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씨자료.행사/문중행사

오봉헌(종택)& 오봉공재사

죽재권혁무 2007. 8. 15. 17:28

 

영해 사림의 본거지 나라골

나라골은 행정구역으로 창수면 인량1,2리를 말한다. 영해에서 서쪽으로 약 10리, 영해 영양간 국도변에 서있는 안내판 뒤로 들판을 가로지르고 송천 다리를 건너 학이 날개를 펼쳐놓은 것 같은 인량대산 자락에 싸여 동서 5리에 걸쳐 펼쳐진 마을이다. 인량대산의 왼쪽 날개가 동으로 뻗어 해풍을 막아주고 오른쪽 날개가 서풍을 막아주며, 남으로는 수백정보의 너른 들판을 감싸고 송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이름난 명당이다.

영해의 발상지이기도 한 나라골은 상고시대에 우시국(于尸國)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어 나라골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영해사림의 본거지로서 영양남씨, 안동권씨, 대흥백씨, 무안박씨, 재령이씨 등 소위 5대성을 비롯한 명문대가들의 입향시거지이기도 하다. 세간에 나라골 8대가로 널리 알려져있으나 실은 위의 5대성 외에도 10여 성씨가 한 마을에 세거하면서 각기 손세를 확장하여 한 고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거주하는 150여가구 중에는 안동권씨 24호, 함양박씨 24호, 재령이씨 20호, 선산김씨 20호, 영양남씨 12호, 영천이씨 12호, 평산신씨 9호, 무안박씨 6호, 파평윤씨 5호가 있으며, 대흥백씨, 단양신씨, 야성정씨, 신안주씨는 남아있지 않다.

 

나라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안동권씨종택인 오봉헌이었다. 오봉헌이란 당호(堂號)가 영해에 처음 입향한 오봉 책의 호를 따서 지은 것임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나라골의 안동권씨 종택은 관어대나 송천의 권씨들의 가장 큰집인 셈이다.

오봉헌 뒤편으로 벽산정이라는 정자가 두드러져보이는데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오봉헌과 다르게 최근에 지어진 것이었다. 그 덕에 고풍스런 빛을 더해가는 아래쪽의 오봉헌이 조금 누추해보이기도 했지만 벽산정과 오봉헌은 나름대로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먼 데서 보기에도 뒤편의 산이며 울창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담장위로 가지를 드리운 고목들과 어우러진 풍광이 어느 고택보다도 멋들어져 보였다.

 

권자신(權自愼), 권책(權策)과 권상길(權尙吉)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건물.

지정번호 : 경북문화재자료 제 381호(1999년 12월 30일)
1999년 12월30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蒼水面) 미곡리에 있다. 1800년대 초에 건립되었고, 안동권씨 부정공파 영해문중이 소유·관리한다. 재향시 윗어른이 머무르거나 재례공간으로 사용되는 추감루(追感樓) 본채와 아랫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사 옆에는 경모재(景慕齋)가 있는데 축대 위에 건립한 이유로 중층 건물처럼 보인다. 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처마는 홑처마,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가운데에 마루방이 있으며, 좌우에 온돌방을 1칸씩 두었다. 마루방은 앞쪽으로 4분합문을 두었고, 뒤쪽 판벽에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마루 좌우는 판장문으로 막았고, 좌우 협칸에는 반자를 두었다. 아래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처마는 홑처마, 지붕은 서산각지붕이며, 온돌방인 수임방(受任房)과 헌관방(獻官房) 2칸을 두었다. 오른쪽에는 부엌과 유사실(有司室)이, 왼쪽에는 온돌방 2칸, 재물창고, 재물실이 있고, 재물창고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았다.본채와 ㄷ자형의 아래채는 전체적으로 튼 입 구(口)자형 배치이다. 경모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누각형 건물로, 4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2칸을 두었다. 2익공, 1고주(高柱), 5량 가구(架構)이며, 툇보는 고주 위에 결구하고 대들보는 고주 위에 얹혔다. 툇보 하부에는 선각(線刻)한 보아지로 보강하였고, 종도리는 동자기둥 위에 장식없이 처리하였다. 권자신은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처형되었고, 권책은 안동권씨 영해입향조가 되었으며, 권상길은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한 인물이다.

대봉재사 (大峯齋舍) 소재지 경북 영덕군 창수면 미곡리 737-1 (분 류) 사묘재실 소유자 안동권씨부정공파영해문중 수 량 2동 조선 전기의 문신인 권자신(?∼1456)을 가운데 두고 권책(1442∼?)과 권상길(1610∼1674)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제사 지내는 건물이다. 권자신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육신과 함께 세조 2년(1456) 살해되었고, 단종 외할아버지 권전의 증손자인 권책은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단종복위 사건으로 연루되어 영해로 위배되었다. 그는 영해에서 정착하여 살았으며 권상길은 병자호란 때 청(淸)에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던 분이다. 헌종 1년(1835)에 대봉산 기슭 아래 ‘충현사’란 이름으로 세웠다가 헌종 13년(1847) ‘대봉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쇄된 것을 1912년 다시 고쳐 지었다. 본채인 추감루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로, 제사 지낼 때 웃어른들이 기거하는 재례 공간이다. 높은 축대 위에 있어 중심 건물로서의 위계를 지키고 있는데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쪽에 온돌방을 둔 독립적인 공간이다. 앞쪽 아래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경모재로 통하는 작은 대문이 있다. 오봉공 권 책 공이 13세가 되던 세조2년 1456년에 사육신의 단종복위거사 실패로 일문이 참화를 맞았다 이해 6월에 당숙 충장공 자신(自愼)이 거열형(車裂刑)으로 순절하고 공의 두 형 저(箸)와 서(署)가 연좌로 형사(刑死)하였다. 이 때에 공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죽음을 면하고 해변지로 유배되어 살게 되는 '연기미만 책거영해'(年氣未滿責居寧海)의 감형을 받게 되었다. 어린 나이의 혈혈단신으로 영해땅에 전지했던 공은 다행히 후덕한 군자인 향반(鄕班) 평산신공(平山申公)을 만났다. 신공은 공을 구제하여 자택으로 데려다 부양하고 교육시켜 화주(華胄)의 후손이 준재(俊才)임을 보고 사위를 삼아 이곳에 세거토록 정착시켰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창수면 인량2리 나래곳인 것이다. 공이 이곳에 유배되어 정착한 지 1년 4개월여 뒤인 세조3년, 1457년 10월에는 상왕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아우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유)가 유배지 순흥에서 상왕 복위를 위한 의거를 일으켜려다 실패하는 화변이 일어나고 연이어 10월 24일에는 영월에 유배중이던 단종이 시해(弑害)되는 비보가 전해졌다. 이에 공은 마을 뒤의 바위 밑에 가서 상왕이 있던 북쪽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기절까지 하였는데 이로부터 삭망(朔望) 즉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그 바위에 올라가 북쪽에 망곡하기를 평생토록 하니 사림들이 이 바위를 일컬어 왕암 또는 대왕암이라 하게 되었다. 오봉공은 이렇듯 한 마음을 지키면서 생을 마쳤고 자손에게 유훈(遺訓)으로 '문자로써 영달을 구하지 말라'하였다. 실기(實記)가 있고 유고로 오봉집(五峯集)을 남겼는데 그 유시(遺詩)에 '분호천지노(憤號天之怒): 분하여 소리치면 천지도 노하고 원읍귀신비(寃泣鬼神悲):원통해 울면 귀신도 슬퍼한다'한 구절이 있다. 이 후로 공의 후손은 오래도록 벼슬길 등의 진출이 금고되어 있다가 200여년이 지난 숙종조에 그 선고 부제학공 등이 신원(伸寃)되자 공의 충의를 경모하는 사림(士林)에서 묘소 아래에 대봉서원(大峯書院)을 창건하고 공의 당숙 충장공 자신(自愼)을 주위(主位)로 하고 공과 공의 7대손 남곡(南谷) 권상길(權尙吉)을 배향하였다. 이 서원을 그 뒤 고종5년, 1868년에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2년에 그 사당이 있던 구지(舊趾)에 경모제(景慕齊)를 창건하고 그 당에는 망월당(望越堂)이라 현액(懸額)하여 공이 영월 땅을 우러러 바라보던 뜻을 기렸다. 그리고 공이 상왕 단종을 향해 망곡(望哭)하던 왕암에도 글자를 새겨 이를 잊지 않도록 했다. 다시 1923년에는 충청도 유림의 발론으로 공주의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에 있는 장릉절신(莊陵節臣)들의 숙모전(肅慕殿)에 공이 추배(追配) 되었다. 이와 같은 오봉공의 사직은 가전의 실기와 문적 외에 명현록(名賢錄)과 단양지(丹陽誌) 등에 소재되어 있다. 오봉공은 독자로 승의부위(承義副尉) 인형(仁衡)만을 두었는데 이후로 그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오늘날에는 2천여호를 헤아리면서 부정공파 가운데서도 가장 큰 문중을 이루고 있다.

 

 

 

 

 

 

 

<36世 竹齋 權赫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