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원.사.당.재/안동연원재사

안동 연원재사 사적집 2. 사적

죽재권혁무 2020. 12. 15. 07:03

안동 연원재사 사적집 2. 사적

 

안동권씨 좌윤공파사적(佐尹公派事蹟)

 

좌윤공파조(佐尹公派祖)

 

호장공(戶長公) 이여(利輿)의 4남 호장공 통(通)의 장자이다. 공은 옛 족보에 그 세계(世系)를 몰라 별보(別譜)로 입록되어 있었으나 1907년의 정미보(丁未譜)를 할 때에 여러 집안의 신적(信蹟)을 고증하여 입록하게 되었다. 관작은 호장(戶長)으로서 좌윤(佐尹)을 겸하여 좌윤공으로 칭하고 시조후 10세 15대파의 여섯 번째 좌윤공파의 파조(派祖)이다. 좌윤은 고려 초기에 태봉(泰封)의 관제를 답습해 광평성(廣評省)에 두었던 벼슬이 향직(鄕職)으로 변한 것이며 6품에 해당되었다. 이외에 공에 관한 기록은 없다.

아들은 정용위 별장(精勇衛別將) 세위(世位)이고 손자 별장 부정(別將副正) 양준(良俊)은 복야공(僕射公) 수홍(守洪)의 사위이다. 증손 수(粹:精)에 이르러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두 아들 혁(奕)과 견(堅:구명 成泰)을 두니 혁은 또한 문과를 하여 중문지후(中門祗侯)가 되고 견은 낭장(郎將)으로서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추증된다. 이후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계출(繼出)하여 문호가 크게 번창하였다.

참고문헌 : 태사공실기 1333쪽에서 발췌

 

〔좌윤공사적 (佐尹公事蹟)〕

호장공 통(通)의 장자로 관직은 좌윤(佐尹)을 지냈다. 공은 처음 족보에 그 세계를 몰라 별보로 기재되어있었으나 정조11년 고증되어 후 갑인보에 수록되었다. 좌윤은 고려 초기 광평성에 있는 벼슬이 향직으로 변한 정6품에 해당된다. 아들은 정용위별장 세위(世位)이고 손은 별장 부정 양준(良俊)이다. 증손 수(粹)는 문과에 급제하고 현손 혁(奕)은 중문지후가 되고 견(堅)은 형부상서로 추증되었다.

 

〔十世 좌윤공(佐尹公) ~ 十六世 문정공(文靖公) 사적〕

 

十世 좌윤공(佐尹公) 諱 지정(至正)

태사공(太師公)의 7대종손(代宗孫) 호장공(戶長公) 휘 이여(利輿)의 넷째아들 호장(戶長) 휘 통(通)의 장자이다. 호장(戶長)으로서 좌윤(佐尹)을 지냈기 때문에 좌윤공(佐尹公)으로 칭하며 10세 14대파(大派) 가운데 여섯 번째인 좌윤공파(佐尹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공은 별장공파(別將公派) 파조(派祖) 영정(英正)과 형제간이다. 아들은 정용위 별장(精勇衛別將) 세위(世位)가 있다.

 

十一世 諱 세위(世位)

정용위별장(精勇衛別將)이다. 파보(派譜)에 병조정랑(兵曹正郞)과 군기감(軍器監)을 행직(行職)한 것으로 나온다. 병조정랑은 고려관제(高麗官制)로 병부낭중(兵部郞中)이다. 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兼) 호장(戶長)으로 나온다. 이는 만년에 호장을 겸하였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가 된 것은 뒤에 자손이 귀히 됨에 따라 추봉(追封)된 것이 아닌가 한다.

 

十二世 諱 양준(良俊)

별장 부정(別將副正)이다. 파보에는 이 향직(鄕職) 외에 경직(京職) 병조정랑(兵曹正郞) 즉 병부낭중(兵部郞中)을 행직한 것으로 나온다. 배위 영가권씨(永嘉權氏)는 상서좌복야상장군(尙書左僕射上將軍) 수홍(守洪)의 따님이다. 아들은 문과공(文科公) 수(粹)이다.

 

十三世 諱 수(粹)

고휘(古諱)는 정(精)이다. 좌윤공의 독증손(獨曾孫)으로 별장 부정(別將副正) 휘 양준(良俊)의 아들이다. 일체의 기록이 미상이나 보서(譜書)에 문과 급제(文科及第)로 나온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의 아들 혁(奕)의 주기(註記)에는 호장(戶長)으로 나온다. 배위는 안동강씨(安東姜氏)로서 호장 정위(戶長正位) 효창(孝昌)의 따님이고, 아들은 중문지후(中門祿候) 혁(奕) ・ 낭장(郎將) 견(堅)이다.

 

十四世 지후공(祗候公) 諱 혁(奕)

좌윤공의 장현손(長玄孫)으로 별장부정(別將副正) 휘 양준(良俊)의 손자요, 수(粹)의 아들이다. 충렬왕 16년 1290년 5월의 방(榜)에 우탁(禹倬) 등과 함께 문과에 진사(進士) 제19인이었고, 응시 당시 신분은 국학(國學)의 면응재생(眠應齋生)이었다. 관직은 중문지후(中門祗候)에 이르렀다. 사후(死後)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또한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었는데 이는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그 증손 진(軫)이 정승(政丞)으로 귀(貴)히 됨에 따라서이다. 배위는 동종(同宗)의 영가권씨(永嘉權氏)로서 예빈동정(禮賓同正) 열(烈)의 따님이고 묘소는 안동부(安東府) 북쪽의 연미원(燕尾院) 오이동(烏耳洞)에 경향(庚向)으로 합폄(合窆)되어 있다. 아들은 낭장(郞將) 용일(用一)이다.

 

高麗中門祗候贈嘉善大夫吏曹叅判永嘉君墓碣銘

고려중문지후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영가군 묘갈명

故中門祗候永嘉君權公奕之藏이 在安東府北烏耳洞枕甲之原하니 舊有表에 漫漶不堪讀이라 後孫이 將治石改竪以顯刻할새 屬冶城宋浚弼하니 嗚呼라 公은 高麗人也라 距今五百有餘年에 出處行事는 史逸無傳하야 生卒表德이 亦未詳所據者라 公이 少에 博學能文章하야 忠烈王十六年에 登第하야 與禹祭酒先生倬으로 同榜하야 官至中門祗候하고 旣致仕에 優游田里하야 以令名으로 終後하니 贈嘉善大夫吏曹叅判하고 追封永嘉君하니 權氏는 東方著姓이라 始祖幸이 佐麗太祖하야 平甄亂하고 官至太師하다 十世而諱至正은 官佐尹이요 子諱世位는 樞密院府事오 子諱良俊은 兵曹正郞이요 子諱粹는 文科라 娶安東姜氏刑部尙書孝昌女하니 寔公皇考妣也라 配는 禮賓同正權烈의 女니 贈貞夫人이오 墓는 祔公하다 子用一은 門下侍中이오 贈左叅贊諡僖敬이요 孫希正은 監察이오 贈左議政諡文靖이니 是生七男三女하니 男轂은 版圖正郞이요 輿道는 監司요 軫은 右議政諡文景이오 輊와 軒은 皆縣監이요 軺는 判事요 輜는 縣令이요 女는 適司僕寺事裵尙志하고 副正李云侯하고 奉禮郞金革하다 以下는 不盡載하다 語에 曰 世或有無根而産芝하고 未有濬源而不流라하니 以是觀公之世컨대 子孫繁衍에 名位相承하니 如竹林公山海邃學淸節과 龜峯公德麟文行華秩과 松鶴公應時至孝治績과 洛濱公震翰과 鳩谷迪立朝謇諤이 皆卓然爲王國之藎臣이요 龍泉公鼎鉉은 雖未貴顯而淸名雅行이 亦爲世所重하니 是公積德遺澤之歷久彌彰이 盖有不加誣者矣라 舊表作에 不詳年代하고 今於改碣也에 始終彈誠者는 泰鴈·斗植二君也오 玆索余言者는 員外君正默也라 銘曰

猗公家世는 麟棷鳳穴이라 篤生偉人에 有學有烈이라 世代悠荒에 莫究顚末이라 推其顯者에 潛光可述이라 有隆其阜에 苔碑字沒이라 我最以銘에 垂示杳忽이라

玄默敦牂小春節에 外後孫宋浚弼은 謹撰이라

 

고려(高麗) 중문지후(中門祗候)를 지낸 영가군(永嘉君) 권공(權公) 혁(奕)의 묘소가 안동부(安東府) 북쪽 오이동(烏耳洞) 갑좌(甲坐)의 산에 있는데, 비석이 오래 되고 글자가 마모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다. 후손이 새로 돌을 준비해서 글을 새기려고 나 송준필(宋浚弼)에게 부탁하였다.

아! 공은 고려(高麗)시대 분이시고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어서 품행과 업적이 역사에 남아있지 않고 생졸년이나 자(字)도 고증할 수 없다. 공이 소년기에 학문이 깊고 문장력이 좋아서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등과(登科)해서 좨주(祭酒) 우탁(禹倬) 선생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고 벼슬이 중문지후(中門祗候)에 이르렀고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착한 명성(名聲)으로 세상을 뜨시었으니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이시고 영가군(永嘉君)으로 추봉(追封)되셨다.

권씨는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이고 시조(始祖) 행(幸)이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견훤(甄萱)의 난을 평정(平定)하고 태사가 되시었다. 10세 휘(諱) 지정(至正)은 좌윤(佐尹)이었으며 그 아들의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樞密院)부사(府事)요, 그 아들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그 아들 휘 수(粹)는 문과급제(文科及第)했으며 배위(配位)는 안동강씨(安東姜氏) 형부상서(刑部尙書) 효창(孝昌)의 따님이시다. 이 분이 공의 황고(皇考)시고 배위(配位)는 예빈동정(禮賓同正) 권열(權烈)의 따님이시니 증직(贈職) 정부인(貞夫人)이요 묘소는 공과 같이 부장(祔葬)되어있다. 아들 용일(用一)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증직 좌참찬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요, 손자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이요 증직 좌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니 이 분은 7남3녀를 두시었는데, 아들 곡(轂)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요, 여도(輿道)는 감사(監司)요, 진(軫)은 우의정(右議政)이며 시호는 문경(文景)이오, 지(輊)와 헌(軒)은 모두 현감(縣監)이요, 초(軺)는 판사(判事)요, 치(輜)는 현령(縣令)이요, 사위는 사복시사(司僕寺事) 배상지(裵尙志)와 부정(副正) 이운후(李云侯)와 봉례랑(奉禮郞) 김혁(金革)이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옛말에 ‘뿌리 없는 지초(芝草)는 혹시라도 있을 수 있으나 근원(根源) 없는 물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공의 가세(家世)에 훌륭한 많은 자손을 보면 명성(名聲)과 직위(職位)가 이어졌으니 죽림공(竹林公) 산해(山海)의 깊은 학문과 높은 절의와 귀봉공(龜峯公) 덕린(德麟)의 화려한 문행(文行)과 업적과 송학공(松鶴公) 응시(應時)의 지극한 효성과 치적과 낙빈공(洛濱公) 진한(震翰)과 구곡(鳩谷) 적(迪)이 조정에서 바른 말을 해서 다들 국왕을 위해 뛰어난 충신들이며 룡천공(龍泉公) 정현(鼎鉉)은 비록 높은 관직은 없으나 청렴한 명성과 아름다운 품행이 또 세상에 존경을 받았으니 이것은 공의 적덕(積德)과 은택(恩澤)이 오래도록 빛난 것이니, 여기에 무었을 더 과장해서 말하겠는가? 옛 비문에 연대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고, 지금 다시 비를 세우는 데 성력(誠力)을 아끼지 않은 태안(泰鴈) · 두식(斗植) 두 분이고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부탁한 분은 원외랑 정묵(正默)이다. 명(銘)을 쓴다.

 

猗公家世(의공가세) 공의 가세(家世)를 상고(詳考)하면

麟棷鳳穴(인추봉혈) 기린(麒麟)의 숲 같고 봉황(鳳凰)의 집 같아서

篤生偉人(독생위인) 걸출(傑出)한 위인(偉人)이 태어나서

有學有烈(유학유열) 학문도 깊고 공열(功烈)도 높아서

世代悠荒(세대유황) 끝없이 대대로 이어져서

莫究顚末(막구전말) 전말(顚末)을 다 궁구할 수 없으나

推其顯者(추기현자) 현달(顯達)한 분을 추구(追求)해 보면

潛光可述(잠광가술) 숨은 광채(光彩)를 서술(敍述)할 수 있다.

有隆其阜(유융기부) 산같이 높은무덤 비석에

苔碑字沒(태비자몰) 글자가 없어지고 이끼가 끼었기에

我最以銘(아최이명) 내가 이 명(銘)을 지어

垂示杳忽(수시묘홀) 먼 후일(後日)까지 전하게 한다

 

임오년(1942) 10월 외후손(外後孫) 송준필(宋浚弼) 삼가 지음. <국역:권기갑(權奇甲)>

묘소는 안동군 북후면(北後面) 오산동(烏山洞) 연원(燕院) 잣밭골에 있다.

 

燕院齋舍重新記

연원재사중신기문

直永嘉治北十里而近 有燕尾院梧里洞 洞之東麓 庚向之阡 寔我二十一代祖參判府君衣履之藏也 貞夫人祔左 曾孫縣令公諱輜 亦繼葬焉 二十代祖參贊府君之藏 在其西麓丙向 而前後貞夫人先後祔焉 舊無冡人以守之 正廟庚子 族先龍泉公諱鼎鉉 詢及諸宗 置祭田若干塍 仍創建祭閣八樑 以爲齋宿之所矣 高宗丙申 災於鬱攸 因其燼餘 架漏牽補 誅茅以覆 苟且度了者 有年矣 至是 遠近宗盟 峻發重建之議 醵鍰貲 鳩材瓦 經始於丁丑春 而越明年春竣功 其制凡十間 中爲堂 而兩夾爲室 以適凉燠 厨竃庫藏 因舊貫焉 既落 首班一人 執爵而旅之曰 維我先齋 倡自龍翁 而至一百六十七年 而不幸及災 歷四十二年 而始克重新 玆事或庶幾籍手前修 而亦不禁人代 今昔之感焉 在龍翁之時 則適丁昭代 右文孝理之化 洽于群黎 士詠楚茨 女歌採蘋 莫不以反始報本爲重 宜祖考來格 而子孫受嘏矣 若今之世 則頽季也 狂潮震盪 桑海茫洋 先王文教 無復遺響 而綱淪法斁 人而獸矣 矧夫一種無神之論 汎濫天下 載胥及溺馴 而至焚屍毀宔 恬不爲怪 自今以往 孔聖所謂卜其宅兆而安厝之 春秋祭祀以時思之者 終歸於彌文剩語而已 然則吾輩將何修而爲善後之圖哉 惟願僉宗 一乃心膂教養兒孫 必須劑量新舊 而申之以孝悌之道 使知反始報本之爲何等所重 而克追先猷以敬其祭祀 俾吾先齋保不知巋然空閣 而永傳千祀之遠 此裔承今日第一義 詩不云乎 以似以續 續古之人 又云子子孫孫勿替引之 盍相與勉旃 僉曰唯唯 仍屬余爲記

檀紀四二九三年 九月 日 二十一世孫 斗植 謹撰

 

안동부(安東府) 치소(治所) 북쪽으로 10리 되는 제비원[燕院] 근처에 오리동(梧里洞)이 있고 오리동 동쪽기슭 갑좌경향(甲坐庚向)의 묘소는 나의 21대조 참판(參判)부군이시고, 정부인(貞夫人)이 왼쪽에 부장(祔葬)되었다. 증손인 현령(縣令) 휘 치(輜)의 묘소도 이어져있다. 20대조 참찬(參贊)부군의 묘소는 그 서쪽기슭 병향(丙向)이며 전후취(前後娶) 정부인(貞夫人)은 앞뒤로 부장(祔葬)되었다. 과거에 묘소 지키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조(正祖) 4년 경자년(1780)에 선대 족친(族親) 용천공(龍泉公) 휘 정현(鼎鉉)이 여러 자손과 의논해서 제전(祭田)을 조금 사고 잇달아 재사(齋舍) 8칸을 창건해서 재숙(齋宿)으로 써다가 고종(高宗) 병신년(1896)에 화재를 당해서 타다 남은 몇 칸을 보수해서 띠[茅]로 덮어서 몇 해를 구차하게 지내다가 이제 와서 원근의 종친들이 중건하자는 의논을 하고 자금을 갹출(醵出)해서 목재와 기와를 준비하고 정축년(1937) 봄에 시작해서 다음해 봄에 준공하니 규모가 열 칸인데 중앙에 마루로 쓰고 양쪽에 방을 만들어 여름 ・ 겨울에 편리하고 주방(廚房)과 창고는 과거(過去)와 같게 했다. 낙성(落成)한 뒤에 어른 한 분이 술잔을 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재사는 용천공이 시작하시어 지금 167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화재를 보고 42년을 지나서 새로 중건했으니 이 일은 아마도 옛 분이 한 일을 후인이 이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으나 용천공 시대는 태평성대(太平

聖代)라 백성들에게 훌륭한 교화(敎化)가 이루어져서 선비는 초자가(楚茨歌)를 부르고 부인(婦人)들은 채빈곡(採蘋曲)을 부르면서 조상의 음덕(蔭德)에 보답하고 조상이 돌보시어 자손이 복(福)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시대가 변하고 불미 스런 풍조가 생겨서 세상이 달라졌으니 옛날 문화교육(文化教育)의 영향이 없고 윤리(倫理)가 무너져서 사람의 도리를 하지 않고 또 무신론(無神論)이 범람(氾濫)해서 모두가 무신론(無神論)에 빨려들어서 묘소를 파서 화장(火葬)하고 신주(神主)를 없애면서도 태연(泰然)하게 괴이(怪異)함을 모르니 이대로 간다면 ‘묘소를 써서 편하게 모시고’ ‘춘추로 제사 지내면서 사모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은 결국 글로 남고 말만 전할 뿐이니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후일(後日)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오직 바라는 것은 온 종중(宗中)이 한마음으로 힘써 조손(祖孫)을 가르치는 데 반드시 고금(古今)의 형편을 참작하고 효도하고 공경하고 조상에 보답하는 뜻이 얼마나 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선대(先代)의 뜻을 따라 공손으로 제사를 올리게 하고 우리는 이 재사(齋舍)를 보존하는 일을 알 수는 없지만 높이 솟은 넓은 집이 천년이 되도록 오래 전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첫째 책무인 것이니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이같이 이어가면서 예전같이 계속하라’ 고 했으며 또 ‘자자손손(子子孫孫) 끝없이 이어가라’ 했으니 어찌 같이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니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내가 그대로 기문(記文)을 썼다.

단기 4293년[서기 1960년] 9월 일에 21세손 두식(斗植)은 근찬(謹撰)이라. <국역:권기갑(權奇甲)>

 

十五世 희경공(僖敬公) 諱 용일(用一)

좌윤공의 5대종손 지후공(祗候公) 휘 혁(奕)의 독자(獨子)이다. 관직은 낭장(郎將)을 지냈으나 보서(譜書)에는 고려조의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추밀원사(樞密院事)의 직함이 보이는데 이는 행직(行職)인지 증직(贈職)인지 알 수 없다. 또 사후 추증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받았는데 이는 조선조(朝鮮朝)에 손자 진(軫)이 귀히 됨에 따라서이며 희경(僖敬)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초배(初配)가 정부인(貞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 광계(光啓)의 따님이고 재배(再配)는 정부인 영가권씨(永嘉權氏) 중문지후(中門祗候) 빈(份)의 따님이며, 묘소는 경북 안동시 북쪽 제비원 서쪽 언덕에 병향(丙向)으로 있다. 아들은 감찰(監察) 희정(希正)과 중랑장 희백(希伯)이 있다.

 

高麗門下侍中贈議政府左叅贊諡僖敬公墓碣銘

고려문하시중 증의정부좌참찬 시 희경공 묘갈명

公의 諱는 用一이니 安東之世는 高麗太師權幸之后也라 高祖諱는 世位이니 樞密院府事요 曾祖諱는 良俊이니 兵曹正郞이요 祖諱는 粹니 文科요 考諱는 奕이니 中門祗候贈吏叅이며 封永嘉君하고 妣는 貞夫人權氏禮賓同正烈之女라 公이 仕至門下侍中하고 入本朝에 贈左叅贊諡僖敬은 以孫左相文景公軫의 貴로 追恩也라 謹按文景公이 當麗末國初則公이 似是忠肅忠宣朝人而無世傳信蹟하고 永嘉誌에 居于城東門外云하고 葬于府西燕院坐壬하니 阡在永嘉君墓右麓이라 配貞敬夫人冶城宋氏니 父는 光啓라 祔後하고 繼配는 貞敬夫人永嘉權氏니 父는 中門祗候份이니 同堋이라 生二男하니 希正은 監察이요 贈左議政諡文靖이요 希伯은 中郞將이라 希正은 生七男三女하니 男轂은 正郞이오 輿道는 監司요 軫은 右議政諡文景號敬齋요 輊·軒은 皆縣監이요 軺는 文判事라 本朝에 除北伯해도 不赴하고 隱居于龍宮念松山下하야 自號를 松臯라하다 輜는 縣令이요 女에 裵尙志는 司僕寺事贈吏判이요 李云侯는 副正이요 金革은 奉禮郞이라 轂은 生三男二女하니 男에 處中은 郞將이요 處庸은 牧使贈副提學이요 處和는 司直이요 女에 潘詠은 節制使요 南得儉은 司直이요 軫은 生四男四女하니男에 孟慶은 兵使요 孟度는 郡守요 孟貞은 少尹贈戶判이요 七臨은 文正郞이요 女는李之誠이요 裵素는 文吏正이요 申自敬은 大護軍이요 宋守謙은 縣監이라 輊는 生四男四女하니 男에 若中은 司直이요 若經이오 若衡이오 若枰은 進士요 女는 金雨寶·權均·魯存禮·孫中和요 軺는 生一男寬하니 義禁府經歷이요 輜는 生三男一女하니 男에 致和는 司直이요 致順은 主簿요 致孫은 司直이요 女는 李材요 處庸은 生一男孝孫하니 萬戶贈右副承旨요 處和는 生一男係生하니 生員이오 孟度는 生一男準하고 孟貞은 生五男一女하니 男에 叔慄은 叅奉이요 叔惕이오 惶은 護軍이요 叔愷요 仲愼은 府使요 女에 沈貞源은 僉知오 七臨은 生一男琛하니 縣監이요 若中은 生三男三女하니 男은 用世·叔仁·季仁이요 女는 孫奉孝·權柔文이요 仲敬이요 若經은 生一女하니 李慶春은 錄事오 若衡은 生一男一女하니 男推는 生員이오 女林貴俊은 縣監이요 若枰은 生一男一女하니 男巽은 司直이요 女權成美는 叅軍이요 寬은 生六男二女하니 男에 山海는 號竹林이요 僉正이고 贈吏判諡忠愍이니 丙子에 與六臣과 同殉하야 旌閭하고 享魯峯院하고 自海는 察訪이요 福海요 壽海는 號向日齋고 司正이오 德海요 得海고 女에 李堯丁은 縣監이요 權守經은 武科오 致和는 生四男하니 自位는 別侍오 自育은 司猛이오 自溫은 司直이오 自貴오 致順은 生一男하니 宗李니 進武오 致孫은 一男一女하니 男得中은 監察이요 女鄭以僑는 翰林이라 曾孫以下는 繁不勝錄하나 但追錄入享院祠諸賢하니 八世孫德麟은 號龜峰이요 文正郞인데 晦齋李先生高弟로 享雲谷하고 九世孫復興은 號五慕齋요 壬亂殉節하야 旌閭하고 享忠烈祠하고 士諤은 號梅窩오 正郞이고 贈左承旨니 壬亂錄勳하고 享虎溪祠하고 士敏은 號梅軒이요 司甕主簿고 贈左承旨니 壬亂錄勳하고 旌閭하고 享玉淵祠하다 於乎라 今距公世가 六百有餘禩矣라 以若門閥之舊冠冕之盛이 可謂雄鳴一國而顧世代綿邈하고 文獻이 無徵하니 匪但遺謨懿蹟之泥焉이라 倂與其生卒年月而失之하니 可勝言哉아 正廟己亥에 十三世孫龍泉公鼎鉉이 重建齋舍에 克殫誠力하고 乃於丙戌에 諸族이 會議하야 將竪碣于公墓할새 石이 旣具에 後孫肅永·容默·澤中·五錫·沃이 涉三百里하야 責忠鎬以麗牲之文하니 余固不敢而竊念我先祖副正公이 爲公之孫甥則揆諸諠分에 亦有不可終辭라 爲之銘曰

燕院이 在城西二十里하니 寔公父子巾舃之藏也라 蔚乎喬木之世에 又何蟬赫其簪纓也오 降六百餘載에 所恨杞宋之無憑也라 匪直名跡之俱晦라 從以生卒之莫詳也라 迺竪高珉改舊床也에 微雲來不億其麗가 曷能使久翳而復章가 可驗夫深仁厚澤이 有積于始而必報于終也라 綴蕪詞而揭崇阡하야 將有感于斯銘也하노라

外裔孫從仕郞前章陵叅奉眞城李忠鎬는 謹撰하노라

丙戌十月日에 改竪하다

 

공의 휘(諱)는 용일(用一)이니 안동의 세족(世族)이며 고려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시다. 고조 휘 세위(世位)는 추밀원부사(樞密院府事)요, 증조 휘 양준(良俊)은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조(祖) 휘 수(粹)는 문과(文科)요, 고(考) 휘 혁(奕)은 고려(高麗) 중문지후(中門祗候)요, 조선(朝鮮) 증직이조참판(贈職吏曹叅判)이며 영가군(永嘉君)으로 봉군(封君)이 되시었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권씨(權氏)며 예빈동정(禮賓同正) 열(烈)의 따님이시다.

공의 벼슬은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조선조(朝鮮朝)에 증직 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인데 손자인 문경공(文景公) 진(軫)이 우상(右相)이 되어서 추은(追恩)으로 받은 것이다.

삼가 고안(考案)하니 문경공(文景公)이 고려말(高麗末)과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분이어서 고려 충숙왕(忠肅王) · 충선왕(忠宣王) 당시의 분으로 추정(推定)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고 ?영가지(永嘉誌)?에 안동의 동문(東門) 밖에 살았고 안동 서쪽 제비원 임좌(壬坐)에 장사지냈고 영가군(永嘉君)의 묘소 우측이라고 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 광계(光啓)의 따님이시며 묘소의 뒤에 부장(附葬)되었고 후배위(後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영가권씨(永嘉權氏)니 중문지후(中門祗候) 빈(份)의 따님이니 같은 광중(壙中)이다.

아들이 두 분인데, 희정(希正)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요 희백(希伯)은 중랑장(中郞將)이다. 희정(希正)은 7남3녀를 두셨는데, 아들 곡(轂)은 정랑(正郞)이오 여도(輿道)는 감사(監司)요 진(軫)은 우의정(右議政)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며 호는 경재(敬齋)이다. 지(輊)와 헌(軒)은 다 현감(縣監)를 지냈고 초(軺)는 문과(文科)로 판사(判事)를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함경도(咸鏡道) 감사(監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용궁(龍宮)의 염송산(念松山) 아래 은거(隱居)하면서 자호(自號)를 송고(松臯)라 했다. 치(輜)는 현령(縣令)이요, 사위 배상지(裵尙志)는 사복시사(司僕寺事)며 증직 이조참판과 부정(副正)인 이운후(李云侯)와 봉례랑(奉禮郞)인 김혁(金革)이다.

곡(轂)은 3남2녀를 두었는데, 처중(處中)은 낭장(郞將)이요 처용(處庸)은 목사(牧使)며 증직(贈職)부제학(副提學)이요 처화(處和)는 사직(司直)이다. 사위 반영(潘詠)은 절제사(節制使)요 남득검(南得儉)은 사직(司直)이다. 진(軫)은 4남4녀를 두셨으니 맹경(孟慶)은 병사(兵使)요 맹도(孟度)는 군수(郡守)요 맹정(孟貞)은 소윤(少尹)이며 증직 호조참판이요 칠임(七臨)은 문과정랑(文科正郞)이요, 사위는 이지성(李之誠)과 문과이정(文科吏正)인 배소(裵素)와 대호군(大護軍) 신자경(申自敬)과 현감 송수겸(宋守謙)이다.

지(輊)는 4남4녀를 두셨으니 약중(若中)은 사직(司直)이요 약경(若經)과 약형(若衡)과 진사(進士)인 약평(若枰)이다. 사위는 김우보(金雨寶) · 권균(權均) · 노존예(魯存禮) · 손중화(孫中和)이다. 초(軺)는 외아들 관(寬)을 길렀으니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이요, 치(輜)는 3남1녀를 두셨으니 치화(致和)는 사직(司直)이요 치순(致順)은 주부(主簿)요 치손(致孫)은 사직(司直)이요, 사위는 이재(李材)다.

처용(處庸)은 외아들 효손(孝孫)이 만호(萬戶)며 증직 우부승지(右副承旨)요, 처화(處和)도 외아들 계생(係生)이 생원(生員)이오, 맹도(孟度)도 외아들 준(準)이고, 맹정(孟貞)은 5남1녀를 두었으니 숙율(叔慄)은 참봉이요, 숙척(叔惕)이며, 황(惶)은 호군(護軍)이요, 숙개(叔愷)요, 중신(仲愼)은 부사(府使)다 사위인 심정원(沈貞源)은 첨지(僉知)다. 칠림(七臨)은 외아들 침(琛)이 현감이요 약중(若中)은 3남3녀를 두셨는데, 용세(用世)와 숙인(叔仁)과 계인(季仁)이다. 사위는 손봉효(孫奉孝)와 권유문(權柔文)이오, 중경(仲敬)이오, 약경(若經)은 1녀를 길렀는데, 사위는 녹사(錄事)인 이경춘(李慶春)이다. 약형(若衡)은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 추(推)는 생원이오, 사위 임귀준(林貴俊)은 현감이다. 약평(若枰)은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 손(巽)은 사직(司直)이요, 사위 권성미(權成美)는 참군(叅軍)이다.

관(寬)은 6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 산해(山海)의 호는 죽림(竹林)이고 벼슬은 첨정(僉正)인데 증직 이조참판이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니 단종손위(端宗遜位) 때에 사육신(死六臣)과 같이 순직(殉職)해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노봉서원(魯峯書院)에 모시었고, 자해(自海)는 찰방(察訪)이요, 다음 복해(福海)요, 수해(壽海)는 호 향일재(向日齋)고 사정(司正)이오, 다음 덕해(德海)요, 득해(得海)이다. 사위 이요정(李堯丁)은 현감이요, 권수경(權守經)은 무과(武科)이다. 치화(致和)는 4남을 두셨는데, 자위(自位)는 별시위(別侍衛)오 자육(自育)은 사맹(司猛)이오 자온(自溫)은 사직(司直)이오, 다음 자귀(自貴)이다. 치순(致順)은 외아들 종리(宗李)가 진무(進武)이다. 치손(致孫)은 1남1녀니 아들 득중(得中)은 감찰(監察)이요, 사위 정이교(鄭以僑)는 한림(翰林)이다.

증손 이하는 번성해서 다 기록할 수 없고, 단지 서원에 배향된 제현(諸賢)만 추록하니, 8세손 덕린(德麟)은 호 귀봉(龜峰)이요 문과(文科) 정랑(正郞)인데 회재(晦齋) 이(李)선생의 제자며 운곡서원에 모시었고, 9세손 복흥(復興)은 호 오모재(五慕齋)요 임란(壬亂)에 순절(殉節)하시어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충렬사(忠烈祠)에 모시었고, 사악(士諤)은 호 매와(梅窩)요 정랑(正郞)이며 증직 좌승지니 임란(壬亂)의 공신록(功臣錄)에 오르시고 호계사(虎溪祠)에 모시었고, 사민(士敏)은 호 매헌(梅軒)이요 사옹주부(司甕主簿)였고 증직 좌승지니 임란 공신록에 오르시고 정려가 내리고 옥연사(玉淵祠)에 모시었다.

아! 공으로부터 지금까지 600년이 넘는 세월인데 옛 벼슬이 이렇게 화려했으니 한 나라에 명성을 남기면서 대대로 이어졌다 할 수 있으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니 그 훌륭한 행적과 가르침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 생졸년(生卒年)까지 없어졌으니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정조(正祖) 기해년(1779)에 13세손 용천공(龍泉公) 정현(鼎鉉)씨가 재사(齋舍)를 중건하는 데 성력(誠力)을 다했고, 그리고 병술년(1946)에 제손(諸孫)들이 회의를 해서 묘비의 돌을 준비해 놓고 후손인 숙영(肅永) · 용묵(容默) · 택중(澤中) · 오석(五錫) · 옥(沃) 등이 300리를 와서 나 충호(忠鎬)에게 비문을 부탁하니 나는 원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깊이 생각하니 나의 선조 부정공(副正公)이 공의 손서(孫壻)이니 그 정의로 굳이 사양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銘)을 쓴다.

 

燕院在城西二十里 寔公父子巾舃之藏也

(연원재성서이십리 식공부자건석지장야)

안동 서쪽 20리 제비원이 공의 부자(父子)의 묘역이다.

蔚乎喬木之世 又何蟬赫其簪纓也

(울호교목지세 우하선혁기잠영야)

화려한 명문세가에 또 높은 직위의 인물이 어이 이렇게 많았을까?

降六百餘載 所恨杞宋之無憑也

(강육백여재 소한기송지무빙야)

6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서 문적이 없어졌으니

匪直名跡之俱晦(비직명적지구회)

탄식이 되는 것은 명성과 업적뿐만이 아니라

從以生卒之莫詳也(종이생졸지막상야)

생졸년까지 알 수 없으나

迺竪高珉改舊床也(내수고민개구상야)

이렇게 높은 비석과 상석을 바꾸는 것은

微雲來不億其麗(미운래불억기려)

그 자손이 많지 않았다면

曷能使久翳而復章(갈능사구예이부장)

확실하지 않은 오래 된 일을 어찌 다시 밝힐 수 있었겠는가?

可驗夫深仁厚澤(가험부심인후택)

그 남기신 어진 음덕이 크기 때문에

有積于始而必報于終也(유적우시이필보우종야)

후손들에게 복이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綴蕪詞而揭崇阡 將有感于斯銘也

(철무사이게숭천 장유감우사명야)

큰 묘소에 부족한 글로 감회가 깊은 명(銘)을 써서 후세에 남기려한다.

외후손(外後孫) 종사랑(從仕郞) 전 장릉참봉(章陵參奉) 진성(眞城) 이충호(李忠鎬)는 삼가 찬(撰)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병술년(1946) 10월 일에 개수(改竪)하다.

묘소는 안동군 북후면(北後面) 오산동(烏山洞) 연원(燕院) 잣밭골에 있다

 

十六世 문정공(文靖公) 諱 희정(希正)

 

좌윤공(佐尹公)의 6대 종손(宗孫)으로 희경공(僖敬公) 휘 용일(用一)의 아들이다. 관직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냈다. 감찰규정이란 고려 때 감찰사(監察司)에 딸린 종6품 벼슬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고친 이름인데 조선조의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같은 관직이다. 사후에 그 셋째아들 문경공(文景公) 좌의정 진(軫)이 귀히 됨에 따라 의정부 좌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받았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판도총랑(版圖總郎) 김해부사(金海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고, 묘소는 안동시 남쪽 강정(江汀)의 고지동(高支洞)에 을향(乙向)으로 쌍분을 이루고 있다. 아들은 경산현령(慶山縣令) 곡(穀) ・ 감사(監司) 여도(輿道) ・ 좌의정 진(軫) ・ 현감 지(輊) ・ 현감 헌(軒) ・ 대사성 초(輜) ・ 현령 치(輜)가 있고 따님은 3녀가 각각 증 판서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 증 참판 이운후(李云侯:퇴계 이황李滉의 고조부) ・ 안동인(安東人) 김혁(金革:김조순金祖淳의 13대조)에게 출가했다. 공의 자녀 7남 3녀가 모두 이와 가치 현달하니 오늘과 같이 좌윤공파의 문호(門戶)를 크게 번창시킨 것이 실로 공이 끼친 큰 덕으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자(長子) 경산현령(慶山縣令) 권곡(權轂)은 여섯째 동생 권초(權軺)와 함께 예천(醴泉) 대죽리(大竹里)로 이거(移居)하였는데 권초(權軺)의 손자 권산해(權山海)는 부정공파(副正公派)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사위가 되어 만년에 단종(端宗) 복위 실패로 자진(自盡)하였다. 셋째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은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 세종(世宗) 때 좌의정에까지 올랐고 만년에는 풍산(豐山) 상리(上里)에 복거(卜居)했다는 기록이 ?영가지(永嘉誌)?에 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에 있고 안동지방에 세거(世居)하는 후손이 없다. 넷째 권질(權軼)과 다섯째 권헌(權軒)은 예천 금곡(金谷)으로 이거하고, 안동에는 오직 막내 권치(權輜)의 후예 몇 집이 풍산 일대에 산거(散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외손들은 번창하여 안동 지방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였으니 권희정(權希正)의 사위는 첫째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둘째가 퇴계의 고조부 이운후(李云侯), 셋째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의 조부 김혁(金革)으로 안동 지방에 세거하는 여러 씨족으로서 권희정(權希正)의 외손이 되지 않는 가문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 외손은 번창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권희정(權希正)의 아들 좌의정 권진(權軫)은 안동 김씨 전농정(典農正) 김득우(金得雨)의 사위가 되었고, 안동 김씨 김득우(金得雨)의 아들 김혁(金革)은 권희정(權希正)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이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行監察諡文靖公墓碣銘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행감찰 시문정공 묘갈명

 

花之權이 盖出於太師氏而積德根基에 爲當時之最赫世簪纓이 實玆州之冠에 加之以先生子若孫의 黼黻弘獻則宜其文獻之表表可稱而惜乎라 年代浸遠하고 累經兵燹하야 功名事業과 生卒月日을 有不可强攷而只以年代之詳略으로 特爲序次하니 豈非記事者恨於後日也아 謹按하니 先生諱는 希正이요 姓은 權氏오 籍安東하니 其鼻祖는 高麗太師諱幸이오 十世諱至正은 佐尹이오 三傳至諱粹는 文科니 卽先生之曾祖也오 祖諱는 奕이니 文科오 贈吏叅이고 封永嘉君하고 考諱는 用一이니 門下侍中이오 贈左叅贊諡僖敬이니 先生贈官至左議政諡文靖三世追恩이 以先生之第三子軫之貴也라 貞敬夫人彦陽金氏는 府使可器之女니 有七男三女하니 男에 轂은 版圖正郞이오 輿道는 文監司오 軫은 文科左議政世子師傅오 號는 敬齋오 諡文景이오 輊는 縣監이니 以孝行으로 旌閭하고 軒은 縣監이오 軺는 文判事오 入本朝하야 拜大司成除北伯해도 皆不赴하고 號는 松臯요 輜는 縣令이오 以老職으로 陞通政하고 女에 裵尙志는 司僕寺事오 贈兵判이오 李云侯는 副正이오 金革은 文監司오 轂의 三男에 處中은 郞將이요 處庸은 牧使요 處和는 司直이요 軫의四男에 孟慶은兵使요 孟度는 郡守요 孟貞은 少尹이오 贈戶叅이요 七臨은文兵正이오 輊의四男에若中은 司直이오 若經이오 若衡이오 若枰은 進士요 軺의 一男寬은 經歷이오 輜는 三男하니 致和는司直이오 致順은 主簿요 致孫은 司直이라 以下分派之散이 在各處에 非不繁衍而歲久年深에 詳略不同하야 有不可枚錄而盖先生之道德文章이 載在國史家乘而世級漸下하야 遺蹟蕩失無由措其萬一하니 雖若可恨而先生衣履改厝之日에 松巖權先生好文이 祭之以文曰 惟公은 應鼻祖之後하야 鳴英廟之庭에 可補周袞이요 可調殷羹이라 臨民施澤이 春雨時榮이요 匡君糾愆이 秋霜夜橫이라 位足台鼎이요 手合均衡이라 赫世功勳이 照時儀刑이라 一片苔碑가 千古姓名이라하니 觀於此에 略可以仰想先生之遺風而他無可攷則後生이 何述가 藐余顓蒙은 忝在外裔之末하야 適守玆州에 佳覩百歲未遑之盛事하고 不覺斂袵而起敬焉이라 銘曰

殷羹周袞之事業이요 春雨秋霜之氣像이라 一片苔碑之指點이 萬古姓名之瞻仰이라

己卯月日에 嘉善大夫行安東都護府拜安東鎭兵事水軍僉節制使眞城李啓魯는 謹識하노라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원래 태사공(太師公)의 적덕(積德)한 기반(基盤)에서 시작되었고 의정공(議政公)이 당시에 높으신 관직(官職)이 이 고을에서 으뜸이시었으며 또 아들 손자들의 높은 벼슬을 했으니 당연히 문헌(文獻)에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일인데 애석(愛惜)하게도 세월이 오래되고 난리를 여러 번 겪으면서 공명(功名)과 사업(事業)과 생졸년(生卒年)을 참으로 상고(詳考)할 수도 없고 단지 대략적인 연대로 차례를 정할 수밖에 없으니 후일에 글을 쓰는 자신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고안(考按)하니 선생 휘(諱)는 희정(希正)이요 성(姓)은 권씨(權氏)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하니 시조(始祖)는 고려태사(高麗太師) 휘(諱) 행(幸)이다. 10세 휘 지정(至正)은 좌윤(佐尹)이오 3대를 내려와서 휘 수(粹)는 문과(文科)니 바로 선생의 증조이시다. 할아버지 휘는 혁(奕)이니 문과(文科)오 증직 이조참판(吏曹參判)이고 영가군(永嘉君)으로 봉군(封君)되시었다. 아버지 휘는 용일(用一)이니 고려조(高麗朝) 문하시중(門下侍中)이오 조선조(朝鮮朝) 증직(贈職)좌참찬(左叅贊)이며 시호(諡號)는 희경(僖敬)이다. 선생은 증직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시다. 3대의 증직이 선생의 셋째 아드님 진(軫)의 관직(官職)에 따라 추증(追贈)된 것이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는 부사(府使) 가기(可器)의 따님이시니 7남3녀를 기르시었다. 아들 곡(轂)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오, 여도(輿道)는 문과감사(文科監司)오, 진(軫)은 문과(文科) 좌의정(左議政) 세자사부(世子師傅)인데 호는 경재(敬齋)요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지(輊)는 현감(縣監)이니 효행(孝行)이 있어서 정려(旌閭)가 내렸고, 헌(軒)은 현감이오, 초(軺)는 문과판사(文科判事)였다. 조선(朝鮮)이 되어서 대사성(大司成)과 함경도(咸鏡道) 감사(監司)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었고 호는 송고(松臯)라 했다. 치(輜)는 현령(縣令)이오, 원로(元老)의 예우(禮遇)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사위는 사복시사(司僕寺事)며 증직 병조참판(兵曹參判)인 배상지(裵尙志)와, 부정(副正)인 이운후(李云侯)와, 문과감사(文科監司)인 김혁(金革)이다. 곡(轂)은 아들이 셋인데, 처중(處中)은 낭장(郞將)이요, 처용(處庸)은 목사(牧使)요, 처화(處和)는 사직(司直)이다. 진(軫)은 아들이 넷인데, 맹경(孟慶)은 병사(兵使)요, 맹도(孟度)는 군수(郡守)요, 맹정(孟貞)은 소윤(少尹)이며 증직 호조참판(戶曹叅判)이요, 칠림(七臨)은 문과(文科) 병조정랑(兵曹正郞)이오, 지(輊)는 아들이 넷인데, 약중(若中)은 사직(司直)이오, 다음 약경(若經)이오, 다음 약형(若衡)이오, 다음 약평(若枰)은 진사(進士)이다. 초(軺)의 아들 관(寬)은 독자(獨子)며 관직은 경력(經歷)이다. 치(輜)는 아들이 셋인데, 치화(致和)는 사직(司直)이오, 치순(致順)은 주부(主簿)요, 치손(致孫)은 사직(司直)이다. 이하는 파(派)가 나뉘어져 각처에 살고 있는데, 모두가 번성(繁盛)하고 세월이 오래되었고 상황이 다 같을 수 없어 모두를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의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이 대체로 국사(國史)와 가승(家乘)에 실려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이 분실되어 만분(萬分)의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니 비록 한(恨)이 되지만 선생의 묘소를 개축(改築)할 때에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선생이 제문(祭文)에 쓰기를 “공은 시조의 뒤를 이어 영조(英祖)의 조정을 울렸으니 주(周)나라를 도운 곤직원로(袞職元老)와 같았고 은(殷)나라에 화갱(和羹)을 한 부열(傅說)과 같아서 백성에게는 봄비 같은 은택을 베풀었고 임금님에게 과오(過誤)를 바로잡은 것은 가을밤 서리가 비낀 것같이 엄격했다. 지위는 정승(政丞)이 되기에 충분했고 재주는 균형(均衡)에 부합(符合)하여 세상에 공적(功績)과 훈업(勳業)이 나타나고 그 시대의 모습이 조명되어 한 면의 비석(碑石)에 천고(千古)의 성명(姓名)이 전해진다.”라고 했으니 이 글을 읽어 보면 선생이 남기신 풍교(風敎)를 대략 우러러 상상할 수 있으니 더 고증(考證)할 수 없는 후생(後生)이 무엇을 더 서술(敍述)하겠는가? 부족하고 우매(愚昧)한 자신이 누가 되게 외손의 처지로 이 고을 원님으로 왔다가 백 대가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아름답고 성대한 일을 구경하면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쓴다.

殷羹周袞之事業(은갱주곤지사업)

은(殷)나라 부열(傅說) 같고 주(周)나라 주공(周公)같은 업적(業績)이요,

春雨秋霜之氣像(춘우추상지기상)

봄비 같고 가을 서리 같은 기상(氣像)이시다.

一片苔碑之指點(일편태비지지점)

한 조각 이끼 푸른 비(碑)를 가리키면서

萬古姓名之瞻仰(만고성명지첨앙)

만고(萬古)의 명성(名聲)을 우 러러볼 수 있다.

기묘년(1879) 월 일에 가선대부 행(行) 안동도호부 배(拜) 안동진병사수군첨절제사 진성(眞城) 이계로(李啓魯)는 삼가 기록 하노라.

<국역:권기갑(權奇甲)> <편집:권혁무權赫武>

묘소는 안동군 정하 2동 강정(江汀) 고지동(高支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