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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흥(權復興)
병든 다리로도 구국 항전을 외면할 수 없었던 오모재(五慕齋) 권복흥(權復興)
이은영(李恩英)*
Ⅰ. 머리말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을 출발한 약 20만의 왜군이 부산포로 들어와 부산
진 전투가 발발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왜군의 침략에 대한 방비책을 특별히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작스런 침략을 받은 조선은 동래성 전투, 김해성 전투 등에
서 거듭 패하였다. 급기야 충주에 배수진을 치고 있던 신립(申砬)마저 패전으로 자결했
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졌다. 급기야 임금이 파천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병으로 다리가 불편했던 권복흥은 임진왜란이 발
발하자 불편한 다리로 종제(從弟)와 함께 가동(家)들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그의 불편한 다리를 보고 출전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병을 빙자
해서 구국 항전을 외면할 수 없다며 출전하였다. 그 후 그는 불편한 다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사보국(誓死報國)의 자세로 각지를 전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보름 만에
다대포 진중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불편한 다리로도 왜군을 격퇴시키고 말겠다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에 전사하면서 권복흥의 이름과 그의 행적은 오늘날 제대로 알
려지지 않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첫날과 다음날에 걸쳐 수많은 희생자를 낸
다대포 전투에 대한 사료조차 많이 남겨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권복흥은 다대포 전투
때 전사한 것이 아니라 각지를 전전하다 다대포 진중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
한 사료를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성록』1)에 그가 다대포 진중에서 전사한 사실이 부인 류씨의 순절
과 함께 기록으로 남겨지면서 그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1) 『 일성록(日省錄)』 : 조선 시대, 1760(영조 36)년부터 1910(융희 4)년까지 150년 동안 날마다 임금의 말과 행동
을 적어 규장각에서 편찬한 책. 모두 2,329권이며, 국보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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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본고에서는 『일성록』의 기록을 통해 병든 다리로도 구국 항전을 외면할 수 없
어 출전했다 전사한 권복흥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가계와 생애
1) 가계2)
권복흥(權復興, 1555~1592)의 자(字)는 중원(仲元)이고, 호(號)는 오모재(五慕齋)이
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출신지는 경주(慶州)이다.
안동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안동권씨의 시조는 신라 왕실의 후손인 태사(太師) 권행(權幸)으로, 본래 성씨는 김
씨(金氏)였다. 그런데 9세기 말 신라가 부패하여 민란이 잇따라 일어나 나라가 기울어
가던 때 후백제 견훤(甄萱)이 쳐들어와서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였다. 이에
격분한 별장(別將) 권행이 930년 고려 왕건(王建)이 병사를 일으키자 그를 도왔다. 그
리고 고창군(高昌郡 현 안동(安東))에서 고려군(高麗軍)과 견훤의 후백제군이 대치하
였을 때 권행은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함께 후백제군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어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 그로인해 고려 건국 후 권행은 김선평·장정필과
함께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 아보공신태사(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에 제수
되었다. 이때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킨 뒤 권행에게 안동부를 식읍(食邑)으
로 내려주었다. 이와 함께 왕건은 권행에게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다
[병기달권(炳幾達權)]’는 뜻으로 권(權)씨 성도 함께 내려주었다. 이로부터 후손들은 권
행을 시조로 삼고 안동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 후 안동권씨는 권행의 10세에 이르러 크게 15개 파로 나누어졌다. 15개 파는 권
수중(權守中)을 파조로 하는 종파(宗派), 권시중(權時中)을 파조로 하는 부호장공파(副
戶長公派), 권수평(權守平)을 파조로 하는 추밀공파(樞密公派), 권수홍(權守洪)을 파조
로 하는 복야공파(僕射公派), 권체달(權達)을 파조로 하는 동정공파(同正公派), 권
지정(權至正)을 파조로 하는 좌윤공파(佐尹公派), 권영정(權英正)을 파조로 하는 별장
2)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의 <안동권씨>, 『울진신문』 2004년 11월 04일 기사 <
고려·조선 통한 명문 후예 안동권씨> (http://ulj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06) 등을
기저로 서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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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파(別將公派), 권통의(權通義)를 파조로 하는 부정공파(副正公派), 권인가(權仁可)를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권형윤(權衡允)을 파조로 하는 급사중공파(給事中公
派), 권숙원(權叔元)을 파조로 하는 중윤공파(中允公派), 권사발(權思拔)을 파조로 하는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 권대의(權大宜)를 파조로 하는 정조공파(正朝公派 일명 광석
공파(廣石公派)), 권추(權樞)를 파조로 하는 호장공파(戶長公派), 권척(權倜)을 파조로
하는 검교공파(檢校公派)이다.
고려 때의 대표인물로는 ‘당대구봉군(當代九封君)’으로 이름을 떨친 영가부원군(永嘉
府院君) 권부(權溥) 집안이 있다. 당대구봉이라 함은 권부와 그의 다섯 아들 길창부원
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광복군(廣福君) 권종정(權宗頂)·영가부원군 권고(權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大君) 권후(權煦)·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 권겸(權謙)과 함께 군
(君)에 봉해진 세 사위 계림부원군 이제현(李齊賢)·순정대군(順正大君) 왕숙(王璹)·
회안대군(淮安大君) 왕순(王珣) 등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그 밖에 복야공파의 파조
인 권수홍의 증손(曾孫)으로 충숙왕 때 시중(侍中)을 지낸 권한공(權漢功)이 있고, 우왕
때 좌사간(左司諫) 재임 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안동으로 낙향한 뒤 조선
태종이 대사헌(大司憲) 벼슬을 내리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며 불사이군(不
事二君)의 충절을 드러낸 권정(權定) 등이 있다.
조선 때의 대표인물로는 기로소(耆老所)에 든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 권희(權僖)와
권한공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권중화(權仲和)가 있다. 그리고 태조 때 조선 최초 대제
학(大提學)을 지낸 권근(權近)과 그의 둘째 아들로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바친 대제학 권제(權嗇), 권근의 조카로 훌륭한 문관에
게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제도인 호당(湖堂)에 첫 번째로 뽑힌 권채(權
採)가 있다. 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병을 핑계로 더 이상 관직에
물러났다가 다음해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3)이 참형을 당하자 함께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 자결한 단묘(端廟) 절신(節臣)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가 있다. 그밖에 우찬성 권벌(權), 삼정승(三政丞) 권철(權轍) 등이 있
다. 임진왜란 때 전공(戰功)을 세운 인물로는 권철의 아들로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된 장군(將軍) 권율(權慄)을 비롯해 선무공신 2등 의병대장(義兵大將) 권응수(權應
銖),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 권응전(權應銓), 선무원종공신 1등 권응평(權應
平), 선무원종공신 3등 권응생(權應生) 4형제와 선무원종공신 2등 권응심(權應心)과 선
3) 사육신(死六臣) :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잡혀 죽은 여섯 명의 충신. 곧 성삼문(成三
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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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종공신 3등 권응기(權應箕) 형제, 선무원종공신 2등 권덕시(權德時)와 권덕성(權德
成) 형제 등이 있다.
근현대의 대표인물로는 일제 강점기 때의 항일투사 권종해(權鍾海)와 권준(權晙) 등
이 있다.
오모재(五慕齋) 권복흥은 시조 권행의 24세이고, 좌윤공파 권지정(權至正)의 후손
이며, 8대조 감찰규정(監察糾正) 권희정(權希正)은 증 좌의정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
다. 그리고 5대조 충민공(忠愍公)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의 벼슬은 종부시첨정(宗
簿寺僉正)이며,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
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 물러났다가 다음해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참
형을 당하자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 자결로 인해 그의 후손들은 100년 동안 벼
슬길이 막히고 전 가족이 변방(邊方)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권산해의 넷째 아들 판관공(判官公) 권철손(權哲孫 : 권복흥의 고조부)은 경주(慶州)로 이거하여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으며, 단묘(端廟) 절신(節臣) 권산해는 예천 노봉서원(魯峰書院)에서 봉향하며,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 배향하고 있으며, 부인 영가권씨(永嘉權氏)는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따님이고, 단종대왕의 이모부(姨母夫)이다.
안동권씨 가문은 조선 시대 때 문과 급제자 359명을 배출하면서 상신(相臣)은 증직
(贈職)을 포함해서 40명, 경신(卿臣)은 116명, 공신(功臣)은 86명, 문형(文衡)은 6명,
봉군(封君)된 인물은 69명, 시호(諡號)가 봉해진 인물은 59명이나 되면서 왕족인 전주
이씨 다음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가로써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안동권씨 가
문은 권력으로 부(富)를 축적하기보다는 학문에 전념한 학자들도 많았던 만큼 난신적
자(亂臣賊子), 즉 역적질이나 도적질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안동권씨 가문에서 나고 자란 권복흥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 항전을 외
면할 수 없다며 병으로 불편해진 다리를 이끌고도 창의(倡義)한 뒤 각지를 전전하며 다
대포 진중에서 분전하다 전사한 것은 단종 때 절신으로 이름난 권산해의 후손으로서
충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임을 알 수 있다.
2) 생애4)
권복흥은 1555년(명종 10) 8월 19일 묘시(卯時)에 지금의 경주시 강동면(江東面)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의 <권복흥(權復興)> 등을 기저로 서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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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구리(丹丘里)에서 부친 권평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독자이다. 부인 서산류씨(瑞山柳
氏)는 참봉 류희춘(柳希春)의 5녀이다.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기계가 곧고 효성이 지
극하며, 남달리 가문의 명예(名譽)를 소중히 하고, 선유(先儒)의 맥(脈)을 이어 학업에
전념하며, 후학양성으로 自足하며, 참 선비로 성실히 살아왔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든 다리를 이끌고 종제(從弟) 구사재
(九思齋) 권복시(權復始, 1556~1636)와 함께 가동(家)들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서사보국(誓死報國)의 자세로 각지를 전전하다 그해 4월 28일 다대포(多大浦)
에서 분전하다 다대포 진중에서 전사(戰死)하였다. 남편의 죽음을 전해들은 부인 류씨
(柳氏)는 초혼(招魂)으로 빈소를 차린 뒤 식음을 전폐한 지 9일 만에 생을 마감하였다.
1737년(영조 13) 권복흥에게 충렬(忠烈)과 정포(旌褒)가 내려졌다. 그리고 1740년
(영조 16)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권복흥의 향리에 단계사(丹溪祠)를 세우고 제향하
단계서당
유허비각
충렬사
충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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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1786년(정조 10)에 ‘권복흥유허비(權復興遺墟碑)’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
에서 세워졌는데 ‘권복흥유허비’의 비명(碑銘)은 승의랑(承議郞) 전 행 사포서별제(前
行司圃署別提) 한산(韓山) 이광정(李光靖)이 지은 것이다. 현재 1980년대에 뜬 ‘권복흥
유허비’ 탁본이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794년(정조 18)에는 부인에게 열녀(烈女)와 정포가 내려졌다.
현재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간행한 『오모재실기(五慕齋實紀)』가 전한다.
Ⅲ. 다대포 전투에서 전사
1) 다대포 전투에서 전사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온 국토가 초토화되고 민생이 무참히 짓밟
히는 데 분기한 권복흥은 병든 다리를 이끌고 종제 권복시와 함께 가동들을 이끌고 토
적(討賊)을 부르짖으며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다.
당시 권복흥의 다리가 불편한 것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출전(出戰)하는 것은 어
렵다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권복흥은 “내 비록 병으로 인해 다리가 불편하나 내 마음은
병들지 않았다. 임금이 난을 만나 피난길을 떠나는 형편에 어찌 병을 빙자해서 구국 항
전을 외면하겠는가?”라며 분연히 일어섰다.
그 후 각지를 전전하면서 왜군과 투쟁하다 그해 4월 28일 낙동강 하구와 바닷물이
만나는 현 부산광역시 사하구(沙下區) 다대동(多大洞)에 위치한 다대포로 달려갔다.
다대포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날 장졸 700여 명 등 총 1천2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5) 왜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뒤, 왜군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곳으로 달려간 권
복흥은 서사보국(誓死報國)의 자세로 화살이 다할 때까지 분전하다 다대포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보름 만이었다.
5) 부산일보(http://news20.busan.com/) 2013년 11월 25일 기사 <[나의 길 나의 삶] 다대포 향토사 연구하는
한건 다대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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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인 류씨의 순절
남편이 다대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류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
였다. 그래서 부인은 즉시 집에서 부리던 남자 일꾼을 데리고 가서 남편의 시신을 찾으
러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이에 부인은 남편의 옷깃으로 남편의 혼을 불러 빈소
를 차렸다. 그 후 집안일을 처리하고 네살 아들을 근친에게 부탁하고는 말하기를 “남편
이 왜적의 칼날에 죽음을 당하였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하늘에 사무
치는 죄이다. 나를 남편의 혼을 모신 널 옆에 합장(合葬)하여 평소에 한 무덤에 묻히고
싶어 했던 소원을 이루게 하라.”고 하였다. 그 말을 마친 부인은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식음을 전폐한 지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져 생을 마감하였다.6)
그 후 영조 때 감사(監司)에 의해 권복흥이 전사하고 부인이 순절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이에 영조는 1737년(영조 13) 권복흥에게 “충신의사권복흥지려(忠臣義士權
復興之閭)”라는 정포(旌褒)를 내려주었다. 이를 계기로 1740년(영조 16) 사림(士林)이
공의(公議)로 경주 강동면 향리에 그를 기리기 위한 단계사(丹溪祠)를 건립하고 제향하
였다.
그리고 정조는 부인의 순절한 뜻을 기려 1794년(정조 18) “열녀의사권복흥처서산유
씨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라는 정포를 내려주었다.
권복흥과 부인에게 정려가 내려진 사실은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찬( )한 「의사 권복흥과 열부 서산유씨에 대한 정려명[義士權公復興,烈
婦瑞山柳氏旌閭銘]」 7)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3) 『일성록』에 실린 사료
『일성록』에는 권복흥과 부인 류씨와 관련된 기사가 세 개 실려 있다.
하나는 아래의 『국역 일성록』 정조 13년(1789) 윤5월 22일 기사 <예조가 서울과 지
방의 효열 별단(孝烈別單)으로 아뢰었다.>이다.
6) 『 국역 일성록』 정조 13년(1789) 윤5월 22일 기사. <예조가 서울과 지방의 효열 별단(孝烈別單)으로 아뢰었다.>
참조.
7) 홍양호(洪良浩), 『이계집(耳溪集)』 권17 「의사 권복흥과 열부 서산유씨에 대한 정려명[義士權公復興,烈婦瑞山
柳氏旌閭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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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녀 치지 별단(烈女置之別單)은 다음과 같다.
한산의 고 학생 권원(權援)의 처 박씨, 봉산(鳳山)의 고 사인 이보은(李輔殷)의 처
강씨(姜氏), 울산(蔚山)의 고 사인 유진옥(柳震沃)의 처 장씨(蔣氏), 경주(慶州)8)의
고 처사 권복흥(權復興)의 처 유씨(柳氏), 서부의 고 통덕랑 이경(李絅)의 처 유씨,
강화의 전 별장 박상엽(朴尙燁)의 처 전씨(田氏)이다.
……
경주(慶州)9) 권복흥(權復興)의 처 유씨(柳氏)는 남편이 임진왜란 때 전쟁에 나가
서 죽자, 유씨가 즉시 집에서 부리던 남자 일꾼을 데리고 가서 남편의 시신을 찾았으
나 끝내 찾지 못하였으므로, 옷깃으로 초혼(招魂)하여 돌아와 빈소를 차렸다. 이어서
집안일을 처리하고 말하기를, “남편이 왜적의 칼날에 죽음을 당하였으나 시신을 찾
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이다. 나를 남편의 혼을 모신 널 옆에
합장(合葬)하여 평소에 한 무덤에 묻히고 싶어 했던 소원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곡기를 끊은 지 9일 만에 저절로 목숨이 끊
어졌다.
또 하나는 아래 『국역 일성록』 정조 18년(1794) 7월 16일 기사 <예조가 서울과 지방
의 효자와 열녀의 실제 행적에 대해 회계(回啓)하였다.>이다.
○ 열녀 가운데 복호(復戶)해 줄 대상에 대한 별단은 다음과 같다. ……
경주(慶州)의 고 의사(義士) 권복흥(權復興)10)의 처 유씨(柳氏)는, 도(道)에서 올
린 장계(狀啓)에, “유씨의 열행(烈行)은 전해 들은 것이 없어서 고 의사에 대해 포상
해 줄 것을 청하였을 때에 함께 거론할 수 없었습니다. 유적지에 비석이 세워질 때도
대략적인 것조차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사인 이도국(李燾國)이
우연히 집 창고를 조사해 보다가 어지럽게 벌여 있는 상자에서 옛날 종이 한 장을 얻
었습니다. 그것은 그 집의 6대조 이영립(李榮立)이 손수 기록한 것으로 의사의 순절
및 유씨가 그 남편을 따라 죽은 데 대한 내용이었는데, 기록된 것이 상당히 자세하였
8) 서울대 규장각본 『일성록(日省錄)』의 원문은 ‘廣州’로 되어 있고, 『국역 일성록』의 번역은 ‘광주(廣州)’ 되어 있
다. 그러나 이는 모두 경주(慶州)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수정하였음.
9) 서울대 규장각본 『일성록(日省錄)』의 원문은 ‘廣州’로 되어 있고, 『국역 일성록』의 번역은 ‘광주(廣州)’ 되어 있
다. 그러나 이는 모두 경주(慶州)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수정하였음.
10) 『 국역 일성록』에 경주(慶州)의 고 의사(義士) 권부흥(權復興)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권복흥의 독음 오기이므
로, 바로잡아 수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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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발견한 그 옛날 종이를 바치게 하여 세세히 검사해 보니, 좀 먹고 연기에 그
을린 뒤라 글자와 그림을 겨우 판독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첫머리에 의사의 순
절에 대한 내용이 씌어 있었고 또 유씨가 자진한 내용이 하단에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는 옛사람의 실제 기록으로 조금도 틀림없을 뿐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마지막 하나는 아래 『일성록(日省錄)』 순조 12년(1812) 10월 13일 기사에 실려 있다.
고(故) 충신(忠臣) 권복흥(權復興)이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일로 속히 추증하였다.
4) 권복흥유허비11)
「조선 고(故) 충신(忠臣) 학생(學生) 안동 권공(安東權公) 유허비명(遺墟碑銘)과
서문(序文)을 아울러 기록하다.」
승의랑(承議郞) 전 행 사포서별제(前行司圃署別提) 한산(韓山) 이광정(李光靖)이
짓다.
방계 후손 권상적(權相績)이 삼가 쓰다. 전서(篆書).
임진왜란 때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방백과 수령들 대부분이 새와 쥐처럼 도망가 숨
어있을 때 권복흥(權復興) 공과 같은 사람은 강개하여 소매를 떨치고 집안 하인들을 이
끌고 곧장 앞장서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시신으로 눕게 되었다. 그로부터
145년 뒤 도신(道臣)이 조정에 보고하여 특명으로 정려문을 내려주었다. 마을 사람들
이 축수하던 사단(社壇)은 이미 나라의 명령으로 철거되었는데, 이때 유허(遺墟)에 비
(碑)를 세우기로 하여 내게 비명(碑銘)을 구했다.
아아, 나라에서 봉토(封土)를 받은 신하가 봉토에서 죽고 말고삐를 잡는 신하가 말고
삐를 잡은 채 죽었다 하더라도 자기 직분에 맞는 일을 한 것뿐이다. 만약 그 직분이 아
니라면 아무리 쥐처럼 바위틈에 숨어서 목숨을 보전한다 해도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
11) 권복흥의 12세손 권혁무(權赫武)가 자료 재공한 ‘권복흥유허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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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 그러나 공은 외딴 지방의 일개 포의(布衣 : 관직이 없는 선비)로서, 관원이 되어
충성을 맹서하지도 않았는데 홀로 주먹을 불끈 쥐고 나아가 싸우다 사지(死地)에 깊이
들어갔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이 어찌 충성과 의리로 가득 찬 심장을 가슴속에 간직한
것이 아니겠는가? 원수인 적에게 분노하는 것만 알았지 칼날과 화살이 무섭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의 죽음이 지금까지도 빛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당시
위험한 상황이 하늘까지 넘쳤는데 단신(單身)으로 집안 하인들을 채찍질하여 사나운
적을 맞아 몸은 멸망하고 공(功)은 이지러졌으니, 마치 포호빙하(暴虎憑河)12)처럼 무모
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
나 당시는 무사하던 백년이 하루아침에 변해버려 풍문만 듣고도 혼비백산해서 모든 관
원이 머리를 땅에 박고 감히 무기를 잡는 자가 없어 마침내 왜적(倭賊)이 무인지경으
로 멀리 들어오도록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이 적과는 하루도 같은 하늘을 이고 있
을 수 없으니 한 명의 적을 없애고 한 명의 적을 죽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쌓인
충성심을 갚는 데에 충분하니 차마 풀숲에서 욕되고 구차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
각했을 것이다. 그 뜻이야말로 어찌 열혈장부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공의 죽음으로 인
해 충의(忠義)를 다투어 권장하고 인심을 더욱 격려하여 마침내 나라의 회복을 도모하
는 과업을 거두게 되었으니 한 사람의 죽음이 격발하여 조짐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공의 죽음이 부질없고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
지 않다. 나라에서 정려문을 내려 표하고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세
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의 자(字)는 중원(仲元)이고, 영가(永嘉 안동의 옛 이름) 사람이다. 고려 태사 권
행(權幸)의 후손 중에 찰방(察訪) 권산해(權山海)가 있었는데, 호는 죽림(竹林)이다. 세
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곧장 자살하여 자신을 바르게 지켰
다. 공이 나라를 위해 죽음을 결행한 것은 유래가 있었던 것이다. 부친인 참봉 권평(權
平)이 경주(慶州)의 북강(北江) 동쪽 단구리(丹丘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과묵하고 신중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로 소문났다. 의병을 일으켜 싸우러 갈 때 일행이
모두 공의 발에 병이 있어 어렵다고 하자 공은 화를 내며 말했다. “내 발에 병이 났지만
내 마음만은 병이 없다. 임금이 몽진(蒙塵)한 상황에 절뚝발이라고 해서 혼자만 죽지도
못한단 말인가?” 죽은 뒤에 시신을 찾지 못하자 남겨진 의관(衣冠)으로 마을 뒤 동쪽을
등진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銘)하기를,
12) 포호빙하(暴虎憑河) : 혈기가 지나쳐 무모한 행동을 감행하는 것을 말한다. 폭호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쳐 죽이
는 것이고, 빙하는 배도 없이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가는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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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의리 천성에 뿌리박아
발은 절뚝이나 마음엔 병이 없으니
임금이 몽진하고 칼날은 위태로워
새와 쥐는 달아났는데 이런 사람 누구인가?
몸은 떠났으나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
열렬한 그 빛 물처럼 산처럼 푸르네
임금이 가상히 여겨 정려문 내리고
명성이 멀리 울리니 유허에 슬픔 남아
한 조각 옥돌 세우자는 의견 모아졌으니
아첨 없는 명문 새겨 영원히 보이리라.
상(上 : 임금)이 즉위한 지 10년이 되는 병오년(정조 10, 1786) 4월 일 세움.
『부인 서산유씨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사망한 일과 서문을 아울러 기록하다.』
비문이 완성된 뒤 4개월 뒤 중추(仲秋)에 혈통을 이은 자손 권영조(權榮祖)와 유생
(儒生) 이도국(李燾國)이 향교·서원의 글과 사림(士林)의 글을 가지고 와 찢어지고 뭉
개진 옛날 종이 한 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은 이도국의 집안 고적 중에서 얻은 것
입니다. 아마 이도국의 조부와 의사공(義士公 : 권복흥)은 동서간이고 또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그 일을 목격하여 적어두었다가 뒷사람에게 알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불행
히도 양가의 후손이 여러 대에 걸쳐 일찍 세상을 떠나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다보니 희
미해져 오래도록 잊혀져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먼지에 그을리고 벌레 먹은 끝에 2백년
이 지난 뒤 진적(眞蹟)이 비로소 나왔으니 아마도 하늘의 뜻이 그 절개를 애달파하여
차마 끝내 사라지지 않게 한 듯합니다. 비문에 붙여 의열(義烈)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뜻입니다.”
그 기록을 살펴보니 앞머리는 다음과 같았다. “의사공의 언행과 지조가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거상(居喪)을 잘하여 마을에서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공이 전구(戰具)를
갖추어 적진을 향해 가자 부인 유씨가 옷을 잡고 통곡하며 말했다. ‘발에 병이 든 당신
이 이런 난리를 당해 전구를 갖추어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공이 말했다. ‘안강(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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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에 마음으로 사귄 벗이 있어서 만나려고 하니 만나는 즉시 돌아오겠소.’ 마침내 곧
장 전장(戰場)에 나아가 사망하자 유씨는 울부짖으며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시신을 찾
았으나 끝내 찾지 못해 초혼(招魂)하며 돌아왔는데, 9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다가 세상
을 떠났다. 단림(丹林)의 같은 서향(西向) 언덕에 합장하였다.”
아! 지아비는 충성으로 죽고 지어미는 지조로 죽었으니 절개와 의리가 짝이 되어 고
금(古今)에 밝게 빛난다. 애석하게도 지나간 자취가 날로 멀어져 이야기를 아는 나이든
사람도 없으니 뛰어난 절개와 훌륭한 행의가 사라져 풀섶에 묻혀버리고, 삼강(三綱)을
구비한 하늘의 포상이 옥구이씨(沃溝李氏)의 집안에 미쳤으니 죽은 사람에게는 손해될
게 없겠지만 세상의 도리(道理)로 보아 후세 사람의 유감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부쳐 나중에 백성의 풍습을 캐는 사람이 알도록 했다. 부인의 관향은 서산(瑞
山)이고, 참봉 유희춘(柳希春)의 딸이다.
1786년 8월 일 이광정(李光靖)이 또 짓다.
Ⅳ. 맺음말
1592년 중국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 1536~1598)]가 1598년(선조 31) 왜
군에게 조선에서 물러갈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병사(病死)하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온전한 몸으로도 기피하고자 하는 것이 전쟁이다. 그런데 권복흥은 병을 빙자해서
구국 항전을 외면할 수 없다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다리
를 이끌고 각지를 전전하다 다대포 진중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권복흥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
다. 하나는 임진왜란 기록이 대부분 큰 전투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반해 권복흥
이 죽음을 맞이한 다대포 진중에서의 싸움은 큰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
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권복흥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보름 만에 전
사하면서 그와 관련된 임진왜란 때의 행적을 서술할 내용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부인의 순절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일성록』을 통해서라도 그의 임진왜란 때의 행
적을 확인할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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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을 때는 조
선 정도는 가볍게 점령하고 명나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권복흥처럼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의병들이었
다. 그렇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사하기에 앞서 조선을 끝까지 점령할 수 없
음을 깨닫고 자신의 군사들에게 조선에서 물러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국 항전을 외면할 수 없어 불편한 다리로도 의병활동에 나서 서사보국
의 자세로 분전하다 전사한 권복흥의 희생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는 점에서 그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은 세상에 알릴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본고를 통해 『국역 일성록』에 표기된 오기가 바로 잡아짐과 동시에 권복흥과
그의 부인이 보여준 임진왜란 때의 행적이 하루 빨리 세상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며 글
을 마친다.
* 참고 문헌
『國譯 日省錄』
『東京誌』
『五慕齋實紀』 (權復興)
『嶺南人物考』
『운곡서원지』, 운곡서원, 대보사, 2011.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최효식, 국학자료원, 2004.
『壬辰抗爭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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