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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조선의역사)南人

죽재권혁무 2007. 12. 1. 16:16
조선 선조 때 동인(東人)에서 갈려나온 붕당(朋黨)의 하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北人)으로 나뉜 것은 서인 정철(鄭澈)의 세자책봉 문제제기로 동인 내부에서 생겨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에서 기인하였다. 분당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당시 집권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것은 집권당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현상이었다.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를 따른 일파를 북인이라 부르고 우성전(禹性傳)·유성룡(柳成龍)을 따른 일파를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서울 남산 밑에 있었고 유성룡이 영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남인은 이이(李珥)와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을 제외하고는 이황(李滉) 문하의 영남학파 출신이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은 북인과 갈린 이후 우성전·유성룡·김성일(金誠一) 등을 중심으로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북인이 1602년(선조 35) 유성룡을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탄핵, 사직하게 한 뒤 정권에서 밀려났다. 서인을 중심으로 북인정권에 반대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반정 때,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자 남인과 서인 사이에는 유대가 성립되었다. 인조 때 당파세력은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과 연합하는 형세였고, 북인 중 소북(小北)의 일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조 때의 남인으로는 유성룡의 문인 정경세(鄭經世)를 중심으로 당시 영의정 이원익과 이광정(李光庭)·이성구(李聖求)·이준(李埈)·장현광(張顯光)·정온(鄭蘊)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남인과 서인 사이의 유대관계는 점점 이완되어 서인과의 알력이 점차 표면화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성리학의 논쟁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서인 주기파(主氣派)와 남인 주리파(主理派)의 논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리하여 효종 이후 북벌 등을 내세워 정국을 주도하는 서인과 그를 비판하는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국면을 이루게 되었다. 남인은 현종 때 효종의 상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논쟁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바로 1659년(현종 즉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그뒤 다시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을 둘러싸고 다시 예송이 전개되었을 때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물러나게 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예송에서 남인의 주장은 대체로 왕실의 예와 사족의 예가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 서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남인이 다시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누어졌는데 전자를 탁남(濁南), 후자를 청남(淸南)이라 불렀다. 허적(許積)을 수령으로 하는 탁남에 대립하여 서인의 죄를 강력하게 추궁해서 문죄하자는 청남에는 허목(許穆)이 수령격이었다. 탁남을 중심으로 한 남인정권은 어느 정도 독자적인 군문을 확보하면서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정권을 잃은 뒤 서인(노론·소론)과 정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탁남과 청남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후 탕평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오광운(吳光運) 등 탕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집단과 소극적인 집단으로 나뉘기도 하고, 정조년간에 채제공(蔡濟恭)이 영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경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남인집권기는 도래하지 않은 채 중앙정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남인들의 주장이 탕평책과 연결된 것은 그들의 붕당론에서 왕의 정치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과 연관된다.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은 영남을 중심으로 향촌에서 기반을 유지하면서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실학자'들 가운데는 남인계가 많으며 18세기말에 천주학이 일부 남인계를 중심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동인, 붕당정치, 사색당파
南智大 글
宇賢 權赫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