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次
十七世 송고공(松臯公) 諱 초(軺)
高麗判事松臯公墓碣銘
麗末忠義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墓碣銘幷序
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遺墟碑銘幷序
十八世 경력공(經歷公) 諱 관(寬)
司直行朝散大夫義禁府經歷權公墓碣銘幷序
十九世 죽림공(竹林公) 諱 산해(山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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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世 송고공(松臯公) 諱 초(軺)
호는 송고(松臯)이다. 개령공(開寧公) 지(輊)의 아우로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의 여섯째아들이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제용감(濟用監)의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누차 부름을 받아 함경도 관찰사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백씨(伯氏) 경산공(慶山公) 곡(穀)과 매부(妹夫)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와 더불어 이르기를, “나라의 종묘사직이 이미 옮겨갔으니 우리는 마땅히 은둔할 뿐이다[신기기이(神器旣移) 아배당둔(我輩當遯)]”고 한탄하고는 드디어 경북 예천(醴泉) 땅의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 아래 대죽리(大竹里)로 들어가 병거(屛居)하니 그 산 이름을 고쳐 이르기를 고려조(高麗朝)의 서울 송도(松都)를 생각한다는 뜻의 염송산(念松山)으로 불렀다. 또한 스스로 호를 일컬어 송고(松臯)라 하였는데 이는 개경(開京) 송도(松都)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공이 비록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 여생을 전야(田野)에 묻고 마쳤으나 관찰사와 대사성과 같은 큰 관직도 초개(草芥)같이 버리고 기절(氣節)을 지킨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수절신(守節臣) 중의 한 사람이다. 공이 살던 마을 이름을 지금껏 절동(節洞)라 하는 것 또한 절개를 지키는 동네라는 뜻이니 그 유래가 우연이 아니다. 묘소는 경북 예천 용궁의 염송산 절동에 유좌(酉坐)로 있으며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춘천 박씨(春川朴氏) 중현대부(中顯大夫) 광우(光佑)의 따님인데 건위(乾位) 뒤에 부장(祔葬)되어 있고 비갈(碑碣)이 있다. 아들은 사직(司直)과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을 지낸 관(寬)이 있고 공의 장손(長孫)은 죽림공(竹林公) 산해(山海)이다.
高麗判事松臯公墓碣銘
고려판사 송고공 묘갈명
公은 系出安東하니 太師諱幸이 其鼻祖也라 曾祖諱奕은 贈吏叅永嘉君이요 祖諱用一은 贈左叅贊諡僖敬이요 考諱希正은 贈左議政諡文靖이라 公이 麗朝에 登第하야 官至判事하고 及我朝受禪에 慨然語栢竹裵公尙志曰宗社已墟에 我輩安適하고 遂挈家浮洛에 屛居于念松山하니 譜牒에 曰 除北伯에 不赴하고 又仕版載以大司成云하니 竊念公이 以前朝世臣으로 志全罔僕하야 累召不起하고 遺戒子孫하야 不錄其官하니 噫라 公之言行志節이 必有可傳於來世者而公之孫諱山海가 殉於六臣之禍하야 盡灰遺事未彰하니 至今遺憾云爾라
崇禎紀元後四乙酉四月日
十一世孫迪運은 謹識하노라
공은 안동권씨니 태사(太師) 휘 행(幸)이 시조(始祖)이시다. 증조 휘 혁(奕)은 증직 이조참판(吏曹叅判)이며 영가군(永嘉君)이요, 할아버지 휘 용일(用一)은 증직 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요, 아버지 휘 희정(希正)은 증직 좌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공이 고려조(高麗朝)에 급제해서 관직이 판사(判事)에 이르렀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공과 탄식(歎息)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라가 터만 남았으니 우리는 어디로 갈고” 라고 말씀하시고 드디어 식구들을 데리고 낙동강을 따라 염송산(念松山) 아래에 은거해 사시었다 보첩(譜牒)에는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또 벼슬아치 명부(名簿)인 사판(仕版)에 대사성(大司成)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공이 고려(高麗)의 구신(舊臣)으로 망복(罔僕)의 뜻을 지키려고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 그 관직을 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아! 공의 언행(言行)과 지절(志節)이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일이었으나 공의 손자인 휘 산해(山海)가 육신(六臣)의 화(禍)로 순직(殉職)하면서 모두가 소실(燒失)되어 업적(業績)이 나타나지 못하니 지금까지 한(恨)이 될 뿐이다.
순조 25년 을유년(1825) 4월 일에 11세손 적운(迪運)은 삼가 기록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예천군 지보면(知保面) 대죽리(大竹里) 절동(節洞) 염송산(念松山)에 있다
麗末忠義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墓碣銘幷序
여말 충의 문과 판제용감사 송고선생 권공 묘갈명 병서
龍宮念松山節洞之麓坐酉之原 有崇三尺者 麗末忠義松臯先生權公衣履之藏也 距今六百餘載 墓域陵夷 儀物蕭條 而數尺短碣之碑陰 太簡而略 且歲久磨滅 字畫難分 不億之孫 不勝憂懼 將擬修治墓域爲營改碣 以備儀物之全 齊會而殫誠發議 衆論歸一 使寧夏赫根赫光赫性君 造余而請銘 余雖不文 事同一室 且公與鄙先祖思復齋公 同朝節臣 世分有別 故終不能孤 謹按 公諱軺 姓權氏 系出安東 始祖諱幸 本新羅宗姓 佐麗祖 討甄萱 以炳幾達權 賜姓權 拜大相太師 遂采邑于安東 陞郡爲府 遺民思公德義 立太師廟妥享 又士林公議 享雲谷院 至十世諱至正佐尹 是爲派祖 生諱世位樞密院副使 生諱良俊別將副正行兵曹正郎 生諱粹文科 生諱奕文科中門祗候 贈吏參 追封永嘉君 生諱用一門下侍中 贈左參贊 諡俙敬公 生諱希正監察糾正 贈左議政 諡文靖公 三世推贈 皆公之三子左議政諡文景諱軫之貴也 是公父祖以上七世世德 妣曰贈貞敬夫人彦陽金氏府使可器之女 公卽六子也 生卒與字 佚而無傳 譜牒祇載麗朝文科判濟用監事 入本朝 除北伯 又除大司成 皆不就 與伯兄版圖公諱轂 姊兄栢竹堂裵公諱尙志嘆曰 神器旣移 我輩當遯 遂屛居于龍宮濂松山下大竹里 更名其山曰念松山 自號松臯云 餘無可考之徵 而于以自靖卒世 後人名其洞曰節洞 墓已見上 配曰淑夫人春川朴氏中顯大夫光佑之女 墓祔前 育一男 曰寬義禁府經歷 經歷有六男二女 男長曰山海宗簿寺僉正 景泰丙子禍 投閣自盡 與六臣同殉 旌閭 累贈至大冢宰 諡忠愍公 享雲谷魯峯兩院 次自海察訪 次福海 次壽海司正 次德海 次得海 女適李堯丁縣監 適權守經武科 山海男哲祖 哲宗 哲命別提 哲孫判官 女適鄭蘭元縣監 壽海男孝忠司直 敬忠 達忠 義忠 哲祖男稱 哲命男經生員 綸敎授 純參奉 綬直長 哲孫男敏 保功部將 孝忠男命錘 命均 命銓 敬忠男潤祖 秀祖 潤身 達忠男邦彦 義忠男潤衡 餘不錄 於乎 公以七世之蟬聯赤舃 申之以七弟兄之偉風大德 宜有文獻之斑斑可考 而竟沈湮無傳者 推想公長孫忠愍公 以景泰禍 削奪官爵 家餘烈徙邊 而百年禁錮之故 有以致此 便作杞宋之嘆 吁亦可恨然 至今行路之過公墓域 趍蹌而指點公墓域曰 忠義權公之墓也 公之德 有何加損於文獻之存不存哉 憲祖 生於公六百餘年之後 而且淺劣蒙昧 縱欲贊美 力量之所不及也 亦恐犯穢佛之嫌 不能陳所感 摭其譜牒及舊碑陰 略修上系及子孫錄 系之以銘曰
世有令聞 鐵步相傳 淵源家學 得之于天 德重學邃 早陞桂籍 志操堅確 忠心介石 累除不赴 守貞韜光 首陽節赫 翠薇風長 莫嘆杞宋 口碑不息 我銘非諛 行路必式
黃鼠林鍾月上澣 宗後孫 權憲祖 謹撰
용궁(龍宮) 염송산 절동(節洞) 산기슭 유좌(酉坐) 터에 큰 묘소가 있으니 고려말에 충의를 지키신 송고(松臯) 권선생이 잠드신 곳이다. 육백 년이 넘는 지금에 봉분이 무너지고 간단한 석물로 짧고 작은 비석에 간단한 비음기문(碑陰記文)이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많은 자손들이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 금할 수 없어서 앞으로 묘역을 정비하고 개갈(改碣)해서 묘역의 의장(儀裝)을 꾸미려고 하는데 자손 모두가 뜻을 같이 해서 일을 하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영하(寧夏) ・ 혁근(赫根) ・ 혁광(赫光) ・ 혁성(赫性) 군을 시켜서 나에게 와서 비문을 지어달라고 하니 내 비록 학문이 부족하지만 내 문중의 일과 다를 것이 없고 또 공과 나의 선조인 사복재(思復齋) 공은 같은 왕조에 같은 절의를 지키신 분이어서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삼가 사적을 고증하니 공의 휘는 초(軺), 성은 권씨(權氏),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시조의 휘는 행(幸)이시고 원래 신라종성(新羅宗姓)이시다.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벌할 때에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다는 의미로 권씨 성과 대상(大相)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리시고 안동을 식읍으로 주시면서 안동을 부(府)로 승격시키니 안동 백성들이 태사공의 음덕(蔭德)과 대의(大義)를 사모하면서 태사묘(太師廟)를 지어서 제사를 올리고 또 사림의 공의로 운곡서원을 세우게 되었고 십세(十世)인 휘 지정(至正)에 이르러 좌윤(佐尹)을 하셨으니 이 분이 파조(派祖)시다. 이 분의 아들 세위(世位)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시며 아들의 휘는 양준(良俊)이며 별장부정(別將副正) 행병조정랑(行兵曹正郎)이며 이 분의 아들 휘는 수(粹)니 문과(文科)급제하시었고 이 분의 아들 휘 혁(奕)은 문과급제하시어 중문지후(中門祗候)가 되시었고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시었다. 이 분의 아들 휘 용일(用一)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증직(贈職) 좌참찬(左參贊)이시고 시호(諡號)는 희경(俙敬)이시고 그 아들 휘 희정(希正)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며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다. 삼대의 증직은 다 공의 삼자(三子)인 좌의정(左議政) 시호 문경(文景) 휘 진(軫)의 직위에 따른 것이다. 이상이 공의 아버지로부터 칠대의 덕이 이어진 것이다. 비(妣)는 증직(贈職)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부사(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시다. 공은 제육자(第六子)로서 생졸년(生卒年)이나 자(字)도 전해지지 못하고 보첩(譜牒)에는 단지 고려조에 문과(文科)급제하신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이며 조선조에서 함경도 감사를 제수하고 또 대사성을 제수했으나 두 직위를 다 사양하시고 백형인 판도공(版圖公) 휘 곡(轂)과 자형(姊兄)인 백죽당(栢竹堂) 배공(裵公) 휘 상지(尙志)와 더불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왕조가 바뀌었으니 우리들은 당연히 은둔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고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 아래 대죽리(大竹里)에 낙향해서 살면서 산은 염송산(念松山)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인의 자호(自號)를 송고(松臯)라고 했다“고 되어있고 그 이상은 더 고증할 수 없다. 이렇게 종용(從容)하게 사시다가 세상을 뜨시니 후인들이 그 마을을 절동(節洞)이라 했고 묘지는 위에 이미 기록이 되어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춘천박씨(春川朴氏) 중현대부(中顯大夫) 광우(光佑)의 따님이시다. 묘는 앞에 부장(祔葬)되어있다.
아들이 독자(獨子)인데, 휘 관(寬)이며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이시다. 이 분의 아들은 육남이녀(六男二女)를 두셨는데, 장남 산해(山海)는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인데 경태(景泰)년간에 단종 손위 사건 때에 지붕위에서 투신 자진하시어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순직(殉職)을 하시어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여러 차례 증직으로 이조판서에 오르시었고 시호(諡號)는 충민(忠愍)이며 운곡(雲谷) ・ 노봉(魯峯) 두 서원에 모시었다. 차남인 자해(自海)는 찰방(察訪)이며 셋째아들은 복해(福海), 넷째아들 수해(壽海)는 사정(司正)이다. 다섯째아들은 덕해(德海), 여섯째아들은 득해(得海)다. 사위는 현감(縣監) 이요정(李堯丁)과 무과(武科) 권수경(權守經)이다. 산해(山海)의 아들은 철조(哲祖)와 철종(哲宗)과 별제(別提)인 철명(哲命)과 판관(判官)인 철손(哲孫)이며 사위는 현감(縣監)인 정난원(鄭蘭元)이다. 수해(壽海)의 아들은 사직(司直)인 효충(孝忠)과 경충(敬忠)과 달충(達忠)과 의충(義忠)이다. 철조(哲祖)의 아들은 칭(稱)이며 철명(哲命)의 아들 경(經)은 생원(生員)이며 윤(綸)은 교수(敎授)이고 순(純)은 참봉(參奉)이고 수(綬)는 직장(直長)이다. 철손(哲孫)의 아들 민(敏)은 보공부장(保功部將)이다. 효충(孝忠)의 아들은 명추(命錘)와 명균(命均)과 명전(命銓)이다. 경충(敬忠)의 아들은 윤조(潤祖)와 수조(秀祖)와 윤신(潤身)이다. 달충(達忠)의 아들은 방언(邦彦)이다. 의충(義忠)의 아들은 윤형(潤衡)이다. 더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일곱 세대 동안 관직을 이어온 후손이시며 또 일곱 형제의 맏이로서 거룩한 풍채와 큰 덕망이 있으시어 당연히 아름다운 문헌을 남기시어 상고(詳考)할 것이 있을 것인데, 끝까지 사라져서 전하지 못한 것은 미루어 생각하면 공의 장손(長孫) 충민공(忠愍公)이 단종 손위 때에 삭탈관작(削奪官爵) 당하고 온 식구가 사변(徙邊)되고 백년금고(百年禁錮)를 받았기 때문에 없어졌을 것이니 참으로 기송지탄(杞宋之嘆)을 하게 되었다.
아! 이것이 또 한스럽다. 하지만 지금 길을 가는 나그네도 공의 묘역을 지나다가 머뭇거리면서 공의 묘를 가리키면서 충의를 지킨 권공의 묘소라고 하니 공의 덕(德)이 문헌이 있다고 해서 이보다 더 나타날 수 있겠는가? 나는 공(公)보다 육백여 년 후에 태어났고, 또 용렬하고 우매해서 공의 미덕을 찬양하고 싶으나 능력이 부족하고 또 잘못된 말로 누를 끼칠까 염려가 되어 생각대로 다 쓰지 못하고 족보와 옛 비문을 근거해서 이상과 같이 대략 선계(先系)와 자손(子孫)을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쓴다.
世有令聞(세유령문)
대대로 명성이 있었고
鐵步相傳(철보상전)
위대한 업적 이어진 것은
淵源家學(연원가학)
가학의 근원을
得之于天(득지우천)
하늘이 내려준 것이어서
德重學邃(덕중학수)
덕망과 학문으로
早陞桂籍(조승계적)
일찍이 벼슬길에 으르시어
志操堅確(지조견확)
지조가 확고하고
忠心介石(충심개석)
충성심이 반석같이 굳으시어
累除不赴(루제불부)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고
守貞韜光(수정도광)
은거해서 절의 지키시니
首陽節赫(수양절혁)
백이숙제 같은 절의가 빛나고
翠薇風長(취미풍장)
채미(採薇)의 기풍이 길었습니다.
莫嘆杞宋(막탄기송)
증거 없다 한탄하지 마십시오.
口碑不息(구비불식)
칭송이 끝없이 입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我銘非諛(아명비유)
내가 지나친 칭찬으로 명을 쓴 것이 아 니 라
行路必式(행로필식)
길가는 사람들도 경의를 표합니다.
무자년(2008) 6월 상한 종후손 권헌조 근찬. <국역:권기갑(權奇甲)>
文判濟用監事松臯先生權公遺墟碑銘幷序
문과 판제용감사 송고선생 권공 유허비명 병서
先生 以勝國卓節 繼以長孫忠愍公竹林先生魯陵之禍患 忠愍公夫人權氏 恐有後患 家藏書籍一無所餘 盡燒無痕 又子孫徙邊 禁錮百年 近數百年 零替棲屑 文獻蕩佚 無傳 至於先生墓道之顯刻 太甚蕭條 歲久磨滅 字畫難分 而又未知誰之所撰 積世累擬改碣 世故因仍 竟未果焉 數年前 賢仍殫誠合謀 崇碑改碣 又當日守靖斂晦之地 尙無遺墟之表德 繼以爲竪碑之策 余聞風而起敬嘆嘗 思欲往賀 月餘前 寧夏君 踵門而請銘 顧余不文僭撰墓銘 實所愧赧 况重此謬託 無或乎不思之太甚乎 累累辭之 寧夏君 起以復之曰 世非無秉管君子 然門父老 使余請于族兄者 亦有所以然也 松臯先祖 與貴先祖思復齋先生 同節義 故鄙派門議 欲乞於同宗同節義後孫者 如合一辭少無鑿枘之不貳 願族兄 愼勿固辭 其請益勤 辭不獲已 謹按 先生諱軺 姓權氏 系出安東 始祖諱幸 本新羅宗姓 敬順王時 佐麗太祖討甄 三重大匡亞父功臣 拜大相太師 以炳幾達權 賜姓權 遂食采于安東 子孫因以爲貫 享太師廟雲谷院 至十世諱至正佐尹是爲派祖 生諱世位樞密院副事 生諱良俊兵曹正郎 生諱粹文科 生諱奕文科中門祗候 贈吏參 追封永嘉君 生諱用一門下侍中 贈左參贊 諡俙敬公 生諱希正監察糾正 贈左議政 諡文靖公 寔先生之皇考 三世推榮 皆三子左議政諡文敬公諱軫之貴也 妣曰 贈貞敬夫人彦陽金氏 金海府使可器之女 先生之生卒與字 累經患亂 盡佚無傳 麗季文判濟用監事 麗鼎訖 守僕之義 國初 除北伯大司成 皆不就 與伯兄版圖公諱轂 姊兄栢竹堂先生裵公諱尙志 嘆曰 神器旣移 我輩當遯 遂斂晦于龍宮濂松山下大竹里 改山名濂松山爲念松 自號松臯 于以卒世 時人稱其洞曰節洞 壽藏于節洞山負酉原 於乎 先生之忠義 徜徉薖軸之所 六百餘年 枵然作寂寞之地 今始闡發 顯晦之待時也 亦賢仍善述之誠也 孰不曰有是祖而有是孫也哉 憲祖 以先生之宗後孫 追思鄙先祖同節義之誼 則宜當詳悉贊美乎先生之事蹟 識淺而且訥於辭 縱不能及焉 然昭載於譜牒 亦不輟於輿誦 復何敢架疊也哉 祇敍遺墟豎碑之由 系之以銘曰
鐵石之竪 松竹之貞 累徵不就 斂晦韜名 首陽孤標 翠薇風節 有孫忠愍 丕承其烈 歲經六百 尤光其德 恨無棹楔 天意莫測 當日逍遙 餘香不沫 行路指點 古今不輟 孰使然也 彛衷不革 我銘斯石 以表其蹟
己丑仲春下澣 宗後孫權憲祖 謹撰
선생은 고려조(高麗朝)에 높은 절의를 지키신 분이고 계속해서 장손 충민공(忠愍公) 죽림선생(竹林先生)이 단종(端宗) 손위(遜位)의 화를 입어서 충민공(忠愍公)의 부인(夫人) 권씨(權氏)께서 후환(後患)이 두려워서 집에 있던 모든 서적(書籍)을 다 불태워 없앴고 또 자손(子孫)들이 사변(徙邊) 당하고 백년금고(百年禁錮)를 겪으면서 거의 몇 백 년을 한미(寒微)하게 살면서 기록이 없어졌고 선생의 묘소 비문(碑文)마저 매우 내용이 소략(疏略)하고 오래되어 작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으니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비석을 새로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세상이 불안해서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훌륭한 자손들이 정성을 쏟고 뜻을 모아 큰 비석을 다시 세웠으나 선생이 당시에 은거하시던 곳에 아직까지 덕망을 기리는 유허비가 없어서 잇달아 비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으니 내가 그 소문을 듣고 존경스럽고 감탄하는 마음으로 가서 하례(賀禮)하고 싶었는데, 한 달 전에 영하군(寧夏君)이 내 집을 찾아와서 비명(碑銘)을 청하니 내가 자신을 돌아보면 부족한 글로 묘비명을 지은 것도 참람해서 매우 부끄러운 처지인데, 하물며 이렇게 큰일을 부탁하는 것은 사람을 잘못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일이어서 누누이 사양했으나 영하군(寧夏君)이 다시 말하기를 “세상에 비문을 쓸 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중의 부로(父老)들이 나를 시켜서 족형에 부탁한 것은 그럴만한 연유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송고(松臯) 선조는 귀(貴) 선조 사복재(思復齋) 선생과 같이 절의(節義)를 지키시었기 때문에 비파(鄙派)의 문중 의논이 같은 절의를 지키신 분의 후손에게 글을 받고 싶다고 하나같이 말하고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족형은 사양하지 말라”고 간청하니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었다.
삼가 살펴하니 선생의 휘는 초(軺)요 성은 권씨(權氏)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시조(始祖)의 휘는 행(幸)이니 원래 신라왕(新羅王)과 같은 성(姓)이었다. 경순왕(敬順王) 때에 고려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벌하고 삼중대광아보공신(三重大匡亞父功臣)이 되시고 대상(大相) 태사(太師)의 벼슬을 받았으며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했다는 의미로 권씨 성과 안동을 식읍으로 받고 따라서 자손이 안동을 관향으로 하고 태사묘와 운곡서원에 모시게 되었으며 십세(十世) 휘(諱) 지정(至正)이 좌윤(佐尹) 벼슬을 하시고 이 분이 파조(派祖)시다. 파조의 아들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事)며 이 분의 아들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郎)이며 이 분의 아들 휘 수(粹)가 문과급제하시고 아들 휘(諱) 혁(奕)도 문과급제하고 중문지후(中門祗候)였으며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시었다. 이 분의 아들 휘(諱)는 용일(用一)이며 고려관직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 좌참찬(左參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俙敬)이시다. 아들 휘 희정(希正)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며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신데 이 분이 선생의 아버지시고 삼세(三世)의 증직은 다 제삼자(第三子) 좌의정(左議政) 시호 문경(文敬)이신 휘(諱) 진(軫)의 벼슬에 따라 받은 것이다. 어머님은 증직(贈職)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며 김해부사(金海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시다. 선생의 생졸년(生卒年)과 자(字)는 환란(患亂)을 겪으면서 전해지지 못했다. 고려말년에 문과(文科)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를 역임하시고 고려왕조가 끝났으나 고려조에 대한 충성심을 잊을 수 없어서 조선조에서 함경도 감사와 대사성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으시고 백형인 판도공(版圖公) 휘(諱) 곡(轂)과 자형(姊兄)인 백죽당(栢竹堂) 배선생(裵先生) 휘(諱) 상지(尙志)와 탄식을 하고 “나라가 없어졌으니 우리들은 당연히 숨어서 살아야 한다”고 하고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 아래 대죽리(大竹里)에 살면서 염송산(濂松山)을 염송산(念松山)으로 부르고 자호(自號)을 송고(松臯)라 하고 생을 마치시니 사람들이 그 동명을 절동(節洞)이라 불렀다. 묘는 절동산 유좌(酉坐)터다. 아! 선생이 충의(忠義)를 지키시며 유유히 생활하시던 곳이 육백년(六百年)이 넘도록 적막하고 쓸쓸하게 있다가 이제 와서 처음으로 자취를 찾아 들어나게 하니 숨겨지고 드러나는 것이 때가 있는 것이지만 어진 후손들의 정성을 보면 그 훌륭한 조상에 훌륭한 자손이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선생의 종후손(宗後孫)으로서 나의 선조와 같은 절의를 지켰다는 족의(族誼)를 미루어 생각하면 당연히 선생의 아름다운 업적을 자세히 천양해야 하지만 식견이 없고 글재주가 서툴러서 부족함이 많다. 하지만 보첩(譜牒)에 소상하게 실려 있는 내용을 길가는 사람들도 칭송하고 있으니 다시 감히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유허비(遺墟碑)의 연유(緣由)를 서술하고 잇달아 명을 쓴다.
鐵石之堅(철석지견)
철석같은 굳은 의지와
松竹之貞(송죽지정)
송죽 같은 충의의 신조로
累徵不就(누징불취)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斂晦韜名(염회도명)
은둔생활 하셨으니
首陽孤標(수양고표)
백이숙제 같은 높은 표상으로
翠薇風節(취미풍절)
고사리 캐먹은 기풍을 가지시었고
有孫忠愍(유손충민)
손자인 충민공은
丕承其烈(비승기열)
선대의 장렬한 뜻을 크게 이으시어서
歲經六百(세경육백)
육백년 세월이 지났으나
尤光其德(우광기덕)
그 아름다운 음덕이 더욱 빛나네.
恨無棹楔(한무도설)
정려가 없는 것을 한을 했으니
天意莫測(천의막측)
하늘의 뜻을 알 수 없었다.
當日逍遙(당일소요)
그 때에 유유자적하시던 곳
餘香不沫(여향불말)
그 향기 사라지지 않아서
行路指點(행로지점)
길가는 사람들도 그 곳을 가리키며
古今不輟(고금불철)
지금까지도 칭송이 이어지니
孰使然也(숙사연야)
어째서 그러할까?
彛衷不革(이충불혁)
사람의 도덕심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我銘斯石(아명사석)
나는 이 비에 명을 새겨서
以表其蹟(이표기적)
그 유적을 알린다.
기축년(2009) 2월 하한에 종후손 권헌조는 근찬이라. <국역:권기갑(權奇甲)>
十八世 경력공(經歷公) 諱 관(寬)
조산대부(朝散大夫)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에 이르고 무산계(武散階) 사직(司直)을 받았다. 배위 김해최씨(金海崔氏)는 현감 중운(仲雲)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염송산(念松山) 선고(先考) 묘소 아래 경좌(庚坐) 연분(連墳)이며 부인이 앞이다.
司直行朝散大夫義禁府經歷權公墓碣銘幷序
公卽松臯之肖胤竹林之賢父也 像想其當時 則宜有可傳之文獻 湮沒而六百餘年寂廖無聞者 非徒賢仍之所齎恨 遠近同宗之所嗟嘆者 久矣 數月前 賢仍純國珠赫寧大容鎬君 踵門而道余曰 松臯先祖及經歷先祖兩世墓所 俱在念松山下節洞之陽同原上下 墓域歲久頹圯 短碣蘚苔 將加修葺 同時改碣爲計 各處散在孱孫 齊誠合謀 方今就事之境 門父老 使不敏四人 請銘于宗長 願宗長俾惠一言銘之 余應之曰 顧余不文 僭撰松臯公碣文 愧不自勝重託是銘 無或乎不思之甚乎 不堪當是役而且事蹟無所影響莫知將何辭 故累累辭之 四君起而復之曰 經歷先祖之事蹟 若有所徵而孱孫之家狀亦備 則請之于他門 實所非難也 一無考據 捨族兄 則無所可乞矣 請益勤 辭不獲已 謹按 公諱寬 字號佚而無傳 姓權氏 安東人 麗末忠義 文判濟用監事 松臯公諱軺之無妹獨子也 妣曰淑夫人春川朴氏 中顯大夫光佑之女 公之生卒 無所可考 官司直行朝散大夫義禁府經歷 墓松臯公墓下負甲原 配曰淑人金海崔氏縣監仲雲之女 墓祔前 上系及子孫錄 詳載先公碣文 不必煩惱加疊矣 於乎 自古名賢事蹟 有美而潛藏 久莫顯者 或因患難而蕩佚者 或因後孫之零替而無傳者 終乃莫顯其眞 卽古人所謂杞宋之嘆者 誠是也 雖然 推想公 則累世冠冕文獻忠義之門 必不無懿蹟 而盖緣長胤忠愍公忠烈之禍家餘烈 有以致此 然 公之後孫蕃衍昌熾 忠孝節烈 文章德行 繼繼承承 菀爲南鄕之盛族 苟非公修德之餘蔭 烏能有是乎 易之所云 積善之家必有餘慶者 豈非公家之謂歟 乃公六百餘年 幽潛之德 今始闡發者 顯晦之有時也 又賢仍善繼述之至誠所致也 蒼天不老而報善之道 誠無訝矣 與其無實而傳會荀章忝辱於地下祖先萬世之靈者 孰若循理而以待公議之闡明乎 余 於公 抑有私焉 鄙先祖思復齋公 與先公 同節義 故兩家之誼 不比尋常同宗 而世講有別矣 今余粗率爲公此役 感慨無量矣 妄以不韙之辭 表揭于阡曰
爲祖而修其德 貽厥嘉猷爲計 後孫樹其實者也 爲孫而盡其誠 承其祖武 闡發先徽 善繼述者也 名門授受之有道 愈久而愈光者也 蒼天報善之有理 必永必昌者也 窈窕竹陽之原 松楸之鬱鬱蒼蒼 君子之攸藏者也 戒以樵牧之勿毁勿傷 永保遺香之無疆者也
戊子流火節 宗後孫權憲祖 謹撰 義城后人金徹壎 謹書 司正公判官公門中 謹竪
공은 바로 송고공(松臯公)의 아드님이시고 죽림공(竹林公)의 훌륭한 아버지시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전할 가치가 있는 문헌이 있었을 것이지만 600년 동안 숨겨져서 전혀 알려지지 못한 것은 그 자손만이 원통했을 뿐이 아니고 멀거나 가까운 우리 종친들도 같이 탄식한 일이었다. 몇 달 전에 훌륭한 자손 순국(純國) ・ 주혁(珠赫) ・ 영대(寧大) ・ 용호(容鎬) 네 분이 내 집을 찾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송고(松臯)선조와 경력(經歷)선조 양대(兩代)의 묘소가 염송산 아래 절동(節洞) 양지에 아래위로 같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서 봉분이 무너지고 작은 비석에 이끼가 붙어서 봉분도 새로 쌓고 비석도 새로 세울 계획을 하고 각처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이 같은 생각으로 정성을 모아 지금 일을 시작하면서 문중의 어르신들이 불민(不敏)한 저희들 넷을 시켜서 족친께 비명(碑銘)을 청하게 되었으니 어른께서는 한편 명을 지어 주십시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나 자신을 반성해보면 글을 쓸 재능이 못되어 참람하게 송고선생의 비문을 쓴 것도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는데, 거듭 이 분의 명(銘)을 지어달라고 하니 아마도 생각을 매우 잘못한 것이 아닌가? 이 일은 감당할 수 없고 또 이 분의 사적(事蹟)에 영향을 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하고 몇 번이나 사양을 했으나 네 분이 다시 말하기를 “만약에 경력선조의 사적을 고증할 수 있고 저희들의 가장(家狀)이 갖추어져 있다면 타문(他門)에 가서 비문을 부탁하는 것도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고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족친이 아니면 누구에게 가서 글을 받겠습니까?” 하면서 더욱 간청(懇請)하니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는 관(寬)이며 자(字)와 호(號)는 기록으로 전해지지 못했고 성은 권씨며 안동이 본관이시다. 고려 말에 가문의 충의와 자신의 학문과 인품이 있었으며 판제용감사를 역임하신 송고선생의 무매독자(無妹獨子)시고 어머니는 숙부인 춘천박씨 중현대부 광우(光佑)의 따님이시다. 공의 생졸년은 고증할 수 없다. 관직은 사직(司直) 행조산대부(行朝散大夫) 경력(經歷)이시다. 묘소는 송고선생 묘아래 갑좌(甲坐) 터다. 배위는 숙인 김해최씨며 현감 중운(仲雲)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건위(乾位) 묘소 앞에 있다. 선대와 자손의 기록은 윗대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거듭 쓸 필요가 없다.
아! 예로부터 명현(名賢)의 사적이 훌륭했으나 숨겨져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못한 경우는 환란을 겪으면서 자료가 없어졌거나 자손이 한미(寒微)해서 전해지지 못해서 끝까지 밝힐 수 없는 것을 고인(古人)들이 말하기를 ‘기송지탄(杞宋之嘆)’이라 한 것은 참으로 이러한 경우를 지칭한 말이다.
하지만 공의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여러 대를 관직을 지내시고 문한(文翰)과 충의(忠義)의 가문이어서 반드시 아름다운 업적이 있었을 것인데, 아마도 그 분의 맏아들 충민공(忠愍公)의 충의로 가문이 화(禍)를 당한 연유로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자손이 번성하고 충효와 절의와 공렬(功烈)과 문장과 덕행이 대대로 이어져서 경주(慶州)의 훌륭한 문벌(門閥)이 되었으니 참으로 공이 남기신 음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적선(積善)한 가문에 경사(慶事)가 있다”고 했으니 공의 가문이 그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600년이 지난 지금 숨겨져 있던 음덕의 사실이 처음으로 현창(顯彰)하게 되었으니 숨겨진 음덕이 나타나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또 훌륭한 자손들이 선대(先代)의 뜻을 잘 계승해서 지극 정성으로 이루진 일이니 하늘의 이치가 변함이 없어서 착한 자에게 복을 내리는 일은 참으로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근거가 확실하지 못한 내용으로 구차(苟且)한 말을 더 붙이면 지하에 계시는 만세(萬世)의 존령(尊靈)께 누(累)가 될 것이다. 누가 공에게 순리대로 공론에 따라 공의 덕행을 천양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공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나의 사복재(思復齋) 선조께서 공과 같은 절의를 지키시어 두 가문의 정의는 여타 종중에 비해서 특별하게 이어져왔으니 지금 내가 간단하게 이 글을 쓰는 것이 감개무량하니 망령되고 그릇되지 않은 말로 무덤길에 명(銘)을 높이 매단다.
爲祖而修其德 貽厥嘉猷爲計 後孫樹其實者也
(위조이수기덕 이궐가유위계 후손수기실자야)
조상은 덕을 쌓아 자손에게 좋은 가르침을 남기셨고 후손은 그 사실대로 비를 세웠다.
爲孫而盡其誠 承其祖武 闡發先徽 善繼述者也
(위손이진기성 승기조무 천발선휘 선계술자야)
자손은 정성을 다하여 조상의 뒤를 이어 선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밝혔으니 잘 잇고 이었다.
名門授受之有道 愈久而愈光者也
(名門授受之有道 유구이유광자야)
이름난 가문이 주고받음에 이치가 있어서 오래 될수록 더욱 빛나는 일이다.
蒼天報善之有理 必永必昌者也
(창천보선지유리 필영필창자야)
하늘은 선(善)을 복(福)으로 보답하는 이치가 있어서 오래될수록 반드시 번창하는 것이다.
窈窕竹陽之原 松楸之鬱鬱蒼蒼 君子之攸藏者也
(요조죽양지원 송추지울울창창 군자지유장자야)
아름다운 대죽리(大竹里) 남쪽의 산에 나무들이 울창하니 그 곳은 군자가 잠드신 곳이다.
戒以樵牧之勿毁勿傷 永保遺香之無疆者也
(계이초목지물훼물상 영보유향지무강자야)
초동(樵童)과 목동(牧童)에게 부탁하노니 그 나무 베지도 말고 상처주지도 말아서 남기신 향기를 영원토록 끝없이 보존해야 할 것이다.
무자년(2008) 음력7월 종후손 권헌조(權憲祖) 삼가 짓고, 의성(義城)후인 김철훈(金徹壎) 삼가 쓰고, 사정공・판관공문중 삼가 세우다. <국역:권기갑(權奇甲)>
十九世 죽림공(竹林公) 諱 산해(山海)
태종 3년 계미년(1403)에 태어나 세조 2년 병자년(1456)에 작고(作故)하였다. 조선 전기의 의인(義人)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덕보(德甫)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의 증손으로 경력(經歷) 관(寬)의 아들이다. 처부(妻父)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이다. 어려서 종조부(從祖父) 우의정(右議政) 진(軫)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종(文宗)의 비(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이모부(姨母夫)로 세종 22년 1440년에 창덕궁녹사(昌德宮錄事) ․ 주부(主簿)에 천거(薦擧)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과 사귀었다. 단종 2년 1454년에 어린 왕을 도우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올랐으나, 1455년 단종의 손위(遜位) 이후로는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찰방(察訪)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있다가,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斬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정조 13년 기유년(1789)에 관직이 추복(追復)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으며, 경주(慶州) 운곡서원(雲谷書院) ․ 예천(禮泉)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예천(醴泉) 대죽리(大竹里) 현 지보면(知保面) 신풍리(新豊里)에 살았다.
자는 덕보(德甫)이고 호는 죽림(竹林)이다. 문정공 휘 희정(希正)의 증손으로 송고공(松臯公) 대사성(大司成) 초(軺)의 손자요 경력(經歷) 관(寬)의 6남 가운데 장남이다. 태종(太宗) 3년 계미년(1403)에 예천 용궁구읍(龍宮舊邑)의 대죽리(大竹里)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강의(剛毅)하고 몸가짐이 견확(堅確)하였는데 일찍이 그 종조부인 좌의정 문경공(文景公) 진(軫)에게 가서 공부하면서 ?사기(史記)?를 읽다가 「백이전(伯夷傳)」에 이르자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 있은 연후(然後)에 가히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이 부지(扶持)되었구나” 하니 문경공이 웃으면서 기특하게 여겼다. 공은 이같이 특출한 자질로 학업이 날로 성취되어 장래가 크게 촉망되었는데 관례(冠禮)를 올리기에 이르러서는 부정공파(副正公派)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집에서 수실(授室)을 하여 그 사위가 되었다. 그런데 세종 13년 신해년(1431)에 공의 나이 29세 때인데 화산부원군의 제3녀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니 이로부터 왕세자인 문종(文宗)의 손윗동서의 척분(戚分)이 된 공은 세인(世人)의 지목을 꺼려 마침내 일체의 과거에 나가는 것을 페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22년 경신년(1440)에는 38세로서 녹사(錄事)와 주부(主簿) 등의 벼슬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 문종이 등극하고 다시 그 2년 임신년(1452)에 대신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및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등이 유조(遺詔)를 받아 이질(姨姪)인 단종(端宗)을 받들어 보좌하게 될 때에도 출사(出仕)를 아니하고 재야(在野)에 있다가 단종 2년 갑술년(1454)에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제수되어 마침내 사직(辭職)하지 아니하고 받으니 이때 공의 나이 52세였다. 그러나 이듬해 을해년(1455)에 단종이 손위(遜位)되어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고 세조(世祖)가 박팽년(朴彭年) ・ 하위지(河緯地) ・ 성삼문(成三問) 등 3학사(學士)를 맨 먼저 발탁하여 이배(移拜)시키고 공에게는 찰방(察訪)의 직을 주어 나가게 하니 이를 받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스스로 하늘에 서약하고 복침음읍(伏枕飮泣)하였다. 그러다가 세조 2년 병자년(1456)에 단종을 복위하려던 성삼문 등의 모사(謀事)가 누설되어 화란(禍亂)이 닥쳐 일어나자 공이 탄식하여 마지않기를, “하늘이 돕지 않는구나. 내 홀로 살아서 무엇을 하리오. 살아서 능히 사직을 광구(匪救)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서 선왕(先王)께 보은(報恩)하는 수밖에 없구나” 하고는 조복(朝服)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누각(樓閣)에 올라 북향(北向)하여 머리를 조아려 사배(四拜)를 한 다음에 드디어 투각(投閣)하여 자진(自盡)하니 이때 연세 54세였다. 한편 세조의 조정에서는 공을 나치(拿致)하려는 사자(使者)가 파견되어 내려왔으나 공이 이미 숨을 거둔 뒤였고 또한 부인이 소장된 서적을 모두 불살라 없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남지 않았으므로 죄벌이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공의 성명(姓名)이 모의(謀議)한 사람들의 당적(黨籍)에 들어 있다고 하여 가족이 변경(邊境)으로 이사하여 금고(禁錮)를 당하는 형에 해당되었다. 그 아우 사정(司正) 수해(壽海)와 여러 아들이 시신을 수렴(收斂)하여 예천 용궁(龍宮) 구읍(舊邑) 염송산(念松山)의 선영 아래 유좌(酉坐) 언덕에 고장(藁葬)하였다. 그 뒤로 명종 11년 병진년(1556)에 100년 만에 공의 죄가 탕척(蕩滌)되었고 2년 뒤 무오년(1558)에 손자 경(經)이 나이 73세로서 그 계자(系子)인 증손 응성(應星)과 더불어 해금되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자 그때까지 인멸(湮滅)되고 묻혀 있던 공의 사적(事蹟)을 추기(追記)하여 가승(家乘)을 만들고 징사(徵士) 단곡(丹谷) 곽진(郭진)이 그 묘소에 지문(誌文)을 지어 묻었다. 정조 9년 을사년(1785)에는 경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시조 태사공의 곁에 배향(配享)되었고 다시 정조 13년 기유년(1789)에 신원(伸冤)되어 관직이 추복되었다. 또 정조 15년 신해년(1791)에는 공의 충절이 사육신(死六臣)과 다르지 않다는 이유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충신이 난 그 마을을 정표(旌表)하여 정충각(旌忠閣)을 내렸다. 고종 21년 갑신년(1884)에는 이조 판서로 가증(加贈)되고 고종 38년 신축년(1901)에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려 사당을 모시고 기신제(忌辰祭)를 받들게 되었다. 다시 신유년(1921)에는 예천의 호명면(虎鳴面) 내신동(內新洞)에 공을 모시는 노봉서원(魯峰書院)이 세워졌다.
공의 문집이나 유고는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아니하나 유사(遺事)와 실기(實記)가 있으며 사적이 ?용궁읍지(龍宮邑誌)?와 ?장릉지(莊陵誌)? ・ ?명현록(名賢錄)? 등에 등재되어 있다.
공의 신도비문은 통사랑(通仕郎) 이한응(李漢膺)이 짓고 행장(行狀)은 박기녕(朴箕寧)이 지었으며 비문은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지었다. 판윤(判尹) 이헌경(李獻慶)이 공의 전기 「죽림절사전(竹林節士傳)」을 짓고 판돈녕(判敦寧) 이민보(李敏輔)가 복관시(復官時)의 묘소에 올리는 분황고묘문(焚黃告墓文)을 지었다. 정충각 상량문(上樑文)은 판서 목만중(睦萬重)이 짓고 기문(記文)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홍양호(洪良浩)와 문숙공(文肅公) 안정복(安鼎福)이 썼다. 공의 배위는 증 정부인 영가권씨(永嘉權氏)로서 증 영의정 화산부원군 경혜공(景惠公) 전(專)의 제1녀인데 그 제3녀가 곧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이다. 묘소는 현재 지명으로 경북 예천군 용궁면 대죽동(大竹洞)의 절골[節洞] 염송산(念松山) 아래에 유좌(酉坐)로 있고, 배위는 그 앞에 있다. 아들은 철조(哲祖) ・ 철종(哲宗) ・ 별제(別提) 철명(哲命) ・ 판관(判官) 철손(哲孫)이 있고 딸은 1녀로 현감 정난원(鄭蘭元)에게 출가하였다. <권오훈(權五焄)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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