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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노봉서원(魯峯書院)은 내신마을의 신당초등하교 옆 노사봉 아래 서향으로 좌정하고 있는 5동의 건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사주문을 통하여 강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강당 뒤편에 전사청이 있다. 그 오른쪽에 내삼문과 사당(숭의사)이 위치한다. 강당 왼쪽 협문 밖에는 관리사가 있고, 담장 바깥 울창한 송림 앞에는 연못이 있다. |
건축 배경 |
노봉서원은 1794년(정조 18) 단종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후 1866년(고종 3) 훼철된 후 도산서원의 통문(通文)으로 병산서원·호계서원·역동서원과 도내 여러 사림의 찬동을 얻어 1921년에 현 위치에 세워졌다.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를 제향하고 있다. |
건축 구성 |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서쪽으로부터 온돌방 2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뒤쪽과 오른쪽에는 툇마루가 있으나 왼쪽에는 없다. 대청 2칸의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밀폐된 실내공간을 이룬다. 건물은 높은 자연석 기단 뒤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사용하였고, 지붕가구는 삼량가로서 간소하다. 몽양재(夢養齋)·건척재·상이당이라고 양각된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인 숭의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자연석 기단과 초석 위에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 사이에는 두 짝 살문을 내었고, 앞쪽으로 툇간을 두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인 신도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다. |
관련이야기 |
- 노봉서원 |
노봉서원(魯峯書院)은 호명면 내신리에 있다. 호명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예천군 지역으로 본포리에 있는 범우리의 뜻을 따서 호명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본동’, ‘원곡’, ‘송곡’, ‘금릉’, ‘한어’, ‘본동’, ‘형호’, ‘오천’, ‘산합’, ‘백송’, ‘직산’, ‘황지’, ‘월포’, ‘종산’, ‘내신’, ‘담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명면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안동시 풍산읍, 서쪽으로는 지보면과 개포면, 남쪽으로는 지보면과 안동시 풍천읍, 북쪽으로는 예천읍과 보문면에 접한다. 내신리는 호명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7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신당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내동’과 ‘신동’의 이름을 따서 내신리라 하고 예천군 호명면에 편입되었다. 내신리는 ‘내동’, ‘양촌’, ‘신동’, ‘지내’, ‘범장골’, ‘신당동’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신당동’이다. 신당동은 ‘신당골’이라고도 한다. 신당 못 부근에 있는 마을이며, 1914년 전까지는 신당면의 중심지였다 |
관련인물
관련인물 |
- 권산해 |
권산해(權山海, 1403~1456)는 지보면 대죽리 한대(大竹) 마을 출신이다.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시호는 충민(忠愍), 본관은 안동이다. 권관(權寬)의 맏아들로, 단종 임금의 이모부이며, 좌의정 권진(權軫)의 제자다. 1440년(세종 22)에 창덕궁 녹사 및 주부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오르지 않다 단종이 즉위한 후 1454년에 종부시 첨정(僉正)의 벼슬을 하였다. 1456년 단종이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고, 세조가 즉위하여 찰방 벼슬을 내렸으나 세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성삼문 등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을 다시 임금 자리에 앉히려다 사육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분을 못 이겨 대죽리 고향으로 돌아와 숨어 살았다. 그러던 중 사육신이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내 살아서 단종을 구하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하며 통곡하면서 지붕 위에 올라가 투신 자결하였다. 동생 권수해(權壽海)가 상주인 철명(哲命), 철손(哲孫) 그리고 사위인 정난원(鄭蘭元)과 더불어 지보면 신풍리 피앗골(念松山)의 묘터에 외로이 장사 지냈다. 온 가족이 바닷가 영해로 유배되고, 자손은 오랜 세월 벼슬에 나아갈 수 없는 형벌을 받았는데, 이후 1785년에 후손 권종락이 억울한 것을 풀어달라 하여, 1789년 종부시 첨정 벼슬을 되찾아 양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1791년 정조 임금이 수원을 거쳐 영월 단종릉으로 거동할 때, 경기?충청?경상 3도 선비 2천여 명이 그 길목에서 청하여 충신으로 정려되었다. 정충각(旌忠閣)을 지보면 대죽리에 세웠다가 1862년에 무덤 옆으로 옮겨졌고, 1956년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또 1791년 이조참판에 이어 1884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785년에는 월성군 강동면의 운곡서원, 1794년에는 호명면 내신리 신당(新塘) 마을의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되었다. 권산해는 성격이 강직하고, 지조가 매우 굳고, 재주가 있었다. 권산해의 부인은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문종 임금의 아내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언니다. 현덕왕후는 단종과 경혜공주를 낳았다. 그러므로 권산해는 문종과 동서 간이고 단종의 이모부다. |
마을이야기
예천 > 예천호명권 > 내신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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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신리. | |
내신리는 호명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7㎞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신당면(新塘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내동’과 ‘신동’의 이름을 따서 내신리라 하고 예천군 호명면에 편입되었다. 내신리는 ‘내동’, ‘양촌’, ‘신동’, ‘지내’, ‘범장골’, ‘신당동’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신당동’이다. 신당동(新堂洞)은 ‘신당골’이라고도 불린다. 신당못 부근에 있는 마을이며, 1914년 전까지는 신당면(神堂面)의 중심지였다. 내동(內洞)은 ‘안골’이라고도 불린다. 열두 신당골의 한 마을이며, 마을 뒤의 화봉산 동쪽에 새로 생긴 못이 있었으므로 옛날부터 신당(新塘)골이 되었다. 화봉산 기슭의 무구ㆍ목골ㆍ새골ㆍ안골 중 안골에 위치한 신당못 안쪽이고, 못 뒤 남쪽이다. 양촌(陽村)은 ‘양지마’라고도 불린다. ‘범장골’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20가구의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성촌이다. 마을이 남향이라서 종일토록 햇볕이 잘 드는 나지막한 언덕바지 마을이라고 양지마을이다. 신동(新洞)은 ‘새마’ 또는 ‘샛마’라고도 불린다. ‘내동’에 살던 진성이씨(眞城李氏)가 조선 중엽 응달을 피하여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와서 못 뒤와 모산의 중간에 새로 개적한 마을이다. 내신동(內新洞)의 중심 마을이었던 15집이 살고 있는 곳이다. 지내(池內)는 ‘모산’이라고도 불린다. ‘범장골’의 서편에 있으며, 소쿠리 테 모양의 양지바른 지형이다. 또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앞에 못이 있었고, 그 못 안쪽의 동쪽에 안동권씨만 사는 마을이 지내(池內)이다. 범장골은 신당국민학교(新塘國民學校)가 있는 마을이다. 풍수설에 산세가 범이 잠든 형상과 같다고 ‘범장골’이라 부른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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