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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화양서원(槐山 華陽書院)

죽재권혁무 2007. 6. 1. 08:35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

(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2007.5.30답사)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인물인 송시열

 

송시열 그는 선조임금부터  숙종 임금 때까지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그의 전성기는 효종 때이며 효종임금의 오른팔이 되어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정계의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방대한 저술도 남겼다.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가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점이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된 학자였으며  흙탕물 같은 정치판에는 끼어들지 말아야 했다.

 그는 83세로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오던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 때까지

 당쟁과  파벌의 투쟁을 벌인 전형적인 외골수 선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송시열 뿐이며  또 전국 42개 서원에

 배향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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