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경주단계서당

오모재 현판을 걸고

죽재권혁무 2024. 1. 31. 09:20

[오모재 현판을 걸고 바라보니 엄숙히 고개 숙여 읍하여 지드라]

 

一 의사오모재권선생(충열사)

一 충신의사권복흥지려(충렬각)

一 충신의사오모재안동권선생(묘비)

一 유명조선 고충신안동권공(유허비각)

一 오모재공

一 오모재공 선조

一 오모재공 할아버지

 

읍하면서 고개 숙여 속으로 몇 번을 불러본 그 이름 집에 와서 적어 나열하여 보았다.

 

오모재(五慕齋)는 처음 당호(堂號: 집 이름)이면서 의사권복흥선조(義士權復興先祖)의 호(號)이다.

 

어제 오후에 나는 오모재(五慕齋) 현판 걸려고 단계서당(丹溪書堂) 강당(講堂)인 숭의당(崇義堂)에 올라서니 오모산(五慕山) 아래 작은 집을 짓고 오 모재 현판을 걸어 놓고 의사오모재권복흥(義士五慕齋權復興) 할아버지와 서산류 씨(瑞山柳氏) 할머니의 외동아들 지(䥍)와 함께 오손도손 살던 곳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엄숙히 고개 숙여 읍하고 들어서 지드라.

 

내가 2023년 가을 어느 날 오모재선생실기(五慕齋先生實紀) 국역과, 단계서당 사적(事蹟) 발간 준비 관계로 단계서당 전체를 촬영하고 또 하루는 날씨 좋은 날 한번 더 촬영하고서 자료를 찾던 중에 강당 성인재(成仁齋) 방 벽장에 오모재(五慕齋) 현판이 여러 물건에 묻처 있었는데, 먼지 묻고, 그을리고, 약간 파손된 부분도 있었으나 보물 같은 현판이라 지난(2023) 묘제 시 현판을 제관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니 순담씨 왈 “7년 동안 유사하면서도 못 봤다. 귀한 자료이다.”하고, 종손 왈 “복원하여 영구보관하자”하니 모두 찬성이라 중론에 따라 복원 전문가에게 부탁하여 원형대로 부러진 부분을 복원하여 찾아와서 어제(2024. 1. 30 오후) 혁목(유사) 동생과 나 둘이서 강당 성인재 방에 현판을 걸고 사진 촬영하고 유심히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오모재(五慕齋)란 글자 석자 앞에 서서 자연히 고개 숙여 읍하며 “의사오모재권선생”이라 속으로 불어 지드라.

 

오모재(五慕齋) 현판 글쓴이를 찾아보니 우당 이회영(友堂李會榮: 1867~1932)이다. 우당은 풍족한 삶 버리고 조국을 택했던 이회영 한국의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이고, 사상가요, 조선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이고, 경주이씨이며, 백사 이항복의 10세손이고, 이조판서 이유승의 6남 중에 넷째이며, 바로 아래 동생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 시영이고, 이종찬(李鍾贊1936~ 현 광복회 회장이고 전 국정원장)의 조부이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단한 집안이다.

 

아! 부군(府君)께서는 위대하고 훌륭하시어, 천기와 지기로 큰 才能을 갖고 나시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니 임금은 정려를 내리고 나라님은 꾸러앉아 절을 하네 그러나 사당은 여러 번 짖고 헐리고 수난(受難)을 격은 충렬사(忠烈祠)는 오모재공이 순절하고 145(1737)년 후에 도신이 처음 순절(殉節) 사실을 조정에 알리어 정려를 새워 그 충성을 정표하니 이에 고을 선비들이 유허비를 새워 기록하고 또 오모산(대)하에 사당(忠烈祠)을 지어 향사를 지냈다. 그러나 향례 봉상 2년 만에 영조 17(1741)년 당쟁의 소굴로 지목하여 전국 300여 사당이 같이 훼철(毁撤: 건물을 부시거나 철거하는 등의 행위)되었다. 그 후 병오(1786 정조 10)년 이전에 훼철된 서원 복설령에 묘우 충렬사를 1788년에 다시 세웠는데, 그러나 또 1868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또 충렬사 사당은 훼철되고 단계사(丹溪祠)는 단계서당(丹溪書堂)으로 강등되었다.

 

생각해 보니 현재 오모재(五慕齋) 현판은 대원군 때 훼철되고 10년이 지난 무인(1878)년에 오모재를 중건하고, 오모재 현판을 걸고 지내오다가, 충렬사지에 1924년 향사지네는 제단(祭壇)을 설치하고(제단으로 사용하든 단은 내 기억으로는 가로세로 약 4, 높이 3자 정도 시멘트로 만든 단) 복향 행사할 때 강당 중수하면서 강당에 걸었던 우당 이선생이 새로 쓴 오모재(五慕齋) 현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30년 후 1954년 단을 헐고 묘우인 충렬사를 재건하고 강당을 중수하면서 당호인 오모재 현판을 내려 벽장에 보관하고 현재 걸려있는 숭의당(崇義堂)으로 다시 걸었다.

 

제가 오모재중건기를 살펴보니 오모재(五慕齋)는 할아버지의 나이 서른세 살에 부모의 상을 당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여 생명이 다할 지경이었으며, 삼 년 복이 끝남에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은 재실을 지어 편액을 달 때 이름을 “오모재(五慕齋)”라 하였다. 대개 순임금이 오십에 부모의 도의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따라 종신토록 늘 사모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그 재실 이름을 오모재공의 후손들이 오모재공을 사모한다는 모자가 되었다. 시에 가로대 “효자가 나오면 계속해서 그 자손에 동류의 효자가 나오게 된다 “ 하는데 이 것을 말한 것일 것이다.

2024년 1월 31일 12世손 혁무(赫武) 공경히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