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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에서 순국한, 의병장 권복흥

죽재권혁무 2016. 10. 8. 08:38
 
[공유] 다대포에서 순국한, 의병장 권복흥 나의 관심정보

2016.10.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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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혁무(khm2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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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연이네 집 | 청도인
원문 http://blog.naver.com/kjyoun24/60019049361
 

 

응봉 봉수대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두송산에 있는 조선 시대의 응봉 봉수대 앞면이다. 1976년 벽돌 모양의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아 봉수대를 만들고 중앙에는 연조가 복원되었으며, 2010년 봉수대 모형을 석축 위에 설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응봉 봉수대 [鷹峯烽燧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의병장 권복흥(權復興)

 

 

    오모재실기(五慕齋實紀) 권복흥(權復興)     (1555, 명종 10-1592, 선조 25)

 

                <다대포 응봉 봉수대>

 

   자(字) 중원(仲元), 호(號) 오모재(五慕齋), 본(本) 안동(安東), 부(父) 평(平), 거(居) 경주(慶州)    전(傳); 목만중(睦萬中) 찬(撰). 공(公)은  1592년 왜구의 침범으로 열읍(列邑)에 와해(瓦解)되거늘 경주(慶州) 인사(人士)들이 의(義)로 단결(團結)하여 일로(一路)를 차단코자 할 때 공(公)이 동사(同事)하기를 자강(自講)하였으나 모두들 이를 받아 주지 않으므로 스스로 가재(家財)를 털어 몇몇 가동(家동)을 거느리고 앞에 나서 부산(釜山)으로 직행(直行)하였다.

 

   다대포(多大浦)에서 적(賊)을 만나 돌진(突陳) 분격(奮擊)하다가 죽었으며 부인(夫人)이 시체(屍體)를 찾으려 갔으나 찾지 못하고 의관(衣冠)으로 초혼(招魂)하여 돌아 왔다. 140년이 지난 1728년(영조 4)에 증손(曾孫) 이질(以질)이 관(官)에 소원장(訴寃狀)을 올리어 순찰사(巡察使) 박문수(朴文秀)의 치계(馳啓)로 인(因)하여 정려(旌閭)의 영(令)이 내렸다.

 

   <영남문집(嶺南文集) 2권1책>

 

 

   권복흥(權復興)

 

   1555∼1592(선조 25).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본관은 안동. 자는 중원(仲元). 경주에서 거주하였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 가동(家동)을 인솔하고 토적(討賊)을 부르짖으며 의병항쟁에 앞장섰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족질(足疾)을 염려하여 기병을 만류하였으나, “나의 발은 비록 병들었으나 마음은 병들지 않았다. 이제 국왕이 몽진(蒙塵)하였거늘 발에 병이 있다 하여 어찌 죽어서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겠는가?” 하고서 분연히 일어섰다.

 

   그뒤 각지를 전전하면서 왜군과 투쟁하다 진중에서 죽었다. 후일 경기감사의 주청에 의해 포상받았고, 집에 정문이 내려진 것을 계기로 향중인사들이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다.

 

    <嶺南人物考.(張東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