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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좌윤공파 도음재사

죽재권혁무 2020. 3. 25. 23:11

目次

二十世 판관공(判官公) 諱 철손(哲孫)

判官權公祭壇碑銘幷序

二十一世 보공부장(保功部將) 諱 민(敏)

保功部將安東權公墓碣銘

禱蔭齋記

禱蔭齋記

二十二世 諱 순경(舜卿)

處士安東權公諱舜卿墓碣銘

二十三世 천사부장(天使部將) 諱 영(寧)

天使部將安東權公諱寧墓碣銘

二十三世 장사랑(將仕郞)행경능참봉(行敬陵參奉) 諱 평(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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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世 판관공(判官公) 諱 철손(哲孫)

판관공(判官公)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의 현손이고 송고공(松臯公) 초(輜)의 증손, 경력(經歷) 관(寬)의 손자로 죽림공 산해(山海)의 넷째아들이다. 생몰 연대 등 여러 기록이 미상이다. 공은 세조 2년 병자년(1456)에 사육신의 단종 복위 거사 미수 사건으로 인하여 선부군(先府君)이 순절(殉節)한 뒤에 연좌되어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로부터 경주(慶州)에서 세거하여 이곳 좌윤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배위는 서산유씨(瑞山柳氏) 사직 복규(復圭)의 따님이고 묘소는 미상이다. 아들은 보공부장(保功部將) 민(敏)이 있고 딸은 2녀가 참봉 김서경(金瑞卿)과 김중동(金仲仝)에게 출가했다.

 

判官權公祭壇碑銘幷序

판관권공 제단비명병서

判官權公은 卽竹林先生之令子也오 端宗大王之姨從也라 景泰丙子에 以竹林先生殉節事로 禁錮百年하야 全家徙邊에 仍世居月城하니 像想其賢父祖明敎之下에 宜有班班可考之蹟이나 以禍家餘生盡佚無傳하고 墓亦失傳하니 不啻賢仍之所齎恨이라 吾宗各派之所公公痛嘆者가 于今半千年矣라 日者에 賢仍齊會焉하야 使赫根君으로 造余曰 吾判官先祖는 東都入鄕祖라 世經數十에 尙無霜露省掃之禮하니 先父祖積世殫誠에 累擬設壇이나 因以世故杌隉而未果也러니 乃者에 孱仍이 敢效先志하야 菊堂主孫宅富와 多山主孫純寬이 與門父老로 合謀敦事하야 門議一致에 謀劃已定하니 俾惠一言銘之하라 余起而斂膝曰 大矣며 壯矣라 諸君之善述也歟여 雖然이나 顧余非其人으로 累累辭之하니 至再至三에 其請益勤일세 辭不獲已하야 謹按 公의 諱는 哲孫이요 姓은 權氏요 貫安東이요 文判官이니 字號生卒은 竝無傳하다 高麗太師諱幸이 爲鼻祖요 至十世에 諱至正은 佐尹이니 是爲派祖요 三傳諱粹는 文刑部尙書요 生諱奕하니 文祗候요 贈吏參에 追封永嘉君하고 生諱用一하니 文侍中이오 贈參贊諡僖敬이요 生諱希正하니 糾正이오 贈左相諡文靖이니 三世推榮이 三子文景公諱軫의 貴也라 六子諱軺는 文判事요 號松臯라 入本朝하야 累徵不起하고 守罔僕之義하니 於公에 曾祖오 祖諱는 寬이니 經歷이오 考諱는 山海니 世稱竹林先生이라 以宗簿寺僉正으로 時丁景泰丙子하야 與六臣으로 同時殉節하야 百年禁錮하다 正廟己酉에 復官하고 辛亥에 贈吏參旌閭하고 高廟甲申에 贈吏判諡忠愍하고 享雲谷魯峯兩院하다 妣曰永嘉權氏는 景惠公專之女오 配曰瑞山柳氏는 司直復圭之女라 有一男二女하니 男은 曰敏이니 保功部將이요 女는 適全瑞卿金仲仝하고 敏의 男은 舜卿이오 女는 適朴璟卿이오 卿男良은 直長이오 寧은 部長이오 平은 參奉이라 良은 无后하고 寧의 男은 復始니 僉正이라 壬亂에 與郭忘憂堂으로 赴火旺山城하야 多樹戰功하고 平의 男은 復興이니 壬亂倡義하야 赴多大浦하야 殉國하니 英廟丁巳에 旌閭하고 享忠烈祠하고 夫人瑞山柳氏는 親尋夫屍나 不得하야 九日絶食하여 自盡하다 正廟甲寅에 賜食物復戶하고 旌閭하다 餘는 不盡錄하다 於乎라 公은 以忠節之世에 淵源家學으로 承襲厥猷則公亦忠義之士也라 夫忠者는 三綱之首也라 世若有立言君子면 宜當闡明於幾百年之前而潛藏于今日者는 天道至公之理가 無或乎差謬而致此杞宋之嘆也耶아 古語에 云 日月雖明이나 不照覆盆之下라하니 繄公之蹟이 沉晦而無徵者는 譬如覆盆者矣라 若有奮發而斥覆盆者면 其照同一矣리니 顯晦之道가 必也有遲速之待時也라 復夫何恨乎哉아 憲祖는 以玄玄宗後生으로 聞見이 蔑焉하고 識且淺焉하야 恐犯溢美喪實之誅하야 不敢贊述이라 只書上系及子孫錄하야 遂爲之銘曰

曾祖之罔僕과 大庭之忠烈兮여 昭載國乘에 與日月之爭光이오 長玄孫之倡義樹功과 次玄孫之奮義殉國兮여 世忠義之愈章이라 繩繩析荷之風을 人不能盡知兮여 懿天鑑之必詳이라 頻經禍患之餘烈兮여 省掃無由之憑이라 賢仍이 善述追先之誠兮여 封壇如阜之興이라 於休精靈之有所憑依而是安是寧兮여 永萬世風光之增이라

辛巳蜡月에 宗後孫 權憲祖는 謹撰이라

 

판관(判官) 권공(權公)은 바로 죽림(竹林)선생의 아드님이시고 단종(端宗)대왕의 이종(姨從)이시다. 세조(世祖) 2년 병자년(1456)에 죽림선생이 순절(殉節)하신 일로 인해서 백년금고(百年禁錮)가 되었고 전체 가정이 먼 곳으로 이사 가게 되어서 대대(代代)로 월성(月城)에 살게 되었으니 그 부조(父祖)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고 정직(正直)한 행적(行蹟)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想像)할 수 있으나 가문(家門)이 화(禍)를 당하고 문적(文籍)들이 다 없어졌고 묘소까지 실전이 되었으니 그 통한(痛恨)은 후손뿐만 아니라 우리 권문전체가 공통된 일이 아닌가?

반천년이 지난 오늘날 그 훌륭한 후손들이 같이 모여 의논을 하고 혁근(赫根)군을 시켜서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판관선조는 경주로 입향하신 조상이신데 수십대(數十代)를 지났으나 아직까지 춘추(春秋)로 제사(祭祀)를 지내는 예(禮)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선대(先代) 때부터 대대(代代)로 여러 번 정성을 다해서 설단(設壇)을 하려고 했으나 시운(時運)이 맞지 않아서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는데, 이번에 잔손(孱孫)들이 감히 선대(先代)의 뜻을 받들어 국당주손(菊堂主孫) 택부(宅富)와 다산주손(多山主孫) 순관(純寬)가 문중의 부로(父老)들과 의논을 하나로 정해서 일을 계획하고 있으니 명(銘)을 지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무릎을 여미고 앉아서 “제군들이 선대의 뜻을 받들어 경영(經營)하는 일은 매우 장한 일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나는 그 글을 쓸 사람이 못됩니다” 라고 몇 번을 사양했으나 재삼 간청하니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철손(哲孫), 성(姓) 권씨(權氏)니 본관(本官) 안동(安東)이고 문과(文科)로 판관(判官)을 역임(歷任)하셨으니 자(字)와 호(號)와 생졸년(生卒年)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태사(高麗太師) 휘(諱) 행(幸)이 시조(始祖)시다. 십세(十世)의 휘(諱) 지정(至正)이 좌윤(佐尹)이며 이 분이 파조(派祖)시다. 삼대(三代)를 내려와서 휘 수(粹)는 형부상서(刑部尙書)오 이 분의 아들 휘 혁(奕)이니 관직(官職)이 고려 지후(祗侯)인데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이 되시었다.

이 분의 아들 휘 용일(用一)이 시중(侍中)이며 증직참찬(贈職參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다. 이 분의 아들의 휘는 희정(希正)이며 관직이 규정(糾正)이고 증직 좌상(左相)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니 삼대(三代)의 증직(贈職)은 셋째아들 문경공(文景公) 휘 진(軫)의 직위(職位)로 된 것이다. 여섯째아들 휘 초(軺)는 판사(判事)요 호 송고(松臯)인데, 조선조(朝鮮朝)가 되어서 여러 번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고려구신(高麗舊臣)의 절의(節義)를 지키시었다. 이 분이 공의 증조(曾祖)시다.

조(祖)의 휘는 관(寬)이니 관직(官職)이 경력(經歷)이며 고(考)의 휘는 산해(山海)니 세칭(世稱) 죽림(竹林)선생이시다.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이고 그 때 단종손위(端宗遜位) 사건(事件)을 만나서 사육신(死六臣)과 같이 순절(殉節)하시고 백년금고(百年禁錮)를 당하고 정조(正祖) 기유년(1789)에 복관(復官)되시고 신해년(1791)에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고종(高宗) 갑신년(1884)에 증직(贈職)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충민(忠愍)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운곡(雲谷) · 노봉(魯峯) 두 서원에 봉향(奉享)되시었다.

비(妣) 영가권씨(永嘉權氏)는 경혜공(景惠公) 전(專)의 따님이시고 배(配) 서산유씨(瑞山柳氏)는 사직(司直) 복규(復圭)의 따님이시다.

1남 2녀를 두시었는데, 아들은 민(敏)이니 보공부장(保功部將)이요, 사위는 전서경(全瑞卿)과 김중동(金㑖仝)이다. 민(敏)의 아들은 순경(舜卿)이요, 사위는 박영경(朴璟卿)이다. 순경(舜卿)의 아들 양(良)은 직장(直長)이요, 영(寧)은 부장(部將), 평(平)은 참봉(參奉)이다. 양(良)은 아들이 없고, 영(寧)의 아들은 복시(復始)니 첨정(僉正)이다. 임난(壬亂)에 곽망우당과 같이 화왕산성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평(平)의 아들은 복흥(復興)이다. 임난(壬亂)에 창의(倡義)해서 다대포(多大浦)에서 순국(殉國)해서 영조(英祖) 정사년(1737)에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충열사(忠烈祠)에 모셔져있고, 부인(夫人) 서산유씨(瑞山柳氏)는 직접 부군의 시신(屍身)을 찾으려고 노력(努力)했으나 끝까지 찾지 못해서 9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자결(自決)하시었고, 정조 갑인년(1794)에 식물(食物)을 내리고 세금과 부역이 면제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이 충절(忠節)을 대대로 지키고 학문의 연원이 있어서 그 가통을 이어받았으니 공도 역시 충의를 지키신 분이다. 원래 충(忠)이란 삼강(三綱)의 으뜸이니 세상에 만약 훌륭한 군자가 있었다면 백 년 전에 당연히 밝혀질 일이지만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니 지공무사(至公無私)한 하늘의 이치도 혹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고증(考證)이 되지 않아 탄식하는 일도 있다. 옛말에 “일월이 밝지만 엎어놓은 동이의 밑은 비치지 못한다” 라고 했으니 공에 대한 업적을 밝힐 수 없는 것은 비유한다면 동이 밑과 같으나 만약에 분발해서 동이를 물리면 햇빛을 받을 수 있으니 충절(忠節)이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은 것이 조만(早晩)이 있기는 하지만 때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한을 하겠는가? 나는 세월이 오래된 후에 태어나서 듣고 보지 못했고 또 식견이 적어서 훌륭한 업적을 잘못되게 기술(記述)할까 두려워서 단지 선계조상(先系祖上)과 후손을 기록할 뿐이다. 이어서 명(銘)을 쓴다.

 

曾祖之罔僕(증조지망복)

증조(曾祖)는 망복지신(罔僕之臣)이시고

 

大庭之忠烈兮(대정지충렬혜)

아버지는 충렬(忠烈)을 지키신 것이

 

昭載國乘(소재국승)

국사(國史)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

 

與日月之爭光(여일월지쟁광)

일월과 빛남을 다투네

 

長玄孫之倡義樹功(장현손지창의수공)

장손(長孫)의 현손(玄孫)은 창의(倡義)로 공을 세우시고

 

次玄孫之奮義殉國兮(차현손지분의순국혜)

차손(次孫)의 현손(玄孫)은 정의(正義)로 분발하시어 순국하셨으니

 

世忠義之愈章(세충의지유장)

충의(忠義)가 세상에 더욱 빛이 난다.

 

繩繩析荷之風(승승석하지풍)

대대로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이어온 가풍을

 

人不能盡知兮(인불능진지혜)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겠는가?

 

懿天鑑之必詳(의천감지필상)

하늘은 반드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頻經禍患之餘烈兮(빈경화환지여열혜)

여러 차례 난리와 가화(家禍)를 겪으면서

 

省掃無由之憑(성소무유지빙)

묘소를 잃게 되어

 

賢仍善述追先之誠兮(현잉선술추선지성혜)

장한 후손들이 선대(先代)를 계승하려는 정성으로

 

封壇如阜之興(봉단여부지흥)

큰 단(壇)을 만들어

 

於休精靈之有所憑依而是安是寧兮

(오휴정령지유소빙의이시안시녕혜)

편안하게 공의 영(靈)이 여기에 의지해서 계시게 되시었으니

 

永萬世風光之增(영만세풍광지증)

영원히 만세에 풍광(風光)이 더해질 것이다.

 

신사년(2001) 섣달 종후손(宗後孫) 권헌조(權憲祖) 삼가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제단(祭壇)은 영일읍 상달전리(上達田里) 산82번지 달밭에 있다

 

 

二十一世 보공부장(保功部將) 諱 민(敏)

보공장군(保功將軍)으로 부장(部將)이다. 배위 영가권씨(永嘉權氏)로 묘소는 경북 포항시 흥해읍 상달전(上達田)에 묘향(卯向) 합폄이고 후손 헌장(憲章)이 지(識)를 지었다. 아들은 순경(舜卿)이다.

 

 

保功部將安東權公墓碣銘

보공부장 안동권공 묘갈명

府君諱는 敏이오 姓은 權氏오 貫安東이니 麗太祖亞父功臣太師諱幸이 爲始祖요 中世에 有諱希正하니 文監察이오 本朝에 贈左議政諡文靖이니 有七男俱爲顯官에 第三子諱軫이 世宗朝에 左相諱文景이오 第六諱軺는 麗文判事오 入本朝에 除北伯及大司成이오 皆不赴하고 與伯兄版圖公諱轂과 妹兄栢竹堂裵尙志로 歎曰 神器旣移하니 我輩當遯이라하고 遂屛居于龍宮濂松山下하야 更名其山曰念松이라하고 自號曰松臯라하고 以寓自靖之義也니 於府君에 爲高祖也라 曾祖諱는 寬이니 義禁府經歷이오 祖諱는 山海오 號는 竹林이니 與成三問朴彭年으로 爲道義交하야 文廟庚申에 以才行으로 除昌德宮錄事及主簿해도 不就하고 曰 內有椒闈之親而冒進干祿이 非吾志也라하니 盖夫人權氏가 於顯德王后에 兄也라 端廟甲戌에 始就僉正之職하야 曰 吾以未報於先王者는 以效沖主也라하다 及丙子禍作에 與六臣으로 同時殉節하야 子孫이 徙邊禁錮하다 至正廟朝에 十二世孫諱宗洛이 鳴寃하야 特命復官하고 贈吏判하고 旌其閭하니 事載龍宮邑誌及莊陵誌하다 考諱는 哲孫이니 判官이오 妣는 瑞山柳氏中領副司直復圭之女也오 配는 端人權氏니 墓는 同塋이라 有一男하니 諱는 舜卿이라 生三男하니 諱良은 直長이요 諱寧은 天使部將이오 諱平은 敬陵叅奉이라 部將이 有一男하니 諱는 復始오 號는 九思齋오 奉直郞守司宰監僉正이라 壬亂倡義하야 與忘憂堂郭再祐로 守火旺城하야 在同苦錄하고 事見東京誌하다 叅奉은 有一男하니 諱는 復興이오 號는 五慕齋니 壬亂首倡義하야 殉節于東萊多大浦하니 朝家에 特命旌閭하고 鄕人이 立祠尸祝하다 以下는 不能盡錄하다 於乎라 府君이 上承松臯竹林賢祖之懿行卓烈하고 下啓九思五慕肖孫之孤忠危節則忠孝二字가 豈非府君述先裕後之旨訣乎아 府君平日言行이 著於文字者想必多可傳諸後者而兵燹之餘에 子孫이 零替하야 文獻이 蕩佚에 漠然無傳而以至生卒年月筮仕顚末을 亦不得考하야 爲子孫之痛恨이 曷有其已에 墓는 在興海郡禱蔭山上達田酉坐原하니 墓道闕顯刻이 自是先父兄經營未遑之事也라 不肖輩年已六旬에 切恐一朝溘然則又負先父兄經營之意也라 故로 今春에 與族兄憲章曁諸族으로 斷議竪碣而略叙世代及官閥하니 使三尺貞珉永世不□□ 而後裔之省掃墳塋者肅瞻起敬하야 知忠孝二字에 爲世守之規也니 於乎可不敬哉라

壬子十月에 十三世孫宜度는 謹識하노라

石字沒故로 己亥十月에 改書改竪라

 

부군(府君)의 휘는 민(敏)이오, 성은 권씨(權氏)요,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니,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의 아보공신(亞父功臣) 태사(太師) 휘 행(幸)이 시조(始祖)시며, 중세(中世)에 휘 희정(希正)이 문과(文科) 감찰(監察)이시며, 본조(本朝)에서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과 문정(文靖)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시었다. 아들 칠형제(七兄弟)가 모두 크게 출세했으며, 그 중 셋째아드님 휘 진(軫)이 세종조(世宗朝)에 좌상(左相)이었으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오, 여섯째아드님 휘 초(軺)는 고려조(高麗朝)에 문과판사(文科判事)오, 조선조(朝鮮朝)에서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除授)했으나 모두 거절하시고, 그 백형(伯兄) 판도공(版圖公) 휘 곡(轂)과 매형(妹兄)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와 함께 탄식(歎息)하고 말하기를 “왕조(王朝)가 이미 바뀌었으니 우리들은 당연히 은둔(隱遁)해야 한다”고 하고 용궁(龍宮)의 염송산(濂松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그 산을 ‘염송(念松)’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호를 ‘송고(松臯)’라고 해서 절의(節義)를 지키는 뜻을 나타냈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관(寬)이니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이오, 조(祖)의 휘는 산해(山海)오, 호는 죽림(竹林)이니, 이 분이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과 도의(道義)를 중시(重視)하는 친구였다. 세종(世宗) 22년 경신년(1440)에 재능(才能)과 품행(品行)으로 창덕궁(昌德宮) 녹사(錄事)와 주부(主簿)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왕비(王妃)의 인척(姻戚)으로서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아마도 부인권씨(夫人權氏)가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언니였기 때문이다.

단종(端宗) 2년 갑술년(1454)에 처음으로 첨정(僉正) 벼슬에 나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왕(先王) 문종(文宗))의 은혜(恩惠)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어린 임금님 단종(端宗)에게 보답할 것이다”이라고 했는데, 병자년(1456)에 단종이 손위(遜位)하는 화(禍)가 생겨서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시기에 순절(殉節)하시고 자손(子孫)이 변방(邊方)으로 이사(移徙)가게 되고 과거시험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조대왕(正朝大王) 때에 12세손(世孫) 휘 종락(宗洛)이 왕에게 애통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려서 왕의 특명(特命)으로 복관(復官)되시고 증직(贈職)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정려(旌閭)가 내려진 사적(事蹟)이 ?용궁읍지(龍宮邑誌)?와 ?장릉지(莊陵誌)?에 실려 있다.

고(考)의 휘는 철손(哲孫)이니 판관(判官)이오, 비(妣)는 서산류씨(瑞山柳氏)며 중령부사직(中領副司直) 복규(復圭)의 따님이시다. 배위(配位)는 단인(端人) 권씨(權氏)니 묘소는 동분(同墳)이다. 독자(獨子)를 기르시어 휘는 순경(舜卿)이다. 이 분이 아들 삼형제(三兄弟)를 기르시어 휘 양(良)은 직장(直長)이요, 휘 영(寧)은 천사부장(天使部將)이오, 휘 평(平)은 경릉참봉(敬陵叅奉)이다.

천사부장(天使部將)이 아들이 한 분인데, 휘는 복시(復始)오, 호는 구사재(九思齋)오, 봉직랑(奉直郞) 수(守)와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을 역임하시었다. 임란(壬亂)에 창의(倡義)하시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화왕성(火旺城)을 지키신 「동고록(同苦錄)」이 있고 ?동경지(東京誌)?에도 기록되어있다.

참봉(叅奉)은 외동아들이니 휘는 복흥(復興)이오, 호는 오모재(五慕齋)니, 임란 때에 가장 먼저 창의하시어 동래(東萊) 다대포(多大浦)에서 순절(殉節)하시니, 나라에서 특명(特命)으로 정려(旌閭)가 내리고, 그 지역민이 정성을 모아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府君이 위로는 송고(松臯) ・ 죽림(竹林) 두 분 훌륭한 조상의 장열(壯熱)한 행동을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구사재(九思齋) ・ 오모재(五慕齋) 같은 착한 손자들이 뛰어난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를 지키시니 충효(忠孝) 두 글자는 부군(府君)께서 선조를 계승해서 후손에 전한 뜻이 아니겠는가?

부군(府君)의 평일에 하신 말씀과 행동이 글로 남겨서 후세에 전한 것이 많았을 것인데 난을 겪고 자손이 한미(寒微)해서 문헌(文獻)이 유실(遺失)되어 남은 것이 없어서 생졸년(生卒年)과 벼슬한 내용까지 상고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들의 원통한 한이 끝이 있겠는가? 묘소는 흥해(興海) 도음산(禱蔭山) 달전(達田) 유좌(酉坐)터이다. 비석이 없어서 선부형(先父兄)께서 경영(經營)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라 불초(不肖)들이 나이 이미 60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면 선부형(先父兄)이 경영하던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서 금년 봄에 헌장(憲章) 족형을 비롯해서 여러 족인(族人)이 비(碑)를 세울 결정을 하고 세대와 관작과 문벌을 간단하게 서술해서 작은 돌을 세워 영원토록 후손들이 묘사(墓祀)를 올리면서 엄숙(嚴肅)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충효(忠孝) 두 글자는 대대(代代)로 지켜온 규범(規範)이니, 아!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자년(1972) 10월에 13세손 의도(宜度)는 삼가 씀. <국역:권기갑(權奇甲)>

옛 비석에 글자가 깎여 없어졌기 때문에 기해년(1959) 10월에 다시 세운다. 묘소는 포항시 영일읍 달전리(達田里) 산82번지에 있다

 

 

禱蔭齋記

도음재기

曲江郡二十里에 有禱蔭山하고 山之下達田里에 有齋新起而冒山名者는 卽故部將永嘉權公諱敏과 及其孫直長諱良과 部將諱寧과 叅奉諱平의 墳菴也라 公之葬斯丘가 殆四百年而往在壬子에 胄孫宜度氏가 謀諸宗人하야 始竪牲石하고 再明年甲寅에 又建是齋하니 正堂五間이오 曲樓二間이오 廟舍以陪之하고 堵墉以繚之하니 幹之者는 宜五·宜重·萬運·宜錘·肅道·宜郁也라 旣落에 宜重氏가 以僉意로 命余曰 吾家之落慶州가 自部將公으로 始하니 始公之祖竹林先生이 當端廟遜位之日하야 與成朴諸先生으로 同時殉節하야 自若孫이 徙錮邊塞하고 錮旣解에 公이 自延日로 來居安康하야 動忍增益하고 禔躬節行하야 僅能成立門戶而畏約以沒世하니 三孫이 俱通仕路而竟沈淹未蔭하고 漆齒之亂에 九思赴義하고 五慕矢復하야 家業因以旁落하야 報本之事를 卒闕而未遑開剏之祖하야 而一無畝墓宮하니 此先父老所苦心茹痛者也라 不肖輩가 今始鳩孱功合綿力하야 立得數架屋子하니 非敢曰肯構而粗述遺志也라 不可以無記니 子其圖之하라하고 因示憲章氏所爲文俾爲按本하니 顧中業之匪人無文으로 誠不敢當이나 然이나 於公之先祖文靖公에 實爲外裔也라 追念同祖誼에 亦不敢終辭에 謹取其文而讀之하니 首歎門戶之零替하고 中言建立之艱難하고 終以追慕之誠과 敦叙之道로 勉焉하니 是卽記也라 何必捨鷄而求鶩也哉아 於呼라 竊惟我外氏가 自錫土以來로 名公巨卿과 大儒弘匠이 世世輩出하야 爲東方甲閥而公之家最盛焉하니 公生是家에 以松臯竹林爲祖하고 九思五慕로 爲孫則其上承下啓之氣脉眞詮이 乃忠義二字也라 其才德之美와 志節之高는 必非夷常人比而旣當大有之世矣니 若無之痛之未伸而策名登朝則其功名事業이 安知不克紹家聲而身處畏約하니 規成底退에 痛念家國하니 往事西班徵御必不屑就焉則自外之窮通을 固不敢云云이라 其平日躬修之嘉言懿行이 宜有可傳諸後者로대 而兵燹浩劫이 乃歸於杞宋之文獻하고 婁世仁善之積이 宜有昌熾之報라 而並與此無之하니 禍福之天이 尙未定而然耶아 是今人可感者也라 於乎라 天下之人이 孰無父祖리오마는 聖遠敎弛倫彛斁喪하야 其終身飽煖하고 門非父祖遺澤이리요마는 而所以奉先이 不如自奉하고 甚者頹堂敗斧를 睨視而不修하고 殘盃冷炙을 過時而不奠하고 猶恬不知愧也로데 今宜度氏諸公則不然하고 以報本之未克盡誠으로 夙夜憂懼하야 節食縮衣하고 辛勤拮据하야 旣竪之石하고 又建之齋하니 陵谷桑瀛之有備而祀享歌哭之有所則一片堪語가 將與人之豊鐫하야 同其久遠而數架之築이 有多於渠渠之屋也니 是今人可敬者也라 夫屈伸之運과 祥殃之降이 不替는 在人而於忠孝에 甚焉이오 又屈之久者는 必伸之長而其期必遠하니 盖公家之屈이 始也以忠而今至四百年之久에 乃有此諸孫之孝思하니 吾知伸之在玆而期亦及矣라 其伸之日에 人必曰公之蔭也니 姑擧此可感可敬者로 以告夫世之有家君子而揭于齋壁하니 未知覽之者以爲善禱也否아

建齋後六年己未七夕日에 眞城李中業은 謹記하노라

 

곡강군(曲江郡)에서 20리 거리에 도음산(禱蔭山)이 있고 산 아래 달전리(達田里)에 새로 지은 집은 바로 고(故) 부장(部將) 영가권공(永嘉權公) 휘(諱) 민(敏)과 그 손자 직장(直長) 휘 양(良)과 부장(部將) 휘 영(寧)과 참봉(叅奉) 휘 평(平)의 재사(齋舍)이다 이곳에 묘소를 들이고 사백년(四百年) 가까이 되어 지난 임자년(1972)에 주손(胄孫) 의도(宜度)씨가 여러 종인(宗人)들과 의논해서 처음으로 비(碑)와 상석(床石)을 하고 2년 전 갑인년(1974)에 또 이 집을 지으니 정당(正堂) 다섯 칸에 곡루(曲樓) 두 칸이다.

집에 축을 쌓고 원장(垣墻)을 둘러쳤는데. 주간자(主幹者)는 의오(宜五) · 의중(宜重) · 만운(萬運) · 의추(宜錘) · 숙도(肅道) · 의욱(宜郁)씨였다. 낙성(落成)한 뒤에 의중(宜重)씨가 문중(門中)의 뜻에 따라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이 경주에 가서 살게 된 것은 부장(部將)공이 시초(始初)입니다. 처음에 부장공의 조부인 죽림(竹林)선생이 단묘(端廟) 손위(遜位) 때에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선생들과 동시에 순절(殉節)하고 자손들이 사변(徙邊)되었다가 금고(禁錮)가 풀린 뒤에 공(公)이 연일(延日)에서 안강(安康)으로 이사(移徙)해서 큰 고통을 참으시고 편한 마음으로 행동을 절제하시어 겨우 가문을 이루시어 두렵고 검소한 생애로 생을 마치시고 셋 손자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으나 끝까지 음덕을 누리지 못했고 왜란(倭亂) 때에 구사재(九思齋) ・ 오모재(五慕齋:諱 復興)께서 나라에 헌신하시어 가산이 없어져서 입향조(入鄕祖)에 대해서 땅 한 필 집 한 칸 없이 지낸 것을 선부로(先父老)께서 고심하고 한을 했는데 불초(不肖)한 우리들이 이제 와서 적은 돈을 모아 약한 힘을 합해서 몇 칸 집을 지었으니 어찌 감히 조상의 업적을 이었다고 하겠습니까? 겨우 뜻을 따랐을 뿐이지만 기록은 있어야 하니 수고해 주십시오” 하면서 헌장(憲章)씨가 쓴 글을 보여주기에 그것으로 연유(緣由)를 상고해보니 부족한 나 중업(中業)의 글 솜씨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공의 선조 문정공(文靖公)의 외손(外孫)이 되니 선조의 교의(交誼)로 말하면 끝까지 사양(辭讓)할 수 없어서 삼가 그 글을 읽으니 첫째 문호(門戶)가 쇠락한 것을 탄식했고 그 다음에 건립하기 어려웠다는 말과 마지막에 추모(追慕)의 성의(誠意)와 돈목(敦睦)의 도(道)를 힘쓰고 있으니 이게 바로 기문(記文)인데, 굳이 그 말을 다 버리고 내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 우리 외가(外家) 집은 안동에서 태사(太師)공이 식읍(食邑)을 받은 뒤로부터 이름난 공경(公卿)의 벼슬과 유학(儒學)의 대학자(大學者)가 대대(代代)로 이어져서 동방(東方)의 갑족(甲族)이지만 공의 집이 그 중에 유명했는데 공이 이 집에서 태어났으니 송고(松臯)와 죽림(竹林)이 조상이 되고 구사재(九思齋)와 오모재(五慕齋)가 자손이니 위로 조상을 계승해서 아래로 자손에 이어진 가통이 충의(忠義) 두 글자란 것을 참으로 알 수 있다. 그 훌륭한 재덕(才德)과 높은 지조(志操)는 참으로 보통사람들에 비해서 뛰어났으니 만약에 애통(哀慟)함을 풀지 못한 시련(試鍊)이 없이 출세(出世)했다면 공명(功名)과 사업(事業)이 가문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 알 수 있겠는가? 두렵고 요약(幺弱)한 마음으로 처신(處身)하면서 규범(規範)을 이룬 후에 가문과 국가를 염려했으니 그 전에 무반(武班)에서 불렀을 때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나셨다면 그 후에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의 몸가짐과 좋은 말씀과 특이한 행동은 당연히 후손에 전할 것이 많았겠지만 난리를 겪으면서 증거(證據)될 문헌(文獻)이 분실되었고 여러 대(代) 남긴 적선(積善)이 자손에게 반드시 복이 내려지겠지만 아직까지 보답이 될 만한 복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하늘이 화복(禍福)을 주는 데에 아직까지 복이 내려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이것이 지금 유감(有感)스런 일이다.

아!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부모조상(父母祖上)이 있지만 성인시대(聖人時代)가 오래 되어 인륜(人倫)의 교육(敎育)이 사라져서 한 평생 편하게 사는 것이 부조(父祖)의 은택이 아닐까마는 조상을 모시는 일에는 자신을 돌봄 같이 하지 않아서 심한 자는 조상의 집을 없애고 묘소의 나무를 베어[頹堂敗斧]도 예사로 보고 뒤늦게 조상에 한 잔 술을 올리는 것도 습관이 되어 부끄럼을 모르는데, 지금 의도(宜度)씨 제공(諸公)은 그렇지 않아서 조상을 모시는 뜻을 더할 수 없이 하고 있으면서 밤낮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힘들게 주선(周旋)해서 이미 석물(石物)을 다하고 또 집을 지어서 골짜기가 산이 되고 바다가 뽕밭이 되어도 제사 올릴 곳을 준비한 것이니 한 편의 기문(記文)의 글이 후손에게 경계심을 주는 것은 이 집이 몇 칸 밖에 안 되는 집이지만 사치스런 큰 집보다 나을 것이니 이것이 지금 존경하는 바이다. 앞으로 흥패(興敗)의 운수와 화복(禍福)이 이어지는 것은 자손의 충효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고 또 침체(沈滯)의 기간이 길었으면 복 받을 미래도 긴 법이니 아마도 공의 가문이 침체의 기간이 충성을 하면서 시작되어서 지금 사백년이 되었으나 이렇게 자손의 효심이 있으니 나는 지금부터 복 받을 날이 온 것으로 알고 복을 받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공의 음덕이라고 할 것이다. 감개하고 공경한 바를 열거(列擧)해서 세상에 가문을 지키는 군자에 고(告)하고 도음재(禱蔭齋) 벽에 걸게 하니 이 글을 보는 자가 도음재 기문을 잘 썼다고 하겠는가?

집을 짓고 6년 후 기미년(1979) 칠석일(七夕日) 진성 이중업(李中業)은 삼가 記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禱蔭齋記

도음재 기문

齋以禱蔭은 在昔成中廟之世에 保功部將權公諱敏과 及其長孫直長諱良과 次孫天使部將諱寧과 次孫參奉諱平의 墳塋齋宿之所也라 四祖孫之玄宅이 在禱蔭山下達田里하니 入葬後近四百年壬子에 始竪顯刻하고 越二年甲寅에 刱建是齋하야 取其山名而署楣하야 揭起巖李公諱中業所著記文하니 盖於其時에 保功部將公之大人判官公과 其大人竹林先生之禍患餘烈에 因以失傳하야 深目莫徵에 省掃無憑이나 然이나 判官公이 實慶州肇基之祖也라 乃者賢仍爲先之誠이 出乎彛天하야 今年에 崇封祭壇에 燦備儀物하고 徵銘於余하니 余雖非其人이나 誼重百世에 事同一室로 僭妄納名이러니 事竟遂而告由後赫根君이 道余曰禱蔭齋由來部將先祖四祖孫齋宿之所也나 然이나 今則判官先祖를 同麓設壇하야 從玆年年祭需奉上于是齋하니 判官先祖가 旣元位也라 然則宜有敍由之文하야 願族祖는 俾惠一言實之否아 余斂膝而起曰君之言則是也오 君之誠亦大也나 然이나 余旣不文而且菊堂多山兩門門議一致然後에 以可矣之說로 辭之嗣後至再至三累累懇請하고 前月에 又與赫文世豪君으로 並造山莊하야 出示起巖公記文曰門議已定하야 以門議로 晉拜라하고 其愀然之貌가 油然乎出諸善述之誠하고 惻然之詞가 洽然乎令人感動之志矣라 辭不獲已하야 敬讀記文하니 詳悉無缺하고 精切懇惻하야 贊美極備하니 更雖有碩德文章이라고 難復架疊이온 况若憲祖之蔑識乎아 旣感賢仍殫誠追先之至意하고 重感起巖公大德雄文之旨訣하야 坦腹焉하고 僅會芻言하야 略敍判官公設壇之由而歸之하고 抑又有一說하니 曰判官公之事蹟이 遙遙無可考之地나 然이나 世有耈哲之相承하니 苟非積陰累德이면 烏能有是也면 及今賢仍之追遠至誠이 亦非家傳摑血之孝思不匱者歟에 余以是獻賀而遂爲之記

壬午陽復節에 宗後孫 權憲祖는 謹記하노라

 

재(齋)의 이름을 도음(禱蔭)이라고 한 것은 옛 성종(成宗) 중종(中宗) 때에 보공부장(保功部將) 권공(權公) 휘(諱) 민(敏)과 그 장손(長孫) 직장(直長)인 휘 양(良)과 차손(次孫) 천사부장(天使部將)인 휘 영(寧)과 차손 참봉(參奉)인 휘 평(平)의 묘소에 재숙(齋宿)하던 곳이다. 네 분 조손(祖孫)의 묘소가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蔭山) 밑에 있으니 묘소를 들인 후 400년이 가까운 임자년(1972)에 처음으로 비(碑)를 세우고 2년이 지난 갑인년(1974)에 이 도음재(禱蔭齋)를 창건(刱建)하고 그 산 이름을 이용(利用)한 것이다. 기문(記文)은 기암(起巖) 이중업(李中業) 공이 지었다.

아마 그 때에 보공부장(保功部將)공의 아버지인 판관(判官)공과 그 분의 아버지인 죽림(竹林)선생이 환란(患亂)을 겪으면서 실전(失傳)되고 묘소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판관(判官)공이 실로 경주에 터를 잡은 조상이고 그 후손들이 조상을 섬기는 타고난 정성이 있어서 금년에 제단을 크게 만들고 화려하게 상석과 의물(儀物)을 갖추고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하니 내가 비록 그 글을 쓸 사람이 못되지만 백세(百世)도 지친(至親)이란 정의(情誼)가 중(重)해서 내 집 일과 같이 생각하고 외람(猥濫)되게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고유(告由)한 뒤에 혁근(赫根)군이 내게 말하기를 “도음재(禱蔭齋)의 유래는 부장(部將) 선조 네 분 조손(祖孫)의 재사(齋舍)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판관(判官)선조를 같은 곳에 설단(設壇)하여 해마다 이 재(齋)에서 제수(祭需)를 준비하게 되었고 판관(判官)선조가 원위(元位)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유문이 있어야 하니 족조(族祖)께서는 사실에 맞게 고유문을 지어 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무릎을 여미고 말하기를 “군(君)의 말이 옳고 군(君)의 성심(誠心) 또 대단하지만, 그러나 나는 글 솜씨도 없고 또 국당(菊堂) · 다산(多山) 두 문중(門中)의 의논이 일치한 연후에 말하는 것이 옳다”고 사양했다.

그 후에 재삼 누누이 간청했고 지난달에 또 혁문(赫文) · 세호(世豪)군과 같이 와서 기암(起巖)공이 지은 기문(記文)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문중 의논이 이미 정해져서 문중의 의논에 따라 왔다”고 하면서 걱정하는 모습으로 선대의 일을 해야 된다는 정성과 측은한 사연이 나의 뜻을 감동시키니 사양할 수 없고 그 기문을 읽어보니 빠짐없이 수록되었고 자세하고 간결하고 뜻이 담긴 글이어서 매우 칭찬했으니 비록 큰 학덕이 있는 문장이 다시 있다고 할지라도 더 할 말이 없는데 하물며 나 헌조(憲祖)같이 무식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손들이 조상을 위한 지극한 성의에 감동을 하고 높은 덕망과 아름다운 문장을 쓴 기암(起巖)공의 글이 의미가 넓음을 감탄하면서 겨우 옹졸한 말로 판관(判官)공 설단의 연유를 간단하게 기록해 주면서, 또 한마디 말을 더 하는 것은 판관공의 사적이 오래되어 고증(考證)할 수 없게 되었지만 하지만 대대로 훌륭한 자손이 이어지니 참으로 많은 적덕(積德)이 쌓이지 않았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지금에 훌륭한 자손들의 지극한 성념(誠念)은 비단 나라에만 목숨을 바친 충신의 자손일 뿐 아니라 효심도 지극한 가문이라서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의미에 하례(賀禮)하고 기문을 쓴 것이다.

임오년(2002) 동짓달에 종후손 권헌조(權憲祖)는 삼가 기(記)하다. <국역:권기갑(權奇甲)>

 

 

二十二世 諱 순경(舜卿)

배위 오천정씨(烏川鄭氏)는 문림(文林)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旺新里) 운곡(雲谷)의 탑등(塔嶝)에 간좌(艮坐) 합폄(合窆)이며 묘갈(墓碣)이 있다.

 

處士安東權公諱舜卿墓碣銘

처사 안동권공 휘 순경 묘갈명

公의 諱는 舜卿이오 姓은 權氏오 貫安東이니 高麗太師諱幸이 爲鼻祖요 中世에 有諱至正하니 官佐尹이고 爲派祖요 有諱奕은 永嘉君이오 生諱用一하니 贈左參贊僖敬公이오 生諱希正하니 監察이오 贈左議政文靖公이오 生諱軺하니 文科判事니 左相文景公諱軫之弟而隱居于龍宮濂松山下하야 改其山曰念松이라하고 因自署松臯하야 以寓罔僕自靖之義하야 除北伯及大司成에 皆不就하니 於公에 爲五代祖也라 高祖諱는 寬이니 義經歷이오 曾祖諱는 山海니 號竹林이라 以文廟姻親으로 遭端廟遜越之變하야 與成朴死六臣諸先生으로 同時殉節하니 其子若孫이 禁錮徙謫이라 至正廟朝에 十三世孫宗洛이 鳴寃號龥하야 伸雪復官하고 累贈至大冢宰하야 優蒙旌褒하고 享慶州雲谷追遠祠及襄陽魯峯院하고 祖諱는 哲孫이니 判官이오 考諱는 敏이니 保功部將이오 妣는 權氏니 墓는 興海達田이오 配는 烏川鄭氏文林女니 墓는 江東面雲谷塔嶝坤向에 合窆이라 生三子하니 良은 直長이오 寧은 部將이오 平은 叅奉이오 寧의 子復始는 僉正이오 號九思齋오 平의 子復興은 號五慕齋오 復始의 子必昌이로 鎣은 號兄江이오 鑰은 內禁衛오 鑑이오 復興의 子䥍는 折衝將軍이라 餘는 不錄하다 嗚乎라 前而有冠冕之蟬赫하고 繼以有忠孝之節行하니 公이 生丁此時하야 宜有以顯輝當世하야 垂裕後承而上而端廟未卽復位하고 下而節義諸賢이 莫有洗寃하니 其於遭難諸家에 縷命苟保하여 其於公之生卒表德履歷行治에 疇能傳後而徵言乎哉아 又況世代貿遠하고 荐經兵燹하야 如于文獻盡輸하니 烏有以故로 迄于今數十世之遠五百年之久에 墓道에 尙闕顯刻이러니 迺者에 賢裔等이 命余以職之하니 顧此渺末後生이 固不敢臆揣容喙나 以參在同根에 誼豈尋常가 窃惟陽復有理하고 碩果不食하나 公際覆盆하야 未伸齎志沒世나 然이나 公之雲仍이 布濩一鄕에 文學行誼가 蔚然爲東都望族則觀於此 而可驗天道報施之理를 不誣而足以爲爲善者之觀也라

壬子七月日에 族後孫五寅은 謹撰하노라. 十四世孫赫澤은 謹書라

 

공(公)의 휘는 순경(舜卿)이오, 성(姓)은 권씨(權氏)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니, 고려태사(高麗太師) 휘 행(幸)이 시조(始祖)이시다. 중세(中世)에 휘 지정(至正)이 관직(官職)이 좌윤(佐尹)이고 파조(派祖)이시다. 휘 혁(奕)은 영가군(永嘉君)이며, 이 분의 아들 휘 용일(用一)이 증직(贈職) 좌참찬(左參贊)이며 시호(諡號)가 희경(僖敬)이시다.

이 분의 아들이 희정(希正)이니 벼슬이 감찰(監察)이오, 증직(贈職) 좌의정(左議政)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다. 이 분의 아들 휘 초(軺)가 문과판사(文科判事)니 좌의정(左議政)인데 문경공(文景公) 휘 진(軫)의 아우이며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아래에 은거(隱居)하시면서 그 산을 염송산(念松山)이라 하고 잇따라 자호(自號)를 송고(松臯)라 하고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와 대사성(大司成)을 내렸으나 모두 나가지 않으셨는데, 이 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휘는 관(寬)이니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을 지내시었고, 증조(曾祖) 휘는 산해(山海)니 호가 죽림(竹林)이신데, 문종대왕(文宗大王)의 인척(姻戚)으로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영월(寧越)로 손위(遜位)하는 변(變)을 당해서 사육신(死六臣)과 동시에 순절하시니 자손이 금고(禁錮)되고 사변(徙邊)되었다가 정조대왕(正祖大王)때에 13세손 종락(宗洛)이 왕에게 원통(寃痛)함을 호소(呼訴)해서 한(恨)을 풀고 복관(復官)되시었다가 여러 번 증직(贈職)이 더 내려져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시고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경주(慶州) 운곡서원(雲谷書院)과 예천(醴泉) 노봉서원(魯峯書院)에 모시었다.

조(祖) 휘는 철손(哲孫)이니 판관(判官)이오, 고(考) 휘는 민(敏)이니 보공부장(保功部將)이오, 비(妣)는 권씨(權氏)니 묘소는 흥해(興海) 달전(達田)에 있고, 배위(配位)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림(文林)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강동면(江東面) 운곡(雲谷) 탑등(塔磴) 곤향(坤向)에 합폄(合窆)으로 되어있다.

아들 삼형제를 두시었는데, 양(良)은 직장(直長)이오, 영(寧)은 부장(部將)이오, 평(平)은 참봉(叅奉)이다. 영(寧)의 아들 복시(復始)는 벼슬이 첨정(僉正)이며 호는 구사재(九思齋)오, 평(平)의 아들 복흥(復興)은 호(號)는 오모재(五慕齋)이다. 복시(復始)의 아들 사형제에 맏이는 필창(必昌)이고 다음 형(鎣)은 호 형강(兄江)이고, 다음 약(鑰)은 벼슬이 내금위(內禁衛)오, 다음은 감(鑑)이다. 복흥(復興)의 아들 지(䥍)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선대(先代)에 높은 관직(官職)이 이어지고 충효(忠孝)와 절의(節義)가 이어지는 시기에, 공이 출생하시었으니 당연히 화려한 직책으로 후인에 업적을 남기고 위로는 단종(端宗)을 복위하고 밑으로는 절의(節義)를 지킨 제현(諸賢)의 원한(怨恨)을 풀어주어야 되지만 어려움을 만난 가문(家門)에서 겨우 목숨만 보전하게 되었으니 공의 생졸년(生卒年)과 자(字)와 행적(行績)마저 고징(考徵)할 수 없게 되었고 또 대수(代數)가 오래되고 거듭된 병화(兵火)로 문헌(文獻)이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 수십세(數十世)가 흘렀고 오백년(五百年)의 세월이 지났으며 아직까지 묘소에 비(碑)도 없어서 이번에 훌륭한 후손들이 나에게 비문을 쓰는 책임을 주니 나 오인(五寅)같이 부족한 후생(後生)이 원래 감히 글을 쓸 수 없는 일이지만 같은 성(姓)으로서 범연(泛然)한 정의(情誼)가 아니고 또 조용히 생각하니 어려움을 넘기면 좋은 날이 오는 것은 이치이고 큰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 없어서 공이 정의(正義)가 없어진 시대에 한(恨)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하지만 공의 후손이 온 향내(鄕內)에 퍼져있고 문학(文學)과 품행(品行)이 있어서 경주(慶州)에서 명망(名望)있는 문중(門中)이 되었으니 이것을 보면 하늘이 착한 자에 복을 준다는 이치를 거짓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선(善)을 행한 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임자년(1972) 7월 일에 족후손 오인(五寅)은 삼가 짓고, 14세손 혁택(赫澤)은 삼가 쓰다.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旺信里) 산126-1번지(운곡 탑등)에 있다

 

二十三世 천사부장(天使部將) 諱 영(寧)

자는 자안(子安)이고 부장(部將)이다. 혹은 중국 천사(天使)의 부장으로 나온다. 배위 오천정씨(烏川鄭氏)는 세홍(世弘)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북 포항시 흥해읍 상달전(上達田)의 조고(祖考) 묘소 위에 유좌(酉坐) 연분(連墳)이고 배위가 뒤이다.

天使部將安東權公諱寧墓碣銘

천사부장 안동권공 휘 영 묘갈명

東都之北 菊堂坊 永嘉氏之世居而克守先訓 無忝厥祖 宗族敦睦 孝友相勸 尊賢貴德之風尙繼焉 鄕稱四姓之一 實無僭者 其先有天使部將諱寧 墓在興海上達田酉坐原 世經德斬 子姓克勤省掃 期乎岡陵 況有碣之祖 同兆域 雖有陵谷之換 無問深目之患 且克誠賢裔 向念益篤 屢度先事年年修創之餘 歲當甲午春 門老四座 遠踵畿南之荊門曰 吾之先府君壽域散在遠近 俱有表阡 實部將府君之墓 祖山同域 故以爲後於其子若曾孫而未遑也 毋論仁明而於禮 不可無人人自赧焉 是以今春雲仍之會 俱曰事之有先於守墳.勢也 尊之有序於傳家.禮也 因勢而闕禮 神理人情 不可無忝於下位也 樹計片石而請辭焉 願勞陰之記 余曰誰無奉先隨勢之錯乎 以誠克禮 甚敬畏也 辭而不獲 謹按 公之行狀及譜錄則姓權 諱寧 字子安 籍安東 官天使部將 先係則域內有前人之述備矣 不必贅言 曾祖諱哲孫判官 祖諱敏保功部將 考諱舜卿 妣烏川鄭氏文林女 公卽三棣居仲 配烏川鄭氏父世弘之女祔後 伯公諱良 通訓大夫司饔院直長無嗣 有壻月城華閥孫晊之裔 無替先規 尙繼香火 士族之門禮甚畏也 季公 諱平 敬陵參奉 公之育一男二女 男復始 字伯元 號九思齋 官奉直郎 守司宰監僉正 龍蛇之亂 從郭忘憂堂樹軍功 旣遂錄名倡義 趁卽退臥林泉 設糾風之約 濡染鄕里 里之異風易俗 聞於朝家 偏蒙綸音 治行之卓絶可想 女適月城李養性子慶翼 次適高敞吳櫛子進士周榦 九思齋有四子二女 長必昌無嗣 始葬於其聘舅姑之山下吾琴里 後俱以緬於兄江公兆域亥坐原 俱石儀 門中恪勤致祭 是亦法家之所難者也 次鎣字器之號兄江 遊寒岡鄭先生之門有學行 次鑰 字器甫 以蔭行內禁衛 次鑑 字器哉 號舍羅齋 以下麟趾蕃蔓 不能盡錄 厥後子姓諸彦 旣而有蕃衍 文行聲望者 闡古啓後之功多矣 想公之趨庭氏與瓜瓞之賢則罍之有餘而缾之無罄者鑑耳 然而世遠物換 未曉於嘉言徽績 自顧鴻雪之歎而況賢裔乎, 請文氏五吉赫俊赫光赫根俱有諱名之請 是所謂大易之謙謙也 余不敢應命者 亦難違於春秋之遺法也 係以銘曰

有源之泉 晝宵不息 流之愈衍 勢之無極 承蔭之孫 無忝厥德 裔之益繁 守之不忒 德之有行 惟水之則 無稼於先 豈有後穡

建國 再乙未 孟春日 門後孫 奇甲 謹撰

경주 북쪽 국당은 안동권씨가 선대의 규범을 지켜서 조상에 누(累)가 되지 않게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종족이 돈독하고 화목하게 효도와 우애를 서로 장려하면서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고 덕(德)을 소중히 하는 풍속이 이어지니 경주에서 대성(大姓)으로 칭하는 한 집이라 해도 실로 외람된 말이 아니다.

그 선대(先代)에 천사부장(天使部將) 휘 영(寧)이란 분의 묘소가 흥해(興海) 상달전(上達田) 유좌(酉坐) 산에 모셔졌는데, 대수(代數)가 오래 되었으나 자손들의 성념(誠念)이 극진해서 산(山)이 없어지지 않은 한 묘소가 유지될 것인데 하물며 비문이 있는 조상의 묘역 안에 있으니 비록 산이 골짜기가 되는 일이 있다고 해도 잊을 일은 없지만, 훌륭한 자손의 성의가 지극해서 해마다 선대 조상의 일을 하면서도 갑오년(2014) 봄에 그 문중의 네 분이 경기도 남쪽 내 집까지 오시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선대 조상의 묘소가 원근에 흩어져있으나 모두 다 비석이 있는데, 실로 천사부장(天使部將) 부군의 묘소는 그 조부의 묘소와 같이 있다는 이유로 그 분의 아들과 손자 묘소에까지 비석을 세우면서 이 부군의 묘소에는 비가 없으니 불효와 불명(不明)을 따지기 전에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서 자손은 누구나 부끄럽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 문회(門會)에 모두가 말하기를 ‘묘소를 알기 위해서 각처에 비를 세운 것은 우리의 경제형편이였고 윗대 조상을 높이는 것은 우리가문의 법도이니 돈이 없다’고 해서 윗분 묘소에 비(碑)가 없다는 것은 신(神)의 이치나 자손의 정의(情誼)로 말 한다고 해도 아들 손자분에 누가 되는 일이라서 비를 세울 계획을 했으니 비문을 지어 주십시오” 하시기에 내가 말하기를 “어느 가문이라도 형편에 따라 일을 하다가 보면 순서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예를 다 갖추어 하시니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하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공의 행장과 가첩(家牒)을 상고하니 성은 권씨, 휘는 영(寧), 자(字)는 자안(子安), 본관은 안동이며, 직함은 천사부장(天使部將)이시다.

선계(先系)는 같은 묘역에 있는 선대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어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증조의 휘는 철손(哲孫)이니 판관(判官)이시고, 조의 휘는 민(敏), 직함은 보공부장(保功部將)이시며, 고 휘는 순경(舜卿), 비위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림(文林)의 따님이시다. 공은 삼형제의 둘째시며, 배위는 오천정씨 세홍(世弘)의 따님이시고 공의 묘소 위에 모셔졌다.

공의 백씨는 휘 양(良)이며 통훈대부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이며 아들이 없고 사위는 월성의 명문가 손씨 질(晊)인데 그 후손이 아직까지 선대의 규범을 지키면서 향화(香火)를 이어오고 있으니 사족(士族)의 규범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공의 아우 되시는 분은 휘 평(平)이며 경릉(敬陵)참봉이시다.

공께서는 1남2녀를 두셨는데, 아들 복시(復始)는 자가 백원(伯元)이고 호는 구사재(九思齋)이다. 직함은 봉직랑(奉直郞)이며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이었는데 임진란에 의병을 모집해서 곽망우(郭忘憂) 장군과 함께 군공(軍功)을 세워서 공신의 녹권(錄券)에 등재되었고 전후(戰後)에는 고향에 오시어 은거하시면서 백성을 순화하는 향중규약(鄕中規約)을 만들어서 풍속이 순박해지니 조정에까지 명성이 들려서 특별히 왕의 윤음(綸音)을 받으시었고 품행이 특별하시었다.

사위는 월성이씨 양성(養性)이며 그 외손은 경익(慶翼)이다. 둘째사위는 고창오씨(高敞吳氏) 진사 즐(櫛)이며 외손은 주간(周幹)이다.

구사재는 4남2녀를 기르시어 맏아들 필창(必昌)은 아들이 없고 그 분의 처부모 묘소가 있는 오금리(吾琴里)에 묘소를 썼다가 후일에 그 처부모까지 형강공(兄江公)의 묘역 해좌(亥坐)로 이장(移葬)하고 상석까지 놓아서 문중에서 아직까지 정성껏 제사를 올리니 이 일은 법을 지키는 가문에서도 하기 어려운 훌륭한 일이다.

둘째아들 형(鎣)은 자가 기지(器之), 호는 형강(兄江)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문하생으로 학문과 품행으로 명성이 있었다. 셋째아들 약(鑰)은 자가 기보(器甫)이다. 음직(蔭職)으로 내금위(內禁衛)를 역임하시었다. 넷째아들 감(鑑)은 자가 기재(器哉)이고 호는 사라재(舍羅齋)이다. 이하 많은 자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후세에 자손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았고 학문이나 품행으로 명망이 높으신 분들이 선대의 이력(履歷)을 밝혀서 후손에게 알려준 공로(功勞)가 많았다. 공의 아드님과 후손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은 것을 생각해 보면 공의 품행이 훌륭하시어서 자손들이 공에게 누(累)가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으나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뀐 뒤에 공이 남기신 말씀이나 좋은 행적들은 참으로 눈밭에 앉았던 기러기 자취 같이 사라졌으니 후손들의 여한(餘恨)이 얼마나 간절하겠는가?

비문을 요청한 오길(五吉) · 혁준(赫俊) · 혁광(赫光) · 혁근(赫根) 네 분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역(周易)?에서 말한 겸손(謙遜)에서 겸손을 더한 도리라고 할 수 있으나, 내가 그 말을 따를 수 없는 것은 사실대로 기록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잇달아 명(銘)을 쓴다.

 

有源之泉(유원지천) 근원이 있는 물이라면

晝宵不息(주소불식) 밤낮으로 흘러서

流之愈衍(유지유연) 흐를수록 불어나고

勢之無極(세지무극) 끝이 없는 것이다.

承蔭之孫(승음지손) 자손이 조상의 음덕에

無忝厥德(무첨궐덕) 누(累)를 남기지 않고

裔之益繁(예지익번) 대대로 번성하여 규범을

守之不忒(수지불특) 지키고 살아가니

德之有行(덕지유행) 덕이 흘러가는 것은

惟水之則(유수지칙)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無稼於先(무가어선) 조상의 덕이 없었다면

豈有後穡(기유후색) 오늘의 자손이 있었겠나?

 

건국(建國) 후 두 번째 을미년(2015) 정월 일에 문후손(門後孫) 기갑(奇甲)은 짓고 국역하다

 

23世 평(平) 장사랑(將仕郞) 행경능참봉(行敬陵參奉)

장사랑(將仕郞) 행 경릉참봉(行敬陵參奉)이다. 묘(墓)는 포항시 연일읍 달전동(達田洞) 조고 묘 뒤에 유좌(酉坐)이고, 사손(嗣孫) 헌장(憲章)공이 찬(撰)을 한 비명(碑銘)이 있고, 배(配)는 실전(失傳)하였다.

공은 고려태사(高麗太師) 시조 휘 행(幸)의 23世이고, 입조태종조(入朝太宗朝)에 증 좌의정(左議政) 시호는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의 7세손이며, 단종조(端宗朝) 충신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요 호는 죽림(竹林)이며 휘 산해(山海)의 고손이고, 죽림선생의 4子 휘 철손(哲孫) 판관공의 증손이며 보공부장(保功部將) 민(敏)의 손자이고, 순경(舜卿)의 三子이며, 오모재 권복흥(五慕齋權復興) 독자(獨子)를 두었다.

伯兄 양(良)은 통훈대부 사옹원직장(通訓大夫司饔院直長)이고 무사(無嗣)이며 女는 월성인(月城人) 손질(孫晊)이며 현재까지 외손봉사(外孫奉祀)하고 있다. 仲兄 영(寧)은 천사부장(天使部將)이며 중형 子의 휘는 복시(復始) 호는 구사재(九思齋) 봉직랑 수사재감첨정(奉直郞守司宰監僉正)이고 그 후손은 경주 강동 국당에 살고 있다.

입향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哲孫)가 단종사화로 숙부 사정공 휘 수해(壽海)와 같이 영일지방으로 이거하여 묘가 영일 연일 달전리에 있으니 다산과 달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약2km)이라 효심에 선조의 묘 가까이에 살고 싶었을 것이며 또한 넓은 들을 낀 다산리에 정착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후손으로 총 호수는 약350여 호이며 송정마을에는 약40여 호의 집성촌으로 살아오다가 현재 약10여 호가 살고 있으며 인근마을 및 경주권 등 각지에 살고 있는 후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단계서당과 문중을 수호하고 운영해 오고 있다.

 

將仕郞行敬陵參奉安東權公之墓

장사랑행경능참봉안동권공지묘

23世 평(平) 장사랑(將仕郞) 행경능참봉(行敬陵參奉)

장사랑(將仕郞) 행 경릉참봉(行敬陵參奉)이다. 묘(墓)는 포항시 연일읍 달전동(達田洞) 조고 묘 뒤에 유좌(酉坐)이고, 사손(嗣孫) 헌장(憲章)공이 찬(撰)을 한 비명(碑銘)이 있고, 배(配)는 실전(失傳)하였다.

공은 고려태사(高麗太師) 시조 휘 행(幸)의 23世이고, 입조태종조(入朝太宗朝)에 증 좌의정(左議政) 시호는 문정공(文靖公) 휘 희정(希正)의 7세손이며, 단종조(端宗朝) 충신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요 호는 죽림(竹林)이며 휘 산해(山海)의 고손이고, 죽림선생의 4子 휘 철손(哲孫) 판관공의 증손이며 보공부장(保功部將) 민(敏)의 손자이고, 순경(舜卿)의 三子이며, 오모재 권복흥(五慕齋權復興) 독자(獨子)를 두었다.

伯兄 양(良)은 통훈대부 사옹원직장(通訓大夫司饔院直長)이고 무사(無嗣)이며 女는 월성인(月城人) 손질(孫晊)이며 현재까지 외손봉사(外孫奉祀)하고 있다. 仲兄 영(寧)은 천사부장(天使部將)이며 중형 子의 휘는 복시(復始) 호는 구사재(九思齋) 봉직랑 수사재감첨정(奉直郞守司宰監僉正)이고 그 후손은 경주 강동 국당에 살고 있다.

입향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哲孫)가 단종사화로 숙부 사정공 휘 수해(壽海)와 같이 영일지방으로 이거하여 묘가 영일 연일 달전리에 있으니 다산과 달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약2km)이라 효심에 선조의 묘 가까이에 살고 싶었을 것이며 또한 넓은 들을 낀 다산리에 정착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후손으로 총 호수는 약350여 호이며 송정마을에는 약40여 호의 집성촌으로 살아오다가 현재 약10여 호가 살고 있으며 인근마을 및 경주권 등 각지에 살고 있는 후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단계서당과 문중을 수호하고 운영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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