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常識)/역사 일반상식

노론(조선역사)<老論>

죽재권혁무 2007. 12. 1. 16:36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하나.
분당의 계기는 1680년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許積)의 유악남용사건(油幄濫用事件)과 허적의 서자 견(堅)의 역모사건으로 남인이 대거숙청된 경신대출척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비롯되었다.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 등은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반대한 소장파 한태동(韓泰東) 등은 김익훈을 탄핵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노장파는 김익훈에 대한 탄핵상소에 반박하면서 소장파와 대립하였다. 특히 노장파의 거두였던 송시열이 그의 문인인 윤증(尹拯)과 개인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분파작용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를 노론이라 부른다. 노론에 속하는 당인(黨人)들은 본래 예학(禮學)의 태두였던 김장생(金長生)의 문인들이었으며, 청렴과 의리를 중시했던 산림(山林) 사림들의 정치집단이었던 산당(山黨)에 속하는 서인들이었다. 노소분열 이후 정권을 잡은 노론은 약 10년간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1689년 희빈 장씨 소생, 왕자 윤(昀)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송시열·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이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기사환국을 거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부활하여 숙종 말 이래의 정국은 노·소론의 정쟁(政爭)이 중심을 이루었다. 경종·영조 때에는 노·소론의 당세(黨勢)가 정국을 양분하는 형상을 띠기도 하였다. 특히 경종·영조 때의 노론의 당세는 노론 출신의 4대신이 주도하고 있었다. 경종 때의 4대신으로는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이이명(李命)·조태채(趙泰采) 등이 꼽히고, 영조 때의 4대신은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정호(鄭澔)·홍치중(洪致中)이다. 나중에 노론은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사건(賜死事件)으로 다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나누어졌다. 시파는 세자의 불행한 죽음에 동정하는 당파이며, 벽파는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당파이다. 영조말에는 주로 벽파가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조 때에는 시파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계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자, 벽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을 계기로 노론 가운데서 시파와 소론·남인 등이 몰락하게 되고, 그후에는 노론 벽파의 독주시대가 계속되었다.→ 붕당정치, 서인, 소론
金武勇 글
우현 권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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