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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朴氏 糾正公派世譜(밀양박씨 규정공파세보) 및 恭簡公派(공간공파) 계보도

죽재권혁무 2019. 3. 28. 20:47

한민족 상고사.전통문화

 

密陽朴氏 糾正公派世譜(밀양박씨 규정공파세보) 및 恭簡公派(공간공파) 계보도

 
프로파일 영한대제 대이 명성 2018. 2. 2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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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朴氏 糾正公派世譜(밀양박씨 규정공파세보) 및 恭簡公派(공간공파) 계보도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 시대 (공간공후 사직공파 대종중)

-대산소 신축재실(연무읍 안심리 824번지(시제 및 정기총회 매년 음력 3월15일)

■密陽朴氏 糾正公派世譜(밀양박씨 규정공파세보)■

●신라의 시조왕 朴赫居世(박혁거세) 시대 (성은 朴 휘는 赫居世)
1世 朴赫居世(박혁거세) 始祖王(시조왕)

↓↓↓

●밀(성)양박씨 시대     ●密陽朴氏(밀양박씨)
(中始祖 景明王-子 密城大君

30世 彦沈(언침)            1世 密陽朴氏(밀양박씨)(中始祖 景明王 맏아들)(密城大君)

31世 郁 (욱)                     2世

32世 瀾 (란)                     3世

33世 永禎(영정)                4世

34世 基世(기세)                5世

35世 施做(시주)                6世

36世 讚行(찬행)                7世

37世 彦孚(언부)                8世

38世 孝臣(효신)                9世

39世 公弼(공신)               10世

40世 育和(육화)               11世

41世 允恭(윤공)               12世

42世 光禮(광례)               13世

43世 推孝(추효)               14世

44世 興 (흥)                    15世


●중시조 규정공파 시대
45世 鉉 (현)                    16世           1世 中始祖(糾正公派世) 중시조(규정공파)

46世 文有(문유)               17世            2世

47世 思敬(사경)               18世            3世

48世 沈 (침)                    19世            4世

49세 剛生(강생)               20世            5世

50世 切問(절문)               21世            6世

51世 仲孫(중손)         22世            7世
(朴赫居世)       
(密陽朴氏)      (糾正公派世)     (恭簡公派世)

●중시조 공간공파 시대
52世 鍵 (건)                      23世           8世           1世 中始祖(恭簡公派世)

53世 承燧(승수)                24世           9世           2世

※承燧(승수)의 첫째 爲(위).둘째 苓(령).셋째 葵(규)의 첫째 致元(치원).둘째 宗元(종원)

54世 蔿 (위)                   25世          10世          3世 (아들이 없음)

※蔿 (위)가 아들이 없어 葵(규)의 둘째 宗元(종원)를 양자로 입적

55世 宗元(종원)               26世          11世          4世 (승현)

56世 崇賢(숭원)               27世          12世          5世 (상현,효원,승현,양현,득현)

57世 萬喆(만철)               28世          13世          6世 (만철,순유,승명,황,승)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 시대 (공간공후 사직공파 대종중)

-대산소 신축재실(연무읍 안심리 824번지(시제 및 정기총회 매년 음력 3월15일)

58世 英震(영진)                29世         14世          7世

※부인 신씨 할머니 大澤(대택) 아들을 데리고 연무대 금곡리로 이주

59世 大澤(대택) 외아들 첫째 30世      15世          8世 (대택)

60世 泰茂(태무)  외아들 첫째 31世    16世          9世 (태무)

61世 世道(세도)5형제 중 첫째 32世    17世        10世 (세도,세중,세겸,세망,세검)

62世 以恭(이공)4형제 중 첫째 33世    18世        11世 (이공,이순,이경,이홍),

63世 光烈(광열)5형제 중 첫째 34世    19世        12世 (광열,광신,광현,광민,광옥)

64世 載楫(재즙)3형제 중 셋째 35世    20世        13世 (재익,재겸,재즙)

65世 壽鎭(수진)2형제 중 첫째 36世    21世        14世 (수진,태진)

66世 準植(준식)2형제 중 둘째 37世    22世        15世 (준귀,준식)

67世 成來(성래)  외아들  첫째 38世    23世        16世 (성래)

68世 魯勝(노승)4형제 중 첫째 39世    24世        17世 (노승,노옥,노홍,노선)

69世 英圭(영규)  외아들  첫째 40世    25世        18世 (영규)

70世 鍾宇(종우)3형제 중 첫째 41世    26世        19世 (종우,종현,종근)

71世 正淳(정순)2형제 중 첫째 42世    27世        20世 (정순,선율)

72世 仁(인)자 돌림                43世     28世        21世

73世 容(용)자 돌림                44世     29世        22世

74世 璋(장)자 돌림                45世     30世        23世

❐ 박씨 시조

박혁거세 朴赫居世 [BC 69~AD 4], 신라의 시조(재위 BC 57∼AD 4)

왕의 성은 박(朴)이요 휘(諱)는 혁거세이다. 성모(聖母)의 휘는 파소(婆蘇)인데 본래 한(漢) 선재(宣帝)의 공주로 선술(仙術)을 배워 동(東)으로 해상(海上)에서 노닐다가 경주 선도산에 이르렀다.

서기 기원전 619년에 큰 알을 낳아 양산(楊山)기슭 나정(蘿井)숲에 두었다.

이때 고허촌장(高虛村長)이 멀리 서광이 뻗친 것을 보니 마치 선인(仙人)이 엎드려 절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이윽고 알을 깨고 남아(男兒)를 얻으니 형체가 단정하였다.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나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다.

육촌(六村)사람들은 그 출생이 하도 기이하여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나이 열셋에 의젓함이 어른같아 육촌장들에게 추대되어 임금이 되었다. 왕호(王號)를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는데 때는 오봉(五鳳) 원년갑자(元年甲子) 기원전 517년 4월이었다.

5년 봄 정월(正月)에 알영(閼英)씨를 왕비를 맞았는데 왕비의 출생도 역시 상서로웠다. 즉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여아(女兒)를 낳으므로 한 할미가 이상히 여겨 거두어 기르고 샘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불렀다. 자라서 왕비가 되어서는 어진 덕으로 왕을 잘 보필하니 백성들이 이성(二聖)이라 칭송하였다.

왕 8년에 왜병이 국경을 침범하려다가 왕의 신덕(神德)을 듣고 곧 물러갔으며 17년에는 왕과 왕비가 육부(六部)를 돌아보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였다.

19년에는 변한(弁韓)이 항복해오고 21년에는 수도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불렀으며 26년에는 비로소 궁궐을 지었다.

30년에는 낙랑인이 노략질을 하려고 왔다가 국경에 들어서서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노적가리가 많은 것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도(道)가 있는 나라이니 범할 수 없다』 철병해 돌아갔다.

38년에는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어 수교하게 되었는데 그 왕이 사대(事大)의 예를 책망함으로 호공이 응수하기를『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일으켜 인사에 질서 있으므로 천시(天時)가 화(和)하고 창고가 가득하여 백성들은 겸양합니다. 그리하여 진한(辰韓),변한(弁韓),낙랑(樂浪),왜인(倭人)들은 모두 외복(畏服)아니함이 없지만 우리 왕께서는 겸허하여 소신으로 하여금 수교를 하게하니 예에 지나치다고 할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마한(馬韓)왕이 노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좌우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해를 넘겨 이듬해에 마한왕이 돌아가므로 어떤 이가 왕께 권유하기를 전에 마한왕이 우리 사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지금 상사(喪事)때 마한을 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왕은 남의 재앙을 좋아한 것은 불인(不仁)이라 하고 도리어 사신을 보내 조문케 하였다.

53년에는 동옥저(東沃沮)의 임금이 양마 20필을 바치면서 이 사람이 듣건데 『남한(南韓)에 성인이 있다하기로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삼국은 모두 전쟁을 숭상하였는데 왕만은 홀로 인의(仁義)를 지키고 위력을 내세우지 않으니 원근 여러 나라가 풍문을 듣고 불침되기를 원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61년 갑자(甲子)서기4년 3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수(壽)는 73세였다. 태자 남해(南解)가 왕이 되어 이해에 왕을 수도 남쪽에 장사지냈는데 왕이 돌아가신지 7일 만에 왕비 알영씨도 따라 돌아가셨다.

왕이 불던 옥적(玉笛)이 아직도 조령 서쪽에서 소리가 퍼지고 있으며 왕이 쓰던 금척(金尺)이 아직도 건천 남쪽에서 빛을 들어내고 있으니 왕의 영원한 존재가 여기에 더욱 뚜렷한 것이다.

남해왕 뒤에 박씨왕이 전해지기 팔대에 사위인 석씨와 김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었으며 서라의 국호는 지징왕 때에 신라로 고쳤는데 그때가 992년 이었다.

세종13년 서기1429년 비로소 고도(故都) 경주에 사당을 세우고 경종3년 서기1723년에 전호(殿號)를 걸어 숭덕(崇德)이라하며 나라에서 제사지냈다. 영조27년 서기1751년 신주(神主)에 왕자(王字)를 쓰게 하고 묘비를 세웠다.

❐ 밀양(밀성)박씨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연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6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서기 900년경)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 진원 박씨 등

-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 삼척 박씨 등

-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 고성 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 무안 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 춘천 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의 인구의 70~ 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2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중 제 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 이씨, 다음으로 제 3위였다.

❐밀양박씨 중시조
박언침 (朴彦沈)
-박혁거세의 30세손 신라 제54대 경명왕 맏아들
중시조(中始祖)박언침(朴彦枕)은 시조(始祖) 왕(王)박혁거세(朴赫居世)의 30세손(世孫)이요, 신라(新羅)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로 경명왕(景明王)이 여덟 왕자(王子)를 각기 분봉(分封)할 때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封)해졌기 때문에 후손(後孫)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밀성(密城)이 뒤에밀양(密陽)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본관(本貫)을밀양(密陽)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地名)을 따라 밀성(密城)박씨(朴氏)라고도 한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세계(世系)는 중시조(中始祖)박언침(朴彦枕)의 8세(世)에서 6파(派)로, 그 아래에서 다시 6파(派)로 나뉘어 크게 12파(派)로 분파(分派)되어 파(派)마다 중조(中祖)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각기(各岐) 또 여러 소파(小派)로 분파(分派)되어 내려오고 있다.

3.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밀양
밀양(密陽)은 지금의밀양시(密陽市) 일원에 있던 지명(地名)으로 삼한(三韓)시대(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했으며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었다고 한다. 법흥왕(法興王) 때 신라(新羅)에 병합(倂合)되어 추화군(推火郡, 밀벌 또는 미리벌)이 설치(設置)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改編)하였다. 995년(고려(高麗) 성종(成宗) 16)에는 밀주(密州)로 개칭(改稱)하였고, 1018년(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改編)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군민(郡民)의 모반(謀叛) 사건(事件)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降等)되어 계림부(鷄林府:慶州)에 편입(編入)되었다가 후(後)에 현(縣)으로 승격(昇格)하였다. 1285년에는 군(郡)으로 승격(昇格)되었으나 다시 현(縣)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밀양부(密陽府)로 승격(昇格)하였다. 조선(朝鮮) 1415년(태종 15)에밀양(密陽)도호부가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경상남도(慶尙南道)밀양군(密陽郡)이 되었다. 1918년에는 부내면이밀양면(密陽面)으로 개칭(改稱)되고 1931년에밀양읍(密陽邑)으로, 1989년 시(市)로 승격(昇格)하여 독립(獨立)하였다. 1995년밀양군(密陽郡)이밀양시(密陽市)에 통합(統合)되었다.

4.밀양박씨(密陽朴氏) 12계파(系派)
-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 파조박언부(朴彦孚).

-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 파조박언상(朴彦祥).

-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 파조박언인(朴彦仁).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 파조박양언(朴良彦).

- 판도판각공파(版圖判閣公派) : 파조박천익(朴天翊).

-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 : 파조박을재(朴乙材).

- 규정공파(糾正公派) : 파조박현(朴 鉉).

-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 : 파조박원(朴 元).

- 밀성군파(密城君派) : 파조박척(朴 陟).

-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 파조박중미(朴中美).

-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 : 파조박원광(朴元光).

- 정국공파(靖國公派) : 파조박위(朴 蔿).

이 중 규정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밀양박씨의 60% 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 또한 규정공파, 밀성군파, 좌복야공파, 사문진사공파등에서 많이 배출했다.

밀양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61명, 상신 1명, 문형 1명, 청백리 2명,

공신 6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 밀양박씨 규정공파 중시조
박 현 朴 鉉 (1253~1340),
-박혁거세의 45대손이자 밀성대군 언침의 16세손,규정공파 중시조

규정공 휘(諱) 현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으로 고려 의선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의 종3품 규정과 태사를 지냈으며 수교충절록(受敎忠節錄)에 의하면 대사헌 박상충(朴尙衷)이 상서하여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의(忠義)를 다한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라 하였다고 전전(田傳)이 상소(上疏)를 고려태사 대사공신(代死公臣) 청백리 박현은 크게 글을 일으키고 몸을 날에 순절(殉節)하여 천지를 다시 밝혀 명성이 멀리 퍼졌다고 하였다. 후에 퇴직하시여 87세의 수를 누리셨다. 묘는 잠수부(岑州府) 남쪽 40리 두매산 아래 자좌에 신득을 파하고 모시였으니, 지금의 장단군(長端郡) 장도면(長道面) 두매리(杜梅里) 성주동(聖主洞)인데 잃어버렸다고 전하였기에, 고양군(高揚郡) 원당읍(元堂邑) 주교리(舟橋里) 두응촌(豆應村)과 완주군(完州郡) 용진면(龍進面) 간중리(澗中里) 봉서동(鳳捿洞) 에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받들어 온다. 옥천군 원덕사(遠德祠)와 고흥군 숭양사(崇陽祠)와 장흥군의 세덕사(世德祠)와 경산 율산(栗山)에 위폐를 모시고 고향사를 받들고 있다.

❐ 밀양박씨 규정공파 공간공파 중시조
박 건 朴 楗 (1434~1509)
-박혁거세의 52대손이자 밀성대군 언침의 23세손.규정공파8세손 공간공파 중시조

공간공 휘(諱) 건 자는 자계(子啓)이고 호는 연봉(蓮峰)이다. 존성재 미(楣)의 아우로 공효공 중손의 아들이다. 외조는 남평인 정랑 문승조(文承祚)이고 처부는 전주인 부평부사 최윤이다. 1452년(단종원년)에 사마시에 뽑혀 가을에 식년시(式年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이 되고 영주 18학사(瀛洲十八學士)에 올랐다. 성균관 직강(直講) 이조정랑(吏曹正郞), 예문관 응교 성균관 사예를 거쳐 검상을 지냈다. 1455년(세조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고 사인 예문관 직제학 첨지중추부사 승정원 우부승지를 거쳐 1468년(예종즉위) 전라(全羅), 강원(江原), 경상(慶尙), 평안 관찰사(平安觀察使), 한성부 우윤에 오르고 1472년(성종3)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477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병조, 예조, 공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우참찬(議政府左右參贊)이 되었다가 1503(연산9)년에 함경도관찰사(咸境道觀察使)로 좌천(左遷)되었다가 1506년 판중추부사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익대정국훈(翊戴靖國勳)으로 밀원군에 피봉 되었다가 밀원부원군(密原府院君)에 좌찬성(左贊成) 겸영경영사(兼領經筵事)로 승진되었다.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고 애도하여 조회를 쉬고 시호(諡號)를 공간(恭簡)이라 하고 부조지전을 내렸다.

※ 밀성대군파가 밀양박씨가 된 이유 → 조선 태종 15년(1415) ‘밀성군’이 ‘밀양도호부’로 명칭이 바뀐뒤로 계속하여 ‘밀양’으로 되어 밀양박씨인 것임. 만약 지금도 ‘밀성시’라는 행정명을 사용하고 있다면 ‘밀성박씨’라고 불렀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