에 山海는 號竹林이요 僉正이고 贈吏判諡忠愍이니 丙子에 與六臣과 同殉하야 旌閭하고 享魯峯院하고 自海는 察訪이요 福海요 壽海는 號向日齋고 司正이오 德海요 得海고 女에 李堯丁은 縣監이요 權守經은 武科오 致和는 生四男하니 自位는 別侍오 自育은 司猛이오 自溫은 司直이오 自貴오 致順은 生一男하니 宗李니 進武오 致孫은 一男一女하니 男得中은 監察이요 女鄭以僑는 翰林이라 曾孫以下는 繁不勝錄하나 但追錄入享院祠諸賢하니 八世孫德麟은 號龜峰이요 文正郞인데 晦齋李先生高弟로 享雲谷하고 九世孫復興은 號五慕齋요 壬亂殉節하야 旌閭하고 享忠烈祠하고 士諤은 號梅窩오 正郞이고 贈左承旨니 壬亂錄勳하고 享虎溪祠하고 士敏은 號梅軒이요 司甕主簿고 贈左承旨니 壬亂錄勳하고 旌閭하고 享玉淵祠하다 於乎라 今距公世가 六百有餘禩矣라 以若門閥之舊冠冕之盛이 可謂雄鳴一國而顧世代綿邈하고 文獻이 無徵하니 匪但遺謨懿蹟之泥焉이라 倂與其生卒年月而失之하니 可勝言哉아 正廟己亥에 十三世孫龍泉公鼎鉉이 重建齋舍에 克殫誠力하고 乃於丙戌에 諸族이 會議하야 將竪碣于公墓할새 石이 旣具에 後孫肅永·容默·澤中·五錫·沃이 涉三百里하야 責忠鎬以麗牲之文하니 余固不敢而竊念我先祖副正公이 爲公之孫甥則揆諸諠分에 亦有不可終辭라 爲之銘曰
燕院이 在城西二十里하니 寔公父子巾舃之藏也라 蔚乎喬木之世에 又何蟬赫其簪纓也오 降六百餘載에 所恨杞宋之無憑也라 匪直名跡之俱晦라 從以生卒之莫詳也라 迺竪高珉改舊床也에 微雲來不億其麗가 曷能使久翳而復章가 可驗夫深仁厚澤이 有積于始而必報于終也라 綴蕪詞而揭崇阡하야 將有感于斯銘也하노라
  外裔孫從仕郞前章陵叅奉眞城李忠鎬는 謹撰하노라
  丙戌十月日에 改竪하다

공의 휘(諱)는 용일(用一)이니 안동의 세족(世族)이며 고려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시다. 고조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부사(樞密院府事)요, 증조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조(祖) 휘 수(粹)는 문과(文科)요, 고(考) 휘 혁(奕)은 고려(高麗) 중문지후(中門祗候)요, 조선(朝鮮) 증직이조참판(贈職吏曹叅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봉군(封君)이되시었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권씨(權氏)며 예빈동정(禮賓同正) 열(烈)의 따님이시다.
  공의 벼슬은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조선조(朝鮮朝)에 증직 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인데 손자인 문경공(文景公) 진(軫)이 우상(右相)이 되어서 추은(追恩)으로 받은 것이다.
  삼가 고안(考案)하니 문경공(文景公)이 고려말(高麗末)과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분이어서 고려 충숙왕(忠肅王) · 충선왕(忠宣王) 당시의 분으로 추정(推定)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고 ?영가지(永嘉誌)?에 안동의 동문(東門) 밖에 살았고 안동 서쪽 제비원 임좌(壬坐)에 장사지냈고 영가군(永嘉君)의 묘소 우측이라고 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 광계(光啓)의 따님이시며 묘소의 뒤에 부장(附葬)되었고 후배위(後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영가권씨(永嘉權氏)니 중문지후(中門祗候) 빈(份)의 따님이니 같은 광중(壙中)이다.
  아들이 두 분인데,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요 희백(希伯)은 중랑장(中郞將)이다. 희정(希正)은 7남3녀를 두셨는데, 아들 곡(轂)은 정랑(正郞)이오 여도(輿道)는 감사(監司)요 진(軫)은 우의정(右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며 호는 경재(敬齋)이다. 지(輊)와 헌(軒)은 다 현감(縣監)를 지냈고 초(軺)는 문과(文科)로 판사(判事)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함경도(咸鏡道) 감사(監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용궁(龍宮)의 염송산(念松山) 아래 은거(隱居)하면서 자호(自號)를 송고(松臯)라 했다. 치(輜)는 현령(縣令)이요, 사위 배상지(裵尙志) 배상지(裵尙志):1351∼1413. 본관은 흥해(興海). 호는 백죽당(栢竹堂). 1351년(충정왕 3) 현재의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음사(蔭仕)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정국이 혼란하여 머지않아 변혁이 있을 것을 깨닫고 사직한 뒤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에 머물던 외조부 손홍량을 생각하며 안동 금계촌(金溪村, 현 서후면 금계리)으로 옮겨가 살았다. 그 뒤 고려의 운이 다하게 되자 집 주위에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꿋꿋한 절개를 보여주는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그 집을 백죽당(栢竹堂)이라고 했다. 은거 중 금오산(金烏山)에 숨어 살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교유하였다.
는 사복시사(司僕寺事)며 증직 이조참판과 부정(副正)인 이운후(李云侯)와 봉례랑(奉禮郞)인 김혁(金革)이다.
  곡(轂)은 3남2녀를 두었는데, 처중(處中)은 낭장(郞將)이요 처용(處庸)은 목사(牧使)며 증직(贈職)부제학(副提學)이요 처화(處和)는 사직(司直)이다. 사위 반영(潘詠)은 절제사(節制使)요 남득검(南得儉)은 사직(司直)이다. 진(軫)은 4남4녀를 두셨으니 맹경(孟慶)은 병사(兵使)요 맹도(孟度)는 군수(郡守)요 맹정(孟貞)은 소윤(少尹)이며 증직 호조참판이요 칠임(七臨)은 문과정랑(文科正郞)이요, 사위는 이지성(李之誠)과 문과이정(文科吏正)인 배소(裵素)와 대호군(大護軍) 신자경(申自敬)과 현감 송수겸(宋守謙)이다.
  지(輊)는 4남4녀를 두셨으니 약중(若中)은 사직(司直)이요 약경(若經)과 약형(若衡)과 진사(進士)인 약평(若枰)이다. 사위는 김우보(金雨寶) · 권균(權均) · 노존예(魯存禮) · 손중화(孫中和)이다. 초(軺)는 외아들 관(寬)을 길렀으니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이요, 치(輜)는 3남1녀를 두셨으니 치화(致和)는 사직(司直)이요 치순(致順)은 주부(主簿)요 치손(致孫)은 사직(司直)이요, 사위는 이재(李材)다.
  처용(處庸)은 외아들 효손(孝孫)이 만호(萬戶)며 증직 우부승지(右副承旨)요, 처화(處和)도 외아들 계생(係生)이 생원(生員)이오, 맹도(孟度)도 외아들 준(準)이고, 맹정(孟貞)은 5남1녀를 두었으니 숙율(叔慄)은 참봉이요, 숙척(叔惕)이며, 황(惶)은 호군(護軍)이요, 숙개(叔愷)요, 중신(仲愼)은 부사(府使)다 사위인 심정원(沈貞源)은 첨지(僉知)다. 칠림(七臨)은 외아들 침(琛)이 현감이요 약중(若中)은 3남3녀를 두셨는데, 용세(用世)와 숙인(叔仁)과 계인(季仁)이다. 사위는 손봉효(孫奉孝)와 권유문(權柔文)이오, 중경(仲敬)이오, 약경(若經)은 1녀를 길렀는데, 사위는 녹사(錄事)인 이경춘(李慶春)이다. 약형(若衡)은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 추(推)는 생원이오, 사위 임귀준(林貴俊)은 현감이다. 약평(若枰)은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 손(巽)은 사직(司直)이요, 사위 권성미(權成美)는 참군(叅軍)이다.

예천(醴泉) 노봉서원(魯峯書院)
  관(寬)은 6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 산해(山海)의 호는 죽림(竹林)이고 벼슬은 첨정(僉正)인데 증직 이조참판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니 단종손위(端宗遜位) 때에 사육신(死六臣)과 같이 순직(殉職)해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노봉원(魯峯院)에 모시었고, 자해(自海)는 찰방(察訪)이요, 다음 복해(福海)요, 수해(壽海)는 호 향일재(向日齋)고 사정(司正)이오, 다음 덕해(德海)요, 득해(得海)이다. 사위 이요정(李堯丁)은 현감이요, 권수경(權守經)은 무과(武科)이다. 치화(致和)는 4남을 두셨는데, 자위(自位)는 별시위(別侍衛)오 자육(自育)은 사맹(司猛) 사맹(司猛):조선 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정팔품의 군직(軍職). 관계상(官階上)으로는 승의부위(承義副尉)라 별칭되었다.
이오 자온(自溫)은 사직(司直)이오, 다음 자귀(自貴)이다. 치순(致順)은 외아들 종리(宗李)가 진무(進武) 진무부위(進武副尉):1436년(세종 18)에 설치된 정9품의 무산계. 1466년(세조 12)에 효력부위(效力副尉)로 고침.
이다. 치손(致孫)은 1남1녀니 아들 득중(得中)은 감찰(監察)이요, 사위 정이교(鄭以僑)는 한림(翰林)이다.
  증손 이하는 번성해서 다 기록할 수 없고, 단지 서원에 배향된 제현(諸賢)만 추록하니, 8세손 덕린(德麟)은 호 귀봉(龜峰)이요 문과(文科) 정랑(正郞)인데 회재(晦齋) 이(李)선생의 제자며 운곡서원에 모시었고, 9세손 복흥(復興)은 호 오모재(五慕齋)요 임란(壬亂)에 순절(殉節)하시어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충렬사(忠烈祠)에 모시었고, 사악(士諤)은 호 매와(梅窩)요 정랑(正郞)이며 증직 좌승지니 임란(壬亂)의 공신록(功臣錄)에 오르시고 호계사(虎溪祠)에 모시었고, 사민(士敏)은 호 매헌(梅軒)이요 사옹주부(司甕主簿)였고 증직 좌승지니 임란 공신록에 오르시고 정려가 내리고 옥연사(玉淵祠)에 모시었다.
  아! 공으로부터 지금까지 600년이 넘는 세월인데 옛 벼슬이 이렇게 화려했으니 한 나라에 명성을 남기면서 대대로 이어졌다 할 수 있으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니 그 훌륭한 행적과 가르침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 생졸년(生卒年)까지 없어졌으니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정조(正祖) 기해년(1779)에 13세손 용천공(龍泉公) 정현(鼎鉉)씨가 재사(齋舍)를 중건하는 데 성력(誠力)을 다했고, 그리고 병술년(1946)에 제손(諸孫)들이 회의를 해서 묘비의 돌을 준비해 놓고 후손인 숙영(肅永) · 용묵(容默) · 택중(澤中) · 오석(五錫) · 옥(沃) 등이 300리를 와서 나 충호(忠鎬)에게 비문을 부탁하니 나는 원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깊이 생각하니 나의 선조 부정공(副正公)이 공의 손서(孫壻)이니 그 정의로 굳이 사양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銘)을 쓴다.

燕院在城西二十里 寔公父子巾舃之藏也
(연원재성서이십리 식공부자건석지장야)
안동 서쪽 20리 제비원이 공의 부자(父子)의 묘역이다.

蔚乎喬木之世 又何蟬赫其簪纓也
(울호교목지세 우하선혁기잠영야)
화려한 명문세가에 또 높은 직위의 인물이 어이 이렇게 많았을까?

降六百餘載 所恨杞宋之無憑也
(강육백여재 소한기송지무빙야)
6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서 문적이 없어졌으니

匪直名跡之俱晦(비직명적지구회)
탄식이 되는 것은 명성과 업적뿐만이 아니라

從以生卒之莫詳也(종이생졸지막상야)
생졸년까지 알 수 없으나

迺竪高珉改舊床也(내수고민개구상야)
이렇게 높은 비석과 상석을 바꾸는 것은

微雲來不億其麗(미운래불억기려)
그 자손이 많지 않았다면

曷能使久翳而復章(갈능사구예이부장)
확실하지 않은 오래 된 일을 어찌 다시 밝힐 수 있었겠는가?

可驗夫深仁厚澤(가험부심인후택)
그 남기신 어진 음덕이 크기 때문에

有積于始而必報于終也(유적우시이필보우종야)
후손들에게 복이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綴蕪詞而揭崇阡 將有感于斯銘也
(철무사이게숭천 장유감우사명야)
큰 묘소에 부족한 글로 감회가 깊은 명(銘)을 써서 후세에 남기려한다.

  외후손(外後孫) 종사랑(從仕郞) 전 장릉참봉(章陵參奉) 진성(眞城) 이충호(李忠鎬) 이충호(李忠鎬):1872~1951. 진성인(眞城人), 자(字) 서경(恕卿), 호(號) 하정(霞汀), 거(居) 예안(禮安) 상계(上溪). 퇴계(退溪) 황(滉)의 13대 종손(宗孫), 중경(中慶)의 자(子)로 종족(從族) 만인(晩寅)의 문인이다.
는 삼가 찬(撰)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병술년(1946) 10월 일에 개수(改竪)하다.
  묘소는 안동군 북후면(北後面) 오산동(烏山洞) 연원(燕院) 잣밭골에 있다

 

十六世 문정공(文靖公) 諱 희정(希正)

좌윤공(佐尹公)의 6대 종손(宗孫)으로 희경공(僖敬公) 휘 용일(用一)의 아들이다. 관직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냈다. 감찰규정이란 고려 때 감찰사(監察司)에 딸린 종6품 벼슬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고친 이름인데 조선조의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같은 관직이다. 사후에 그 셋째아들 문경공(文景公) 좌의정 진(軫)이 귀히 됨에 따라 의정부 좌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판도총랑(版圖總郎) 김해부사(金海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고, 묘소는 안동시 남쪽 강정(江汀)의 고지동(高支洞)에 을향(乙向)으로 쌍분을 이루고 있다. 아들은 경산현령(慶山縣令) 곡(穀) ・ 감사(監司) 여도(輿道) ・ 좌의정 진(軫) ・ 현감 지(輊) ・ 현감 헌(軒) ・ 대사성 초(輜) ・ 현령 치(輜)가 있고 따님은 3녀가 각각 증 판서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 증 참판 이운후(李云侯:퇴계 이황李滉의 고조부) ・ 안동인(安東人) 김혁(金革:김조순金祖淳의 13대조)에게 출가했다. 공의 자녀 7남3녀가 모두 이와 같이 현달하니 오늘과 같이 좌윤공파의 문호(門戶)를 크게 번창시킨 것이 실로 공이 끼친 큰 덕으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자(長子) 경산현령(慶山縣令) 권곡(權轂)은 여섯째 동생 권초(權軺)와 함께 예천(醴泉) 대죽리(大竹里)로 이거(移居)하였는데 권초(權軺)의 손자 권산해(權山海)는 부정공파(副正公派)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사위가 되어 만년에 단종(端宗) 복위 실패로 자진(自盡)하였다. 셋째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은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 세종(世宗) 때 좌의정에까지 올랐고 만년에는 풍산(豐山) 상리(上里)에 복거(卜居)했다는 기록이 ?영가지(永嘉誌)?에 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에 있고 안동지방에 세거(世居)하는 후손이 없다.  넷째 권질(權軼)과 다섯째 권헌(權軒)은 예천 금곡(金谷)으로 이거하고, 안동에는 오직 막내 권치(權輜)의 후예 몇 집이 풍산 일대에 산거(散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외손들은 번창하여 안동 지방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였으니 권희정(權希正)의 사위는 첫째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둘째가 퇴계의 고조부 이운후(李云侯), 셋째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김계행(金係行):1431년(세종 13년) ~ 1521년(중종 16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에 모셔졌다.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의 조부 김혁(金革)으로 안동 지방에 세거하는 여러 씨족으로서 권희정(權希正)의 외손이 되지 않는 가문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 외손은 번창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권희정(權希正)의 아들 좌의정 권진(權軫)은 안동 김씨 전농정(典農正) 김득우(金得雨)의 사위가 되었고, 안동 김씨 김득우(金得雨)의 아들 김혁(金革)은 권희정(權希正)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이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諡文靖公墓碣銘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행감찰 시문정공 묘갈명

문정공 묘소
花之權이 盖出於太師氏而積德根基에 爲當時之最赫世簪纓이 實玆州之冠에 加之以先生子若孫의 黼黻弘獻則宜其文獻之表表可稱而惜乎라 年代浸遠하고 累經兵燹하야 功名事業과 生卒月日을 有不可强攷而只以年代之詳略으로 特爲序次하니 豈非記事者恨於後日也아 謹按하니 先生諱는 希正이요 姓은 權氏오 籍安東하니 其鼻祖는 高麗太師諱幸이오 十世諱至正은 佐尹이오 三傳至諱粹는 文科니 卽先生之曾祖也오 祖諱는 奕이니 文科오 贈吏叅이고 封永嘉君하고 考諱는 用一이니 門下侍中이오 贈左叅贊諡僖敬이니 先生贈官至左議政諡文靖三世追恩이 以先生之第三子軫之貴也라 貞敬夫人彦陽金氏는 府使可器之女니 有七男三女하니 男에 轂은 版圖正郞이오 輿道는 文監司오 軫은 文科左議政世子師傅오 號는 敬齋오 諡文景이오 輊는 縣監이니 以孝行으로 旌閭하고 軒은 縣監이오 軺는 文判事오 入本朝하야 拜大司成除北伯해도 皆不赴하고 號는 松臯요 輜는 縣令이오 以老職으로 陞通政하고 女에 裵尙志는 司僕寺事오 贈兵判이오 李云侯는 副正이오 金革은 文監司오 轂의 三男에 處中은 郞將이요 處庸은 牧使요 處和는 司直이요 軫의四男에 孟慶은兵使요 孟度는 郡守요 孟貞은 少尹이오 贈戶叅이요 七臨은文兵正이오 輊의四男에若中은 司直이오 若經이오 若衡이오 若枰은 進士요 軺의 一男寬은 經歷이오 輜는 三男하니 致和는司直이오 致順은 主簿요 致孫은 司直이라 以下分派之散이 在各處에 非不繁衍而歲久年深에 詳略不同하야 有不可枚錄而盖先生之道德文章이 載在國史家乘而世級漸下하야 遺蹟蕩失無由措其萬一하니 雖若可恨而先生衣履改厝之日에 松巖權先生好文이 祭之以文曰 惟公은 應鼻祖之後하야 鳴英廟之庭에 可補周袞이요 可調殷羹이라 臨民施澤이 春雨時榮이요 匡君糾愆이 秋霜夜橫이라 位足台鼎이요 手合均衡이라 赫世功勳이 照時儀刑이라 一片苔碑가 千古姓名이라하니 觀於此에 略可以仰想先生之遺風而他無可攷則後生이 何述가 藐余顓蒙은 忝在外裔之末하야 適守玆州에 佳覩百歲未遑之盛事하고 不覺斂袵而起敬焉이라 銘曰
  殷羹周袞之事業이요 春雨秋霜之氣像이라 一片苔碑之指點이 萬古姓名之瞻仰이라

  己卯月日에 嘉善大夫行安東都護府幷安東鎭兵事水軍僉節制使眞城李啓魯는 謹識하노라

화산(안동구호)의 권씨(權氏)는 원래 태사공(太師公)의 적덕(積德)한 기반(基盤)에서 시작되었고 의정공(議政公)이 당시에 높으신 관직(官職)이 이 고을에서 으뜸이시었으며 또 아들 손자들의 높은 벼슬을 했으니 당연히 문헌(文獻)에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일인데 애석(愛惜)하게도 세월이 오래되고 난리를 여러 번 겪으면서 공명(功名)과 사업(事業)과 생졸년(生卒年)을 참으로 상고(詳考)할 수도 없고 단지 대략적인 연대로 차례를 정할 수밖에 없으니 후일에 글을 쓰는 자신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諱)는 희정(希正)이요 성(姓)은 권씨(權氏)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하니 시조(始祖)는 고려태사(高麗太師) 휘(諱) 행(幸)이다. 10세 휘 지정(至正)은 좌윤(佐尹)이오 3대를 내려와서 휘 수(粹)는 문과(文科)니 바로 선생의 증조이시다. 할아버지 휘는 혁(奕)이니 문과(文科)오 증직 이조참판(吏曹參判)이고 영가군(永嘉君)으로 봉군(封君)되시었다. 아버지 휘는 용일(用一)이니 고려조(高麗朝) 문하시중(門下侍中)이오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다. 선생은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시다. 3대의 증직이 선생의 셋째 아드님 진(軫)의 관직(官職)에 따라 추증(追贈)된 것이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는 부사(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시니 7남3녀를 기르시었다. 아들 곡(轂)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오, 여도(輿道)는 문과감사(文科監司)오, 진(軫)은 문과(文科) 좌의정(左議政) 세자사부(世子師傅)인데 호는 경재(敬齋)요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지(輊)는 현감(縣監)이니 효행(孝行)이 있어서 정려(旌閭)가 내렸고, 헌(軒)은 현감이오, 초(軺)는 문과판사(文科判事)였다. 조선(朝鮮)이 되어서 대사성(大司成)과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었고 호는 송고(松臯)라 했다. 치(輜)는 현령(縣令)이오, 원로(元老)의 예우(禮遇)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사위는 사복시사(司僕寺事)며 증직 병조참판(兵曹參判)인 배상지(裵尙志)와, 부정(副正)인 이운후(李云侯)와, 문과감사(文科監司)인 김혁(金革)이다. 곡(轂)은 아들이 셋인데, 처중(處中)은 낭장(郞將)이요, 처용(處庸)은 목사(牧使)요, 처화(處和)는 사직(司直)이다. 진(軫)은 아들이 넷인데, 맹경(孟慶)은 병사(兵使)요, 맹도(孟度)는 군수(郡守)요, 맹정(孟貞)은 소윤(少尹)이며 증직 호조참판(戶曹叅判)이요, 칠림(七臨)은 문과(文科) 병조정랑(兵曹正郞)이오, 지(輊)는 아들이 넷인데, 약중(若中)은 사직(司直)이오, 다음 약경(若經)이오, 다음 약형(若衡)이오, 다음 약평(若枰)은 진사(進士)이다. 초(軺)의 아들 관(寬)은 독자(獨子)며 관직은 경력(經歷)이다. 치(輜)는 아들이 셋인데, 치화(致和)는 사직(司直)이오, 치순(致順)은 주부(主簿)요, 치손(致孫)은 사직(司直)이다. 이하는 파(派)가 나뉘어져 각처에 살고 있는데, 모두가 번성(繁盛)하고 세월이 오래되었고 상황이 다 같을 수 없어 모두를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의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이 대체로 국사(國史)와 가승(家乘)에 실려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이 분실되어 만분(萬分)의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니 비록 한(恨)이 되지만 선생의 묘소를 개축(改築)할 때에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권호문(權好文):1532(중종 27)∼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아버지는 안주교수(安州敎授) 권륙(權稑),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조카딸이다.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권문해(權文海), 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관물당(觀物堂)에서 일생을 마쳤다. 문집에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선생이 제문(祭文)에 쓰기를 “공은 시조의 뒤를 이어 영조(英祖)의 조정을 울렸으니 주(周)나라를 도운 곤직원로(袞職元老)와 같았고 은(殷)나라에 화갱(和羹)을 한 부열(傅說)과 같아서 백성에게는 봄비 같은 은택을 베풀었고 임금님에게 과오(過誤)를 바로잡은 것은 가을밤 서리가 비낀 것같이 엄격했다. 지위는 정승(政丞)이 되기에 충분했고 재주는 균형(均衡)에 부합(符合(하여 세상에 공적(功績)과 훈업(勳業)이 나타나고 그 시대의 모습이 조명되어 한 면의 비석(碑石)에 천고(千古)의 성명(姓名)이 전해진다”고 했으니 이 글을 읽어 보면 선생이 남기신 풍교(風敎)를 대략 우러러 상상할 수 있으니 더 고증(考證)할 수 없는 후생(後生)이 무었을 더 서술(敍述)하겠는가? 부족하고 우매(愚昧)한 자신이 누가 되게 외손의 처지로 이 고을 원님으로 왔다가 백대가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아름답고 성대한 일을 구경하면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쓴다.

  殷羹周袞之事業(은갱주곤지사업)
  은(殷)나라 부열(傅說) 같고 주(周)나라 주공(周公)같은 업적(業績)이요,

  春雨秋霜之氣像(춘우추상지기상)
  봄비 같고 가을 서리 같은 기상(氣像)이시다.

  一片苔碑之指點(일편태비지지점)
  한 조각 이끼 푸른 비(碑)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萬古姓名之瞻仰(만고성명지첨앙)
  만고(萬古)의 명성(名聲)을 우러러 볼 수 있다.
 
  기묘년(1879) 월 일에 가선대부 행(行) 안동도호부 병(幷) 안동진병사수군첨절제사 진성(眞城) 이계로(李啓魯) 이계로(李啓魯):1828(순조 28, 무자)-1886(고종 23, 병술). 본관 진성(眞城). 자는 성건(聖建). 호는 석림(石林).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했으며, 1852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후 권점(圈點)을 받아 청요직(淸要職)에 올랐으며,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문집에 ?석림집(石林集)?이 있다.
는 삼가 기록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안동군 정하2동 강정(江汀) 고지동(高支洞)에 있다


十七世 송고공(松臯公) 諱 초(軺)
호는 송고(松臯)이다. 개령공(開寧公) 지(輊)의 아우로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의 여섯째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제용감(濟用監)의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누차 부름을 받아 함경도 관찰사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백씨(伯氏) 경산공(慶山公) 곡(穀)과 매부(妹夫)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와 더불어 이르기를, “나라의 종묘사직이 이미 옮겨갔으니 우리는 마땅히 은둔할 뿐이다[신기기이(神器旣移) 아배당둔(我輩當遯)]”고 한탄하고는 드디어 경북 예천(醴泉) 땅의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 아래 대죽리(大竹里)로 들어가 병거(屛居)하니 그 산 이름을 고쳐 이르기를 고려조(高麗朝)의 서울 송도(松都)를 생각한다는 뜻의 염송산(念松山)으로 불렀다. 또한 스스로 호를 일컬어 송고(松臯)라 하였는데 이는 개경(開京) 송도(松都)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공이 비록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 여생을 전야(田野)에 묻고 마쳤으나 관찰사와 대사성과 같은 큰 관직도 초개(草芥)같이 버리고 기절(氣節)을 지킨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수절신(守節臣) 중의 한 사람이다. 공이 살던 마을 이름을 지금껏 절동(節洞)라 하는 것 또한 절개를 지키는 동네라는 뜻이니 그 유래가 우연이 아니다. 묘소는 경북 예천 용궁의 염송산 절동에 유좌(酉坐)로 있으며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춘천 박씨(春川朴氏) 중현대부(中顯大夫) 광우(光佑)의 따님인데 건위(乾位) 뒤에 부장(祔葬)되어 있고 비갈(碑碣)이 있다. 아들은 사직(司直)과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을 지낸 관(寬)이 있고 공의 장손(長孫)은 죽림공(竹林公) 산해(山海)이다.

    高麗判事松臯公墓碣銘
    고려판사 송고공 묘갈명
公은 系出安東하니 太師諱幸이 其鼻祖也라 曾祖諱奕은 贈吏叅永嘉君이요 祖諱用一은 贈左叅贊諡僖敬이요 考諱希正은 贈左議政諡文靖이라 公이 麗朝에 登第하야 官至判事하고 及我朝受禪에 慨然語栢竹裵公尙志曰宗社已墟에 我輩安適하고 遂挈家浮洛에 屛居于念松山하니 譜牒에 曰 除北伯에 不赴하고 又仕版載以大司成云하니 竊念公이 以前朝世臣으로 志全罔僕하야 累召不起하고 遺戒子孫하야 不錄其官하니 噫라 公之言行志節이 必有可傳於來世者而公之孫諱山海가 殉於六臣之禍하야 盡灰遺事未彰하니 至今遺憾云爾라
  崇禎紀元後四乙酉四月日
  十一世孫迪運은 謹識하노라

공은 안동권씨니 태사(太師) 휘 행(幸)이 시조(始祖)이시다. 증조 휘 혁(奕)은 증직 이조참판(吏曹叅判)이며 영가군(永嘉君)이요, 할아버지 휘 용일(用一)은 증직 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요, 아버지 휘 희정(希正)은 증직 좌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공이 고려조(高麗朝)에 급제해서 관직이 판사(判事)에 이르렀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공과 탄식(歎息)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라가 터만 남았으니 우리는 어디로 갈고” 라고 말씀하시고 드디어 식구들을 데리고 낙동강을 따라 염송산(念松山) 아래에 은거해 사시었다 보첩(譜牒)에는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또 벼슬아치 명부(名簿)인 사판(仕版)에 대사성(大司成)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공이 고려(高麗)의 구신(舊臣)으로 망복(罔僕)의 뜻을 지키려고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그 관직을 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아! 공의 언행(言行)과 지절(志節)이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일이었으나 공의 손자인 휘 산해(山海)가 육신(六臣)의 화(禍)로 순직(殉職)하면서 모두가 소실(燒失)되어 업적(業績)이 나타나지 못하니 지금까지 한(恨)이 될 뿐이다.
  순조 25년 을유년(1825) 4월 일에 11세손 적운(迪運)은 삼가 기록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예천군 지보면(知保面) 대죽리(大竹里) 절동(節洞) 염송산(念松山)에 있다


    麗末忠義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墓碣銘幷序
    여말 충의 문과 판제용감사 송고선생 권공 묘갈명 병서


송고선생 묘소
龍宮念松山節洞之麓坐酉之原 有崇三尺者 麗末忠義松臯先生權公衣履之藏也 距今六百餘載 墓域陵夷 儀物蕭條 而數尺短碣之碑陰 太簡而略 且歲久磨滅 字畫難分 不億之孫 不勝憂懼 將擬修治墓域爲營改碣 以備儀物之全 齊會而殫誠發議 衆論歸一 使寧夏赫根赫光赫性君 造余而請銘 余雖不文 事同一室 且公與鄙先祖思復齋公 同朝節臣 世分有別 故終不能孤 謹按 公諱軺 姓權氏 系出安東 始祖諱幸 本新羅宗姓 佐麗祖 討甄萱 以炳幾達權 賜姓權 拜大相太師 遂采邑于安東 陞郡爲府 遺民思公德義 立太師廟妥享 又士林公議 享雲谷院 至十世諱至正佐尹 是爲派祖 生諱世位樞密院副使 生諱良俊別將副正行兵曹正郎 生諱粹文科 生諱奕文科中門祗候 贈吏參 追封永嘉君 生諱用一門下侍中 贈左參贊 諡俙敬公 生諱希正監察糾正 贈左議政 諡文靖公 三世推贈 皆公之三子左議政諡文景諱軫之貴也 是公父祖以上七世世德 妣曰贈貞敬夫人彦陽金氏府使可器之女 公卽六子也 生卒與字 佚而無傳 譜牒祇載麗朝文科判濟用監事 入本朝 除北伯 又除大司成 皆不就 與伯兄版圖公諱轂 姊兄栢竹堂裵公諱尙志嘆曰 神器旣移 我輩當遯 遂屛居于龍宮濂松山下大竹里 更名其山曰念松山 自號松臯云 餘無可考之徵 而于以自靖卒世 後人名其洞曰節洞 墓已見上 配曰淑夫人春川朴氏中顯大夫光佑之女 墓祔前 育一男 曰寬義禁府經歷 經歷有六男二女 男長曰山海宗簿寺僉正 景泰丙子禍 投閣自盡 與六臣同殉 旌閭 累贈至大冢宰 諡忠愍公 享雲谷魯峯兩院 次自海察訪 次福海 次壽海司正 次德海 次得海 女適李堯丁縣監 適權守經武科 山海男哲祖 哲宗 哲命別提 哲孫判官 女適鄭蘭元縣監 壽海男孝忠司直 敬忠 達忠 義忠 哲祖男稱 哲命男經生員 綸敎授 純參奉 綬直長 哲孫男敏 保功部將 孝忠男命錘 命均 命銓 敬忠男潤祖 秀祖 潤身 達忠男邦彦 義忠男潤衡 餘不錄 於乎 公以七世之蟬聯赤舃 申之以七弟兄之偉風大德 宜有文獻之斑斑可考 而竟沈湮無傳者 推想公長孫忠愍公 以景泰禍 削奪官爵 家餘烈徙邊 而百年禁錮之故 有以致此 便作杞宋之嘆 吁亦可恨然 至今行路之過公墓域 趍蹌而指點公墓域曰 忠義權公之墓也 公之德 有何加損於文獻之存不存哉 憲祖 生於公六百餘年之後 而且淺劣蒙昧 縱欲贊美 力量之所不及也 亦恐犯穢佛之嫌 不能陳所感 摭其譜牒及舊碑陰 略修上系及子孫錄 系之以銘曰
世有令聞 鐵步相傳 淵源家學 得之于天 德重學邃 早陞桂籍 志操堅確 忠心介石 累除不赴 守貞韜光 首陽節赫 翠薇風長 莫嘆杞宋 口碑不息 我銘非諛 行路必式
  黃鼠林鍾月上澣 宗後孫 權憲祖 謹撰

용궁(龍宮) 염송산 절동(節洞) 산기슭 유좌(酉坐) 터에 큰 묘소가 있으니 고려말에 충의를 지키신 송고(松臯) 권선생이 잠드신 곳이다. 육백 년이 넘는 지금에 봉분이 무너지고 간단한 석물로 짧고 작은 비석에 간단한 비음기문(碑陰記文)이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많은 자손들이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 금할 수 없어서 앞으로 묘역을 정비하고 개갈(改碣)해서 묘역의 의장(儀裝)을 꾸미려고 하는데 자손 모두가 뜻을 같이 해서 일을 하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영하(寧夏) ・ 혁근(赫根) ・ 혁광(赫光) ・ 혁성(赫性) 군을 시켜서 나에게 와서 비문을 지어달라고 하니 내 비록 학문이 부족하지만 내 문중의 일과 다를 것이 없고 또 공과 나의 선조인 사복재(思復齋) 공은 같은 왕조에 같은 절의를 지키신 분이어서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삼가 사적을 고증하니 공의 휘는 초(軺), 성은 권씨(權氏),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시조의 휘는 행(幸)이시고 원래 신라종성(新羅宗姓)이시다.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벌할 때에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다는 의미로 권씨 성과 대상(大相)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리시고 안동을 식읍으로 주시면서 안동을 부(府)로 승격시키니 안동 백성들이 태사공의 음덕(蔭德)과 대의(大義)를 사모하면서 태사묘(太師廟)를 지어서 제사를 올리고 또 사림의 공의로 운곡서원을 세우게 되었고 십세(十世)인 휘 지정(至正)에 이르러 좌윤(佐尹)을 하셨으니 이 분이 파조(派祖)시다. 이 분의 아들 세위(世位)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시며 아들의 휘는 양준(良俊)이며 별장부정(別將副正) 행병조정랑(行兵曹正郎)이며 이 분의 아들 휘는 수(粹)니 문과(文科)급제하시었고 이 분의 아들 휘 혁(奕)은 문과급제하시어 중문지후(中門祗候)가 되시었고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시었다. 이 분의 아들 휘 용일(用一)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증직(贈職) 좌참찬(左參贊)이시고 시호(諡號)는 희경(俙敬)이시고 그 아들 휘 희정(希正)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며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다. 삼대의 증직은 다 공의 삼자(三子)인 좌의정(左議政) 시호 문경(文景) 휘 진(軫)의 직위에 따른 것이다. 이상이 공의 아버지로부터 칠대의 덕이 이어진 것이다. 비(妣)는 증직(贈職)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부사(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시다. 공은 제육자(第六子)로서 생졸년(生卒年)이나 자(字)도 전해지지 못하고 보첩(譜牒)에는 단지 고려조에 문과(文科)급제하신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이며 조선조에서 함경도 감사를 제수하고 또 대사성을 제수했으나 두 직위를 다 사양하시고 백형인 판도공(版圖公) 휘 곡(轂)과  자형(姊兄)인 백죽당(栢竹堂) 배공(裵公) 휘 상지(尙志)와 더불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왕조가 바뀌었으니 우리들은 당연히 은둔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고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 아래 대죽리(大竹里)에 낙향해서 살면서 산은 염송산(念松山)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인의 자호(自號)를 송고(松臯)라고 했다“고 되어있고 그 이상은 더 고증할 수 없다. 이렇게 종용(從容)하게 사시다가 세상을 뜨시니 후인들이 그 마을을 절동(節洞)이라 했고 묘지는 위에 이미 기록이 되어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춘천박씨(春川朴氏) 중현대부(中顯大夫) 광우(光佑)의 따님이시다. 묘는 앞에 부장(祔葬)되어있다.
  아들이 독자(獨子)인데, 휘 관(寬)이며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이시다. 이 분의 아들은 육남이녀(六男二女)를 두셨는데, 장남 산해(山海)는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인데 경태(景泰)년간에 단종 손위 사건 때에 지붕위에서 투신 자진하시어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순직(殉職)을 하시어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여러 차례 증직으로 이조판서에 오르시었고 시호(諡號)는 충민(忠愍)이며 운곡(雲谷) ・ 노봉(魯峯) 두 서원에 모시었다. 차남인 자해(自海)는 찰방(察訪)이며 셋째아들은 복해(福海), 넷째아들 수해(壽海)는 사정(司正)이다. 다섯째아들은 덕해(德海), 여섯째아들은 득해(得海)다. 사위는 현감(縣監) 이요정(李堯丁)과 무과(武科) 권수경(權守經)이다. 산해(山海)의 아들은 철조(哲祖)와 철종(哲宗)과 별제(別提)인 철명(哲命)과 판관(判官)인 철손(哲孫)이며 사위는 현감(縣監)인 정난원(鄭蘭元)이다. 수해(壽海)의 아들은 사직(司直)인 효충(孝忠)과 경충(敬忠)과 달충(達忠)과 의충(義忠)이다. 철조(哲祖)의 아들은 칭(稱)이며 철명(哲命)의 아들 경(經)은 생원(生員)이며 윤(綸)은 교수(敎授)이고 순(純)은 참봉(參奉)이고 수(綬)는 직장(直長)이다. 철손(哲孫)의 아들 민(敏)은 보공부장(保功部將)이다. 효충(孝忠)의 아들은 명추(命錘)와 명균(命均)과 명전(命銓)이다. 경충(敬忠)의 아들은 윤조(潤祖)와 수조(秀祖)와 윤신(潤身)이다. 달충(達忠)의 아들은 방언(邦彦)이다. 의충(義忠)의 아들은 윤형(潤衡)이다. 더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일곱 세대 동안 관직을 이어온 후손이시며 또 일곱 형제의 맏이로서 거룩한 풍채와 큰 덕망이 있으시어 당연히 아름다운 문헌을 남기시어 상고(詳考)할 것이 있을 것인데, 끝까지 사라져서 전하지 못한 것은 미루어 생각하면 공의 장손(長孫) 충민공(忠愍公)이 단종 손위 때에 삭탈관작(削奪官爵) 당하고 온 식구가 사변(徙邊)되고 백년금고(百年禁錮)를 받았기 때문에 없어졌을 것이니 참으로 기송지탄(杞宋之嘆)을 하게 되었다.
  아! 이것이 또 한스럽다. 하지만 지금 길을 가는 나그네도 공의 묘역을 지나다가 머뭇거리면서 공의 묘를 가리키면서 충의를 지킨 권공의 묘소라고 하니 공의 덕(德)이 문헌이 있다고 해서 이보다 더 나타날 수 있겠는가? 나는 공(公)보다 육백여 년 후에 태어났고, 또 용렬하고 우매해서 공의 미덕을 찬양하고 싶으나 능력이 부족하고 또 잘못된 말로 누를 끼칠까 염려가 되어 생각대로 다 쓰지 못하고 족보와 옛 비문을 근거해서 이상과 같이 대략 선계(先系)와 자손(子孫)을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쓴다.

  世有令聞(세유령문)
  대대로 명성이 있었고
  鐵步相傳(철보상전)
  위대한 업적 이어진 것은
  淵源家學(연원가학)
  가학의 근원을
  得之于天(득지우천)
  하늘이 내려준 것이어서
  德重學邃(덕중학수)
  덕망과 학문으로
  早陞桂籍(조승계적)
  일찍이 벼슬길에 으르시어
  志操堅確(지조견확)
  지조가 확고하고
  忠心介石(충심개석)
  충성심이 반석같이 굳으시어
  累除不赴(루제불부)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고
  守貞韜光(수정도광)
  은거해서 절의 지키시니
  首陽節赫(수양절혁)
  백이숙제 같은 절의가 빛나고
  翠薇風長(취미풍장)
  채미(採薇)의 기풍이 길었습니다.
  莫嘆杞宋(막탄기송)
  증거 없다 한탄하지 마십시오.
  口碑不息(구비불식)
  칭송이 끝없이 입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我銘非諛(아명비유)
  내가 지나친 칭찬으로 명을 쓴 것이 아 니 라
  行路必式(행로필식)
  길가는 사람들도 경의를 표합니다.

  무자년(2008) 6월 상한 종후손 권헌조 근찬.  <국역:권기갑(權奇甲)>


    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遺墟碑銘幷序
    문과 판제용감사 송고선생 권공 유허비명 병서
先生 以勝國卓節 繼以長孫忠愍公竹林先生魯陵之禍患 忠愍公夫人權氏 恐有後患 家藏書籍一無所餘 盡燒無痕 又子孫徙邊 禁錮百年 近數百年 零替棲屑 文獻蕩佚 無傳 至於先生墓道之顯刻 太甚蕭條 歲久磨滅 字畫難分 而又未知誰之所撰 積世累擬改碣 世故因仍 竟未果焉 數年前 賢仍殫誠合謀 崇碑改碣 又當日守靖斂晦之地 尙無遺墟之表德 繼以爲竪碑之策 余聞風而起敬嘆嘗 思欲往賀 月餘前 寧夏君 踵門而請銘 顧余不文僭撰墓銘 實所愧赧 况重此謬託 無或乎不思之太甚乎 累累辭之 寧夏君 起以復之曰 世非無秉管君子 然門父老 使余請于族兄者 亦有所以然也 松臯先祖 與貴先祖思復齋先生 同節義 故鄙派門議 欲乞於同宗同節義後孫者 如合一辭少無鑿枘之不貳 願族兄 愼勿固辭 其請益勤 辭不獲已 謹按 先生諱軺 姓權氏 系出安東 始祖諱幸 本新羅宗姓 敬順王時 佐麗太祖討甄 三重大匡亞父功臣 拜大相太師 以炳幾達權 賜姓權 遂食采于安東 子孫因以爲貫 享太師廟雲谷院 至十世諱至正佐尹是爲派祖 生諱世位樞密院副事 生諱良俊兵曹正郎 生諱粹文科 生諱奕文科中門祗候 贈吏參 追封永嘉君 生諱用一門下侍中 贈左參贊 諡俙敬公 生諱希正監察糾正 贈左議政 諡文靖公 寔先生之皇考 三世推榮 皆三子左議政諡文敬公諱軫之貴也 妣曰 贈貞敬夫人彦陽金氏 金海府使可器之女 先生之生卒與字 累經患亂 盡佚無傳 麗季文判濟用監事 麗鼎訖 守僕之義 國初 除北伯大司成 皆不就 與伯兄版圖公諱轂 姊兄栢竹堂先生裵公諱尙志 嘆曰 神器旣移 我輩當遯 遂斂晦于龍宮濂松山下大竹里 改山名濂松山爲念松 自號松臯 于以卒世 時人稱其洞曰節洞 壽藏于節洞山負酉原 於乎 先生之忠義 徜徉薖軸之所 六百餘年 枵然作寂寞之地 今始闡發 顯晦之待時也 亦賢仍善述之誠也 孰不曰有是祖而有是孫也哉 憲祖 以先生之宗後孫 追思鄙先祖同節義之誼 則宜當詳悉贊美乎先生之事蹟 識淺而且訥於辭 縱不能及焉 然昭載於譜牒 亦不輟於輿誦 復何敢架疊也哉 祇敍遺墟豎碑之由 系之以銘曰
鐵石之竪 松竹之貞 累徵不就 斂晦韜名 首陽孤標 翠薇風節 有孫忠愍 丕承其烈 歲經六百 尤光其德 恨無棹楔 天意莫測 當日逍遙 餘香不沫 行路指點 古今不輟 孰使然也 彛衷不革 我銘斯石 以表其蹟
    己丑仲春下澣 宗後孫權憲祖 謹撰

선생은 고려조(高麗朝)에 높은 절의를 지키신 분이고 계속해서 장손 충민공(忠愍公) 죽림선생(竹林先生)이 단종(端宗) 손위(遜位)의 화를 입어서 충민공(忠愍公)의 부인(夫人) 권씨(權氏)께서 후환(後患)이 두려워서 집에 있던 모든 서적(書籍)을 다 불태워 없앴고 또 자손(子孫)들이 사변(徙邊) 당하고 백년금고(百年禁錮)를 겪으면서 거의 몇 백 년을 한미(寒微)하게 살면서 기록이 없어졌고 선생의 묘소 비문(碑文)마저 매우 내용이 소략(疏略)하고 오래되어 작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으니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비석을 새로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세상이 불안해서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훌륭한 자손들이 정성을 쏟고 뜻을 모아 큰 비석을 다시 세웠으나 선생이 당시에 은거하시던 곳에 아직까지 덕망을 기리는 유허비가 없어서 잇달아 비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으니 내가 그 소문을 듣고 존경스럽고 감탄하는 마음으로 가서 하례(賀禮)하고 싶었는데, 한 달 전에 영하군(寧夏君)이 내 집을 찾아와서 비명(碑銘)을 청하니 내가 자신을 돌아보면 부족한 글로 묘비명을 지은 것도 참람해서 매우 부끄러운 처지인데, 하물며 이렇게 큰일을 부탁하는 것은 사람을 잘못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일이어서 누누이 사양했으나 영하군(寧夏君)이 다시 말하기를 “세상에 비문을 쓸 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중의 부로(父老)들이 나를 시켜서 족형에 부탁한 것은 그럴만한 연유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송고(松臯) 선조는 귀(貴) 선조 사복재(思復齋) 선생과 같이 절의(節義)를 지키시었기 때문에 비파(鄙派)의 문중 의논이 같은 절의를 지키신 분의 후손에게 글을 받고 싶다고 하나같이 말하고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족형은 사양하지 말라”고 간청하니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었다.
  삼가 살펴하니 선생의 휘는 초(軺)요 성은 권씨(權氏)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시조(始祖)의 휘는 행(幸)이니 원래 신라왕(新羅王)과 같은 성(姓)이었다. 경순왕(敬順王) 때에 고려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벌하고 삼중대광아보공신(三重大匡亞父功臣)이 되시고 대상(大相) 태사(太師)의 벼슬을 받았으며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했다는 의미로 권씨 성과 안동을 식읍으로 받고 따라서 자손이 안동을 관향으로 하고 태사묘와 운곡서원에 모시게 되었으며 십세(十世) 휘(諱) 지정(至正)이 좌윤(佐尹) 벼슬을 하시고 이 분이 파조(派祖)시다. 파조의 아들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事)며 이 분의 아들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郎)이며 이 분의 아들 휘 수(粹)가 문과급제하시고 아들 휘(諱) 혁(奕)도 문과급제하고 중문지후(中門祗候)였으며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시었다. 이 분의 아들 휘(諱)는 용일(用一)이며 고려관직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 좌참찬(左參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俙敬)이시다. 아들 휘 희정(希正)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며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신데 이 분이 선생의 아버지시고 삼세(三世)의 증직은 다 제삼자(第三子) 좌의정(左議政) 시호 문경(文敬)이신 휘(諱) 진(軫)의 벼슬에 따라 받은 것이다. 어머님은 증직(贈職)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며 김해부사(金海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시다. 선생의 생졸년(生卒年)과 자(字)는 환란(患亂)을 겪으면서 전해지지 못했다. 고려말년에 문과(文科)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를 역임하시고 고려왕조가 끝났으나 고려조에 대한 충성심을 잊을 수 없어서 조선조에서 함경도 감사와 대사성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으시고 백형인 판도공(版圖公) 휘(諱) 곡(轂)과 자형(姊兄)인 백죽당(栢竹堂) 배선생(裵先生) 휘(諱) 상지(尙志)와 탄식을 하고 “나라가 없어졌으니 우리들은 당연히 숨어서 살아야 한다”고 하고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 아래 대죽리(大竹里)에 살면서 염송산(濂松山)을 염송산(念松山)으로 부르고 자호(自號)을 송고(松臯)라 하고 생을 마치시니 사람들이 그 동명을 절동(節洞)이라 불렀다. 묘는 절동산 유좌(酉坐)터다. 아! 선생이 충의(忠義)를 지키시며 유유히 생활하시던 곳이 육백년(六百年)이 넘도록 적막하고 쓸쓸하게 있다가 이제 와서 처음으로 자취를 찾아 들어나게 하니 숨겨지고 드러나는 것이 때가 있는 것이지만 어진 후손들의 정성을 보면 그 훌륭한 조상에 훌륭한 자손이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선생의 종후손(宗後孫)으로서 나의 선조와 같은 절의를 지켰다는 족의(族誼)를 미루어 생각하면 당연히 선생의 아름다운 업적을 자세히 천양해야 하지만 식견이 없고 글재주가 서툴러서 부족함이 많다. 하지만 보첩(譜牒)에 소상하게 실려 있는 내용을 길가는 사람들도 칭송하고 있으니 다시 감히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유허비(遺墟碑)의 연유(緣由)를 서술하고 잇달아 명을 쓴다.

  鐵石之堅(철석지견)
  철석같은 굳은 의지와
  松竹之貞(송죽지정)
  송죽 같은 충의의 신조로
  累徵不就(누징불취)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斂晦韜名(염회도명)
  은둔생활 하셨으니
  首陽孤標(수양고표)
  백이숙제 같은 높은 표상으로
  翠薇風節(취미풍절)
  고사리 캐먹은 기풍을 가지시었고
  有孫忠愍(유손충민)
  손자인 충민공은
  丕承其烈(비승기열)
  선대의 장렬한 뜻을 크게 이으시어서
  歲經六百(세경육백)
  육백년 세월이 지났으나
  尤光其德(우광기덕)
  그 아름다운 음덕이 더욱 빛나네.
  恨無棹楔(한무도설)
  정려가 없는 것을 한을 했으니
  天意莫測(천의막측)
  하늘의 뜻을 알 수 없었다.
  當日逍遙(당일소요)
  그 때에 유유자적하시던 곳
  餘香不沫(여향불말)
  그 향기 사라지지 않아서
  行路指點(행로지점)
  길가는 사람들도 그 곳을 가리키며
  古今不輟(고금불철)
  지금까지도 칭송이 이어지니
  孰使然也(숙사연야)
  어째서 그러할까?
  彛衷不革(이충불혁)
  사람의 도덕심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我銘斯石(아명사석)
  나는 이 비에 명을 새겨서
  以表其蹟(이표기적)
  그 유적을 알린다.
  기축년(2009) 2월 하한에 종후손 권헌조는 근찬이라.  <국역:권기갑(權奇甲)>


十八世 경력공(經歷公) 諱 관(寬)

조산대부(朝散大夫)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에 이르고 무산계(武散階) 사직(司直)을 받았다. 배위 김해최씨(金海崔氏)는 현감 중운(仲雲)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염송산(念松山) 선고(先考) 묘소 아래 경좌(庚坐) 연분(連墳)이며 부인이 앞이다.


    司直行朝散大夫義禁府經歷權公墓碣銘幷序
公卽松臯之肖胤竹林之賢父也 像想其當時 則宜有可傳之文獻 湮沒而六百餘年寂廖無聞者 非徒賢仍之所齎恨 遠近同宗之所嗟嘆者 久矣 數月前 賢仍純國珠赫寧大容鎬君 踵門而道余曰 松臯先祖及經歷先祖兩世墓所 俱在念松山下節洞之陽同原上下 墓域歲久頹圯
경력공 묘소
 短碣蘚苔 將加修葺 同時改碣爲計 各處散在孱孫 齊誠合謀 方今就事之境 門父老 使不敏四人 請銘于宗長 願宗長俾惠一言銘之 余應之曰 顧余不文 僭撰松臯公碣文 愧不自勝重託是銘 無或乎不思之甚乎 不堪當是役而且事蹟無所影響莫知將何辭 故累累辭之 四君起而復之曰 經歷先祖之事蹟 若有所徵而孱孫之家狀亦備 則請之于他門 實所非難也 一無考據 捨族兄 則無所可乞矣 請益勤 辭不獲已 謹按 公諱寬 字號佚而無傳 姓權氏 安東人 麗末忠義 文判濟用監事 松臯公諱軺之無妹獨子也 妣曰淑夫人春川朴氏 中顯大夫光佑之女 公之生卒 無所可考 官司直行朝散大夫義禁府經歷 墓松臯公墓下負甲原 配曰淑人金海崔氏縣監仲雲之女 墓祔前 上系及子孫錄 詳載先公碣文 不必煩惱加疊矣 於乎 自古名賢事蹟 有美而潛藏 久莫顯者 或因患難而蕩佚者 或因後孫之零替而無傳者 終乃莫顯其眞 卽古人所謂杞宋之嘆者 誠是也 雖然 推想公 則累世冠冕文獻忠義之門 必不無懿蹟 而盖緣長胤忠愍公忠烈之禍家餘烈 有以致此 然 公之後孫蕃衍昌熾 忠孝節烈 文章德行 繼繼承承 菀爲南鄕之盛族 苟非公修德之餘蔭 烏能有是乎 易之所云 積善之家必有餘慶者 豈非公家之謂歟 乃公六百餘年 幽潛之德 今始闡發者 顯晦之有時也 又賢仍善繼述之至誠所致也 蒼天不老而報善之道 誠無訝矣 與其無實而傳會荀章忝辱於地下祖先萬世之靈者 孰若循理而以待公議之闡明乎 余 於公 抑有私焉 鄙先祖思復齋公 與先公 同節義 故兩家之誼 不比尋常同宗 而世講有別矣 今余粗率爲公此役 感慨無量矣 妄以不韙之辭 表揭于阡曰
爲祖而修其德 貽厥嘉猷爲計 後孫樹其實者也 爲孫而盡其誠 承其祖武 闡發先徽 善繼述者也 名門授受之有道 愈久而愈光者也 蒼天報善之有理 必永必昌者也 窈窕竹陽之原 松楸之鬱鬱蒼蒼 君子之攸藏者也 戒以樵牧之勿毁勿傷 永保遺香之無疆者也
  戊子流火節 宗後孫權憲祖 謹撰 義城后人金徹壎 謹書 司正公判官公門中 謹竪

공은 바로 송고공(松臯公)의 아드님이시고 죽림공(竹林公)의 훌륭한 아버지시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전할 가치가 있는 문헌이 있었을 것이지만 600년 동안 숨겨져서 전혀 알려지지 못한 것은 그 자손만이 원통했을 뿐이 아니고 멀거나 가까운 우리 종친들도 같이 탄식한 일이었다. 몇 달 전에 훌륭한 자손 순국(純國) ・ 주혁(珠赫) ・ 영대(寧大) ・ 용호(容鎬) 네 분이 내 집을 찾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송고(松臯)선조와 경력(經歷)선조 양대(兩代)의 묘소가 염송산 아래 절동(節洞) 양지에 아래위로 같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서 봉분이 무너지고 작은 비석에 이끼가 붙어서 봉분도 새로 쌓고 비석도 새로 세울 계획을 하고 각처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이 같은 생각으로 정성을 모아 지금 일을 시작하면서 문중의 어르신들이 불민(不敏)한 저희들 넷을 시켜서 족친께 비명(碑銘)을 청하게 되었으니 어른께서는 한편 명을 지어 주십시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나 자신을 반성해보면 글을 쓸 재능이 못되어 참람하게 송고선생의 비문을 쓴 것도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는데, 거듭 이 분의 명(銘)을 지어달라고 하니 아마도 생각을 매우 잘못한 것이 아닌가? 이 일은 감당할 수 없고 또 이 분의 사적(事蹟)에 영향을 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하고 몇 번이나 사양을 했으나 네 분이 다시 말하기를 “만약에 경력선조의 사적을 고증할 수 있고 저희들의 가장(家狀)이 갖추어져 있다면 타문(他門)에 가서 비문을 부탁하는 것도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고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족친이 아니면 누구에게 가서 글을 받겠습니까?” 하면서 더욱 간청(懇請)하니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는 관(寬)이며 자(字)와 호(號)는 기록으로 전해지지 못했고 성은 권씨며 안동이 본관이시다. 고려 말에 가문의 충의와 자신의 학문과 인품이 있었으며 판제용감사를 역임하신 송고선생의 무매독자(無妹獨子)시고 어머니는 숙부인 춘천박씨 중현대부 광우(光佑)의 따님이시다. 공의 생졸년은 고증할 수 없다. 관직은 사직(司直) 행조산대부(行朝散大夫) 경력(經歷)이시다. 묘소는 송고선생 묘아래 갑좌(甲坐) 터다. 배위는 숙인 김해최씨며 현감 중운(仲雲)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건위(乾位) 묘소 앞에 있다. 선대와 자손의 기록은 윗대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거듭 쓸 필요가 없다.
  아! 예로부터 명현(名賢)의 사적이 훌륭했으나 숨겨져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못한 경우는 환란을 겪으면서 자료가 없어졌거나 자손이 한미(寒微)해서 전해지지 못해서 끝까지 밝힐 수 없는 것을 고인(古人)들이 말하기를 ‘기송지탄(杞宋之嘆)’이라 한 것은 참으로 이러한 경우를 지칭한 말이다.
  하지만 공의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여러 대를 관직을 지내시고 문한(文翰)과 충의(忠義)의 가문이어서 반드시 아름다운 업적이 있었을 것인데, 아마도 그 분의 맏아들 충민공(忠愍公)의 충의로 가문이 화(禍)를 당한 연유로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자손이 번성하고 충효와 절의와 공렬(功烈)과 문장과 덕행이 대대로 이어져서 경주(慶州)의 훌륭한 문벌(門閥)이 되었으니 참으로 공이 남기신 음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적선(積善)한 가문에 경사(慶事)가 있다”고 했으니 공의 가문이 그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600년이 지난 지금 숨겨져 있던 음덕의 사실이 처음으로 현창(顯彰)하게 되었으니 숨겨진 음덕이 나타나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또 훌륭한 자손들이 선대(先代)의 뜻을 잘 계승해서 지극 정성으로 이루진 일이니 하늘의 이치가 변함이 없어서 착한 자에게 복을 내리는 일은 참으로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근거가 확실하지 못한 내용으로 구차(苟且)한 말을 더 붙이면 지하에 계시는 만세(萬世)의 존령(尊靈)께 누(累)가 될 것이다. 누가 공에게 순리대로 공론에 따라 공의 덕행을 천양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공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나의 사복재(思復齋) 선조께서 공과 같은 절의를 지키시어 두 가문의 정의는 여타 종중에 비해서 특별하게 이어져왔으니 지금 내가 간단하게 이 글을 쓰는 것이 감개무량하니 망령되고 그릇되지 않은 말로 무덤길에 명(銘)을 높이 매단다.

  爲祖而修其德 貽厥嘉猷爲計 後孫樹其實者也
  (위조이수기덕 이궐가유위계 후손수기실자야)
  조상은 덕을 쌓아 자손에게 좋은 가르침을 남기셨고 후손은 그 사실대로 비를 세웠다.

  爲孫而盡其誠 承其祖武 闡發先徽 善繼述者也
  (위손이진기성 승기조무 천발선휘 선계술자야)
  자손은 정성을 다하여 조상의 뒤를 이어 선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밝혔으니 잘 잇고 이었다.

  名門授受之有道 愈久而愈光者也
  (名門授受之有道 유구이유광자야)
  이름난 가문이 주고받음에 이치가 있어서 오래 될수록 더욱 빛나는 일이다.

  蒼天報善之有理 必永必昌者也
  (창천보선지유리 필영필창자야)
  하늘은 선(善)을 복(福)으로 보답하는 이치가 있어서 오래될수록 반드시 번창하는 것이다.

  窈窕竹陽之原 松楸之鬱鬱蒼蒼 君子之攸藏者也
  (요조죽양지원 송추지울울창창 군자지유장자야)
  아름다운 대죽리(大竹里) 남쪽의 산에 나무들이 울창하니 그 곳은 군자가 잠드신 곳이다.

  戒以樵牧之勿毁勿傷 永保遺香之無疆者也
  (계이초목지물훼물상 영보유향지무강자야)
  초동(樵童)과 목동(牧童)에게 부탁하노니 그 나무 베지도 말고 상처주지도 말아서 남기신 향기를 영원토록 끝없이 보존해야 할 것이다.

  무자년(2008) 음력7월 종후손 권헌조(權憲祖) 삼가 짓고, 의성(義城)후인 김철훈(金徹壎) 삼가 쓰고, 사정공・판관공문중 삼가 세우다.  <국역:권기갑(權奇甲)>


十九世 죽림공(竹林公) 諱 산해(山海)

태종 3년 계미년(1403)에 태어나 세조 2년 병자년(1456)에 작고(作故)하였다. 조선 전기의 의인(義人)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덕보(德甫)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의 증손으로 경력(經歷) 관(寬)의 아들이다. 처부(妻父)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이다. 어려서 종조부(從祖父) 우의정(右議政) 진(軫) 권진(權軫):1357(공민왕 6)-1435(세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독수와. 아버지는 감찰규정 희정(希正)이다. 1377년(우왕 3)에 문과에 급제했다. 1401년(태종 1) 지형조사에 이어 우사간대부를 지내고, 1406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에 형조·호조·이조판서를 지냈고, 1426년(세종 8) 찬성이 되었으며,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 1433년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을 때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문경이다.
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종(文宗)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 현덕왕후(顯德王后):1418년(태종 18)-1441년(세종 23).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비.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권전(權專)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 세자궁에 선임되어 승휘(承徽)에 올랐다. 1433년경 양원(良媛)에 진봉되었다. 1437년 종부시소윤 봉려(奉礪)의 딸 순빈(純嬪)이 부덕하여 폐빈된 뒤 세자빈이 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총애를 받았다. 1441년 원손(元孫 : 뒤의 단종)을 출생하고 3일 뒤에 죽었다. 같은 해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의 이모부(姨母夫)로 세종 22년 1440년에 창덕궁녹사(昌德宮錄事) ․ 주부(主簿)에 천거(薦擧)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과 사귀었다. 단종 2년 1454년에 어린 왕을 도우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올랐으나, 1455년 단종의 손위(遜位) 이후로는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찰방(察訪)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있다가,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斬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정조 13년 기유년(1789)에 관직이 추복(追復)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으며, 경주(慶州) 운곡서원(雲谷書院) ․ 예천(禮泉)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예천(醴泉) 대죽리(大竹里) 현 지보면(知保面) 신풍리(新豊里)에 살았다.

자는 덕보(德甫)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다. 문정공 휘 희정(希正)의 증손으로 송고공(松臯公) 대사성(大司成) 초(軺)의 손자요 경력(經歷) 관(寬)의 6남 가운데 장남이다. 태종(太宗) 3년 계미년(1403)에 예천 용궁구읍(龍宮舊邑)의 대죽리(大竹里)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강의(剛毅)하고 몸가짐이 견확(堅確)하였는데 일찍이 그 종조부인 좌의정 문경공(文景公) 진(軫)에게 가서 공부하면서 ?사기(史記)?를 읽다가 「백이전(伯夷傳)」에 이르자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 있은 연후(然後)에 가히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이 부지(扶持)되었구나” 하니 문경공이 웃으면서 기특하게 여겼다. 공은 이같이 특출한 자질로 학업이 날로 성취되어 장래가 크게 촉망되었는데 관례(冠禮)를 올리기에 이르러서는 부정공파(副正公派)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집에서 수실(授室)을 하여 그 사위가 되었다. 그런데 세종 13년 신해년(1431)에 공의 나이 29세 때인데 화산부원군의 제3녀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니 이로부터 왕세자인 문종(文宗)의 손윗동서의 척분(戚分)이 된 공은 세인(世人)의 지목을 꺼려 마침내 일체의 과거에 나가는 것을 페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22년 경신년(1440)에는 38세로서 녹사(錄事)와 주부(主簿) 등의 벼슬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 문종이 등극하고 다시 그 2년 임신년(1452)에 대신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및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등이 유조(遺詔)를 받아 이질(姨姪)인 단종(端宗)을 받들어 보좌하게 될 때에도 출사(出仕)를 아니하고 재야(在野)에 있다가 단종 2년 갑술년(1454)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제수되어 마침내 사직(辭職)하지 아니하고 받으니 이때 공의 나이 52세였다. 그러나 이듬해 을해년(1455)에 단종이 손위(遜位)되어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고 세조(世祖)가 박팽년(朴彭年) ・ 하위지(河緯地) ・ 성삼문(成三問) 등 3학사(學士)를 맨 먼저 발탁하여 이배(移拜)시키고 공에게는 찰방(察訪)의 직을 주어 나가게 하니 이를 받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스스로 하늘에 서약하고 복침음읍(伏枕飮泣)하였다. 그러다가 세조 2년 병자년(1456)에 단종을 복위하려던 성삼문 등의 모사(謀事)가 누설되어 화란(禍亂)이 닥쳐 일어나자 공이 탄식하여 마지않기를, “하늘이 돕지 않는구나. 내 홀로 살아서 무엇을 하리오. 살아서 능히 사직을 광구(匪救)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서 선왕(先王)께 보은(報恩)하는 수밖에 없구나” 하고는 조복(朝服)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누각(樓閣)에 올라 북향(北向)하여 머리를 조아려 사배(四拜)를 한 다음에 드디어 투각(投閣)하여 자진(自盡)하니 이때 연세 54세였다. 한편 세조의 조정에서는 공을 나치(拿致)하려는 사자(使者)가 파견되어 내려왔으나 공이 이미 숨을 거둔 뒤였고 또한 부인이 소장된 서적을 모두 불살라 없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남지 않았으므로 죄벌이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공의 성명(姓名)이 모의(謀議)한 사람들의 당적(黨籍)에 들어 있다고 하여 가족이 변경(邊境)으로 이사하여 금고(禁錮)를 당하는 형에 해당되었다. 그 아우 사정(司正) 수해(壽海)와 여러 아들이 시신을 수렴(收斂)하여 예천 용궁(龍宮) 구읍(舊邑) 염송산(念松山)의 선영 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고장(藁葬)하였다. 그 뒤로 명종 11년 병진년(1556)에 100년 만에 공의 죄가 탕척(蕩滌)되었고 2년 뒤 무오년(1558)에 손자 경(經)이 나이 73세로서 그 계자(系子)인 증손 응성(應星)과 더불어 해금되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자 그때까지 인멸(湮滅)되고 묻혀 있던 공의 사적(事蹟)을 추기(追記)하여 가승(家乘)을 만들고 징사(徵士) 단곡(丹谷) 곽진(郭)이 그 묘소에 지문(誌文)을 지어 묻었다. 정조 9년 을사년(1785)에는 경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시조 태사공의 곁에 배향(配享)되었고 다시 정조 13년 기유년(1789)에 신원(伸冤)되어 관직이 추복되었다. 또 정조 15년 신해년(1791)에는 공의 충절이 사육신(死六臣)과 다르지 않다는 이유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충신이 난 그 마을을 정표(旌表)하여 정충각(旌忠閣)을 내렸다. 고종 21년 갑신년(1884)에는 이조 판서로 가증(加贈)되고 고종 38년 신축년(1901)에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려 사당을 모시고 기신제(忌辰祭)를 받들게 되었다. 다시 신유년(1921)에는 예천의 호명면(虎鳴面) 내신동(內新洞)에 공을 모시는 노봉서원(魯峰書院)이 세워졌다.
  공의 문집이나 유고는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아니하나 유사(遺事)와 실기(實記)가 있으며 사적이 ?용궁읍지(龍宮邑誌)?와 ?장릉지(莊陵誌)? ・ ?명현록(名賢錄)? 등에 등재되어 있다.
  공의 신도비문은 통사랑(通仕郎) 이한응(李漢膺)이 짓고 행장(行狀)은 박기녕(朴箕寧)이 지었으며 비문은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지었다. 판윤(判尹) 이헌경(李獻慶)이 공의 전기 「죽림절사전(竹林節士傳)」을 짓고 판돈녕(判敦寧) 이민보(李敏輔)가 복관시(復官時)의 묘소에 올리는 분황고묘문(焚黃告墓文)을 지었다. 정충각 상량문(上樑文)은 판서 목만중(睦萬重)이 짓고 기문(記文)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홍양호(洪良浩)와 문숙공(文肅公) 안정복(安鼎福)이 썼다. 공의 배위는 증 정부인 영가권씨(永嘉權氏)로서 증 영의정 화산부원군 경혜공(景惠公) 전(專)의 제1녀인데 그 제3녀가 곧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이다. 묘소는 현재 지명으로 경북 예천군 용궁면 대죽동(大竹洞)의 절골[節洞] 염송산(念松山) 아래에 유좌(酉坐)로 있고, 배위는 그 앞에 있다. 아들은 철조(哲祖) ・ 철종(哲宗) ・ 별제(別提) 철명(哲命) ・ 판관(判官) 철손(哲孫)이 있고 딸은 1녀로 현감 정난원(鄭蘭元)에게 출가하였다. <권오훈(權五焄) 찬(撰)>


    ?장릉지(莊陵誌)? 「열전(列傳)」 발췌(拔萃)
權山海 字德甫 號竹林 文景公軫之從孫 權自愼之姊壻 官至宗簿寺僉正 天資剛毅 操履堅確 幼時 侍文景公 讀吏記 至伯夷傳 三復太息曰 有是人然後 可以扶萬古綱常 逮夫端廟遜位 常懷一死之心 累除職不就 丙子 成三問等被收 山海仰天歎曰 此實天也 遂投閣自盡 追削官爵 今上己酉 復爵 辛亥贈吏參 旌其門

권산해(權山海)의 자는 덕보(德甫)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며 문경공(文景公) 진(軫)의 종손(從孫)으로 권자신(權自愼)의 매부(妹夫)인데 관직은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이르렀다. 타고난 자질이 강의(剛毅)하고 몸가짐과 실행이 견확(堅確)하였는데 어릴 때 문경공한테서 배우면서 ?사기(史記)?를 읽다가 「백이전(伯夷傳)」에 이르러서는 세 번 거듭 크게 탄식을 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 있은 연후에야 가히 만고의 강상(綱常)이 부지(扶持)되었구나” 하였다. 단종이 손위(遜位) 당함에 이르러서는 항상 한번 죽을 결심을 품고 누차 관직에 제수되어도 나가지 않다가 병자년(1456)에 성삼문(成三門) 등이 피수(被收)되자 산해(山海)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이는 실로 하늘의 일이로다” 하고 드디어 누각(樓閣)에서 투신(投身)하여 자진(自盡)하니 관작이 추가로 삭탈(削奪)되었다. 정조 기유년(1789)에 관작이 회복되고 신해년(1791)에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정문(旌門)이 하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사
1403(태종 3)∼1456(세조 2). 조선 전기(前期)의 의인(義人).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440년(세종 22)에 천거되어 녹사·주부가 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454년(단종 2)에 처음으로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었다.
  1455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못 이겨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세조(世祖)가 조정에 나올 것을 종용(慫慂)하였으나 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건에 가담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하다 끝내 자결(自決)하고 말았다.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자손들도 백 년 동안 벼슬길이 막혔다.
  1789년(정조 13) 신원복관((伸寃復官)되고 1791년(정조 15) 이조참판, 1885년(고종 2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예천 노봉서원(魯峯書院)에서 봉향하며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되었다.


    竹林公行狀
    죽림공 행장
先生 諱山海 字德甫 永嘉人 我端宗大王時 三朝遺臣也 權氏 始於麗太師諱幸 樹勳德 錫土姓 其後 史不絶書 五世祖 中門祇候諱奕 贈吏參永嘉君 高祖 門下侍郎 諱用一 贈左參贊 諡僖敬 曾祖 監察 諱希正 贈左議政 諡文靖 三世有本朝之封贈爵諡 以叔祖文景公 諱軫之大拜也 祖文判事 諱軺 入國朝 除北伯及大司成 皆不起 隱於竺城之濂松山 大竹里 名其山日 念松山 號松臯 忠孝之傳 有自來也 考諱寬 經歷 妣金海崔氏 縣監仲雲女 是生公卽永樂癸未也 及冠 授室于權景惠公專之家 世宗辛亥 冊權專第三女爲世子嬪 卽顯德王后也 自是遂廢擧 至庚申 除錄事主簿 不應命 文宗壬申 大臣金宗瑞 皇甫仁 及集賢殿學士 朴彭年成三問等 受遺詔輔少主 瑞宗二年甲成 拜公爲宗簿寺僉正 乃不辭而就職 乙亥 上王遜位 光廟首擢三學士 官之移拜公水衡 不肅而歸杜門自誓 伏枕飮泣 及丙子 事泄而禍作 公歎日 天也 獨生何爲 生不能匡救社稷 寧死而歸報先王 與家人訣 以朝衣冠 登樓北望 稽首四拜 遂投閣 自盡 使者至 公已死 夫人 又收所藏書籍 火之 無所驗 罪止削奪 然猶書姓名於黨籍 徙邊禁錮 公之弟 司正公壽海 與諸孤斂屍 藁葬於念松山 負酉原 明宗丙辰 始蕩滌 越戊午孫經 年七十三 與曾孫應星 中司馬 乃敢追記事蹟 爲家乘 而古徵士 丹谷郭公 誌其壙 按公 天稟剛毅 持守甚確 自髫齔 志尙已不苟 嘗讀吏 至伯夷傳 三復太息曰 斯人也扶萬古之綱常 文景公 笑而心異之 平居無事 雖恂恂不自異 至邪正是非之辨 截然壁立 每喜論古今名節 未嘗不扼腕慷慨 若身履其地 與鄕人處 見其不是 若將浼焉 於人少許可 惟與權忠莊公自愼 及梅竹醉琴諸公 交好最密 自號竹林居士 避世遠嫌 翛然若高蹈長往 自二十九 不事公車者十年 晩入薦剡 不屑從宦者 又十餘年 及其就仕也 時則 金忠翼 皇甫忠定公 已死 許貞簡公詡 又縊殺於謫所 不待丙子 而六臣之禍 將次第矣 先生乃奮然祗職曰 吾以未報於先王者 欲少效今日 與集賢舊臣 日事徵逐 相得益甚 其心炳然可想 而事乃有大謬者 嗚呼 六臣之死 其跡著故 其名彰 先生之死 其跡晦故其名隱 所以有顯晦之殊 然斯義也 不敢公傳道之者 百有餘年 自肅廟始復陵號 許六臣立祠 而逮我英祖正考拜釋幽寃 寵之以爵諡 獨公湮滅於無聞 歲己酉 後孫宗洛上言嗚寃 以事遠無証 從大臣言 探得罪籍於刑部 還給職牒 於是 魯陵遺臣 有竹林公矣 辛亥 上命設壇於越中仙寢隮食 丙子 諸臣 畿湖嶺之士 宋文箕等 二千餘人上言 請一體崇報 議下廟堂 如沈頤之 李在簡 李坤諸公 迭相陳啓 廷議僉同 繼而樊庵蔡公濟恭 獻議曰 權山海之墜閣自盡事蹟雖未彰著 觀於徙邊禁錮則 與六臣 宜無異同 特命復官 可樹風百世 而適當莊陵立殣諸臣 設壇崇報之日則 多士之請 恐不爲過 上允之 贈吏曹參判 兼如例旌其閭曰 旌忠閣 宣敎之日 南州婦孺 無不惑泣流涕 而是日也 自祀庭有光燭天 若彩虹然者 移時乃止 觀者皆曰 先生不死云 此蓋公遺事之始末也 嗚呼 公以剛大之氣 兼通悟之識 兒時讀傳之日 已有激昻底意 卒之盡節 自樹扶持 得萬古綱常 其聞伯夷之風者乎 然竊嘗論之 魯陵之臣 有死六生六之稱 死固義也 生亦義也 惟義所在 其盡忠一也 若以是而觀於先生出處則 世族耳 后戚耳 其富與貴 圖所自有 而問其官則 乃主簿僉正也 又嘗自處以秋江梅月 天放江湖之逸跡 雖全身遠害 宜無所不可 而顧乃見危授命 殺身成仁 如此若先生 可謂擧一世 特立獨行 而不顧者矣 蓋其自靖之志 固已默定於天人 去就之際 與六臣諸公 生則俱生 死則俱死 而特先後異耳 公之就死也 若使金吾之命 少在於危樓拱北之前 其將含笑就捕 入於王廷 脫至尊有問 必至死 不變玉坻之碎 露梁之達 公必樂爲之也 又情 先後顯晦之足論乎 要之 丙子諸臣 樹立甚卓 固不可以慷慨 殺身 槪之 而若吾先生則 又與從容取義 而兼焉 後之君子 其必有知 祈尙論者矣 但其平日 踐履問學之實 當必有可傳者 而泯泯然 無所尋逐 此爲可慨也已 雖然 觀於其所成就 而素所蘊蓄 猶可證嚮 苟非 存養之工密取舍之分明 惡能若是乎 先儒云 忠魂烈魄 鬱而不散 迬迬有靈恠之跡 今於竹里焚誥時 虹異之蹟 益不誣矣 無乃公鬱而不散之氣 殄滅而不得 烈烈于霄 而自露其光 恠耶 吁亦異矣 事載龍宮邑誌 自太學 首發俎豆之論 可見秉彛 公議之所同 而正廟乙巳 隮享於慶州雲谷 然而太常之議 祠壇之配 尙有曠典 此或有待而然邪 夫人同贈貞夫人 生四子一女 哲祖 哲宗無嗣而夭 哲命別提 哲孫判官 女適縣監鄭蘭元 哲命子經生員 綸 純 緩 哲孫子敏 綸子應星進士 純子應箕 應參生員 應精進士 敏子舜卿 玄孫以下 多不盡錄 略記節行科宦則 潔散階 潫生員 號野逸 値昏朝 薦授參奉 改玉後 還輸職牒 良直長 寧部將 平參奉 五世孫復始 僉正 號九思 入火旺倡義錄 復興 壬辰殉節 與妻柳氏 同旌忠烈 後享丹溪社 敏中生員 六世孫鎣 遊寒旅二先生門 以進士 萬濟文縣監 七世孫鼎老 生員 達國 文正郎 八世孫鉉 生員 如龜峰公德麟 季氏司正公 玄孫也 與公竝享 子孫散居 慶州順興 及醴泉 今至數百人 嗚呼 判大節於禪受之際者 得保有後承 難矣 而丹書旣暴 雲仍甚繁 天之報施 至此而果驗矣 日公之諸孫 强屬余遺狀 不佞於先生風節 蓋嘗艶慕 而累欷者 遂不敢辭 而撰次如右 以俟後之君子焉 咸陽 朴箕寧 謹撰

선생의 휘는 산해(山海)이고 자는 덕보(德甫)이며 영가(永嘉)가 본관인 사람으로서 우리 단종대왕 때에 세 왕조를 섬긴 유신(遺臣)이다. 권씨는 고려 태사 휘 행(幸)이 훈덕(勳德)을 세우고 토지와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부터 비롯하여 그 후로 사서(史書)에 오르고 후손의 이름이 끊이지를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5세조는 중문지후(中門祗候) 위 혁(奕)으로서 증 이조참판에 영가군(永嘉君)으로 봉군되고 고조부 문하시랑(門下侍郎) 휘 용일(用一)은 증 좌참찬에 희경(僖敬)의 시호를 받았다. 증조부는 감찰(監察)로서 휘가 희정(希正)인데 증 좌의정에 문정(文靖)의 시호를 받았다. 이같이 3대가 본조(本朝)에 들어와 증작(贈爵)과 시호를 받은 것은 공의 숙조부(叔祖父)인 문경공(文景公) 진(軫)이 정승의 벼슬을 배수 받음으로써 말미암은 것이었다. 선생의 조부는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判事)에 오른 휘 치(輜)인데 조선조에 들어와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또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고 경북 예천군 용궁면의 염송산(濂松山) 대죽리(大竹里)에 은거하면서 그 산 이름을 염송산(念松山)이라 하고 아호(雅號)를 송고(松臯)라 하니 충효의 전통이 이로부터 비롯된 바 있었다. 선고(先考)는 휘가 관(寬)으로서 경력(經歷)을 지내고 선비(先妣)는 김해최씨(金海崔氏)로서 현감 중운(仲雲)의 따님인데 곧 태종 3년 계미년(1403)에 공을 낳았다.
  관자(冠者)가 되기에 이르러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딸을 실인(室人)으로 맞이하였는데 세종(世宗) 신해년(1431)에 권전(權專)의 제3녀가 세자빈으로 책봉되니 곧 이 이가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이로부터 공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폐하고 경신년(1440)에 이르러서는 녹사(錄事)와 주부(主簿)로 제수되었으나 소명(召命)에 응하여 나가지 아니하였다. 문종 임신년(1452)에 대신(大臣)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 및 집현전(集賢殿) 학사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등이 선왕(先王) 문종(文宗)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는데 단종 2년 갑술년(1454)에 공을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배수하니 사임을 아니하고 직에 나아갔다.
  을해년(1455)에 상왕(上王) 단종이 손위(遜位)하니 세조가 삼학사(三學士) 삼학사(三學士):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세 사람을 지칭한 것이다.
를 먼저 발탁하여 관직을 높이고 공은 찰방(察訪)으로 이배(移拜)시키니 이에 숙배(肅拜)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스스로 세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면서 베개에 엎드려 눈물을 삼켰다. 그러다가 병자년(1456)에 이르러 일이 누설되어 큰 화가 일어나자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천운이로다. 내 홀로 살아 무엇을 하리오. 살아서 능히 사직(社稷)을 광구(匡救)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서 선왕께 돌아가 보답하리라” 하고는 집안사람들과 영결하고 조복(朝服)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려 사배(四拜)를 한 다음 드디어 투각(投閣)하여 자진(自盡)하였다.
  사자(使者)가 이르렀을 때에는 공이 이미 사망하였고 부인이 또한 소장하고 있던 서적류(書籍類)를 거두어 모두 태워버렸으므로 징험할 것이 남지 않은지라 죄가 삭탈관작을 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당적(黨籍)에 그 성명이 들어 있다고 하여 그 유족이 변경으로 이사하여 금고(禁錮)에 처해지는 벌을 받게 되었다. 공의 아우 사정공(司正公) 수해(壽海)가 공의 여러 아들과 더불어 시신을 염습하여 염송산의 유좌(酉坐) 언덕에 임시로 장사를 하였는데 명종 병진년(1556)에 비로소 공의 죄가 탕척(蕩滌)되고 다음 무오년(l558)에 손자 경(經)이 나이 73세로 증손 응성(應星)과 더불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서는 인하여 감히 공의 사적(事蹟)을 추기(追記)하여 가승(家乘)을 만들고 벗 징사(徵士) 징사(徵士):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부르나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은사이다.
 단곡(丹谷) 곽진(郭) 공이 그 광중(壙中)의 지문(誌文)을 썼다.
  살피건대 공은 타고난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지니고 지키는 것이 심히 확고하였는데 어린 나이에서부터 뜻이 숭고하여 구차스러움이 없었다. 일찍이 ?사기(史記)?를 읽다가 「백이전(伯夷傳)」에 이르러서는 세 차례 거듭 크게 탄식을 하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하였구나”하니 문경공(文景公)이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아무 일이 없이 평거(平居)할 때에는 비록 공손하고 온화하여 스스로 유별난 면이 없었으나 삿된 것과 바른 것의 시비를 가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절연(截然)히 벽립(壁立)하여 서서 흔들림이 없었으며 매양 고금의 이름난 절개를 논하기를 즐겨하고 그럴 때에는 미상불 팔을 걷어붙이고 강개하여 마치 몸이 지금 그 처지에 있는 것과 같이 하였으며 향리의 사람들과 대처함에 있어서도 그 옳지 못한 것을 보면 그것이 자기 몸에 물들 것같이 싫어하였다.
  남과 더불어 마음을 허하고 지내는 일이 드물었는데 오직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과 매죽(梅竹) 성삼문(成三問) ・ 취금(醉琴) 박팽년(朴彭年) 등 제공(諸公)과 교호(交好)하기를 가장 친밀히 하며 죽림거사(竹林居士)라 자호(自號)하고 세상의 혐의를 멀리 피해 소연(翛然)하기가 마치 높이 날아 멀리 가는 큰 새와 같이 지냈다. 29세 때로부터 과거를 보는 일을 그만둔 것이 10년이었는데 만년(晩年)에 향당(鄕黨)에서 은일(隱逸)의 인재로 추천해 올리는 데에 들어 있으되 벼슬을 즐겨 아니하여 나가지 않은 것이 또한 10년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가 곧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와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이 이미 죽고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가 또한 적소(謫所)에서 액살(縊殺)을 당하는 화란의 때였는데 곧이어 병자년(1456)에는 육신(六臣:사육신)의 화가 차례로 닥쳐왔다.
  이러한 때에 선생은 자기가 해야 할 직무를 오로지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선왕(先王)께 보답을 못한 것을 오늘 그 조금이나마 갚아야겠다” 하고는 집현전(集賢殿)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날마다 일을 도모하여 추진하더니 서로 얻고 돕는 바가 더욱 깊어진지라 그 마음이 병연(炳然)히 밝게 드러나 가히 상상할 수가 있는데도 뒤에 그로 말미암은 일이 크게 잘못된 것이 있게 되었다. 오호라, 육신이 죽은 것은 그 발자취가 드러난 고로 그 이름이 창현(彰顯)되고 선생의 죽음은 그 흔적이 감추어진 고로 그 이름이 은일(隱逸)되니 이것이 바로 드러남과 어둡게 숨겨진 것의 다름에서 말미암은 소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의리로 볼 때에 감히 공변되이 전하고 말하지 못해온 것이 백여 년이나 되었다가 숙종 때로부터 비로소 단종의 능호(陵號)가 추복되고 육신에게 사당을 세울 것이 허락되었으며 우리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에 이르러서는 그 오래 쌍인 유원(幽寃)을 풀어 주고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총을 입기에 이르렀는데 유독 공만이 인멸되어 알려짐이 없었다. 이에 정조 13년 기유년(1789)에 후손 종락(宗洛)이 상소를 올려 신원(伸寃)해 줄 것을 호소하니 일이 너무 멀고 증거가 없는지라 대신들의 진언을 좇아 형조(刑曹)의 죄적(罪籍)을 수탐(搜探)하여 그 근거를 얻어낸 다음 그 직첩(職牒)을 되돌려 지급하기에 이르니 이에 노릉(魯陵:단종)의 유신(遺臣)에 죽림공이 있게 된 것이다. 정조 15년 신해년(1791)에 상께서 명하여 영월(寧越) 단종(端宗) 능침 경내(境內)에 단(壇)을 베풀고 단종의 제사에 배향(配享)해 주도록 하였다.
  병자년(1816)에는 조정의 여러 신하와 기호(畿湖)와 영남의 선비 송문기(宋文箕) 등 2천여 인이 상소를 올려 사육신과 일체로써 숭보(崇報)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묘당(廟堂:의정부)에 내려 의논케 하니 심이지(沈頤之)와 이재간(李在簡) ・ 이곤(李坤) 제공과 같은 이가 서로 번갈아 진계(陳啓)하여 올려 조정의 의론이 모두 한 가지로 일치하였다. 여기에 잇따라 번암(樊庵) 채제공(蔡濟恭) 공이 헌의(獻議)하여 이르기를, “권산해가 누각에서 추락하여 자진한 일의 사적은 비록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유족이 변경으로 이주되어 금고(禁錮)에 처해진 것을 본다면 육신과 더불어 의당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특별히 명하여 관작을 추복시켜 백세(百世)의 풍교(風敎)를 세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리고 마침 단종을 위해 의로운 죽음으로 충절을 세운 여러 신하들에게 단소(壇所)를 베풀고 숭보한 날을 맞이하였으니 여러 선비들의 청하는 바가 지나친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니 상께서 이를 윤허하여 이조 참판을 추증하고 겸하여 다른 신하들의 예와 같이 그 마을에 정표(旌表)를 내려 이르기를 정충각(旌忠閣)이라 하였다. 교지(敎旨)가 선포되는 날 영남 고을의 부유(婦孺)들에 이르기까지도 감읍(感泣)하여 눈물을 홀리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 날에 사당의 뜨락으로부터 빛이 발생하여 하늘을 밝히는데 그것이 마치 무지갯빛과 같으면서 한참 시각이 지난 다음에야 없어지니 보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이 죽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이상이 대개 공의 유사(遺事)의 시말이다.
  오호라, 공은 굳세고도 큰 기개로써 통오(通悟)한 지식을 겸했는데 아이 때에 전(傳)을 읽던 날 이미 격앙(激昂)한 뜻을 보인 바 있었고 충절을 다함으로써 삶을 마쳐 스스로 부지(扶持)함을 수립하고 만고의 강상(綱常)을 얻기에 이르렀으니 그 소문이 백이(伯夷) 백이(伯夷)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것에 반대하여 산속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으면서 주(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다가 끝내 굶어 죽은 사람이다.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
의 풍모와 같게 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논하여 보건대 노릉(魯陵)의 신하로서 사육신과 생육신(生六臣)의 칭호가 있거니와 죽은 것도 본래 의리에서요 산 것 또한 의리에서이며 오로지 그 의리가 소재한 곳에서 충성을 다한 것은 한 가지이니 만약 이로써 선생을 관찰한다면 그 태어나 처한 것이 세족(世族)의 집안이고 왕후의 인척이며 그 부와 귀가 본디부터 타고난 바인데 그 관직이 이른 것을 물어본다면 겨우 주부(主簿)와 첨정(僉正)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일찍이 추강(秋江)과 매월(梅月)로써 자처하여 자연 그대로를 즐기면서 강호(江湖)에 그 자취를 숨기다가 비록 위해(危害)로부터 멀리 있어 몸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이 마땅히 없지 않음에도 돌아보고는 위태로운 일을 보고 목숨을 내놓아 몸을 죽여 어진 것을 이루었으니 이와 같기가 선생과 같은 이라면 가히 일컬어 한 세상에 특별히 서서 홀로 행동을 하되 일신을 돌보지 않은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그 스스로를 조용히 다스린 뜻은 본디부터 하늘과 사람의 도리로써 묵정(默定)하였던 바이니 거취를 하는 계제에 있어서도 사육신의 제공과 더불어 살아서는 모두 함께 살고 죽음에 있어서도 다 같이 행동하였으되 특히 앞서고 뒤선 것이 다를 뿐이다. 공이 죽음을 취함에 있어서 만약 의금부(義禁府)의 명이 조금 빨라서 공이 위태로운 누각에 올라가 북향을 하여 두 손을 맞잡기 전에 와 닿아 웃음을 머금고 체포되어 왕정(王廷)에 끌려 들어가 지존의 국문을 받게 하였더라면 공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러서도 섬돌에서 옥(玉)같이 부셔져 노량진(露梁津)에 묻히는 것을 즐겨 택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또한 어찌하여 앞섬과 뒤섬과 드러남과 가려짐을 가지고 족히 논할 것이 있으리오.
  요컨대 병자년(1456)에 여러 신하들이 심히 탁월하게 수립(樹立)한 것이 진실로 불가한 일에 대하여 비분강개함으로써 살신(殺身)한 것이지만 개략하여 우리 선생으로 볼 것 같으면 또한 종용(從容)한 가운데 의리를 취하면서도 이를 겸하였으니 후일에 군자가 이를 반드시 아는 이가 있어 높이 기려 논하게 될 것이다. 단지 공이 평일에 행의로 실천하고 학문을 한 사실 가운데 반드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있었을 터인데 모두가 민멸(泯滅)되어 추적하여 찾아낼 길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가히 개탄하여 마지않을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그 성취한 바와 평소에 온축(蘊蓄)하였던 바를 살펴 볼진대는 오히려 징험하고 지향할 바가 있으니 진실로 함양하여 지니는 공부를 쌓고 취사(取舍)를 분명히 함에 정밀하지 아니하였던들 어찌 능히 이와 같았을 수가 있었을 것인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충성스런 혼과 열렬한 넋은 울울히 맺혀 흩어지지 않는다” 하였는데 왕왕 영험스럽고도 괴이한 행적이 일어난 바 있거니와 지금의 대죽리(大竹里)에서 임금의 교지를 불사를 때에 무지개의 이적(異蹟)이 일어났으니 더욱 속이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오히려 공의 울울히 쌓여 흩어지지 않는 기운이 다 없애려 하여도 그와 같이 되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열렬히 살아 스스로 그 빛을 발로한 것이니 괴이하고도 이 또한 별다른 일이 아니겠는가? 그 사적이 ?용궁읍지(龍宮邑誌)?에 실리게 되자 성균관으로부터 먼저 제향을 받드는 의논이 일어났으니 가히 이륜(彛倫)을 바로잡는 공변된 의론이 한 가지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조 을사년(1785)에 경주(慶州)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시호를 의론하여 내리게 하는 봉상시(奉常寺)의 의론과 사단(祠壇)을 세워 제향을 받드는 일이 아직도 의전을 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혹시 다른 특별한 기회를 기다림이 있어 그러한 것인가?
  부인은 한 가지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4남1녀를 생육하여 철조(哲祖)와 철종(哲宗)은 후사가 없이 일찍 죽었고 철명(哲命)은 별제(別提)요 철손(哲孫)은 판관(判官)이며 딸은 현감 정난원(鄭蘭元)에게 출가하였다. 철명의 아들 경(經)은 생원이고 그 다음 윤(綸) ・ 순(純) ・ 수(綬)가 있으며 철손의 아들은 민(敏)이다. 윤의 아들 응성(應星)은 진사이고 순의 아들은 응기(應箕)와 생원 응삼(應參) ・ 진사 응정(應精)이다.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절행(節行)을 하고 과거급제와 벼슬살이를 한 이들을 약기(略記)하면 결(潔)과 계()는 한직(閑職)인 산관(散官)의 품계(品階)에 있고 연(潫) 권연(權潫) : 1571년(선조 4)∼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 문신‧의병. 자는 자심(子深)이고, 호는 야일(野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예천(醴泉)이다. 부친 권응성(權應星)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권계(權㬖)가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소모장(義兵召募將)에 추대되어 곽재우(郭再祐)가 쌓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서미동(西微洞) 정사(精舍)에서 모시며 부지런히 학업에 힘썼다. ‘潫’은 자전에 ‘만’으로 나오나 본가에서는 ‘淵’의 고자(古字)로 보며 따라서 음도 ‘연’으로 읽는다.
은 생원이며 호가 야일(野逸)인데 광해군 시대를 만나 참봉으로 추천 제수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도 그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다. 양(良)은 직장(直長)이고 영(寧)은 부장(部將)이며 평(平)은 참봉인데 이상은 공의 현손이다. 5세손 복시(復始)는 첨정(僉正)으로서 호가 구사재(九思齋)인데 화왕산성(火旺山城)의 창의록(倡義錄)에 들어갔고 복흥(復興)은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그 아내 유씨(柳氏)와 함께 충렬(忠烈)의 정표(旌表)를 받았고 뒤에 단계서원(丹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민중(敏中)은 생원이다. 6세손 형(鎣)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두 선생의 문인(門人)이고 이숙(以)은 진사이며 만제(萬濟)는 문과에 급제한 현감이다. 7세손 정로(鼎老)는 생원이고 달국(達國)은 문과 급제 정랑(正郎)이다. 8세손 현(鉉)은 생원이고 귀봉공(龜峰公) 덕린(德麟)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공의 계씨(季氏) 동정공(同正公)의 현손인데 공과 함께 경주의 운곡서원에 병향(竝享)되었다.
  그 자손들이 산거하는 것이 경주와 순흥(順興) 및 예천(醴泉) 등지인데 지금 수백 인에 이르고 있다. 오호라, 임금이 뒤바뀌는 선수(禪受)의 때를 당하여 대절(大節)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 뒤를 계승할 후손을 득보(得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거니와 임금의 주서(朱書)가 이미 드러나 밝혀지고 그 후손이 심히 번창하니 하늘이 보시(報施)하여 베푸는 바가 여기에 이르러 과연 징험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공의 여러 후손이 나더러 억지로 유장(遺狀)을 지을 것을 촉탁하였다. 이 불녕(不佞)한 사람이 선생의 풍절(風節)에 대해서 대개 일찍부터 염모(艶慕)해왔던 바라 거듭 탄식하고 두려워하다가 드디어 감히 사양하지 못한 나머지 이상과 같이 찬차(撰次)하여 후일의 군자가 제대로 바로잡아 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함양(咸陽) 박기영(朴箕寧) 박기영(朴箕寧):1779-1857. 자(字) 치승(穉承), 호(號) 하수(荷叟), 본(本) 함양(咸陽). 1816년(순조 16) 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고 오직 노친을 봉양하고 학문에 힘썼으며, 적성산(赤城山)에 은거하여 후진을 교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문집에 ?하수집? 6권3책이 있다.
 삼가 지음. <국역:권오훈(權五焄)>

선생의 휘는 산해(山海), 자는 덕보(德甫), 영가인(永嘉人) 영가(永嘉) : 안동의 옛 지명이다.
으로 단종대왕 때 세 왕조 삼조(三朝) : 세 왕조(王朝). 여기서는 즉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을 이른 것이다.
를 모신 유신(遺臣)이다. 권씨(權氏)는 고려태사(高麗太師) 휘 행(幸)이 세운 훈덕(勳德)으로 사성(賜姓) 사성(賜姓) : 특별한 경우 나라로부터 성씨(姓氏)를 받는 것이다.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인 권행(權幸)은 본래 김행(金幸)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의 백제군과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 병산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 태조는 전공을 치하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能炳幾達權)’ 라며 권(權)씨 성을 하사하고 태사(太師)에 제수하였다.
과 안동(安東)을 식읍(食邑)으로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후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역사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오니 5세조 중문지후(中門祗侯) 휘 혁(奕)은 이조참판에 증직되면서 영가군(永嘉君)으로 봉해졌고, 고조 문하시랑(門下侍郞) 휘 용일(用一)은 좌참찬에 증직되어 시호가 희경공(僖敬公)이고, 증조 감찰(監察) 휘 희정(希正)은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며 3세 모두 증직(贈職), 봉작(封爵), 시호(諡號)가 내려진 것은 조선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文景公) 진(軫)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추존되었으니 공에게는 종조부가 된다. 할아버지의 휘는 초(軺)로 고려 문판사(文判事)를 지냈으며 이태조(李太祖)가 북백(北伯) 북백(北伯) : 함경도 관찰사의 다른 이름이다.
과 성균관 대사성으로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축성(竺城) 축성(竺城) : 예천군 용궁면, 지보면의 옛 지명이다.
 대죽리(大竹里) 염송산(濂松山)아래 은거하며 오로지 고려 송도(松都)를 생각하며 산 이름 중에서 염(濂)자를, 생각 염(念)자로 바꾸고 호를 송고(松臯)라 하니 충효의 전통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관(寬)으로 경력(經歷)이며 어머니 김해최씨(金海崔氏)는 현감 중운(仲雲)의 따님으로 영락(永樂) 계미년(1403)에 공을 낳았다. 스무 살에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세종 신해년(1431) 경혜공의 셋째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훗날 문종(文宗) 왕비가 되었으니 바로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이로부터 마침내 과거에 뜻을 버리고 학문연구에 힘쓰던 중 경신년(1440) 창덕궁 녹사(綠事)와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종(文宗) 임신년(1452) 판서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과 집현전 학사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어린 임금 단종(端宗)을 보필하라는 유명(遺命)을 받았기 때문에 공은 갑술년(1454)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제수되자 사양하지 않고 벼슬에 나아갔다. 을해년(1455) 세조가 단종을 손위(遜位) 손위(遜位) : 임금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시키고 단종을 보호하려던 삼학사(三學士) 삼학사(三學士) :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세 사람을 지칭한 것이다.
의 관직을 옮기고 공을 수형(水衡)수형(水衡) : 경사(京師)의 하천(河川) 및 상림원(上林苑)을 관장하였던 관청을 말하는데, 수형도위(水衡都尉)와 수형승(水衡丞)을 두었다.
으로 제수하자 불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침식을 잊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병자년(1456)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계획이 누설되면서 화가 닥치게 되자 공은 탄식하며, “참으로 하늘의 뜻이니 나 홀로 살아 무엇하리요? 살아서 사직(社稷)을 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 선왕에게 돌아가 보답하리라”  하고 조복(朝服)을 갖추고 높은 집에 올라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리고 투신 자결로 가족과 영결하니 부인은 집안의 모든 서적을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때 금부(禁府)금부(禁府) : 조선 시대, 임금의 명에 의해 죄인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을 이르던 말이다.
의 사자가 왔으나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죄를 물을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자 관직의 삭탈과 함께 죄적부(罪籍簿)에 올리고 가족 모두를 변방으로 내쫓으며 그 자손들을 백 년 동안 금고(禁錮)하였다. 공의 아우 수해(壽海)가 고애(孤哀) 고애(孤哀) : 아버지를 잃은 자식이란 뜻이다.
들과 공의 시신을 거두어 염송산(念松山) 유좌원(酉坐原)에 장사지냈다.
  명종(明宗) 병진년(1556)에 금고가 해제되면서 2년 후인 무오년(1558) 공의 손자 경(經)이 73세 나이로 조카 응성(應星)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서야 공의 옛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전하게 되었다. 징사(徵士) 징사(徵士) :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부르나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은사이다.
 단곡(丹谷) 곽진(郭)곽진(郭 1568∼1633) : 본관 현풍(玄風). 자 정보(靜甫), 호 단곡(丹谷). 권우(權宇)의 문하에 수학하다 임진왜란이 나자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을 읽고 그의 둘째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단공산(丹公山)에 작은 암자를 짓고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취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잠심하였다. 아들 곽영(郭瓔)이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주참하라는 상소했다가 투옥되어 죽자,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시문에 능했으며, 장현광(張顯光)과 이준(李埈) 등과 사우관계를 맺었다. 백고리사(白臯里祠)에 제향되었다. ?단곡문집?이 있다.
이 쓴 공의 묘지명(墓誌銘)에 공은 천품이 강직하고 지조가 높아 어릴 때부터 구차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일찍이 「백이전(伯夷傳)」을 읽다가 세 번 거듭 탄식하기를, “이런 사람이 있은 후에야 만고의 불변인 삼강오륜이 잘 지켜질 것이다” 라고 하니 문경공(文景公)이 웃으며 예사롭지 않음을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공의 성품이 평상시에는 화순(和順)하시나 의리와 시비를 가릴 때는 엄격하여서 언제나 고금의 이름난 충절의 일을 보면 본인이 당한 것처럼 격분하고 슬퍼하였으며 고을 사람들의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내가 더럽혀질까 걱정하였다. 허심탄회하게 사귄 벗은 적었으나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공(公)들과 친밀하게 사귀었다. 호를 죽림거사(竹林居士)라 하고 권력과 혐의를 멀리 피하며 깨끗하게 살고자하는  절의(節義)를 생각한 것이 29세 때부터이었으며 과거를 통해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10년을 열심히 학문을 닦으니 명망이 높아졌다. 명망으로 벼슬에 천거되어도 환로(宦路)에 종사하지 않다가 그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벼슬에 나아가게 되었고, 공이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나갔을 때는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와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은 이미 죽었고 정간공(貞簡公) 허후(許珝)는 귀양지에서 교살(絞殺)당했다. 병자년(1556) 이전 육신(六臣)의 화가 이미 차례대로 일어나고 있었으나 공은 분연히 벼슬에 나아가면서 “내가 선왕(先王) 선왕(先王) :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을 지칭한 것이다.
에 갚지 못한 은혜를 오늘에야 어린 단종 임금에게 갚겠다” 라고 하며 집현전(集賢殿)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날마다 긴밀하게 왕래하면서 서로가 의기를 다지며 충심을 드러내어 사실을 분명히 밝히기를 도모하다가 마침내 일이 크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슬프다! 육신(六臣)들의 죽음에 대한 행적은 밝게 기록되어 역사에 빛났건만 선생의 죽음은 사적에서 밝혀지지 못하고 은밀하게 묻히어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은 차별 때문에 그 높았던 충의(忠義)가 백여 년이나 세상에 전해지를 못하였다. 숙종(肅宗)때 이르러서야 단종(端宗)을 복위하고 육신의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때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억울한 죄를 풀어주면서 시호(諡號)와 벼슬이 내려졌으나 공만이 홀로 자취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자 기유년(1789) 후손 종락(宗洛)이 상언(上言) 상언(上言) : 신하나 백성이 임금에게 사사로운 일을 글로 올리는 문서의 명칭이다.
으로 원통함을 호소하니 일이 오래되고 증거를 찾을 수 없으나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형조(刑曹)의 죄적부에서 죄를 삭제하고 직첩(職牒) 직첩(職牒) :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 사령서를 이르던 말이다.
을 환급(還給)하게 되자 그때서야 노릉(魯陵)노릉(魯陵) :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육신(六臣) 모두 처형된 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해 세조 3년(14573) 10월 24일 영월에서 죽었다. 노산군의 무덤을 노릉이라 하였다.
의 유신(遺臣) 유신(遺臣) : 선왕을 모시던 신하. 또는 왕조(王朝)가 망한 뒤에 남아 있는 구신(舊臣)이다.
중에 죽림공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해년(1791) 임금의 특명(特命)으로 장릉(莊陵)장릉(莊陵) : 성삼문(成三問) 등이 도모한 상왕복위계획이 탄로되어 영월에서 사사(賜死)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관을 갖추어 장사지낸 뒤 숨겨져 왔다. 숙종 7년(1681) 대군(大君)으로 추봉하고, 그후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附廟)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의 석물(石物)은 숙종과 정조 때 왜소하면서도 간단하게 조성하였다.
으로 격상하고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병자년 단종의 충신들을 제향(祭享)할 때 경기 ・ 충청 ・ 영남 삼도(三道)의 유생 송문기(宋文箕) 등 2천여 명이 상소하여 죽림공도 숭보(崇報) 숭보(崇報) : 은덕을 기리고 보답하는 것이다.
할 것을 청하자 “묘당(廟堂) 묘당(廟堂) : 조선시대 행정부의 최고 기관이다.
에서 의논하도록 하라” 라는 비답(批答)비답(批答) : 고려와 조선 때 신하가 올리는 보고·건의·상소(上疏)에 대해 왕이 내리는 답변이다.
이 내려졌다. 이에 심이지(沈頤之) ・ 이재간(李在簡) ・ 이곤(李坤) 등 여러 공들이 경연(經筵)에서 같은 의견으로 번갈아 진계(陳啓)하니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권산해(權山海)가 높은 곳에서 투신하여 자진(自盡)했다는 사실을 모두 밝혀내지 못했으나 자손들이 금고(禁錮)당한 것을 보면 사육신과 다를 바가 없으니 관작을 복직하라는 특명을 내리어 백세토록 풍교(風敎)를 수립하여 장릉(莊陵)의 여러 신하를 숭보(崇報)하는 날에 함께 해줄 것을 많은 선비들이 요청하니 과도한 일이 아니옵니다” 라고 아뢰자 임금이 윤허(允許)하고 이조참판의 증직과 아울러 관례에 따라 마을에 정표(旌表) 내려 정충각(旌忠閣)을 세우도록 하였다. 조정에서 하명이 있던 날, 영남의 선비들은 물론 부녀자들까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고유제(告由祭)를 지낼 때 묘정(廟庭)에 오색 무지개가 하늘 높이 비치니 보는 사람 모두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죽지 않고 살아계신 증거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선생의 유사(遺事)에 전말이다.
  슬프다! 공이 강직하고 정대한 기품으로 높은 학식을 갖추었고 어릴 때 사기(史記)를 읽으면서 격앙했던 마음이 마침내 만고강상(萬古綱常)을 붙드는 충절이 되었으니 이것은 백이(伯夷)백이(伯夷)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것에 반대하여 산속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으면서 주(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다가 끝내 굶어 죽은 사람이다.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
의 유풍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단종의 신하가운데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으로 구분하나 죽음도 의리(義理)로 하였고 사는 것도 의리로 하였으니 오로지 의리와 충성은 하나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선생의 내력을 살펴보면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었고 왕비의 친척으로 부귀는 자연이 있을 것임에도 관직은 주부(主簿)와 첨정(僉正)뿐이었다.
  선생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같이 강호(江湖)의 자연에 은거하며 몸을 보전하고 화를 멀리해도 되었을 것이나 불의를 보고 목숨을 바치고 몸을 죽여 어진 일을 이루었으니 이는 선생만이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뚝한 일인 것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죽음으로 의리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뜻은 천인(天人)의 거취천인(天人)... :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시 사람을 능히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라는 말로, 소식(蘇軾)이 인용한 인중승천 천정역승인(人衆者勝天 天定亦勝人)이란 시구가 더욱 유명한 격언이 되었다.?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이니 사육신과 더불어 생사(生死)를 같이 하였으니 죽음의 선후만이 달랐을 뿐이다. 만약 금오(金吾)금오(金吾) : 의금부(義禁府)의 별칭이다.
의 체포령이 고혼의 웃음고혼(孤魂)의 웃음 : ‘나의 일편단심은 귀신이 아니, 깊은 원한 풀지 못해 더디 죽는 것 한스럽네. 지하에서 만약 비간(比干)을 따른다면 고혼은 웃음을 머금을 것이니 슬퍼할 것 없네.(丹心一片鬼神知 未吐深寃恨死遲 地下若從比干去 孤魂含笑不須悲)’ 라는 조대중(曺大中)의 시이다. 죽음을 달갑게 여긴다는 뜻으로 인용하였다.
을 머금기 전에 다다랐으면 공도 임금 앞에 잡혀가 국문(鞠問)을 당하여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고 몸은 산산이 부서져 노량진(鷺梁津)노량진(鷺梁津) : 조선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숙종 17년(1691)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정조 6년(1782)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만 묻혔으나, 사육신묘역 정화사업 때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도 추봉(追封)하였다.
에 묻힐 것을 공도 기꺼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현회(顯晦)의 전말을 논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요컨대 병자년 여러 신하들은 강개(慷慨)한 의지로서 살신(殺身)하여 세운 탁월한 충의이며 선생은 스스로 자결하여 충의를 취하였을 뿐이다. 이후의 군자들이 반드시 이를 알아 높이 칭송하고 논의하리라.
  다만 선생께서 평상시에 실천했던 이력과 저술한 학문이 반드시 있었을 것임에도 모두 없어져 찾을 길이 없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충의로 죽음을 무릅쓴 것을 보면 평소 온축된 의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니 취사(取舍)의 구분이 명확한 뒤에 존양(存養)의 공부가 치밀해진다취사(取捨)의... : ‘취사(取舍)의 구분이 명확한 뒤에 존양(存養)의 공부가 치밀해진다.(取舍之分明 然後存養之工密)’ 하였다.?논어집주(論語集註)?
는 성현의 말씀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충의로 죽음을 무릅쓴 것을 보면 배운 대로 실행하였고 처리가 분명하지 않았으면 어찌 이 같은 충절의 사적이 있으리오? 선현들이 이르기를, 충혼열백(忠魂烈魄)이 성대(盛大)하여 흩어지지 않으면 가끔 영괴(靈怪) 영괴(靈怪) : 신비한 작용을 이른 말이다.
한 기적(奇跡)이 있다고 하였으니 죽리(竹里)에 있는 선생의 묘소에 분황고유(焚黃告由)분황고유(焚黃告由) : 조정에서 선조에게 증직(贈職)이 내려졌을 때 그 임명장을 누런 종이에 복사하여 무덤 앞에 가지고 가서 사유를 고한 뒤에 불태우는 것을 말한다.
할 때 오색 무지개가 뻗힌 기이한 일은 거짓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어찌 선생의 성대한 충의의 기운이 흩어지고 진멸(殄滅)되지 않았다는 것을 달리 얻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열렬한 기운 하늘에 뻗히어 그 빛을 보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이러한 공의 사적이 ?용궁읍지(龍宮邑誌)?에 실려 있으며 제향(祭享)의 논의는 성균관(成均館)에서 먼저 발의되어 떳떳한 인륜(人倫)으로 사림의 공의(公議)가 모아져 정조(正祖) 을사년(1785)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그러나 태상시(太常寺) 태상시(太常寺) : 제사와 시호(諡號)를 내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의 의논이 사육신의 사단(祠壇)에 배향과 광전(曠典)광전(曠典) : 오랫동안 거행하지 않은 전례(典禮). 혹은 지금까지 없던 대전(大典)이나 법제(法制)이다.
이 아직 이루지지 않았으니 때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리라.
  부인(夫人)도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으며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으니 철조(哲祖)와 철종(哲宗)은 일찍 죽어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였고, 철명(哲命)은 별제(別提)별제(別提) : 조선 시대의 관리. 정육품(正六品)과 종육품(從六品)으로 형조(刑曹), 호조(戶曹), 교서관(校書館), 상의원(尙衣院), 군기시(軍器寺), 예빈시(禮賓寺) 등의 관청에 한두 명씩 속해 있었다.
, 철손(哲孫)은 판관(判官)이며 딸은 현감 정난원(鄭蘭元)에게 출가하였다. 철명의 아들 경(經)은 생원(生員)이며, 윤(綸) ・ 순(純) ・ 수(綬)이고, 철손의 아들은 민(敏)이다. 윤의 아들 응성(應星)은 진사이며, 순의 아들 응기(應箕), 응삼(應參)은 생원이며, 응정(應精)은 진사이다. 민의 아들은 순경(舜卿)이며 현손(玄孫)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하고 대강 절행(節行)과 관직이 있는 자손만이 기록하였다. 현손 결(潔)은 참봉, 계()는 산계(散階)산계(散階) : 직무(職務)는 없고 품계(品階)만 있는 벼슬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종사랑(從事郞) 등이 이에 해당한다.
, 연(潫: 淵의 古字)은 생원으로 호는 야일(野逸)이며, 광해군 때 참봉을 제수되었다가 인조(仁祖)때 직첩을 돌려받았다. 양(良)은 직장(直長), 영(寧)은 부장(部將), 평(平)은 참봉이며, 5세손 복시(復始)는 첨정(僉正)으로 호는 구사재(九思齋)이며 임란 때 화왕산(火旺山)화왕산(火旺山) : 경남 창녕에 소재한 산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7월 21일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를 중심으로 하여 각 지방의 의병장과 의사들이 모여 죽음으로 나라를 수호할 것을 결의하는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이 있었다.
에서 창의하여 ?화왕산동고록(火旺山同苦錄)?에 올랐으며, 복흥(復興)도 임란에 창의하여 순절(殉節)하였고 부인 류씨(柳氏)와 함께 충렬(忠烈)로 정려정려(旌閭) :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와 충신, 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이며 정려를 받게 되면 군역. 부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되었으며 후에 단계사(丹溪社)에 향사되었다. 민중(敏中)은 생원이며, 6세손 형(鎣)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숙(以熽)은 진사이며, 만제(萬濟)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7세손 정로(鼎老)는 생원이며, 달국(達國)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고, 8세손 현(鉉)은 생원이다. 선생의 아우 사정(司正) 수해(壽海)의 현손 귀봉공(龜峯公) 덕린(德麟)이 선생과 함께 운곡서원에 배향되었다. 후손은 예천(醴泉) ・ 경주(慶州) ・ 순흥(順興)과 여천(呂泉)에 수백 인이 흩어져 살고 있다.
  슬프다. 단종사화(端宗士禍) 때 큰 충절(忠節)들의 후손들은 보전하기 어려웠으나 충신이란 단서(丹書) 단서(丹書) : 임금이 백성들에게 알리는 글을 적은 문서이다.
가 드러나면서부터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해 준 은혜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일일게다. 어느 날 선생의 자손들이 행장을 부탁하나 옳지 못한 내가 선생의 높은 충성과 큰 절개를 흠모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썼으니 후일의 군자가 바로 잡아주기를 기다린다.
  함양(咸陽) 박기영(朴箕寧)이 삼가 짓다. <국역:이상필(李相弼)>


    贈嘉善大夫吏曹叅判竹林先生墓碣銘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죽림선생 묘갈명

죽림선생묘소
竹林權公이 殉於丙子六臣之難하니 公與六臣으로 其心同 其節同 而特其死於自盡하야 不能與六臣으로 同故로 至今三百餘年에 世無得以知者하고 文獻事蹟이 日就於湮沒而莫之徵하니 不惟無以慰長逝者之魂魄而亦非君子尊獎節義와 扶世立敎之至意也라 公의 諱는 山海오 安東人也라 永樂元年癸未月日에 生하니 生而慷慨有志操하야 嘗受學於從祖文景公軫할세 讀伯夷傳에 歎曰有是人然後에 可以扶萬古綱常이라하니 文景公이 奇之하다 不事擧子業하고 事親孝 接人恕 遇事判 別義利에 未嘗苟也러라 交遊가 如成三問朴彭年執友也라 庚申에 才行薦昌德宮錄事하고 又除主簿에 皆不就하고 甲戌에 除宗簿僉正하야 乃就職하니 其志將欲追先王而報冲君也라 乙亥에 端宗遜位에 公이 仰屋慨惋하고 枕席有涕泣處하다 尋除察訪에 不赴하고 丙子에 與六臣으로 謀復事覺하야 成朴諸公이 就鞫에 公은 知志不遂하고 投閣自盡하니 年이 五十四라 弟壽海가 與姪孤로 藁葬于龍宮大竹里念松山卯向之原하니 嗚呼라 公이 以喬木世家로 受國厚恩하야 忠義之性이 已見於幼稚之日하고 長而受室子景惠公權專之女 則於顯德王后에 姊也라 不欲夤緣椒闈에 以媒榮進하고 斂跡林園以自樂하야 訓誨後進으로 爲己任而其一心許國에 期以死報則乃素所畜積也라 公之歿也에 夫人이 悉焚家藏書籍故로 著述言行이 皆不傳하고 至於生卒月日도 亦無從考焉이라 朝家에서 以公不訊而先殞으로 不用孥戮之典 而猶廢錮子孫이 凡百年이라 嘉靖戊午에 禁始解하야 公之孫與曾孫이 次第登上庠하다 公은 高麗太師幸之後오 五世祖諱奕은 中門祗候오 贈吏曹叅判하고 封永嘉君하고 高祖諱用一은 門下侍郞이오 贈左叅贊諡僖敬하고 曾祖諱希正은 監察이오 贈左議政諡文靖하니 以三子軫의 貴也라 祖諱軺는 文判事오 考諱寬은 經歷이오 妣는 金海崔氏縣監仲雲之女라 公이 生四男一女하니 男哲祖·哲宗·哲命·哲孫이오 女는 適鄭蘭元하니 縣監이라 孫曾以下는 有家譜不盡錄하다 銘曰
  帝降民彝에 惟孝與忠이라 孰無是秉이리오마는 鮮克有終이라 死生呼吸에 難辨魚熊이라 公在髫齔에 嶄然頭角이라 孝思盡誠에 忠欲竭力이라 急難君父에 片片心赤이라 鼎呂義重에 鴻毛命輕이라 生同六臣에 死沒其名이라 名蹟俱泯에 寸心誰明고 刻銘云云하니 來者可聞이라
    甲辰嘉平節에 韓山李光靖 謹撰

죽림(竹林) 권공(權公)이 병자년(1456)에 사육신(死六臣)의 난(難)에 순직(殉職)하셨으니 공과 육신(六臣)은 뜻이 같고 절의(節義)도 같았으나 그 죽음이 특이하게 자진(自盡)을 하시어 육신(六臣)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300년이 지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문헌(文獻)과 사적(事蹟)이 날로 없어져서 증거(證據)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세상을 뜨신 그 분의 혼(魂)을 위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군자의 높은 절의(節義)로 세상을 가르치는 본뜻도 아니었다.
  공의 휘는 산해(山海)오 안동권씨(安東權氏)다. 태종 3년 계미년(1403)에 출생하시어 의기(義氣)에 넘치는 지조(志操)를 갖고 사시면서 일직부터 종조부(從祖父) 문경공(文景公) 휘 진(軫)에게 「백이전(伯夷傳)」을 배우다가 감탄(感歎)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이러해야 가히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할 수 있다”라고 하니 문경공(文景公)이 기특(奇特)하게 생각했으나 과거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효심(孝心)으로 부모를 섬기고 남에게 용서(容恕)하면서 정의(正義)와 사심(私心)을 판별하면서 구차(苟且)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경신년(1440)에 재량(才量)과 품행(品行)으로 창덕궁(昌德宮) 녹사(錄事)로 추천되었으나 부임(赴任)하지 않고 주부(主簿)로 제수(除授)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과 뜻이 맞아 교유(交遊)하다가 갑술년(1454)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취임(就任)했으나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어린 임금을 보필(輔弼)할 생각이었는데, 을해년(1455)에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니 공이 하늘을 처다 보고 분개(憤慨)하다가 베개에 눈물을 흘리셨고, 찰방(察訪)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병자년(1456)에 육신(六臣)과 같이 복위(復位) 모의(謀議)를 하다가 발각(發覺)되어서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제공(諸公)이 국문(鞫問)을 당할 때에 공은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높은 집에 올라 자진(自盡)하니 연세가 54세였다.
  아우 수해(壽海)가 어린 조카와 같이 용궁현(龍宮縣) 대죽리(大竹里) 현 예천군 지보면(知保面) 신풍리(新豊里) 산47번지이다.
 염송산(念松山) 묘향(卯向)에 거적에 싸서 장사지냈다.
  아! 공이 훌륭한 세가(世家)의 자손으로 나라에 은혜를 받고 충의(忠義)의 본성(本性)이 어려서부터 강했고 성년(成年)이 되어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따님에게 장가드니 현덕왕후(顯德王后)에 대해 언니이다. 왕후(王后)에 의지하여 출세(出世)할 생각을 하지 않고 향리(鄕里)에 은거(隱居)함을 즐거워하고 후학(後學)을 양성하는 일을 자기 책임이라 생각하면서 나라에 전심력(全心力)을 기울여서 몸을 바쳐 충성(忠誠)한다는 것이 타고난 포부(抱負)였다.
  공이 세상을 뜨시니 부인(夫人)이 집에 저장(貯藏)된 모든 서적을 불태웠기에 저술(著述)한 언행(言行)이 다 없어져서 생졸년(生卒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조정에서 공을 신문하기 전에 먼저 자진했기 때문에 자손을 종으로 삼는 벌은 없었으나 백년 간 폐고(廢錮)의 벌을 내려서 명종 13년 무오년(1558)에 해금(解禁)되어 공의 후손이 차례로 급제(及第)하고 태학(太學)에 입학되었다.
  공은 고려태사(高麗太師) 행(幸)의 후손이다. 5세조 휘 혁(奕)은 고려(高麗)의 중문지후(中門祗候)오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叅判)이고 영가군(永嘉君)으로 봉(封)해졌고, 고조 휘 용일(用一)은 문하시랑(門下侍郞)이며 증직(贈職) 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고, 증조 휘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이오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 문정(文靖)이니 셋째아들 진(軫)의 작위(爵位)에 따른 것이다. 조(祖) 휘 초(軺)는 문과판사(文科判事)오, 고(考) 휘 관(寬)은 경력(經歷)이다. 비(妣)는 김해최씨(金海崔氏) 현감(縣監) 중운(仲雲)의 따님이시다.
  공이 4남1녀를 두셨는데 아들은 철조(哲祖) · 철종(哲宗) · 철명(哲命) · 철손(哲孫)이오, 사위는 현감(縣監) 정난원(鄭蘭元)이다. 손자증손 이하는 족보에 수록되어있고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을 쓴다.

  帝降民彝(제강민이)
  하늘이 사람에 부여한 심성(心性)은
  惟孝與忠(유효여충)
  오직 효(孝)와 충(忠)이다.
  孰無是秉(숙무시병)
  누구나 이 심성(心性)이 있지만
  鮮克有終(선극유종)
  끝까지 이 심성(心性)을 간직하기 어렵 다.
  死生呼吸(사생호흡)
  생사(生死)의 갈림길 잠시(暫時) 사이에도
  難辨魚熊(난변어웅)
  목숨을 버리고 죽음을 택하는 ?孟子・告子上?에 “魚는 正義, 生은 不義”라는 말이 나온다.
 것은 어려운 일인데
  公在髫齔(공재초츤)
  공은 어린 나이 때부터
  嶄然頭角(참연두각)
  특별한 견해가 있어서
  孝思盡誠(효사진성)
  효에 성력(誠力)을 다하고
  忠欲竭力(충욕갈력)
  충성(忠誠)에 힘을 쓰려고 해서
  急難君父(급난군부)
  임금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片片心赤(편편심적)
  일편단심으로
  鼎呂義重(정려의중)
  군주(君主) 정려(鼎呂): 구정대려(九鼎大呂). 사직(社稷)을 말함.
에 충의(忠義)을 중(重)하게 여기고
  鴻毛命輕(홍모명경)
  자기(自己)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
  生同六臣(생동육신)
  살아서는 육신(六臣)과 뜻이 같았으나
  死沒其名(사몰기명)
  죽어서는 명성(名聲)이 없었고
  名跡俱泯(명적구민)
  명성과 행적(行蹟)이 다 없어졌으니
  寸心誰明(촌심수명)
  그 마음을 누가 밝혀줄까?
  刻銘云云(각명운운)
  비문에 명(銘)을 이렇게 새겼으니
  來者可聞(래자가문)
  후인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갑진년(1784) 동짓달 원문의 가평절(嘉平節)은 납일(臘日)을 명절로 일컫는 말이다.
에 한산(韓山) 이광정(李光靖) 이광정(李光靖):1714∼1789. 본관 한산(韓山). 자는 휴문(休文), 호는 경실(景實)·소산(小山). 형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다.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소호리(蘇湖里)에서 태어났다. 문집으로 ?소산집(小山集)? 13권 7책이 있다.
 삼가 찬(撰)하다. <국역:권기갑(權奇甲)>


    墓碣後識
    묘갈 후지
公之墓에 闕顯刻이러니 正廟甲辰에 始經度之文이 成而未及竪하고 後六年己酉에 因蹕路하야 後孫宗洛이 龥寃復其官爵如故하고 又三年辛亥에 車駕過露梁에 侑祭六臣墓하고 仍追感魯陵事하야 命開江都秘史하야 考死義諸臣에 將並加褒章이러니 會多士龥言에 公一死靖獻이 無愧六臣者는 大臣儀曹交口建白하야 特命棹楔其故里하고 追贈天官亞卿에 兼帶如例하니 嗚呼라 公之死에 其跡晦至今三百餘年而始顯于世하니 君子是益悲하니 公之心이 感天道之久而後乃定也라 頒誥之夕에 有虹隮于隧하니 豈公之精忠愍節이 尙亦有亘宇宙而不散者哉아 公廟食이 在慶州雲谷祠하니 從賢關議也라 今上二十五年乙酉에 具麗牲追記하야 成命于在左方하야 以碣文出於我叔祖小山府君으로 俾秉運相其役하니 義有不敢辭者라 遂略叙其事如右云이라
  通訓大夫前行淸安縣監李秉運은 謹識하노라
  墓所는 在醴泉郡知保面大竹里念松山下麓甲向(節洞)이라

공의 묘소에 비(碑)가 없었는데, 정조(正祖) 갑진년(1784)에 처음으로 경위(經緯)를 밝힌 글이 제술(製述)되었으나 비를 세우지는 못했고 6년이 지난 기유년(1789)에 왕의 행차 길에 후손 종락(宗洛) 권종락(權宗洛):미상∼1819년(순조 19). 조선 후기 학자. 자는 명응(明應)이고, 호는 갈산(葛山)‧형와(兄窩)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안동이다. 간재(艮齋) 이헌경(李獻慶)의 문인으로 경전의 뜻을 익혔으며, 함께 깊이 교유한 인물로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등이 있다. 선조 되는 죽림공 권산해가 단종 복위를 도모할 때 사육신의 참형 소식에 자결을 했었는데, 자신의 대에 이를 때까지 신원되지 못함을 억울하게 여겨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린 끝에 관직을 복관시키고, 영주(榮州) 금성단(錦城壇)과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게 하였다. 유고로 ?갈산집(葛山集)?이 전한다.
이 옛 관작(官爵)을 복직(復職)해 달라고 애원(哀怨)했고 또 3년이 지난 신해년(1791)에 왕이 노량진(露梁津)을 지나다가 육신(六臣)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잇달아 단종(端宗)의 일이 감동(感動)되어서 강화(江華)에 사신(史臣)을 보내서 비사(秘史)를 찾아 정의(正義)로 죽은 제신(諸臣)을 고증(考證)하시고 모두 표창(表彰)하게 하시니 때마침 많은 선비들이 상소문(上疏文)을 올려서 공이 선왕(先王)을 위한 죽음이 육신(六臣)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분이라고 했고 대신(大臣)과 해당(該當) 조(曹)에서 차례대로 말씀을 드려서 특명(特命)으로 고향(故鄕)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예(例)에 의해서 이조참판(吏曹參判)와 예(例)에 따른 겸직(兼職)도 추증(追贈)하였다.
  아! 공이 자진(自盡)했으나 300년이 지나도록 세상이 알지 못하다가 지금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군자들이 이것을 더욱 슬퍼한다. 공의 마음이 천도(天道)에 감동을 준 것이 오래된 뒤에 정해진 일이다. 이 일이 반포(頒布)되던 날 석양(夕陽)에 공의 묘소에 무지개가 있었으니 공의 맑은 영혼(靈魂)이 아직까지 우주 안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겠는가? 공을 모신 사당(祠堂)은 경주(慶州) 운곡(雲谷)에 있으니 성균관(成均館)의 논의(論議)에 따른 것이다. 지금 임금 순조(純祖) 25년 을유년(1825)에 묘정비문(廟庭碑文)이 완성되어 묘우(廟宇) 좌측에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나의 종조부(從祖父)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부군(府君)께서 지으시고 나 병운(秉運)에게 그 일을 도우라 하시니 도의(道義) 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간략하게 이상과 같이 기록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전(前) 행청안현감(行淸安縣監) 청안현(淸安縣):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 청연현으로 고쳐 괴양군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 청당현으로 고쳤으며 1018년 청주에 속했다. 후에 감무를 두어 도안현 감무를 겸임하게 했다. 1405년 청당현과 도안현을 병합해 청안현으로 하고 1413년 현감을 두었다. 1895년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군이 되었으며, 1896년 충청북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으로 괴산군에 병합되었다.
 이병운(李秉運) 이병운(李秉運) :1766~1841. 한산인(韓山人), 자(字) 제가(際可), 호(號) 면재(俛齋), 거(居) 안동(安東) 소호(蘇湖). 이대산(李大山)의 손자로 김종덕(金宗德)의 문인이다. 「동정일록(東征日錄)」, 「사득록(思得錄)」, 「구폐사의(救弊私議)」 등을 남겼으며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문집(文集) ?면재집(俛齋集)? 5권3책이 전한다.
은 삼가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醴泉郡 知保面 大竹里 念松山 아래 기슭 절동(節洞)에 갑향(甲向)으로 있다


    碣陰後敍
    갈음후서
嗚呼 在昔 丙子殉國 一時秉義之士 僂指不少 而率多沈晦不章 間有厪得姓字 而行業 則無聞焉 不得如皇明革除年間死事諸人之彪烈炳朗 以照人耳目 吾東文獻之不備 良足慨已 竹林權公 以世臣懿戚 死國埋名三百餘年 而今其後孫翼溥 方謀樹石幽阡 爲發潛闡幽之圖 公之危忠勁節 將自此 大顯而永有辭矣 噫 公與當時諸賢 同志同事 而其所處義槪 與柳忠景公相類 而特以在鄕自盡之故 得免六臣之禍 而名亦泯焉 悲夫 或謂公旣參義擧 而不能同日就鞫 以扶植人紀 如六先生之爲者 爲若可憾而人自靖獻 不一其道 歸在無愧於心 而全吾付畀之天而已 卽身後之顯晦榮落 直一過空之雲 於公何病 不佞 猥以冗賤夤緣先故 遂略書所感如右 以贖平日孤陋之失云爾 醉琴軒十二代孫 進士 朴光斗 謹識

아! 옛 병자년(1456)에 정의(正義)를 지키려고 동시에 순직한 분을 손을 꼽아 봐도 적지 않으나 대부분 숨겨져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고 그 중에 겨우 성명(姓名)만 전해지고 행적은 알 수 없으니 중국 명나라가 세워질 때에 목숨을 바친 많은 사람들을 확실하게 밝혀서 사람의 이목(耳目)을 끌게 한 것같이 하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의 문헌이 미비한 것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죽림권공은 대대로 벼슬한 가문이고 나라에 척분(戚分)이 있었고 순국을 했으나 삼백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알려지지 못하다가 지금 그 후손 익부(翼溥)가 묘소에 비를 세워서 숨겨진 행적을 밝히려고 하니 공의 곧은 충성과 강한 절의가 지금부터 크게 나타나서 영원한 칭찬이 있을 것이다.
  아! 공은 당시 제현들과 뜻이 같고 행동이 같았으나 그 처지와 의기는 충경공(忠景公) 류성원(柳誠源) 류성원(柳誠源) : ?-1456.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박팽년·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 1447년 문과중시에 합격했다. 1452년 <고려사절요>를 편찬할 때 최항·박팽년·신숙주·이극감 등과 함께 열전을 담당하여 찬술했다. 춘추관기주관으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은 뒤 집현전에 정난녹훈의 교서를 만들도록 명하자, 집현전교리로 있던 그는 혼자 남아서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교서를 작성했다. 1454년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455년 단종의 복위를 꾀했으나 1456년 성균관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이 사실이 탄로 나자 자결했다.
 상공(相公)과 같았으나 특이한 것은 집에서 자진(自盡)했기 때문에 육신(六臣)과 같이 죽는 화(禍)는 면했으나 명성(名聲) 역시 알려지지 못했으니 슬픈 일이었다. 누구는 말하기를 “공이 의거(義擧)에 동참(同參)했으나 같이 국문을 받지 않았으니 육신(六臣)과 같이 충의를 지켰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지만 사람이 선대왕에게 충의(忠義)를 지키는 방법이 다를 수 있으니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자신이 타고난 천성(天性)대로 행동하고 죽은 후에 명성이 있고 없는 것은 지나가는 뜬 구름같이 생각했으니 공에게 무슨 상관이 되겠는가? 부족한 나는 외람되게 선대의 인연이 있어서 이상과 같이 소감(所感)대로 서술해서 평소에 고루해서 못다 한 일을 속죄하려고 한다.
  취금헌[박팽년(1417~1456)] 12대손 진사 박광두(朴光斗) 박광두(朴光斗) : 일명(一名) 광현(光顯). 자 운경(運卿), 생년 정미(丁未) 1727년, 본관 순천(順天), 거주지 대구(大丘). 정조(正祖) 4년 (17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삼가 기록하다. <국역:권기갑(權奇甲)>


    端廟忠臣 贈資憲大夫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通訓大夫 宗簿寺僉正 竹林權先生之墓

府君의 墓碣文은 伸冤前 正宗八年(一七八四) 甲辰에 小山 李公光靖이 撰하였으나 碑를 세우지 못하다가 伸冤 旌贈後 純祖二十五年(一八二五) 乙酉에 縣監 李公秉運의 後識를 붙여 처음 세웠다가 高宗十五年(一八七八) 戊寅에 後孫 永祚가 請贈爵諡하여 各曹 回啓와 廟堂 獻議에 依하여 前面과 같이 特蒙加贈되셨으며 또 日治 辛酉年(一九二一)에 士林이 峻發 同聲協力하여 魯峯書院을 重建 奉安하였고 民國 丙申年(一九六五)에 神道碑와 碑閣을 세웠는데 그 事蹟이 모두 漏落되었으나 尙今 改碣하지 못하였으니 噫라! 祖上께는 罪스럽고 남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므로 子孫된 마음에 더욱 恨스러운 일이더니 榮州壯山文化獎學財團 理事長 奇鎬甫가 獻誠 專擔하여 改碣하게 되었으니 晩時之歎은 있으나 多倖한 일이다. 이에 碣文과 後識는 重複을 避하여 省略했으며 前面만 改書하고 삼가 그 顚末을 簡略하게 적는 바이다.
  民國庚辰二OOO年 三月 日 十五世孫 寧夏 謹識, 義城后人 金徹壎 謹書, 十七世孫 奇鎬 謹竪


    竹林權公墓誌
    죽림권공 묘지
惟宗簿寺副正安東權公。旣歿之百有七十年。玄孫生員潫。請余曰。吾先祖節義宜有述。而先世以廢錮。墓碣壙誌。至今無辭以刻。願吾老。一言以識之。嗚呼。公之名行。銘在口碑。不必待不佞之不文而揚之。然重子之堅懇。且樂誦義蹟。遂强顔就述焉。公諱山海。字德甫。竹林其號也。曾祖諱希正。監察贈左議政諡文靖。祖諱軺。觀察使。考諱寬。經歷。娶金海崔氏縣監仲雲之女。以永樂元年癸未月日。生公于龍宮大竹里第。公自髫齔。穎悟超凡。孝友純至。勤於爲學。嘗受業于從祖文景公。讀伯夷傳三復太息曰。有是人然後。可以扶萬古綱常。文景公笑而奇之。及長。器局峻整。惟義是求。見人之善。如就芝蘭。聞人之惡。如避蛇蝎。平居恂恂若無可否。至於判義理明是非。截然有不可犯者。蓋其天性然也。正統庚申。以才行薦。爲昌德宮錄事。轉爲主簿。皆辭據曰。內有椒闈之親。冒進干祿。非我志也。以夫人權氏。於顯德后爲姊故也。景泰甲戌。除宗簿寺副正。公雖無意仕進。嘗感先朝之眷遇。欲報效冲王。故始就。乙亥。魯山遜位。公嘗懷慨惋。一心靡他。尋除察訪。稱疾不赴。翌年丙子。與權自愼․成三問等謀復。事覺。三問自愼。皆就擒。公仰天雪涕曰。此實天也。不死何爲。遂投閣以盡。夫人取書籍以焚之。以故得免拏戮之禍。公之弟壽海。與諸孤歛屍。藁葬于龍宮縣濂松山卯向之原。從先兆也。惟公稟質淸明。素履確如。祕跡林園。不動勢利。事親止於孝。事君止於忠。處難愈篤。殺身不悔。所立卓爾。炳如日星。惜乎其平日著述。盡火於丙子。微言格論。不傳於世也。公娶景惠公權專之女。生一女四男。女適縣監鄭蘭元。男長哲祖。哲宗夭。哲命․哲孫皆有後。不可殫錄。

생각건대 종부시부정(宗簿寺副正) 안동권공(安東權公)은 서거(逝去)하신 지 이미 170년이 되었는데 현손(玄孫)인 생원(生員) 연(潫)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절의(節義)는 당연히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선세(先世)에 유폐(幽廢)와 금고(禁錮)로 묘갈(墓碣)과 묘지명(墓誌銘)도 지금까지 없으니 존로(尊老)께서 한 말씀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공의 명성(名聲)과 행적(行蹟)이 입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부덕(不德)한 나의 짧은 글로 천양(闡揚)해서 더 나을 일도 없으나 그러나 그대가 간절하게 부탁하니 또 충의(忠義)의 행적을 즐겁게 읽다가 억지로 힘을 내서 서술한다.
  공의 휘는 산해(山海)며 자(字)는 덕보(德甫)요 죽림(竹林)은 그 분의 호(號)다. 증조의 휘는 희정(希正)이며 감찰(監察) 벼슬을 했고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다. 조(祖)의 휘는 초(軺)며 관찰사(觀察使)였고 고(考)의 휘는 관(寬)이며 경력(經歷)이시다. 어머니 김해최씨(金海崔氏)는 현감(縣監) 중운(仲雲)의 따님이시다. 영락원년(永樂元年) 계미년(1403)에 용궁 대죽리 집에서 공을 낳으셨다.
  공은 어릴 때부터 총명이 뛰어났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해서 일찍이 종조부 문경공에게 글을 배울 때에 「백이전(伯夷傳)」을 읽다가 세 번을 반복해서 읽고 크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사람[伯夷]이라야 만세에 강상(綱常)을 유지해 줄 수 있다”고 하니 문경공이 웃으면서 기특하게 생각하시었다. 장년(長年)이 되어서 도량과 재능이 뛰어나고 오직 정의를 실천하고 남의 훌륭한 행동을 보면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남의 나쁜 일을 보면 두려운 마음으로 멀리했으며 평소에 성실하고 곧은 마음으로 모두를 수용(受用)하는 것 같았으나 정의와 시비를 가려야하는 처지에서는 준엄해서 불의에 뜻을 굽히지 않은 것은 타고난 천성이었다. 정통(正統) 경신년(1440)에 재능과 품행으로 추천되어 창덕궁(昌德宮) 녹사(錄事)가 되고 또 주부(主簿)로 전직(轉職)되었으나 다 나가지 않으시고 말씀하기를 “왕비와 척분이 있으면서 벼슬을 하는 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부인 권씨(權氏)가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언니가 되기 때문이었다. 경태(景泰) 갑술년(1454)에 종부시부정(宗簿寺副正)이 제수되자 공은 벼슬에 뜻이 없으나 선대왕[문종]의 은덕을 입고 어린 군주[단종]에게 보답하려고 나간 것이 을해년(1455)이었다. 노산군(魯山君)으로 손위(遜位)하자 공은 항상 개탄(慨歎)하는 마음으로 지내다가 찰방(察訪)이 제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나가지 않으시고 다음해 병자년(1456)에 권자신(權自愼) ・ 성삼문(成三問) 등과 복위를 도모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삼문(三問)과 자신(自愼)이 다 국문을 당하니 공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의 뜻이니 죽지 않고 무었을 하겠는가?” 하고 집 위에 올라가서 투신자진하니 부인이 모든 서적(書籍)을 불태웠다. 그래서 가족이 다 죽는 화는 면했다. 공의 아우 수해(壽海)가 공의 여러 아들들과 같이 시신을 거적으로 염(殮)을 해서 용궁현(龍宮縣) 염송산(濂松山) 묘향(卯向)의 산에 장사(葬事)지냈으니 선대 조상의 묘역이었다.
  공은 타고난 천품(天稟)이 오직 총명하고 행동이 확실해서 시골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권세와 이익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고 부모에 효성으로 섬기고 임금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의 의지가 확실해서 목숨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으시니 자기의 의지가 일월(日月)같이 분명하게 확립된 분이었다. 평소에 저술한 것이 병자년(1456)에 불에 타서 드러나지 않은 격언(格言)들이 세상에 남겨지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은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따님과 결혼하시어 1여4남을 두시어 사위는 현감 정난원(鄭蘭元)이고 장남은 철조(哲祖)며, 철종(哲宗)은 일찍 졸하고 철명(哲命)과 철손(哲孫)은 다 후손이 있으나 기록하지 못한다.
  곽진(郭)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竹林權公旌閭記
    죽림권공 정려기문

죽림선생 정려기
上之十五年辛亥春三月에 車駕詣顯隆園하야 過露梁津할세 望見六臣祠하고 愴然興感하야 親製文致祭하고 旣還都에 遣史臣于江都하야 開秘藏하야 攷莊陵時死義諸臣하야 將加褒章할세 如六臣者를 會에 關東觀察使尹師國이 行部至寧越府하야 訪子規樓舊址하야 伐材改建 而徵文於舘閣할세 適在此時에 上聞而異之하고 遂命權自愼成勝等諸臣으로 並賜美謚하고 設壇同祭於莊陵隧閣之前하니 於是에 畿湖嶺三道儒生等이 上言曰 故宗簿僉正權山海는 卽故相臣軫之從孫이오 顯陵國舅權專之女壻也라 素負士林之望하고 與成三問等으로 交善하야 及莊陵遜位에 謝官屛跡하고 伏枕飮泣하야 及三問이 與權自愼으로 被逮하고 山海는 仰天於悒曰此天也라하고 遂從高閣自投己 而使者來收하니 山海已死에 罪止奪官하고 徙家于極邊하고 錮子孫百年하니 其節義之焯然이 無愧於六臣矣라 前年에 雖復其官階而未得與死事諸臣으로 同被褒獎하니 乞伸恩命하야 以樹風聲事下하야 攸司禮曹判書李致中이 覆奏曰多士之請이 實出公議하니 合施貤贈이라하여 命大臣議左議政蔡濟恭하야 言權山海事蹟은 雖不彰著當時나 旣被徙邊錮廢之律則其與六臣으로 同志並節을 可知니 今當莊陵諸臣表奬之日에 從多士請旌閭贈官이 恐不爲過라하니 上이 可之하고 吏曹判書洪良浩가 啓贈山海爲吏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하고 卽命嶺南守臣하야 就其舊居에 丹其門하니 山海十二世孫宗洛이 以良浩曾尹慶州에 習聞古老言하고 今又長天官이 請施華贈하고 來乞棹楔之記하니 良浩起而歎曰 嗚呼라 節莫毅於六臣이오 事莫嚴於莊陵이라 六臣之事가 雖已揚厲而炳烺其時나 事遠而無徵은 不惟人不敢言이라 亦無有知者니 如權公之偉節이 至今泯翳不章이러니 幸賴我聖上追寧考之遺志하야 勵一世於忠義하니 凡莊陵立殣之臣이 靡不博考而遍揚이로되 以權公遐遠幽閼이 亦得明彰明於數百年之後하야 旣旌其閭하고 又贈以爵하니 豈直爲權氏一門之榮哉아 將以勸萬世之爲人臣者猗歟盛矣라 余以託名爲榮에 顧何敢辭리요 謹叙其樹立大槩와 屈伸始末하야 俾揭于門하노라
  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舘事弘文舘提學 洪良浩는 撰하노라

죽림선생 정충각


죽림선생 정충기
지금 임금 정조(正祖) 15년 신해년(1791) 3월에 임금님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실 때에 노량진(露梁津)을 지나다가 육신(六臣)의 사당(祠堂)을 바라보고 슬픈 감회(感懷)를 가지시고 임금님이 몸소 제문(祭文)을 지어서 제사를 올리고 궁중에 돌아오시어 사신(史臣)을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에 보내서 사고(史庫)에 있는 기록(紀錄)을 상고(詳考)해서 단종(端宗) 때에 정의(正義)로 죽은 여러 신하들을 표창(表彰)할 때에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충신들을 찾을 때에 관동(關東)의 관찰사(觀察使) 윤사국(尹師國) 윤사국(尹師國):1728(영조 4)∼1809(순조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빈경(賓卿), 호는 직암(直庵). 대사헌·대사성을 거쳐 강원도감찰사가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공조·형조의 판서와 강화유수·한성판윤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나이 80세가 되자 숭록대부(崇祿大夫)의 관계에 승진하여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서예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조정의 금보(金寶)·옥책(玉冊)과 당시 사찰·누관(樓觀)의 편액(扁額)을 많이 썼다.
이 영월(寧越)을 지나다가 자규루(子規樓) 자규루는 원래 1428년(세종 10)에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고 부르던 건물인데 단종이 영월군 남면(南面) 광천리(廣川里) 국지산(菊芝山) 밑에 있는 청령포로 유배된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자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종은 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어 심정을 토로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자규루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옛 터를 찾아 나무를 베고 자규루(子規樓)를 중건(重建)하고 중앙부서(中央部署)에 글을 보낸 것이 바로 이때였다.
  정조대왕(正朝大王)이 그 말을 듣고 이상(異常)하게 생각하고 곧바로 권자신(權自愼) ・ 성승(成勝) 성승(成勝):?-1456(세조 2).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 호는 적곡.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아버지이다. 경상도병마절제사, 중추원부사, 의주목사,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도총관에 이르렀다. 아들 삼문과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질·유응부·박쟁 등과 단종복위를 꾀했다. 1456년 김질의 밀고로 발각됨에 따라 모의하던 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했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홍주 노은동에 있으며, 장릉(단종의 묘) 충신단에 배향되고, 동학사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이다.
 등에게 장렬(壯烈)하다는 시호(諡號)를
자규루(子規樓)
 내리고 장릉(莊陵)의 제각(祭閣) 앞에 단(壇)을 만들어 같이 제사지내게 하니 이때에 기호(畿湖)와 영남(嶺南) 삼도(三道)의 유생(儒生)들이 상소문(上疏文)을 올려서 요청하기를 “옛날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권산해(權山海)는 바로 정승 진(軫)의 종손(從孫)이고 권왕비(權王妃:顯德王后)의 아버지 권전(權專)의 사위인데, 원래 사림(士林)의 신망(信望)이 높았고 성삼문(成三問) 등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단종이 손위(遜位)할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해서 눈물을 흘리다가 성삼문과 권자신이 같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산해(山海)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이것은 하늘의 명(命)이다’ 하고 곧바로 높은 집에 올라 뛰어내려 자진하니 체포(逮捕)하러 갔던 자들이 산해(山海)가 이미 죽었기에 삭탈관직(削奪官職)의 죄만 내리고 온 식구(食口)를 먼 곳으로 보내고 자손이 백년동안 금고(禁錮)를 당했으니 빛나는 절의(節義)는 사육신(死六臣)에 못지않습니다. 전년(前年)에 비록 그 관직(官職)은 복직(復職)되었으나 다른 신하들처럼 같은 포장(褒獎)을 받지 못했으니 은명(恩命)을 내리시어 그 풍성(風聲)을 후세에 남겨주십시오” 라고 했고,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치중(李致中)이 다시 주달(奏達)하기를 “많은 선비들의 요청은 참으로 공적인 의론이니 증직을 더 내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고 해서 대신(大臣)들에 명하여 논의하게 하니 좌의정(左議政)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권산해(權山海)의 사적(事蹟)이 비록 그 당시(當時)에 크게 나타나 있지 않으나 이미 사변(徙邊)과 금고(禁錮)의 벌(罰)을 받은 것을 보면 육신(六臣)과 같은 뜻으로 절의(節義)를 지킨 것을 알 수 있으니 지금 단종(端宗) 때 제신(諸臣)들과 같이 표장(表奬)해서 여러 선비들의 요청에 따라 정려(旌閭)를 내리고 증직(贈職)을 하는 깃이 아마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가하다” 고 하시고 이조판서(吏曹判書) 홍양호(洪良浩) 홍양호(洪良浩):1724~1802. 조선 시대 영조 때 실학파의 거두이며 대학자이다. 박학한 문장으로 영조의 총애를 받고 그 이름을 떨쳤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초명은 양한(良漢)이었으며, 자는 한사(漢師)이고, 호는 이계(耳谿),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대사헌·평안도 관찰사, 이조 판서, 양관(兩館) 대제학 겸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이계집? 37권 외에 많은 저서가 있다.
가 또 “산해(山海)를 이조참판(吏曹叅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의 증직(贈職)을 내리자”고 계문(啓聞)해서 바로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命)해서 그 옛날 살던 곳에 붉은 문(門)을 세우니 산해(山海)의 12세손 종락(宗洛)이 나를 찾아 기문(記文)을 부탁하는데, 나 양호(良浩)는 전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왔을 때에 고로(古老)를 통해서 익히 들은 말이고 지금 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화려(華麗)한 증직(贈職)을 내리자고 주청(奏請)했는데, 정려기(旌閭記)를 지어달라고 하니 나 양호(良浩)가 탄식하면서 말한다.
  아! 육신(六臣)같이 굳은 절의(節義)가 없고 단종(端宗) 사건(事件)같이 엄중(嚴重)한 일이 없는데 육신(六臣)의 일은 이미 그 당시에 다 드러났으나 오래된 일을 증거(證據)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도 없어서 권공(權公)같은 위대한 절의(節義)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하게도 우리 임금님이 훌륭한 선대(先代) 왕 원문의 ‘영고(寧考)’는 선왕(先王), 특히 천명(天命)을 받아서 천하를 편안하게 한 선왕을 이르는 것으로 ‘영왕(寧王)’이라고도 한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의 “영왕이 나에게 큰 보배인 거북을 물려주심은 하늘의 밝은 명을 소개하신 것이라[寧王遺我大寶龜, 紹天命]”고 한 구절에 채침(蔡沈)이 주를 달아, 영왕(寧王)은 무왕(武王)이니, 아래의 글에는 또 영고(寧考)라고 하였다.
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온 세상에 충의(忠義)를 장려(獎勵)하게 하시니 무릇 단종(端宗)에 목숨을 바친 신하들을 모두 찾아서 선양(宣揚)하게 되었으나 권공(權公)은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다가 수백 년 후에 알려지게 되어서 이미 그 고향에 정려를 세우고 또 증직이 더해지니 이것이 어찌 권씨 한 가문의 영광일 뿐이겠느냐? 앞으로 만세를 지나도록 신하가 된 자들이 장한 충의를 본받게 될 것이다. 나도 이 기문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삼가 정려를 짓는 대략적인 내용과 본말(本末)의 연유(緣由)를 서술(敍述)해서 정려각(旌閭閣)에 걸게 한다.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홍양호는 찬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旌忠閣記
    정충각 기문
易稱立人之道曰仁與義。人之道。惟是二者而已。觸之萬事而皆然。試以事君者言之。當治平之世。將順其美仁也。匡救其惡義也。當患難之時。後身先君仁也。臨難不避義也。故聖人曰。殺身成仁。又曰。舍生取義。其義顧不重邪。竹林權公諱山海。字德甫。永樂癸未。生于龍宮縣之大竹里第。自幼孝友勤學。讀伯夷傳。三復太息曰。有是人然後。可以扶萬古之綱常。從祖文景公軫聞而奇之。及長。好善嫉惡。惟義是求。公於文廟爲婭。以椒親不欲應擧。無仕進意。惟以經史自娛。正統庚申。以才行薦。爲昌德官錄事。轉爲主簿。甲戌。除宗簿寺僉正。公感先朝之眷遇。欲報效於冲君。始就職。乙亥。端宗遜位。公素與成三問等友善。常懷慨惋。謀復舊君。事覺。公婦弟自愼及三問等皆就捕。公仰天雪涕曰。此天也。不死何爲。遂投閣自殞。以其不就鞫故。雖不孥籍。猶命追削官爵。全家徙邊。廢錮子孫百年。遭變之日。夫人取書籍焚之。平日著述不傳於世。人皆惜之。嘉靖戊午禁解。公之孫經始登上庠。公辦命殉節。與六臣無異。郭徵士撰誌曰。殺身不疑。炳如日星。龍宮邑誌。亦曰與六臣同事。在家自盡。公論久而不泯矣。但其禁錮徙邊之後。子孫不振。至于三百餘年。而未蒙伸雪之恩。公十二代孫宗洛十度上言。該司以事在久遠。寢不以聞。己酉四月。孝昌墓動駕時。擊錚鳴寃。遂命復爵。今辛亥二月弘陵動駕時。三道儒生宋文箕等。上言請㫌贈之典。又命旌閭。贈嘉善大夫吏曹參判。實曠世異數也。時上於莊陵立殣諸臣崇報之日。公之㫌贈。適當其會。使公之誠節幽鬱而不彰者。凡三百三十六年而復顯于世。豈不異哉。公之子孫。遂立旌門於公所居大竹里墓下。扁曰旌忠閣。旌門與扁額。洪吏判良浩筆也。樑頌睦都正萬中文也。又屬紀文于不佞。不佞老耄。不敢當而終莫之辭。謹書如右。噫。自古忠義之士。雖功未存於社稷。力不救於顚覆。而視死如歸。安之若命者。臣節當然也。廉頑立懦之風。百世而不磨。四方人士之過此閣而見此文者。孰不感慨而興慕乎。
  時上之十五年辛亥夏。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廣成君 漢山安鼎福 謹記。

?주역?에 말하기를, “사람을 세우는 도리(道理)는 인(仁)과 의(義)이다” 하였으니, 사람의 도리는 오직 이 두 가지 뿐이다. 만 가지 일에 부딪쳐도 모두가 그러한데, 우선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써 말해보면 치평(治平)의 세상을 당하여 그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순종하는 것은 인(仁)이요, 그 악(惡)을 바로잡아 주고 말리는 것은 의(義)며, 환란의 때를 당하여 내 몸을 뒤로 하고 임금을 우선으로 보호하는 것은 인(仁)이요, 난리에 임하여 피하지 않는 것은 의(義)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자신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룬다” 하고, 또,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하였으니, 그 뜻이 중(重)하지 않은가?
  죽림(竹林) 권공(權公)은 이름이 산해(山海)요 자는 덕보(德甫)이니 태종 3년 계미년(1403)에 용궁현(龍宮縣) 대죽리(大竹里)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학문에 부지런하였는데, 「백이전(伯夷傳)」을 읽으면서 세 번 되풀이해 읽고는 크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이런 사람이 있은 뒤에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을 부지할 수 있다” 하니, 종조(從祖) 문경공(文景公) 진(軫)이 듣고 기특하게 여겼다. 장성해서는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여 오직 의(義)만을 추구하였다.
  공은 문종(文宗)에게 동서(同壻)가 되는데, 왕비의 인척이라 하여 과거에 응하려하지 않고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아 오직 경사(經史)만을 스스로 즐겼다. 세종 22년 경신년(1440)에 재행(才行)으로 천거되어 창덕궁녹사(昌德宮錄事)가 되었다가 옮겨서 주부(主簿)가 되었고, 갑술년(1454)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문종(文宗)의 은총을 생각하여 어린 단종(端宗) 임금에게 보답하고자 비로소 취임(就任)하였다. 을해년(1455)에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평소 성삼문(成三問) 등과 절친하게 지내오던 공은 항시 분개(憤慨)하고 슬퍼하며 옛 임금 단종(端宗)을 복위할 계획을 세웠는데, 일이 발각되어 공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및 성삼문 등이 모두 체포되었다. 공이 하늘을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는 천명(天命)이다. 죽지 않고 무엇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집에서 몸을 던져 자결(自決)하였다. 국문(鞠問)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처자(妻子)를 관노(官奴)로 삼고 재물을 적몰(籍沒)해 들이는 노적(孥籍)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관작을 추삭(追削)하고 전 가족을 변경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자손을 100년간 폐고(廢錮)시킴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명종 13년 무오년(1558)에 해금(解禁)되자 공의 손자 경(經)이 비로소 성균관에 올랐다.
  변을 당하던 날에 부인이 서적을 모조리 불태워버려 평소에 저술한 것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 공이 목숨을 버려 순절(殉節)한 것은 육신(六臣)과 다를 바가 없다. 징사(徵士) 곽진(郭)이 지은 묘지(墓誌)에, “목숨을 버리면서도 주저하지 않았으니 밝기가 해와 별과 같다” 하였고, ?용궁읍지(龍宮邑誌)?에도, “육신(六臣)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하다가 집에서 자결하였다” 하였으니, 공론(公論)이 오래도록 민멸(泯滅)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금고(禁錮)되고 변경으로 강제 이주(移住) 당한 뒤로는 자손이 부진(不振)하여 300여 년이 지나도록 신설(申雪)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다.
  공의 12대손 종락(宗洛)이 열 번이나 상언(上言)하였으나 해당 관청에서 오래된 일이라 하여 덮어두고 아뢰지 않았다. 정조(正祖) 13년 기유년(1789) 4월에 대가(大駕)가 효창(孝昌) 묘소에 거둥하실 때에 격쟁(擊錚)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자 드디어 복작(復爵)을 명하였고, 금년 신해년(1791) 2월에 대가(大駕)가 홍릉(弘陵)에 거둥하실 때에 경기(京畿) ․ 호남(湖南) ․ 영남(嶺南) 세 도(道)의 유생 송문기(宋文箕) 등이 상언(上言)하여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의 은전(恩典)을 청하자 다시 정려를 명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하였으니, 실로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총이다. 이때는 임금께서 단종(端宗)을 위해 순절한 모든 신하에게 융숭하게 보답하신 즈음이었는데, 공의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이 마침 이 기회를 만났던 것이다. 공의 충성과 절의가 묻혀 드러나지 못한 지가 무릇 336년이었다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으니, 어찌 기이(奇異)하지 않은가?
  공의 자손이 마침내 공이 살았던 대죽리(大竹里) 묘소 아래에 정문을 세우고 편액(扁額)을 정충각(旌忠閣)이라 하였는데, 정문(旌門)과 편액은 이조판서(吏曹判書) 홍양호(洪良浩) 홍양호(洪良浩) : 홍양호(洪良浩, 1724년 ~ 1802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이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사헌부대사헌,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 예문관제학, 홍문관제학, 형조판서와 양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집인 ?이계집?을 비롯하여 ?육서경위(六書經緯)?·?군서발배(群書發排)?·?격물해(格物解)?·?칠정변(七情辨)?·?해동명장전?·?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흥왕조승(興王肇乘)?·?삭방습유(朔方拾遺)?·?북새기략(北塞記略)?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글씨도 잘 써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진체와 당체(唐體)에 특히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이다.
의 글씨요, 상량문(上樑文)은 도정(都正) 목만중(睦萬中) 목만중(睦萬中) : 1727 ~ 1810. 조선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이다. 1759년(영조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6년(정조 10) 도사(都事)로서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임명되었다. 태천현감(泰川縣監)을 거쳐 1797년(정조 21) 병조참의, 승지(承旨)를 지내고, 1798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남인(南人) 시파(時派) 계열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주도하였다. 1806년(순조 6)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내고, 180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의 글이다. 다시 기문(記文)을 나에게 부탁하니 내가 늙고 정신이 없어 감히 감당할 수 없지만, 끝내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위와 같이 쓴다.
  아! 예로부터 충의의 선비는 비록 공(功)이 사직(社稷)을 보존하지 못하고 힘이 전복(顚覆)함을 구하지 못할지라도 죽음 보기를 응당 돌아가야 할 곳처럼 하여 운명으로 알고 편안하게 처신했으니, 이는 신하의 도리가 당연히 그래야하기 때문이다. 완악(頑惡)한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약(懦弱)한 자를 확고하게 하는 맹자가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지아비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지아비는 입지(立志)하게 된다”라고 한 말을 축약한 것이다. ?孟子 萬章下?
 기풍은 백세가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곳을 지나며 이 글을 보는 사방의 인사 가운데 감개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정조대왕 15년 신해년(1791) 여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광성군(廣成君) 한산(漢山) 안정복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실학자이자 역사가이지만 성리학자이기도 하여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문을 해석,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775년 세손익위사 익찬으로 세손(정조)를 보도할 때는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를 비교하는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자득하였고, 이황이 선현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하기도 했다.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받았고, 정조 즉위 후 남인을 중용하였으나 스스로 관직을 사양하였다. 그 뒤 특명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작되었다. 1790년 이후 천주교가 보급되면서 남인내에서도 천주교도가 확산되자,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였다. ?동사강목?과 「계갑일록」의 저자이자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았다. 사후 천주교 비판의 공로로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에 추증되었다. 정조의 세손시절 스승 중의 한사람이다. 제천 태생이다.
 삼가 기(記)하다. <국역:권기갑(權奇甲)>

    旌忠閣重修後識
    정충각 중수후지
正宗大王十五年辛亥。故宗簿寺僉正。贈吏曺叅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竹林先生權公㫌忠閣成。吏曺判書。兼弘文館藝文館大提學。豐山洪良浩。記其事。越六十四年。今上甲寅。重修㫌閣。幷記板而新之。公之孫周運。屬余一言識于後。以彙寧爲朴忠正外裔也。公與朴忠正諸公。同志並節。共被聖朝表奬。彙寧。與有感焉。義何敢辭。嗚呼。公自幼。勤學篤行。與朴忠正諸公。爲道義交。特以端廟懿戚。不樂仕進。未及與兩相公諸學士。受託孤之命。然光廟除官。辭不肅命。與朴忠正之啓不書臣。成忠文河忠敬之官不受祿。同而身在下僚。不得叅別雲劒侍衛之列。則寧屛退竹林。守自靖以獻之義而已。及其昌德宴罷。鼎鑊傍肆。則公歎曰諸公幸得死所。吾何獨不死。爲朴之欲隕於慶會樓者。政吾今日事也。復誰止之。是公自處。距六臣之死。不多日也。若使公知逮命之繼至。當整冠帶。少竢之與六臣。同死于王庭。共瘞于露梁之阡矣。公必以不爲此爲恨也。然錦城君祭壇百年。枯杏更生於雲谷躋配之庭。嚴叅判遺墟一道。晴虹復起於竹里宣敎之日。是知公之靈。尙不死。風馬雲旗。徃朝于莊陵。退與六宗英。四懿戚。三相。三大夫。生死六臣。兩叅賛。鎭撫。府使。文敬。文獻之子若孫。忼慨翺翔于淸泠浦子䂓樓下矣。綽楔于此。不過表其故里也。况其事則洪公已記之詳。更安用識爲㢤。竊自書其所嘗感者。敢寓托名之幸云。 李彙寧撰) 이휘령(李彙寧) :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군목(君睦), 호는 고계(古溪).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귀응(李龜應), 아버지는 이승순(李承淳),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백부는 이지순(李志淳), 백모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백부에게 입양되었다.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다. 1816년(순조 16) 생원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영릉참봉이 되고 1821년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도사를 거쳐 호조좌랑, 동복현감이 되고, 서산군수, 영천군수, 밀양부사,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 동래부사에 부임했으나 감사에 거슬려 체직되었고 18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855년 돈령부도정을 거쳐 1861년 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문집으로 『고계집(古溪集)』이 있다. 기타 『십도집설(十圖集說)』, 『퇴계선생예설유편(退溪先生禮說類編)』 등의 저술과 한글로 된 시가 「방경무도사(邦慶舞蹈辭)」와 「팔고조도(八高祖圖)」가 전한다.


정조 재위(在位) 15년 신해년(1791)에 고(故)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죽림선생(竹林先生) 권공(權公)의 정충각(旌忠閣)을 짓고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홍양호(洪良浩)가 그 일에 대한 기문(記文)을 쓴 것이 64년이 되었다.
  지금 상감[철종(哲宗)]의 갑인년(1854)에 정려각(旌閭閣)을 중수(重修)하고 아울러 기문 현판을 새로 하면서 공의 후손 주운(周運)이 나에게 후지(後識) 한 편을 부탁하니 나[휘녕(彙寧,1788-1862)]는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외손(外孫)이고 공은 충정공(忠正公) 등 여러분과 같은 뜻으로 같이 절의를 지키시어서 함께 나라의 표창을 받았으니 나도 공의 후손과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 도의(道義)로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아!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품행이 독실해서 박충정공(朴忠正公)과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했고 특히 단종(端宗)과 인척(姻戚)이어서 벼슬하기를 즐겁게 생각하지 않으시어서 두 상공(相公)과 여러 학사(學士)들과 같이 세자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제수되시어 바로 몸을 일으켜 명에 따른 것은 아마도 집현전(集賢殿) 회의(會議)가 있던 날에 제공(諸公)과 같이 초대되어 같이 일을 논의하기를 기대했을 것이고 세조(世祖)가 우관(郵官:察訪)으로 임명했을 때에 건강을 이유로 직책을 받지 않은 것은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계문(啓聞)에 신(臣)이라고 말하지 않은 분과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과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도 녹(祿)을 받지 않는 분과 같이 세조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낮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죽림공은 편하게 은퇴해서 스스로 선대왕에게 보답하려는 생각뿐이었고 창덕궁(昌德宮)의 연회(宴會)가 끝나고 죽임이 자행(恣行)될 때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제공(諸公)들은 다행하게도 죽을 곳을 얻었으나 내 홀로 죽지 못한 것은 박충정공(朴忠正公)이 경회루(慶會樓) 아래 떨어져 죽으려하니 바로 오늘 나의 일이니 내가 아니면 누가 말리겠는가?” 라고 했으니 이것은 공이 육신(六臣)의 죽음과 거리를 두려고 한 것인데, 몇 날이 지나지 않아 나라에서 체포하러 올 줄 알았다면 공께서는 당연히 조금 기다렸다가 의관(衣冠)을 가지런히 하고 육신(六臣)과 같이 대궐에서 죽어서 노량진 언덕에 묻히고 장릉(莊陵)에서 제사를 받아도 공께서는 반드시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금성군(錦城君) 제단(祭壇)에 100년이 된 은행나무가 운곡서원 뜰에서 소생(蘇生)했고 엄참판(嚴參判)의 유허비(遺墟碑) 글에 “반포문(頒布文)이 내려오던 날 죽리에서 청천 하늘에 무지개가 생겼다”고 하니 이것은 공의 영(靈)이 아직까지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고 바람 타고 구름 타고 단종릉에 조회하러 가시어서 물러나서는 육신(六臣)과 종영(宗英)과 사의척(四懿戚)과 삼상(三相) ・ 삼대부(三大夫)와 생육신(生六臣) ・ 사육신(死六臣)과 양참찬(兩參贊)과 진무(鎭撫) ・ 부사(府使) 문경(文敬) ・ 문헌(文獻)의 아들 ・ 손자와 정의의 마음으로 청령포(淸泠浦) 청령포(淸泠浦)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남한강 상류에 있는 지명. 이곳은 1457년(세조 3) 세조에 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의 자규루(子規樓)와 여기 고향에 있는 정려각에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홍공(洪公:홍양호)의 기문에 이미 자세히 말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더 쓰겠는가? 느낀 바를 스스로 삼가 쓰서 감히 내 이름을 붙이는 다행(多幸)을 붙였다. 이휘령(李彙寧) 이휘령(李彙寧) :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군목(君睦), 호는 고계(古溪).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귀응(李龜應), 아버지는 이승순(李承淳),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백부는 이지순(李志淳), 백모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백부에게 입양되었다.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다. 1816년(순조 16) 생원시에 합격하여 이듬해 영릉참봉이 되고 1821년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도사를 거쳐 호조좌랑, 동복현감이 되고, 서산군수, 영천군수, 밀양부사,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 동래부사에 부임했으나 감사에 거슬려 체직되었고 18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855년 돈령부도정을 거쳐 1861년 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문집으로 『고계집(古溪集)』이 있다. 기타 『십도집설(十圖集說)』, 『퇴계선생예설유편(退溪先生禮說類編)』 등의 저술과 한글로 된 시가 「방경무도사(邦慶舞蹈辭)」와 「팔고조도(八高祖圖)」가 전한다.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旌忠閣上樑文
    정충각 상량문
殉以道 復殉以其身 無待乎受六尺託
知有君 不知有天命 所信者惟一寸心

事去而志節愈堅
論定而名蹟始著

惟故僉正贈吏曹參判竹林權先生

求仁而得
移孝而爲
少日葭莩之嫌 恥攀援於戚里
太陽葵藿之性 誓扶支於宗祊

喟憑心於腐令 蠶室之編 伯夷之風聞者
嘅扼腕於泰山 鴻毛之辨 袁安之涕自然

旣賦之以疾風勁草之姿
又置之於衝飈激浪之會

當景泰丙子之十月
而忠節甲乙於六臣

膺宗正之除亟
回偃蹇之初志

辭郵丞之命則
是顧戀之危衷

各用職何罪乎 勇徒奮於拒轍
所欲爲極難耳 身竟殲於墮樓

藐矣子孫之流離 爾來三百餘歲
蕩然文籍之灰燼 誰識一介孤忠

冲辟之顯諡追揚 毅魄亦應感泣
聖朝之褒典獨漏 志士所共嗟傷

雲谷新祠 俎豆縱依於名祖
魯陵寒食 壇壝未列於諸公

迺者殘裔之鳴號
果然重宸之矜惻

一氣感應 適値子規樓重修
百代風聲 厥惟商容閭古事

旣自天而擧盛典
豈無地之表遺芳

歲紀已邈於六周 尙流傳生長之里
山脈遙連於百粵 宛髣髴往來之魂

洛東之江水廻還 想萬折兮朝宗古道
河濱之祠屋隣近 宜一體於芬苾千秋

就遺墟而迺營門閭
諏吉日而爰揭棹楔

舊銜新秩恩極聖世之哀榮
大筆特書名尊擧國之矜式

台州儼正學之廟 三綱不頹
桐江屹子陵之臺 一絲增重

江山不改於古宅
日月回照於重泉

地近藁葬之山 血餘化碧
楣留板揭之字 心猶炳丹

陳兒郞六偉之辭
使人臣二心者愧

抛樑東 鶴駕山光二白通
恍惚尻輪來去地 翠華如在暮雲中

抛樑南 迬蹟傷心未忍談
報主何須集賢殿 顯陵歸拜不曾慚

抛樑西 花間鵑血不勝啼
莊陵近日新添誌 成朴芳名眞與齊

抛樑北 投閣無人知舊宅
自是貞心保歲寒 豈緣休戚在椒掖

抛樑上 繞屋雲山皆北向
春竹暮花何處邊 涓涓隔水遙相望

抛樑下 故山桑梓連松檟
覆巢餘卵雲仍繁 時節年年麥飯灑

伏願上樑之後

過者必式
巋然長存

微斯人 誰歸審取舍於熊掌
無君子 焉取聳觀瞻於烏頭
      睦萬中 撰

도(道)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자기 양심에 따라 목숨을 바친다면 세자를 부탁하지 않아도 도울 것이고
왕에게 충성할 마음이 있다면 하늘의 명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오직 자기 양심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건을 지난 뒤에 절의가 더욱 견고해지고
논의가 정해져야 명성과 업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생각하면 고 첨정 이조참판 죽림 권선생은

인을 구해서 인을 얻었고
인을 효로 옮겨 실천하시었다.

젊을 때는 인척의 혐의가 있어서 초방(椒房)의 연줄로 출세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으니
인금님을 위한 충성심은 천성으로 타고나시어서 사직(社稷)을 보존하려고 맹세하시었다

아! 부형(腐刑) 받은 태사령(太史令)이 잠실(蠶室)에서 지은 책 腐令蠶室之編 : 사기(史記)를 말한 것임. 사기는 부형(腐刑)을 받아 잠실에서 병간호를 한 일이 있는 태사령 사마천이 지은 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에 마음을 두어 백이(伯夷)의 기풍을 듣는 자이고
아! 태산(泰山)에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자기 목숨같이 가볍게 버리니 원안(袁安)의 눈물이 자연스럽게 나왔네. 원안(袁安) : 후한(後漢) 사람으로, 낙양(洛陽)에 폭설이 내렸을 적에, 사람들이 눈을 치우고 밖으로 나와서 걸식을 하였는데, 원안의 집만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으므로, 이미 굶어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낙양 영(洛陽令)이 의심한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치우고 들어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원안이 뻣뻣이 드러누워 있다가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있는 판에,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게 여겨져서 그랬다〔大雪人皆餓 不宜干人〕”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낙양 영이 훌륭하게 여겨 그를 효렴(孝廉)으로 천거했다는 원안와설(袁安臥雪)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이미 타고난 기질은 사나운 바람에 꺾이지 않은 풀이고
또 여울물과 회오리바람이 부딪치는 시대를 만난 것이

경태 병자년(1456) 시월이니
충절은 육신과 비등(比等)했고

사직(社稷)의 어려움을 당해서는
높고 견고한 초지(初志)를 지켰고

찰방의 직명 마다했으니
이것은 옛 임금을 사모한 것이다

각자 자기 직분대로 사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용기를 뽐내었네
하려는 일 매우 어려웠기에, 자신이 높은 루에 올라 떨어져서 생을 마치시었다

한미(寒微)한 자손 멀리 유배되어 삼백년이 되었고
불에 타서 문적이 없으니 이 분의 충절 누가 알겠는가?

어린 임금[단종]의 시호를 높여 천양하니 공의 강직한 혼도 감읍을 했을 것이고
조정에서 누락된 분[죽림공] 포상하니 뜻을 가진 선비들 다 같이 슬픈 감격을 짓네

운곡에 새로 지은 사당에는 명망 있는 시조님 따라 제사 올리지만
장릉에서 단 터에서 한식제사는 제공들과 같이 모시지 않았다네

그래서 잔손들이 징을 울리며 왕에게 애원해서
과연 나라에서 거듭 가긍(可矜)히 여겼으니

같은 신의 기운이 감응한 것은 자규루 중수할 때 시작이 되었고
백세의 풍성을 남기려고 옛 상용(商容) 상용(商容) :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사람. 주(紂)에게 직간하다가 쫓겨났는데 무왕(武王)이 은(殷)을 정벌한 후 그의 여리(閭里)에다 정표(旌表)를 하였다. ?書經 武城?
의 고사(古事)같이 정려를 세웠네.

이미 왕으로부터 성전이 내려졌으니
정려각을 세우는 일이 어찌 없겠는가?

세월은 이미 오래되어 6주갑(週甲)[360년]이지만 아직까지 생장하신 마을에 명성이 남았고
산맥은 멀리 백 겹이나 이어졌으나 혼은 장릉으로 왕래하는 것 같네

낙동강 물굽이 돌고 돌아 만 번이나 꺾인 것을 생각하니 서울 가는 옛길 같고
하빈(河濱)에 있는 사옥(祠屋)은 인접해 있으니 천년이 흘러도 당연히 같이 제사 올려야겠네.

사시던 터에 이렇게 정려각(旌閭閣)을 세우는데.
좋은 날 골라서 집 지어 현판을 붙이니

옛 관직에 새로운 증직은 성세의 은택에 따라 슬픔이 영광으로 바뀌었고
대서특필로 쓴 큰 글씨에 높은 명성은 온 나라에 자랑이 되었네.

태주(台州)에 의젓한 정학(正學)의 사당 台州儼正學之廟 : 남송(南宋) 무주(婺州) 금화(金華) 사람 왕백(王柏, 1197~1274)이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가지고 태주(台州)의 후진(後進)을 가르친 일을 말함. 「숙흥야매잠」은 4언의 운문(韻文)으로 지은 잠언(箴言)이다. 왕백은 자가 회지(會之) 또는 백회(伯會)이고, 호는 장소(長嘯) 또는 노재이다. 저서에 ?독역기(讀易記)?, ?독서기(讀書記)?, ?시변설(詩辨說)?, ?천문고(天文考)?, ?지리고(地理考)? 등이 있다.
이 있어서 삼강(三綱)을 유지함과 같고
동강(桐江) 엄자릉(嚴子陵)의 높은 조어대 桐江屹子陵之臺 : 은자(隱者)의 낚시터를 말함. 동강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 엄광(嚴光, 자는 자릉)이 낚시하던 곳이다. 엄광은 광무제와 어릴 때 같이 공부한 친구로, 광무제가 왕위에 오른 뒤 찾아 맞이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맡겼으나 벼슬을 싫다고 하고 동려현(桐廬縣) 남쪽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엄광이 낚시하던 곳이 동려현 남쪽에 있으므로 동강이라 한 것이다.?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에 낚싯줄이 하나 더 있게 되었네.

고향의 강산은 변함이 없어서
묘역에 일월이 다시 비치니.

정려 터는 거적 덮어 장시지낸 묘와 가까우니 피가 푸른 풀로 변했고
문 위에 걸린 현판 글에는 일편단심이 붉게 빛난다.

아랑곡 여섯 절 노래하니
두 마음 가진 신하들은 부끄러울 것이다.

대량(大樑)을 안고 동쪽을 향해서 노래한다.
학가산 빛이 소백산 태백산과 통하니
선생의 혼이 신마(神馬) 타고 왕래하는 곳이고
선생의 행차가 저녁 구름 위에 계시는 것 같네.

대량을 안고 남쪽을 향해서 노래한다.
옛 일들은 마음이 아파서 차마 말할 수 없다
집현전 학사만이 국왕의 은혜 갚는단 말인가?
선생은 현릉에 가시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대량을 안고 서쪽을 향해서 노래한다.
꽃 사이에 피나게 울던 두견새는 울지도 못하고
요사이 장릉지에 기록이 더 첨가되어서
선생은 성삼문 박팽년과 같이 방명(芳名)에 올랐다네.

대량을 안고 북쪽을 향해서 노래한다.
고택에 와보니 집 위에서 투신한 일 아는 사람 없으나
투신한 일 때문에 창송(蒼松)같이 곧은 마음 남겼으니
부귀빈천이 어찌 초방(椒房)과의 인연으로 이루어졌겠는가?

대량을 안고 하늘을 쳐다보고 노래한다.
집 주위의 산들이 모두 서울로 향해 있으니
봄이면 대나무 저녁이면 꽃들이 끝없이 무성한데
줄줄 흐르는 물이 가려져서 멀리 바라볼 뿐일세.

대량을 안고 땅을 내려다보고 노래한다.
고향 마을 묘역과 이어져 있으니
어려움을 겪고 살아온 후손이 번성해서
해마다 계절마다 제사지네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는

길 가는 나그네도 반드시 경의를 표하고
이 집은 오래도록 우뚝하게 유지되게 하십시오.

선생이 아니었다면 누가 목숨을 버리고 정의를 지키려 했겠습니까?
군자가 없었다면 어찌 높이 솟은 정려각(旌閭閣)을 볼 수 있겠습니까?
  목만중(睦萬中) 목만중(睦萬中) : 1727(영조 3)∼1810(순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 1759년(영조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6년(정조 10) 도사(都事)로 재직 중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임명되었다. 관직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여와집(餘窩集)?이 있다.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竹林節士傳
    죽림절사 전
外史氏曰殷之亡。伯夷叔齊。天下之大老也。其義當死。故死之。殷之小臣。亦有從死者乎。曰否。晉奚齊卓子之亂。荀息受遺托者也。其義當死。故死之。晉之小臣亦有從死者乎。曰否。余以是知竹林權公山海以小臣殉節於端宗。卓乎其尤難。亦可見吾東方風敎之美。軼殷晉而過之。吁何盛哉。其傳曰。權公山海字德甫。安東人。始祖幸。爲高麗太師。曾祖希正監察贈左議政謚文靖。祖軺麗朝文判事。皇考寬經歷。公以永樂元年生。幼從從祖文景公軫。受伯夷傳。三復太息曰。微斯人。何以扶萬古綱常。及長不治家人生產。亦不爲擧子業。日以經學敎授生徒。居家以孝友聞。天性恂恂以和。未甞嶄絶露圭角。至爭辨義利。截然有不可犯者。正統庚申以才行薦授錄事。轉主簿。皆辭不就。以公夫人戚聯椒掖。故不欲冒進也。景泰甲戌。超授宗簿寺僉正。公乃就職曰以未報於先王者。報之於冲君。吾志也。及乙亥端宗遜位。公悲惋不自勝。枕席上常有涕泣處。尋除察訪以疾辭。明年丙子。舊臣成三問,朴彭年等六人謀復端宗。事覺誅死。公素與成公友善。實預其謀。知志不遂。投閣而死。公之夫人悉取家藏書籍火之。以故得免孥戮之禍。子孫猶廢錮百年。噫。成朴諸公受集賢殿遺託。義固當死。公一蔭官耳。禮所謂朝不坐燕不與者也。亦能殺身而殉君。雖謂東方風敎軼殷晉而過之。寧非然乎。其三復伯夷傳也。已有伯夷之心。卒成伯夷之節。此豈一時感慨倉卒捐生者所可比邪。公生於龍宮之大竹里。以竹林自號。豈亦慕孤竹之風歟。成朴諸公位高顯。刑禍亦慘。明白死。故有名後世。至今赫然也。公官卑。又自决死。死而名不顯。旣百年。子孫之禁錮始解。孫經與從子應星俱升上庠。公之事蹟始有所記載。十二代孫宗洛。今上己酉籲寃於輦路。有司以聞。上嘉公之節。特命追復官爵。又聞慶州之雲谷太師廟。以公配食。公之名節。始爲國人所知。凜凜與成朴諸公幷稱於世。噫。史所稱徒以身膏草野誰復知之者。陋哉降虜衛律之言也。其卒無知乎哉。其卒有知如是夫。然若權公之心。知義當死而已。人之知不知。又何恤焉。世有如此之人。而能言之士不爲之一言。則亦何以勸天下後世爲人臣者乎。余於伯夷傳末。重有所感歎。雖非靑雲之士。不忍使忠義之蹟湮沒而無稱。遂爲權竹林傳。
  李獻慶撰

야사(野史)의 기록에 “은(殷)이 망하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천하에 큰어른이어서 정의(正義)로 죽어야하기 때문에 죽었으나 은(殷)나라 서민들도 역시 따라서 죽었는가?”하였는데 그렇지는 않다. 진(晉)나라 해제(奚齊)와 탁자(卓子)의 난(亂) 이극(里克)은 진나라의 대부이다. 두 임금은 해제(奚齊)와 탁자(卓子)이며, 한 명의 대부는 순식(荀息)이다. 진 헌공(晉獻公)이 여희(驪姬)를 총애한 나머지 태자 신생(申生)을 폐하고 그녀의 소생인 해제를 세우려 하였다. 진 헌공이 죽자 순식이 해제를 세웠는데, 이극이 상차(喪次)에서 해제를 시해하였다. 순식이 또 탁자를 세우자, 이극이 또 탁자를 조정에서 시해하고 순식도 죽였다. ?春秋左氏傳 僖公9年?
에 순식(荀息)은 왕에게 부탁을 받은 사람이니 정의(正義)로 당연히 죽어야하기 때문에 죽었지만 진(晉)나라 낮은 관료들도 따라 죽었는가? 그것은 아니다. 나는 그래서 이 죽림(竹林) 권공(權公) 산해(山海)는 지위가 낮은 신하지만 단종(端宗)에 순절(殉節)했으니 더욱 실천하기 어려운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또 우리 동방에 아름다운 기풍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은나라와 진나라의 망한 허물이 아! 어찌 그리 컸을까? 전(傳)의 내용을 이렇게 쓴다. 권공(權公) 산해(山海)의 자(字)는 덕보(德甫)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시조(始祖)는 행(幸)이며 고려태사(高麗太師)였다. 증조는 희정(希正)이며 감찰(監察)벼슬을 했으며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謚號)는 문정(文靖)이요, 조(祖)의 휘는 초(軺)며 고려조(高麗朝) 문과판사(文科判事)였다. 아버지는 관(寬)이며 관직은 경력(經歷)이다. 공은 영악원년(永樂元年,1403)에 출생하고 어릴 때에 종조부 문경공(文景公) 진(軫)에게 글을 배우면서 「백이전(伯夷傳)」을 읽다가 세 번이나 감탄하고 말하기를 “백이(伯夷)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만고(萬古)에 법도를 지킬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 성장해서는 가정이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또 과거공부도 하지 않고 날마다 후학들에게 경전(經典)을 가르치면서 효심과 우애가 지극하다고 소문이 있었다. 천성(天性)이 온순하고 화목해서 특별히 모난 행동이 없었으나 정의(正義)와 사심(私心)을 분별해야 할 일에 있어서는 확실한 주관이 있어서 누구도 그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정통(正統) 경신년(1440)에 재능(才能)과 품행(稟行)이 있다고 추천(推薦)되어 녹사(錄事)가 되었다가 주부(主簿)로 자리가 옮겨졌으나 다 나가지 않으신 것은 공의 부인이 문종비(文宗妃)와 인척관계여서 벼슬길로 나가지 않았든 것이다. 경태(景泰) 갑술년(1454)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부름을 받고 공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말하기를 선대왕에 빚을 진 은혜를 어린 임금님께 갚는 것이 내 뜻이라고 했으나 을해년(1455)에 단종이 손위(遜位)하니 공이 슬픔과 애통함을 견딜 수 없어서 항시 침석에 누워 베개에 눈물을 흘리며 지냈는데 찰방(察訪)의 교지(敎旨)가 내리니 병으로 사양하고 다음해 병자년(1456)에 오래된 신하인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 육인(六人)이 모의(謀議)해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고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공은 원래 성삼문과 가까운 관계였고 실제로 미리 모의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 위에 올라 투신자진하니 공의 부인이 집에 있든 모든 서적을 불태웠다. 그래서 온 식구가 죽는 화는 면했으나 자손들이 백년동안 폐고(廢錮)를 당했다. 아! 성삼문 ・ 박팽년 등 제공(諸公)들은 집현전(集賢殿)에서 왕명을 받았으니 도의(道義)적으로 죽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은 직책이 낮은 음직(蔭職)의 한 사람이니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공적(公的)으로 같이 앉지도 못했고 사적(私的)으로 같이 참여하지도 못한다”고 했으니 그런 분이지만 임금을 위해 순직했으니 참으로 이 나라의 풍속과 교화가 은(殷)나라 진(晉)나라 보다 아름답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부인 할 사람이 있겠는가? 공은 「백이전(伯夷傳)」을 세 번 반복해서 읽고 이미 백이(伯夷)의 정신을 계승해서 죽을 때 백이의 절의를 따랐으니 그 실천이 순간의 감격이나 갑작스런 생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공이 용궁(龍宮) 대죽리(大竹里)에서 출생하시어 죽림이란 호를 쓴 것이 고죽(孤竹)의 풍교(風敎)를 추모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삼문 ・ 박팽년 등 제공(諸公)들은 지위(地位)가 높고 참혹한 형벌로 죽은 것이 명백(明白)했기 때문에 후세에 명성이 전해져서 지금까지 빛나고 있지만 공은 낮은 벼슬이고 또 자결(自决)해서 죽었기 때문에 명성(名聲)이 나타나지 않았고 자손들의 백년 금고(禁錮)가 처음으로 풀려서 손자 경(經)과 그 조카 응성(應星)이 같이 성균관에 입학해서 공의 사적(事蹟)이 처음으로 기록(記錄)에 등재(登載)되었고 12대손 종락(宗洛)이 현재 상감님의 기유년(1789)에 행차하시는 수레 앞에서 원통함을 호소해서 유사(有司)가 아뢰어서 상감이 공의 절의(節義)를 아름답게 받아들이시고 특명(特命)으로 관작(官爵)을 복지시키고 또 경주(慶州) ・ 운곡(雲谷) ・ 태사묘(太師廟)에 공을 배식(配食)하는 것을 아뢰어서 공의 명성(名聲)을 온 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늠름(凜凜)한 모습이 그 시대의 육신(六臣)과 같았다고 말하게 되었다.
  아! 역사에 말하기를 “초야(草野)에서 몸으로 도끼에 기름칠이 된 형벌을 받아서 죽은 역사를 누가 알겠는가?” 라고 했으니 고루(固陋)한 사건이다. 흉노(匈奴)에 항복(降伏)한 위청(衛靑) 위청(?~ B.C.106) :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장군. 평생을 흉노의 정벌과 방어에 힘썼다. 위율(衛律)은 장수(長水) 지방의 호인(胡人)으로 한나라에 귀화했다. 이연년(李延年)과 친하여 그의 추천으로 흉노에 사신을 갔다. 위율이 돌아올 무렵 이연년이 한나라에서 죽임을 당하자, 화를 입을까 두려워 흉노에 항복하였다. 뒤에 흉노에 중용되어 높은 관직을 지냈고, 포로로 잡힌 소무에게 흉노의 뜻대로 항복을 권유하다 꾸짖음을 당했다. ?漢書 卷54 李陵傳?
의 죄를 적용한다는 말인가? 그 내용을 끝까지 알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오래 되면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공의 뜻은 정의로 죽을 뿐이었으니 남들이 알고 모르는 데 대해 무슨 고민을 했겠는가? 세상에 이러한 분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밝힐 사람이 밝히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 세상 후인들에게 신하된 도리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백이전」 끝에 감탄한 바가 있어서 비록 벼슬을 하지는 못했으나 충신의 자취가 말없이 숨겨진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권죽림공(權竹林公)의 전(傳)을 썼다.
  이헌경(李獻慶)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竹林權先生神道碑銘
    죽림권선생 신도비명

죽림선생신도비
世之數莊陵忠節之最著一辭同然한이 曰死六生六하니 生死別而辭無間然者가 豈不以其跡이 雖異나 其心則同也耶아 然則心同而跡又同者를 雖謂之死七이라도 可也라 若故僉正竹林權先生이 卽其人也歟인저 公의 諱는 山海오 字는 德甫니 安東之權이 自高麗太師幸으로 遂爲大姓에 圭組蟬聯하다 曾祖諱는 希正이니 監察이오 贈左議政諡文靖이오 祖諱는 軺니 麗朝判事니 議政軫之弟也라 考諱는 寬이니 經歷이라 娶金海崔氏縣監仲雲女也라 以永樂癸未에 生公於龍宮大竹里第하니 生有志操하야 嘗受讀伯夷傳에 三復歎曰 有是人然後에 可以扶萬古綱常이라 하니 從祖文景公이 已心奇之러니 及長에 不事擧業하고 惟以經學으로 敎授生徒하다 一時交好라 如成公三問朴公彭年權公自愼皆以道義相磨礱하다 平居恂恂若無可否하고 至於判別義利에 截然有可犯者러라 正統庚申에 以才行으로 薦爲昌德宮錄事하고 又轉主簿에 皆不赴하니 以顯德王后가 於公夫人에 妹也라 蓋避椒闈之嫌也라 甲戌에 除宗簿僉正하야 乃就職曰 將以未效先生者로 報冲主也라하다 時則三相臣이 旣死하고 事無可爲者而公乃出仕에 其志固有爲矣라 乙亥端宗遜位에 公이 常懷慨惋에 至寝席有涕泣㾗하고 尋除察訪에 不赴하고 丙子에 與六臣謀復禍作하야 諸公이 就鞫에 公은 知志不諧하야 投閣自盡하니 享年이 五十四라 夫人이 急取書籍하야 悉焚之하니 以故로 得免拏戮之禍而猶削奪徙邊일세 弟壽海가 殮瘞于念松山負酉之原하다 明宗戊午에 禁始解하고 肅宗壬戌에 剙六臣祠하고 又復 莊陵徽號而公之事는 猶泯沒未著러니及英廟正考兩聖朝에 凡擊魯陵事하야 並釋幽冤에 公之十二世孫宗洛이 始乃訴冤而未徹하고 己酉에 復擊金하야 遂命復爵하고 辛亥에 因三道儒生宋文箕等하야 上言에 特命旌其故里하고 贈天官亞卿하고 兼帶依例從賢關議하야 配慶州之雲谷祠하니 於是에 公之貞忠大節이 赫然於世하야 與六臣으로 無間而永爲勸於千古矣라 寧不盛哉아 蓋公之舍生이 與死臣으로 何異而乃獨翳然於三百餘年之久者只以在家自盡에 其跡이 晦而文籍이 又蕩然하야 並世君子가 以春秋義諱로 不敢言하고 徙邊孱孫이 亦惴惴不敢瀆訴하니 苟非聖主追先志獎節과 立敎盛德이 有以應天循環之會하야 能若是渙發哉아 由是而丹谷郭之誌와 小山李光靖之銘이 俱爲可徵而左相蔡濟恭之獻議와 吏判洪良浩之旌忠閣記가 皆有助於發揮聖敎扶植彛倫之道요 況又頒誥之夕에 忽有彩虹이 自祀庭直亘九霄하야 人皆嗟異하니 豈程子所謂忠魂義魄이 鬱結而不散하야 往往有靈在之跡者耶아 嗚呼烈哉라 夫人은 卽景惠公權專의 女라 贈貞夫人이니 有四男一女하니 哲祖·哲宗이요 哲命은 別提오 哲孫은 判官이오 女는 適縣監鄭蘭元하니라 孫稱經은 生員이오 綸은 敎授오 純은 參奉이오 綬敏은 部將이라 曾孫應陽·應星은 進士오 應箕는 進士오 應參은 生員이오 應定은 進士오 舜卿이오 玄孫以下는 散居醴泉慶州順興者를 不能錄하다 銘曰
孤竹淸風이 萬古扶綱이라 誰其聞者竹林之剛이요 時則有若六臣之烈이 同心殉國이오 成仁則七應會而顯하야 終赫斯名이라 刻珉詔後에 中天日星이라
  通仕郞繕工監役眞城李漢膺은 謹撰하노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단종(端宗) 때 최고로 드러난 사육신(死六臣) 생육신(生六臣)이 같다”고 하니 행적이 다르지만 뜻이 같아서 같다는 것이다. 뜻도 같고 행적도 같은 분이 있었다면 사칠신(死七臣)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고(故) 첨정(僉正) 죽림(竹林) 권(權)선생이 바로 그 분이시다. 공의 휘는 산해(山海)오 자는 덕보(德甫)니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고려태사(高麗太師) 행(幸)으로 시작하여 대성(大姓)이 되었고 높은 관직이 이어져왔다. 증조 휘는 희정(希正)이니 감찰(監察)이며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오, 조(祖)의 휘는 초(軺)니 고려조(高麗朝) 판사(判事)니 의정(議政) 진(軫)의 아우이다. 고(考)의 휘는 관(寬)이니 경력(經歷)이다. 배위(配位)는 김해최씨(金海崔氏) 현감 중운(仲雲)의 따님이시다. 공이 태종(太宗) 3년 계미년(1403) 용궁(龍宮) 대죽리(大竹里)에서 출생하셨다.
  지조(志操)를 타고나시어서 일찍이 「백이전(伯夷傳)」 백이열전(伯夷列傳):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에 나오는 백이⋅숙제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사마천의 서술로 구성되어 있다. 백이와 숙제가 정의로운 삶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극악무도한 도척과 같은 인물은 천수를 다하는 세상의 모순 속에서 선악정사(善惡正邪)를 바로 드러내고자 했던 사마천의 역사 철학이 담겨져 있다.
을 읽다가 세 번 감탄(感歎)하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이런 연후(然後)에야 가히 만고(萬古)에 강상(綱常)을 지킬 수 있다”고 하니 종조부(從祖父) 문경공(文景公)이 속마음으로 기특(奇特)하게 여겼고 커서는 과거공부를 하지 않고 오직 경학(經學)만 하시어 생도(生徒)들을 가르치셨다.
  같은 시대의 친구로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권자신(權自愼) 등과 도의(道義)로 교류하시었다. 평소에는 조심하는 모습으로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지만 의(義)와 리(利)를 판별(判別)하는 데 있어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시었다. 세종(世宗) 22년 경신년(1440)에 재능(才能)과 덕행(德行)으로 창덕궁(昌德宮) 녹사(錄事)로 추천되었고 또 주부(主簿)에 선임(選任)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으신 것은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부인(夫人)의 누이여서 중전(中殿)의 측근(側近)이란 혐의(嫌疑)를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단종 2년 갑술년(1454)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의 명을 받고 직무를 수행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선왕(先王)에 보답하지 못한 은혜를 앞으로 어린 군주(君主)에 보답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때에 김종서(金宗瑞) 등 세 분 중신(重臣)이 이미 죽음을 당하고 무슨 일도 할 수 없었기에 공이 벼슬을 버리고 나오신 것은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을해년(1455)에 단종이 손위(遜位)하시니 공이 분개(憤慨)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서도 눈물을 흘리시고 찰방(察訪)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으시고 병자년(1456)에 육신(六臣)과 같이 복위(復位)를 도모하시다가 화(禍)가 생겨서 제공(諸公)이 국문(鞫問)을 당할 때에 공은 뜻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지붕위에 오르시어 투신자진(投身自盡)하시니 향년(享年)이 54세였다.
  부인이 급하게 모든 문적(文籍)을 다 불태웠기 때문에 가족이 모두 죽음을 면하고 삭탈관직(削奪官職)과 사변(徙邊)의 벌을 받게 되었다. 아우 수해(壽海)가 시신(屍身)을 염(殮)해서 염송산(念松山) 유좌(酉坐)터에 장사했다.
  명종(明宗) 13년 무오년(1558)에 금고(禁錮)가 풀리고 숙종(肅宗) 8년 임술년(1682)에 육신사당(六臣祠堂)이 처음으로 세워지고 또 단종(端宗)의 왕호(王號)가 복위(復位)되어서 장릉(莊陵)이란 능호(陵號)가 내려졌으나 공의 일은 묻혀서 밝혀지지 못했다.
  영조(英祖) ・ 정조(正祖) 두 임금에게 노산군(魯山君)의 일을 왕에 알려서 억울한 자의 원한(寃恨)을 풀어줄었는데, 이때에 공의 12세손 종락(宗洛)이 처음으로 원한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조 13년 기유년(1789)에 다시 호소해서 복작(復爵)되고, 신해년(1791)에 삼도(三道:경기·경상·충청) 유생(儒生) 송문기(宋文箕) 등이 상소문(上疏文)을 올려서 왕의 특명(特命)으로 공의 고향에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의 증직(贈職)이 내려지고 성균관(成均館) 논의(論議)의 예(例)에 따라 경주(慶州) 운곡사(雲谷祠)에 모시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공의 굳은 충성(忠誠)과 절의(節義)가 사육신(死六臣)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세상에 드러나고 천고(千古)에 영원토록 본보기가 되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아마 공의 죽음이 사육신(死六臣)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오랜 300년 동안 가려진 것은 단지 집에서 자진(自盡)했다는 차이로 숨겨져 있었고 문적(文籍)이 또 없어졌으니 같은 시대의 군자들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숨기면서 감히 말하지 못했고 사변(徙邊)이 되어 어려운 자손이 또 불안한 마음에 감히 하소연을 못했으니 참으로 착한 임금님이 선현(先賢)의 장(壯)한 절의(節義)의 가르침을 시행하는 성덕(聖德)과 천명(天命)을 따르는 순환(循環)의 이치가 아니었다면 이같이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
  그 후에 단곡(丹谷) 곽진(郭)선생의 지문(誌文)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선생의 명(銘)이 다 징거(徵據)가 되고 좌정승 채제공(蔡濟恭)의 논의(論議)와 이판(吏判) 홍양호(洪良浩)의 정충각(旌忠閣) 기문(記文)이 다 임금님의 교화와 도의정신을 심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하물며 반포문(頒布文)을 고(告)하던 날 저녁에 제사지내는 뜰에서 하늘까지 채색(彩色) 무지개가 갑자기 생겨나니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다고 감탄했으니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신 “충혼(忠魂)의 기백(氣魄)이 모여서 종종 영적(靈的)인 존재가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장렬(壯烈)하다.
  그 부인은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따님으로서 증직(贈職) 정부인(貞夫人)이시고 4남1녀를 기르시었으니 철조(哲祖)요 철종(哲宗)이요 철명(哲命)은 별제(別提)요 철손(哲孫)은 판관(判官)이요, 사위는 현감 정난원(鄭蘭元)이다.
  손자에 칭경(稱經)은 생원(生員)이오, 윤(綸)은 교수(敎授)요, 순(純)은 참봉(參奉)이요, 수민(綬敏)은 부장(部將)이다. 증손에 응양(應陽)이요, 응성(應星)이요, 응기(應箕)는 진사(進士)오, 응삼(應參)은 생원이요, 응정(應定)은 진사요, 순경(舜卿)이다. 현손(玄孫) 이하는 예천(醴泉) ・ 경주(慶州) ・ 순흥(順興)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을 쓴다.

  孤竹淸風 萬古扶綱(고죽청풍 만고부강)
  백이(伯夷)같은 맑은 유풍(遺風)이 만고(萬古)에 기강(紀綱)이 되었으니

  誰其聞者 竹林之剛(수기문자 죽림지강)
  죽림공의 강직함을 들은 사람이 누구일까?

  時則有若六臣之烈 同心殉國(시즉유약육신지열 동심순국)
  그 때에 있었던 장열(壯熱)한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뜻으로 순국(殉國)했으니

  成仁則七應會而顯 終赫斯名(성인즉칠응회이현 종혁사명)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한 일곱 분이 같은 기회에 드러내시어 끝까지 이 명성이 화려하니

  刻珉詔後 中天日星(각민조후 중천일성)
  비에 새겨 후세에 남기니 하늘에 일월성신(日月星辰)과 같을 것이다.

   통사랑(通仕郎) 선공감역(繕工監役) 진성(眞城) 이한응(李漢應)은 삼가 찬(撰)한다. <국역:권기갑(權奇甲)>


    竹林權先生神道碑閣上樑文
    죽림권선생 신도비각 상량문

忠義爭日月之光 煥乎龜龍之蜒蜿
棟宇備風雨之患 翼然鳥翬之革飛

匪直爲觀瞻
聊以圖久遠

恭惟竹林權先生

圭璋令資
松栢貞操

幼而聞淸聖之風 已知綱常之重
長而嫌椒闈之戚 屢辭絓簪之榮

旋欲效忠於冲君
晩始膺命於宗簿

尙何忍言 玉輦遭遷奧之厄
斷方無他 丹忱共復辟之謀

日星爲之晦冥 露粱荒沙 埋六臣忠烈之魄
熊魚判其取舍 竹里高閣 寔先生成仁之場

遷徙全家
削奪官職

亘百年禁錮孫姓
矢一綱黨籍姓名

惟一理之未泯
豈大節之終晦

復官贈爵旌門之典 歷三朝而愈隆
顯銘幽誌表坊之文 俟百世而不朽

妥享魯峯之院 見白鵲之來栖
配食雲谷之祠 植枯杏而繁茂

盖其貞忠之所感
致此造化之非常

仰瞻楸原 宛神道之陟降
敬鑱珉石 猗信筆之揄揚

尙有雲仍之憂
未遑榬桷之覆

有其誠則有其物 何患乎事鉅而力綿
謀于衆而謀于神 幸見夫龜從而筮協

肆募工而起役
迺不日而告功

雲簷垂空 豈霜露之爲患
虹樑映日 宛溪山之增輝

恭述襟紳寓慕之忱
庸助兒郞呼耶之役

抛樑樑東
巖巖鶴駕揷層空

挺然特立擎天勢
爭似先生報國忠

抛樑南
洛東江水靑如藍

請看萬折必宗海
臣事二君能不慚

抛樑西
漢陽宮闕昔時齊

玉駕東巡何日返
榛苓痛憶美人兮

抛樑北
百奧山高望不極

淸夜子規樓月光
也應分照旌門閾

抛樑上
九天閶闔開雲仗

玉樓日日拜君王
携手六臣相揖讓

抛樑下
孔道砥平走車馬

人人指點鳥頭語
知有聞風興起者

伏願上樑之後

神明陰佑
地運泰回

勵節樹風 詎亶有補於今日
扶傾架漏 不能無望於後昆

扶倫綱而特立
與穹壤而同終

  歲赤猿之三月旣望에 永嘉權相圭는 謹頌하노라

충의(忠義)가 일월(日月)같이 분명(分明)하니 상량(上樑)나무가 선명(鮮明)하게 굼틀대는 것 같고, 비각(碑閣)은 비바람 막으려고 지으니, 집이 날개를 펴고 나는 새 같구나. 지금 바로 보기만 하려고 짓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보존하려는 뜻으로 짓는다.
  공손하게 죽림(竹林) 권(權)선생을 사모해 보니, 군자의 인품으로 송백(松柏) 같은 지조(志操)를 가지시어, 어려서 백이(伯夷)의 기풍(氣風)을 듣고 이미 강상(綱常)이 중함을 아시었고, 장년(壯年)이 되어서는 왕비(王妃)의 친척이 혐의(嫌疑)스러워서 벼슬을 여러 번 사양하시었다가? 어린 임금에 충성을 하려고 마음을 바꾸어 늦은 후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의 직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오직 군주(君主)가 손위(遜位) 되는 액운(厄運)을 어찌 차마 말로 하겠는가? 결단(決斷)을 내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충심(忠心)으로 임금님을 복위(復位)시키려는 뜻이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이 광채(光彩)를 잃게 되어 노량진(露粱津) 모래밭에 육신(六臣)의 충렬(忠烈)의 혼(魂)이 묻히게 되었고, 목숨 바쳐 정의(正義)를 지켰기에 죽리(竹里) 비각(碑閣)은 곧 선생의 인(仁)을 나타낸 곳이다. 온 식구(食口)가 사변(徙邊)을 가고 삭탈관직(削奪官職)이 되었으니, 자손의 금고(禁錮)는 백년(百年)동안 이어졌고 한번 당적(黨籍)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으나, 하나의 이치(理致)가 존재하는 한 어찌 큰 절의(節義)가 영원히 숨겨지겠는가?
  복관(復官)되고 증직(贈職)이 내려지고 정려(旌閭)가 내려져서 세 분 대왕(大王)을 거쳐 오면서 더욱 은전(恩典)이 융성해서, 숨겨진 일들을 마을 거리의 높은 비에 새겨서 백세(百世)가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일이 되었고, 노봉서원(魯峯書院)에 모시니 흰 까치가 와서 서식(棲息)하고, 운곡사당(雲谷祠堂)에 마른 은행나무 심은 것이 무성하게 자란다. 그런 일들은 아마도 충정(忠情)이 감동(感動)해서 이루어졌을 것이고, 자연조화(自然造化)의 이치로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묘소를 우러러 바라보면 신(神)의 강림(降臨)이 완연(宛然)하고, 돌에 새긴 비문을 공경으로 읽어보면 사실(事實)대로 잘 밝히었네. 하지만 자손들의 걱정은 건축(建築)을 마치지 못할까 염려하네.
  정성(精誠)이 있으면 사물(事物)을 성취하는 법이니, 이런 큰일에 힘이 부족하다고 근심할 필요 있겠는가? 여럿이 모여 의논하고 신에게 자문(諮問)하면 거북점을 쳐도 길한 괘를 얻을 것이니, 힘내어 공인(工人)을 모아 일을 시작하면 아마 짧은 시일에 집을 지을 것이니, 처마에 구름이 내린다고 해도 서리 오고 이슬 내리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무지개 같은 용마루에 태양이 비치면 산수(山水)가 완연(宛然)하게 광채가 생길 것이다. 공손히 옷깃 여미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량곡 부르며 상량을 돕는 노래를 부른다.
  동쪽으로 불러본다. 높고 높은 학가산(鶴駕山) 허공을 찌르고 있으니, 우뚝하게 솟은 모습 하늘을 받드는 형세가 선생의 보국충정(報國忠情)과 높낮이를 다투는 것 같구나.
  남쪽으로 불러본다. 낙동강 물 푸르기 쪽빛 같구나.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바다로 가는 것을 봐라. 신하가 두 임금 섬긴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서쪽으로 불러본다. 한양(漢陽) 궁궐 옛날과 같은데, 가신 님 어느 날 돌아오실까? 우거진 숲 바라보면서 임이 그리워 애통하구나.
  북쪽으로 불러본다. 백 구비 높은 산 바라보니 끝이 없구나. 맑은 밤 자규루(子規樓)에 비쳐주는 달빛이 이 정려각(旌閭閣)에도 같이 비춰 줄 것이다.
  위로 불러본다. 구천(九天)의 하늘에 구름의 휘장(徽章)이 걷히니, 하늘 위 옥루(玉樓)에 계시는 인금님 날마다 육신(六臣)의 손을 잡고 서로 인사하는 모습 뵙는구나.
  아래로 불러본다. 큰 길 평탄해서 차와 말이 달리는데, 젊은 사람마다 이곳을 가리켜 물어서 선생의 풍화(風化)를 들으면 감흥을 일으킬 것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후에 신명(神明)이 남몰래 도와주고 대지(大地)의 운기(運氣)가 길운(吉運)이 돌아와서 절의(節義)와 풍화(風化)을 일으키면 어찌 현재에만 도움이 되겠는가? 집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은 자손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이하게 강상(綱常)을 유지하는 것은 이 세상이 있는 한 이어질 것이다.
  병신년(1956) 3월 16일에 영가(永嘉:안동) 권상규(權相圭) 권상규(權相圭):1874~1961. 조선 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이자 의병.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삼(致三), 호는 채산(蔡山)·인암(忍庵). 외할아버지는 한산(韓山) 이문직(李文稷)이고, 권충재(權沖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다. 봉화(奉化) 유곡(酉谷)에 거주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며 경학(經學)과 성리학(性里學),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문집(文集)에 ?인암집(忍庵集)? 24권12책이 있다.
는 삼가 송(頌)한다. <국역:권기갑(權奇甲)>


    竹林先祖復爵時上言
    죽림선조 복작시 상언 정조 기유년(1789) 4월 25일
矣身은 竊伏念爲祖訟冤은 子孫之至情이오 崇節伸幽는 國家之盛典이라 今若以世代之寝遠으로 因循緘默而止則是自阻於仁覆之天矣라 矣身이 前此累次上言에 終未登徹情私所迫하니 不勝抑鬱하야 敢此嗚冤於法駕之前하니 驚達天聽에 罪合萬死라 矣身의 十二代祖故僉正臣山海가 以莊陵姨戚之臣으로 値丙子 遜荒之時에 殺身成仁之蹟과 殉身報國之心이 質諸死六臣而並列하고 比之生六臣而齊美한대 而及夫莊陵追復之日하야 繼有凡坐魯陵事者를 幷許伸雪之敎한데 獨於矣身의 祖는 追削之罪名이 尙今未伸하니 此矣身의 家所以積抱幽明之痛이 轉深冤鬱之情者也로이다 噫라 矣身의 先祖山海는 素堅志操하야 見推士流에 世所稱竹林號是也라 幼時에 讀伯夷傳하다가 嘗揜卷歎曰有是人然後에 可以扶萬古綱常이라하더니 及長에 與成三問等으로 爲莫逆之交하야 世廟庚申에 薦爲錄事主簿에 皆不就曰 內有椒闈之親하니 冒進于祿이 非我志也라 端廟甲戌에 始就宗簿僉正之命하야 欲報眷顧之恩이러니 及至遜位에 常懷一死之心하야 累有除旨에 終不出하고 肅枕席에 常有涕泣處하고 丙子에 權自愼成三問等이 先就鞫하니 矣身의 祖는 仰天垂淚曰 此實也라 하고 遂從高閣投下自盡하고 及其拿命至而矣身祖는 已死矣라 故로 罪止削官하고 罪及徙家하여 又今禁錮子孫百年하니 此乃矣身의 祖의 立節之大略也라 嗚呼라 矣身의 祖는 卽故相臣文景公軫之從孫也오 顯陵國舅臣景惠公專之女壻也라 顧以喬木之世家로 又忝椒掖之近密하야 與國休戚에 義共死生盡節於當時하야 死而自靖故로 故徵士臣郭이 題其墓曰 處難愈篤에 殺身不悔하니 所立卓爾에 炳如日星이라하고 龍宮邑誌忠義門에 有曰 與六臣同志同事로 聞하야 六臣은 先就鞫하고 在家自盡하니 其後에 以忠義로 配享於慶州權太師廟云하니 此盖見公議之下泯而實蹟之可徵也라 恭惟我英宗大王은 克體寧考之盛德하사 特起表節之曠感에 生六臣死六臣을 莫不貤贈之棹楔之하시고 逮我聖上에 亦下生六臣易名之恩典則矣身祖貞忠純節은 實與生死六臣으로 一而二也라 而矣身家徙邊之後로 仍伏遐隅하야 禁錮之餘에 竟微不振하야 嗚冤之擧가 尙稽于今하야 抱鬱茹恨이 傳子傳孫하니 跡雖陳於百數年而事若當於昨今日矣라 玆敢裸足於千里之遠하야 自速於萬戮之誅하니 伏乞天地父母는 俯察泉壤幽鬱之冤하사 俾免獨漏에 以光聖德하소서

저는 간절하게 생각하니 조상의 원통함을 말씀드리는 것은 자손의 지극한 뜻이고, 충절을 높이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국가의 옳은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만약 세월이 오래 지난 일이라고 해서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덮어둔다면 이것은 스스로 인(仁)을 막고 하늘을 가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날에 여러 차례 말씀을 올렸으나 끝내 절박한 저의 사정이 통해지지 못하고 억울함을 견딜 수 없어서 감히 이렇게 행차하시는 수레 앞에서 원통함을 하소연해서 전하를 놀라시게 하니 만 번 죽을 죄를 짓고 있습니다.
  저의 12대조(代祖)인 고(故) 첨정(僉正) 신(臣) 산해(山海)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이종(姨從)으로서 병자년(1456) 손위(遜位)하실 때에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사실과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 충성심(忠誠心)은 사육신과 같고 생육신에 비하면 더 훌륭합니다. 노산군(魯山君)이 단종대왕(端宗大王)으로 복위(復位)될 때에 단종대왕에 연좌(緣坐)되었던 모든 신하들이 다 신원(伸冤)의 하교(下敎)를 받았는데. 저의 선조만 유독 삭탈관직의 죄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집은 조상이나 자손의 가슴에 쌓인 원통함이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 저의 선조 산해(山海)는 원래 지조(志操)가 견고(堅固)하시어 사림(士林)의 신망(信望)이 높으시어 세칭(世稱) 죽림(竹林)이란 호(號)를 쓰신 분입니다. 어릴 때에 「백이전(伯夷傳)」을 읽다가 책을 덮고 감탄하기를 이런 사람이라야 가(可)히 만고(萬古)에 강상(綱常)을 가지게 할 수 있다고 하고 성년(成年)이 된 후에 성삼문(成三問) 등과 절친한 친구사이였고 세종(世宗) 22년 경신년(1440)에 녹사(錄事)와 주부(主簿)에 추천(推薦)되었으나 모두 취임(就任)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내전(內殿)과 척분(戚分)이 있으면서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다” 하시고 단종(端宗) 2년 갑술년(1454)에 처음으로 종부시(宗簙寺) 첨정(僉正)의 명(命)을 받고 임금의 성은(聖恩)을 보답(報答)하려고 했는데, 손위(遜位)하시게 되자 항상 목숨을 바칠 각오를 가지고 여러 차례 벼슬 교지(敎旨)를 받았으나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침석(枕席)에 누워 항시 눈물을 흘리다가 병자년(1456)에 권자신(權自愼) ・ 성삼문(成三問) 등이 먼저 국문(鞫問)을 당하니 저의 선조는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씀하시기를 “이게 사실이다” 하고 곧 바로 지붕위에 올라 투신자결(投身自決)하시고 잡아 오라는 명(命)을 받고 사람이 왔을 때에 저의 선조는 이미 운명(殞命)했기 때문에 죄가 삭탈관직에 그쳤으나 사변(徙邊)의 죄에 자손이 백년금고(百年禁錮)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선조의 절의를 지킨 대략(大略)입니다.
  아! 저의 선조는 바로 고(故) 상신(相臣) 문경공(文景公) 진(軫)의 종손자(從孫子)요, 현릉국구(顯陵國舅)인 신(臣) 경혜공(景惠公) 전(專)의 사위입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교목(喬木)같은 세가(世家)요, 내전(內殿)과 가까운 척분(戚分)이어서 왕실(王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고 정의(正義)로 사생(死生)을 무릅쓰고 당시에 절의(節義)를 다하다가 죽음으로 깨끗하게 생을 마쳤기 때문에 고(故) 징사(徵士) 신(臣) 곽진(郭)이 지은 비문(碑文)에는 “어려운 처지(處地)에서 더욱 독실(篤實)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면서 후회하지 않으니 탁월(卓越)한 의지(意志)가 일월(日月)같이 밝다”고 했고, ?용궁읍지(龍宮邑誌)? 「충의문(忠義門)」에는 “육신(六臣)과 뜻이 같고 행동이 같다는 소문이 있어서 육신(六臣)이 먼저 국문(鞫問)을 당하니 집에 있다가 자진(自盡)하고 그 후에 충의(忠義)가 장하시어 경주(慶州) 권태사묘(權太師廟)에 배향(配享)되었다”고 하니 이 같은 일들은 아마도 공의(公議)에서 나타나서 실상(實狀)이 나타난 징거(徵據)입니다.
  공손히 생각하면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은 선대왕(先大王)의 성덕(盛德)을 계승(繼承)하시어 특별히 정려(旌閭)를 내리는 큰 성덕(聖德)으로 생육신(生六臣) ・ 사육신(死六臣) 모두에게 증직(贈職)과 정려(旌閭)를 내리시었고 우리 성상(聖上)께서도 역시 생육신의 이름을 바꾸는 은전(恩典)을 내렸습니다. 저의 선조의 정충(貞忠)과 순절(純節)은 실로 생사육신(生死六臣)과 충성은 같았으나 은전(恩典)은 같지 않습니다.
  저의 집은 사변(徙邊)이 된 뒤로 한쪽 모퉁이에 엎드려 있다가 금고(禁錮)가 풀린 후에도 아직까지 일어서지 못해서 애원(哀怨)하는 일도 지금까지 늦어져서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억울하게 한(恨)을 삼키고 있으니 백년이 넘은 일이지만 어제오늘 일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이렇게 맨발로 천리 길을 와서 스스로 만 번 죽을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천지(天地) 같고 부모(父母) 같은 성상(聖上)께서 지하(地下)에 계시는 원통한 혼(魂)을 살피시어 성상의 은전(恩典)이 홀로 남아있는 저에게도 비춰 주시기 바랍니다.
  <국역:권기갑(權奇甲)>

    죽림선생 묘갈 후지
부군(府君)의 묘갈문(墓碣文)은 신원전(伸冤前) 정조 8년 갑진년(1784)에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공이 찬(撰)하였으나 비(碑)를 세우지 못하다가 신원복작정증(伸冤復爵旌贈) 후(後) 순조(純祖) 25년 을유년(1825)에 현감 이병운(李秉運) 공의 후지(後識)를 붙여 처음 세웠다가 고종(高宗) 15년 무인년(1878)에 좌측(左側) 구비(舊碑)와 같이 개갈후(改碣後) 동왕(同王) 22년 을유년(1885)에 후손(後孫) 영조(永祚)가 작시(爵諡)를 내려주실 것을 청하여 각조회계(各曹回啓)와 묘당헌의(廟堂獻議)에 의(依)하여 전면(前面)과 같이 특몽가증(特蒙加贈)되셨으며 또 일치(日治) 신유년(1921)에 사림(士林)이 준발동성협력(峻發同聲協力)하여 노봉서원(魯峯書院)을 중건봉안(重建奉安)하였고 민국(民國) 병신년(1965)에 신도비(神道碑)와 비각(碑閣)을 세운 사실(事實)이 모두 누락(漏落)되었으나 다시 개갈(改碣)하지 못하였으니 희(噫)라!
  조상(祖上)께는 죄(罪)스럽고 남에겐 부끄러운 일이므로 자손(子孫)된 마음에 더욱 한(恨)스러운 일이더니 17세손(世孫) 기호(奇鎬) 보(甫)가 헌성전담(獻誠專擔)하여 개갈(改碣)하게 되었으니 만시지탄(晩時之嘆)은 있으나 다행(多倖)한 일이다 갈문(碣文)과 후지(後識)는 중복(重複)을 피(避)하여 생략(省略)하고 전면(前面)만 개서(改書)하고 삼가 그 전말(顚末)을 간략(簡略)하게 적습니다.
  민국(民國) 경진년(2000) 3월 일
  15세손(世孫) 영하(寧夏) 삼가 기록하고, 17세손(世孫) 시환(時煥) 삼가 쓰다


    鴨脚樹記
    압각수 기문
嶺南順興之客舍傍 古有鴨脚樹 其枝虯蟠蔓走 北渡竹溪 覆明倫堂 蓋其大且奇 無與倫者 景泰癸酉間 忽自枯 鄕人懼而卜之其繇曰 鴨樹復生 興州可復 人莫曉其意 丁丑錦城之難 革興州屬之豊基 至 肅廟丙子 樹有㽕孼透生腐根 兩傍皮甲 環抱古査 合成大樹如舊 已而有復興州之事 卜始驗戊寅又復 莊陵 英祖壬戌 又 命設錦城壇于樹下 自是厥後 樹根之所延及輒有茅茁 奄成一大林 吁可異也 蓋當復陵之日 凡坐 魯陵事者 擧皆伸雪 越至于 英祖 曁 當宁 靡不次第顯遂之 而猶未免 有未遑之典 如竹林權公 投閣自盡之節 與六臣相伯仲而且寥寥也 其後孫宗洛居慶州 每往來經樹下手撫口歎 仰天獨語曰 枯木之復㽕 其 莊陵復位之祥乎 蔓芽之成林 其節義褒崇之兆乎 吾祖丙子之寃 亦可以暴之 於今日耶 當宁己酉 果蒙復官之典 宗洛奉誥而歸 先到樹下 口祝以移植 雲谷之意 雲谷者 權太師之祠 而竹林公配食 在慶州者也 迺斫大如柯長尺許者 內之行槖中 見者莫不笑之 蓋興之距慶 四百餘里 而宗洛之行 迂回於醴泉 龍宮之間 一朔而廑達雲谷 始出裝中枝視之 皮膚已乾 本末俱坼 衆咸言 萬萬無生理 宗洛激慨曰 先祖之忠節若彰 此樹必生 於是 揷之祠傍 龍湫之上 實六月十六日也 已而果生 今三年 頗菀然茁茂 而又有竹林公 旌閭贈職之命 噫 又異矣 余嘗謂古今天下 無無理底物事 此聖人所以不語怪也 今此雲谷 移樹之事 乃其至無謂者 則雖以語之三尺童 必不信也 然而從古以來 忠臣節士 以一片秉彛 奮發赤心 九死靡悔 則其烈魂義魄 衝霄漢而貫日月 鬱而不洩 久而不泯 固自有不可誣者矣 而况丙子節義 是何等剛腸熱血 撑乾柱坤 立一時之倫紀 扶萬古之綱常 使夫爲人臣 懷二心者 顙泚而舌縮 則天地鬼神 亦或有以黙感 而陰相之 以顯其靈異 神奇之跡 此必然之理也 且我 聖上 以敦風化 尙名節之心 起曠感於往牒 述遺志於兩聖 故當其子規樓 復新之日 靈怪之應 不一而足 火之風之 而露其礎址 雨之瀜之 而導其木石 若有指揮 而犇走者則 又何怪乎 朽者之經數百年焉 而芽斫者之歷三十日焉而活乎 是樹 雖一無情之植物 而固錦城贈纓草檄時 在傍知狀者 則其將敗也 先枯其枝榦 殆若豫告其禍 其將復也 忽茁其芽萌 又若顯報其喜 至於移植 雖連根厚培於傍近之地 猶患其不得生 彼斫枝之 乾敗已久 而隨手輒萌 有若以此樹 明此事之始終 以此枝作此人之證契 則其烈烈之精氣 所以感應於怳惚之間者 夫豈偶然而已 或枯或生 必當其時 直欲榮瘁以之 雖謂之 獨得天地之正氣 可也 雖謂之 樹木中六臣 亦可也 斯可見 竹林公貞忠大節 歷浩劫 猶驗於物 而亦豈非宗洛之誠孝 有足以相感也耶 噫 夫子之檜 萊公之竹 皆信而有徵 傳之簡冊 則固不可謂無是理也 烏可以槖駝之例法 膠執泥論於非常之造化乎 吾知天下後世之聞此樹而見此樹者 擧將蹴惕感慨於枝葉風聲之間 而自不覺興起激昻 髮竪而眦裂 又不但爲人 愛惜而已也 然則此樹之有關於世敎 豈止於一時異聞也哉 嗚呼 其可敬也夫 其可畏也夫 竹林公諱山海 鴨脚樹 俗名銀杏云
  進士 坡平尹愭 撰[正宗十五年辛亥 自成均館 製送]


영남 순흥(順興) 고을의 객사(客舍) 곁에 옛날부터 압각수(鴨脚樹) 압각수(鴨脚樹): 잎이 오리발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은행나무의 별칭.
가 그 가지가 둘레를 넓히며 서리고 뻗어나가 북으로 죽계(竹溪)를 건너 향교 명륜당(明倫堂)을 덮으니 대개 그 크고도 기이한 것이 더불어 짝할 자가 없었다. 단종(端宗) 계유(1453) 연간에 홀연(忽然)히 저절로 시드니 고장 사람이 두려워하여 점을 쳤는데 점괘가 나오기를 “압각수가 다시 살면 순흥 고을이 회복될 것이라” 하므로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정축년(1457)에 금성대군(錦城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의 여섯째아들 유(瑜)로서 세조의 동모제(同母弟)이고 단종의 숙부.
의 수난(受難)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가 실패한 뒤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다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안동부의 옥에서 이 해 10월에 사사된 일.
이 일어나자 순흥 고을을 혁파(革罷)하여 풍기(豊基)에 예속(隸屬)시켰는데 숙종(肅宗) 병자년(1696)에 이르러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움이 터 썩은 뿌리를 뚫고 살아나더니 양쪽 껍질까지 차서 올라 옛 흔적의 둘레만큼 감싸면서 지난날의 거목(巨木)으로 합성(合成)되더니 이윽고 순흥 고을이 회복되는 일이 있으니 그 점복(占卜)이 비로소 효험이 있었고 무인년(1698)에는 다시 단종이 복위되었으며 영조(英祖) 임술년(1742)에는 또 그 나무 아래에 금성대군 제단을 설치하라는 명이 내렸다. 이로부터 이후로 나무의 뿌리가 뻗어 미치는 곳에 곧 새 순이 나와서 문득 하나의 큰 숲을 이루니, 아아! 가히 기이한 일이다. 대개 단종이 복위되는 날을 당하여 무릇 노릉(魯陵: 단종)의 일로 연좌(連坐)된 자는 모두 죄가 깨끗이 풀려 용서되고 다시 영조(英祖)와 지금의 임금 정조(正祖)에 이르러 차례로 드러나게 해주지 않음이 없는데, 아직도 은전(恩典)을 내려줄 겨를이 없음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 죽림 권공(權公)이 누각(樓閣)에서 투신하여 자결(自決)한 절개(節槪)는 사육신과 더불어 백중(伯仲)을 이루는데 또한 적료(寂寥)함에 싸여 있었다. 그 후손으로 경주에 사는 갈산공 종락(宗洛)이 매번 왕래할 때에 이 나무 아래를 지나면서 손으로 어루만지고 입으로 탄식하며 하늘을 우러러 홀로 말하기를 “고목에서 다시 움이 트니 그것이 장릉이 복위될 상서(祥瑞)이고 뻗어나간 싹이 숲을 이루니 그것은 절의(節義)를 포숭(褒崇)할 징조(徵兆)였으니 우리 선조의 병자년(1456) 원한 또한 금일에야 폭로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지금 임금 정조(正祖) 기유년(1789)에 과연 [죽림공이] 관작이 회복되는 은전을 입어 종락(宗洛)이 교지를 받들고 돌아오는 길에 먼저 이 나무 아래에 당도(當到)하여 운곡(雲谷)에 옮겨 심을 뜻을 입으로 빌어 말하니 운곡은 권태사의 사당으로 죽림공을 배향(配享)했는데 경주에 있는 것이었다. 이어 도끼자루 만한 크기와 긴 잣대만한 길이의 그 곁가지를 잘라 행탁(行橐)속에 넣으니 보는 자가 웃지 않음이 없었다. 대개 순흥(順興)에서 경주가 4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종락의 행로(行路)는 예천(醴泉)과 용궁(龍宮) 사이로 우회(迂回)하게 되어 있어서인데 한 달이나 되어서야 겨우 운곡에 도달하여 비로소 행장(行裝) 속의 가지를 꺼내 보니 껍질은 이미 말랐고 밑과 끝의 양쪽이 다 갈라 터져 있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살아날 이치가 만무(萬無)하다”고 하자 종락이 격개(激慨)하여 말하기를 “선조의 충절(忠節)이 현창(顯彰)된다면 이 나무가 반드시 살 것”이라 하였다. 이에 사당 곁의 폭포 위에 꽂아 심으니 실로 6월 16일이었는데 이윽고 과연 살아나서 지금 3년이 지나자 울연(菀然)히 움틈이 무성한데 또한 죽림공에게 정려(旌閭)하고 증직(贈職)을 내리는 명(命)이 있게 되니, 아아! 다시 기이한 일이다. 내가 일찍이 여기기를 고금(古今) 천하(天下)에 이치가 없는 사물이 없고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괴이(怪異)한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인데 지금 이 운곡의 나무를 이식(移植)한 일은 바로 그렇게 말하지 않은 바의 지극한 것인즉 비록 이를 삼척동자(三尺童子)에게 말한다 하여도 반드시 믿지 않을 일인 것이다. 그러나 자고(自古)로 충신과 절사(節士)가 일편단심으로 이륜(彛倫)을 잡아 적심(赤心)으로 분발(奮發)하여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아니한다면 그 의열(義烈)의 혼백(魂魄)이 하늘의 은혜를 치받고 해와 달을 관통하며 울결(鬱結)하여 엉기되 풀어져 새지 않고 오래 되어도 민몰(泯沒)되지 않는 것이 본디 절로 그러한 것이어서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병자년(1456)에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모의한 절의(節義)가 어떤 정도의 굳센 장부(腸腑)와 열혈(熱血)로써 하늘을 지탱하고 땅의 기둥이 되며 일시의 윤기(倫紀)를 세움으로써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을 부축한 것임에 일러 말할 바이겠는가? 무릇 임금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로 하여금 이마에서 땀이 나고 혀가 움츠러들게 하였으니 천지의 귀신도 또한 침묵하며 감응(感應)하여 음으로 도움으로써 그 영이(靈異)를 드러나게 하였을지도 모르니 신기한 자취는 이같이 자연스러운 이치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우리 성상(聖上) 정조(正祖)께서 풍화(風化)를 두터이 함으로써 명절(名節)의 마음을 숭상하고 지난날의 서패(書牌)에서 널리 감회를 일으켜 양성(兩聖: 단종 내외)에 대한 유지(遺志)를 계술(繼述)하였으므로 그 자규루(子規樓) 자규루(子規樓):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건물. 단종은 1456년(세조 2) 노산군(魯山君)으로 낮추어져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국지산 아래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자 관풍헌으로 옮겨가 생활하며 동쪽의 자규루에 자주 올라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준 「자규사(子規詞)」를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원래 매죽루(梅竹樓)였던 것이 후에 자규루로 개칭되었다.
를 새로이 회복시키는 날에 신령스럽고 괴이한 감응이 하나가 아니어서 족하고 그것이 화재 바람으로 그 주춧돌과 터를 드러내며 비를 내리고 융화시켜 그 나무와 돌을 인도하기를 마치 지휘하여 분주히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인즉 또한 무엇이 괴이할 것인가? 썩은 것이 수백 년을 경과하여 싹이 나고 잘라온 것이 30일이 지나서 살아났으니 이 나무가 비록 하나의 감정이 없는 식물일지라도 본디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갓끈을 떼어주면서 격문(檄文)을 기초(起草)할 때에 곁에서 그 상황을 안 자이므로 그가 패하게 됨에는 먼저 그 줄기와 가지가 말라서 거의 그 화를 예고하는 것같이 하고 그 후 위가 되게 되어서는 홀연히 그 싹이 움터서 또한 그 기쁨을 드러내 보답(報答)하는 것 같이 하였으며 옮겨심기에 이르러서는 비록 곁의 가까운 땅에 뿌리가 잇닿아 두터이 배양(培養)되더라도 오히려 살지 못할까 근심할 일인데 그 자른 가지가 말라서 터진 것이 이미 오래인데 손으로 심음에 따라 문득 순이 싹텄으니 마치 이 나무가 이 일의 시종(始終)을 밝히 아는 것과 같고 이 가지로써 이 사람의 증계(證契)를 만들어 주었으니 열렬한 정기가 황홀한 사이에 감응하는 소이(所以)가 대저 어찌 우연한 일로 일어난 바일뿐이겠는가? 혹은 고사했다가 혹은 살아나는 것이 반드시 그 때를 당하여 바로 이로써 영화롭고 췌락(瘁落)함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니 비록 홀로 천지의 정기(正氣)를 얻었다고 하여도 가할 것이며 비록 수목 가운데의 육신(六臣)이라고 하여도 가할 것이니 이로써 가히 죽림공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이 영겁을 지나서도 오히려 사물에 징험(徵驗)되는 것을 볼 수 있음에야 또한 어찌 종락(宗洛)의 성효가 [지극히 발현되었음을] 족히 상감(想感)할 수 있는 바가 아니겠는가? 아아! 공자(孔子)의 노송나무와 내공(萊公) 구준(寇準): 961-1023. 북송 초의 정치가 겸 시인. 거란의 침입 때 많은 공을 세워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하였다. 시집으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이 있다.
의 대나무가 다 믿을 만한 기미가 잊어 간책(簡冊)에 전하고 있는 것인즉 실로 이 같은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거늘 어찌 가히 탁타(槖駝) 탁타(槖駝): 꼽추라는 뜻인데 중국에서 옛적에 수목을 잘 심은 명인(名人) 곽탁타(郭槖駝)를 이른다.
의 예법(例法)으로 이를 비상한 조화라고 천박한 논리를 굳세게 고집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천하의 후세에 이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나무를 보는 자가 나뭇잎에서 부는 바람 소리를 듣는 사이에 모두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감개로 각자가 불각(不覺)에 흥기(興起)하고 격앙하여 모발(毛髮)이 서고 눈초리가 갈라지며 또한 사람의 일만을 아끼고 사랑할 뿐이 아닐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런즉 이 나무가 세교(世敎)와 관계가 있는 것이 어찌 일시에 그칠 기이한 소문일 것인가? 오호라, 그는 가히 공경해야할 바요 그는 가히 두려워해야 할 바일진저. 죽림공은 휘(諱)가 산해(山海)이며 압각수는 속명(俗名)이 은행이라 한다.
  진사(進士) 파평(坡平) 윤기(尹愭) 지음[정조 15년 신해년(1791)에 성균관에서 지어 보낸다]

    鴨脚樹記
    압각수 기문
永休 嘗西遊興州 觀其所謂鴨脚樹 壇下人指而語曰 此錦城大君所憩之地也 此樹之生長於斯而菀然獨秀捍衛客舍 一枝蔓走北渡竹溪水 直抵明倫堂者 不知昉於何代 亦不知其甚人培養 而盖其大且奇殊異乎倫者 自始固然矣 粤在景泰癸酉 忽焉自枯 州人懼而卜之曰 鴨樹復生 興州可復 人不能解其繇 而是我文宗大王賓天之明年三相臣死事之時也 越二年乙亥 端宗遜位 又二年丁丑 錦城之難 興州始革 二百三十九年 而至肅廟丙子 朽根始㽕環紉古楂 樹復如舊 是歲興州果復 又二年戊寅追復魯陵 又四十四年弘陵壬戌 命壇樹下縟儀大擧 諸寃咸伸 於是隨根輒芽菀然成林 嗚呼 大君不死之心 固知其寄在天壤之間 庸詎知不死之樹心 斂藏於盤根之中 而發見於四甲之久耶 我傍先竹林先生與大君同節也 當時之爲魯陵立殣諸臣 歷二聖而靡不崇報而獨於先生之貞忠卓節 猶未免有未遑之典 其耳孫葛山公宗洛 痛伸雪之蹉跎 叫九閽 以幽鬱往來京洛 道此樹下 彷徨捫涕曰 枯木回春 幽寃克伸 吾祖之忠 庶達天聰 時正宗己酉也 始蒙復官之典 歸抵于此 又祝曰 願得鴨脚枝移樹竹林祠 迺斫長大如柯 藏之行槖 盤旋龍宮 月餘而抵本祠 實六月十六日也 出視其枝 皮膚已乾 木末俱坼 況且木氣囚藏之節萬萬無生理 而公迺揷之於見心門外曰 吾祖之忠節見旌 此樹必生 明年厥樹果生 旌贈畢擧 尤亦異矣 永休 近僑玆邦 祗拜于祠 愀然而退 蒼然而亭亭者 曾所謂鴨脚樹 而森森如錦壇之見也 繞其下百千回 摩挲焉 詠歎焉 諸宗相顧而問曰 此樹之生 二忠同節之心與 抑葛山公追孝之誠與 永休應之曰 雖可謂追孝之誠 微二忠所不可必也 雖可謂同節之心 微葛翁安能使然 然則其忠孝之誠心 脗合於三百載之間 自天褒崇之恩 參化育而生得者也 今以此言之人則人或疑其理外而凡事之非常理必有非常 從古以來 忠臣烈士之殉其身者 其貞魂毅魄貫 日月亘宇宙 鬱而不散 歷浩劫而長在 迬迬呈露其靈怪神異之跡 同死之鳥樹 南指之墓樹 已皆傳之簡冊 徵信後世 至若先生頒誥之夕 白日祥虹 自祠庭 橫亘雲霄 其端隱隱 若隮于百粤之中 頃當節洞創齋之日 蓄石露而礎之 旱泉湧而圬之 則其常神異之蹟 與夫子規樓重新之日 火之風之 而露其礎址 雨之瀜之 而導其木石者 同一論契 而又有如昭顯陵間 自枯之松 亦非神明所格自然之理耶 窃惟我竹林先生 貞高耿介之操 出於人幾等 而自知讀書興感於孤竹子 扶綱萬世之節 及長而如成梅竹諸先生 爲死生之交 盖其盡忠所事之心 已見於尙論交友之間 而惟其戚聯椒闈 不欲冒進 遂廢擧業 屢徵不起 退守林泉 三十年經學之娛 尤足以忘世 至端宗甲戌 皇甫忠定諸公 相繼而殯 機禍已明 而卽赴應召 其志固有在於難言之中矣 竟辦大節於丙子之秋 其一心死國與大君 贈纓草檄之志 終始如一 協謀同力 六臣可七 六臣在京而就鞫 先生在鄕而自盡 故其跡不得垺美於世 獨此幽寃駸駸 至三百六十年之久而后 始得爲莊陵七臣闡發之有先後 其猶一樹之花 生有早晩 若見義之明 先生家傳之心法 先生之皇考判事公 守義勝國 挈家浮洛 六世而義士公 島夷猖獗 輿疾死難 其孺人柳氏 矢復邊城自盡下從 十一世而未笄娘子取薪供孝罵樵自縊三忠二烈 前後炳烺 十二世而又有如葛山公 爲祖訟寃 十度叫閽 先生之家 可謂三綱已備矣 惟此鴨脚樹之先知冲王遜荒之機而自死 先知莊陵追復之喜而復生 又知錦城設壇之命 而成林者 其可不先知先生旌贈之典而移生乎 吾知其朽者之復生 斫者之移生 非但爲忠孝所感 而其死其生之心 固已凖備於長衛公館 而直抵明倫堂之初 今玆連抱其大 而森森枝幹 擎立蒼穹者 與錦城壇上樹 同氣相通 同心相應 上以扶國家萬古之綱常 下以芘倫綱俱備之家矣 後之人 過此地 而見此樹者 固不可以無情之植物看之 而敬之如神明 則百世之下 必有聞其風者 而大有關於名敎也 旣族祖致根氏 責一言以記之 謹述其耳目所及 及其問答之語 如右 祠在東都之雲谷 我上祖太師公 尸祝之所 而先生與龜峯先生從焉 龜峯竹林之從玄孫也 鴨脚樹 銀杏之象名云爾
  權永休 撰

나 영휴(永休)가 일찍이 서쪽으로 흥주(興州)를 유람(遊覽)할 때 소위 압각수(鴨脚樹)라는 것을 보았는데 금성단(錦城壇) 금성단(錦城壇): 경북 영주시 순흥군 내죽리.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다가 화를 당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1426년~1457년)을 비롯하여 이보흠 등 그 일에 연루 되어 목숨을 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여기는 금성대군(錦城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 조선 세종의 여섯 째 아들. 이름은 유(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단종의 숙부, 세조의 동생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으로 봉해지고, 1437년 방석(芳碩)의 후사가 되었다.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1)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에 안치, 그곳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基川) 현감의 고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이 쉬었던 곳이다. 이 나무가 여기서 생장하여 완연(菀然)하게 홀로 빼어나 객사(客舍)를 막아 지켰는데 가지 하나가 북쪽으로 뻗어 죽계수(竹溪水) 죽계수(竹溪水): 소백산 초암사(草庵寺)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삼괴정 근처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에 걸쳐 흐르는 계곡을 죽계구곡(竹溪九曲)이라 한다. 죽계구곡은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하여 영주시 순흥면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 상류로 흘러들어 가는 죽계천(竹溪川)의 상류 지역이다.
를 건너 명륜당(明倫堂)을 곧바로 밀어젖힌 것은 어느 대(代)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또 누가 배양(培養)하였는지도 알지 못하나 아마도 그 크고 기이하여 그런 종류보다 아주 특이함은 처음부터 본디 그랬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단종 원년 계유년(1453)에 갑자기 저절로 시들었다. 고을 사람들이 겁이 나서 점을 치니, “압수(鴨樹)가 다시 살아나면 흥주(興州: 順興)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아차릴 수 없었는데 이때는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이 돌아가신 이듬해로서 세 정승이 사형을 당한 때였다. 2년을 지나 을해년(1455)에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였고 또 2년을 지나 정축년(1457)에 금성대군(錦城大君)이 흥주(興州)에서 사사(賜死)되는 난이 있었다. 흥주가 혁파(革罷)되고 239년이 지나 숙종(肅宗) 병자년(1696)에 이르러 썩은 뿌리에서 비로소 싹이 옛 등걸을 매어 묶어서 압각수가 예전처럼 회복하니 이 해에 흥주가 과연 회복되었다. 또 2년을 지나 무인년(1698)에 노릉(魯陵)을 추복(追復)하고, 또 44년을 지나 영조(英祖) 임술년(1742)에 단수(壇樹)아래에서 화려한 의식을 크게 거행하도록 명하니 여러 원통함이 모두 풀렸다. 이에 뿌리를 따라 문득 눈이 터서 울연(菀然)하게 무성해졌다.
  아! 대군(大君)의 죽지 않는 마음이 진실로 천지의 사이에 붙어 있었던 것은 어찌 죽지 않는 나무의 속마음이 얽힌 뿌리 속에 감춰졌다가 240년이나 되는 오랜 뒤에 발현될 줄은 알지 못했는가! 우리 방선조(傍先祖)이신 죽림선생이 금성대군과 함께 절조(節操)를 지키셨다. 당시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키다 죽은 여러 신하가 두 임금을 지나서 숭보(崇報)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오직 정충탁절(貞忠卓節)한 선생에 대해서는 오히려 서두르지 못한 의식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 7대손 갈산공(葛山公) 종락(宗洛)이 울분을 풀 기회를 놓쳤음을 애통하게 여겨 궁궐에 유울(幽鬱)한 사정을 아홉 번 부르짖었는데 서울을 왕래하는 길에 이 나무 아래에서 서성이며 눈물을 닦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들었던 나무가 회춘(回春)하니, 우리 할아버지의 유원(幽寃)도 풀릴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정충(貞忠)이 임금에게 도달될 것이다” 때는 정조(正祖) 기유년(1789)이었다.
  비로소 관작(官爵)을 회복하는 은전(恩典)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여기에 도착하여 또 다음과 같이 빌었다. “원컨대 압각수의 가지를 꺾어서 죽림사(竹林祠)에 가져가서 심겠다.” 이에 도끼자루만한 길이로 잘라 행탁(行槖)에 넣어 예천(醴泉) 용궁(龍宮)을 돌아 한 달여 만에 본 사당에 도착하니 실로 기유년(1789) 6월16일이었다. 그 가지를 꺼내어 보니 껍질은 이미 말랐고 나무 양끝도 모두 터졌으며 거기다가 나무 기운이 움츠려드는 계절이어서 살아날 리가 전혀 없었는데도 공께서 현심문(見心門) 밖에 꽂아 심으면서 “우리 할아버지의 충절(忠節)이 정려(旌閭)를 받았으니 이 나무가 꼭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듬해에 그 나무가 과연 살아났고 증직(贈職)이 모두 이루어졌으니 특별히 기이하였다.
  나 영휴(永休)가 근래에 이곳에 살면서 공경하게 사당에 참배하고 용모를 바르게 하고 물러나오는데 푸르게 높이 솟아 있는 것은 일찍이 말했던 압각수인데 무성하여 마치 금성단에서 보는 것 같았다. 그 아래를 백 바퀴 천 바퀴 돌면서 손으로 어루만지고 감동하여 찬탄하였다. 여러 종인이 서로 돌아보면서 묻기를 “이 나무가 살아난 것이 이충(二忠: 금성대군과 죽림공)이 절개(節槪)를 같이 한 마음인가? 아니면 갈산공이 추효(追孝)한 정성인가?” 나 영휴(永休)가 응답하기를 “비록 갈산공이 추효한 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더라도 이충(二忠)이 아니면 기필(期必)할 수 없었던 것이며 비록 절개를 같이 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더라도 갈산옹이 아니면 어찌 그리 되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충과 효의 성심이 300년 사이에 꼭 맞아서 하늘로부터 포숭(褒崇)하는 은전이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길러 자라게 하는 데에 참여하여 압각수를 살아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사람들은 혹시 이치 밖으로서 비상한 일에는 이치상 반드시 비상함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예로부터 충신과 열사로서 자기 몸을 바친 자는 그 올곧고 굳센 혼백이 해와 달을 뚫고 우주에 뻗혀서 울분이 막혀 흩어지지 않아 매우 긴 세월을 지나도 길이 남아 왕왕 그 영괴신이(靈怪神異)한 자취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함께 죽은 섬나무[島樹]’와 ‘남쪽을 가리켜준 무덤나무[墓樹]’가 이미 모두 간책(簡冊)에 전하여 후세에게 믿음의 증거가 되고 있다. 선생에게 직첩(職牒)을 내려주던 날 저녁에 해와 무지개가 사당 뜰로부터 가로질러 하늘까지 뻗혀서 그 끝이 은은(隱隱)하여 마치 험한 백월산(百粤山) 한가운데로 올라가는듯하였다. 그 때 절동(節洞)에 재사(齋舍)를 창건하던 날에는 축석(蓄石)이 무너져서 그것이 주춧돌이 되고, 마른 샘에서 물이 솟아 흙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늘 있어온 신이(神異)한 자취는, 자규루(子規樓)를 다시 지을 때 불이 나고 바람이 불어 예전 주춧돌을 드러나게 하고 비가 오고 물이 불어 나무와 돌을 인도한 것과 더불어 같은 논리로 합치하고, 또 소현릉(昭顯陵) 소현세자(昭顯世子): 조선 인조의 맏아들(1612~1645).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서역 원정에 출전하여 서양 서적과 지구의, 천주 상(像) 따위를 가지고 돌아왔다.
 사이에 저절로 말랐던 소나무도 신명(神明)이 이르러 저절로 일어났다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죽림선생은 절개가 곧고 높으며 지조는 세속과 타협하지 않아 보통 사람을 몇 등급이나 뛰어넘어서 글을 읽을 줄 알 때부터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伯夷와 叔齊]이 만세의 강상(綱常)을 바로 세우는 절의에 흥감하였고 자라서는 매죽당(梅竹堂) 성삼문(成三問) 성삼문(成三問): 조선(朝鮮) 시대(時代) 4대 세종(世宗) 때의 충신(忠臣)ㆍ학자(學者)(1418~1456).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자(字)는 근보(謹甫)ㆍ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昌寧).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서 정 인지(鄭麟趾) 등(等)과 세종(世宗)을 도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 때 음운(音韻)의 조사(調査) 연구(硏究)를 위(爲)하여 요동(遼東)에 여러 차례(次例) 왕래(往來)하는 등(等) 공이 많음.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한 뒤, 세조(世祖) 2(1456)년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失敗)하여 화를 입음. 충의(忠義)의 시조(時調)와 한시(漢詩)가 남아 전(傳)함.
과 같은 여러 선생과 생명을 건 교우를 했던 것은 대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겠다는 마음이, 이미 고인(古人)의 일을 평론하고 벗과 사귀는 사이에 나타났으나, 오직 궐내(闕內)와 인척관계로서 무턱대고 나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공부를 폐하고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고 임천(林泉)에 물러나서 30년 동안 경학(經學)에 심취(心醉)한 즐거움이 넉넉히 세정(世情)을 잊었다. 단종 갑술년(1454)에 황보인(皇甫仁) 황보 인(皇甫仁): 조선(朝鮮) 시대(時代) 4대 세종(世宗) 때의 상신(相臣). 호는 지붕(芝峰)ㆍ지재(芝齋). 영천(永川) 사람. 세종(世宗) 18(1436)년 병조(兵曹) 판서(判書)가 되었으며 1440년 평안 함길도 체찰사(平安咸吉道體察使)가 된 후(後) 약 10년간에 걸쳐 절제사(節制使) 김 종서(金宗瑞)와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開拓)했음. 5대 문종(文宗) 2(1452)년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나 6대 단종(端宗) 1(1453) 계유정난 때 수양 대군에게 죽음. (?~1453).
 시충정공(諡忠定公) 등 여러분이 서로 잇달아 죽고 화의 기미가 이미 밝혀져 곧 부름에 응한 것은 그 뜻의 고유함이 말하기 곤란한 가운데에 굳게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병자년(1456) 가을에 대절(大節) 대절(大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
을 준비하였으니 그 한결같은 마음은 나라와 대군(大君)을 위하여 죽되 현명한 사람을 보내어 격문(檄文)을 기초(起草)할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을 협력 도모하고 같이 노력하였으니 육신(六臣)은 칠신(七臣)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육신(六臣)은 서울에 살아서 국문(鞫問)에 잡혀갔고 선생은 시골에 있어 자진(自盡)하였기 때문에 그 자취는 세간(世間)에 육신(六臣)과 비등(比等)한 아름다움을 얻지 못하고 홀로 깊은 원한(寃恨)이 세월이 빠르게 달려 36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장릉(莊陵: 단종)의 칠신(七臣)이 되었으니 천발(闡發)함에 선후가 있음은 한 나무의 꽃이 일찍 피는 것도 있고 늦게 피는 것도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의(義)를 나타냄이 명확한 것은 선생의 대물림한 심법(心法)이다. 선생의 할아버지 판사공(判事公)께서는 고려에 대한 의(義)를 지켜서 가솔(家率)을 이끌고 서울에서 떠났고 육세(六世)에서 의사공(義士公)께서는 왜적(倭賊)의 세력이 거셀 때 병든 몸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 전사하니 그 유인류씨(孺人柳氏)가 변성(邊城)을 회복할 것을 맹세하고 부군(夫君)을 따라 자진(自盡)하였고, 11세에서 시집가지 않은 낭자(娘子)가 땔감을 해서 효성으로 부모를 모시는데 어떤 나무꾼이 해코지하려하자 그 나무꾼을 꾸짖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세 사람의 충(忠)과 두 사람의 열(烈)은 앞뒤 일이 명백하다. 12세에 또 갈산공(葛山公)은 조선(祖先)을 위하여 열 번이나 궁중(宮中)에서 억울하고 원통함을 호소한 일이 있었으니 선생의 집안은 삼강(三綱)이 이미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압각수(鴨脚樹)가 어린 임금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어야한다는 기미를 먼저 알고 스스로 죽었다가 장릉(莊陵)이 복위(復位)되는 기쁨을 먼저 알아차리고 다시 살아났으며 또한 금성단(錦城壇)을 설치하라는 명이 있을 것을 알고 무성하게 된 것은 선생에게 정려(旌閭)와 증작(贈爵)의 은전(恩典)이 내려질 것을 미리 알고 살아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알기로는 썩은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잘린 토막이 옮겨 살아난 것은 충과 효에 감동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죽고 사는 마음이 진실로 확실히 이미 공관(公館)을 길이 호위(護衛)할 것을 준비하여서 처음에는 명륜당을 곧바로 밀어젖혔던 것이 요즈음에는 여럿이 팔을 이어서 안아야 할 만큼 커서 쫙 벌어진 몸통은 하늘을 떠받드는 것은 금성단 위의 나무와 더불어 같은 기운이 상통하고 같은 마음이 상응하여 위로는 나라의 만고강상(萬古綱常)을, 아래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갖춘 집안을 보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뒷날 이곳을 지나면서 이 나무를 보는 이는 진실로 지각없는 식물로만 보지 않고 신명처럼 조심하며 대한다면 백세 아래라도 꼭 그 소문을 듣게 될 사람이 있어서 인륜의 명분을 가르치는 데 크게 말미암음이 있으리라. 이전에 족조(族祖) 치근씨(致根氏)가 기문(記文)을 지으라고 권하기에 듣고 본 바와 묻고 답하였던 말들을 위와 같이 삼가 적었다.
  사당(祠堂)은 경주의 운곡에 있으며 우리 시조 태사공을 제사지내는 곳으로 先生이 귀봉선생과 종향되어있다. 귀봉은 죽림의 종현손(從玄孫)이다. 압각수(鴨脚樹)는 은행(銀杏)나무잎의 생김새로 인해 이름이 붙여졌다.
  권영휴(權永休) 지음.


    竹林公遺墟碑文
    죽림공 유허비 비문
光廟丙子 六臣成三問等 謀復上王 事覺被鞫時 有故僉正權公山海 在家聞變 自投于閣以死 光廟命削其官 家屬徙于邊 子孫亦禁錮 肅宗戊寅 復莊陵位號 其時坐事死者 竝許旌贈之典 公名尙在罪籍 至今上己酉 公之十二代孫宗洛 上言訟寃 上特命復爵 後三年辛亥 上過露梁六臣廟 感莊陵事 命於陵傍建祠築墠 合祀死難諸人 於是 三道儒生宋文箕等 齊籲請褒 上議大臣 贈公吏曹參判 旌其閭曰忠臣之門 嗚呼 自古 立殣殉絶者 雖或蹔翳於一時 終必彰著於百世者 天也 夫以公所樹之卓而暗昧不章者 殆三百年 豈當時事爲世所諱 人不敢公傳道之 而公又捐生 近於隱約 故無得以名之歟 抑後裔微弱不能任闡揚之責 遂至于今日也 公死後 夫人權氏 取家藏文籍 悉焚之 公之行蹟 無由得詳 然公天資剛毅 嘗讀伯夷傳 歎曰 有是人然後 可以扶萬古綱常也 論古人遇難立節 必爲之扼腕激慨 見人之不義 若將浼焉 以才行薦爲昌德宮錄事 轉主簿 以戚聯椒掖 辭不拜 甲戌 除宗簿寺僉正 始就任 蓋欲爲幼主效忠也 公與成公 交最厚 權自愼 又公之婦弟也 成權事敗 雖不與六臣者 竝膏斧鑕以驚動一世之耳目 而若其先幾殉身 以獻先王 則均之無愧於義也 屬今聖心曠感 凡坐  莊陵事者 靡不褒揚 多士之請 適會斯時 於是乎 貤贈棹楔 輝暎丘原 而公之大節 始日星乎宇宙矣 時雖有早晩 而及其至 則一也 屈伸顯晦 信有天可徵者也 豈不盛乎 公安東人 字德甫 號竹林 曾祖諱希正監察 贈左議政 諡文靖 祖諱軺 高麗文判事 議政軫之弟也 考諱寬 經歷 娶金海崔氏縣監仲雲女 以永樂癸未 生公于龍宮大竹里 夫人權氏 顯德后之姊也 生四男一女 男哲祖 哲宗夭 哲命別提 哲孫判官 女適縣監鄭蘭元 孫曰經 七十三 見禁錮解 與從子應星 同登司馬 玄曾以下 多不盡錄 公之後孫 議就公遺墟竪短碑 宗洛 屬文於不佞云
  李敏輔 撰

세조 병자년(1456)에 사육신인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모의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이 되어서 국문(鞠問)을 당할 때에 첨정 벼슬을 하신 권산해(權山海)가 집에서 그 변고를 듣고 집 위에 올라 투신자진을 하니 세조가 그를 삭탈관작을 하고 가족을 사변(徙邊)시키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숙종(肅宗) 무인년(1698)에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켜서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으로 부르게 하고 사육신 사건 때에 연좌(連坐)되어 죽은 신하들에게 모두 정려의 은전을 내렸으나 죽림공은 죄인의 명부에 남아있었다.
  지금 상감[정조(正祖)]의 기유년(1789)에 죽림공의 12대손 종락(宗洛)이 억울함을 하소연한 글을 올려서 상감께서 특별히 관작의 복직을 명하시었고 삼년이 되는 신해년(1791)에 상감께서 노량진 육신 사당에 들려서 단종의 억울함을 감탄하시고 단종릉[장릉] 옆에 사당을 짓고 단을 만들어서 순직한 여러 신하들을 합동으로 제사지내계하시었다. 이때에 삼도(三道)의 유생(儒生) 송문기(宋文箕) 등이 여러 충신들의 표창을 주청해서 상감께서 대신(大臣)들과 논의해서 공에게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을 내리시고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워 충신의 문(門)으로 부르게 하시었다.
  아! 예로부터 정의로 목숨을 바친 자는 간혹 일시적으로 숨겨지는 경우는 있어도 뒤늦게 세상에 드러나 백세토록 알게 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인 것이데. 公께서는 훌륭한 절의를 세웠으나 300년 가까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것은 어째서 그 당시 일들이 세상에 숨겨지게 되고 사람들이 감히 공개적으로 공의 일을 말할 수 없었을까? 공이 또 거의 남들이 모르게 세상을 뜨셨기에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후손들이 미약해서 천양(闡揚)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공이 세상을 뜨시니 부인 권씨(權氏)께서 집에 있던 문적(文籍)을 모두 불태워서 공의 행적을 남기지 않으시어서 공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공께서는 천품(天稟)이 굳세고 정직해서 일찍이 「백이전(伯夷傳)」을 읽다가 탄식하고 말씀하시기를 “인품이 백이(伯夷) 같은 사람이 된 뒤에야 가히 만고(萬古)에 강상(綱常)을 지킬 수 있다”고 하시고 고인(古人)들이 어려움을 당해서 절의를 지킨 글들을 읽고는 분개(憤慨)한 마음으로 주먹에 힘을 주었고 불의(不義)를 저지른 사람을 보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 같이 생각하시었고 재능과 품행으로 추천이 되어 창덕궁(昌德宮) 녹사(錄事)로 임명이 되고 주부(主簿)로 승진이 되었으나 왕비의 인척이란 이유로 사양하시고 갑술년(1454)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최초로 벼슬길에 오른 것은 아마도 어린 임금님께 충성을 다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성삼문(成三問)과 가장 가까웠고 권자신(權自愼)은 또 공의 처남(妻男)이었다. 성삼문 ・ 권자신 두 분의 일이 실패를 해서 사육신과 같이 일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육신이 함께 죽음을 당해서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니 아마도 기미(幾微)를 아시고 먼저 목숨을 버리고 선대왕[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것은 육신과 같은 정의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지금 임금님의 마음에 느낌을 주었기에 단종사건에 연좌되었던 모든 분에게 모두 표창하시었고 때마침 여러 사림들의 주청(奏請)이 있었다.
  아! 정려가 내려져서 고향 산천이 빛이 나고 공의 큰 절의가 처음으로 우주에 일월(日月)같이 밝혀졌으니 비록 표창이 늦고 이른 것은 있을 수 있으나 밝혀진 것은 같으니 숨겨지고 나타난 것은 참으로 하늘이 증거 해 주는 것이니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은 안동(安東)이 본관이시고 자(字)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이며 증조의 휘(諱)는 희정(希正)이며 감찰(監察)인데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고 조(祖)의 휘는 초(軺)며 고려(高麗) 관직 문과(文科) 판사(判事)이며 조선조 정승이신 진(軫)의 아우시고 고(考)의 휘는 관(寬)이며 경력(經歷)이시다. 김해최씨(金海崔氏) 현감(縣監) 중운(仲雲)의 따님과 결혼하시어 영락(永樂) 계미년(1403)에 용궁(龍宮) 대죽리(大竹里)에서 공을 낳으셨는데, 부인 권씨(權氏)는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언니가 되는 분이시다. 4남1여를 낳으시어 장남은 철조(哲祖)이고 다음 철종(哲宗)은 요사(夭死)했고 철명(哲命)은 별제(別提)였고 철손(哲孫)은 판관(判官)이었다. 사위는 현감 정난원(鄭蘭元)이다. 손자 경(經)은 73세에 금고(禁錮)가 풀려서 조카 응성(應星)과 같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그 밑으로 현손(玄孫) ・ 증손(曾孫)들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후손들이 공이 살던 곳에 작은 비를 세우기로 의논을 하고 종락(宗洛)씨가 부족한 나에게 글을 부탁해서 이렇게 지었다.
  이민보(李敏輔) 이민보(李敏輔) : 1720-1799. 조선 후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눌(伯訥), 호는 풍서(豊墅) 또는 상와(常窩)이다. 1795년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노인직으로 판돈녕부사·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충렬서원의 제35대 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풍서집(豊墅集)』18권, 『상와고(常窩稿)』, 『충역변(忠逆辨)』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贈大冢宰忠愍公竹林權先生遺墟碑銘後識
    증대총재 충민공 죽림 권선생 유허비명 후지
先生之忠烈 昭載國乘 與六臣幷卓 累贈至大冢宰 諡忠愍公 享雲谷魯峯兩院 貞忠碑 神道碑 伸冤後趁竪於墓下 最近移建于魯峯院 已成碑閣 至於遺墟碑 葛山公之世已乞於李公諱敏輔 積數百餘年 尙今未遂 賢仍積世齎恨之餘 殫誠合謀 將擬豎碑於當日徜徉之地 寧夏君 踵門而請余識其後 余雖不文 事同一室 不揆僭越 强把殘毫 至於先生事蹟狀碣及遺墟碑文 詳載 不復加疊 祇敍積世未遑至今遷延顚末之由
  己丑仲春 宗後孫權憲祖 謹撰

선생의 충성(忠誠)과 열의(烈義)는 국사(國史)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서 사육신과 같기 때문에 증직이 여러 차례 더해져서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충민이란 시호를 받고 운곡 ・ 노봉 두 서원에 모셨으며 정충(貞忠)의 비(碑)와 신도비는 신원(伸寃)된 뒤에 일찍이 묘역 아래 세워졌다가 최근에 노봉서원으로 옮겨서 이미 비각까지 지었고 유허비를 세우는 일은 갈산공 시대에 이미 이민보(李敏輔)공의 글을 받고도 백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고 후손들이 여러 해 동안 걱정하다가 지금 훌륭한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려고 뜻을 모서 선생이 평소에 거닐던 곳에 유허비를 세우려고 영하(寧夏)군이 내 집을 찾아와서 후지(後識)를 부탁 하니 내가 문장력(文章力)이 부족하지만 내 문중의 일과 같아서 참람함을 무릅쓰고 억지로 힘을 내서 쓰는데 선생 사적은 갈명(碣銘)과 유허비에 자세히 기록되어서 중복으로 쓸 필요는 없고 대대로 이루지 못하고 미루어오게 된 연유(緣由)를 삼가 서술한다.
  기축년(2009) 중춘[2월] 종후손 권헌조(權憲祖) 삼가 지음


    魯峯書院事蹟碑
    노봉서원 사적비

醴泉의 池後村에 魯峯書院이 높직하니 竹林先生을 모시는 이 겨레의 聖域이다. 先生은 山海로 이름 쓰고 字는 德甫이며 安東權氏十九世이니 高麗開國의 元勳인 太師公으로 紀世하여 佐尹公이 派祖요 할아버님은 文科하여 判事요 軺로 이름 쓰는 松臯公인데 朝鮮이 革命하자 罔僕臣으로 嶺을 넘어 龍宮縣 大竹里에 숨으니 忠孝가 世傳했음을 알게 하며 經歷이던 諱에 寬과 金海崔氏인 仲雲의 따님이 兩親이다. 先生이 이 집안 六男二女의 맏이요 太宗癸未인 西紀一四O三年에 태어나 어려서 從祖인 文景公께 글을 배우다가 伯夷傳에 이르러 이런 사람이 있어야 綱常이 萬古에 푸르리라 하였으니 至極히 正邪是非에 뚜렷했고 넉넉한 學德으로도 端宗大王의 姨叔이므로 벼슬 않더니 文宗의 顧命大臣들이 어린 임금을 輔弼할새 先生도 一四五四年 宗簿寺僉正으로 朝廷에 섰다가 이듬해 禪位하자 一死心을 품고 온갖 誘惑을 뿌리치며 옛집 大竹으로 물러났는데 謀復이 이미 드러나 六臣들이 獄에 있다 듣고 先生은 저승 가서 임금을 돕자 하고 妻子와 告訣하고 朝服을 갖추고 樓에 올라 四拜하고 自盡하니 嗚呼라 春秋가 五十四歲이요 世祖가 罪籍에 이름 얹고 家族을 바닷가로 내치고 子孫에게 禁錮하니 그 酷毒함이여 明宗丙辰에 蕩滌되니 百年만이요 肅宗戊寅인 一六九八年에 端宗이 追復되고 英祖壬戌인 一七四二年에 死六臣들이 封諡贈爵되지만 先生에게는 恩典이 없자 十二世孫인 葛山公이 一七八五年인 正祖乙巳에 雲谷書院에 先生을 配享하고 伸冤하고자 上疏가 열 번이요 擊錚하기 세 차례에 드디어 一七八九年인 己酉五月七日癸亥에 復官되고 이태 지난 辛亥四月에 吏曹參判의 敎旨가 내려 旌閭되고 영월의 正壇에 모셔졌으며 이 해 五月에 太學의 生進들 通文이 있자 龍宮鄕校를 비롯한 나라 안의 士林들이 贊同하여 甲寅인 一七九四年에 여기 書院이 서니 魯峯이요 廟號는 崇節이요 門은 節義이며 堂은 尙彛요 乾惕과 蒙養이 夾室이고 齋는 取義와 成仁이며 樓는 拜鵑이니 顯晦는 때가 있고 葛山公의 至誠에 神明이 感應했도다. 六十年 지난 哲宗甲寅에 불타고 곧이어 院祠毁撤의 邦禁이 있었지만 高宗乙酉인 一八八五年 三月에 吏曹判書에 加贈되었다. 다시 一九二十年에 醴泉鄕校가 復院을 主倡하여 陶山과 屛山 등 遠近 여러 校院의 公論으로 이듬해 뜻을 이루니 祠를 崇義로 고쳤고, 一九八五年에는 文化財百四十號로 慶北道가 指定했고 一九九九年에 雲谷書院이 葛山公의 追配를 發議하여 道內 열세 校院의 協謀로 二千一年인 辛巳 九月 初五日에 從享하니 公의 諱는 宗洛이요 字는 明應이며 慶州菊洞에서 諱에 翼銖의 아드님으로 英祖乙丑인 一七四五年에 나서 竹林先生을 위한 七十五歲를 누렸다. 거룩하여라 先生의 마음속에는 오직 나라를 위하는 일뿐이고 생각속에는 오직 임금 돕는 일뿐이더니 일이 어긋나자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貞忠卓節이 빛났는데 그 지취를 葛山公이 밝혔으므로 先生곁에 公을 모시는 事蹟을 밝혀 三門 앞에 세운다.
  二千一年 冬至日에 原任成均館典學  東萊  鄭亮秀  謹撰
                              慶州菊洞葛山公門中  謹竪


二十世 판관공(判官公) 諱 철손(哲孫)
판관공(判官公)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의 현손이고 송고공(松臯公) 초(輜)의 증손, 경력(經歷) 관(寬)의 손자로 죽림공 산해(山海)의 넷째아들이다. 생몰 연대 등 여러 기록이 미상이다. 공은 세조 2년 병자년(1456)에 사육신의 단종 복위 거사 미수 사건으로 인하여 선부군(先府君)이 순절(殉節)한 뒤에 연좌되어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로부터 경주(慶州)에서 세거하여 이곳 좌윤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배위는 서산유씨(瑞山柳氏) 사직 복규(復圭)의 따님이고 묘소는 미상이다. 아들은 보공부장(保功部將) 민(敏)이 있고 딸은 2녀가 참봉 김서경(金瑞卿)과 김중동(金仲仝)에게 출가했다.

 禱蔭齋記(舊)
    도음재기
曲江郡二十里에 有禱蔭山하고 山之下達田里에 有齋新起而冒山名者는 卽故部將永嘉權公諱敏과 及其孫直長諱良과 部將諱寧과 叅奉諱平의 墳菴也라 公之葬斯丘가 殆四百年而往在壬子에 胄孫宜度氏가 謀諸宗人하야 始竪牲石하고 再明年甲寅에 又建是齋하니 正堂五間이오 曲樓二間이오 廟舍以陪之하고 堵墉以繚之하니 幹之者는 宜五·宜重·萬運·宜錘·肅道·宜郁也라 旣落에 宜重氏가 以僉意로 命余曰 吾家之落慶州가 自部將公으로 始하니 始公之祖竹林先生이 當端廟遜位之日하야 與成朴諸先生으로 同時殉節하야 自若孫이 徙錮邊塞하고 錮旣解에 公이 自延日로 來居安康하야 動忍增益하고 禔躬節行하야 僅能成立門戶而畏約以沒世하니 三孫이 俱通仕路而竟沈淹未蔭하고 漆齒之亂에 九思赴義하고 五慕矢復하야 家業因以旁落하야 報本之事를 卒闕而未遑開剏之祖하야 而一無畝墓宮하니 此先父老所苦心茹痛者也라 不肖輩가 今始鳩孱功合綿力하야 立得數架屋子하니 非敢曰肯構而粗述遺志也라 不可以無記니 子其圖之하라하고 因示憲章氏所爲文俾爲按本하니 顧中業之匪人無文으로 誠不敢當이나 然이나 於公之先祖文靖公에 實爲外裔也라 追念同祖誼에 亦不敢終辭에 謹取其文而讀之하니 首歎門戶之零替하고 中言建立之艱難하고 終以追慕之誠과 敦叙之道로 勉焉하니 是卽記也라 何必捨鷄而求鶩也哉아 於呼라 竊惟我外氏가 自錫土以來로 名公巨卿과 大儒弘匠이 世世輩出하야 爲東方甲閥而公之家最盛焉하니 公生是家에 以松臯竹林爲祖하고 九思五慕로 爲孫則其上承下啓之氣脉眞詮이 乃忠義二字也라 其才德之美와 志節之高는 必非夷常人比而旣當大有之世矣니 若無之痛之未伸而策名登朝則其功名事業이 安知不克紹家聲而身處畏約하니 規成底退에 痛念家國하니 往事西班徵御必不屑就焉則自外之窮通을 固不敢云云이라 其平日躬修之嘉言懿行이 宜有可傳諸後者로대 而兵燹浩劫이 乃歸於杞宋之文獻하고 婁世仁善之積이 宜有昌熾之報라 而並與此無之하니 禍福之天이 尙未定而然耶아 是今人可感者也라 於乎라 天下之人이 孰無父祖리오마는 聖遠敎弛倫彛斁喪하야 其終身飽煖하고 門非父祖遺澤이리요마는 而所以奉先이 不如自奉하고 甚者頹堂敗斧를 睨視而不修하고 殘盃冷炙을 過時而不奠하고 猶恬不知愧也로데 今宜度氏諸公則不然하고 以報本之未克盡誠으로 夙夜憂懼하야 節食縮衣하고 辛勤拮据하야 旣竪之石하고 又建之齋하니 陵谷桑瀛之有備而祀享歌哭之有所則一片堪語가 將與人之豊鐫하야 同其久遠而數架之築이 有多於渠渠之屋也니 是今人可敬者也라 夫屈伸之運과 祥殃之降이 不替는 在人而於忠孝에 甚焉이오 又屈之久者는 必伸之長而其期必遠하니 盖公家之屈이 始也以忠而今至四百年之久에 乃有此諸孫之孝思하니 吾知伸之在玆而期亦及矣라 其伸之日에 人必曰公之蔭也니 姑擧此可感可敬者로 以告夫世之有家君子而揭于齋壁하니 未知覽之者以爲善禱也否아
  建齋後六年己未七夕日에 眞城李中業은 謹記하노라

곡강군(曲江郡) 곡강군(曲江郡):흥해군(興海郡)의 옛이름이다. 오산군(鰲山郡)이라고도 한다.
에서 20리 거리에 도음산(禱蔭山) 도음산(禱蔭山):흥해군의 진산(鎭山)으로 포항시 북구 흥해읍과 신광면에 걸쳐 있다.
이 있고 산 아래 달전리(達田里)에 새로 지은 집은 바로 고(故) 부장(部將) 영가권공(永嘉權公) 휘(諱) 민(敏)과 그 손자 직장(直長) 휘 양(良)과 부장(部將) 휘 영(寧)과 참봉(叅奉) 휘 평(平)의 재사(齋舍)이다 이곳에 묘소를 들이고 사백년(四百年) 가까이 되어 지난 임자년(1972)에 주손(胄孫) 의도(宜度)씨가 여러 종인(宗人)들과 의논해서 처음으로 비(碑)와 상석(床石)을 하고 2년 전 갑인년(1974)에 또 이 집을 지으니 정당(正堂) 다섯 칸에 곡루(曲樓) 두 칸이다.
  집에 축을 쌓고 원장(垣墻)을 둘러쳤는데. 주간자(主幹者)는 의오(宜五) · 의중(宜重) · 만운(萬運) · 의추(宜錘) · 숙도(肅道) · 의욱(宜郁)씨였다. 낙성(落成)한 뒤에 의중(宜重)씨가 문중(門中)의 뜻에 따라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이 경주에 가서 살게 된 것은 부장(部將)공이 시초(始初)입니다. 처음에 부장공의 조부인 죽림(竹林)선생이 단묘(端廟) 손위(遜位) 때에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선생들과 동시에 순절(殉節)하고 자손들이 사변(徙邊)되었다가 금고(禁錮)가 풀린 뒤에 공(公)이 연일(延日)에서 안강(安康)으로 이사(移徙)해서 큰 고통을 참으시고 편한 마음으로 행동을 절제하시어 겨우 가문을 이루시어 두렵고 검소한 생애로 생을 마치시고 셋 손자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으나 끝까지 음덕을 누리지 못했고 왜란(倭亂) 때에 구사재(九思齋) ・ 오모재(五慕齋:諱 復興)께서 나라에 헌신하시어 가산이 없어져서 입향조(入鄕祖)에 대해서 땅 한 필 집 한 칸 없이 지낸 것을 선부로(先父老)께서 고심하고 한을 했는데 불초(不肖)한 우리들이 이제 와서 적은 돈을 모아 약한 힘을 합해서 몇 칸 집을 지었으니 어찌 감히 조상의 업적을 이었다고 하겠습니까? 겨우 뜻을 따랐을 뿐이지만 기록은 있어야 하니 수고해 주십시오” 하면서 헌장(憲章)씨가 쓴 글을 보여주기에 그것으로 연유(緣由)를 상고해보니 부족한 나 중업(中業)의 글 솜씨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공의 선조 문정공(文靖公)의 외손(外孫)이 되니 선조의 교의(交誼)로 말하면 끝까지 사양(辭讓)할 수 없어서 삼가 그 글을 읽으니 첫째 문호(門戶)가 쇠락한 것을 탄식했고 그 다음에 건립하기 어려웠다는 말과 마지막에 추모(追慕)의 성의(誠意)와 돈목(敦睦)의 도(道)를 힘쓰고 있으니 이게 바로 기문(記文)인데, 굳이 그 말을 다 버리고 내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 우리 외가(外家) 집은 안동에서 태사(太師)공이 식읍(食邑)을 받은 뒤로부터 이름난 공경(公卿)의 벼슬과 유학(儒學)의 대학자(大學者)가 대대(代代)로 이어져서 동방(東方)의 갑족(甲族)이지만 공의 집이 그 중에 유명했는데 공이 이 집에서 태어났으니 송고(松臯)와 죽림(竹林)이 조상이 되고 구사재(九思齋)와 오모재(五慕齋)가 자손이니 위로 조상을 계승해서 아래로 자손에 이어진 가통이 충의(忠義) 두 글자란 것을 참으로 알 수 있다. 그 훌륭한 재덕(才德)과 높은 지조(志操)는 참으로 보통사람들에 비해서 뛰어났으니 만약에 애통(哀慟)함을 풀지 못한 시련(試鍊)이 없이 출세(出世)했다면 공명(功名)과 사업(事業)이 가문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 알 수 있겠는가? 두렵고 요약(幺弱)한 마음으로 처신(處身)하면서 규범(規範)을 이룬 후에 가문과 국가를 염려했으니 그 전에 무반(武班)에서 불렀을 때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나셨다면 그 후에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의 몸가짐과 좋은 말씀과 특이한 행동은 당연히 후손에 전할 것이 많았겠지만 난리를 겪으면서 증거(證據)될 문헌(文獻)이 분실되었고 여러 대(代) 남긴 적선(積善)이 자손에게 반드시 복이 내려지겠지만 아직까지 보답이 될 만한 복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하늘이 화복(禍福)을 주는 데에 아직까지 복이 내려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이것이 지금 유감(有感)스런 일이다.
  아!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부모조상(父母祖上)이 있지만 성인시대(聖人時代)가 오래 되어 인륜(人倫)의 교육(敎育)이 사라져서 한 평생 편하게 사는 것이 부조(父祖)의 은택이 아닐까마는 조상을 모시는 일에는 자신을 돌봄 같이 하지 않아서 심한 자는 조상의 집을 없애고 묘소의 나무를 베어[頹堂敗斧] ?시경(詩經) 국풍(國風) 제12 진풍(第十二 陳風)? 「묘문(墓門)」에 “墓門有棘(묘문유극) 斧以斯之(부이사지):묘문에 대추나무를 도끼로 잘라낸다”는 구절이 있다. 묘문(墓門)은 흉벽(凶僻)한 땅이니, 가시덤불이 많이 자란다. 사(斯)는 쪼갬이다.
도 예사로 보고 뒤늦게 조상에 한 잔 술을 올리는 것도 습관이 되어 부끄럼을 모르는데, 지금 의도(宜度)씨 제공(諸公)은 그렇지 않아서 조상을 모시는 뜻을 더할 수 없이 하고 있으면서 밤낮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힘들게 주선(周旋)해서 이미 석물(石物)을 다하고 또 집을 지어서 골짜기가 산이 되고 바다가 뽕밭이 되어도 제사 올릴 곳을 준비한 것이니 한 편의 기문(記文)의 글이 후손에게 경계심을 주는 것은 이 집이 몇 칸 밖에 안 되는 집이지만 사치스런 큰 집보다 나을 것이니 이것이 지금 존경하는 바이다. 앞으로 흥패(興敗)의 운수와 화복(禍福)이 이어지는 것은 자손의 충효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고 또 침체(沈滯)의 기간이 길었으면 복 받을 미래도 긴 법이니 아마도 공의 가문이 침체의 기간이 충성을 하면서 시작되어서 지금 사백년이 되었으나 이렇게 자손의 효심이 있으니 나는 지금부터 복 받을 날이 온 것으로 알고 복을 받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공의 음덕이라고 할 것이다. 감개하고 공경한 바를 열거(列擧)해서 세상에 가문을 지키는 군자에 고(告)하고 도음재(禱蔭齋) 벽에 걸게 하니 이 글을 보는 자가 도음재 기문을 잘 썼다고 하겠는가?
  집을 짓고 6년 후 기미년(1979) 칠석일(七夕日) 진성 이중업(李中業) 이중업(李中業):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기암(起巖)이다. 아버지는 1910년 자정 순국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이다. 이중업은 1863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부친 이만도와 함께 예안 지역에서 조직된 선성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1919년 일제의 조선 국권 침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호소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이 주도한 파리장서의거에 처음부터 참가하여 주동 인물로 활약하였다.
은 삼가 記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禱蔭齋記(新)
    도음재 기문
齋以禱蔭은 在昔成中廟之世에 保功部將權公諱敏과 及其長孫直長諱良과 次孫天使部將諱寧과 次孫參奉諱平의 墳塋齋宿之所也라 四祖孫之玄宅이 在禱蔭山下達田里하니 入葬後近四百年壬子에 始竪顯刻하고 越二年甲寅에 刱建是齋하야 取其山名而署楣하야 揭起巖李公諱中業所著記文하니 盖於其時에 保功部將公之大人判官公과 其大人竹林先生之禍患餘烈에 因以失傳하야 深目莫徵에 省掃無憑이나 然이나 判官公이 實慶州肇基之祖也라 乃者賢仍爲先之誠이 出乎彛天하야 今年에 崇封祭壇에 燦備儀物하고 徵銘於余하니 余雖非其人이나 誼重百世에 事同一室로 僭妄納名이러니 事竟遂而告由後赫根君이 道余曰禱蔭齋由來部將先祖四祖孫齋宿之所也나 然이나 今則判官先祖를 同麓設壇하야 從玆年年祭需奉上于是齋하니 判官先祖가 旣元位也라 然則宜有敍由之文하야 願族祖는 俾惠一言實之否아 余斂膝而起曰君之言則是也오 君之誠亦大也나 然이나 余旣不文而且菊堂多山兩門門議一致然後에 以可矣之說로 辭之嗣後至再至三累累懇請하고 前月에 又與赫文世豪君으로 並造山莊하야 出示起巖公記文曰門議已定하야 以門議로 晉拜라하고 其愀然之貌가 油然乎出諸善述之誠하고 惻然之詞가 洽然乎令人感動之志矣라 辭不獲已하야 敬讀記文하니 詳悉無缺하고 精切懇惻하야 贊美極備하니 更雖有碩德文章이라고 難復架疊이온 况若憲祖之蔑識乎아 旣感賢仍殫誠追先之至意하고 重感起巖公大德雄文之旨訣하야 坦腹焉하고 僅會芻言하야 略敍判官公設壇之由而歸之하고 抑又有一說하니 曰判官公之事蹟이 遙遙無可考之地나 然이나 世有耈哲之相承하니 苟非積陰累德이면 烏能有是也면 及今賢仍之追遠至誠이 亦非家傳摑血之孝思不匱者歟에 余以是獻賀而遂爲之記
  壬午陽復節에 宗後孫 權憲祖는 謹記하노라

재(齋)의 이름을 도음(禱蔭)이라고 한 것은 옛 성종(成宗) 중종(中宗) 때에 보공부장(保功部將) 권공(權公) 휘(諱) 민(敏)과 그 장손(長孫) 직장(直長)인 휘 양(良)과 차손(次孫) 천사부장(天使部將)인 휘 영(寧)과 차손 참봉(參奉)인 휘 평(平)의 묘소에 재숙(齋宿)하던 곳이다. 네 분 조손(祖孫)의 묘소가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蔭山) 밑에 있으니 묘소를 들인 후 400년이 가까운 임자년(1972)에 처음으로 비(碑)를 세우고 2년이 지난 갑인년(1974)에 이 도음재(禱蔭齋)를 창건(刱建)하고 그 산 이름을 이용(利用)한 것이다. 기문(記文)은 기암(起巖) 이중업(李中業) 공이 지었다.
  아마 그 때에 보공부장(保功部將)공의 아버지인 판관(判官)공과 그 분의 아버지인 죽림(竹林)선생이 환란(患亂)을 겪으면서 실전(失傳)되고 묘소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판관(判官)공이 실로 경주에 터를 잡은 조상이고 그 후손들이 조상을 섬기는 타고난 정성이 있어서 금년에 제단을 크게 만들고 화려하게 상석과 의물(儀物)을 갖추고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하니 내가 비록 그 글을 쓸 사람이 못되지만 백세(百世)도 지친(至親)이란 정의(情誼)가 중(重)해서 내 집 일과 같이 생각하고 외람(猥濫)되게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고유(告由)한 뒤에 혁근(赫根)군이 내게 말하기를 “도음재(禱蔭齋)의 유래는 부장(部將) 선조 네 분 조손(祖孫)의 재사(齋舍)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판관(判官)선조를 같은 곳에 설단(設壇)하여 해마다 이 재(齋)에서 제수(祭需)를 준비하게 되었고 판관(判官)선조가 원위(元位)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서유문이 있어야 하니 족조(族祖)께서는 사실에 맞게 지어 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무릎을 여미고 말하기를 “군(君)의 말이 옳고 군(君)의 성심(誠心) 또 대단하지만, 그러나 나는 글 솜씨도 없고 또 국당(菊堂) · 다산(多山) 두 문중(門中)의 의논이 일치한 연후에 말하는 것이 옳다”고 사양했다.
  그 후에 재삼 누누이 간청했고 지난달에 또 혁문(赫文) · 세호(世豪)군과 같이 와서 기암(起巖)공이 지은 기문(記文)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문중 의논이 이미 정해져서 문중의 의논에 따라 왔다”고 하면서 걱정하는 모습으로 선대의 일을 해야 된다는 정성과 측은한 사연이 나의 뜻을 감동시키니 사양할 수 없고 그 기문을 읽어보니 빠짐없이 수록되었고 자세하고 간결하고 뜻이 담긴 글이어서 매우 칭찬했으니 비록 큰 학덕이 있는 문장이 다시 있다고 할지라도 더 할 말이 없는데 하물며 나 헌조(憲祖)같이 무식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손들이 조상을 위한 지극한 성의에 감동을 하고 높은 덕망과 아름다운 문장을 쓴 기암(起巖)공의 글이 의미가 넓음을 감탄하면서 겨우 옹졸한 말로 판관(判官)공 설단의 연유를 간단하게 기록해 주면서, 또 한마디 말을 더 하는 것은 판관공의 사적이 오래되어 고증(考證)할 수 없게 되었지만 하지만 대대로 훌륭한 자손이 이어지니 참으로 많은 적덕(積德)이 쌓이지 않았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지금에 훌륭한 자손들의 지극한 성념(誠念)은 비단 나라에만 목숨을 바친 충신의 자손일 뿐 아니라 효심도 지극한 가문이라서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의미에 하례(賀禮)하고 기문을 쓴 것이다.
  임오년(2002) 동짓달에 종후손 권헌조(權憲祖)는 삼가 기(記)하다. <국역:권기갑(權奇甲)>

 判官權公設壇告由文
    판관권공 설단 고유문
伏以恭惟府君(복이공유부군)  삼가 생각하옵건대 부군께서는
大庭禍患(대정화환)  조정(朝廷)의 화환(禍患)으로
禁錮百年(금고백년)  백 년 금고(禁錮)를 당하시고
流落東都(유락동도)  경주(慶州)로 옮겨 사시면서
性命苟全(성명구전)  목숨을 겨우 보전하시고
守貞處義(수정처의)  절개와 의리를 지키시며
焦燬丹田(초훼단전)  마음을 애태우셨으나
富貴榮華(부귀영화)  부귀와 영화 같은 것은
付一夢邊(부일몽변)  꿈도 꾸지 않으셨습니다
天台屹干(천태흘간)  크고 작은 화재(火災)가
累世相連(누세상련)  여러 세대에 연달아 있어나고
繼以兵燹(계이병선)  계속해서 전쟁이
尤甚侵纏(우심침전)  더욱 심하게 일어나
文獻盡佚(문헌진일)  문헌(文獻)을 모두 잃어
攷證無緣(고증무연)  고증(考證)할 근거가 없어지고다
于焉歲月(우언세월)  어느덧 세월이 흘러
已經半千(이경반천)  500년이나 지나가버려
深目莫徵(심목막징)  묘소를 찾을 길 없어
因以失傳(인이실전)  이로 인해 실전(失傳)하여
孱孫齎恨(잔손재한)  후손들이 한(恨)을 품었으나
無地訴焉(무지소언)  하소연할 데가 없어
累擬設壇(누의설단)  여러 번 설단(設壇)하려고 하였으나
誠殘力綿(성잔역면)  정성과 재력(財力)이 모자라
肯積微誠(긍적미성)  작은 정성도 모으지 못하고
年復年延(연부연연)  여러 해 지연되다가
今才封築(금재봉축)  이제야 겨우 북돋우고 쌓아
壇墠少宣(단선소선)  제단(祭壇)을 조금 이루었으나
記德莫詳(기덕막상)  덕행(德行)을 기록한 게 자세하지 않아
疎略無詮(소략무전)  소략(疏略)하고 온전하지 못하여
無依靈魄(무의영백)  혼백(魂魄)께서 의지할 데가 없지만
庶或是還(서혹시환)  바라옵건대 부디 돌아오시어
是安是寧(시안시녕)  이곳에서 편안하시며
可擬隧埏(가의수연)  묘소에 비길 만하여
爰卜吉日(원복길일)  이에 좋은 날을 택하니
黑馬菊天(흑마국천)  임오[2002]년 9월입니다
明朗天日(명랑천일)  날씨는 맑고 밝으며
藹菀風烟(애울풍연)  바람과 먼지도 잔잔하고
溪山呈彩(계산정채)  강산도 채색(彩色)을 띠며
瑞氣鶱鶱(서기건건)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오르니
孱孫駿奔(잔손준분)  이에 후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闔族周旋(합족주선)  모든 친족(親族)이 주선(周旋)하여
洋洋陟降(양양척강)  성대하게 오르내리시는듯하니
若奉僾然(약봉애연)  어렴풋이 받드는 듯하여
敢告厥由(감고궐유)  감히 그 사유(事由)를 알리오니
肹蠁歆旃(힐향흠전)  제수(祭羞)를 흠향(歆饗)하시오소서
  壬午晩春宗後孫權憲祖 謹撰
    임오[2002]년 3월 종후손 권헌조 삼가 지음

    判官權公祭壇常享祝文
    판관권공 제단 상향축문
深目莫徵(심목막징)  묘소를 찾을 길 없어
孱孫無方(잔손무방)  후손들이 어쩔 수 없이
封壇如墓(봉단여묘)  산소처럼 제단을 쌓아
以寓羹墻(이우갱장)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붙였습니다
霜露旣降(상로기강)  서리와 이슬이 벌써 내렸으니
倍增感愴(배증감창)  더욱 더 마음속 깊이 슬퍼서
瞻掃展省(첨소전성)  우러러 쓸고 살피오니
庶幾臨上(서기임상)  위에로 임(臨)하시오소서
  黑馬復月上旬宗後孫權憲祖 謹撰
    임오[2002]년 11월 상순에 종후손 권헌조 삼가 지음

 

    判官權公祭壇碑銘幷序
    판관권공 제단비명병서
判官權公은 卽竹林先生之令子也오 端宗大王之姨從也라 景泰丙子에 以竹林先生殉節事로 禁錮百年하야 全家徙邊에 仍世居月城하니 像想其賢父祖明敎之下에 宜有班班可考之蹟이나 以禍家餘生盡佚無傳하고 墓亦失傳하니 不啻賢仍之所齎恨이라 吾宗各派之所公公痛嘆者가 于今半千年矣라 日者에 賢仍齊會焉하야 使赫根君으로 造余曰 吾判官先祖는 東都入鄕祖라 世經數十에 尙無霜露省掃之禮하니 先父祖積世殫誠에 累擬設壇이나 因以世故杌隉而未果也러니 乃者에 孱仍이 敢效先志하야 菊堂主孫宅富와 多山主孫純寬이 與門父老로 合謀敦事하야 門議一致에 謀劃已定하니 俾惠一言銘之하라 余起而斂膝曰 大矣며 壯矣라 諸君之善述也歟여 雖然이나 顧余非其人으로 累累辭之하니 至再至三에 其請益勤일세 辭不獲已하야 謹按 公의 諱는 哲孫이요 姓은 權氏요 貫安東이요 文判官이니 字號生卒은 竝無傳하다 高麗太師諱幸이 爲鼻祖요 至十世에 諱至正은 佐尹이니 是爲派祖요 三傳諱粹는 文刑部尙書요 生諱奕하니 文祗候요 贈吏參에 追封永嘉君하고 生諱用一하니 文侍中이오 贈參贊諡僖敬이요 生諱希正하니 糾正이오 贈左相諡文靖이니 三世推榮이 三子文景公諱軫의 貴也라 六子諱軺는 文判事요 號松臯라 入本朝하야 累徵不起하고 守罔僕之義하니 於公에 曾祖오 祖諱는 寬이니 經歷이오 考諱는 山海니 世稱竹林先生이라 以宗簿寺僉正으로 時丁景泰丙子하야 與六臣으로 同時殉節하야 百年禁錮하다 正廟己酉에 復官하고 辛亥에 贈吏參旌閭하고 高廟甲申에 贈吏判諡忠愍하고 享雲谷魯峯兩院하다 妣曰永嘉權氏는 景惠公專之女오 配曰瑞山柳氏는 司直復圭之女라 有一男二女하니 男은 曰敏이니 保功部將이요 女는 適全瑞卿金仲仝하고 敏의 男은 舜卿이오 女는 適朴璟卿이오 卿男良은 直長이오 寧은 部長이오 平은 參奉이라 良은 无后하고 寧의 男은 復始니 僉正이라 壬亂에 與郭忘憂堂으로 赴火旺山城하야 多樹戰功하고 平의 男은 復興이니 壬亂倡義하야 赴多大浦하야 殉國하니 英廟丁巳에 旌閭하고 享忠烈祠하고 夫人瑞山柳氏는 親尋夫屍나 不得하야 九日絶食하여 自盡하다 正廟甲寅에 賜食物復戶하고 旌閭하다 餘는 不盡錄하다 於乎라 公은 以忠節之世에 淵源家學으로 承襲厥猷則公亦忠義之士也라 夫忠者는 三綱之首也라 世若有立言君子면 宜當闡明於幾百年之前而潛藏于今日者는 天道至公之理가 無或乎差謬而致此杞宋之嘆也耶아 古語에 云 日月雖明이나 不照覆盆之下라하니 繄公之蹟이 沉晦而無徵者는 譬如覆盆者矣라 若有奮發而斥覆盆者면 其照同一矣리니 顯晦之道가 必也有遲速之待時也라 復夫何恨乎哉아 憲祖는 以玄玄宗後生으로 聞見이 蔑焉하고 識且淺焉하야 恐犯溢美喪實之誅하야 不敢贊述이라 只書上系及子孫錄하야 遂爲之銘曰
曾祖之罔僕과 大庭之忠烈兮여 昭載國乘에 與日月之爭光이오 長玄孫之倡義樹功과 次玄孫之奮義殉國兮여 世忠義之愈章이라 繩繩析荷之風을 人不能盡知兮여 懿天鑑之必詳이라 頻經禍患之餘烈兮여 省掃無由之憑이라 賢仍이 善述追先之誠兮여 封壇如阜之興이라 於休精靈之有所憑依而是安是寧兮여 永萬世風光之增이라
    辛巳蜡月에 宗後孫 權憲祖는 謹撰이라

판관(判官) 권공(權公)은 바로 죽림(竹林)선생의 아드님이시고 단종(端宗)대왕의 이종(姨從)이시다. 세조(世祖) 2년 병자년(1456)에 죽림선생이 순절(殉節)하신 일로 인해서 백년금고(百年禁錮)가 되었고 전체 가정이 먼 곳으로 이사 가게 되어서 대대(代代)로 월성(月城)에 살게 되었으니 그 부조(父祖)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고 정직(正直)한 행적(行蹟)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想像)할 수 있으나 가문(家門)이 화(禍)를 당하고 문적(文籍)들이 다 없어졌고 묘소까지 실전이 되었으니 그 통한(痛恨)은 후손뿐만 아니라 우리 권문전체가 공통된 일이 아닌가?
  반천년이 지난 오늘날 그 훌륭한 후손들이 같이 모여 의논을 하고 혁근(赫根)군을 시켜서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판관선조는 경주로 입향하신 조상이신데 수십대(數十代)를 지났으나 아직까지 가을묘제를 지내는 예(禮)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선대(先代) 때부터 대대(代代)로 여러 번 정성을 다해서 설단(設壇)을 하려고 했으나 시운(時運)이 맞지 않아서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는데, 이번에 잔손(孱孫)들이 감히 선대(先代)의 뜻을 받들어 국당주손(菊堂主孫) 택부(宅富)와 다산주손(多山主孫) 순관(純寬)가 문중의 부로(父老)들과 의논을 하나로 정해서 일을 계획하고 있으니 명(銘)을 지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무릎을 여미고 앉아서 “제군들이 선대의 뜻을 받들어 경영(經營)하는 일은 매우 장한 일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나는 그 글을 쓸 사람이 못됩니다” 라고 몇 번을 사양했으나 재삼 간청하니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철손(哲孫), 성(姓) 권씨(權氏)니 본관(本官) 안동(安東)이고 문과(文科)로 판관(判官)을 역임(歷任)하셨으니 자(字)와 호(號)와 생졸년(生卒年)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태사(高麗太師) 휘(諱) 행(幸)이 시조(始祖)시다. 십세(十世)의 휘(諱) 지정(至正)이 좌윤(佐尹)이며 이 분이 파조(派祖)시다. 삼대(三代)를 내려와서 휘 수(粹)는 형부상서(刑部尙書)오 이 분의 아들 휘 혁(奕)이니 관직(官職)이 고려 지후(祗侯)인데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이 되시었다.
  이 분의 아들 휘 용일(用一)이 시중(侍中)이며 증직참찬(贈職參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다. 이 분의 아들의 휘는 희정(希正)이며 관직이 규정(糾正)이고 증직 좌상(左相)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니 삼대(三代)의 증직(贈職)은 셋째아들 문경공(文景公) 휘 진(軫)의 귀함이라. 여섯째아들 휘 초(軺)는 문과(文科)로 판사(判事)요 호 송고(松臯)인데, 조선조(朝鮮朝)가 되어서 여러 번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고려구신(高麗舊臣)의 절의(節義)를 지키시었다. 이 분이 공의 증조(曾祖)시다.
  조(祖)의 휘는 관(寬)이니 관직(官職)이 경력(經歷)이며 고(考)의 휘는 산해(山海)니 세칭(世稱) 죽림(竹林)선생이시다. 벼슬은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이고 그 때 경태병자(1456세종2년)에 단종손위(端宗遜位) 사건(事件)을 만나서 사육신(死六臣)과 같이 순절(殉節)하시고 백년금고(百年禁錮)를 당하고 정조(正祖) 기유년(1789)에 복관(復官)되시고 신해년(1791)에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고종(高宗) 갑신년(1884)에 증직(贈職)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충민(忠愍)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운곡(雲谷) · 노봉(魯峯) 두 서원에 봉향(奉享)되시었다.
  비(妣) 영가권씨(永嘉權氏)는 경혜공(景惠公) 전(專)의 따님이시고 배(配) 서산유씨(瑞山柳氏)는 사직(司直) 복규(復圭)의 따님이시다.
  1남 2녀를 두시었는데, 아들은 민(敏)이니 보공부장(保功部將)이요, 사위는 전서경(全瑞卿)과 김중동(金㑖仝)이다. 민(敏)의 아들은 순경(舜卿)이요, 사위는 박영경(朴璟卿)이다. 순경(舜卿)의 아들 양(良)은 직장(直長)이요, 영(寧)은 부장(部將), 평(平)은 참봉(參奉)이다. 양(良)은 아들이 없고, 영(寧)의 아들은 복시(復始)니 첨정(僉正)이다. 임난(壬亂)에 곽망우당과 같이 화왕산성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평(平)의 아들은 복흥(復興)이다. 임난(壬亂)에 창의(倡義)해서 다대포(多大浦)에서 순국(殉國)해서 영조(英祖) 정사년(1737)에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충열사(忠烈祠)에 모셔져있고, 부인(夫人) 서산유씨(瑞山柳氏)는 직접 부군의 시신(屍身)을 찾으려고 노력(努力)했으나 끝까지 찾지 못해서 9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자결(自決)하시었고, 정조 갑인년(1794)에 식물(食物)을 내리고 세금과 부역이 면제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이 충절(忠節)을 대대로 지키고 학문의 연원이 있어서 그 가통을 이어받았으니 공도 역시 충의를 지키신 분이다. 원래 충(忠)이란 삼강(三綱)의 으뜸이니 세상에 만약 훌륭한 군자가 있었다면 백 년 전에 당연히 밝혀질 일이지만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니 지공무사(至公無私)한 하늘의 이치도 혹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고증(考證)이 되지 않아 탄식하는 일도 있다. 옛말에 “일월이 밝지만 엎어놓은 동이의 밑은 비치지 못한다” 라고 했으니 공에 대한 업적을 밝힐 수 없는 것은 비유한다면 동이 밑과 같으나 만약에 분발해서 동이를 물리면 햇빛을 받을 수 있으니 충절(忠節)이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은 것이 조만(早晩)이 있기는 하지만 때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한을 하겠는가? 나는 세월이 오래된 후에 태어나서 듣고 보지 못했고 또 식견이 적어서 훌륭한 업적을 잘못되게 기술(記述)할까 두려워서 단지 선계조상(先系祖上)과 후손을 기록할 뿐이다. 이어서 명(銘)을 쓴다.

曾祖之罔僕(증조지망복)
할아버지의 불사이군 절의와

大庭之忠烈兮(대정지충렬혜)
아버지는 충렬(忠烈)을 지키신 것이

昭載國乘(소재국승)
국사(國史)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

與日月之爭光(여일월지쟁광)
일월과 빛남을 다투네

長玄孫之倡義樹功(장현손지창의수공)
장손(長孫)의 현손(玄孫)은 창의(倡義)로 공을 세우시고

次玄孫之奮義殉國兮(차현손지분의순국혜)
차손(次孫)의 현손(玄孫)은 정의(正義)로 분발하시어 순국하셨으니

世忠義之愈章(세충의지유장)
충의(忠義)가 세상에 더욱 빛이 난다.

繩繩析荷之風(승승석하지풍)
대대로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이어온 가풍을

人不能盡知兮(인불능진지혜)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겠는가?

懿天鑑之必詳(의천감지필상)
하늘은 반드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頻經禍患之餘烈兮(빈경화환지여열혜)
여러 차례 난리와 가화(家禍)를 겪으면서

省掃無由之憑(성소무유지빙)
묘소를 잃게 되어

賢仍善述追先之誠兮(현잉선술추선지성혜)
장한 후손들이 선대(先代)를 계승하려는 정성으로

封壇如阜之興(봉단여부지흥)
큰 단(壇)을 만들어

於休精靈之有所憑依而是安是寧兮
(오휴정령지유소빙의이시안시녕혜)
편안하게 공의 영(靈)이 여기에 의지해서 계시게 되시었으니

永萬世風光之增(영만세풍광지증)
영원히 만세에 풍광(風光)이 더해질 것이다.

  신사년(2001) 섣달 종후손(宗後孫) 권헌조(權憲祖) 삼가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제단(祭壇)은 영일읍 상달전리(上達田里) 산82번지 달밭에 있다


二十一世 보공부장(保功部將) 諱 민(敏)
보공장군(保功將軍)으로 부장(部將)이다. 배위 영가권씨(永嘉權氏)로 묘소는 경북 포항시 흥해읍 상달전(上達田)에 묘향(卯向) 합폄이고 후손 헌장(憲章)이 지(識)를 지었다. 아들은 순경(舜卿)이다.


    保功部將安東權公墓碣銘
    보공부장 안동권공 묘갈명
府君諱는 敏이오 姓은 權氏오 貫安東이니 麗太祖亞父功臣太師諱幸이 爲始祖요 中世에 有諱希正하니 文監察이오 本朝에 贈左議政諡文靖이니 有七男俱爲顯官에 第三子諱軫이 世宗朝에 左相諱文景이오 第六諱軺는 麗文判事오 入本朝에 除北伯及大司成이오 皆不赴하고 與伯兄版圖公諱轂과 妹兄栢竹堂裵尙志로 歎曰 神器旣移하니 我輩當遯이라하고 遂屛居于龍宮濂松山下하야 更名其山曰念松이라하고 自號曰松臯라하고 以寓自靖之義也니 於府君에 爲高祖也라 曾祖諱는 寬이니 義禁府經歷이오 祖諱는 山海오 號는 竹林이니 與成三問朴彭年으로 爲道義交하야 文廟庚申에 以才行으로 除昌德宮錄事及主簿해도 不就하고 曰 內有椒闈之親而冒進干祿이 非吾志也라하니 盖夫人權氏가 於顯德王后에 兄也라 端廟甲戌에 始就僉正之職하야 曰 吾以未報於先王者는 以效沖主也라하다 及丙子禍作에 與六臣으로 同時殉節하야 子孫이 徙邊禁錮하다 至正廟朝에 十二世孫諱宗洛이 鳴寃하야 特命復官하고 贈吏判하고 旌其閭하니 事載龍宮邑誌及莊陵誌하다 考諱는 哲孫이니 判官이오 妣는 瑞山柳氏中領副司直復圭之女也오 配는 端人權氏니 墓는 同塋이라 有一男하니 諱는 舜卿이라 生三男하니 諱良은 直長이요 諱寧은 天使部將이오 諱平은 敬陵叅奉이라 部將이 有一男하니 諱는 復始오 號는 九思齋오 奉直郞守司宰監僉正이라 壬亂倡義하야 與忘憂堂郭再祐로 守火旺城하야 在同苦錄하고 事見東京誌하다 叅奉은 有一男하니 諱는 復興이오 號는 五慕齋니 壬亂首倡義하야 殉節于東萊多大浦하니 朝家에 特命旌閭하고 鄕人이 立祠尸祝하다 以下는 不能盡錄하다 於乎라 府君이 上承松臯竹林賢祖之懿行卓烈하고 下啓九思五慕肖孫之孤忠危節則忠孝二字가 豈非府君述先裕後之旨訣乎아 府君平日言行이 著於文字者想必多可傳諸後者而兵燹之餘에 子孫이 零替하야 文獻이 蕩佚에 漠然無傳而以至生卒年月筮仕顚末을 亦不得考하야 爲子孫之痛恨이 曷有其已에 墓는 在興海郡禱蔭山上達田酉坐原하니 墓道闕顯刻이 自是先父兄經營未遑之事也라 不肖輩年已六旬에 切恐一朝溘然則又負先父兄經營之意也라 故로 今春에 與族兄憲章曁諸族으로 斷議竪碣而略叙世代及官閥하니 使三尺貞珉永世不□□ 而後裔之省掃墳塋者肅瞻起敬하야 知忠孝二字에 爲世守之規也니 於乎可不敬哉라
  壬子十月에 十三世孫宜度는 謹識하노라
  石字沒故로 己亥十月에 改書改竪라

부군(府君)의 휘는 민(敏)이오, 성은 권씨(權氏)요,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니,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의 아보공신(亞父功臣) 태사(太師) 휘 행(幸)이 시조(始祖)시며, 중세(中世)에 휘 희정(希正)이 문과(文科) 감찰(監察)이시며, 본조(本朝)에서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과 문정(文靖)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시었다. 아들 칠형제(七兄弟)가 모두 크게 출세했으며, 그 중 셋째아드님 휘 진(軫)이 세종조(世宗朝)에 좌상(左相)이었으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오, 여섯째아드님 휘 초(軺)는 고려조(高麗朝)에 문과판사(文科判事)오, 조선조(朝鮮朝)에서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除授)했으나 모두 거절하시고, 그 백형(伯兄) 판도공(版圖公) 휘 곡(轂)과 매형(妹兄)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와 함께 탄식(歎息)하고 말하기를 “왕조(王朝)가 이미 바뀌었으니 우리들은 당연히 은둔(隱遁)해야 한다”고 하고 용궁(龍宮)의 염송산(濂松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그 산을 ‘염송(念松)’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호를 ‘송고(松臯)’라고 해서 절의(節義)를 지키는 뜻을 나타냈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관(寬)이니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이오, 조(祖)의 휘는 산해(山海)오, 호는 죽림(竹林)이니, 이 분이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과 도의(道義)를 중시(重視)하는 친구였다. 세종(世宗) 22년 경신년(1440)에 재능(才能)과 품행(品行)으로 창덕궁(昌德宮) 녹사(錄事)와 주부(主簿)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왕비(王妃)의 인척(姻戚)으로서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아마도 부인권씨(夫人權氏)가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언니였기 때문이다.
  단종(端宗) 2년 갑술년(1454)에 처음으로 첨정(僉正) 벼슬에 나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왕(先王) 문종(文宗))의 은혜(恩惠)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어린 임금님 단종(端宗)에게 보답할 것이다”이라고 했는데, 병자년(1456)에 단종이 손위(遜位)하는 화(禍)가 생겨서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시기에 순절(殉節)하시고 자손(子孫)이 변방(邊方)으로 이사(移徙)가게 되고 과거시험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조대왕(正朝大王) 때에 12세손(世孫) 휘 종락(宗洛)이 왕에게 애통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려서 왕의 특명(特命)으로 복관(復官)되시고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정려(旌閭)가 내려진 사적(事蹟)이 ?용궁읍지(龍宮邑誌)?와 ?장릉지(莊陵誌)?에 실려 있다.
  고(考)의 휘는 철손(哲孫)이니 판관(判官)이오, 비(妣)는 서산류씨(瑞山柳氏)며 중령부사직(中領副司直) 복규(復圭)의 따님이시다. 배위(配位)는 단인(端人) 권씨(權氏)니 묘소는 동분(同墳)이다. 독자(獨子)를 기르시어 휘는 순경(舜卿)이다. 이 분이 아들 삼형제(三兄弟)를 기르시어 휘 양(良)은 직장(直長)이요, 휘 영(寧)은 천사부장(天使部將)이오, 휘 평(平)은 경릉참봉(敬陵叅奉)이다.
  천사부장(天使部將)이 아들이 한 분인데, 휘는 복시(復始)오, 호는 구사재(九思齋)오, 봉직랑(奉直郞) 수(守)와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을 역임하시었다. 임란(壬亂)에 창의(倡義)하시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화왕성(火旺城)을 지키신 「동고록(同苦錄)」이 있고 ?동경지(東京誌)?에도 기록되어있다.
  참봉(叅奉)은 외동아들이니 휘는 복흥(復興)이오, 호는 오모재(五慕齋)니, 임란 때에 가장 먼저 창의하시어 동래(東萊) 다대포(多大浦)에서 순절(殉節)하시니, 나라에서 특명(特命)으로 정려(旌閭)가 내리고, 그 지역민이 정성을 모아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府君이 위로는 송고(松臯) ・ 죽림(竹林) 두 분 훌륭한 조상의 장열(壯熱)한 행동을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구사재(九思齋) ・ 오모재(五慕齋) 같은 착한 손자들이 뛰어난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를 지키시니 충효(忠孝) 두 글자는 부군(府君)께서 선조를 계승해서 후손에 전한 뜻이 아니겠는가?
  부군(府君)의 평일에 하신 말씀과 행동이 글로 남겨서 후세에 전한 것이 많았을 것인데 난을 겪고 자손이 한미(寒微)해서 문헌(文獻)이 유실(遺失)되어 남은 것이 없어서 생졸년(生卒年)과 벼슬한 내용까지 상고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들의 원통한 한이 끝이 있겠는가? 묘소는 흥해(興海) 도음산(禱蔭山) 달전(達田) 유좌(酉坐)터이다. 비석이 없어서 선부형(先父兄)께서 경영(經營)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라 불초(不肖)들이 나이 이미 60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면 선부형(先父兄)이 경영하던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서 금년 봄에 헌장(憲章) 족형을 비롯해서 여러 족인(族人)이 비(碑)를 세울 결정을 하고 세대와 관작과 문벌을 간단하게 서술해서 작은 돌을 세워 영원토록 후손들이 묘사(墓祀)를 올리면서 엄숙(嚴肅)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충효(忠孝) 두 글자는 대대(代代)로 지켜온 규범(規範)이니, 아!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자년(1972) 10월에 13세손 의도(宜度)는 삼가 씀. <국역:권기갑(權奇甲)>
  옛 비석에 글자가 깎여 없어졌기 때문에 기해년(1959) 10월에 다시 세운다. 묘소는 포항시 영일읍 달전리(達田里) 산82번지에 있다

 

二十二世 諱 순경(舜卿)
배위 오천정씨(烏川鄭氏)는 문림(文林)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旺新里) 운곡(雲谷)의 탑등(塔嶝)에 간좌(艮坐) 합폄(合窆)이며 묘갈(墓碣)이 있다.

    處士安東權公諱舜卿墓碣銘
    처사 안동권공 휘 순경 묘갈명
公의 諱는 舜卿이오 姓은 權氏오 貫安東이니 高麗太師諱幸이 爲鼻祖요 中世에 有諱至正하니 官佐尹이고 爲派祖요 有諱奕은 永嘉君이오 生諱用一하니 贈左參贊僖敬公이오 生諱希正하니 監察이오 贈左議政文靖公이오 生諱軺하니 文科判事니 左相文景公諱軫之弟而隱居于龍宮濂松山下하야 改其山曰念松이라하고 因自署松臯하야 以寓罔僕自靖之義하야 除北伯及大司成에 皆不就하니 於公에 爲五代祖也라 高祖諱는 寬이니 義經歷이오 曾祖諱는 山海니 號竹林이라 以文廟姻親으로 遭端廟遜越之變하야 與成朴死六臣諸先生으로 同時殉節하니 其子若孫이 禁錮徙謫이라 至正廟朝에 十三世孫宗洛이 鳴寃號龥하야 伸雪復官하고 累贈至大冢宰하야 優蒙旌褒하고 享慶州雲谷追遠祠及襄陽魯峯院하고 祖諱는 哲孫이니 判官이오 考諱는 敏이니 保功部將이오 妣는 權氏니 墓는 興海達田이오 配는 烏川鄭氏文林女니 墓는 江東面雲谷塔嶝坤向에 合窆이라 生三子하니 良은 直長이오 寧은 部將이오 平은 叅奉이오 寧의 子復始는 僉正이오 號九思齋오 平의 子復興은 號五慕齋오 復始의 子必昌이로 鎣은 號兄江이오 鑰은 內禁衛오 鑑이오 復興의 子䥍는 折衝將軍이라 餘는 不錄하다 嗚乎라 前而有冠冕之蟬赫하고 繼以有忠孝之節行하니 公이 生丁此時하야 宜有以顯輝當世하야 垂裕後承而上而端廟未卽復位하고 下而節義諸賢이 莫有洗寃하니 其於遭難諸家에 縷命苟保하여 其於公之生卒表德履歷行治에 疇能傳後而徵言乎哉아 又況世代貿遠하고 荐經兵燹하야 如于文獻盡輸하니 烏有以故로 迄于今數十世之遠五百年之久에 墓道에 尙闕顯刻이러니 迺者에 賢裔等이 命余以職之하니 顧此渺末後生이 固不敢臆揣容喙나 以參在同根에 誼豈尋常가 窃惟陽復有理하고 碩果不食하나 公際覆盆하야 未伸齎志沒世나 然이나 公之雲仍이 布濩一鄕에 文學行誼가 蔚然爲東都望族則觀於此 而可驗天道報施之理를 不誣而足以爲爲善者之觀也라
  壬子七月日에 族後孫五寅은 謹撰하노라. 十四世孫赫澤은 謹書라

공(公)의 휘는 순경(舜卿)이오, 성(姓)은 권씨(權氏)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니, 고려태사(高麗太師) 휘 행(幸)이 시조(始祖)이시다. 중세(中世)에 휘 지정(至正)이 관직(官職)이 좌윤(佐尹)이고 파조(派祖)이시다. 휘 혁(奕)은 영가군(永嘉君)이며, 이 분의 아들 휘 용일(用一)이 증직(贈職) 좌참찬(左參贊)이며 시호(諡號)가 희경(僖敬)이시다.
  이 분의 아들이 희정(希正)이니 벼슬이 감찰(監察)이오,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다. 이 분의 아들 휘 초(軺)가 문과판사(文科判事)니 좌의정(左議政)인데 문경공(文景公) 휘 진(軫)의 아우이며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아래에 은거(隱居)하시면서 그 산을 염송산(念松山)이라 하고 잇따라 자호(自號)를 송고(松臯)라 하고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와 대사성(大司成)을 내렸으나 모두 나가지 않으셨는데, 이 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휘는 관(寬)이니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을 지내시었고, 증조(曾祖) 휘는 산해(山海)니 호가 죽림(竹林)이신데, 문종대왕(文宗大王)의 인척(姻戚)으로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영월(寧越)로 손위(遜位)하는 변(變)을 당해서 사육신(死六臣)과 동시에 순절하시니 자손이 금고(禁錮)되고 사변(徙邊)되었다가 정조대왕(正祖大王)때에 13세손 종락(宗洛)이 왕에게 원통(寃痛)함을 호소(呼訴)해서 한(恨)을 풀고 복관(復官)되시었다가 여러 번 증직(贈職)이 더 내려져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시고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경주(慶州) 운곡서원(雲谷書院)과 예천(醴泉) 노봉서원(魯峯書院)에 모시었다.
  조(祖) 휘는 철손(哲孫)이니 판관(判官)이오, 고(考) 휘는 민(敏)이니 보공부장(保功部將)이오, 비(妣)는 권씨(權氏)니 묘소는 흥해(興海) 달전(達田)에 있고, 배위(配位)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림(文林)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강동면(江東面) 운곡(雲谷) 탑등(塔磴) 곤향(坤向)에 합폄(合窆)으로 되어있다.
  아들 삼형제를 두시었는데, 양(良)은 직장(直長)이오, 영(寧)은 부장(部將)이오, 평(平)은 참봉(叅奉)이다. 영(寧)의 아들 복시(復始)는 벼슬이 첨정(僉正)이며 호는 구사재(九思齋)오, 평(平)의 아들 복흥(復興)은 호(號)는 오모재(五慕齋)이다. 복시(復始)의 아들 사형제에 맏이는 필창(必昌)이고 다음 형(鎣)은 호 형강(兄江)이고, 다음 약(鑰)은 벼슬이 내금위(內禁衛)오, 다음은 감(鑑)이다. 복흥(復興)의 아들 지(䥍)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선대(先代)에 높은 관직(官職)이 이어지고 충효(忠孝)와 절의(節義)가 이어지는 시기에, 공이 출생하시었으니 당연히 화려한 직책으로 후인에 업적을 남기고 위로는 단종(端宗)을 복위하고 밑으로는 절의(節義)를 지킨 제현(諸賢)의 원한(怨恨)을 풀어주어야 되지만 어려움을 만난 가문(家門)에서 겨우 목숨만 보전하게 되었으니 공의 생졸년(生卒年)과 자(字)와 행적(行績)마저 고징(考徵)할 수 없게 되었고 또 대수(代數)가 오래되고 거듭된 병화(兵火)로 문헌(文獻)이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 수십세(數十世)가 흘렀고 오백년(五百年)의 세월이 지났으며 아직까지 묘소에 비(碑)도 없어서 이번에 훌륭한 후손들이 나에게 비문을 쓰는 책임을 주니 나 오인(五寅)같이 부족한 후생(後生)이 원래 감히 글을 쓸 수 없는 일이지만 같은 성(姓)으로서 범연(泛然)한 정의(情誼)가 아니고 또 조용히 생각하니 어려움을 넘기면 좋은 날이 오는 것은 이치이고 큰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 없어서 공이 정의(正義)가 없어진 시대에 한(恨)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하지만 공의 후손이 온 향내(鄕內)에 퍼져있고 문학(文學)과 품행(品行)이 있어서 경주(慶州)에서 명망(名望)있는 문중(門中)이 되었으니 이것을 보면 하늘이 착한 자에 복을 준다는 이치를 거짓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선(善)을 행한 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임자년(1972) 7월 일에 족후손 오인(五寅)은 삼가 짓고, 14세손 혁택(赫澤)은 삼가 쓰다.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旺信里) 산126-1번지(운곡 탑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