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경주단계서당

단계서당자료 국역

죽재권혁무 2019. 1. 25. 15:01

  안동권씨 좌윤공파 단계서당

 순서
一. 16世 文靖公 墓碣銘(안동 연원재사)
一. 20世 判官安東權公祭壇碑銘(도음재: 달밭)
一. 20世 禱蔭齋記(後記)(도음재: 달밭)
一. 24世 五慕齋重建記(도음재: 달밭)
一. 24世 丹溪書堂記(단계서당: 다산)
一. 24世 有明朝鮮故忠臣學生安東權公遺墟碑銘幷序(단계서당: 다산)
一. 24世 忠烈旌閭記幷銘(단계서당: 다산)
一. 24世 丹溪書堂忠烈祠常享祝文(단계서당: 다산)
一. 24世 達林齋記(달립재: 행장골)
一. 24世 忠臣義士五慕齋權公墓碑銘(달립재: 행장골)
一. 25世 折衝將軍 墓竭銘(달립재: 행장골)

  己亥2019年 1月  日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혁무가 칠근에게 보낸내용)


16世 文靖公 墓碣銘(諱 希正)
前面大字: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諡文靖權先生之墓
      貞夫人彦陽金氏墓附
碑文:
花之權盖出於太師氏而積德根基爲當時之最赫世簪纓實玆州之冠加之以先生子若孫黼黻弘猷則冝其文獻之表表可稱而惜乎年代浸遠累經兵燹功名事業生卒年月有不可強攷而只以年代之詳畧特爲序次豈非記事者恨於後日也謹按先生諱希正姓權氏籍安東其鼻祖高麗太師諱幸十世諱至正佐尹四傳至諱粹文科即先生之曾祖也祖諱奕文科 贈吏參封永嘉君考諱用一門下侍中  贈左參贊  謚僖敬先生  贈官至左議政  謚文靖三世追恩以先生之第三子軫之貴也貞敬夫人彥陽金氏府使可器之女有七男三女男轂版圖正郎輿道文監司軫文科左議政世子師傳號敬齋 謚文景輊縣監以孝行 旌閭軒縣監軺高麗文判事入本朝拜大司成除北伯皆不赴號松皐輜縣令以耆職陞通政女裵尚志司僕寺事 贈兵判李云侯副正金革奉禮郎轂三男處中郎將處庸牧使處和司直軫四男孟慶兵使孟度郡守孟貞少尹 贈戶參七臨文兵正輊四男若中司直若經若衡若枰進十軺一男寬經歷輜三男致和司直致順主簿致孫司直以下分派之散在各處非不繁衍而歲久年深詳畧不同有不可枚錄而盖先生之道德文章載在國史家乘而世級漸下遺蹟蕩失無由措其萬一雖若可恨而先生衣履改厝之日松巖權先生好文祭之以文曰惟公應鼻祖之後鳴 世廟之廷可補周袞可調殷羹臨民施澤春雨時榮匡君糾愆秋霜夜橫位足台鼎手合均衡赫世功勲照時儀形一片荒碑萬古姓名觀於此畧可以仰想先生之遺風而他無可攷則後生何述藐余顓蒙忝在外裔之末適守玆州佳覩百歲未遑之盛事不覺歛袵而起敬焉銘曰
殷羹周袞之事業春雨秋霜之氣像一片苔碑之指點萬古姓名之瞻仰
    己卯 月 日
    嘉善大夫行安東都護府並安東鎭兵馬水軍僉節制使 眞城 李啓魯謹撰

文靖公墓碣銘(諱 希正)
前面大字: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諡文靖權先生之墓
            配貞敬夫人彦陽金氏墓祔
碑文:
花之權은盖出於太師氏라而積德根基는爲當時之最요赫世簪纓은實玆州之冠이라加之以先生의子若孫이黼黻弘猷하니則宜其文獻之表表可稱이라而惜乎라年代浸源하고累經兵燹하며功名事業과生卒月日이有不可强攷라而只以年代之詳略으로特爲序次하니豈非記事者의恨於後日也리요謹按先生의諱希正이고姓權氏요籍安東이라其鼻祖는高麗太師諱幸이라十世에諱至正은左尹이요三傳至에諱粹는文科卽先生之曾祖也라祖諱는奕이요文科로  贈吏參封永嘉君이고考諱는用一이요門下侍中이고  贈左參贊  諡僖敬이다先生은  贈官이至左議政이요  諡文靖이니三世追恩은以先生之弟三子軫之貴也라貞敬夫人은彦陽金氏니府使可器之女라有七男三女하니男穀은版圖正郞이요輿道는文監事요軫은文科로左議政世子師傅요號敬齋요  諡文景이라輊는縣監이요以孝行  旌閭하다軒은縣監이요軺는文判事니入本朝하야拜大司成徐北伯하되皆不赴라號松皐이다輜는縣令이니以老職으로降通政하다女裵尙志는司僕寺事요  贈兵判이다李云侯는副正이요金革은文監司요轂은三男이니處中은郞將이요處庸은牧使요處和는司直이요軫은四男이니孟慶은兵使요孟度는郡守요孟貞은少尹요  贈戶參이라七臨은文兵正이라輊는四男이니若中은司直이요若經若衡若枰은進士이다軺는一男이니寬은經歷이라輜는三男이니致和는司直이요致順은主簿요致孫은司直이라以下는分派之散在各處하야非不繁衍이라而歲久年深하니詳略不同하야有不可枚錄이라而盖先生之道德文章이載在國史家乘이라而世級漸下하니遺蹟蕩失하여無由措其萬一이라雖若可恨이로데而先生衣履改厝之日에松巖權先生好文祭之以文하되曰惟公은應鼻祖之後하고鳴世  廟之廷이라可補周袞요可調殷羹이라臨民施澤에春雨時榮하고匡君糾愆에秋霜夜撗이라位足台鼎이요手合均衡이라赫世公勳이照時儀形이라一片荒碑로萬古姓名이라하니觀於此略에可以仰想先生之遺風이라而他無可攷則後生何述이리요藐余顓蒙으로忝在外裔之末하고適守玆州하야佳覩百歲未遑之盛事하니不覺歛袵而起敬焉이라銘曰
殷羹周袞之事業이요春雨秋想之氣像이라一片苔碑之指點이요萬古姓名之瞻仰이라.
 己卯 月 日
 嘉善大夫行安東都護府幷安東鎭兵事水軍僉節制使眞城李啓魯謹識
 十七世孫永昊謹書

문정공 묘 갈 명(휘 희정)
前面大字: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행 감찰 시호 문정 권 선생의 묘
 배는 정경부인 언양김씨 묘 부
碑文:
화산(안동)의 권씨는 모두 태사씨의 후손이라 덕을 쌓고 뿌리를 잡은 터는 가장 번창하고 대대로 현저한 고관은 이 고을의 으뜸이라 선생의 아들과 손자가 모두 높은 관직과 큰 선비라 마땅히 선생의 문헌이 표표히 칭송함이 있어야 하는데 애석하도다. 연대가 침원하고 여러 번 병선(난리)을 지내고 나니 공명 사업과 생졸월일이 가히 아무리 힘을 써도 고증하지 못함이 있도다. 다만 연대의 상략으로 특별히 서차를 하니 어찌 기사 하는 사람으로서 후일을 한 하지 아니 하리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희정이요 성은 권씨요 본적은 안동이라, 그 비조는 고려태사 휘 행이라, 십 세에 휘 지정은 좌윤이요, 삼세를 전해서 휘 수는 문과에 급제하니 곧 선생의 증조라, 조의 휘는 혁이요 문과로 증 이조참판이요 영가군에 봉하다. 고의 휘는 용일이요 벼슬은 문하시중이고 증직은 좌참찬이요 시호는 희경공이라, 선생의 증직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공이라, 삼세 추증하여 나라에 은혜를 입은 것은 선생의 셋째아들 진의 귀함이라. 정경부인은 언양김씨이고 부사 가기의 따님이시다. 일곱 아들과 셋 딸이 있는데 맏아들 곡은 판도 정랑이요, 둘째 아들 여도는 문과 급제하여 감사요, 셋째 아들 진은 문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세자 사부고 호는 경재요 시호는 문경공이라, 넷째아들 지는 현감이요 효행으로 정려하다, 여섯째아들 초는 문과로 판사라 본조에 들어 와서 대사성과 북백을 재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호는 송고이고, 일곱째아들 치는 현령이니 노직으로 통정대부에 재수하다. 맏딸은 배상지에께 시집갔는데 벼슬은 사복시사요, 둘째 딸은 이운후에께 시집갔는데 부정이요, 셋째 딸은 김혁에께 시집갔는데 문과로 감사이다. 곡은 아들이 셋 있는데 처중은 낭장이요, 청용은 목사요, 처화는 사직이라. 진의 아들은 넷인데 맹경은 병사요, 맹도는 군수요, 맹전은 소윤이요, 증직으로 호조참판이라, 철임은 문과로 병조정랑이라. 지는 아들이 넷인데 약중은 사직이요. 약경, 약형, 약평은 진사라. 초는 아들이 한분인데 관이요 경력이라. 치는 아들이 셋인데 치화는 사직이요 치순은 주부요, 치손은 사직이라 이하는 분파하여 각처에 산재하여 크게 번영하였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상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아니하여 낱낱이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대게 선생의 도덕과 문장은 국사와 가승에 상세히 실려 있지만, 세대가 점점 내려올수록 유적을 모두 잃어버리니 사유를 만분지일도 두지 못했다, 비록 가히 한스럽지만, 선생의 의복과 신을 고쳐 둔 날 송암 권 선생 호문이 제사 때 글을 지어 가로대 오직 공은 시조의 감흥을 이어받아 조정에 세묘를 명동 하였으니 가히 주나라 무왕을 보좌한 곤이와 은 탕왕을 조화한 갱이의 등류로다. 백성에게 덕을 베풀 때는 봄비가 때를 맞추어 내리는 것 같고 임금을 도와 허물을 규탄할 때는 가을 서리가 밤에 가득한 것 같도다. 지휘는 태정(삼정승)으로 만족하였고 손은 균형에 합당하였다. 공훈은 세상에서 빛나고 의형은 때에 따라 비추었도다. 한 조각 거친 비석은 오래도록 성명을 전하리라 하였으니 이글의 대략을 본즉 가히 선생의 유풍을 우러러 생각할 것이요 달리 가히 고증할 길이 없은즉 후생이 어찌 기술 하리오 나같이 어리석고 몽매함으로 외손의 끝자리에 욕되게 있으니 마침 이 고을 안동부사로 재직 중이라 백세로 겨누지 못한 성사를 아름답게 보게 되니 깨닫지 아니하는 사이 저절로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다. 명을 지어 가로대
은나라 갱이와 주나라 곤이의 사업이요, 봄비와 가을 서리의 기상이로다. 한 조각 이끼 낀 비석을 눈에 익혀 두었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만고에 성명을 존경하고 사모하도다.
 기묘 월 일
 가선대부 행 안동도호부병 안동 진병사 수군첨절제사 진성 이계노 삼가 글 짓고17세손  영호 삼가 쓰다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0世 判官安東權公祭壇碑銘(諱 哲孫)
判官安東權公之祭壇
配淑人瑞山柳氏
判官權公卽竹林先生之令子也  端宗大王之姨從也  景泰丙子以竹林先生殉節事禁錮百年全家從邊仍世居慶州像想其賢父祖明敎之下宜有班班可考之蹟以禍家餘生盡佚無傳墓亦失傳不啻賢仍之所齎恨吾宗各派之所公公痛嘆者于今半千年矣日者賢仍齋會焉使赫根君造余曰吾判官公先祖東都入鄕祖世經數十尙無霜露省掃之禮先父祖積世殫誠累擬設壇因以世故杌楻而未果也乃者孱仍敢效先志菊堂主孫宅富多山主孫純寬與門父老合謀敦事門議一致謀劃己定俾惠一言銘之余起而斂膝曰大矣壯矣諸君之善述也歟雖然顧余非其人累累辭之至再至三其請益勤辭不獲己謹按公諱哲孫性權氏貫安東文判官字號生卒並無傳高麗太師諱幸爲鼻祖至十世諱至正佐尹是爲派祖三傳諱粹文刑部尙書生諱奕文祗候  贈吏參追封永嘉君生諱用一門侍中  贈參贊諡僖敬生諱希正糾正  贈左相諡文靖三世推榮三子文景公諱軫貴也六子諱軺文監事號松皐入  本朝累徵不起守岡僕之義於公曾祖祖諱寬經歷考諱山海世稱竹林先生以宗簿寺僉正時丁  景泰丙子與六臣同時殉節百年禁錮  正廟己酉復官辛亥  贈吏參  旌閭  高廟甲申  贈吏判諡忠愍享雲谷魯峰兩院妣曰永嘉權氏景惠公專之女配曰瑞山柳氏司直復圭之女有一男二女男曰敏保功部長女適全瑞卿金仲仝敏男舜卿女適朴璟卿男良直長寧部將平參奉良无后寧男復始僉正壬亂與郭忘憂堂赴火旺山城多樹戰功平男復興壬亂倡義赴多大浦殉國  英廟丁巳  旌閭享忠烈祠夫人瑞山柳氏親尋夫屍不得九日絶食自盡  正廟甲寅  賜食物復戶  旌閭餘不盡錄於乎公以忠節之世淵源家學承襲厥猷則公亦忠義之士也夫忠者三綱之首也世若有立言君子宜當闡明於幾百年之前而潛藏于今日者天道至公之理無或乎差謬而致此杞宋之嘆也耶古語云日月雖明不照覆盆之下繄公之蹟沉晦而無徵子譬如覆盆者矣若有奮發而斥覆盆者其照同一矣顯晦之道必也有遲速之待時也復夫何恨乎哉憲祖以玄玄宗後生聞見蔑焉識且淺焉恐犯溢美喪實之誅不敢贊述只書上系及子孫錄遂爲之銘曰
曾祖之岡僕大庭之忠烈兮昭載國乘與日月之爭光長玄孫之倡義樹功次玄孫之倡義殉國兮世忠義之愈章繩繩析荷之風人不能盡知兮懿天鑑之必祥頻經禍患之餘烈兮省掃無由之憑賢仍善述追先之誠兮封壇如阜之興於休精靈之有所憑依而是安是寧兮永萬世風光之增
 辛巳蜡月宗後孫權憲祖謹撰

判官安東權公祭壇碑銘(諱 哲孫)
判官安東權公之祭壇
配淑人瑞山柳氏
判官權公은卽竹林先生之令子也요  端宗大王之姨從也라  景泰丙子에以竹林先生殉節事로禁錮百年하고全家從邊하니仍世居慶州라像想其賢父祖의明敎之下에宜有班班可考之蹟이로데以禍家餘生으로盡佚無傳하고墓亦失傳하니不啻賢仍之所齎恨이리오吾宗各派之所公公痛嘆者가于今半千年矣이다日者에賢仍이齋會焉에使赫根君으로造余曰吾判官公先祖東都入鄕祖라世經數十에尙無霜露省掃之禮하니先父祖積世殫誠하야累擬設壇이라因以世故杌楻而未果也라乃者에孱仍敢效先志하야菊堂主孫宅富와多山主孫純寬이與門父老와合謀敦事하여門議一致라謀劃己定하니俾惠一言하여銘之라余起而斂膝曰大矣壯矣라諸君之善述也歟雖然이나顧余는非其人이라累累辭之하니至再至三其請益勤하야辭不獲己라謹按公諱哲孫이요性權氏요貫安東이요文判官이요字號生卒並無傳이라高麗太師諱幸는爲鼻祖요至十世諱至正佐尹이是爲派祖라三傳諱粹는文刑部尙書요生諱奕는文祗候요贈吏參이요追封永嘉君하다生諱用一는門侍中요贈參贊이요  諡僖敬라生諱希正는糾正이요  贈左相이요諡文靖이니三世推榮은三子文景公諱軫貴也라六子에諱軺는文監事요號松皐요入  本朝하여累徵不起는守岡僕之義라於公에曾祖라祖諱寬는經歷이요考諱山海는世稱竹林先生이라以宗簿寺僉正으로時丁  景泰丙子에與六臣同時殉節히니百年禁錮라  正廟己酉에復官하고辛亥에  贈吏參하고旌閭하다  高廟甲申에  贈吏判으로諡忠愍이라享雲谷魯峰兩院하다妣는曰永嘉權氏니景惠公專之女라配曰瑞山柳氏니司直復圭之女라有一男二女하니男曰敏는保功部長이요女適全瑞卿金仲仝하고敏의男舜卿이요女는適朴璟卿이요男에良는直長이요寧는部將이요平는參奉이요良无后라寧의男에復始는僉正이요壬亂에與郭忘憂堂赴火旺山城하여多樹戰功하고平의男에復興는壬亂倡義하여赴多大浦殉國하니  英廟丁巳에  旌閭하고享忠烈祠하다夫人瑞山柳氏는親尋夫屍나不得하고九日絶食하여自盡하다  正廟甲寅에  賜食物復戶하고  旌閭하다餘不盡錄이라於乎라公은以忠節之世에淵源家學하고承襲厥猷한則公亦忠義之士也라夫忠者는三綱之首也라世若有立言君子면宜當闡明於幾百年之前이라而潛藏于今日者는天道가至公之理無或乎差謬하여而致此杞宋之嘆也耶라古語云日月雖明이라不照覆盆之下라하니繄公之蹟이沉晦而無徵者가譬如覆盆者矣이라若有奮發而斥覆盆者면其照同一矣라顯晦之道가必也有遲速之待時也라復夫何恨乎이리요哉憲祖는以玄玄宗後生으로聞見蔑焉하고識且淺焉하여恐犯溢美喪實之誅라不敢贊述하고只書上系及子孫錄하여遂爲之銘이라曰
曾祖之岡僕과大庭之忠烈兮여昭載國乘하니與日月之爭光이라長玄孫之倡義樹功과次玄孫之倡義殉國兮여世忠義之愈章하니繩繩析荷之風이라人不能盡知兮여懿天鑑之必祥이라頻經禍患之餘烈兮여省掃無由之憑이라賢仍善述追先之誠兮여封壇이如阜之興하니於休精靈之有所憑依라而是安是寧兮여永萬世風光之增이라.
 辛巳蜡月宗後孫權憲祖謹撰

판관 안동권공제단비명(휘 철손)
판관안동권공지제단(判官安東權公之祭壇)
배숙인서산류씨(配淑人瑞山柳氏)
판관권공은 즉 죽림선생의 아드님이시고 단종대왕의 이종이시다. 경태병자년(1456: 세조2년)에 죽림선생의 순절하신일로 자손에게 금고백년과 전 가족이 변방으로 이주하게 하라는 명에 따라 이로 인하여 대대로 경주로 세거하게 되었다. 상상하건대, 그와 같은 어진조상과 부모의 밝은 교육아래 당연히 반반한 가히 고증할만한 자취가 있어야 하는데 사화를 당하고 사라남은지라 사적을 모두 불태우고 전하는 것이 없고 묘 또한 실전하여 후손들이 탄식하고 한할 뿐이다. 우리종중 각파가 공공연히 통탄함이 어언 반 천년이다.
일전에 후손들의 재회 시에 의존하여 혁근 군을 내게 보내 말하기를 판관선조는 경주 입향조 이신데 수십 세를 지내면서 아직 가을묘제의례를 드리지 못하니 선 부조께서 오랜 세월동안 정성을 다해 여러 번 설단 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연이어 세상이 두렵고 어수선하여 실천을 못하였다. 그저께 감히 선 어른신분들의 뜻을 받들어 국당 주손 택부와 다산 주손 순관이 문중부로와 같이 제단과 비석을 세우기로 의견이 일치하여 계획이 이미 확정되었으니 좋은 말씀으로 비명을 찬술하여 주시요하니 내가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여 말하되 크다! 장 하도다! 여러분들의 착한 계획이로다. 돌아 보건데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하고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은지라 삼가 살펴보았다.
공의 휘는 철손이요 성은 권씨요 본관은 안동이라 문과 급제하여 벼슬은 판관이라 자와 호와 생졸월일 조차 전하는 것이 없도다.
고려태사 휘 행은 시조이시고, 10세에 이르러 휘는 지정이시고 벼슬은 좌윤이니 이분이 파조이시다. 삼대에 내려와서 휘의 수는 문과로 형부상서요, 아들 휘의 혁은 문과벼슬로 중문지후요 증 이조참판이요 추봉영가군하다, 아들의 휘는 용일이요, 문과로 문하시중이요, 증 참찬이요, 시호는 희경이다. 아들의 휘는 희정이요, 감찰규정으로 증 좌의정이요, 시호는 문정이다. 삼대로 추증한 것은 문경공 휘 진의 귀함이라.
여섯째아들 휘의 초는 문과로 감사요, 호는 송고라, 조선조 태조계서 여러 번 부르셨으나 나아가지 아니함은 불사이군의 충의를 지킴이요, 공에게는 증조이시다. 조부의 휘는 관이요, 벼슬은 경력이다. 고의 휘는 산해요, 세상에서 죽림선생이라 칭한다, 벼슬은 종부시첨정으로 그때 경태병자(1456 세종 2년)에 단종복위를 사육신과 같이 모의하다가 동시에 순절하니 백연동안 금고형이 내렸다. 정조 기유년에 복관하고 신해년 증 이조참판에 봉해지고 정려를 명하다. 고종갑신에 이조판서의 추증직과 충민이라는 시호가 교지로 내렸다. 노봉, 운곡 양서원에 배향하다. 비위는 영가 권씨요 경해공 휘 전의 따님이라 배위는 서산 류씨 사직 복규의 여이시다.  일남 이녀를 두었는데 남은 민이요 보공부장이라 여는 전시경과 김중동에 각각 시집갔다. 민의 남에 순경이요 딸은 박영경에게 시집갔다. 순경의 남에 양은 직장이요, 영은 부장이요, 평은 참봉이라. 양은무사하고, 영의 남에 복시는 벼슬이 첨정이라 임진왜란에 곽 망우당을 따라 화왕산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평의 남에 복흥은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다대포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다대첨사 윤흥신장군과 같은 날 순절하였다, 영조정사에 왕명으로 유명조선국충신의사 권복흥지려라 명하니 충렬사에 봉향하다, 부인 서산류씨께서 친히 가인을 인솔하고 남편의 시신을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초혼 장을 지낸 후 구일불식 자진하니 정조갑인(1786: 정조18)년 정렬부인 충신의사 권복흥처 서산류씨지문이라 정려를 명하고 식물을 하사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라 명하시다. 다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호라! 공은 충절의 세손으로 가학을 연원이 이어받아 몸소 실천하니 공 또한 충의지사로다 대게 충성은 삼강의 으뜸이라 세상에 바른말 잘하는 군자가 있었더라면 의당 기백 년 전에 드러내어 밝혔을 터인데 오늘날까지 남몰래 숨어있는 것은 하늘의 도가 지극히 공평하다는 이치가 혹 잘못되어 이롭게 기송의 탄식이 있었을 뿐이다. 옛날 말에 해와 달이 비록 밝으나 엎어놓은 단지의 밑은 밝히지 못한다 하였으니 공의 경우가 행적이 침회하여 증거가 없는 것은 이와 같도다.
현회의 도리는 반듯이 더디고 빠른 것은 때가 있는 법이라 누가 어떠하게 한 하리요 헌조는 아득한 종 후생으로 견문이 없고 지식 또한 없는지라 너무 칭찬하여 사실을 읽을 가 겁이 나서 감히 찬술을 못하고 다만 상계와 자손 록을 쓸 뿐이다 드디어 명을 지어 가로대
증조부의 불사이군 절의와 부친의 충절이여! 왕조실록에 밝게 실어서 해와 달같이 빛을 다투도다! 장 현손은 창의하여 공을 세움과 차 현손의 창의 순국함이여 세세로 충의를 포창하여 오래도록 연꽃위에 무지개처럼 풍관을 이으리라. 사람을 다 알지 못하지만 거룩한 하늘은 상세하게 알리도다. 여러 번 화난을 격은 여열이여! 가을성소 할 때는 연고 없는 영혼이로다. 어진후손들이 조상을 추앙하는 정성이여! 봉분은 언덕같이 크도다!
아~ 정령 의지할 때 있으니 여기에 편안하게 더 편안하게 길이 만세토록 풍광을 더 하소서!
 신사(2001) 사월(섣달: 12월) 종 후손 헌조 삼가지었다.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0世 禱蔭齋記(後記)
齋以禱蔭在昔 成中廟之世保功部將權公諱敏及其長孫直長諱良次孫天使部將諱寧次孫參奉諱平墳塋齋宿之所也四祖孫之玄宅在禱蔭山下達田里入葬後近四白年壬子始竪顯刻越二年甲寅甁建是齋取其山名而署楣揭起菴李公諱中業所著記文盖於其時保功部將公之大人判官公其大人竹林先生之患餘烈因以失傳深目英微省掃無憑然判官公實慶州肇基之祖也乃者賢仍爲先之誠出乎彝天今年崇封祭壇燦備儀物徵銘於余余雖非其人誼重百世事同一室潛妄納名事竟遂而告由後赫根君道余曰禱蔭齋由來部將先祖四祖孫齋宿之所也然今則判官先祖同麓設壇從玆年年祭需奉上于是齋判官先祖旣元位也然則宜有敘由之文願族祖俾惠一言實之否余斂膝而起曰君之言則是也君之誠亦大也然余旣不文而且菊堂多山兩門門議一致然後以可矣之設辭之嗣後至再至三累累懇請前月又與赫文世豪君幷造山庄出示起菴公記文曰門議己定以門議晋拜其煍然之貌油然乎出諸善述之誠惻然之詞洽然乎令人感動之志矣辭不獲己敬讀記文詳悉無缺精切懇惻贊美極備更雖有碩德文章難復架壘况若憲祖之蔑識乎旣感賢仍殫誠追先之至意重感起菴公大德雄文之旨訣坦復焉僅會芻言略叙判官公設壇之由而歸之抑又有一設曰判官公之事蹟遙遙無可考之地然世有耈哲之相承苟非積陰累德烏能有是也及今賢仍之追遠至誠亦非家傳摑血之孝思不匱者歟余以是獻賀而遂爲之記
 壬午陽復節宗後孫權憲祖  謹記
 西紀二00二年九月  日揭額

禱蔭齋記(後記)
齋를以禱蔭이라在昔하고 成中廟之世에保功部將權公諱敏과及其長孫直長諱良과次孫天使部將諱寧과次孫參奉諱平의墳塋齋宿之所也라四祖孫之玄宅이在禱蔭山下達田里하니入葬後에近四白年壬子에始竪顯刻하고越二年甲寅에甁建是齋하야取其山名而署楣하고揭起菴李公諱中業所著記文하니盖於其時는保功部將公之大人判官公其大人竹林先生之患餘烈로因以失傳하야深目英微하여省掃無憑이라然이나判官公實慶州肇基之祖也라乃者에賢仍爲先之誠이出乎彝天이라今年崇封祭壇할세燦備儀物하고徵銘於余라余雖非其人이나誼重百世하고事同一室이라潛妄納名하다事竟遂而告由後에赫根君이道余曰禱蔭齋의由來는部將先祖四祖孫齋宿之所也라然이나今則判官先祖를同麓設壇하니從玆年年祭需를奉上于是齋니判官先祖旣元位也라然이나則宜有敘由之文이라願族祖俾惠一言하야實之否아余斂膝而起曰君之言則是也라君之誠亦大也라然이나余旣不文而且菊堂多山兩門이門議一致하여然後에以可矣之設이라辭之嗣後에至再至三累累懇請하고前月又與赫文世豪君이幷造山庄하야出示起菴公記文曰門議己定이라以門議晋拜라하니其煍然之貌라油然乎出諸善述之誠하고惻然之詞가洽然乎令人感動之志矣이라辭不獲己이라敬讀記文이라詳悉無缺하고精切懇惻하야贊美極備라更雖有碩德文章이라도難復架壘라况若憲祖之蔑識乎아旣感賢仍殫誠追先之至意하고重感起菴公大德과雄文之旨訣坦復焉이라僅會芻言하여略叙判官公設壇之由하고而歸之라抑又有一設하니曰判官公之事蹟이遙遙無可考之地라然이나世有耈哲之相承하니苟非積陰累德이면烏能有是也리오及今賢仍之追遠至誠이亦非家傳摑血之孝思不匱者歟라余以是獻賀하고而遂爲之記라
 壬午陽復節宗後孫權憲祖  謹記
 西紀二00二年九月  日揭額

도음재기(후기)
재실을 도음이라 편액하다. 옛날 성종, 중종의 시대에 보공부장 권공 휘 민과 그의 장손 직장 휘 양과 차손 천사부장 휘 영과 차손 참봉 휘 평의 분영을 수호하고 자손들이 유숙하는 곳이다. 넷 조손의 무덤이 도음산 아래 달전리에 있으니 입장 후 근 사백년 후 임자년에 비로소 비석을 세우고 이년 후 갑인년에 이 재실을 창건하고 그 산 이름을 따서 도음재라 현판을 달고 기암이공 휘 중업씨가 지은 기문을 편액하여 달다. 대게 그 때 보공부장의 대인(부친) 판관공은 그 대인 죽림선생의 환란여열로 실전하여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증거가 없도다. 성소 때는 의지할 때 없는 영혼이로다. 그러나 판관공은 실지로 경주에 처음 터를 딱은 조상이라 이에 위선하는 정성이 천성에서 나왔도다. 금년에 제단을 높이 쌓고 의물을 가춘 후에 나에게 비명을 부탁하니 내가 비록 그 사람은 못되지만 백세로 사긴 정과 한 집안 후손이라 망령되게 이름을 드렸드니 마침내 이를 마치고 고유한 후에 혁근군이 말하되 “도음재의 유래는 부장선조와 셋 손자의 봉분을 수호하기 위하여 지은재실이다. 그러나 지금인즉 판관공을 동록에 설단하고 이제부터 해마다 제수는 이 재실에서 봉상하면 관관공이 원위이다 그런즉 마땅히 서유의 글이 있어야하는데 원 하건데 족조는 한 말씀으로 사실을 기록해주시오”내가 무릅을 바루고 일어나 말하되 “그대의 말이 올토다! 그대의 정성이 크도다! 그러나 내 이미 글도 잘 못하지만 또한 국당, 다산 양 문중에서 문중의론이 일치한 연후에 말과 사연을 기록하는 것이 가하다”라 하고 돌려보냈는데 그 후에 두 번 세 번 누누이 간청하고 전달해 또 혁문, 세호군이 함께 찾아와서 기암공 기문을 보이고 말하되 “문중의론이 정해지고 문중대표로 진배하였습니다.”라 하니 그 반듯한 모양과 여유 있고 침착하게 일을 정성껏 잘 실천하고 측연한 사연이 흡연하게 사람의 뜻을 감동케 하도다. 사양하다 마지못하여 이에 조심스레 기문을 읽어보니 상세하게 결점이 없도다. 정열이 간측하고 찬미가 극비라 다시비록 석덕문장이 있어도 더 가첩하지 못하리라 하물며 헌조의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할 말이 없다. 이미 후손들의 정성을 다해 선조를 추모하는 지극한 뜻과 거듭 기암공의 대덕과 웅장한 문장과 지결에 탄복할 뿐이다. 겨우 추언을 다시모아 대략 판관공의 설단 한 사유를 써서 돌려보낸다. 또한 일설이 있으니 왈 판관공 사적이 멀고멀어 가히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대대로 어진사손들이 상승하니 진실로 여러 번 음덕을 쌓지 아니했으면 어찌 이룰 수가 있으리오. 그리고 이제 추원지성이 또한 가정에 전해오는 괵혈의 효자는 궤를 아니 함을 생각함이로다. 나는 이로서 하례를 드리고 기문을 마친다.
 임오년12월 종후손 권헌조 삼가기록하고
 서기2002년 9월  일 현판을 달았다.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4世 五慕齋重建記
月城之北舊有五慕齋齋義士權公所居也公天姿剛毅篤於言行早廢公車隱居林樊每讀書至忠孝事輒慨然興感焉年三十三喪考妣泣血哀毁幾至滅性服闋而哀不衰築小齋扁之曰五慕蓋取大舜五十慕父母之義以寓終身之慕也余嘗聞壬辰島夷之變州賢士夫議倡義義士自願當一隊率家僮備戰具直赴賊遻之于多大浦與戰死之後百四十五年道臣始以其事聞于  朝棹楔以旌其忠於是鄕人士立碑遺墟以記之于社於五慕臺下尸祝之悲夫後人之慕公也其深矣社其撤矣公之雲仍愴其齋社俱墟于懼其遺蹟之久而無徵也越丙子春重營是齋於舊臺至戊寅八月始成摠若于楹余惟公之忠孝節行慨然想見宜乎後裔之竭力復建也蓋齋以慕名公之慕親於旣沒之後也今仍其齋名公之裔之慕公之慕也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其此之謂歟公諱復興卽竹林先生五世孫也竹林與朴彭年成三問同志丙子禍作投閣自殺後  贈參判旌其閭吾高王考艮翁公著竹林節士傳曰以小臣殉節卓乎其尤難嗟乎義士公之死亦非小臣之死於忠者歟其忠節之卓亦不克肖其祖歟古人曰求忠臣於孝子之門余於是齋慕公之移孝爲忠重有感於節士傳遂爲之記
 崇禎四己卯蜡日完山後人永川知郡李鶴來焚香肅藁

五慕齋重建記
月城之北에舊有五慕齋하니齋는義士權公所居也라公은天姿剛毅하고篤於言行이라早廢公車하고隱居林樊하여每讀書至忠孝事에輒慨然히興感焉이라年三十三喪考妣에泣血哀毁하야幾至滅性하고服闋에而哀不衰하여築小齋하고扁之曰五慕라蓋取大舜이五十에慕父母之義라以寓終身之慕也라余嘗聞壬辰島夷之變에州賢士夫議倡義할째義士自願當一隊하여率家僮備戰具하고直赴賊할세遻之于多大浦하야與戰死之하니後百四十五年에道臣이始以其事로聞于  朝하여棹楔로以旌其忠하니於是에鄕人士가立碑遺墟하여以記之하고于社於五慕臺下하야尸祝之하다悲夫라後人之慕公也其深矣社其撤矣라公之雲仍이愴其齋社俱墟하고于懼其遺蹟之久而無徵也라越丙子春에重營是齋於舊臺하야至戊寅八月始成摠若于楹하다余惟公之忠孝節行이慨然히想見하야宜乎後裔之竭力復建也라蓋齋를以慕名은公之慕親於旣沒之後也라今仍其齋名은公之裔之慕公之慕也라詩에曰孝子不匱永錫爾類이라하니其此之謂歟라公은諱復興이니卽竹林先生五世孫也라竹林與朴彭年成三問同志로丙子禍作하여投閣自殺하다後에  贈參判하고旌其閭하니吾高王考艮翁公이著竹林節士傳할세曰以小臣으로殉節하니卓乎其尤難이라嗟乎라義士公之死는亦非小臣之死於忠者歟아其忠節之卓이亦不克肖其祖歟아古人曰求忠臣於孝子之門이라하니余於是齋에慕公之移孝爲忠이라重有感於節士傳이라遂爲之記라
 崇禎四己卯蜡日完山後人永川知郡李鶴來焚香肅藁

오모재중건기
월성의 북쪽에 옛날 오모재가 있었는데, 재는 의사권공이 살든 곳이라. 공은 천성이 강의하고 언행이 신중하며 일찍이 출사를 포기하고 시골에 은거하여 매양 독서를 할 때 충효의 대목에는 문득 개연이 흥감해 하드라.
나이 설은 세살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여 거의 생명을 읽을 지경이드라 복이 끝남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은 재실을 지어 편액을 달 때 이름을 오모재라 하다. 대게 순임금이 오십에 부모의 도의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따라 종신토록 늘 사모한다는 말이다.
내가 일찍 들으니 임진년에 섬 오랑캐의 변에 고을 어진선비와 장정들이 창의하기로 의론할 때 의사께서 자원하고 한 부대를 조직하여 가동을 인솔하고 전구를 갖추어 곧 적진으로 나아가 다대포에서 적을 만나 많은 전공을 올리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145년 후에 도신이 처음 그 일을 조정에 알리어 정려를 새워 그 충성을 정표하니 이에 고을 선비들이 유허비를 새워 기록하고 또 오모대하에 사당을 지어 향례를 치르다.
슬프다! 후인들이 공을 사모함이 너무 깊고 그 사당은 훼철되어 공의 후손이 그 재사가 오래 비어 있는 것을 슬퍼하고 또한 유적이 오래되어 증거가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이듬해 병자는 봄에 이 재실을 옛터에 중건하기로 경영하여 무인년 팔월에 모든 건물을 완공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공의 충효와 절행을 개연히 생각하여 후예들이 힘을 다하여 다시 새움이 당연하도다. 대게 이 재실이름을 사모할 모자로 한 것은 공의 양친이 돌아가신 후에도 사모한다는 뜻이다. 이제 부터는 그 재실이름을 공의 후손들이 공을 사모한다는 모자가 되었다. 시에 가로대 효자가 나오면 계속해서 그 자손에 동류의 효자가 나오게 된다하는데 이것을 말한 것일 것이다.
공의 휘는 복흥이니 즉 죽림선생 5세손이라 죽림선생이 박팽년 성삼문동지와 더불어 병자년에 재화가 일어나 투각자살하다. 후에 증참판하고 정려를 명하다. 나의 고왕고간옹공이 죽림 절사전을 지어 가로대 소신으로 순절하니 그 어려움이 남보다 뛰어 나도다. 슬프다! 의사공의 죽음이 또한 소신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으로 죽음이요 그 충절의 뛰어남이 그 조상마음과 같이 위대 하도다. 옛 사람이 말하데 충신은 효자의 문에 구하라 하니 나 이 재실에 공을 사모하여 효도를 옮겨서 나라에 충성함은 거듭 절사전의 감회가 있도다. 이어서 기문을 마감한다.
 순정사기묘(1879)년 12월에 완산후인 영천지군 이학래 분향숙고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4世 丹溪書堂記
人之大倫有五而君臣也夫婦也居三綱之二」
焉若夫臣死於忠婦死於烈則忠與烈名雖殊」
而義則一也府之北丹丘里有五慕齋先生權」
公諱復興字仲元貫永嘉竹林先生五世孫而」
爲國死忠自其先世而己然矣公自少有足病」
而慷慨有志節事親誠孝居喪泣血此五慕之」
所以名齋而孝可以移忠者也當執徐之亂公」
以跛病之足誓心報國身先奮義備戰馬率家」
僮直馳釜山遇賊於多大浦突陳鏖戰劒折矢」
盡死於綏下報至日夫人柳氏奔往戰地覓屍」
不得矢復招魂而歸不食九日而下從之以遺」
衣冠如其言葬與之同穴噫向所謂臣死於忠」
婦死於烈而忠烈雙成萃于一家其不誠韙歟」
壯哉後百四十五年丁巳  朝家特  命旌表」
其閭百年幽翳之蹟始著而一鄕感慕之情有」
餘己未鄕中人議建里社享公矣翊年秋㫌以」
  邦禁見撤更紀立石丙午以小山先生信筆」
刻于碑夫人柳氏貞烈事蹟幷附其傍於是乎」
忠烈俱彰矣適有  朝家自丙午前見撤儒院」
復設之令議定祠祉于五慕臺下卽義士公所」
居地也以鄕賢祠例士林崇奉尸祝百四十餘」
年如一日  太上皇丁卯不幸東國氣數復値」
西林戹會俎豆之所鞠爲茂草之墟丙子春姓」
孫以毁祠餘材添構數架屋扁以五慕齋號以」
爲寓慕之所壬戌春鄕士林以設壇歲一享之」
議會定甚盛事也而壇與廟享有別不可仍舊」
爲丹溪祠改爲丹溪書堂嫡孫憲章及宜重甫」
屬不侫記其事余亦均有秉彛之天者其烏敢」
辭謹接始而祭公里社中而祠公丹溪今而享」
公設壇夫祠之興廢有數存於其間而義士公」
之忠義柳夫人之貞烈亘萬古而不泯矣登是」
堂者瞻壇而起敬慕之心入室而講忠義之譚」
朝焉夕焉念玆在玆使此黑窣世界復見靑邱」
文物則庶幾有補於風化而安知今日之丹溪」
書堂不爲異日之丹溪祠哉」
   甲子長至月上瀚驪江李能允撰」

丹溪書堂記
人之大倫이 有五하니 而君臣也와 夫婦也가 居三綱之二焉이라 若夫臣死於忠하고 婦死於烈則忠與烈이 名雖殊나 而義則一也라 府之北丹丘里에 有五慕齋先生權公하니 諱復興이요 字仲元이고 貫永嘉요 竹林先生의 五世孫이라 而爲國死忠은 自其先世而己然矣이라 公의 自少有足病이나 而慷慨有志節하고 事親誠孝하며 居喪泣血하니 此五慕之所以名齋하고 而孝可以移忠者也라 當執徐之亂에 公은 以跛病之足으로 誓心報國하여 身先奮義하고 備戰馬率家僮하여 直赴釜山하니 遇賊於多大浦하여 突陳鏖戰하야 劒折矢盡에 死於綏下하다 報至日에 夫人柳氏奔往戰地하여 覓屍不得하고 矢復으로 招魂而歸하여 不食九日而下從之하다 以遺衣冠으로 如其言하여 葬與之同穴하다 噫라 向所謂臣死於忠하고 婦死於烈하니 而忠烈雙成하여 萃干一家하니 其不誠韙歟壯哉라 後百四十五年丁巳에  朝家에 特  命旌表其閭하니 百年幽翳之蹟이 始著하고 而一鄕感慕之情이 有餘라 己未에 鄕中人議로 建里社享公矣라 翊年秋에 㫌以  邦禁見撤하고 更紀立石丙午에 以小山先生信筆로 刻于碑하고 夫人柳氏貞烈事蹟을 幷附其傍하니於是乎에 忠烈俱彰矣이라 適有  朝家에 自丙午前의 見撤儒院으로 復設之  令이라 議定祠祉于五慕臺下하니 卽義士公所居地也라 以鄕賢祠例로 士林崇奉尸祝하니 百四十餘年을 如一日이라 太上皇丁卯에 不幸하여 東國氣數가 復値西林戹하니 會俎豆之所가 鞠爲茂草之墟라 丙子春에 姓孫以毁祠餘材로 添構數架屋하고 扁以五慕齋號以爲寓慕之所라 壬戌春에 鄕士林이 以設壇하여 歲一享之議로 會定甚盛事也라 而壇與廟는 享有別이나 不可仍舊爲丹溪祠라 改爲丹溪書堂하다 嫡孫憲章及宜重甫가 屬不侫하니 記其事라 余亦均有秉彝之天者라 其烏敢辭이요 謹接始而祭公里社하고 中而祠公丹溪하고 今而享公設壇하니 夫祠之興廢가 有數에 存於其間이니 而義士公之忠義와 柳夫人之貞烈이 亘萬古而不泯矣이라 登是堂者는 瞻壇而起敬慕之心하고 入室而講忠義之譚하라 朝焉夕焉에 念玆在玆하여 使此黑窣世界로 復見靑邱文物則庶幾有補於風化라 而安知今日之丹溪書堂이 不爲異日之丹溪祠哉아
 甲子長至月上瀚驪江李能允撰

단계서당기
사람의 대륜이 다섯 가지가 있으며 군신과 부부는 삼강에 그 두 가지가 해당한다. 만약 여기에 신하는 나라를 위하여 충성으로 죽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열녀로 죽은즉 충성과 정렬이 이름은 비록 다르나 의리는 한 가지이니라. 경주부 북쪽 다산리에 오모재 선생 권공이 계셨는데 휘는 복흥이요 자는 중원이요 관향은 영가(안동 구 지명)라, 죽림선생의 5세손으로 나라를 위하여 충성으로 죽음은 그 선대부터 그러했도다. 공은 젊어서 발병이 있었는데 그릇됨을 분하게 여기고, 지절이 있는지라 부모를 섬길 때 정성으로 효도하고 부모의 초상에는 피눈물을 흘려 이 때문에 오모재라 자호하였다. 효가 충성으로 옮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은 불편한 다리로 마음속으로 보국을 맹세하고 의를 떨치고 먼저 일어나 전마를 갖추고 가동을 대리고 바로부산에 다다르러 다대포에서 적을 마지하고 돌진하여 무찌르며 싸웠으나 칼은 꺾어지고 화살은 떨어져 기어이 성은 함락되고 첨사 윤흥신 장군과 한날 전사하였다. 전사통보를 듣고 부인류씨는 친히 전쟁터에 가서 시신을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시복으로 초혼하여 돌아왔어 9일 불식하고 남편 따라 자진하였다. 남은 의관으로 유언에 따라 함께 동혈에 장사하다. 슬프다! 옛날 말하든 신하가 충성으로 죽고 아내는 열녀로 죽으니 충과 열이 상성하여 두 정려가 한 집에 모였으니 그 진실로 위대하고 장하도다. 그 후 150년 정사에 나라에서 특별히 유명조선충신권복흥지려라 정려를 명하다. 백연동안 아득하게 숨어든 자취가 비로소 드러나니 한 고을 감모의 정이 넘치도다. 기미년에 향중공의로 사당을 세우고 공을 제향 하였으나 익연가을에 나라의 명령으로 훼철하다. 다시 비를 세울 때 병오년 소산선생 신필로 명과 서를 새기고 부인 류씨 정렬사적을 아울러 그 곁에 글로 부치니 이에 충과 열이 함께 들어나도다 그때 나라에서 병오년 이전에 훼철된 유원을 복설하라는 명에 따라 사당 터를 오모재아래 정하니 즉 의사공의 거주하든 땅이라 향 현사의 예에 따라 사림에서 높이 받들고 향례를 드린 것이 백사십 여년을 하루같이 지냈다 태상왕 정묘에 동국기수가 불행하여 다시 사림 액을 만나니 사당의 터가 풀밭으로 빈 땅만 남아있다. 병자년 봄에 성손이 사당을 헐고 남은 제목으로 5칸 집을 짓고 선생의 호를 따라 오모재라 편액을 달고 조상을 추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임술 봄에 향중사림이 설단하고 해마다 한 번씩 향례를 치르기로 결정하니 심히 장한일이로다. 단과 묘가 행사 치르는 방법은 다르지만 옛날과 같이할 수 없어 단계사를 단계서당으로 개액하고 적손헌장과 의중 두 분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여 나 또한 타고난 천성을 지키는 사람이라 그 어찌 사양하리요 삼가유사를 고람 한즉 처음은 공을 충렬사에 제향하고 지금은 설단하여 제향하다. 대게 사당의 흥하고 폐하는 것이 그 간에 수차 있었지만 의사공의 충의와 류씨부인의 정렬이 만고에 비치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당에 올라오거든 당을 바라보고 공경하고 추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방에 들어오거든 충의에 대한 글을 강론하여 아침이나 저녁이나 생각을 여기에 두라. 이 어두운 세계가 다시 청구문물을 본즉 대게 풍속을 개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찌 오늘의 단계서당이 옛날의 단계사와 같다는 것을 알리요.
 갑자(1934)년 섣달 상순 여강이능윤 짓다.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4世 有明朝鮮故忠臣學生安東權公遺墟碑銘幷序
承議郞前行司圃署別提韓山李光靖  撰
傍裔孫  相績謹書幷篆
執徐之亂列郡瓦解方伯守牧之臣率皆鳥鼠竄時則有若權公諱復興慨然投袂提家僮直前迎賊遂橫尸戰場後百四十五年道臣以聞  朝廷特  命旌表其門鄕人祝之社旣以  邦令撤於是相與立石遺墟求銘於余嗚呼國家有亂封疆之臣死於封疆羈靮之臣死於羈靮固其職耳苟無其職雖竄伏巖竇以全性命誰曰不可然而公以遐方一布衣非有策名委質之責而乃獨輿疾張拳赴鬪深入死而不悔者豈非忠肝義膽輪囷於胸中但知讐賊之可怒而不見鋒鏑之可畏只有忠義之內激而不計死生之必至則倘所謂夫子之死至今有耿光者耶或者疑當時之禍勢若滔天以一介之身策家僮迎豺狼身滅功虧不幾於暴虎憑河而不悔者歟然當是時也昇平百年變起一朝聞風遞魄大小崩角無敢攖其鋒者遂使寇賊長驅如入無人之境公之心盖曰是賊不可一日而共戴天縱使除一羸賊殺一凶醜猶足以少酬宿昔忠奮之積而不忍偸生苟活於草莽之中此其志豈不誠烈丈夫哉况自公之死忠義競勸人心益勵使  國家卒收圖恢之業則公之一死未必不爲之激發而爲之兆耳是則公之死亦不可謂從然而無所補也宜乎 國家旌表之典鄕人感慕之誠愈久而愈無窮也公字仲元永嘉人高麗太師幸之後中世有宗簿寺僉正諱山海號竹林  光廟受禪自度不免卽引決以自靖其爲  國家決一死盖有自也考參奉諱平生公于慶州北江東之多山里公自少寡言沈重以孝悌聞方倡義從戎也衆皆以公有足疾難之公奮然曰吾足雖病吾心獨不病 主上蒙塵跛躄者獨不能一死乎旣死求尸不得以遺衣冠葬於村後負甲之原銘曰
惟忠與義根於天性我足雖躄我心不病  君父蒙塵鋒鏑如飴鳥逝鼠竄彼何人斯公身雖死公心不亡烈烈其光水碧山蒼 王用寵嘉門閭旣旌聲響益遠墟里哀生一片貞珉詢謀攸同我銘不謏刻示無窮
上之十年丙午四月  日謹竪      
夫人瑞山柳氏死節事蹟幷附
碑文旣成越四月仲秋血孫榮祖與儒生李燾國以鄕中校院文字及士林之書來示一張斷爛古紙曰此是得於燾國家古蹟中者蓋燾國之祖與義士公爲婭壻且同里目擊其事而手記之以詔後人也不幸兩家後孫累代蚤世因仍百年之後則寖以忘遠矣惟幸塵媒蠹蝕之餘眞蹟始出於二百餘年之後殆天意哀其節而不忍於終晦也願得附見於碑文使義烈幷著此鄕人之志也謹按其錄首言義士公言行志節自少卓異居喪之善鄕里稱之壬辰之亂公備戰具向賊陣夫人柳氏挽衣而哭曰君病足當此搶掠之日戰具欲何之公曰安康有知心友欲相面卽還遂直赴死戰場柳氏號泣率家人尋尸不得招魂而歸九日不食而死合葬于達林洞坐甲之原噫夫死於忠婦死於烈節義成雙輝暎古今惜乎往蹟日遠故老無存卓節懿行烟浸草埋使三綱具備之 天褒獨及於沃溝李氏之一門於死者何損焉而世道後人之憾當如何哉玆並附之庶幾異日採民風者得焉夫人貫瑞山參奉希春之女是年八月日光靖又書

有明朝鮮故忠臣學生安東權公遺墟碑銘幷序
承議郞前行司圃署別提韓山李光靖  撰
傍裔孫  相績  謹書幷篆
執徐之亂에列郡이瓦解하고方伯守牧之臣이率皆鳥鼠竄하다時則有若權公諱復興은慨然히投袂하야提家僮하고直前迎賊하야遂橫尸戰場하다後百四十五年에道臣이以聞朝廷하여特命으로旌表其門하고鄕人이祝之社러니旣以요邦令으로撤하다於是에相與立石遺墟하고求銘於余라嗚呼라國家有亂에封疆之臣이死於封疆하고羈靮之臣이死於羈靮은固其職耳라苟無其職이면雖竄伏巖竇하야以全性命인들誰曰不可리오然而나公은以遐方一布衣로非有策名委質之責이라而乃獨輿疾張拳하야赴鬪湥入死而不悔者니豈非忠肝義膽이輪囷於胸中이요但知讐賊之可怒而不見鋒鏑之可畏라只有忠義之內激而不計死生之必至라則倘所謂夫子之死라至今有耿光者耶라或者가疑하되當時之禍가勢若滔天이라以一介之身으로策家僮하여迎豺狼이라身滅功虧하여不幾於暴虎憑河로대而不悔者歟아然當是時也라昇平百年에變起一朝하여聞風遞魄하고大小崩角하야無敢攖其鋒者라遂使寇賊이長驅하여如入無人之境이라公之心이蓋曰是賊은不可一日라도而共戴天이라縱使除一羸賊하고殺一凶醜면猶足以少酬宿昔忠奮之積이라而不忍偸生하야苟活於草莽之中이라此其志가豈不誠烈丈夫哉아况自公之死로忠義競勸하고人心이益勵하야使國家로卒收圖恢之業하니則公之一死가未必不爲之激發而爲之兆耳라是則公之死가亦不可謂從然而無所補也라宜乎 國家旌表之典이라鄕人의感慕之誠이愈久而愈無窮也라公의字는仲元이오永嘉人이라高麗太師幸之後로中世에有宗簿寺僉正諱山海요號竹林이  光廟受禪에自度不免하고卽引決以自靖하니其爲  國家하야決一死함은盖有自也라考는參奉이요諱는平이라生公于慶州北江東之多山里하다公은自少로寡言沈重하고以孝悌으로聞이라方倡義從戒也에衆皆以公有足疾로難之라公이奮然曰吾足雖病이나吾心은獨不病이라  主上蒙塵하니跛躄者獨不能一死乎아旣死에求尸不得하고以遺衣冠으로葬於村後負甲之原하다銘曰
惟忠與義가根於天性이라我足이雖躄이나我心은不病이라  君父蒙塵에鋒鏑如飴鳥逝鼠竄에彼何人斯오公身雖死나公心이不亡烈烈其光水碧山蒼이라 王用寵嘉에門閭旣旌이라聲響益遠에墟里哀生이라一片貞珉이詢謀攸同이라我銘이不謏라刻示無窮이라.
上之十年丙午四月  日謹竪
夫人瑞山柳氏死節事蹟幷附    
碑文旣成越四月仲秋에血孫榮祖與儒生李燾國으로以鄕中校院文字士林之書로來示一張斷爛古紙曰此是得於燾國家古蹟中者라蓋燾國之祖가與義士公으로爲婭壻라且同里에서目擊其事라而手記之하야以詔後人也라不幸하여兩家後孫이累代蚤世하여因仍百年之後則寖以忘遠矣이라惟幸塵媒蠹蝕之餘에眞蹟이始出於二百餘年之後則殆天意라哀其節而不忍於終晦也라願得附見於碑文하야使義烈幷著함이此鄕人之志也라謹按其錄하니首言義士公言行志節하고自少卓異하여居喪之善鄕里稱之라壬辰之亂에公備戰具向賊陣할세夫人柳氏挽衣而哭曰君은病足이라當此搶掠之日에戰具하고欲何之요公曰安康에有知心友하니欲相面卽還이라하고遂直赴死戰場이라柳氏號泣率家人하여尋屍不得하고招魂而歸하여九日不食而死하다合葬于達林洞坐甲之原하다噫라夫死於忠하고婦死於烈하니節義成雙이輝暎古今이라惜乎라往蹟日遠하고故老無存하야卓節懿行이烟浸草埋하고使三綱具備之 天褒가獨及於沃溝李氏之一門하니於死者에何損焉이리요而世道後人之憾이當如何哉아玆並附之하니庶幾異日에採民風者得焉이라夫人貫瑞山이요參奉希春之女라是年八月日光靖又書

유명조선 고 충신학생 안동권공 유허비명 병서
임진왜란에 여러 고을이 산산조각 흩어지고 관찰사와 고을원님과 신하들이 모두 새처럼 쥐처럼 굴속에 숨어버렸다. 그런 때를 당하여 권공 휘복흥 같은 분이 있어 개연히 전쟁준비를 하여 가동을 대리고 동지 수십 인과 바로 달려가서 적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45년 후에 관찰사가 조정에 알리어 영조대왕께서 아름답다 칭찬하시고 특명으로 “유명조선 충신의사 권복흥지려”라 정표하고 고을사람들이 사당을 새워서 제사를 지내다가 국영으로 회철하다.
이에 서로 의론하여 돌을 깎아 유허비를 새울 때 나에게 비명을 지어 줄 것을 요구하는 지라. 아 ~ 국가에 난리가 있을 때는 봉강의 신하는 봉강에서 죽고 기적의 신하는 기적에서 죽는 것이 진실로 그 직분이라 만약 그런 직책이 없으면 비록 쥐처럼 바위굴속에 숨고 엎드려 성명을 보존한들 누가 옳지 안타 하리요, 그러나 공은 변방의 일개선비로 관원이거나 몸을 맡겨 책임도 없으면서 병으로 불편한 몸으로 적진에서 힘껏 싸우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충간과 의담이 흉중에 가득 찬 것이 아니다 하리요, 단지 원수의 적을 미워할 줄 알고 칼과 칼끝이 두려움을 보지 못함이라 다만 충의가 안으로 쌓이고 격노하여 죽고 사는데 개의치 아니함이라 아마 공부자가 말씀하신 정의의 죽음이라 지금까지 빛나고 또 빛나도다. 혹자가 당시의 화난이 왜적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데 일개의 몸으로 가동을 데리고 동지 수십 인과 늑대와 이리를 맞이하여 몸은 멸망하고 공은 이루었지만 흡사 성난 범의 소굴과 깊은 빙하에 뛰어들어 후회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드라 그러나 그 때를 당하여 수백 년 평화롭든 나라에 사변이 하루아침에 일어나서 소문만 듣고도 넋을 읽고 크고 작은 고을이 모두 문어저서 감히 그 적군 앞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니 마침내 왜적이 승승장구하여 흡사 무인지경을 들어오는 것과 같도다. 공의 마음속에 결심하되 이 왜적은 함께 하늘아래 살수 없다 만약 파리한 도적을 재거하고 흉한한 괴수를 재거한다면 오히려 족히 조국에 보답이 될 것이다. 그 옛날부터 마음속에 쌓이고 또 쌓인 충성과 격분이 차마 목숨을 아껴서 구차하게 욱어진 숲속에 새나 쥐처럼 숨어사는 것보다 싸우다 죽는 것이 이것이 그 분의 뜻 인즉 어찌 진실한 열렬장부가 아니리요 하물며 공의 죽음으로 인하여 충성과 의리를 서로 권장하고 인심이 더욱 힘을 써서 국가로 하여금 마침내 국토수복 업적을 거둔즉 공의 한번 죽음이 반듯이 격동하여 일으키지 아니해도 의병을 일으키는 조짐이 되었다. 이러한즉 공의 죽음이 국가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국가에서 조선국충신의사 권복흥지려라 정표함이 당연하도다. 향인이 감모하는 정성이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무궁하도다.
공의 자는 중원이요 영가인이요 고려태사 휘 행의 후손이라 중세에 종부시첨정 휘 산해 호는 죽림이라 단종복위를 육신과 같이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스스로 면치 못할 것을 알고 결연히 자진하다 그 국가를 위하여 한번 죽음을 결정한 것은 조상 때부터 그러하였다 고는 참봉인데 휘는 평이라 공은 경주북쪽 강동의 다산리 집에서 태어나다. 공이 어릴 때부터 말이 적고 침중하여 효도와 우애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바야흐로 전쟁터에 나아갈 때 모두가 공은 발병이 있어 어렵다 하니 공이 분연히 말하되, “나의발이 비록 병이 있으나 나의 마음만은 병들지 아니하였다. 나라에 임금이 피난을 가는데 발병이 있다고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음을 겁낼 소야”하고 힘껏 싸우다가 죽으니 시신을 얻지 못하고 남아있는 의관으로 초혼하여 장사를 치르니 마을뒷산 갑좌 언덕이라. 명을 지어 가로되.
오직 충성과 의리는 천성을 타고 낳다. 나의 발은 비록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지 않았다. 임금님이 피난을 가시고 칼날과 활촉만이 날아다닌다. 새처럼 날아가고 쥐처럼 숨으니 저것이 어찌 사람이 할 짓이요 공의 몸은 비록 죽었지만 공의 마음은 죽지 아니하였도다. 열렬한 그 빛이 물처럼 맑고 산처럼 푸르도다. 임금님이 들으시고 사랑하고 칭찬하여 문려에 유명조선국충신의사권복흥지려라 정표를 명하시다. 소라울림이 더욱 멀리 퍼져 마을빈터에 슬픔만 가득하내 한 조각 비를 세우기로 의론이 모두 같아 나의 지은 기명이 거짓이 아닐진대 각자로 새겨 무궁하게 보이리라.
    상지 십년 병오(1786) 4월  일
    숭의랑 전 행 사포서 별제 한산 이광정 찬
    방예손  상적 근서병전
부인 서산류씨 사절사적 병서
비문을 이미 다 짓고 넉 달이 지난 후 가을에 혈손 영조와 유생 이도국이 향중의 향교, 서원문자와 사림의 글을 가지고와서 한 장의 촛불에 그 으른 문서를 보이며 말하되, 이것이 이번에 도국씨 고적 중에서 얻은 것이다. 대게 이도국의 조상이 의사공과 여형제 동서지간이라 또한 한 동리에 살면서 그 일을 목격하고 손수 기록하여 후인에게 가르친 것이다. 불행하게 양가 후손이 누대로 소원하여 이로 인하여 백년 후까지 잠기여 이즌지 너무 멀도다. 오직 다행한 것은 먼지에 그을리고 좀치고 남은 진적이 비로소 이백년 후에 나왔으니 참으로 하늘의 뜻이 그 정절을 슬퍼하여 끝까지 어둡지 아니하도다. 원컨대 얻은 것을 비문에 부처 써서 충의와 정열이 함께 나타내는 것이 향인의 뜻이라 삼가 살펴보니 머리말로 의사공의 언행과 지절을 기록하고 어릴 때부터 남보다 뛰어나고 부모상을 당하여 효심을 다하여 고을에서 칭찬하드라.
임진의 난리에 공이 전구를 갖추어 곧 출발할 때 부인 류씨 옷을 붙들고 울며 말하되, “ 당신은 병족이라 지금 같은 난세를 당하여 전쟁준비를 갖추고 어디로 가는가!” 공이 말하되, “안강에 마음이 통하는 벗이 있는데 상면하고 돌아온다.” 하고 바로 달려가서 전장 터에서 죽으니 류씨 부인 울며 가인을 대리고 시신을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초혼하여 돌아와서 구일 불식하여 죽었다. 달림동 갑좌 언덕에 장사하다.
아 ~ 슬프다 남편은 충성으로 죽고, 아내는 열녀로 죽으니 정절과 충의가 상벽을 이루니 고금에 밝게 빛나도다. 애석하도다. 지난 자취가 너무 멀고 그때사람이 있지 아니하니 뛰어난 절의와 거룩한 행실이 풀밭에 연침하니 삼강구비의 천포(하늘이 내려준 포상)가 홀로 옥구이씨 일문에만 미치니, 아 ~ 죽은 자에게 무엇이 모자라서 그러 하리요 세상의 도리와 후인의 감회가 어떠하리요. 이에 아울러 기록하니 훗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을 얻을지어다. 부인의 관향은 서산이요 참봉 희춘의 여 이시다. 이해 팔월  일에 광정이 또 쓰다.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4世 忠烈旌閭記幷銘(충열정려기병명)』이조판서 홍양호 찬
耳溪集, 卷十七, 銘, 義士權公復興,烈婦瑞山柳氏旌閭銘。 a_241_299c
東都有義士。曰權復興。少病足。不良于行。萬曆壬辰之亂。奮身提戈。赴戰而死。其妻柳走尋屍莫之得。乃以遺衣招魂而歸。哭謂家人曰。夫死於鋒而失其屍。是吾罪也。何以立天地間。今將從死。可祔於衣履之藏。遂閉口絶食。九日而殞。方伯上其事。並其夫相先後旌其門。豐山洪良浩。題其閭曰。人有大倫。夫婦君臣。臣死於君。是謂成仁。壯夫則有。躄者與焉。妻死於夫。以身殉天。生不獲屍。瘞從其魂。三綱得二。亦有婦人。鷄林之野。東海之濱。惟忠惟烈。丹楔雙門。風雨凄凄。飛鳥哀鳴。山高海深。星輝日晶。邦人拜跪。聖主旌之。百世流芬。太史銘之。
上之二十二年戊午南至月
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堤學藝文
館大堤學知春秋館成均館事洪良浩謹撰

忠烈旌閭記幷銘(충열정려기병명)
義士權公復興」
烈婦瑞山柳氏旌閭銘」
東都有義士。曰權復興。少病足。不」
良于行。萬曆壬辰之亂。奮身提戈。」
赴戰而死。其妻柳走尋屍莫之得。」
乃以遺衣招魂而歸。哭謂家人曰。夫」
死於鋒而失其屍。是吾罪也。何以立」
天地間。今將從死。可祔於衣履之藏。」
遂閉口絶食。九日而殞。方伯上其事。並」
其夫相先後旌其門。豐山洪良浩。題」
其閭曰。」人有大倫。夫婦君臣。臣死於君。是謂」
成仁。壯夫則有。躄者與焉。妻死」
於夫。以身殉天。生不獲屍。瘞從其魂。」
三綱得二。亦有婦人。鷄林之野。東海之濱。」
惟忠惟烈。丹楔雙門。風雨凄」
凄。飛鳥哀鳴。山高海深。星輝日晶。」
邦人拜跪。」
聖主旌之。百世流芬。太史銘之。」
上之二十二年戊午南至月崇祿大夫」
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事弘文館大堤學藝文館大堤」
學知春秋館成均館事洪良浩謹撰」

忠烈旌閭記幷銘(충열정려기병명)
忠臣義士權公復興。충신의사 권공복흥
烈婦瑞山柳氏㫌閭記幷銘。열부 서산류씨 정려기 병명
東都有義士。曰權復興。경주에 의협심이 있고 절의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은 권 씨요 휘는 복흥이라 하드라.
少病足。不良于行。젊어서는 발병으로 행보가 불량하셨다.
萬曆壬辰之亂。만력으로 임진년(1592)의 난에
奮身提戈。赴戰而死。창의하여 창을 잡고 전쟁터에 나아가 순국하셨다.
其妻柳氏走尋屍莫之得。그의 아내 류씨께서 달려가 시신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乃以遺衣招魂而歸。이에 고인의 저고리로 혼을 불러서 돌아와 빈소를 차리고
哭謂家人曰。통곡하면서 가족과 친척에게 말하되
夫死於鋒而失其屍。是吾罪也。“남편은 전쟁터에서 순국하고 그 시신조차 읽어 버리니, 이는 모두 나의 죄로다.”
何以立天地間。어찌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이런 일이 있을까!
今將從死。可祔於衣履之藏。“장부 따라 이제 죽거든, 남편의 혼령 곁에 함께 묻어주시오” 하고
遂閉口絶食。九日而殞。곧 입을 닫고 절식한 지, 아흐레 만에 운명하셨다.
方伯上其事。관찰사가 그 일을 나라에 상고하여
並其夫相先後旌其門。그의 남편과 함께 서로 앞뒤로 충신과 열려 문을 정표 하셨다.
豐山洪良浩。題其閭曰。풍산 홍량호 정려 명을 지어 가로대
人有大倫。夫婦君臣。사람이 큰 인륜이 있음은 부부와 군신이 아닌가!
臣死於君。是謂成仁。신하가 나라를 위해서 죽으면 곧 인을 이루었다고 말 하내
壯夫則有。躄者與焉。여기 한 장부가 계시온데 불편한 다리로 참전하셨다가 순국하셨고
妻死於夫。以身殉天。아내가 남편 따라 한 몸 돌보지 않고 순절하셨네!
生不獲屍。瘞從其魂。살아서 시신 얻지 못했지만, 그 영혼 따라 한 무덤에 모셔졌고
三綱得二。亦有婦人。삼강(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가운데 이강을 얻은 건 또한 열부가 계셨도다.
鷄林之野。東海之濱。경주의 들판과 동해의 물가에
惟忠惟烈。丹楔雙門。오직 충신과 열녀로서 붉은 쌍 문이 빛나는구나!
風雨凄凄。飛鳥哀鳴。바람 불고 비 내려 쓸쓸하니 나는 새도 슬피 울고
山高海深。星輝日晶。산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으며 별같이 빛나고 해같이 밝도다.
邦人拜跪。  聖主旌之。나라사람은 꾸러 앉아 절을 하고 어진임금은 충신과 열녀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했도다.
百世流芬。太史銘之。향기로운 명예를 몇 천 년이 흘러도 전해지도록 태사(홍양호)가 정려 명을 짓다.
 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 事洪良浩謹撰。숭록대부 원임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 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 관 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 홍양호 근찬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4世 丹溪書堂忠烈祠常享祝文(단계서당충렬사상향축문)
維歲次干支             後學某官某 敢昭告于
義士五慕齋權先生伏以 學見大義 忠貫白日 隻手扶綱 萬古風烈 玆値季春 謹以淸酌 牲幣用伸 常薦尙 饗
의사오모재권선생 삼가 엎드려 올립니다.  학문에 대한 견해는 중대(重大)한 義理가 있었고 忠誠은 해를 관통할 정도이시고 외로운 처지에 倫綱을 부지하여 큰 명성과 훌륭한 공적이 世上에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이에 계춘을 맞이하여 삼가 맑은 술과 희생과 폐백을 진설하여 예를 올리오니 바라건대 흠향하시옵소서.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4世 達林齋記
月城之北五十里多山東數武地得達林焉山不高而秀麗水不深而紺淸鬱蔥佳氣盡萃于此中有坐甲而崇四尺者卽五慕齋先生永嘉權公諱復興夫人瑞山柳氏之墓也公出竹林先生而氣類相傳忠孝大節已杯樸於孺筮之日讀書至古人殉節處未嘗不廢書而歎事親得志軆之養而及沒泣血廬墓博學多聞慷慨有志節故公之名重於世執徐之難公年纔三十八挾弓矢佩劒率家僮數人勇銳出門劒虹橫肚矢復于眉凜乎若不可犯者夫人柳氏心會而挽衣泣曰戰具欲何之公謬曰安康有知心友欲相面卽還遂挺身上馬馳往釜山遇賊於多大浦鷹揚疾戰劒折矢盡遂死之柳夫人聞報幼男子糚蒼黃馳赴尋死不獲乃以遺衣招魂而歸不食九日而死葬與之同日合堋噫夫死於忠婦死於烈節義成雙輝暎古今於是事聞于  朝而  命棹楔焉蹟記于石而表遺墟焉議發于鄕而奉畏壘焉然後公之忠夫人之烈已日揭而星耀矣四時和氣之薦二仲香煙之升盖秩秩乎可觀而西林運訖毁籍遍及忠烈明宮化爲茂草而免葵燕麥祗自動搖於春風則雲仍之寓慕益無地乃於丙辰春世嫡憲章氏謀于諸族就墓下少西營立南北兩室而中爲堂名之曰達林齋舍旣成屬一方士友而落之令中久記其事中久竊惟先賢經過之地一水一石猶爲後人之所愛護况公杖屨之地衣舃之藏泉石尙帶光華松籟如聽音旨者乎憲章氏乃克追先志賁飾溪山使一區雲物煥然改觀亦可謂不忘其所本而善於繼述者矣雖然齋舍之設豈徒爲羨門之宿齋花樹之然遊已乎將使遊於斯息於斯者因棟宇之新而致肯構之實講先生之忠慕夫人之烈使遺風餘韻愈久而無替焉則是齋也將爲忠烈之所托而永爲永嘉氏之靑氈矣不亦休哉
 著雍敦牂黃花節通訓大夫前行弘文舘副校理如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舘記 注官西學敎授驪江李中久記

達林齋記
月城之北五十里多山東數武地에得達林焉하니山不高而秀麗하고水不深而紺淸이라鬱蔥佳氣가盡萃于此라中有坐甲而崇四尺者는卽五慕齋先生永嘉權公諱復興과夫人瑞山柳氏之墓也라公은出竹林先生而氣類相傳하여忠孝大節이已杯樸於孺筮之日이라讀書至古人殉節處에未嘗不廢書而歎이라事親에得志軆之養하고而及沒에泣血廬墓하다博學多聞하고慷慨有志節이라故로公之名이重於世라執徐之難에公이年纔三十八이라挾弓矢佩劒하여率家僮數人하고勇銳出門하니劒虹橫肚하고矢復于眉하니凜乎若不可犯者라夫人柳氏心會而挽衣泣曰戰具하고欲何之요公謬曰安康에有知心友하니欲相面卽還이라하고遂挺身上馬하여馳往釜山하고遇賊於多大浦하여鷹揚疾戰하다가劒折矢盡하여遂死之하다柳夫人이聞報하고幼男子糚하여蒼黃馳赴하여尋死不獲이라乃以遺衣로招魂而歸하여不食九日而死하니葬與之同日合堋하다噫라夫死於忠하고婦死於烈하니節義成雙에輝暎古今이라於是에事聞于  朝하야而  命棹楔焉하고蹟記于石하여而表遺墟焉하고議發于鄕하여而奉畏壘焉하다然後에公之忠과夫人之烈이已日揭而星耀矣이라四時和氣之薦과二仲香煙之升에盖秩秩乎可觀이러니而西林運訖하여毁籍이遍及忠烈明宮하야化爲茂草라而免葵燕麥에祗自動搖於春風일세則雲仍之寓慕益無地라乃於丙辰春에世嫡憲章氏가謀于諸族하야就墓下少西에營立南北兩室하고而中爲堂名之曰達林齋舍라旣成에屬一方士友而落之하고令中久로記其事하다中久竊惟先賢經過之地라一水一石가猶爲後人之所愛護는况公杖屨之地와衣舃之藏이리요泉石尙帶光華하고松籟가如聽音旨者乎아憲章氏乃克追先志하여賁飾溪山하나使一區雲物이煥然改觀이라亦可謂不忘其所本하야而善於繼述者矣라雖然이나齋舍之設이豈徒爲羨門之宿齋와花樹之然遊已乎아將使遊於斯하고息於斯者는因棟宇之新하여而致肯構之實하고講先生之忠하고慕夫人之烈하야使遺風餘韻으로愈久而無替焉하라則是齋也將爲忠烈之所托이오而永爲永嘉氏之靑氈矣이라不亦休哉아
 著雍敦牂黃花節에通訓大夫前行弘文舘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舘 記注官西學敎授驪江李中久記

달림재기
월성의 북쪽 다산동쪽 얼마머지 않은 곳에 달림산을 얻으니, 산은 높지 아니해도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아니해도 푸르고 맑으며 울총한 아름다운 정기가 모두 이곳에 모였도다. 이 가운데 갑좌 언덕에 4척 봉분은 곧 오모재선생 영가권공 휘 복흥과 정렬부인 서산류씨의 묘이다.
공은 죽림선생의 후손으로 기류가 서로 전해서 충효대절이 이미 어릴 때부터 몸에 배여 글을 읽다가 옛 사람의 순절한 조목에는 아닌 게 아니라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하드라.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뜻과 몸에 맞게 봉양하고 돌아가시매 피눈물을 흘리며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드라. 학식과 견문이 매우 넓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정의심이 북받치어 슬퍼하고 한탄하며 지조와 절개가 있는 고로 공의 명성을 세상에서 중하게 하드라.
집서(임진년)의 난리에 공의 나이 삼십 팔세로 창의하여 활과 화살을 메고 칼을 차고 가동수인과 용감하게 문을 나서니 칼은 빛나고 활과 화살은 가장자리에 정리되어 늠름한 기상이 아무도 범하지 못 하드라. 부인 류씨 진정으로 옷을 붙들고 울며 말하되, “전쟁 준비를 갖추고 어디로 가느냐?” 공이 속여 말하되, “안강에 마음통하는 친구와 상면하고 돌아온다.” 하고 곧 몸을 던져 말에 올라 부산으로 달려가서 다대포에서 적을 만나 용감하게 힘껏 싸우다가 칼은 꺾어지고 활살은 다하여 순절하였다. 류씨 부인이 전사 통보를 듣고 남자로 변장하여 허둥지둥 달려가서 시신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이에 유의로 초혼하여 돌아와 구일 불식하여 죽으니 같은 날 함께 묻었다.
아~ 슬프다!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부인은 열녀로 죽으니 정절과 의리가 두 개로 이루니 고금에 밝게 비추도다. 이에 사적을 조정에서 듣고 정려를 명하니 공적을 돌에 새겨 유허비를 세우고 향중에서 발의하여 위폐를 사당에 높이 받들도다. 그런 후에 공의 충의와 부인의 정렬이 이미 해와 같이 높고 별같이 빛나고 사철에 화목한 분위기가 이어지도다. 봄가을 시제에 향불연기가 올라올 때면 대게 질서정연한 모양이 가히 볼만했는데, 유교운수가 다하여 회철이 명궁에서 충렬사에도 미처 풀밭이 되었도다. 토기는 해바라기 꽃밭에 뛰어 놀고 제비는 보리밭에 지저길 때 시원한 봄바람이 불면 후손의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리라.
이에 병진년 봄에 주손 헌장씨와 모든 후손이 의논하여 산소아래에서 조금서쪽에 남북 두체를 세우고 가운데 당을 세워 당명을 달림재사라 하다. 낙성식을 할 때 많은 선배들이 모였다. 중구로 하여금 달림재 기문을 부탁하기에 중구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선현의 지나가신 땅이라 물 하나 돌 하나도 후인들이 사랑하고 보호해야 하거늘, 하물며 공의 걸어 단이든 땅이고 의석이 뭍인 곳이라 샘가에 돌은 항상 맑은 빛을 띠고 소나무 바람소리는 공의 음성이 들리는 같도다. 헌장씨 이에 정성껏 선조의 뜻을 추존하고 분발하여 계곡과 산을 아름답게 꾸미니 한 골짝 풍경과 빛나는 자연의 경관을 고치니 역시 가히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선조의 뜻을 잘 받들었도다. 비록 그러나 재사의 시설이 어찌 넓은 문중에 잠자는 집과 화수의 놀이 터 뿐 이리요 장차 여기에 놀고 여기에 쉬는 자는 동우의 새로움에 인하여 근구의 실상을 이루고 선생의 충의를 강론하고 부인의 정렬을 사모하여 전해온 풍습과 남아있는 운치로 오래오래 침체함이 없은즉 이 재실은 장차 충렬의 본보기가 되고 영가씨의 대대로 벼슬자리가 이어지리라. 또한 아름답기만 아니리요.
 무오년(1918) 9월 9일에 통훈대부전행홍문관부교리지제 
 교겸경연시독관추추관기주관서학교수 여강 이중구 기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4世 忠臣義士五慕齋權公墓碑銘
忠臣義士五慕齋權先生之墓
配貞烈夫人瑞山柳氏合窆
東都北五十里多山村負甲之麓有封若堂世傳以爲壬亂忠臣義士五慕齋權先生招魂之葬也以貞烈夫人柳氏祔焉余嘗過之不覺髮立而竦然起敬嗚呼偉矣公諱復興字仲元號五慕齋小有至性孝悌之行稱於鄕里忠義之志根於天賦每讀書忠義之處輒感激流涕博學多聞忼慨有志節故公之名重於世  宣廟壬辰之亂列邑瓦解四方波迸公乃罄竭家産召募義勇倡言於衆曰昇平百年兇鋒已迫苟不挫其鋒銳則勢必鴟張禍將不測有能奮勇而先進絶断一路則吾當以身先之可乎遂提劒上馬與麾下同志數十人即向釜山路至多大浦會盟于多大浦僉使尹興信將軍幕下遇賊數萬躍馬大呼賊衆披靡所斬殺數十級劍折矢盡賊勢益熾遂力戰而殉節實四月二十八日也夫人柳氏聞變率家僮跋涉趍多大尋公屍不得焉遂以衣領招魂而歸乃以一子囑諸家人曰此四歲也不乳可生吾豈忍獨活絶食九日而殞家人以公冠舃倣古矢復而葬之又依夫人遺言同穴焉即達林谷西麓也忠義之卓異今古罕儔而及至百五十年丁巳道臣朴公文秀上啓  英廟聞而嘉之特  命旌閭道內諸賢  僉議詢同立祠尸祝因以爲忠烈祠云刱建即  英廟庚申也其後甲寅始得柳氏事巡相李公祖源狀啓  正廟嘉納幷  令旌門訪其後孫侈以食物  命給復雙旌幷峙丹桷璀璨猗歟酬忠之  典莫不欽嘆鄕人不忍公之湮沒于後世鍊石竪之旌閭故參判洪公梓以其時州尹識而銘之徵士小山李公光靖撰遺墟碑銘崇錄大夫原任吏曹判書洪公良浩撰忠烈旌閭記幷銘通政大夫行敦寧府都正泗水睦公萬中撰傳記慶州府尹錦城林公處鎭撰跋文公實高麗太師諱幸之後入我  朝有諱希正  贈左議政諡文靖後二世有諱山海字德甫號竹林官宗簿寺僉正  景泰丙子與六臣同時殉節  贈吏曹判書  諡忠愍於公五代祖也夫人權氏府院君景惠公專之女  顯德王后之兄也弟壽海率子若姪移來慶州仍世居焉竹林公生諱哲孫文判官於公爲高祖曾祖諱敏保功部將祖諱舜卿不仕考諱平參奉公以嘉靖乙卯生萬曆壬辰立節壽三十八有一子䥍官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生益賢友賢益賢無嗣以次子友賢承重有子有經以經大經稱經有經生國重機重國重生達相達秀達相生應璿應璣應玉應七應璿生榮祖見今勝冠數十人不能盡錄應璿等以墓道闕麗牲屬不佞爲銘不佞於公爲外傍裔義不敢辭遂據公遺事顚末如右銘曰
韋布何職任之可責而必死之跛躄何擊刺之可能而必死之  主辱而當死邦骳而當死當死不死生不如死是庸急病于國忘疾于身堂堂乎夫子之一死嗚呼夫死於忠婦死於烈其死也萬古不死刻詞貞珉流芳永世
 前禦侮將軍  世孫翊衛司衛率  驪江  李憲洛  謹撰
 檀紀四三四五年壬辰閏三月  日  謹竪

충신의사오모재권공묘비명
충신의사오모재권선생지묘
배정열부인 정렬부인(貞烈夫人)조선시대, 행실이 바르고 절개가 굳은 부인에게 내리던 칭호

서산류씨합폄
경주50리 북쪽 다산마을 갑좌 산기슭에 큰 봉분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란충신의사 오모재 권선생을 초혼하여 장사하고 정렬부인 류씨를 함께 합장하였다 하드라 내가 일찍 이곳을 그냥 지날 때면 자연히 머리끝이 서고 두려워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다. 아~ 위대하도다.
공의 휘는 복흥이요 자는 중원이요 호는 오모재이다. 어려서부터 본래 천성이 어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척과 이웃에 공경하는 행동이 온 고을에 칭찬이 자자하고 충성과 의리의뜻이 천성을 타고 낳다하고 매양 글을 읽을 때 충의의 조목에 문득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널리 배우고 견문이 많아서 그릇됨을 분하게 여기며 굳은 절개가 있으므로 공의 명성을 세상에서 존중 하드라.
선조임진(1592)왜란에 여러 고을이 산산조각 무너지고 백성은 사방으로 파도처럼 흩어져 달라나는데 공은 이에 가산을 모두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고 의용병을 모집하여 군중에게 말하되 “수백 년 동안 평화롭든 나라에 왜적의 칼날이 이미 급박하니 진실로 그 선봉을 꺾지 않으면 적군의 세력이 위세를 부리고 방자하여 화난을 장차 예측하지 못합니다. 용기를 분발하여 먼저 나아가 한 길을 절단합시다. 내가 마땅히 몸으로 앞장서겠노라”하고 드디어 칼을 빼어들고 활을 메고 말에 올라 휘하동지 수십 인과 곧장 부산 길로 향하여 다대포에 이르러 다대포첨사 윤흥신 윤흥신(尹興信)- 윤흥신은 파평인으로서 인종 때의 권세가인 윤임(大尹)의 아들이며, 을사사화 당시6세로 화는 면하였으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1577년(선조10년) 아버지 윤임이 신원되어 벼슬에 나가 진천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란 때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역전 끝에 순사하였다고 한다. 임진란 당시의 기록인 『징비록』에 『다대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하였고 『재 조번방지(再造蕃邦志)』"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첨사 윤흥신이 힘써 싸우다가 동년 4월 28일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진란이 끝난 선조37년(1604) 6월25일에 공표된 선무공신록권에도 원종1등 공신에 올라있다.
장군 막하에 회맹하여 적군 수만을 만나 말을 달려 크게 소리치니 적중이 흩어지고 스러지니 참살한 머리가 수십 급이라 하드라 칼은 꺾어지고 화살은 떨어지고 적군이 더욱 치열하여 힘껏 사우다가 순절하니 실로 4월28일이라 부인류씨는 변을 듣고 친척과 가동을 대리고 산 넘고 물 건너 다대포로 달려가서 공의 시신을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부득이 옷깃으로 초혼하여 돌아와서 이에 한 아들을 친척에게 부탁하되 “이제 4살이라 젖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차마 혼자 살 리요”하고 9일 절식하여 운명하다. 가인이 공의  의관과 신을 옛날 법에 따라 화살과 화살 통을 함께 장사하다. 또한 부인의 유언에 의하여 동혈에 합장하니 즉 달림곡 서쪽언덕이라 충성과 정렬이 남보다 뛰어남이 고금에 누구와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드물도다.
150년 후 정사(1737년 영조13년)에 경상관찰사 박문수가 상계하니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 아름답다 칭찬하고 특별히 충신이라 정려를 명하니 도내 제현의 의논이 모두 같아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다. 인하여 충렬사라하고 1740영조16년에 창건하다.
그 후 갑인(1794년 正祖18년)에 류씨의 사적을 순찰사 이조원 이조원(李祖源)- 1735(영조11)∼1806(순조6)조선의 문신. 자는 현지(玄之), 호는 판교(板橋), 진보(鎭輔)의 아들. 1768년(영조44)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71년 정언이 되고, 1786년(정조10) 의주부윤, 1789년 이조참의를 지냈다. 1798년 동지부사, 이듬해 동지사로 각각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좌참찬· 한성부 판윤, 1800년(순조즉위) 판의금부사·우참찬, 이듬해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01년(순조1)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대항하다가 유배, 1805년 풀려나왔다. 글씨는 당대명필로 이름났다. 죽은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 장계 장계(狀啓)- 예전에,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는 일이나 그런 문서를 이르던 말,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다
하니 정조께서 아울러 왕명으로 열녀문을 득하여 정표하고 그 후손을 찾아서 식물을 후하게 내리시고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주라 명하시다.
두개의 정려가 산같이 우뚝 솟아 붉은 서까래가 빛나고 빛나도다. 아~ 나라에서 임금님이 충신과 열녀에게 내리는 은전이 이보다 더 흠탄함이 없도다. 고을사람이 차마 공의 행적이 후세에 인몰될까 염려하여 돌에 새겨 정려를 세우고 옛날 참판 홍재 홍재(洪梓)- 1707년(숙종33)∼1781년(정조5).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양지(養之). 구조(龜祚)의 아들이다. 1753년(영조29) 시직(侍直)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54년 정언‧ 호남어사‧ 부교리‧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756년 헌납, 1757년 수찬으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보덕을 거쳐 이듬해에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1762년 승지가 되었고, 1769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5년 한성부좌윤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을 지냈다. 문필에 능하여 북청의 〈이지란신도비(李之蘭神道碑)〉와 경주의 〈삼강묘비(三綱廟碑)〉가 있다.
께서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명(銘)을 짓고 징사(徵士) 징사(徵士) 학식과 덕행(德行) 혹은 절행(節行)이 뛰어난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천거(薦擧)되어 조정에 나아오는 것. 또는 그 선비를 말함.
소산 이광정 이광정(李光靖)- (1714년~1789년)은 조선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 자는 휴문(休文), 호는 소산(小山)이며, 퇴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178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별제에 올랐으며, 사후 참판에 추증되었다. 친형인 이상정과 함께 경상도 남인(南人) 계열의 중심이 되었다. 1792년에 이광정의 아들 이우가 소두(疏頭)가 되어 1만 57명이 연명한 사도세자의 신원(伸寃) 상소인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 유허비명을 찬하다 숭록대부 원임 원임(原任)- 예전에, 고을의 ‘원’을 높여 이르던 말
 이조판서 홍양호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4)~ 1802(순조2).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단양군수 중성(重聖)의 손자이며 진보(鎭輔)의 아들이다. 175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수찬·교리를 지낸 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급제했다. 1777년(정조1) 홍국영의 세도정치에 따른 횡포가 심해지자 경흥부사로 있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인 1781년 한성부우윤·대사간을 지내고 이듬해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1794년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가 되었고, 1799년 양관대제학을 겸임했으며, 1801년(순조1)에는 판중추부사도 겸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국조보감國朝寶鑑〉·〈갱장록羹墻錄〉·〈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을 주관했으며, 중국에 다녀오면서 수용한 고증학을 보급했다.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는 치산(治山)과 치수(治水)에 힘썼는데, 통신사 일행에게 부탁하여 들여온 일본의 벚나무를 서울 우이동에 심기도 했다. 문집인 〈이계집〉을 비롯하여 〈육서경위六書經緯〉·〈군서발배群書發排〉·〈격물해格物解〉·〈칠정변七情辨〉·〈해동명장전〉·〈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흥왕조승興王肇乘〉·〈삭방습유朔方拾遺〉·〈북새기략北塞記略〉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글씨도 잘 써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특히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께서 충렬정려기명병서를 찬하고 통정대부 행 돈령부 돈령부(敦寧府)- 조선시대 왕실과 가까운 친척을 위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도정 도정(都正)- 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 돈녕부(敦寧府)· 훈련원(訓鍊院)의 정3품 당상관직
 사수 목만중 목만중(睦萬中)- 1727년(영조3)∼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 아버지는 목조우(睦祖禹)이다. 1759년(영조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6년(정조10) 도사(都事)로 재직 중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돈령도정(敦寧都正)에 임명되었다. 뒤에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저서로는 《여와집》이 전한다.
이 전기를 찬하고 당시 경주부윤 금성 임처진이 발문을 찬하다.
공은 실로 고려태사 휘 행의 후손이라 아조에 들어와서 휘 희정은 증 좌의정이요 시호는 문정이요 후2세에 휘는 산해(山海) 권산해(權山海)- 권산해(權山海): 1403~1456 조선중기의 문신, 단종 때의 의인(義人),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다. 1440년(세종 22) 창덕궁 록사(錄事) 또 주부(主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54년(단종 2) 통훈대부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올랐으나, 1455년 단종의 손위(遜位) 이후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생사육신(生死六臣)들과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자 순절하니 공은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죄적에 오르고 자손은 백년금고(百年禁錮)하여 사변(徙邊)하였다. 1789년(정조 13) 복관신원(復官伸寃)되고 1791년(정조 15)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정려(旌閭)되고 1885년(고종 22년)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되어 예천 호명 노봉서원(魯峯書院)에 봉향하며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되었다.
     • 『장릉지(莊陵誌)』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안동시사』(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요 자는 덕보요 호는 죽림이요 벼슬은 종부시첨정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조선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집기록하고 종실(宗室)의 잘못을 조사 규탄하는 임무를 맡아보던 관청. 1401(태종1)년에 전중시(殿中寺)를 고친이름으로, 1864(고종1)년에 종친부(宗親府)에 통합되었다.
이라 경태 경태(景泰)- 명나라 경태제의 연호이다.
병자년(1456)에 육신 육신(六臣)- 조선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잡혀죽은 여섯 명의 충신, 곧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말한다.

과 동시에 순절하니 증 이조판서요 시호는 충민이요 공에게 5대조라 부인은 권씨요 부원군 경혜공 휘 전의 따님이요 현덕왕후의 형이시다.
동생 사정공 휘 수해는 아들과 조카(철손)를 대리고 경주로 이사를 왔어 인하여 대대로 살았다. 죽림공이 낳으신 휘 철손은 문과 급제하여 판관이니 공에게 고조할아버지요 증조할아버지의 휘는 민이요 보공부장이라 할아버지의 휘는 순경이요 출사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휘는 평인데 참봉이라 공은 가정 가정(嘉靖)- 명나라 가정제의 연호(元号)이다.
을묘(1555년明宗10년)에 태어나고 임진(1592년)에 입절하니 38세라 한 아들이 있으니 지(䥍)요 벼슬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이요 익현과 우현을 낳으니 익현은 후사가 없고 차자 우현으로 승중하다. 아들에 유경, 이경, 대경, 칭경이라 유경이 국중, 기중을 낳고 국중이 달상, 달수를 낳고 달상이 응선, 응기, 응옥, 응칠을 낳고 응선이 영조를 낳다. 이제 보니 후손이 수십 인이라 다 기록 못한다. 응선등이 묘도에 비석이 없는 고로  재능도 없고 바르지도 못한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니 공의 외방후손이라 의리상 사양도 못하고 마침내 공의 유사에 의거하여 전말을 우와 같이 쓴다. 명왈(銘曰)
벼슬도 없이 무슨 직분과 책임으로 반드시 죽기로 하였는가?
다리를 저는 사람이 적을 칼로 찌름이 가능하다고 반드시 죽기로 하였는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여 욕을 보고 있으니 사워서 죽음이 마땅하고 마땅히 죽어야 하는 곳에 살아서 죽지 않은 것은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다.
여기 한 장부는 나라가 병든 것을 급하게 여기고 자기 몸 병든 것을 잊어버리니, 당당하게 공부자 공부자(孔夫子)- ‘공자’를 높여 이르는 말
의 한번 죽는다는 말씀처럼 정의의 죽음이로다.
아~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남편을 위하여 열녀로 죽으니 그의 죽음은 만고에 죽지 안이 함이로다.
사연을 비석에 새겨 명예로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노라.
 전 어모장군 어모장군(禦侮將軍)- 조선시대, 정삼품 당하관의 무관품계
 세손 세손(世孫)- 조선시대 다음왕위를 이을 왕자의 맏아들,
익위사위수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 조선시대, 왕세자를 곁에서 모시며 호위를 맡아보던 관아
 려강이헌락 이헌락(李憲洛)- 1718년(숙종 44)∼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순(景淳), 호는 약남(藥南). 농재 이언괄(聾齋李彦适)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신중(李愼中)이고,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최덕기(崔德基)의 딸이다. 권희(權僖)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744년(영조 20)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1748년(영조 24) 학행으로 천거되어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섭정할 때, 이조(吏曹)에 명하여 유명한 선비를 뽑아 계방(桂坊: 世子翊衛司)에 충원하도록 하자, 첫 번째로 선발되어 위수(衛率)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평양봉사(平壤奉事)를 거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를 지냈다. 1766년(영조 42)에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내고, 1776년(영조 52)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를 거쳐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함창현감(咸昌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약산(藥山) 남쪽에 서재를 짓고 천석(泉石)으로써 스스로 즐겼다. 문집으로 1850년에 후손 이경희(李景羲)가 편집‧간행 한 《약남집(藥南集)》이 있다.
 삼가 지음
 단기4345년 임진 윤3월  일 삼가 세움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25世 折衝將軍 墓竭銘
前面大字: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安東權公之墓
碑文:
公의諱는䥍요字는器世요姓은權氏니系出安東이라高麗大相太師諱幸爲始祖라至十世에諱至正은佐尹이요是爲派祖라歷三世에連五世顯達하다諱粹는文刑部尙書요諱奕은文祗侯요  贈吏參이요追封永嘉君하다諱用一은文侍中이요  贈參贊이요諡僖敬이다諱希正은糾正이요 贈左相이요諡文靖이다諱軺는文判事요號松皐니麗季節臣이라再傳諱山海는宗簿寺僉正이요  景泰丙子에與六臣同時殉節하야  贈吏判이요諡忠愍이며享雲谷魯峯兩院하고世稱竹林先生이라於公에間六世라五代祖諱哲孫은文判官이요實慶州肇基之祖也라高祖諱敏은部將이요曾祖諱舜卿이요祖諱는平이요參奉이라考諱復興이요號五慕齋라壬亂奮義殉國하여降棹楔하고享忠烈祠하다妣曰瑞山柳氏이며參奉希春之女라親尋夫屍不得하고九日絶食自盡하니旌其閭하고給食復戶하다. 宣廟己丑에生公于茶山里第하니以無妹獨身으로年甫四歲에父旣殉國하고母亦殉從하니竟抱罔極孤露之限하고子子成長하여欲報倭敵父讐하야諸子兵書를專心究賾하고不意外慕라適時旅軒張先生의淹留立岩일세往拜師事하다連値世故杌隉하여杜門守雌하고孝思尤篤하야爲親忠烈하야築五慕齋하니有記文하다又朝夕으로敕勵于子姓曰汝曹는世世積誠하여闡發吾父母之忠烈也라丁寧한遺命이至今家傳口誦이라  仁廟丙寅에登武科하여累蒙品除하니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하다以忠亂餘烈로家勢不振하야文獻沉湮하니孰不嗟傷也哉리오墓達林負子原에配曰淑夫人月城李氏니墓는失傳이요曰淑夫人烏川鄭氏의墓는與公連墳이라育二男二女요男長益賢은有二子二孫에俱無嗣하고次友賢이라女月城李光徵月城崔以升하다友男에有經以經大經稱經라有男國重畿重이요以男에興重任重이라大의男에道重弼重이라稱의男에星重厚重汝重이다以下繁不錄이라於乎라公은以忠烈之肖胤으로洞曉兵書하고况遊大德之門하여立揚而位至三品이라然距今若四百年之久에而遙遙玄玄하여影響無存하니便作杞宋之嘆이라賢仍이積世齎恨하야累擬顯刻이라而未果也러니及今俊哲諸彦이繼述先志하야石旣伐에胃孫純寬이與其族叔赫文과及門內七八人으로並造山庄하여出示公遺事曰先父祖積誠未遑이나若及今不圖면  又未知何待歲月이라策起微衷하니願族祖는俾惠一言하야勿爲溢美而及忝이라辭氣愿款하여不能終辭라乃曰公蹟之潛藏者라自此闡發其光한則信顯晦之有時也라何嘗有遲速之怨尤也哉리요遂不量分하고力摭其遺事하야略叙如右라系之以銘曰 
忠節之世에父而忠하고母而烈하니扶三綱之懿閥也라有師承亦立揚하니爲人祖之大鉢也라於乎其不顯哉라兟兟之螽羽가宜必永達也라
 黑羊仲春宗後孫權憲祖  謹撰
 癸未三月  日 竪碣

절충장군 묘갈명(25세 휘 지)
前面大字: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안동 권공지 묘
碑文:
공의 휘는 지요 자는 기세요 성은 권씨니 본관은 안동이라 고려 대상 태사 휘 행이 시조라. 십대에 이르러 휘 지정은 벼슬이 좌윤이니 이분이 파조이시다. 삼대를 지나서 연이어 오대로 현달하니 휘는 수며 문과이고 형부상서요, 휘의 혁은 문과이고 중문지후며 증 가선대부 이참이며 영가군에 봉하시다. 휘의 용일은 낭장 문하시중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참찬 추밀원사 시호는 희경이요, 휘의 희정은 문과이고 감찰규정이며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시호는 문정이요, 휘 초는 문과이고 판제용 감사이며 호는 송고이며 고려 말 절신이라. 두 대를 내려가서 휘 산해는 종부시첨정으로 경태 병자년에 육신과 같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동시에 순절하여 증 이조판서이며 시호는 충민이라. 운곡서원, 노봉서원 양원에 배향하다 세상에서 죽림선생이라 하도다. 공에게 육대사이에 오대조 휘 철손의 벼슬은 판관이라 이분이 경주 입향조 이시다. 고조의 휘는 민이요 보공부장이며, 증조의 휘는 순경이요, 조의 휘는 평이니 참봉이다. 고의 휘는 복흥이요 호는 오모재로 임란에 분의 순국하여 유명 조선국 충신 권복흥지려라 정려를 명하고 향 충렬사하다. 비는 서산류씨니 참봉 희춘의 여이시다. 친히 부군의 시신을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구일 불식하여 자진하니 정조계서 가납하시고 정려를 명하고 식물을 하사하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라 명하였다. 선묘 기축년에 다산 집에서 출생하다. 무매독신으로 나이 넷 살에 아버지는 이미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고 모친 또한 남편 따라 죽으니 마침내 어버이를 읽은 자식이라 망극한 한을 품고 혈혈 성장하여 일구월심 왜적은 아버지의 원수라 갑기로 맹세하고 제자병서를 전심으로 연구하여 출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 때 여헌 장현광 선생이 입암에 오래 머무는지라 가서 배알하고 스승으로 섬기었다. 연이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에 세상이 어수선하고 두려워 문을 닫고 나가지 아니하고 부모생각 간절하여 부모의 충렬을 위하여 모모재를 짖고 기문을 달다 또한 조석으로 자손에게 훈계하여 가로대 “너희들은 대대로 정성을 다해 네 부모의 충렬을 천발하라” 간절한 유명이 지금도 가전으로 구송되고 있다. 인조병인에 등과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정삼품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까지 지내다. 환난의 여독으로 가세가 부진하여 문헌이 전하는 것이 없으니 누군들 탄식하지 아니 하리요, 묘는 달림동 자좌 언덕이라. 배위는 숙부인 월성이씨고 묘는 실전이요, 왈 숙부인 오천정씨요 묘는 공의 묘와 연분이라. 이남 이여를 기루다 남장에 익현은 두 아들과 두 손자가 있는데 모두 무후하고 차자에 우현이라 딸은 월성 이광징과 월성 최이승에게 각각 시집갔다. 우현의 아들에 유경, 이경, 대경, 칭경이라 유경의 남에 국중, 기중이고 이경의 남에 흥중, 임중이고 대경의 남에 도중, 필중이고 칭경의 남에 성중, 후중, 여중이라 이하는 번거로워 다 기록 못한다. 아~ 공은 충렬을 닮고 이어받아 병서에 환히 밝아 대덕의 문하에서 배우고 입신양명하여 벼슬은 삼품에 올랐으나 거금 사백년의 오랜 세월이 멀고도 아득하고 심오하여 영향이 있는 것이 없으니 문득 기송의 한탄을 지울 뿐이다 모든 후손들이 오래 동안 탄식하고 한할 뿐이랴 여러 번 의논하였으나 결단하지 못하고 지금에야 모든 후손이 선인들의 뜻을 받들어 돌을 이미 다듬고 주손 순관이 그 족숙 혁문과 그 외 칠팔 인이 함께 산장을 찾아왔어 공의 유사를 내 보이고 말하되 “선 어른 분들이 정성을 쌓았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또 어느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지 못하도다. 작은 정성으로 계획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족조 계서는 좋은 한 말씀으로 너무 찬미하지 말고 덜하지도 말고 기문을 지어주세요”하니 사기가 너무 관곡하여 능히 끝까지 사양 못하였다. 공의 잠기고 숨었든 자취가 이제부터 그 빛을 천발 한즉 참으로 밝고 어두운 것이 때가 있음이로다. 어찌 일찍이 더디고 빨은 것을 원망하리요 곧 분수를 해아 리지 아니하고 힘 끝 유사를 모아서 대략 우와 같이 쓰다 이어서 새겨 가로대
충절의 세대에 부친은 충성을 다하고 모친은 정열을 다하니 삼강을 받드는 거룩한 문벌이로다. 대현 장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고 또한 입신양명하니 남의조상의 바릿대로다. 아~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리오. 많은 후손들이 마땅히 반듯이 영달하리라.


 계미2003년 三月에 종 후손 권헌조 근찬
 계미2003년 중춘 수갈
<국역:권혁문(權赫文) 편집:권혁무(權赫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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