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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조선역사)<西人>

죽재권혁무 2007. 12. 1. 16:26

서인

서인(西人)은 조선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로, 사림파 가운데 훈구파를 강하게 비판했던 동인(東人)과는 달리 온건파의 입장을 취했던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이다.

[편집] 특징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점이 없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서인을 자처하게 된 이이성혼을 중심으로 학문적 계통을 형성하였다. 지역적으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의 기호지역 명문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였고, 시기적으로는 명종심의겸의 도움을 받아 일찍 정계에 진출하여 중앙정계에서 오래 활동한 선배 사림파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든든한 배경은 서인이 조선 후기 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학문적으로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학설에 주로 기대면서도 동인 계통의 학문적 본원인 이황의 업적을 인정하는 입장에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십만양병설 등을 주장한 이이의 실용적 기풍을 계승하여 보다 현실적인 정치를 추구하였으나 광해군대 이후로는 보수적인 색채로 돌아서 주자학의 명분론과 예론을 철저히 수호하는 입장에 섰다.

[편집] 역사

1573년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제수하려 한 세력과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을 제수하려 한 세력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를 계기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서인은 선조대에는 동인의 적극적 입장에 밀려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선조 21년 서인인 정여립의 모반을 반격의 기회로 삼아 정철을 중심으로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임진왜란 초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실각하였다. 그리고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였으므로 광해군의 등극과 함께 북인(北人)에게 완전히 밀려 위축되었다.

그러나 남인(南人)과 손잡고 계획한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재집권한 서인은 숙종대까지 남인과 공존하며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그 제자 윤겸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분기되어 그 통일적 색채를 잃었다.


대표적 인물로는 윤두수윤근수 형제, 이항복, 정철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하나.
붕당의 성립은 1575년(선조 8)의 동·서 분당을 기점으로 한다. 이때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방(貞陵坊:정릉)에 있었고, 김효원(金孝元)의 집은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인현동)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지지자들을 서인과 동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초기 서인의 구성원은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박순(朴淳)·김계휘(金繼輝)·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구사맹(具思孟)·홍성민(洪聖民)·신응시(辛應時)·성혼(成渾)·조헌(趙憲)·남언경(南彦經)·이귀(李貴) 등이었다. 특히 이이와 성혼의 제자는 이후에도 서인의 주요학맥이 되었다. 서인은 대부분 전통적으로 중앙정계에서 활약해온 명문가문 출신과 기호지방 사림출신들로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 지역에 든든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은 조선 후기 중앙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서, 세력이 위축·실각했을 때는 있으나 완전히 축출된 적은 없었고 정계에서 항상 일정한 기반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도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때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거치면서 왕권의 지나친 비대화나 외척의 일방적 성장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윤원형을 제거한 뒤에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을사 사화 희생자들의 신원을 주장하고, 경상도·전라도 사림의 등용을 주선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토지문제를 위시한 국정혁신 정책에 대해서는 동인보다 소극적인 편이었다.
1588년(선조 21)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인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의 동인에 대한 탄압은 서인·동인 간의 대립을 굳히고 동인을 남인·북인으로 분리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591년 정철이 세자책봉 건의로 노여움을 사게 되어 실각하면서 동인이 다시 진출했다(建儲議事件). 그러나 서인 실각의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등극이었다. 서인은 선조 때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군제 붕괴와 초반 패전에 책임이 있었다. 물론 전쟁중에 대명외교를 성공시켜 명나라의 원조를 얻어냈고, 의병활동에서 조헌·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의 활약이 있었으나 전반적인 공로는 남인과 북인이 앞섰다. 또한 서인은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으므로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광해군 때 서인은 비교적 중도적 입장을 유지했던 이항복(李恒福)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광해군 후반기에 대북정권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위와 서양갑(徐洋甲) 사건(七庶事件)을 빌미로 일어난 계축옥사로 서인은 일대 위기를 맞았으나, 인조반정을 성공시킴으로써 위치가 공고해졌다. 인조반정 뒤 서인은 소수의 남인과 소북(小北)·중북(中北) 일부를 등용하는 한편,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을 주축으로 한 기호사림을 포섭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이후 서인의 내부에 여러 번 당(黨)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분당이라기보다는 유력인물을 중심으로 한 계파(系派)로서 김유(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최명길(崔鳴吉)·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심명세(沈明世)·구굉(具宏) 등 공신·외척 세력을 포함한 훈신세력과 사림인사로 구분된다. 인조 초기에는 반정공신 세력인 훈서(勳西:또는 功西)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김상헌(金尙憲)의 청서(淸西)로 구분되었다. 훈서는 다시 김유를 중심으로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의 노서(老西)와 이귀·장유·나만갑(羅萬甲)의 소서(少西)로 나누어진다. 이는 남인인사를 등용하는 문제로 갈라진 것인데, 각 당파의 인물을 어떻게 등용할 것이냐를 놓고 이외에도 여러 번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에는 반정공신계보다 사림계인 김상헌·김장생 등이 더욱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인조 후반에 김집·송시열 등이 중용되면서 서인정권은 최후의 공신계열인 원두표의 원당(原黨), 김자점의 낙당(洛黨), 김육(金堉)·신면(申冕)의 한당(漢黨), 사림계인 산당(山黨)으로 구분되었다. 한당과 산당은 김육·김집이 대동법 시행문제를 두고 대립하여 발생했는데, 대동법 시행을 촉구한 김육의 집이 한강 이북에 있고, 산당은 연산(連山)·회덕(懷德) 지역의 사림들이므로 이런 명칭이 붙었다. 효종 때 김집이 이조판서가 되어 송시열·윤선거·이유태(李惟泰)를 천거한 것을 계기로 서인 내부의 사림은 세력을 확충하여 송시열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외에도 이때의 주요인물로 김수흥(金壽興)·송준길(宋浚吉)·유계(兪棨)·민유중(閔維重)·민정중(閔鼎重)·김만중(金萬重)·윤선도(尹善道)·남구만(南九萬) 등이 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주자의 사상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여, 주자의 명분론에 기초한 신분제와 지주전호제의 안정을 기축으로 한 사회재건을 추구했다. 동시에 주자도통계승운동과 율곡의 문묘종사운동을 일으켜 주자·율곡(기호학파)으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학문적 계보와 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하여 당시 최대의 정적이었던 남인에 대항하는 한편, 일부 진보적 학자들에게 도입된 반주자학적 경향과 토지개혁론에 대처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신들의 국정주도를 강조하며 왕실의 비대와 척신정치(戚臣政治)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서인 내부에서 훈서·한당 계열 인물과 송시열계의 대립이 깊어졌다. 결국 현종 때 예제논쟁을 시발로 척신인 김석주(金錫胄)와 윤휴(尹鑴)·허적(許積)을 대표로 하는 남인이 연합하여 정계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인도 개혁론과 다른 당파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노론·소론으로 분리되었다. 인맥과 정책으로 보면 서인의 주류는 노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간의 역학관계 속에서 숙종~경종 때의 정국은 출척(黜斥)과 환국(換局)이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론은 숙종 때 송시열이 사형당하고, 소론의 지지를 받는 경종이 즉위하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위기를 겪지만 영조 즉위와 함께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노론, 동서분당, 동인, 붕당정치,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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