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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인근 가볼만한곳

죽재권혁무 2008. 6. 17. 12:31

대구 인근 가볼만한곳

역사 속으로… 고대사회에서 20세기까지

 

모명재-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

옻골마을- 전형적인 양반마을 양식·생활 볼 수 있는 곳

 

수성구 남부정류장 뒤편의 모명 → 청명한 하늘과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었던 가을도 잠시, 어느덧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겨울.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선조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 다가오는 겨울방학을 맞아 학교 가까이 학생들이 찾아가 볼만한 문화유적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 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 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4칸, 측면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 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 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 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주(註)

1. 군진(軍陳) : 군대가 전투에 대비하여 펴는 진영(陳營)

 

 

 오전9시∼오후5시. (문의: 모명재관리사무소 742-3178)

 

◈영남제일관

 

영남제일관은 조선시대(1601년)에 축조된 대구 읍성의 남문으로 일제 강점기에 철거 되였던 것을 1980년 옛 모습을 남기기 위해 수성구 만촌동에 새로 중건되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진동문·서문은 달서문·남문은 영남제일관·북문은 공북문이라 하였다. 1906년 읍성이 철거 될 당시 다른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어 현재 영남제일관만이 보존되어있다.

 

1980년에 중건된 영남제일관은 성루(성곽의 곳곳에 세운 다락집)의 위치·규모·품격면에서 원형과 크게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대구제일의 향토 상징 관문으로 금호강과 함께 대자연의 운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관문의 좋은 경관을 보여주기 위해 야간 경관조명을 발산하여 우아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영남제일관은 MBC방송국에서 동대구 I.C 쪽으로 가는 50번 도로(화랑로)의 우측. 효목네거리에서 500m거리. 개장시간: 24시간. (문의: 대구관광정보센터 627-8900)

 

◈불로동 고분군

 

불로동 고분군은 총 211기의 대·소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삼국시대에 조성된 이 고분은 1938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표본 발굴 조사한 결과, 직경 15∼20m, 높이 4m 내외의 봉토분(흙을 쌓아올린 고분)인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큼직한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수혈식(4벽을 쌓고 널을 위로부터 넣고 덮개돌을 덮은 형식) 석곽분(=무덤)으로 밝혀졌으며,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그리고 무늬가 새겨진 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불로동 고분군은 대구 일대에 현존하는 고분들 중 외형적인 형태를 가장 잘 갖추고 있고 좁은 지역에 많은 고분들이 밀집해 있다. 이를 통해 고대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대구분지 내에서 비슷한 권력집단이 내당동·비산동·불로동 등 곳곳에 할거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78년 6월, 우리나라 고분군으로써는 가장 먼저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 262호로 지정되었다.

 

불로동 고분군은 팔공로와 경부고속도로 고가도로와 만나는 지점의 동쪽 구릉에 분포. 개장시간: 24시간.(문의: 불로동 관리사무소 984-3506)

 

◈경주최씨종가(옻골마을)

 

옻골 마을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양식과 생활을 엿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의 제일 북쪽에 위치한 종가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대부가 최동집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주택이다. ㄷ자형의 안채와 일자형의 사랑채를 주축으로 사랑채의 동쪽 방형 토담 안에 보본당이 배치되어 있고 안채의 동쪽과 보본당의 뒤쪽에 접하여 가묘(한 집안의 사당)와 별묘(왕실 서자생모의 신주를 모시던 사당)가 각각 일곽의 흙 담장 안에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대구지역의 주택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보본당·가묘· 별묘 등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큰 규모의 건축물로, 조선조 양반주택과 그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개장시간: 오전 8시∼오후 7시 (문의는 옻골 마을사무소 983∼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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