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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재사

죽재권혁무 2013. 11. 23. 16:32

봉산재사(鳳山齋舍)

봉산재사는 시조로부터 19世이고 오위(五衛) 사정공(司正公)이며 호는 항일재(向日齋) 권수해(權壽海)를 봉사(奉祀)하는 재사이다.

 

봉산재사 이건 고유제 및 사정공(司正公) 추향봉행

-일시: 2013년 11월 12일(화) (음력 10월 10일 오전 9시)

-장소: 경주시 안강읍 구강길56-13

- 봉산재사를 두류에서 구강으로 이건하다.

- 사정공(司正公)휘 수해(壽海)의 묘를 이장하다.

- 용천군수 청안이공 휘 유미(裕美)의 묘를 같이 이장하다.

- 처사공 휘 윤신(潤身)의 묘(휘 경충(敬忠)의三子)를 같이 이장하다.

-초헌관-권의언, 아헌관-권칠만, 종헌관-권혁광, 집례-권혁근, 축-권혁조 이하 집사분정은 생략합니다.

-제관 80여명이 참제하여 엄숙히 거행하였다.

 

사정공(司正公) 휘 수해(壽海)

사정공(司正公)은 태종 10년 용궁읍 대죽리에서 경력공(經歷公) 휘 관(寬)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향일재(向日齋)이며 포항 효자동 대잠에 입향했다. 증조는 송고공(松皐公) 휘 초(軺)이고 고조는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이다.

공이 오위(五衛)의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단종(端宗)이 손위 됨에 백씨 죽림공과 함께 사육신과 연좌되어 연일(延日)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 공은 마당에 해바라기를 심고 문지방에 향일재(向日齋)라고 편액하니 선왕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을 의미한 것이다. 세조 12년 57세로 졸하니 묘소는 포항시 효자동에 있었는데 포항제철소 건설로 안강읍 두류리 비봉산으로 이장하였다. 효자동 구지에 유허비가 있다.

봉산재는 향일재(向日齋) 수해(壽海)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68년 안강읍 두류1리 310번지에 세운 재사이다. 본 재사는 1469년 영일군 대잠동에 추원재를 건립하고 묘향을 받들었으나 포항제철소로 편입되어 묘소와 함께 두류동으로 옮기고 봉산재(鳳山齋)라 이름하였다. 봉산재사 기문에 단종이 어려움을 당하여 금고를 면치 못하고 영일로 귀양 오셨다가 병술(丙戌)에 운명하셨다. 재사를 지어 5백여 년 내려왔으니 후손들에게 음덕을 주셨다. 이곳에 제철소가 서니 문중회의를 열고 향일재공이 적거(謫居)하였던 고을 봉산낙맥에 묘지를 구하니 이곳이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두류산 기슭이다. 재실 또한 이곳으로 옮겨 세우니 후손들이 유숙하며 제향을 올린다. 선생의 독실한 우애, 지극한 효성, 고고한 절개는 옛글에 소상히 실려 있다. 후손들에게 봉산재 현판을 걸은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18대손 택훈씨 두류리 봉산재 옆 368번지에 종택이 있다.

사정공은 4남 2여를 두었으니 장남은 효충(孝忠), 차남은 경충(敬忠), 3남은 달충(達忠), 4남은 의충(義忠)이다. 효충(孝忠)은 사직이며 경주에 시거(始居)하였으며 묘소는 포항시 흥해읍 옛 고을 상달산에 있으며 배위가 뒤에 있다. 효충의 아들 명추(命錘)는 봉직랑 상의원 직장이고 집중(執中), 득중(得中), 계중(繼中)을 두었다. 3남 계중(繼中)은 군자감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묘소는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재궁동 주산 선고 묘 계하에 있다.계중의 장자는 덕기(德麒)이며 무후하고 차자는 귀봉공 덕린(德麟), 3자는 덕란(德鸞)으로 군자감정으로 추증되었다. 의충(義忠)은 호가 송죽당(松竹堂)이고 묘소는 포항시 흥해읍 죽전리에 있다. 의충(義忠)의 6대손 목양정(牧養亭) 치웅(致雄)은 선조 병오(丙午)년에 출생하여 일찍이 경학을 연마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선친이 졸하니 여묘살이를하여 공조참의로 증직되었다. 97세에 졸하니 묘는 안동 아동에 있으며 교리 이중구가 묘갈을 찬 하고 정자 최현필이 썼다. 경주시 평동 수북마을 770에 선생을 기리기 위한 목양정(牧養亭)이 있다.

2013년 11월 23일 종후손 혁무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