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동서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왔으나,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수백명의 왜병을 이끌고 귀순한 왜장이 있었다.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그 때 나이 21살이었다. 그는 조선으로 귀화한 후, 8차례 왜군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고 도원수 권율의 추천으로 선조에게서 김씨 성을 하사받고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얻어 살았다.
『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
『 ...저는 섬오랑캐의 천한 사람이요 바닷가의 보잘것없는 사나이입니다.… 사람이 사나이로서 태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나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 나라에 나서 끝내 오랑캐로 죽게 된다면 어찌 영웅의 한되는 일이 아니랴 하고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침식을 잊고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 』사야가가 귀순하기를 청한 편지의 일부다. 그는 임진왜란 때 21살의 나이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부대의 선봉장이 돼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다. 그러나 곧바로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이틀 뒤 침략의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백성들에게 돌린다.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은 이 글을 보고 안심하고 직업을 지킬 것이며 절대로 동요하거나 흩어지지 말라. 지금 나는 비록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너희 나라를 치지 않을 것과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 한결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래성으로 상륙한 다음날로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며 조선에 투항하겠다는 뜻을 적어보낸 사야가의 편지를 받은 박진과 김응서는 그의 귀화를 고심 끝에 찬성하였다.
몇일 후, 사야가는 자신의 철포부대 5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귀화했으며, 부하를 거느리고 말머리를 돌려 왜군을 치고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조선군에 전수했다. 그는 조선의 장수로 울산, 경주, 영천 등지를 돌며 공을 세웠다. 그는 곽재우를 돕는 등 8차례나 왜군을 무찔렀다. 이후 사야가가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18개의 성을 되찾아오자 도원수 권율은 왕에게 이를 포상할 것을 간청, 마침내 그는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의 관직을 부여받게 되었으며 선조는 사야가에게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왜란이 끝나자 그는 자청하여 북방을 어지럽히는 여진족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며 선조가 이를 허락하자 김충선은 10년여간 여진족을 토벌, 공을 세운다. 그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괄의 부장 서야지를 목을 베는 등 큰 활약을 하였고, 1627년 병자 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광주 쌍령에서 매복작전을 펼쳐 대승, 무훈을 떨치었다.
전란이 가라앉자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고 경상도 한 골짜기에 터를 잡아 띠풀로 집을 지으니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그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의 가풍을 지키다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임금이 성(姓)을 내렸다는 뜻의 ‘사성’(賜姓)을 본관 김해 앞에 붙여 사성 김해 김씨로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友鹿)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있다. 현재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세대, 7000여명 후손이 있다.
“조선 문물을 흠모해 귀화한 할아버지는 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으셨죠. 조선에게는 대충신이요, 일본에게는 천하 반역자일게요.” 14세손 김재석(67)씨가 말했다. 선조는 그의 성인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과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합쳐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정해줬다. 왕이 내린 본관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부른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벼슬과 논밭을 “당연히 신하로서 할 도리”라며 마다하고 산수 좋은 달성땅에 내려와 거처를 우록동(友鹿洞)이라 칭하고 사슴과 벗하며 학문에 열중하다 죽었다.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그 무덤 아래에 녹동서원과 사당을 짓고 그를 추모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서 있다. 뜰에는 모하공김공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영산홍, 수국, 모란, 향나무, 무궁화 사이에 서 있다. ‘향양문(向陽門)’ 현판이 선명한 ‘녹동서원’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그의 후손들인 사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1915년 모하당문집이 재간되자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는 사실을 믿는 이가 있는 것은 유감의 극”이라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됐다.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동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1992년 임진왜란 및 김충선공 귀화 400주년 기념제가 녹동서원에서 열렸다. ‘천하의 매국노’가 그곳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한다. NHK방송은 ‘출병에 대의 없다 - 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타리를 내보냈다. 김충선은 임종을 앞두고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같은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내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1590년 일본국 사자 히라요시(平義智)가 선조에게 조총 한 대를 진상했지만 조정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2년 뒤 그 코웃음친 무기를 마구 쏴대는 왜군에 쫓겨 선조는 빗속에 파주땅으로 야반도주하는 운명이 됐다. 유명한 행주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창도 활도 칼도 아니었다.
바로 아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날랐던 짱돌들이었다. 임란 초기 육전에서 조선군이 형편없이 패퇴를 거듭한 것은 바로 무기체계 차이 탓이었다. 돌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원시적인 무기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라는 첨단 살상기계는 애초부터 싸움이 안됐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조선 육군 손에 조총이 쥐어지며 육전 전세는 바뀌게 된다.
학계에서는 임란 이듬해(1593)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는 아래와 같은 편지가 들어 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일본군의 조총. 이 조총은 당시 조선군이 쓰던 중국식 화승총에 비해 월등히 화력이 뛰어났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의하여 벌써 각진에 가르치고 있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보낸 서신에 대한 답신이다. 그래서 신식병기로 무장한 육군이 탄생해 임란은 물론 재란, 병자호란에 투입됐다. 김충선에 대한 이야기는 1998년 한일 양국 교과서에 실렸다. 사야가 가문은 일본에서 사라졌다. 역적의 가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만 않았을터. 김충선은 바람부는 날이면 고향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사야가'가 아닌 김충선을 충무공과 함께 영원히 기억한다. 끝
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
<氏族의 연원>
시조는 김충선(金忠善). 일본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였다. 무예를 닦아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오른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장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가등(加藤)의 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귀화,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널리 알려지기는 우록(友鹿)이 김씨를 김해김씨(2)로 속칭하여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分籍)한, 이른바 법흥파(法興派)인 김해김씨(경순왕 4자인 김은열공의 손자 계열과 조선조계유정난의 단종복위의 주동자이신 백촌김문기 8촌의 김춘계열인 우리 김녕김씨 계열임)와 구별한다.
그 연유는 시조 김충선(金忠善)이 여러 공을 세워 김해로 사관(賜貫)된 데에 있다.
<本貫地 연혁>
우록(友鹿)은 경북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에 있는 지명이다. 달성(達城)은 대구(大丘)의 옛 지명이다. 대구(大丘)는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조 현종 때 경산부(京山府)에 소속시켰고 인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세종 때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세조 때 진(鎭)이 되고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두었으며 1895년 부(府)로 만들었다.
1914년 대구부(大丘府)로 만들고 나머지는 달성군(達城郡)으로 하였다. 1949년 대구(大邱)가 시(市)로 승격할 때 달성군의 성서(城西), 월배면(月背面) 등의 전부, 일부가 대구시(大邱市)에 병합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金, 徐, 夏, 裵씨 등이 있었다.
<주요 世居地와 변천>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達城郡 嘉昌面 友鹿洞)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가창골 깊숙이 들어앉은 125가구 마을인데, 87가구 우록김씨(友鹿金氏)가 4백년 뿌리를 내려 사는 마을이다.
천혜의 요새인 팔조령(八鳥嶺)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싼 이곳에 우록김씨(友鹿金氏)가 터를 잡기는 조선조 선조31년(1598년).
시조 김충선이 임란 후 전진(戰塵)을 털며 조선8도를 돌다 터를 잡았다.
팔조령(八鳥嶺)의 주봉인 자양(紫陽)은 우록김씨의 종산(宗山)으로 그 아래 넓다란 20여만평 비옥한 들판이 널려 인본농심(人本農心)을 대물리고 있다.
조선조의 절의신(節義臣)으로 일생을 마친 입향조 김충선은 자신이 터잡았던 삼정산(三頂山)에 묻혔다.
그 산자락에 후손들이 세운 녹동사원(鹿洞祠院)과 유적비가 마을의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후손들은 해마다 이곳 녹동사원(鹿洞祠院)에서 춘추향사를 받들며 조상 섬기는 전통과 긍지를 잇는다.
예부터 학문과 도덕을 숭상, 충효전가(忠孝傳家)의 가풍을 이어받아 벼슬을 멀리하고 농사를 근본으로 한 탓인지 김(金)씨네는 지금도 부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집집마다 평균 10마지기 이상 먹고 살만큼의 농사를 지으며 <忠孝義烈>의 정신을 대물려 오손도손 사는 것이 자랑이라 한다.
<씨족사의 개요>
우록김씨(友鹿金氏)는 우리나라 여러 귀화 성씨(歸化姓氏) 가운데 유일한 일본계 성씨다.
역사 이래 수많은 왜인(倭人)들이 선진문화국이자 원래의 조상나라이기도 한 한국을 우러러 귀화해 왔지만 왜인(倭人)조상을 내세우고 독자의 가문을 창립하지 않은 탓이리라.
올해로 귀화 393년만인 사성김씨(賜姓金氏)는 그들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준 시조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 충효예의(忠孝禮義)의 한국인상을 어느 토착성씨 가문보다 더 잘 보여주는 한국인으로 깊이 뿌리내려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시조 김충선은 폭력과 궤계(詭計)로 일본을 통일한 풍신(豊臣)이 대륙침략의 야욕을 터뜨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 21세 나이로 가등(加藤)의 선봉장이 되어 3천 병력을 이끌고 4월 13일 부산(釜山)에 상륙했다.
동래(東萊)에 상륙한 지 1주일만인 4월20일 경상좌우병사(慶尙左右兵使) 김응서(金應瑞), 박진(朴晋) 등에게 몰래 글을 보냈다.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 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君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
깃발을 돌이켜 조선의 장수가 된 그는 울산(蔚山), 경주(慶州), 영천(永川)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아군에 화포와 조총이 없음을 보고 화포(火砲),조총(鳥銃) 만드는 법과 사격술을 진중에 보급, 왜적을 西生浦(지금의 경남 蔚州郡 西生面)로 내쫓아 마침내 18개 倭城을 탈환하게 됐다.
그의 역전의 무공과 충정에 감복한 서조 임금은 친히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뜻을 살려 金海金氏의 성과 <忠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원래의 김해김씨와 혼동을 피해 세거지 마을 이름을 따 賜姓金海金氏로 칭하면서도 호적에는 아직 金海金氏로 올라 있는 연유이다.
7년전쟁이 끝난 뒤 김충선은 나이 30세에 진주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우록(友鹿)골에 터를 잡았다.
선조 36년(1603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그는 국경방어를 자청, 10년간 仍防所를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 때는 또다시 출정해 이괄(李适)의 副將 徐牙之(降倭將)를 목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났다.
자신이 10년간이나 지켰던 북방이 일시에 오랑캐들의 말발굽에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66세의 김충선은 분연히 노구를 일으켰다.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 150명의 병사를 매복시켰다. 연전연승에 도취된 호병(胡兵)에 조총(鳥銃)을 퍼부어 그 시체가 시산시해(屍山屍海)를 이루었다.
호병(胡兵)의 코를 베어 전대에 담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달리던 중 인조 임금이 이미 청장(淸將) 용골대(龍骨大)에게 화평을 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春秋의 大義도 이제 끝이 났구나." 그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는 1642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벼슬은 정2품 正憲大夫知中樞府事, 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인 金敬元(上護軍,贈戶曹判書), 金敬信(贈工曹參判), 金佑祥(上護軍), 金繼仁(副護軍), 金敬仁(贈吏曹參判) 등 5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서 초기 우록김문(友鹿金氏)의 기틀을 다졌고 김경원의 둘째 아들 진영(振英)은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참찬관(參贊官)에 올랐다.
4세 김여삼(金汝三)은 조모가 죽자 삼정산(三頂山) 유택에 초막을 치고 3년간 시묘를 극진히 하여 그 행적이 '孝行錄'에 기록돼 있고 오늘날 후손들은 그래서 삼성산(三聖山)을 시모산(侍母山)으로도 부르고 있다.
김씨네는 3대에 걸쳐 시조의 후광을 입어 문무과와 蔭仕 등으로 20여명이 벼슬길에 나섰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굳건히 지켜 영남(嶺南)의 양반가문으로 가업을 닦았다.
金振傑(漢城府左尹,副摠管), 金汝奎(工曹參判), 金汝采(知中樞府事), 金汝明(嘉善大夫), 金養玉(知中樞府事), 金汝明(折衝將軍), 金五南(嘉善大夫), 金汝達(知中樞府事), 金龍河(通政大夫軍司馬), 金儀奉(嘉善大夫)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이름.
그러나 후손들은 "영달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시조 김충선의 유언에 따라 부귀와 벼슬을 멀리 했던 탓으로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족세(族勢)를 크게 떨치지 못했다. (네이버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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