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常識)/역사 일반상식

소론(조선역사)<少論>

죽재권혁무 2007. 12. 1. 16:41
조선시대 서인(西人)이 나누어진 붕당(朋黨)의 하나.
서인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숙종 즉위초에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패하여 남인에게 밀렸다가 1680년(숙종 6)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계기로 정권을 회복했다. 당시 숙종의 외척으로서 남인정권 때부터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김익훈(金益勳) 등이 경신대출척의 과정에서 원훈(元勳) 1등공신이 되어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계에 재등장한 서인들은 훈척의 정치참여에 대한 입장에 따라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타협세력에는 주로 노성한 인물이 많았고, 비판세력에는 신진사류가 많았다. 그뒤 김석주·김익훈 등이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남인 유생인 허새(許璽)가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게 하여 남인의 잔당세력을 제거했다. 이때 소장파인 한태동(韓泰東) 등이 남인을 강경하게 처벌하는 김익훈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송시열(宋時烈)이 김익훈을 두둔하고, 박세채가 소장파를 후원했다. 이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이 각기 하나의 당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는데, 소론은 한태동·박세채 중심의 소장파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처벌에 강경파가 노론이었던 데 비해 신진사류들로 구성된 온건파가 소론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윤증(尹拯) 사이에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불리는 불화가 있었는데, 윤증이 소론에 속함으로써 명분의 시비를 빌미로 분파의 형성이 더욱 촉진되었다. 그런데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을 계기로 소론은 노론과 함께 정치일선에서 남인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그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계기로 노론·소론이 정계에 재등장했는데, 이때 남인출척문제와 장희빈 처리문제에 있어서 소론은 세자(뒤의 경종)를 보아서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온건론을 폄으로써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노론과 다시 충돌했다. 이후 1715년에 일어난 가례원류시말사건으로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치열했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소론 편을 들었다가 이듬해인 병신년에 노론 편을 들어 소론이 일시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1717년부터는 세자인 경종이 대리청정(代理廳政)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과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그러다가 경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경종이 후사를 갖지 못하자 1721년(경종 1) 8월에 노론대신들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자고 주장한 데 이어 경종의 신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제의했다. 소론은 왕세제의 청정에 대해 반대하여 노론측과 격렬한 분쟁을 일으켰고, 이 기회에 소론인 조태억(趙泰億)·이광좌(李光佐)·한배하(韓配夏)·심수현(沈壽賢) 등이 소를 올려 대리를 추진한 노론을 공격했다. 또한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이 대리청정을 추진한 노론 4대신은 왕을 군부로 대접하지 않는 역신이라고까지 몰아붙였다. 이를 빌미로 결국 소론은 노론을 차례로 파직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1722년에는 노론이 경종을 모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소론은 노론 4대신을 위시한 60여 명의 노론이 처벌되었던 신임사화(辛任士禍)를 계기로 소론은 집권했다. 이때 소론4대신은 유봉휘·이광좌·조태구·최석항이다.
이때 소론 내에서도 노론치죄함에 있어서 강경파인 준소(峻小)와 주모자만 처형하자는 온건파인 완소(緩少), 또한 왕세제의 보호를 표방하던 청류(淸流) 등으로 분열되었다. 그뒤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죽고 연산군이 즉위함으로써 소론은 노론에게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은 남인과 연합, 이인좌를 중심으로 무장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리어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에서도 강경파였던 준론(峻論)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이인좌의 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영조는 왕권마저 위협당하자 탕평책으로 노론과 소론을 함께 등용하고자 했지만, 소론에게는 상황이 불리했다. 영조는 이광좌나 조태억을 대신으로 임명해, 그들이 목호룡의 역모사건의 조작자로 발각된 김일경 등의 준소 일파를 단제하게 했다. 이는 노소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탕평책을 통해 소론의 불만을 달래가면서 노론의 공세를 유도해 준소를 제거하고 여타의 소론을 불안하게해 점차 노론세력의 대두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비록 준·소의 구별이 있기는 했지만 그만큼 소론자체의 명분이 약화되었고, 정계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붕당정치, 서인
우현 권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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