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안동연원재사

안동권씨 좌윤공파 연원재사 사적집 1. 제자, 발간사

죽재권혁무 2020. 12. 15. 07:02

上권 안동 연원재사 사적집 1. 제자, 발간사 2. 사적 3. 유래, 4. 홀 축판

안동 연원재사 사적집 발간사(安東燕院齋舍事蹟輯發刊辭)

 

안동권씨 좌윤공파 연원재사 사적(安東權氏佐尹公派燕院齋舍事蹟)을 한곳에 모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정리하고자 함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무엇이든 검색하여 습득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적을 공유하고자 하였다.

안동권씨 좌윤공파 파조(安東權氏左尹公派派祖)는 좌윤공(佐尹公)이고 휘는 지정(至正)이다. 아들의 휘는 세위(世位)이며, 고려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高麗銀靑光綠大夫樞密院府事)이고, 손자의 휘는 양준(良俊)이며 고려 별장부정 행 병부정랑(高麗別將副正行兵部正郞)이고, 증손의 휘는 수(粹)이며 문과(文科)로 호장(戶長)이고, 장 현손 영가군(永嘉君)의 휘는 혁(奕)이며 문과로 중문지후(中門祗侯)이고, 차 현손의 휘는 견(堅)이며 랑장(郎將)이요 추증 형부상서(刑部尙書)이고, 영가군 아들이며 파조의 5세손 희경공(僖敬公)의 휘는 용일(用一)이요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추증 좌참찬 추밀원사(左參贊樞密院事)이고, 6세손 문정공(文靖公)의 휘는 희정(希正)이며 감찰규정(監察糾正)이요 추증은 좌의정이며 7남 3녀를 두었는데 장자 곡(轂)은 경산 현령이요, 둘째 여도(輿道)는 감사요, 셋째 문경공(文景公) 진(軫)은 문과로 좌의정이며, 넷째 지(輊)는 현감이며 효행정려 받았고, 다섯째 헌(軒)은 현감이요, 여섯째 송고공(松皐公) 초(軺)는 문과로 판제용 감사이며, 일곱째 치(輜)는 홍원현령이다. 첫째 사위 판서 백죽당 배상지(裵尙志)는 흥해배씨이고, 둘째 사위 참판 이인후(李云侯)는 퇴계의 고조부이며 진성이씨이고, 셋째 사위 김혁(金革)은 보백당 김계행(金係行)의 조부이고 안동김씨이니 10남매 집집 모두가 명문거족이라 하드라.

예로부터 전해오든 묘제를 이어 받들기 위하여 해마다 후손이 모이는 그 날짜에 어김없이 올해도 戊戌 2018年 음력 10월 13일 오후에 모여 저녁 식사하고는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다음 날 오전 9시부터 묘제를 엄숙히 봉행하였다.

권혁근(權赫根:안강) 족형이 “집사분정기 기록한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기에 전사청 책장을 들여다보니 선대 어르신분들의 소중한 기록이 분산되어 있어 권오신 회장에게 이야기하고 집사분정기, 도기를 가져와서 살펴보니 흐트러지고 구겨진 기록물을 고르고 촬영하기 쉽도록 펼쳐서 연도별로 구분하여 촬영하고 도기는 3권으로 묶고, 홀. 축판 축문 역시 영인본으로 편집하고, 사적 자료 수집하고, 壬午2002년부터 묘향 시 집사록 겸 참제원을 기록하여 원본은 USB에 입력하여 보관하고, 인쇄하여 상(上) 하(下)권으로 나누어 파일철에 넣어 두고, 우선 제(혁무) 블로그에 올려 두었다.

추후 혹 여기에 없는 기록물을 찾으면 합하여 주시고 정리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수정하여 주시기 바라며 파일철에 기록사항을 계속 철하고 오래 보존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戊戌 2018年 동짓달 후손 혁무(赫武) 삼가 적었습니다.

 

안동 연원재사 사적집 2. 사적

 

안동권씨 좌윤공파사적(佐尹公派事蹟)

 

좌윤공파조(佐尹公派祖)

 

호장공(戶長公) 이여(利輿)의 4남 호장공 통(通)의 장자이다. 공은 옛 족보에 그 세계(世系)를 몰라 별보(別譜)로 입록되어 있었으나 1907년의 정미보(丁未譜)를 할 때에 여러 집안의 신적(信蹟)을 고증하여 입록하게 되었다. 관작은 호장(戶長)으로서 좌윤(佐尹)을 겸하여 좌윤공으로 칭하고 시조후 10세 15대파의 여섯 번째 좌윤공파의 파조(派祖)이다. 좌윤은 고려 초기에 태봉(泰封)의 관제를 답습해 광평성(廣評省)에 두었던 벼슬이 향직(鄕職)으로 변한 것이며 6품에 해당되었다. 이외에 공에 관한 기록은 없다.

아들은 정용위 별장(精勇衛別將) 세위(世位)이고 손자 별장 부정(別將副正) 양준(良俊)은 복야공(僕射公) 수홍(守洪)의 사위이다. 증손 수(粹:精)에 이르러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두 아들 혁(奕)과 견(堅:구명 成泰)을 두니 혁은 또한 문과를 하여 중문지후(中門祗侯)가 되고 견은 낭장(郎將)으로서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추증된다. 이후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계출(繼出)하여 문호가 크게 번창하였다.

참고문헌 : 태사공실기 1333쪽에서 발췌

 

〔좌윤공사적 (佐尹公事蹟)〕

호장공 통(通)의 장자로 관직은 좌윤(佐尹)을 지냈다. 공은 처음 족보에 그 세계를 몰라 별보로 기재되어있었으나 정조11년 고증되어 후 갑인보에 수록되었다. 좌윤은 고려 초기 광평성에 있는 벼슬이 향직으로 변한 정6품에 해당된다. 아들은 정용위별장 세위(世位)이고 손은 별장 부정 양준(良俊)이다. 증손 수(粹)는 문과에 급제하고 현손 혁(奕)은 중문지후가 되고 견(堅)은 형부상서로 추증되었다.

 

〔十世 좌윤공(佐尹公) ~ 十六世 문정공(文靖公) 사적〕

 

十世 좌윤공(佐尹公) 諱 지정(至正)

태사공(太師公)의 7대종손(代宗孫) 호장공(戶長公) 휘 이여(利輿)의 넷째아들 호장(戶長) 휘 통(通)의 장자이다. 호장(戶長)으로서 좌윤(佐尹)을 지냈기 때문에 좌윤공(佐尹公)으로 칭하며 10세 14대파(大派) 가운데 여섯 번째인 좌윤공파(佐尹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공은 별장공파(別將公派) 파조(派祖) 영정(英正)과 형제간이다. 아들은 정용위 별장(精勇衛別將) 세위(世位)가 있다.

 

十一世 諱 세위(世位)

정용위별장(精勇衛別將)이다. 파보(派譜)에 병조정랑(兵曹正郞)과 군기감(軍器監)을 행직(行職)한 것으로 나온다. 병조정랑은 고려관제(高麗官制)로 병부낭중(兵部郞中)이다. 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兼) 호장(戶長)으로 나온다. 이는 만년에 호장을 겸하였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가 된 것은 뒤에 자손이 귀히 됨에 따라 추봉(追封)된 것이 아닌가 한다.

 

十二世 諱 양준(良俊)

별장 부정(別將副正)이다. 파보에는 이 향직(鄕職) 외에 경직(京職) 병조정랑(兵曹正郞) 즉 병부낭중(兵部郞中)을 행직한 것으로 나온다. 배위 영가권씨(永嘉權氏)는 상서좌복야상장군(尙書左僕射上將軍) 수홍(守洪)의 따님이다. 아들은 문과공(文科公) 수(粹)이다.

 

十三世 諱 수(粹)

고휘(古諱)는 정(精)이다. 좌윤공의 독증손(獨曾孫)으로 별장 부정(別將副正) 휘 양준(良俊)의 아들이다. 일체의 기록이 미상이나 보서(譜書)에 문과 급제(文科及第)로 나온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의 아들 혁(奕)의 주기(註記)에는 호장(戶長)으로 나온다. 배위는 안동강씨(安東姜氏)로서 호장 정위(戶長正位) 효창(孝昌)의 따님이고, 아들은 중문지후(中門祿候) 혁(奕) ・ 낭장(郎將) 견(堅)이다.

 

十四世 지후공(祗候公) 諱 혁(奕)

좌윤공의 장현손(長玄孫)으로 별장부정(別將副正) 휘 양준(良俊)의 손자요, 수(粹)의 아들이다. 충렬왕 16년 1290년 5월의 방(榜)에 우탁(禹倬) 등과 함께 문과에 진사(進士) 제19인이었고, 응시 당시 신분은 국학(國學)의 면응재생(眠應齋生)이었다. 관직은 중문지후(中門祗候)에 이르렀다. 사후(死後)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또한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었는데 이는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그 증손 진(軫)이 정승(政丞)으로 귀(貴)히 됨에 따라서이다. 배위는 동종(同宗)의 영가권씨(永嘉權氏)로서 예빈동정(禮賓同正) 열(烈)의 따님이고 묘소는 안동부(安東府) 북쪽의 연미원(燕尾院) 오이동(烏耳洞)에 경향(庚向)으로 합폄(合窆)되어 있다. 아들은 낭장(郞將) 용일(用一)이다.

 

高麗中門祗候贈嘉善大夫吏曹叅判永嘉君墓碣銘

고려중문지후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영가군 묘갈명

故中門祗候永嘉君權公奕之藏이 在安東府北烏耳洞枕甲之原하니 舊有表에 漫漶不堪讀이라 後孫이 將治石改竪以顯刻할새 屬冶城宋浚弼하니 嗚呼라 公은 高麗人也라 距今五百有餘年에 出處行事는 史逸無傳하야 生卒表德이 亦未詳所據者라 公이 少에 博學能文章하야 忠烈王十六年에 登第하야 與禹祭酒先生倬으로 同榜하야 官至中門祗候하고 旣致仕에 優游田里하야 以令名으로 終後하니 贈嘉善大夫吏曹叅判하고 追封永嘉君하니 權氏는 東方著姓이라 始祖幸이 佐麗太祖하야 平甄亂하고 官至太師하다 十世而諱至正은 官佐尹이요 子諱世位는 樞密院府事오 子諱良俊은 兵曹正郞이요 子諱粹는 文科라 娶安東姜氏刑部尙書孝昌女하니 寔公皇考妣也라 配는 禮賓同正權烈의 女니 贈貞夫人이오 墓는 祔公하다 子用一은 門下侍中이오 贈左叅贊諡僖敬이요 孫希正은 監察이오 贈左議政諡文靖이니 是生七男三女하니 男轂은 版圖正郞이요 輿道는 監司요 軫은 右議政諡文景이오 輊와 軒은 皆縣監이요 軺는 判事요 輜는 縣令이요 女는 適司僕寺事裵尙志하고 副正李云侯하고 奉禮郞金革하다 以下는 不盡載하다 語에 曰 世或有無根而産芝하고 未有濬源而不流라하니 以是觀公之世컨대 子孫繁衍에 名位相承하니 如竹林公山海邃學淸節과 龜峯公德麟文行華秩과 松鶴公應時至孝治績과 洛濱公震翰과 鳩谷迪立朝謇諤이 皆卓然爲王國之藎臣이요 龍泉公鼎鉉은 雖未貴顯而淸名雅行이 亦爲世所重하니 是公積德遺澤之歷久彌彰이 盖有不加誣者矣라 舊表作에 不詳年代하고 今於改碣也에 始終彈誠者는 泰鴈·斗植二君也오 玆索余言者는 員外君正默也라 銘曰

猗公家世는 麟棷鳳穴이라 篤生偉人에 有學有烈이라 世代悠荒에 莫究顚末이라 推其顯者에 潛光可述이라 有隆其阜에 苔碑字沒이라 我最以銘에 垂示杳忽이라

玄默敦牂小春節에 外後孫宋浚弼은 謹撰이라

 

고려(高麗) 중문지후(中門祗候)를 지낸 영가군(永嘉君) 권공(權公) 혁(奕)의 묘소가 안동부(安東府) 북쪽 오이동(烏耳洞) 갑좌(甲坐)의 산에 있는데, 비석이 오래 되고 글자가 마모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다. 후손이 새로 돌을 준비해서 글을 새기려고 나 송준필(宋浚弼)에게 부탁하였다.

아! 공은 고려(高麗)시대 분이시고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어서 품행과 업적이 역사에 남아있지 않고 생졸년이나 자(字)도 고증할 수 없다. 공이 소년기에 학문이 깊고 문장력이 좋아서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등과(登科)해서 좨주(祭酒) 우탁(禹倬) 선생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벼슬이 중문지후(中門祗候)에 이르렀고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착한 명성(名聲)으로 세상을 뜨시었으니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이시고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셨다.

권씨는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이고 시조(始祖) 행(幸)이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견훤(甄萱)의 난을 평정(平定)하고 태사가 되시었다. 10세 휘(諱) 지정(至正)은 좌윤(佐尹)이었으며 그 아들의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樞密院)부사(府事)요, 그 아들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그 아들 휘 수(粹)는 문과급제(文科及第)했으며 배위(配位)는 안동강씨(安東姜氏) 형부상서(刑部尙書) 효창(孝昌)의 따님이시다. 이 분이 공의 황고(皇考)시고 배위(配位)는 예빈동정(禮賓同正) 권열(權烈)의 따님이시니 증직(贈職) 정부인(貞夫人)이요 묘소는 공과 같이 부장(祔葬)되어있다. 아들 용일(用一)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증직 좌참찬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요, 손자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이요 증직 좌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니 이 분은 7남3녀를 두시었는데, 아들 곡(轂)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요, 여도(輿道)는 감사(監司)요, 진(軫)은 우의정(右議政)이며 시호는 문경(文景)이오, 지(輊)와 헌(軒)은 모두 현감(縣監)이요, 초(軺)는 판사(判事)요, 치(輜)는 현령(縣令)이요, 사위는 사복시사(司僕寺事) 배상지(裵尙志)와 부정(副正) 이운후(李云侯)와 봉례랑(奉禮郞) 김혁(金革)이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옛말에 ‘뿌리 없는 지초(芝草)는 혹시라도 있을 수 있으나 근원(根源) 없는 물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공의 가세(家世)에 훌륭한 많은 자손을 보면 명성(名聲)과 직위(職位)가 이어졌으니 죽림공(竹林公) 산해(山海)의 깊은 학문과 높은 절의와 귀봉공(龜峯公) 덕린(德麟)의 화려한 문행(文行)과 업적과 송학공(松鶴公) 응시(應時)의 지극한 효성과 치적과 낙빈공(洛濱公) 진한(震翰)과 구곡(鳩谷) 적(迪)이 조정에서 바른 말을 해서 다들 국왕을 위해 뛰어난 충신들이며 룡천공(龍泉公) 정현(鼎鉉)은 비록 높은 관직은 없으나 청렴한 명성과 아름다운 품행이 또 세상에 존경을 받았으니 이것은 공의 적덕(積德)과 은택(恩澤)이 오래도록 빛난 것이니, 여기에 무었을 더 과장해서 말하겠는가? 옛 비문에 연대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고, 지금 다시 비를 세우는 데 성력(誠力)을 아끼지 않은 태안(泰鴈) · 두식(斗植) 두 분이고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부탁한 분은 원외랑 정묵(正默)이다. 명(銘)을 쓴다.

 

猗公家世(의공가세) 공의 가세(家世)를 상고(詳考)하면

麟棷鳳穴(인추봉혈) 기린(麒麟)의 숲 같고 봉황(鳳凰)의 집 같아서

篤生偉人(독생위인) 걸출(傑出)한 위인(偉人)이 태어나서

有學有烈(유학유열) 학문도 깊고 공열(功烈)도 높아서

世代悠荒(세대유황) 끝없이 대대로 이어져서

莫究顚末(막구전말) 전말(顚末)을 다 궁구할 수 없으나

推其顯者(추기현자) 현달(顯達)한 분을 추구(追求)해 보면

潛光可述(잠광가술) 숨은 광채(光彩)를 서술(敍述)할 수 있다.

有隆其阜(유융기부) 산같이 높은무덤 비석에

苔碑字沒(태비자몰) 글자가 없어지고 이끼가 끼었기에

我最以銘(아최이명) 내가 이 명(銘)을 지어

垂示杳忽(수시묘홀) 먼 후일(後日)까지 전하게 한다

 

임오년(1942) 10월 외후손(外後孫) 송준필(宋浚弼) 삼가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안동군 북후면(北後面) 오산동(烏山洞) 연원(燕院) 잣밭골에 있다.

 

燕院齋舍重新記

연원재사중신기문

直永嘉治北十里而近 有燕尾院梧里洞 洞之東麓 庚向之阡 寔我二十一代祖參判府君衣履之藏也 貞夫人祔左 曾孫縣令公諱輜 亦繼葬焉 二十代祖參贊府君之藏 在其西麓丙向 而前後貞夫人先後祔焉 舊無冡人以守之 正廟庚子 族先龍泉公諱鼎鉉 詢及諸宗 置祭田若干塍 仍創建祭閣八樑 以爲齋宿之所矣 高宗丙申 災於鬱攸 因其燼餘 架漏牽補 誅茅以覆 苟且度了者 有年矣 至是 遠近宗盟 峻發重建之議 醵鍰貲 鳩材瓦 經始於丁丑春 而越明年春竣功 其制凡十間 中爲堂 而兩夾爲室 以適凉燠 厨竃庫藏 因舊貫焉 既落 首班一人 執爵而旅之曰 維我先齋 倡自龍翁 而至一百六十七年 而不幸及災 歷四十二年 而始克重新 玆事或庶幾籍手前修 而亦不禁人代 今昔之感焉 在龍翁之時 則適丁昭代 右文孝理之化 洽于群黎 士詠楚茨 女歌採蘋 莫不以反始報本爲重 宜祖考來格 而子孫受嘏矣 若今之世 則頽季也 狂潮震盪 桑海茫洋 先王文教 無復遺響 而綱淪法斁 人而獸矣 矧夫一種無神之論 汎濫天下 載胥及溺馴 而至焚屍毀宔 恬不爲怪 自今以往 孔聖所謂卜其宅兆而安厝之 春秋祭祀以時思之者 終歸於彌文剩語而已 然則吾輩將何修而爲善後之圖哉 惟願僉宗 一乃心膂教養兒孫 必須劑量新舊 而申之以孝悌之道 使知反始報本之爲何等所重 而克追先猷以敬其祭祀 俾吾先齋保不知巋然空閣 而永傳千祀之遠 此裔承今日第一義 詩不云乎 以似以續 續古之人 又云子子孫孫勿替引之 盍相與勉旃 僉曰唯唯 仍屬余爲記

檀紀四二九三年 九月 日 二十一世孫 斗植 謹撰

 

안동부(安東府) 치소(治所) 북쪽으로 10리 되는 제비원[燕院] 근처에 오리동(梧里洞)이 있고 오리동 동쪽기슭 갑좌경향(甲坐庚向)의 묘소는 나의 21대조 참판(參判)부군이시고, 정부인(貞夫人)이 왼쪽에 부장(祔葬)되었다. 증손인 현령(縣令) 휘 치(輜)의 묘소도 이어져있다. 20대조 참찬(參贊)부군의 묘소는 그 서쪽기슭 병향(丙向)이며 전후취(前後娶) 정부인(貞夫人)은 앞뒤로 부장(祔葬)되었다. 과거에 묘소 지키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조(正祖) 4년 경자년(1780)에 선대 족친(族親) 용천공(龍泉公) 휘 정현(鼎鉉)이 여러 자손과 의논해서 제전(祭田)을 조금 사고 잇달아 재사(齋舍) 8칸을 창건해서 재숙(齋宿)으로 써다가 고종(高宗) 병신년(1896)에 화재를 당해서 타다 남은 몇 칸을 보수해서 띠[茅]로 덮어서 몇 해를 구차하게 지내다가 이제 와서 원근의 종친들이 중건하자는 의논을 하고 자금을 갹출(醵出)해서 목재와 기와를 준비하고 정축년(1937) 봄에 시작해서 다음해 봄에 준공하니 규모가 열 칸인데 중앙에 마루로 쓰고 양쪽에 방을 만들어 여름 ・ 겨울에 편리하고 주방(廚房)과 창고는 과거(過去)와 같게 했다. 낙성(落成)한 뒤에 어른 한 분이 술잔을 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재사는 용천공이 시작하시어 지금 167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화재를 보고 42년을 지나서 새로 중건했으니 이 일은 아마도 옛 분이 한 일을 후인이 이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으나 용천공 시대는 태평성대(太平

聖代)라 백성들에게 훌륭한 교화(敎化)가 이루어져서 선비는 초자가(楚茨歌)를 부르고 부인(婦人)들은 채빈곡(採蘋曲)을 부르면서 조상의 음덕(蔭德)에 보답하고 조상이 돌보시어 자손이 복(福)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시대가 변하고 불미 스런 풍조가 생겨서 세상이 달라졌으니 옛날 문화교육(文化教育)의 영향이 없고 윤리(倫理)가 무너져서 사람의 도리를 하지 않고 또 무신론(無神論)이 범람(氾濫)해서 모두가 무신론(無神論)에 빨려들어서 묘소를 파서 화장(火葬)하고 신주(神主)를 없애면서도 태연(泰然)하게 괴이(怪異)함을 모르니 이대로 간다면 ‘묘소를 써서 편하게 모시고’ ‘춘추로 제사 지내면서 사모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은 결국 글로 남고 말만 전할 뿐이니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후일(後日)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오직 바라는 것은 온 종중(宗中)이 한마음으로 힘써 조손(祖孫)을 가르치는 데 반드시 고금(古今)의 형편을 참작하고 효도하고 공경하고 조상에 보답하는 뜻이 얼마나 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선대(先代)의 뜻을 따라 공손으로 제사를 올리게 하고 우리는 이 재사(齋舍)를 보존하는 일을 알 수는 없지만 높이 솟은 넓은 집이 천년이 되도록 오래 전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첫째 책무인 것이니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이같이 이어가면서 예전같이 계속하라’ 고 했으며 또 ‘자자손손(子子孫孫) 끝없이 이어가라’ 했으니 어찌 같이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니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내가 그대로 기문(記文)을 썼다.

단기 4293년[서기 1960년] 9월 일에 21세손 두식(斗植)은 근찬(謹撰)이라. <국역:권기갑(權奇甲)>

 

十五世 희경공(僖敬公) 諱 용일(用一)

좌윤공의 5대종손 지후공(祗候公) 휘 혁(奕)의 독자(獨子)이다. 관직은 낭장(郎將)을 지냈으나 보서(譜書)에는 고려조의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추밀원사(樞密院事)의 직함이 보이는데 이는 행직(行職)인지 증직(贈職)인지 알 수 없다. 또 사후 추증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받았는데 이는 조선조(朝鮮朝)에 손자 진(軫)이 귀히 됨에 따라서이며 희경(僖敬)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초배(初配)가 정부인(貞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 광계(光啓)의 따님이고 재배(再配)는 정부인 영가권씨(永嘉權氏) 중문지후(中門祗候) 빈(份)의 따님이며, 묘소는 경북 안동시 북쪽 제비원 서쪽 언덕에 병향(丙向)으로 있다. 아들은 감찰(監察) 희정(希正)과 중랑장 희백(希伯)이 있다.

 

高麗門下侍中贈議政府左叅贊諡僖敬公墓碣銘

고려문하시중 증의정부좌참찬 시 희경공 묘갈명

公의 諱는 用一이니 安東之世는 高麗太師權幸之后也라 高祖諱는 世位이니 樞密院府事요 曾祖諱는 良俊이니 兵曹正郞이요 祖諱는 粹니 文科요 考諱는 奕이니 中門祗候贈吏叅이며 封永嘉君하고 妣는 貞夫人權氏禮賓同正烈之女라 公이 仕至門下侍中하고 入本朝에 贈左叅贊諡僖敬은 以孫左相文景公軫의 貴로 追恩也라 謹按文景公이 當麗末國初則公이 似是忠肅忠宣朝人而無世傳信蹟하고 永嘉誌에 居于城東門外云하고 葬于府西燕院坐壬하니 阡在永嘉君墓右麓이라 配貞敬夫人冶城宋氏니 父는 光啓라 祔後하고 繼配는 貞敬夫人永嘉權氏니 父는 中門祗候份이니 同堋이라 生二男하니 希正은 監察이요 贈左議政諡文靖이요 希伯은 中郞將이라 希正은 生七男三女하니 男轂은 正郞이오 輿道는 監司요 軫은 右議政諡文景號敬齋요 輊·軒은 皆縣監이요 軺는 文判事라 本朝에 除北伯해도 不赴하고 隱居于龍宮念松山下하야 自號를 松臯라하다 輜는 縣令이요 女에 裵尙志는 司僕寺事贈吏判이요 李云侯는 副正이요 金革은 奉禮郞이라 轂은 生三男二女하니 男에 處中은 郞將이요 處庸은 牧使贈副提學이요 處和는 司直이요 女에 潘詠은 節制使요 南得儉은 司直이요 軫은 生四男四女하니男에 孟慶은 兵使요 孟度는 郡守요 孟貞은 少尹贈戶判이요 七臨은 文正郞이요 女는李之誠이요 裵素는 文吏正이요 申自敬은 大護軍이요 宋守謙은 縣監이라 輊는 生四男四女하니 男에 若中은 司直이요 若經이오 若衡이오 若枰은 進士요 女는 金雨寶·權均·魯存禮·孫中和요 軺는 生一男寬하니 義禁府經歷이요 輜는 生三男一女하니 男에 致和는 司直이요 致順은 主簿요 致孫은 司直이요 女는 李材요 處庸은 生一男孝孫하니 萬戶贈右副承旨요 處和는 生一男係生하니 生員이오 孟度는 生一男準하고 孟貞은 生五男一女하니 男에 叔慄은 叅奉이요 叔惕이오 惶은 護軍이요 叔愷요 仲愼은 府使요 女에 沈貞源은 僉知오 七臨은 生一男琛하니 縣監이요 若中은 生三男三女하니 男은 用世·叔仁·季仁이요 女는 孫奉孝·權柔文이요 仲敬이요 若經은 生一女하니 李慶春은 錄事오 若衡은 生一男一女하니 男推는 生員이오 女林貴俊은 縣監이요 若枰은 生一男一女하니 男巽은 司直이요 女權成美는 叅軍이요 寬은 生六男二女하니 男에 山海는 號竹林이요 僉正이고 贈吏判諡忠愍이니 丙子에 與六臣과 同殉하야 旌閭하고 享魯峯院하고 自海는 察訪이요 福海요 壽海는 號向日齋고 司正이오 德海요 得海고 女에 李堯丁은 縣監이요 權守經은 武科오 致和는 生四男하니 自位는 別侍오 自育은 司猛이오 自溫은 司直이오 自貴오 致順은 生一男하니 宗李니 進武오 致孫은 一男一女하니 男得中은 監察이요 女鄭以僑는 翰林이라 曾孫以下는 繁不勝錄하나 但追錄入享院祠諸賢하니 八世孫德麟은 號龜峰이요 文正郞인데 晦齋李先生高弟로 享雲谷하고 九世孫復興은 號五慕齋요 壬亂殉節하야 旌閭하고 享忠烈祠하고 士諤은 號梅窩오 正郞이고 贈左承旨니 壬亂錄勳하고 享虎溪祠하고 士敏은 號梅軒이요 司甕主簿고 贈左承旨니 壬亂錄勳하고 旌閭하고 享玉淵祠하다 於乎라 今距公世가 六百有餘禩矣라 以若門閥之舊冠冕之盛이 可謂雄鳴一國而顧世代綿邈하고 文獻이 無徵하니 匪但遺謨懿蹟之泥焉이라 倂與其生卒年月而失之하니 可勝言哉아 正廟己亥에 十三世孫龍泉公鼎鉉이 重建齋舍에 克殫誠力하고 乃於丙戌에 諸族이 會議하야 將竪碣于公墓할새 石이 旣具에 後孫肅永·容默·澤中·五錫·沃이 涉三百里하야 責忠鎬以麗牲之文하니 余固不敢而竊念我先祖副正公이 爲公之孫甥則揆諸諠分에 亦有不可終辭라 爲之銘曰

燕院이 在城西二十里하니 寔公父子巾舃之藏也라 蔚乎喬木之世에 又何蟬赫其簪纓也오 降六百餘載에 所恨杞宋之無憑也라 匪直名跡之俱晦라 從以生卒之莫詳也라 迺竪高珉改舊床也에 微雲來不億其麗가 曷能使久翳而復章가 可驗夫深仁厚澤이 有積于始而必報于終也라 綴蕪詞而揭崇阡하야 將有感于斯銘也하노라

外裔孫從仕郞前章陵叅奉眞城李忠鎬는 謹撰하노라

丙戌十月日에 改竪하다

 

공의 휘(諱)는 용일(用一)이니 안동의 세족(世族)이며 고려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시다. 고조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부사(樞密院府事)요, 증조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조(祖) 휘 수(粹)는 문과(文科)요, 고(考) 휘 혁(奕)은 고려(高麗) 중문지후(中門祗候)요, 조선(朝鮮) 증직이조참판(贈職吏曹叅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봉군(封君)이 되시었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권씨(權氏)며 예빈동정(禮賓同正) 열(烈)의 따님이시다.

공의 벼슬은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조선조(朝鮮朝)에 증직 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인데 손자인 문경공(文景公) 진(軫)이 우상(右相)이 되어서 추은(追恩)으로 받은 것이다.

삼가 고안(考案)하니 문경공(文景公)이 고려말(高麗末)과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분이어서 고려 충숙왕(忠肅王) · 충선왕(忠宣王) 당시의 분으로 추정(推定)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고 ?영가지(永嘉誌)?에 안동의 동문(東門) 밖에 살았고 안동 서쪽 제비원 임좌(壬坐)에 장사지냈고 영가군(永嘉君)의 묘소 우측이라고 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 광계(光啓)의 따님이시며 묘소의 뒤에 부장(附葬)되었고 후배위(後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영가권씨(永嘉權氏)니 중문지후(中門祗候) 빈(份)의 따님이니 같은 광중(壙中)이다.

아들이 두 분인데,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요 희백(希伯)은 중랑장(中郞將)이다. 희정(希正)은 7남3녀를 두셨는데, 아들 곡(轂)은 정랑(正郞)이오 여도(輿道)는 감사(監司)요 진(軫)은 우의정(右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며 호는 경재(敬齋)이다. 지(輊)와 헌(軒)은 다 현감(縣監)를 지냈고 초(軺)는 문과(文科)로 판사(判事)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함경도(咸鏡道) 감사(監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용궁(龍宮)의 염송산(念松山) 아래 은거(隱居)하면서 자호(自號)를 송고(松臯)라 했다. 치(輜)는 현령(縣令)이요, 사위 배상지(裵尙志)는 사복시사(司僕寺事)며 증직 이조참판과 부정(副正)인 이운후(李云侯)와 봉례랑(奉禮郞)인 김혁(金革)이다.

곡(轂)은 3남2녀를 두었는데, 처중(處中)은 낭장(郞將)이요 처용(處庸)은 목사(牧使)며 증직(贈職)부제학(副提學)이요 처화(處和)는 사직(司直)이다. 사위 반영(潘詠)은 절제사(節制使)요 남득검(南得儉)은 사직(司直)이다. 진(軫)은 4남4녀를 두셨으니 맹경(孟慶)은 병사(兵使)요 맹도(孟度)는 군수(郡守)요 맹정(孟貞)은 소윤(少尹)이며 증직 호조참판이요 칠임(七臨)은 문과정랑(文科正郞)이요, 사위는 이지성(李之誠)과 문과이정(文科吏正)인 배소(裵素)와 대호군(大護軍) 신자경(申自敬)과 현감 송수겸(宋守謙)이다.

지(輊)는 4남4녀를 두셨으니 약중(若中)은 사직(司直)이요 약경(若經)과 약형(若衡)과 진사(進士)인 약평(若枰)이다. 사위는 김우보(金雨寶) · 권균(權均) · 노존예(魯存禮) · 손중화(孫中和)이다. 초(軺)는 외아들 관(寬)을 길렀으니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이요, 치(輜)는 3남1녀를 두셨으니 치화(致和)는 사직(司直)이요 치순(致順)은 주부(主簿)요 치손(致孫)은 사직(司直)이요, 사위는 이재(李材)다.

처용(處庸)은 외아들 효손(孝孫)이 만호(萬戶)며 증직 우부승지(右副承旨)요, 처화(處和)도 외아들 계생(係生)이 생원(生員)이오, 맹도(孟度)도 외아들 준(準)이고, 맹정(孟貞)은 5남1녀를 두었으니 숙율(叔慄)은 참봉이요, 숙척(叔惕)이며, 황(惶)은 호군(護軍)이요, 숙개(叔愷)요, 중신(仲愼)은 부사(府使)다 사위인 심정원(沈貞源)은 첨지(僉知)다. 칠림(七臨)은 외아들 침(琛)이 현감이요 약중(若中)은 3남3녀를 두셨는데, 용세(用世)와 숙인(叔仁)과 계인(季仁)이다. 사위는 손봉효(孫奉孝)와 권유문(權柔文)이오, 중경(仲敬)이오, 약경(若經)은 1녀를 길렀는데, 사위는 녹사(錄事)인 이경춘(李慶春)이다. 약형(若衡)은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 추(推)는 생원이오, 사위 임귀준(林貴俊)은 현감이다. 약평(若枰)은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 손(巽)은 사직(司直)이요, 사위 권성미(權成美)는 참군(叅軍)이다.

관(寬)은 6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 산해(山海)의 호는 죽림(竹林)이고 벼슬은 첨정(僉正)인데 증직 이조참판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니 단종손위(端宗遜位) 때에 사육신(死六臣)과 같이 순직(殉職)해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노봉서원(魯峯書院)에 모시었고, 자해(自海)는 찰방(察訪)이요, 다음 복해(福海)요, 수해(壽海)는 호 향일재(向日齋)고 사정(司正)이오, 다음 덕해(德海)요, 득해(得海)이다. 사위 이요정(李堯丁)은 현감이요, 권수경(權守經)은 무과(武科)이다. 치화(致和)는 4남을 두셨는데, 자위(自位)는 별시위(別侍衛)오 자육(自育)은 사맹(司猛)이오 자온(自溫)은 사직(司直)이오, 다음 자귀(自貴)이다. 치순(致順)은 외아들 종리(宗李)가 진무(進武)이다. 치손(致孫)은 1남1녀니 아들 득중(得中)은 감찰(監察)이요, 사위 정이교(鄭以僑)는 한림(翰林)이다.

증손 이하는 번성해서 다 기록할 수 없고, 단지 서원에 배향된 제현(諸賢)만 추록하니, 8세손 덕린(德麟)은 호 귀봉(龜峰)이요 문과(文科) 정랑(正郞)인데 회재(晦齋) 이(李)선생의 제자며 운곡서원에 모시었고, 9세손 복흥(復興)은 호 오모재(五慕齋)요 임란(壬亂)에 순절(殉節)하시어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충렬사(忠烈祠)에 모시었고, 사악(士諤)은 호 매와(梅窩)요 정랑(正郞)이며 증직 좌승지니 임란(壬亂)의 공신록(功臣錄)에 오르시고 호계사(虎溪祠)에 모시었고, 사민(士敏)은 호 매헌(梅軒)이요 사옹주부(司甕主簿)였고 증직 좌승지니 임란 공신록에 오르시고 정려가 내리고 옥연사(玉淵祠)에 모시었다.

아! 공으로부터 지금까지 600년이 넘는 세월인데 옛 벼슬이 이렇게 화려했으니 한 나라에 명성을 남기면서 대대로 이어졌다 할 수 있으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니 그 훌륭한 행적과 가르침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 생졸년(生卒年)까지 없어졌으니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정조(正祖) 기해년(1779)에 13세손 용천공(龍泉公) 정현(鼎鉉)씨가 재사(齋舍)를 중건하는 데 성력(誠力)을 다했고, 그리고 병술년(1946)에 제손(諸孫)들이 회의를 해서 묘비의 돌을 준비해 놓고 후손인 숙영(肅永) · 용묵(容默) · 택중(澤中) · 오석(五錫) · 옥(沃) 등이 300리를 와서 나 충호(忠鎬)에게 비문을 부탁하니 나는 원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깊이 생각하니 나의 선조 부정공(副正公)이 공의 손서(孫壻)이니 그 정의로 굳이 사양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銘)을 쓴다.

 

燕院在城西二十里 寔公父子巾舃之藏也

(연원재성서이십리 식공부자건석지장야)

안동 서쪽 20리 제비원이 공의 부자(父子)의 묘역이다.

蔚乎喬木之世 又何蟬赫其簪纓也

(울호교목지세 우하선혁기잠영야)

화려한 명문세가에 또 높은 직위의 인물이 어이 이렇게 많았을까?

降六百餘載 所恨杞宋之無憑也

(강육백여재 소한기송지무빙야)

6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서 문적이 없어졌으니

匪直名跡之俱晦(비직명적지구회)

탄식이 되는 것은 명성과 업적뿐만이 아니라

從以生卒之莫詳也(종이생졸지막상야)

생졸년까지 알 수 없으나

迺竪高珉改舊床也(내수고민개구상야)

이렇게 높은 비석과 상석을 바꾸는 것은

微雲來不億其麗(미운래불억기려)

그 자손이 많지 않았다면

曷能使久翳而復章(갈능사구예이부장)

확실하지 않은 오래 된 일을 어찌 다시 밝힐 수 있었겠는가?

可驗夫深仁厚澤(가험부심인후택)

그 남기신 어진 음덕이 크기 때문에

有積于始而必報于終也(유적우시이필보우종야)

후손들에게 복이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綴蕪詞而揭崇阡 將有感于斯銘也

(철무사이게숭천 장유감우사명야)

큰 묘소에 부족한 글로 감회가 깊은 명(銘)을 써서 후세에 남기려한다.

외후손(外後孫) 종사랑(從仕郞) 전 장릉참봉(章陵參奉) 진성(眞城) 이충호(李忠鎬)는 삼가 찬(撰)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병술년(1946) 10월 일에 개수(改竪)하다.

묘소는 안동군 북후면(北後面) 오산동(烏山洞) 연원(燕院) 잣밭골에 있다

 

十六世 문정공(文靖公) 諱 희정(希正)

 

좌윤공(佐尹公)의 6대 종손(宗孫)으로 희경공(僖敬公) 휘 용일(用一)의 아들이다. 관직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냈다. 감찰규정이란 고려 때 감찰사(監察司)에 딸린 종6품 벼슬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고친 이름인데 조선조의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같은 관직이다. 사후에 그 셋째아들 문경공(文景公) 좌의정 진(軫)이 귀히 됨에 따라 의정부 좌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판도총랑(版圖總郎) 김해부사(金海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고, 묘소는 안동시 남쪽 강정(江汀)의 고지동(高支洞)에 을향(乙向)으로 쌍분을 이루고 있다. 아들은 경산현령(慶山縣令) 곡(穀) ・ 감사(監司) 여도(輿道) ・ 좌의정 진(軫) ・ 현감 지(輊) ・ 현감 헌(軒) ・ 대사성 초(輜) ・ 현령 치(輜)가 있고 따님은 3녀가 각각 증 판서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 증 참판 이운후(李云侯:퇴계 이황李滉의 고조부) ・ 안동인(安東人) 김혁(金革:김조순金祖淳의 13대조)에게 출가했다. 공의 자녀 7남 3녀가 모두 이와 가치 현달하니 오늘과 같이 좌윤공파의 문호(門戶)를 크게 번창시킨 것이 실로 공이 끼친 큰 덕으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자(長子) 경산현령(慶山縣令) 권곡(權轂)은 여섯째 동생 권초(權軺)와 함께 예천(醴泉) 대죽리(大竹里)로 이거(移居)하였는데 권초(權軺)의 손자 권산해(權山海)는 부정공파(副正公派)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사위가 되어 만년에 단종(端宗) 복위 실패로 자진(自盡)하였다. 셋째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은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 세종(世宗) 때 좌의정에까지 올랐고 만년에는 풍산(豐山) 상리(上里)에 복거(卜居)했다는 기록이 ?영가지(永嘉誌)?에 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에 있고 안동지방에 세거(世居)하는 후손이 없다. 넷째 권질(權軼)과 다섯째 권헌(權軒)은 예천 금곡(金谷)으로 이거하고, 안동에는 오직 막내 권치(權輜)의 후예 몇 집이 풍산 일대에 산거(散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외손들은 번창하여 안동 지방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였으니 권희정(權希正)의 사위는 첫째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둘째가 퇴계의 고조부 이운후(李云侯), 셋째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조부 김혁(金革)으로 안동 지방에 세거하는 여러 씨족으로서 권희정(權希正)의 외손이 되지 않는 가문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 외손은 번창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권희정(權希正)의 아들 좌의정 권진(權軫)은 안동 김씨 전농정(典農正) 김득우(金得雨)의 사위가 되었고, 안동 김씨 김득우(金得雨)의 아들 김혁(金革)은 권희정(權希正)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이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諡文靖公墓碣銘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행감찰 시문정공 묘갈명

 

花之權이 盖出於太師氏而積德根基에 爲當時之最赫世簪纓이 實玆州之冠에 加之以先生子若孫의 黼黻弘獻則宜其文獻之表表可稱而惜乎라 年代浸遠하고 累經兵燹하야 功名事業과 生卒月日을 有不可强攷而只以年代之詳略으로 特爲序次하니 豈非記事者恨於後日也아 謹按하니 先生諱는 希正이요 姓은 權氏오 籍安東하니 其鼻祖는 高麗太師諱幸이오 十世諱至正은 佐尹이오 三傳至諱粹는 文科니 卽先生之曾祖也오 祖諱는 奕이니 文科오 贈吏叅이고 封永嘉君하고 考諱는 用一이니 門下侍中이오 贈左叅贊諡僖敬이니 先生贈官至左議政諡文靖三世追恩이 以先生之第三子軫之貴也라 貞敬夫人彦陽金氏는 府使可器之女니 有七男三女하니 男에 轂은 版圖正郞이오 輿道는 文監司오 軫은 文科左議政世子師傅오 號는 敬齋오 諡文景이오 輊는 縣監이니 以孝行으로 旌閭하고 軒은 縣監이오 軺는 文判事오 入本朝하야 拜大司成除北伯해도 皆不赴하고 號는 松臯요 輜는 縣令이오 以老職으로 陞通政하고 女에 裵尙志는 司僕寺事오 贈兵判이오 李云侯는 副正이오 金革은 文監司오 轂의 三男에 處中은 郞將이요 處庸은 牧使요 處和는 司直이요 軫의四男에 孟慶은兵使요 孟度는 郡守요 孟貞은 少尹이오 贈戶叅이요 七臨은文兵正이오 輊의四男에若中은 司直이오 若經이오 若衡이오 若枰은 進士요 軺의 一男寬은 經歷이오 輜는 三男하니 致和는司直이오 致順은 主簿요 致孫은 司直이라 以下分派之散이 在各處에 非不繁衍而歲久年深에 詳略不同하야 有不可枚錄而盖先生之道德文章이 載在國史家乘而世級漸下하야 遺蹟蕩失無由措其萬一하니 雖若可恨而先生衣履改厝之日에 松巖權先生好文이 祭之以文曰 惟公은 應鼻祖之後하야 鳴英廟之庭에 可補周袞이요 可調殷羹이라 臨民施澤이 春雨時榮이요 匡君糾愆이 秋霜夜橫이라 位足台鼎이요 手合均衡이라 赫世功勳이 照時儀刑이라 一片苔碑가 千古姓名이라하니 觀於此에 略可以仰想先生之遺風而他無可攷則後生이 何述가 藐余顓蒙은 忝在外裔之末하야 適守玆州에 佳覩百歲未遑之盛事하고 不覺斂袵而起敬焉이라 銘曰

殷羹周袞之事業이요 春雨秋霜之氣像이라 一片苔碑之指點이 萬古姓名之瞻仰이라

己卯月日에 嘉善大夫行安東都護府拜安東鎭兵事水軍僉節制使眞城李啓魯는 謹識하노라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원래 태사공(太師公)의 적덕(積德)한 기반(基盤)에서 시작되었고 의정공(議政公)이 당시에 높으신 관직(官職)이 이 고을에서 으뜸이시었으며 또 아들 손자들의 높은 벼슬을 했으니 당연히 문헌(文獻)에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일인데 애석(愛惜)하게도 세월이 오래되고 난리를 여러 번 겪으면서 공명(功名)과 사업(事業)과 생졸년(生卒年)을 참으로 상고(詳考)할 수도 없고 단지 대략적인 연대로 차례를 정할 수밖에 없으니 후일에 글을 쓰는 자신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고안(考按)하니 선생 휘(諱)는 희정(希正)이요 성(姓)은 권씨(權氏)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하니 시조(始祖)는 고려태사(高麗太師) 휘(諱) 행(幸)이다. 10세 휘 지정(至正)은 좌윤(佐尹)이오 3대를 내려와서 휘 수(粹)는 문과(文科)니 바로 선생의 증조이시다. 할아버지 휘는 혁(奕)이니 문과(文科)오 증직 이조참판(吏曹參判)이고 영가군(永嘉君)으로 봉군(封君)되시었다. 아버지 휘는 용일(用一)이니 고려조(高麗朝) 문하시중(門下侍中)이오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다. 선생은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시다. 3대의 증직이 선생의 셋째 아드님 진(軫)의 관직(官職)에 따라 추증(追贈)된 것이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는 부사(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시니 7남3녀를 기르시었다. 아들 곡(轂)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오, 여도(輿道)는 문과감사(文科監司)오, 진(軫)은 문과(文科) 좌의정(左議政) 세자사부(世子師傅)인데 호는 경재(敬齋)요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지(輊)는 현감(縣監)이니 효행(孝行)이 있어서 정려(旌閭)가 내렸고, 헌(軒)은 현감이오, 초(軺)는 문과판사(文科判事)였다. 조선(朝鮮)이 되어서 대사성(大司成)과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었고 호는 송고(松臯)라 했다. 치(輜)는 현령(縣令)이오, 원로(元老)의 예우(禮遇)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사위는 사복시사(司僕寺事)며 증직 병조참판(兵曹參判)인 배상지(裵尙志)와, 부정(副正)인 이운후(李云侯)와, 문과감사(文科監司)인 김혁(金革)이다. 곡(轂)은 아들이 셋인데, 처중(處中)은 낭장(郞將)이요, 처용(處庸)은 목사(牧使)요, 처화(處和)는 사직(司直)이다. 진(軫)은 아들이 넷인데, 맹경(孟慶)은 병사(兵使)요, 맹도(孟度)는 군수(郡守)요, 맹정(孟貞)은 소윤(少尹)이며 증직 호조참판(戶曹叅判)이요, 칠림(七臨)은 문과(文科) 병조정랑(兵曹正郞)이오, 지(輊)는 아들이 넷인데, 약중(若中)은 사직(司直)이오, 다음 약경(若經)이오, 다음 약형(若衡)이오, 다음 약평(若枰)은 진사(進士)이다. 초(軺)의 아들 관(寬)은 독자(獨子)며 관직은 경력(經歷)이다. 치(輜)는 아들이 셋인데, 치화(致和)는 사직(司直)이오, 치순(致順)은 주부(主簿)요, 치손(致孫)은 사직(司直)이다. 이하는 파(派)가 나뉘어져 각처에 살고 있는데, 모두가 번성(繁盛)하고 세월이 오래되었고 상황이 다 같을 수 없어 모두를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의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이 대체로 국사(國史)와 가승(家乘)에 실려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이 분실되어 만분(萬分)의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니 비록 한(恨)이 되지만 선생의 묘소를 개축(改築)할 때에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선생이 제문(祭文)에 쓰기를 “공은 시조의 뒤를 이어 영조(英祖)의 조정을 울렸으니 주(周)나라를 도운 곤직원로(袞職元老)와 같았고 은(殷)나라에 화갱(和羹)을 한 부열(傅說)과 같아서 백성에게는 봄비 같은 은택을 베풀었고 임금님에게 과오(過誤)를 바로잡은 것은 가을밤 서리가 비낀 것같이 엄격했다. 지위는 정승(政丞)이 되기에 충분했고 재주는 균형(均衡)에 부합(符合)하여 세상에 공적(功績)과 훈업(勳業)이 나타나고 그 시대의 모습이 조명되어 한 면의 비석(碑石)에 천고(千古)의 성명(姓名)이 전해진다.”라고 했으니 이 글을 읽어 보면 선생이 남기신 풍교(風敎)를 대략 우러러 상상할 수 있으니 더 고증(考證)할 수 없는 후생(後生)이 무엇을 더 서술(敍述)하겠는가? 부족하고 우매(愚昧)한 자신이 누가 되게 외손의 처지로 이 고을 원님으로 왔다가 백 대가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아름답고 성대한 일을 구경하면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쓴다.

殷羹周袞之事業(은갱주곤지사업)

은(殷)나라 부열(傅說) 같고 주(周)나라 주공(周公)같은 업적(業績)이요,

春雨秋霜之氣像(춘우추상지기상)

봄비 같고 가을 서리 같은 기상(氣像)이시다.

一片苔碑之指點(일편태비지지점)

한 조각 이끼 푸른 비(碑)를 가리키면서

萬古姓名之瞻仰(만고성명지첨앙)

만고(萬古)의 명성(名聲)을 우 러러볼 수 있다.

기묘년(1879) 월 일에 가선대부 행(行) 안동도호부 배(拜) 안동진병사수군첨절제사 진성(眞城) 이계로(李啓魯)는 삼가 기록 하노라.

묘소는 안동군 정하 2동 강정(江汀) 고지동(高支洞)에 있다.

묘소는 2021년 연원재사 옆으로 이장하였다.

<국역:권기갑(權奇甲)> <편집:권혁무權赫武>

 

안동권씨 좌윤공파 연원재사(安東權氏佐尹公派 燕院齋舍)

 

1. 유래

 

이 재사는 안동권씨 좌윤공파 파조 좌윤공(佐尹公) 지정(至正)의 후예로서 고려조의 인물인 지후공(祗侯公) 혁(奕)을 비롯하여 그 아드님인 희경공(僖敬公) 용일(用一), 증손자인 퇴산공(退山公) 치(輜)와 그 배위 분의 묘제를 위해 정조 4년(1780)에 창건되었다. 그 후 고종 병신(丙申, 1896)년에 화재를 당하여 불타고 남은 건물을 수리하였으며, 정축(丁丑, 1937)년에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재사를 창건할 당시에는 고위(考位) 3위(位)와 그 배위의 묘제를 수행하기 위해 건립된 재사였으나 근래에 들어 지후공의 손자인 문정공(文靖公) 희정(希正)과 배위인 언양김씨(彦陽金氏)의 묘사를 이곳에서 준비하게 되어 묘사의 대상은 총 9분으로 늘어났다.

재사는 안동시 북후면 오산리의 잣밭골[栢田谷]에 있는데 이곳은 우리에게 제비원미륵불[泥川洞石佛]로 유명한 제비원[燕院]의 북쪽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 재사의 명칭을 제비원이라는 지명에서 따왔음을 알 수 있다. 잣밭골은 입구가 동에서 서쪽을 향해있는 깊은 골짜기로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 잣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하여 잣밭골로 불렀다. 이곳 골짜기의 산자락과 산등에는 연원재사와 관련 묘소가 분포되어 있고, 인근의 골짜기와 오이산(烏耳山)에는 안동권씨 부정공(副正公, 通義)의 6대손으로 단종대왕의 외조부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묘소와 재사인 오이재(烏耳齋)가 있다.

연원재사를 이해하기 위해 『영가언행록(永嘉言行錄)』과 외후손 송준필(宋浚弼)이 찬(撰) 지후공 묘갈명(祗侯公墓碣銘) 등을 살펴보면 관련 인물의 세계(世系)와 이력은 다음과 같다.

안동권씨 15파 가운데 6번째 파에 해당되는 좌윤공파(佐尹公派)는 태사공(太師公, 幸)의 10세손인 좌윤공 지정(至正)을 파조로 한다. 파조의 행적과 관련되어 전하는 기록은 호장(戶長)을 지낸 통(通)의 장남으로 고려 때 호장으로서 좌윤(佐尹)을 지냈다는 것 이외에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좌윤이란 일반적으로 고려 공민왕 때 삼사(三司)에 딸렸던 종3품의 벼슬을 지칭하며, 조선시대 때는 한성부(漢城府)에 설치된 종2품의 벼슬을 뜻하는데 이때는 좌윤(佐尹)이 아닌 좌윤(左尹)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공이 받은 좌윤은 고려 초기 태봉(泰封)의 관제를 답습해 광평성(廣評省)에 두었던 벼슬이 향직(鄕職)으로 변형된 것으로서 6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좌윤공의 아들은 세위(世位)인데 정용위 별장(精勇衛別將)을 지냈고 손자는 양준(良俊)으로 별장부정을 지냈는데 복야공(僕射公) 수홍(守洪)의 사위이다. 증손인 수(粹)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두 아들인 혁(奕)과 견(堅)을 두었는데 혁은 문과를 하여 중문지후(中門祗侯)가 되었고 견(堅)은 낭장으로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추증된다. 이후 공경대부(公卿大夫)가 계출(繼出)하여 문호가 크게 번창하였다.

묘사의 대상 가운데 제일 윗대 분인 지후공 혁의 이력을 살펴보면 공은 태사공의 14세손이며 좌윤공의 5대 종손이다. 고려 충렬왕 4년(127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종6품직인 중문지후에 이르렀다. 그 밖의 기록은 미상이고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층되고 또한 영가군으로 추봉(追封)되었는데 이는 조선조에 들어와 그 증손인 진(軫)이 정승으로 영달하였기 때문이다. 배위는 동종(同宗)의 영가권씨(永嘉權氏)로서 예빈동정(禮賓同正) 열(烈)의 따님이고 묘소는 연원재사가 위치한 오이산에 경향(庚向)으로 합폄(合窆)되어 있다.

희경공 용일은 지후공 혁의 독자로 관직은 낭장(郎將)을 지냈으나 보서(譜書)에는 고려조의 문하시중과 추밀원사의 직함이 보인다. 공이 타계한 후 조선조에 들어와 손자 진이 귀하게 됨에 따라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희경(僖敬)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초배(初配)가 정부인(貞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 광계(光啓)의 딸이고, 재배(再配)는 정부인 영가권씨 중문지후 빈(份)의 딸이며 묘소는 안동시 북쪽 제비원의 서쪽 언덕에 병향(丙向)으로 있다. 아들은 감찰(監察) 희정(希正)과 중랑장 희백(希伯)이 있다.

문정공 희정은 희경공 용일의 아들로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관직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역임하였다. 감찰규정이란 고려 때 감찰사(監察司)에 딸린 종6품 벼슬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고친 이름인데 조선조의 사헌부 감찰과 같은 관직이다. 공의 사후에 3자인 문경공 좌의정 진이 귀하게 됨으로 인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판도총랑(版圖總郞) 김해부사 가기(可器)의 딸이고 슬하에 7남3녀를 두었다. 아들은 경산현령 곡(轂)․감사 여도(輿道)․좌의정 진(軫)․현감 지(輊)․현감 헌(軒)․대사성 초(軺)․현령 치(輜)가 있고, 딸은 3녀가 증 판서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증 참판 이운후(李云侯:退溪 李滉의 고조부)․안동인(安東人) 김혁(金革:金祖淳의 13대조)에게 출가 했다. 이처럼 자녀들이 모두 현달하니 오늘과 같이 좌윤공파의 문호(門戶)를 크게 번창시킨 것은 실로 공이 끼친 덕으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퇴산공 치는 문정공 희정의 7자로 좌윤공의 7대손이며 홍원현령(洪原縣令)을 지냈다. 맏형 곡(轂)이 경산현령 재임 중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매부인 배상지와 함께 경북 예천의 용궁(龍宮) 염송산(濂松山) 아래 대죽리(大竹里)로 들어가 시거(始居)하였는데, 이때 공도 함께 들어가 고려조에 대한 지조를 지켰다. 묘소는 지후공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있다.

연원재사의 묘제는 음력 10월 14일이 정일(定日)인데, 보통 후손들이 묘사일 하루 전에 입재(入齋)하여 저녁에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다음날 오전에 묘사를 봉행(奉行)한다.

 

2. 건물의 구성과 배치

 

재사는 잣밭골로 들어가면서 좌측에 형성된 작은 골짜기 안에 있는데 이 골짜기의 지형은 ‘야(也)’자 형국을 이루고 있다. 음택(陰宅)을 정함에 있어 야(也)자 형국은 아주 길지라고 전해지는데 지후공(祗侯公, 奕)과 증손자인 퇴산공(退山公, 輜)의 묘소는 ‘야(也)’자의 필순(筆順) 가운데 마지막 획(劃)의 끝부분에 있으며 서남쪽을 바라보며 앞뒤로 자리 잡고 있다. 재사는 묘소에서 서쪽으로 1백 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동향으로 묘소와 마주보고 있다.

연원재사는 초창시에 8량(樑)의 규모로 건립되었는데 그 후 중간에 화재를 만나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정축(1937)년에 지금의 규모인 10칸의 강당으로 중건되었다. 현재 재사는 강당 1동과 관리인이 평소에 기거하고 묘사 때 제물을 장만하는 주사 1동으로 나누어진다. 강당은 ㄱ자 형태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4칸 크기의 대청을 베풀고 좌우 협칸에는 각각 2칸 크기의 통방을 배치하였으며, 다시 우측 통방의 앞쪽에는 2칸 크기의 통방을 마련하였다.

강당을 건축함에 있어서 대청의 전면과 좌측 협실과 면해있는 벽면에 4분합문을 달아 공간을 넓게 쓰려는 의도가 돋보이는데, 필요시에 협실의 분합문을 들어 올리면 두 개의 공간이 트여서 6칸 크기의 공간으로 변환이 된다. 대청 안쪽의 벽면에는 21세손 두식(斗埴)이 1960년에 지은 기문(記文)이 걸려있고 그 우측에는 안동 가일(佳日)마을 출신으로 국사편찬위원을 지낸 권오인이 쓴 ‘연원재사(燕院齋舍)’ 현판이 게첨되어 있어 재사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강당에 딸린 각 공간의 기능을 살펴보면 대청은 묘사 때 참제원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고 문중의 현안에 대해 의논하는 공간이고, 좌측과 우측의 방은 숙박공간이다. 대청의 동쪽 방에는 묘사 때 주로 수임이나 원로들이 묶고, 서쪽 방에는 연소한 참제원 들이 묶으며, 동재 앞에 마련된 유사방에는 유사들이 기거하면서 제물을 다루고 제반준비를 행한다.

강당의 좌측에 자리한 주사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주사건물의 좌향은 동향이고 규모는 5칸 집으로 형태는 ㄱ자 형이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이다. 공간구성은 가운데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1칸 크기의 안방을 두고, 마루의 우측에는 각각 1칸 크기의 건넌방과 고방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안방의 앞쪽으로는 1칸 크기의 부엌을 배치하였는데 부엌의 가장자리에는 가작을 설치하여 공간을 넓게 사용하고자 꾀하였다.

 

3. 기타

 

1) 關聯儀禮

 

(1) 墓祭笏記

 

厥明灑掃布席陳饌○參神○初獻官以下敍立者皆再拜○鞠躬拜興○拜興降神○謁者引初獻官詣盥帨位○盥帨○因詣香案前○跪○焚香○再拜○少退立○執事者一人取盤盞○立于獻官之左○執事者一人執酒注○立于獻官之右○獻官跪○執事亦跪○獻官受盤盞○執事者斟酒于盞○獻官酹于茅上○以盤盞授執事友之故處○俛○伏○興○獻官再拜○謁者引初獻官降復位◎行初獻禮○謁者引初獻官詣香案○前立○執事者一人執酒注立于獻官之右○執事者一人取考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獻官受盤盞東向立○執事者西向斟酒于盞○獻官奉盤盞授執事奠于故處○執事者一人取妣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獻官受盤盞東向立○執事者西向斟酒于盞○獻官奉盤盞授執事奠于故處○祭酒○執事者二人奉考妣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右○獻官號○執事亦號○獻官受考位盤盞○祭于茅上○以盤盞授執事反之故處○次受妣位盤盞○祭于茅上○以盤盞授執事反之故處○俛○伏○興○少退立○執事者啓飯盖○讀祝○祝取祝板立于獻官之左○獻官以下敍立者皆號○祝號讀祝○畢○獻官以下皆興○獻官再拜○謁者引初獻官降復位○執事者撤酒◎行亞獻禮○贊引引亞獻官詣盥帨位○盥帨○因詣香案前立○執事者一人執酒注立于獻官之右○執事者一人取考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獻官受盤盞東向立○執事者西向斟酒于盞○獻官奉盤盞授執事奠于故處○執事者一人取妣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獻官受盤盞東向立○執事者西向斟酒于盞○獻官奉盤盞授執事奠于故處○祭酒○執事者二人奉考妣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右○獻官號○執事亦號○獻官受考位盤盞○祭于茅上○以盤盞授執事反之故處○次受妣位盤盞○祭于茅上○以盤盞授執事反之故處○俛○伏○興○少退再拜○贊引引亞獻官降復位○執事者撤酒◎行終獻禮○贊引引終獻官詣盥帨位○盥帨○因詣香案前立○執事者一人執酒立于獻官之右○執事者一人取考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獻官受盤盞東向立○執事者西向斟酒于盞○獻官奉盤盞授執事奠于故處○執事者一人取妣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獻官受盤盞東向立○執事者西向斟酒于盞○獻官奉盤盞授執事奠于故處○祭酒○執事二人奉考妣位前盤盞○立于獻官之左右○獻官號○執事亦號○獻官受考位盤盞○祭于茅上○以盤盞授執事反之故處○次受妣位盤盞○祭于茅上○以盤盞授執事反之故處○俛○伏○興○少退再拜○贊引引終獻官降復位行侑食禮○執事者添盞中酒○扳匙○正筯○獻官以下敍立者皆俯伏食頃○祝先起三噫歆○獻官以下俯伏者皆興○進茶○執事者撤考妣位羹○奉水奠之○三抄飯○獻官以下敍立者皆鞠躬少頃○平身○辭神○執事者下匙筯○合飯盖○獻官以下敍立者皆再拜○執事者撤酒撤饌○祝焚祝文○禮畢

 

 

 

(2) 墓祭 祝式

 

燕院齋舍佐尹公及列位祭壇常 享祝文

연원재사좌윤공급열위제단상 향축문

 

維歲次(年干支) ○月(干支)朔 ○日(干支) ○世孫某官某 敢昭告于

(유세차 년 간지 모월 간지 삭 모일 간지 기세손모관모 감소고우)

派祖高麗佐尹府君之壇(파조고려좌윤부군지단)

유세차 ○년 ○월(간지) ○일(간지) ○세손 ○가 송구함을 무릅쓰고,

파조 할아버님 고려좌윤 부군(高麗佐尹府君)께 감히 아뢰옵니다.

 

恭惟我祖 學文裕昆(공유아조 학문유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조께서는 학문으로 후손을 넉넉하게 하였네

文科出仕 忠義報國(문과출사 충의보국) 문과로 벼슬길에 나아가 충의로 나라에 보답했네

用伸追慕 栢田封壇(용신추모 백전봉단) 이로써 추모의 정 펼처 잣밭골에 제단을 쌓아

霜露旣降 冞增感愴(상로기강 미증감창)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어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더욱 더하옵니다.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敬奉(근이 청작서수 지천세사 경봉) 공손(恭遜)히 맑은 술과 모든 제수로써 매년 행사로 제사를 올리며

 

顯○代祖妣夫人(현○대조비부인) ○대 할머님 부인

顯○代祖考高麗銀靑光祿大夫樞密院府事軍器監府君(현○대조고고려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군기감부군)

顯○代祖妣夫人(현○대조비부인) ○대 할머님 부인

顯○代祖考高麗別將副正行兵部正郞府君(현○대조고고려별장부정행병부정랑부군)

顯○代祖妣夫人永嘉權氏(현○대조비부인영가권씨) ○대 할머님 부인 영가권씨

顯○代祖考高麗文科府君(현○대조고고려문과부군)

顯○代祖妣夫人安東姜氏配食尙(현○대조비부인안동강씨배식상) ○대 할머님 부인 안동강씨도 공경히 받들어 모셔서 배식(配食)케 하나이다.

饗(향) 흠향(歆饗)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庚子(2020) 後孫赫武 謹撰

 

글자풀이

* 裕(넉넉할 유) * 昆(후손곤 자손곤) * 冞(두루 다닐 미) * 愴(슬퍼할 창) * 感愴(감창)-感慕(감모)하는 마음이 움직여 슬픔 * 祇(공경할 지)

 

燕院齋舍 山神祝文(연원재사 산신축문)

 

維歲次(年干支) ○月(干支)朔 ○日(干支)某官某

(유세차 년간지) ○月(간지)삭 ○일(간지)모관모)

敢昭告于(감소고우)

土地之神權 恭修歲事于先祖考高麗佐尹府君之壇維時保佑

(토지지신권 공수세사우선조고고려좌윤부군지단유시보우)

實賴 神休敢以酒饌祗薦于 神尙

(실뢰 신휴감이주찬지천우 신상)

饗(향)

 

① 祝式

維歲次年月日于支幾世孫某

敢昭告于

顯幾代祖考高麗中門祇侯贈嘉善大夫吏曺叅判永嘉君府君

顯幾代祖妣貞夫人永嘉權氏之墓氣序流易霜露旣降追惟報本禮不敢忘瞻掃 封塋不勝感慕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尙

 

② 祝式

維歲次年月日于支幾世孫某

敢昭告于

顯幾代祖考高麗門下侍中贈崇祿大夫議政府左叅贊謚僖敬公府君

顯幾代祖妣貞敬夫人冶城宋氏

顯幾代祖妣貞敬夫人永嘉權氏之墓氣序流易霜露旣降追惟報本禮不敢忘瞻掃 封塋不勝感慕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尙

 

③ 祝式

維歲次年月日于支幾世孫某

敢昭告于

顯幾代祖考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謚文靖公府君

顯幾代祖妣貞敬夫人彦陽金氏之墓氣序流易霜露旣降追惟報本禮不敢忘瞻掃 封塋不勝感慕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尙

 

④ 祝式

維歲次年月日于支幾世孫某

敢昭告于

顯幾代祖考贈通政大夫行洪原縣令府君

顯幾代祖妣淑夫人冶城宋氏之墓氣序流易霜露旣降追惟報本禮不敢忘瞻掃 封塋不勝感慕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尙

 

⑤ 山神 祝式

維歲次年月日于支幼學某貫姓名

敢昭告于

土地之神某恭修歲事于先祖考某官府君之墓維時保佑實賴神休敢以酒饌祗薦于 神尙

 

⑥ 陳設圖 및 敍立圖

考位 妣位
盞盤 羹 匙筯 飯 盞盤
熟菜 淸醬 沈菜

 

祝板 香案 尊所

執事→ ←執事 ←贊者

(西階) (東階)

初獻官 亞獻官 終獻官 祝 謁者 贊引 在位者以次敍立

 

※ 陳設順序:先進果品-脯醢-菜饌-匙筯-盞盤-魚肉-餠麵-飯羹-炙湯

 

2) 關聯資料

 

(1) 燕院齋舍重新記

 

直永嘉治北十里而近有燕尾院梧里洞洞之東麓庚向之阡寔我二十一代祖參判府君衣履之藏也貞夫人祔左曾孫縣令公諱輜亦繼葬焉二十代祖參贊府君之藏在其西麓丙向而前後貞夫人先後祔焉舊無冡人以守之正廟庚子族先龍泉公諱鼎鉉詢及諸宗置祭田若干塍仍創建祭閣八樑以爲齋宿之所矣 高宗丙甲災扵㭗攸因其燼餘架漏牵補誅茅以覆苟且度了者有年矣至是遠近宗盟峻發重建之議醵鍰貲鳩材瓦經始扵丁丑春而越明年春竣功其制凡十間中爲堂而兩夾爲室以適凉燠厨竃庫藏因舊貫焉既落首班一人執爵而旅之曰維我先齋倡自龍翁而至一百六十七年而不幸及災歷四十二年而始克重新玆事或庶幾籍手前修而亦不禁人代今昔之感焉在龍翁之時則適丁昭代右文孝理之化洽于群黎士詠楚茨女歌採蘋莫不以反始報本爲重宜祖考來格而子孫受嘏矣若今之世則頽季也狂潮震盪桑海茫洋先王文教無復遺響而網淪法斁人而默矣矧夫一種無神之論汎滥天下載胥及溺馴而至焚屍毀宔恬不為怪自今以往孔聖所謂卜其宅兆而安曆之春秋祭祀以時思之者終歸扵彌文剩語而已然則吾輩將何修而為善後之圖哉惟願僉宗一乃心膂教養兒孫必須劑量新舊而申之以孝悌之道使知反始報本之為何等所重而克追先猷以敬其祭祀俾吾先齋保不知巋然空閣而永傳千祀之遠此裔承今日第一義詩不云乎以似以續續古之人又云子子孫孫勿替引之盍相與勉旃僉曰唯唯仍屬余爲記

檀紀四二九三年 九月 日 二十一世孫 斗植謹撰

 

(2) 永嘉君 墓碣銘

 

【前面大字】高麗中門祗侯 贈嘉善大夫吏曹參判永嘉君權公奕之墓

【碑 文】

故中門祗侯永嘉君權公諱奕之藏在安東府北烏耳洞枕甲之原舊有表漫漶不堪讀後孫將治石改竪以顯刻屬冶城宋浚弼鳴呼公高麗人也距今五百有餘年出處事行史逸無傳生卒表德亦未詳所據者公少博學能文章忠烈王十六年登第與禹祭酒先生倬同榜官至中門袛侯旣致仕優游田里以令名終後 贈嘉善大夫吏曹參判追封永嘉君權氏東方著姓始祖幸佐麗太祖平甄亂官至太師十世而諱至正官佐尹子諱世位樞密院府事子諱良俊兵曹正郎子諱粹文科娶安東姜氏刑部尚書孝昌女寔公皇考妣也配禮賓同正權烈女 贈貞夫人墓祔公子用一門下侍中 贈左參替 謚僖敬孫希正監察 贈左議政 諡文靖是生七男三女男轂版圖正郎輿道監司軫左議政 謚文景輊軒皆縣監軺判事輜縣令女適司僕寺事裵尚志副正李云侯奉禮郎金革以下不盡載語曰世或無根而產芝未有濬源而不流以是觀公之世子姓繁衍名位相承如竹林公山海邃學清節龜峰公德麟文行華秩松鶴公應時至孝治績洛濱公震翰鳩谷公迪立朝謇諤皆卓然爲 王國之藎臣龍泉公鼎鉉雖未貴顯而清名雅行亦爲世所重是公積德遺澤之歷久彌彰盖有不可誣者矣舊表作不詳年代今於改碣也始終殫誠者泰鴈斗植二氏也玆索余言者員外君正默也銘曰 猗公家世麟棷鳳穴篤生偉人有學有烈世代悠荒莫究顛末推其顯者潛光可述有隆其阜苔碑字沒我最以銘垂示杳忽玄黓敦牂

小春節 外後孫 冶城 宋浚弼謹撰

 

(3) 僖敬公 墓碣銘

 

【前面大字】高麗門下侍中 贈崇祿大夫議政府左參贊 謚僖敬公安東用一之墓

【碑 文】

安東之世高麗太師權幸之后也高祖諱世位樞密院府事曾祖諱良後兵曹正郎祖諱粹文科考諱奕中門袛侯 贈吏參封永嘉君妣貞夫人權氏禮賓同正烈之女公仕至門下侍中入 本朝 贈左參贊 謚僖敬以孫左相文景公軫貴追 恩也按文景公當麗末國初則公似是忠肅忠宣朝人而無世傳信蹟永嘉誌居于城東門外云葬于府西燕院坐壬阡在永嘉君墓右麓配貞敬夫人冶城宋氏父光啓祔後繼配永嘉權氏父中門袛侯份同堋生二男希正監察 贈左議政 謚文靖希伯中郎將希正生七男三女男轂正郎輿道監司軫左議政 謚文景號敬齋輊軒皆縣監軺文判事 本朝除北伯不赴隱居于龍宮念松山下自號松皐輜縣令女裵尚志司僕寺事 贈兵判李云侯副正金革 奉禮郎轂生三男二女男處中郎將處庸牧使 贈副提學處和司直女潘詠節制使南得儉司直軫生四男四女男孟慶兵使孟度郡守孟貞少尹 贈戶判七臨文正郎女李之誠裵素文吏正申自敬大護軍宋守謙縣監輊生四男四女男若中司直若經若衡若枰進士女金雨寶權均魯存禮孫仲和軺生一男寬義禁府經歷輜生三男一女男致和司直致順主簿致孫司直女李材處庸生一男孝孫萬戶 贈右副承旨處和生一男係生生員孟度生一男準孟貞生五男一女男叔慄參奉叔惕叔惶護軍叔愷仲慎府使女沈貞源僉知七臨生一男琛縣監若中生三男三女男用世叔仁季仁女孫奉孝權柔文仲敬若經生一女李慶春錄事若衡生一男一女男推生員女林貴俊縣監若枰生一男一女男巽司直女權成美參軍寬生六男二女男山海號竹林僉正 贈吏判丙子與六臣同殉 旌閭享魯峯院自海察訪福海壽海號向日齋司正德海得海女李堯丁縣監權守經武科致和生四男自位別侍自育司猛自溫司直自貴致順生一男宗李進武致孫生一男一女男得中監察女鄭以僑翰林曾玄以下繁不勝錄但追錄入享院祠諸賢八世孫德麟號龜峯文正郎晦齋先生高弟享雲谷院九世孫復興號五慕齋壬亂殉節 旌閭享忠烈祠士諤號梅窩正郎 贈左承旨壬亂錄勲享虎溪祠士敏號梅軒司饗主簿 贈左承旨壬亂錄勲 旌閭享玉淵祠於乎距公之世六百有餘 禩矣以若門閥之舊冠冕之盛可謂雄鳴一國而顧世代綿邈文獻無徵匪但遺謨懿蹟之泯焉倂與其生卒年月而失之可勝言哉 正廟已亥十三世孫龍泉公鼎鉉重建齋舎克殫誠力乃於丙戌諸族會議將竪碣于公墓石既具後孫肅永容默澤中五錫跋涉三百里責忠鎬以麗牲之文余固不敢而竊念我先祖副正公爲公之孫甥則揆諸誼分亦有不可終辭爲之銘曰 燕院在城西二十里寔公父子巾舃之藏也蔚乎喬木之世又何蟬赫其簪纓也降六百餘載所恨杞宋之無憑也匪直名跡之俱晦從以生卒之莫詳也迺竪高珉改舊床也微雲來不億其麗曷能使久翳而復章可驗夫深仁厚澤有積于始而必報于終也綴蕪詞而揭崇阡將有感于斯銘也

丙戌五月下澣 外裔孫將仕郎章陵參奉 眞城李忠鎬 謹撰

 

(4) 文靖公 墓碣銘

 

【前面大字】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諡文靖權先生之墓

貞夫人彦陽金氏墓附

【碑 文】

花之權盖出於太師氏而積德根基爲當時之最赫世簪纓實玆州之冠加之以先生子若孫黼黻弘猷則冝其文獻之表表可稱而惜乎年代浸遠累經兵燹功名事業生卒年月有不可強攷而只以年代之詳畧特爲序次豈非記事者恨於後日也謹按先生諱希正姓權氏籍安東其鼻祖高麗太師諱幸十世諱至正佐尹四傳至諱粹文科即先生之曾祖也祖諱奕文科 贈吏參封永嘉君考諱用一門下侍中 贈左參贊 謚僖敬先生 贈官至左議政 謚文靖三世追恩以先生之第三子軫之貴也貞敬夫人彥陽金氏府使可器之女有七男三女男轂版圖正郎輿道文監司軫文科左議政世子師傳號敬齋 謚文景輊縣監以孝行 旌閭軒縣監軺高麗文判事入本朝拜大司成除北伯皆不赴號松皐輜縣令以耆職陞通政女裵尚志司僕寺事 贈兵判李云侯副正金革奉禮郎轂三男處中郎將處庸牧使處和司直軫四男孟慶兵使孟度郡守孟貞少尹 贈戶參七臨文兵正輊四男若中司直若經若衡若枰進十軺一男寬經歷輜三男致和司直致順主簿致孫司直以下分派之散在各處非不繁衍而歲久年深詳畧不同有不可枚錄而盖先生之道德文章載在國史家乘而世級漸下遺蹟蕩失無由措其萬一雖若可恨而先生衣履改厝之日松巖權先生好文祭之以文曰惟公應鼻祖之後鳴 世廟之廷可補周袞可調殷羹臨民施澤春雨時榮匡君糾愆秋霜夜橫位足台鼎手合均衡赫世功勲照時儀形一片荒碑萬古姓名觀於此畧可以仰想先生之遺風而他無可攷則後生何述藐余顓蒙忝在外裔之末適守玆州佳覩百歲未遑之盛事不覺歛袵而起敬焉銘曰 殷羹周袞之事業春雨秋霜之氣像一片苔碑之指點萬古姓名之瞻仰

己卯 月 日 嘉善大夫行安東都護府並安東鎭兵馬水軍僉節制使 眞城 李啓魯謹撰

<편집:권혁무(權赫武)>

 

안동 연원재사 사적집 4. 홀 축판

燕院齋舍佐尹公及列位祭壇常 享祝文

연원재사좌윤공급열위제단상 향축문

 

維歲次(年干支) ○月(干支)朔 ○日(干支) ○世孫某官某 敢昭告于

(유세차 년 간지 모월 간지 삭 모일 간지 기세손모관모 감소고우)

派祖高麗佐尹府君之壇(파조고려좌윤부군지단)

유세차 ○년 ○월(간지) ○일(간지) ○세손 ○가 송구함을 무릅쓰고,

파조 할아버님 고려좌윤 부군(高麗佐尹府君)께 감히 아뢰옵니다.

 

恭惟我祖 學文裕昆(공유아조 학문유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조께서는 학문으로 후손을 넉넉하게 하였네

文科出仕 忠義報國(문과출사 충의보국) 문과로 벼슬길에 나아가 충의로 나라에 보답했네

用伸追慕 栢田封壇(용신추모 백전봉단) 이로써 추모의 정 펼처 잣밭골에 제단을 쌓아

霜露旣降 冞增感愴(상로기강 미증감창)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어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더욱 더하옵니다.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敬奉(근이 청작서수 지천세사 경봉) 공손(恭遜)히 맑은 술과 모든 제수로써 매년 행사로 제사를 올리며

 

顯○代祖妣夫人(현○대조비부인) ○대 할머님 부인

顯○代祖考高麗銀靑光祿大夫樞密院府事軍器監府君(현○대조고고려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군기감부군)

顯○代祖妣夫人(현○대조비부인) ○대 할머님 부인

顯○代祖考高麗別將副正行兵部正郞府君(현○대조고고려별장부정행병부정랑부군)

顯○代祖妣夫人永嘉權氏(현○대조비부인영가권씨) ○대 할머님 부인 영가권씨

顯○代祖考高麗文科府君(현○대조고고려문과부군)

顯○代祖妣夫人安東姜氏配食尙(현○대조비부인안동강씨배식상) ○대 할머님 부인 안동강씨도 공경히 받들어 모셔서 배식(配食)케 하나이다.

饗(향) 흠향(歆饗)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庚子(2020) 後孫赫武 謹撰

* 裕(넉넉할 유) * 昆(후손곤 자손곤) * 冞(두루 다닐 미) * 愴(슬퍼할 창) * 感愴(감창)-感慕(감모)하는 마음이 움직여 슬픔 * 祇(공경할 지)

 

燕院齋舍 山神祝文(연원재사 산신축문)

 

維歲次(年干支) ○月(干支)朔 ○日(干支)某官某

(유세차 년간지) ○月(간지)삭 ○일(간지)모관모)

敢昭告于(감소고우)

土地之神權 恭修歲事于先祖考高麗佐尹府君之壇維時保佑

(토지지신권 공수세사우선조고고려좌윤부군지단유시보우)

實賴 神休敢以酒饌祗薦于 神尙

(실뢰 신휴감이주찬지천우 신상)

饗(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