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성 김씨 종택[義城金氏 宗宅]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0-1752)은 양반, 선비가 살만한 영남의 4대 길지로 안동의 도산, 하회, 천전, 봉화의 닭실을 꼽았다. 그가 꼽은 4대 길지 중 하나인 천전마을에 의성김씨 종택이 있다. <<택리지>>에는 이곳에 대하여 "안동의 동남에 있는 임하천(臨河川)은 청송읍 시냇물과 하류가 황강(潢江)물과 합류하는 곳이다. 임천(臨川)에는 학봉(鶴峰) 김성일(金城一)이 살던 옛 터가 있다. 지금도 문족(門族)이 번성하여 유명한 마을이 되었고, 그 옆에는 몽선각(夢仙閣)과 도연선찰(陶淵仙刹)의 경치 좋은 곳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택리지>>에서 영남의 4대 길지 중 한 곳으로 꼽은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천전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영덕으로 가는 34번 국도를 타고 반변천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임하댐 보조댐이 나오고, 여기서 1.5km 정도 더 가면 국도 연변 좌측에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자연석에 마을을 알리는 ‘내앞’이라고 쓴 표지석이 서 있어 이 마을이 바로 안동 명문 사족의 하나인 의성김씨 집성촌 마을이며, 반변천 앞이라 하여 한자로는 ‘천전(川前)마을’, 순 우리말로는 ‘내앞마을’임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의성김씨들이 이 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것은 그들이 중시조로 모시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조부인 김만근(金萬謹)이 임하현의 오씨 부인에게로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서 살면서 점차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기와집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규모로 제일 너른 자리를 차지한 의성김씨 종택은 청계(靑溪) 선생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는 대종가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의성김씨 종택이 오자등과댁, 육부자등과지처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청계선생이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들의 영예를 선택한 때문이라고 한다. 문장이 뛰어난 청계선생은 생원이 된 후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해 대과를 포기하고 자손들의 학문 장려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섯 아들인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청계선생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어 이 집을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 내앞마을의 현무봉은 낙동정맥의 통고산(1067m)에서 분맥한 용이 일월산(1291m), 청량산(870m)을 거쳐 낙동강과 대곡천 사이로 힘차게 내려와 나지막하게 일으킨 봉우리다. 마을입구에서 집 뒤 현무봉을 보면 마치 편안하게 누운 소가 한가로이 풀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풍수형국명을 붙이자면 와우형(臥牛形)에 해당한다. 풍수에서 형국론(形局論)은 주산이나 현무봉의 모양을 어느 물체에 비유하여 이들의 기가 가장 많이 모이는 부분에 혈을 정하는 방법일 뿐 형국명이 길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날짐승인 봉황(鳳凰)이나 학(鶴), 꿩(雉), 기러기(雁), 까마귀(烏), 닭(鷄)등은 생기가 벼슬(冠), 날개(翼), 꼬리(尾)부분에 있고, 들짐승인 호랑이(虎), 사자(獅), 소(牛), 개(狗), 쥐(鼠)등은 생기가 코, 배, 젖가슴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곳에다 혈을 정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형국론은 사람의 주관에 따라 호랑이를 개로, 봉황을 닭으로 볼 수도 있으며 지렁이를 용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날짐승을 들짐승으로, 들짐승을 날짐승으로 볼 수도 있어 필자가 누운 소로 본 이곳 형국도 다른 사람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형국명을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은 아니다. 우선 주산이나 현무봉의 모습이 비유하는 물체와 흡사해야 하며, 주변의 사(砂) 등이 형국명을 붙이기에 맞는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즉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이라면 호랑이가 숲을 나오는 형국으로 호랑이가 숲 속에서 나오는 원인이 중요하다. 그것은 안산(案山)의 형상이 졸고 있는 면구안(眠狗案)으로 보인다든지 명당 주변에 개, 토끼 등을 닮은 형상의 바위나 산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러한 짐승을 잡기 위해 호랑이가 숲을 나오기 때문이다.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갈록음수형(渴鹿飮水形)은 목마른 말이나 사슴이 물로 내려오는 형국으로 혈장 앞에 연못이나 시냇물이 있어야 하고, 생사출림형(生蛇出林形)은 뱀이 숲을 나오는 형국으로 혈장 앞쪽으로 개구리나 쥐 형태의 안산이나 사격이 있어야 하고,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은 늙은 쥐가 먹이를 찾아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으로 혈 앞으로 벼이삭을 쌓아 놓은 사(砂)나 주변에 창고 같은 사(砂)가 있어야 하고,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은 봉황이 둥지로 날아드는 형국으로 봉황이 보금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알을 품기 위함이니 혈장 앞의 안산이나 주변의 사격이 알의 형상이어야 한다. 필자가 이곳 형국명을 와우형으로 보는 것은 현무봉의 모습이 소가 누운 모습과 흡사하고, 와우형이 갖춰야 할 조건인 풀 더미에 해당되는 적초안(積草案)과 소가 밭을 갈 수 있도록 마을 앞에는 경전안(耕田案)인 평평한 들, 경전을 갈 쟁기를 끌 멍에 같은 사가 있어야 성국이 되는데 이곳은 이러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이다. 강 건너 안산이 마치 풀 더미 같고 집 앞으로 펼쳐진 들은 소가 일을 할 수 있는 넓은 경전(耕田)이다. 경전을 갈 쟁기를 끌 멍에는 종택의 내백호를 이루는 봉우리와 거기와 이어진 능선이다. 넓은 경전에 비해 소먹이가 반변천 건너에 있고 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반변천변에는 인공적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을 조림하여 개호송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 사는 후손이 들려 준 이야기에 의하면 “종택에 앉아 담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갓이 보이면 땅의 정기가 다 된 증거이니 다른 곳으로 이사하라고 선조들이 말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강 건너편으로 길을 만들었고 길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도록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대개 해변이나 강가에 조림한 소나무 숲은 모래를 막기 위한 방사림 또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조산(朝山)들이 나성을 이루며 감싸고 있어 마을에는 모래나 바람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는 없을 것 같으므로 풍수적 비보(裨補)의 목적으로 숲을 조성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는 선조들이 이곳 형국을 와우형으로 보았다는 증거다. 담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갓이 보이면 땅의 정기가 다 된 증거라는 뜻은 마을 앞으로 길이 생겨 사람이 다니면 소가 먹이를 먹는데 방해를 받기 때문일 것이고, 소나무 숲을 조성한 것은 바로 소의 먹이인 적초안이 반변천 건너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왜 소의 먹이인 소나무 숲을 마을 가까이 조성하지 않고 멀리 강가에 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멀리 있어야 소가 먹이를 먹기 위해서 열심히 마을 앞의 경전을 갈 것이고, 또한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훗날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자연을 통해 가르치려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니 의문은 금방 풀린다. 巳자 형태로 배치한 종택. 출입문에서 안채가 바깥에 있고 사랑채는 깊숙한 안쪽에 있다. 안채의 몸채 지붕은 측면만 보이나 실제 向은 출입구 쪽인 사랑채와 같은 癸坐丁向이다. 그런데 1931년 일본인 무라야마지준(村山智順)이 쓴 <<조선의 풍수>>에는 이곳에 대하여,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이라고 부르고, 3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완사명월(浣紗明月)의 사(紗)는 본래 미려한 직물이며 고귀한 사람의 옷이 되는 좋은 것이다. 이것을 명월하에 완탁(浣濯)한다면 더욱더 미려해지는 것 같이 그 형의 소응은 자손 가운데 명성있는 고관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김극일 등 오형제가 나란히 등과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지금 여기에 사는 가구 수는 170호나 된다.”고 기술하고 있어 이곳 형국명이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으로 불려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이 형국명을 붙이려니 빨래터는 마을 앞에 반변천이 있지만 빨래할 여인이 없다. 마을의 현무봉을 빨래할 여인으로 보려 해도 누워서 빨래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 형국론이 혈을 정하는 방법임을 망각하고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인물에다 초점을 맞추어 반변천만 보고 그럴듯한 형국명을 붙인 것을 무라야마가 기술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배치형태는 지금과 유사하나 당시에는 지금의 출입구가 아닌 다른 출입구였음을 알 수 있다. 길 또한 집 앞으로 곧게 나지 않고 가로로 나 있다. 와우형에는 코, 배, 젖에 해당하는 곳에 혈을 결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곳에다 집터를 정해야 하는데 의성김씨 종택은 코 부분에, 소종가들은 배와 젖에 해당하는 부분에 자리하였다. 종택이 마을의 중심에서 좌측으로 비켜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되새김질하고 있는 소는 코에 가장 많은 기가 집중되므로 이곳에다 자리한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형국이 좋아도 용이 부실하면 그 자리는 허혈(虛穴)이 되는 것이다. 종택 뒤로는 소머리 부분이 되는 현무봉정상에서 내려오는 입수룡이 마을 입구에서도 뚜렷하게 보여 튼실한 용임을 짐작하게 한다. 보물 제450호로 지정된 의성김씨 종택 건물은 처음 지었던 집은 조선 선조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집은 학봉 김성일이 16세기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 상류층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 재건하였다고 한다. 행랑채에 난 출입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口자 형태로 안채가 자리하였고 좌측에는 一자 형태로 사랑채가 자리하였다. 집 앞에서 보아 지붕의 측면만 보이고 가장 높아 보이는 건물이 안채의 몸채다. 口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 및 다른 건물과 이어져 전체적으로는 巳자형 평면을 이룬다. 안채의 몸채 지붕이 측면만 보여 向을 출입구 쪽이 아닌 좌우의 다른 향을 놓았지 않았을까 싶어 제어 보니 사랑채와 같은 癸坐丁向으로 출입구 쪽에다 향을 대었다. 그런데 안채가 출입문에서 가장 깊숙하고 먼 곳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출입문을 들어서자 말자 우측으로 바로 안채이고, 이에 반해 사랑채는 별당처럼 가장 먼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뭔가 이상한 배치가 된 것이 건물의 배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출입문을 지금의 자리에 잘못 배치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 마을이 보이지 않기 위해 인공적으로 숲을 조성했던 그들이 종택으로 들어오는 길과 직충(直衝)이 되게 출입문을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랑채가 길게 가로 놓여있지 않다면 집 안이 훤하게 드러나 보일 출입문의 배치다. 분명 지금의 장소가 아닐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정확히 이전에는 어디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답답했는데 한 장의 사진이 해결해 준다. 무라야마가 쓴 <<한국의 풍수>>에 실린 1930년대의 종택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보면 지금의 출입문 앞은 담장을 둘렀고 그 당시에는 좌측의 사랑채와 연결된 대문채(추정)에 출입문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종택의 배치 역시 사대부가의 일반적인 배치처럼 안채가 출입문에서 가장 깊숙하고 먼 곳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외부에서 종택으로 출입하는 길 또한 지금과 같이 직 또한 지금과 같이 직충되게 나지 않고 집 앞으로 가로로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의성김씨 종택 항공촬영
삼남4대 길지중 손꼽히는 완사명월형의 안동 천전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택입니다.
다섯 아들이 모두가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혹은 오자지과댁으로 불리우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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