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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죽재권혁무 2013. 9. 6. 14:40

 

도동서원은 대니산의 한줄기가 서북으로 뻗어내린 끝자락의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낙동강 건너 고령 땅 개진들이 넓게 펼쳐진 곳이다. 서원 앞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그 뒤로 비교적 경사가 급한 지형을 따라 서원이 조성되어 있다.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반듯하게 설정한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심축에는 이를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통로와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에 있다. 현풍에서 구지면사무소를 지나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약 4㎞쯤 가면 닿는 곳이다.

도동서원은 원래 1568년(선조 1)에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건립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고,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는데,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東來]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동서원은 앞으로 낙동강을 굽어보는 작은 구릉 위에 동북향을 하여 자리잡았다. 서원 앞에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 뒤로 자연 지세에 어우러지며 서원이 조성되었다.

 

한강 정구선생이 심은 은행나무이다.

건축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한강 정구(鄭逑1543~1620) 선생으로서 한강은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영남의 이름난 예학자이다.

 

환주문 : 서원 정문인 환주문은 맞담에 세운 규모가 작은 문으로서 사모지붕이다.

'환주(喚主)'는 '내 심성의 주(主)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뜻을 가졌다.

 

중정당에 위 도동서원은 퇴계선생의 글씨를 집자하였고 아래쪽 도동서원 글씨는 사액이다.

 

중정당 기단

도동서원 강당인 중정당 기단은 크기와 색깔을 달리하는 돌들이 서로 잘 맞물려 일체를 이루고 있다.

위 용머리와 아래 거북이 머리는 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화재예방을 한다로 전해오다.

 

중정당은 강당 건물로,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금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용의 상태를 말한다.

중정당 기단은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이 빈틈없이 서로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 용두석을 배치하고, 기단 윗부분에는 크기가 다른 꽃송이가 좌우에 나란히 조각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시고 있는 도동서원에서는 일년에 두 번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다른 서원과 달리 새벽 1시 30분 쯤 지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참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금년 본원유사 3명 그리고 제 집사 분정기를 붙혀두고 향사를 지내고 그대로 둔 내용이다.

 

문루인 수월루는 공부하던 유생들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던 곳으로, 1888년(고종 25)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3년에 중건되었다. 물 위에 비친 달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뜻을 가진 수월루의 건축적 품격은 서원 내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난간을 두른 2층 누마루에 오르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서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기둥 상단에 힌 창호지로 감은 이유는 동방오현중에 수현을 표 한것이다.

(동방오현○한흰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일두 정여창,○ 퇴계 이황)

생단 : 제수로 쓸 생(牲)을 품평하는 도동서원의 생단은 강당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담으로 두른 일곽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김굉필을 주벽으로 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되기를 원하는 김굉필의 도학정신을 표현한 벽화 두 점이 있다. 제향 후에 축문을 태우는 망례위는 일반적으로 석물로 지상에 조성되는데, 도동서원의 경우는 사당 서편 담에 작은 구덩이처럼 생긴 감(坎)이 설치되어 있다.

 

 권혁무와 이홍락

 도동서원이 건립된 현풍 땅과 김굉필이 관계를 맺게 된 연유는 증조부 김중곤이 현풍 곽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현풍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성장기를 현풍면 대니산 남쪽 솔례촌에서 보낸 한훤당은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18세 때 합천군 야로에 있는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 근처 계곡에 '한훤당'이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이때 인근에 위치한 함양에 군수로 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수제자가 되어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정몽주­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잇게 된다.

김굉필은 2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지목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후에 전라도 순천에 이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약을 받았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명예를 회복하였다.


이와 같이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 구성과 배치 형식은 우리나라 서원건축 중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 구성도 우수하다. 특히 1600년대에 건립된 강당과 사당 등 건물들은 당시 서원과 사묘건축을 대표할 만큼 매우 훌륭한 짜임새와 수법을 보이고 있고,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들도 우수하여 이들 모두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

 

 문경공한훤당김선생

오백주기추모비

 다람제에서 촬영

 

 

 

 

 

 다람재 정자에서 오후4시 30분에 대구로 출발 현풍에서 저녁식사는 현풍항매집곰탕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