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역
권복흥유허비(權復興遺墟碑)
조선 고 충신(故忠臣) 학생(學生) 안동 권공(安東權公) 유허비명(遺墟碑銘). 서문을 아울러 기록함.
승의랑 전 행 사포서별제(承議郞前行司圃署別提) 한산(韓山) 이광정(李光靖) 지음.방계 후손 권상적(權相績) 글씨, 전서(篆書).
임진왜란 때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방백과 수령들 대부분이 새와 쥐처럼 도망가 숨어있을 때 권복흥(權復興) 공과 같은 사람은 강개하여 소매를 떨치고 집안 하인들을 이끌고 곧장 앞장서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시체로 눕게 되었다. 그로부터 145년 뒤 도신(道臣)이 조정에 보고하여 특명으로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축수하던 사단(社壇)은 이미 나라의 명령으로 철거되었는데, 이때 유허(遺墟)에 비를 세우기로 하여 내게 비명(碑銘)을 구했다.아아, 나라에서 봉토(封土)를 받은 신하가 봉토에서 죽고 말고삐를 잡는 신하가 말고삐를 잡은 채 죽었다 하더라도 자기 직분에 맞는 일을 한 것뿐이다. 만약 그 직분이 아니라면 아무리 쥐처럼 바위틈에 숨어서 목숨을 보전한다 해도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공은 외딴 지방의 일개 포의(布衣 : 관직이 없는 선비)로서, 관원이 되어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았는데 홀로 주먹을 불끈 쥐고 나아가 싸우다 사지에 깊이 들어갔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이 어찌 충성과 의리로 가득 찬 심장을 가슴속에 간직한 것이 아니겠는가? 원수인 적에게 분노하는 것만 알았지 칼날과 화살이 무섭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고, 충의로 마음이 격하여 사생의 갈림길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죽음이 지금까지도 빛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당시 위험한 상황이 하늘까지 넘쳤는데 단신으로 집안 하인들을 채찍질하여 사나운 적을 맞아 몸은 멸망하고 공(功)은 이지러졌으니, 마치 폭호빙하(暴虎憑河)처럼 무모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는 무사하던 백년이 하루아침에 변해버려 풍문만 듣고도 혼비백산해서 모든 관원이 머리를 땅에 박고 감히 무기를 잡는 자가 없어 마침내 적이 무인지경으로 멀리 들어오도록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이 적과는 하루도 같은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으니 한 명의 적을 없애고 한 명의 적을 죽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쌓인 충성심을 갚는 데에 충분하니 차마 풀숲에서 욕되고 구차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뜻이야말로 어찌 열혈장부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공의 죽음으로 인해 충의(忠義)를 다투어 권장하고 인심을 더욱 격려하여 마침내 나라의 회복을 도모하는 과업을 거두게 되었으니 한 사람의 죽음이 격발하여 조짐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공의 죽음이 부질없고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라에서 정려문을 내려 표하고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의 자는 중원(仲元)이고 영가(永嘉 : 안동의 옛 이름) 사람이다. 고려 태사 권행(權幸)의 후손 중에 찰방 권산해(權山海)가 있었는데, 호는 죽림(竹林)이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곧장 자살하여 자신을 바르게 지켰다. 공이 나라를 위해 죽음을 결행한 것은 유래가 있었던 것이다. 부친인 참봉 권평(權平)이 경주(慶州)의 북강(北江) 동쪽 단구리(丹丘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과묵하고 신중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로 소문났다. 의병을 일으켜 싸우러 갈 때 일행이 모두 공의 발에 병이 있어 어렵다고 하자 공은 화를 내며 말했다. “내 발에 병이 났지만 내 마음만은 병이 없다. 임금이 몽진(蒙塵)한 상황에 절뚝발이라고 해서 혼자만 죽지도 못한단 말인가?” 죽은 뒤에 시체를 찾지 못해 남긴 의관으로 마을 뒤 동쪽을 등진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銘)하기를,충성과 의리 천성에 뿌리박아 발은 절뚝이나 마음엔 병이 없으니 임금이 몽진하고 칼날은 위태로워 새와 쥐는 달아났는데 이런 사람 누구인가?몸은 떠났으나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 열렬한 그 빛 물처럼 산처럼 푸르네.임금이 가상히 여겨 정려문 내리고 명성이 멀리 울리니 유허에 슬픔 남아 한 조각 옥돌 세우자는 의견 모아졌으니 아첨 없는 명문 새겨 영원히 보이리라.주상이 즉위한 지 10년이 되는 병오년(정조 10, 1786년) 4월 일 세움.부인 서산유씨(瑞山柳氏)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사망한 일, 서문을 아울러 기록함. 비문이 완성된 뒤 4개월 뒤 중추(中秋)에 혈통을 이은 자손 권영조(權榮祖)와 유생 이도국(李燾國)이 향교·서원의 글과 사림의 글을 가지고 와 찢어지고 뭉개진 옛날 종이 한 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은 이도국의 집안 고적 중에서 얻었습니다. 아마 이도국의 조부와 의사공(義士公 : 권복흥)은 동서간이고 또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그 일을 목격하여 적어두었다가 뒷사람에게 알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양가의 후손이 여러 대에 걸쳐 일찍 세상을 떠나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다 보니 희미해져 오래도록 잊혀져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먼지에 그을리고 벌레 먹은 끝에 2백년이 지난 뒤 진적(眞蹟)이 비로소 나왔으니 아마도 하늘의 뜻이 그 절개를 애달파하여 차마 끝내 사라지지 않게 한 듯합니다. 비문에 붙여 의열(義烈)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뜻입니다.”그 기록을 살펴보니 앞머리는 다음과 같았다. “의사공의 언행과 지조가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거상을 잘하여 마을에서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공이 전구(戰具)를 갖추어 적진을 향해 가자 부인 유씨가 옷을 잡고 통곡하며 말했다. ‘발에 병이 든 당신이 이런 난리를 당해 전구를 갖추고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공이 말했다. ‘안강(安康)에 마음으로 사귄 벗이 있어서 만나려고 하니 만난 즉시 돌아오겠소.’ 마침내 곧장 전장에 나아가 사망하자 유씨는 울부짖으며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해 초혼하며 돌아왔는데, 9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단림(丹林)의 같은 서향 언덕에 합장하였다.”아, 지아비는 충성으로 죽고 지어미는 곧은 지조로 죽었으니 절개와 의리가 짝이 되어 고금에 밝게 빛난다. 애석하게도 지나간 자취가 날로 멀어져 이야기를 아는 나이든 사람도 없으니 뛰어난 절개와 훌륭한 행의가 사라져 풀 섶에 묻혀버리고, 삼강(三綱)을 구비한 하늘의 포상이 옥구이씨(沃溝李氏)의 집안에 미쳤으니 죽은 사람에게는 손해 될 게 없겠지만 세상의 도리로 보아 후세 사람의 유감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부쳐 나중에 백성의 풍습을 캐는 사람이 알도록 했다. 부인의 관향은 서산(瑞山)이고, 참봉 유희춘(柳希春)의 딸이다.1786년 8월 일 이광정(李光靖) 지음.
2)원문
有明朝鮮故忠臣學生安東權公遺墟碑銘」
有明朝鮮故忠臣學生安東權公遺墟碑銘幷序」 承議郞前行司圃署別提韓山李光靖 撰」 傍裔孫 相績謹書幷篆」執徐之亂列郡瓦觧方伯守牧之臣率皆鳥鼠竄時則有若權公諱復興慨然投袂提家僮直前迎賊遂」橫尸戰塲後百四十五年道臣以 聞 朝廷特 命㫌表其門鄊人祝之社旣以 邦令撤於是相與」立石遺墟求銘於余嗚呼國家有難封疆之臣死於封疆羈靮之臣死扵覊靮固其職耳苟無其職雖竄」伏巖竇以全性命誰曰不可然而公以遐方一布衣非有䇿名委質之責而乃獨與疾張拳赴闘深入死」而不悔者豈非忠肝義膽輪囷扵胷中但知讐賊之可怒而不見鋒鏑之可畏只有忠義之内激而不計」死生之必至則倘所謂夫子之死至今有耿光者耶或者疑當時之禍勢若滔天以一介之身䇿家僮迎」豺狼身滅功虧不㡬扵暴虎憑河而不悔者歟然當是時也昇平百年變起一朝聞風遞魄大小崩角無」敢攖其鋒者遂使寇賊長驅如入無人之境公之心盖曰是賊不可一日而共戴天縱使除一羸賊殺一」凶醜猶足以少酬宿昔忠奮之積而不忍偸生苟活扵草莽之中此其志豈不誠烈丈夫㢤况自公之死」忠義竸勸人心益勵使 國家卒收圖恢之業則公之一死未必不爲之激發而爲之兆耳是則公之死」亦不可謂徒然而無所補也宜乎 國家㫌表之典鄊人感慕之誠愈乆而愈無窮也公字仲元永嘉人」髙麗太師幸之後中世有察訪諱山海號竹林 光廟受禪自度不免即引决以自靖其爲 國家决一」死盖有自也考參奉諱平生公于慶州北江東之丹立里公自少寡言沈重以孝悌聞方倡義從戎也象」皆以公有足疾難之公奮然曰吾足雖病吾心獨不病 主上夢塵跛躄者獨不能一死乎旣死求尸不」得以遺衣冠葬扵村後負甲之原銘曰」惟忠與義根於天性我足雖躗我心不病 君父蒙塵鋒鏑如飴鳥逝䑕竄彼何人斯公身雖死公心不」亡烈烈其光水碧山蒼 王用寵嘉門閭旣㫌聲響益遠墟里哀生一片貞珉詢謀攸同我銘不謏刻示」無窮」上之十年丙午四月 日」 夫人瑞山柳氏死節事蹟幷附」碑文旣成越四月仲秋血孫榮祖與儒生李燾國以鄊中校院文字及士林之書來示一張㫁爛古紙曰」此是得於燾國家古蹟中者蓋燾國之祖與義士公爲婭壻且同里目擊其事而手記之以詔後人也不」幸雨家後孫累代蚤世因仍百年之後則寢以忘遠矣惟幸塵煤蠧蝕之餘眞蹟始出扵二百餘年之後」殆天意哀其莭而不忍扵終晦也願得附見扵碑▨使義烈並著此鄊人之志也謹按其錄首言義士公」言行志節自少卓異居喪之善鄊里稱之壬辰之亂公備戰具向賊陣夫人柳氏挽衣而哭曰君病足當」此搶掠之日戰具欲何之公曰安康有知心友欲相面即還遂直赴死戰塲柳氏號泣率家人尋尸不得」招魂而歸九日不食而死合葬于丹林洞㘴甲之原噫夫死扵忠婦死扵烈節義成雙輝暎古今惜乎徃」蹟日遠故老無存卓節懿行烟浸草埋使三綱具備之 天褒獨及扵沃溝李氏之一門扵死者何損焉」而世道後人之憾當如何哉玆並附之庶㡬異日採民風者得焉夫人貫瑞山參奉希春之女是年八月」日光靖又書」
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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