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문학산책

이진대의 글 “봇물”

죽재권혁무 2015. 6. 16. 22:12

봇물

 

 열 여자 마다할 남자 없듯이 여자가 원한다면 피곤이 물밀듯 밀려와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남자 아닌가?

봇물이 그러하다. 봇물은 굽은 논 곧은 논  따질 이유도 없다. 몸이 부서지고 심장이 멎을지라도 논바닥이 원하면 봇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뿌듯한 자부심이다.

 봇물은 필요하지 않는 곳에는 가지를 않는다. 오라하지 않는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한 곳이라면 마지막  남은 한 방울 까지 라도 쥐어짜서 기쁜 마음으로 내어주고 뿌듯한 보람을 느끼는 것이 봇물의 운명이다.

 겨울이면 바짝 움츠리고 잠을 잘 줄도 안다. 그러나 단순히 잠만 자는 것이 아니다. 봄날에 왕성하게 풀어내야 할 정력을 위해 몸만들기를 하고 있다. 꽁꽁 언 얼음 속에서도 미꾸라지, 송사리, 붕어 메기 가물치 등과 조화를 이룬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면 지저귀는 새소리와 훈풍에 대지도 잠이 깬다. 들판도 서서히 초록의 옷으로 단장 하면서 사랑의 계절이 찾아온다. 과년한 들판에서 초록 치마가 바람에 팔락이는 것이 보인다. 봇물도 기지개를 펴고 몸단장을 시작한다.

봇물은 넘치는 힘으로 주체할 수 없는 왕성함에 온 들판을 흥건히 적시는 꿈을 꾼다. 부푼 가슴으로 설렘에 들떠 춤을 추듯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아카시아 꽃 진한 향기가 바람에 날릴 때쯤 들판은 굳게 여민 옷고름을 푼다. 봇물이 둑이 넘칠 듯 출렁이는 애무를 하면 사르르 들판의 막혔던 굴 문이 열리고 사랑은 한 몸이 되어 진득하게 흐른다.

마른 논은 큰 사랑을 하고 진논은 덧 사랑을 하여 흥건히 들판을 적시는 쾌감이 하늘을 찌른다. 사랑은 지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여름엔 지칠 때도 있다. 이방인 같은 태풍이 한바탕 휘젓고 지나가거나 장마가 질투처럼 훼방을 할 때면 봇물의 사랑도 잠시 냉정 기를 겪는다.  폭풍의 수난에 찢기고 상처받은 마음을 토닥이며 사랑으로 감사 안아주는 이가 있다. 모래 논이다.

 봇물은 모래 논을 좋아한다. 휴작기가 있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휴작기를 제외하고는 언제 들러도 싫은 내색 한번 없고 짜증 한번 없다. 주어도주어도 어레미같이 물이 빠져나가는 모래땅이라 항상 목말라 허덕이는 그다. 이틀이 멀다하고 피덕피덕 말라가는 모래 논은 봇물을 보지 않고는 사흘만 되어도 시름시름 생기를 잃는다. ‘어데 출장을 갔나? 봇둑이 터졌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형상에 피골이 상접해지고 벌써 노릇하니 황달기도 보인다. 갈라진 상처는 더 깊게 갈라지고 혈색마저 잃을 때 봇물도 마음이 급하다. 사흘을 못보고도 몇 달을 못 본 것 같은 애틋함이 흐른다. 졸졸졸 봇물 들어오는 소리에 모래 논은 뽀글뽀글 비명을 지른다. 봇물은 모래논의 갈라진 상처를 정성스레 위문 하고 모래 논은 그런 그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가을이 되고 겉물이 말라가는 갱년기에도 모래 논은 봇물이 그립다. 겉은 말라도 속은 촉촉이 젖고 싶어 하는 모래 논이다. 봇물은 그런 그를  쓰다듬고 보듬어 줄 수 있어 좋다. 기쁘게 채워 주는 재미가 있어 좋다.

 나에게도 모래 논 같은 친구가 있었다. 세상 풍파에 시달려 무너진 논둑이 또 무너져 모래 논같이 된 친구였다. 외로움에 지치고 따뜻한 정에 목말라 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의 뜻 같았다. 들판에 푸름이 빗겨 간 듯이 빛바랜 땅으로 드러난 묵정논 같은 친구였다. 딱한 사정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봇물이 손을 내밀었고 그는 받아들였다.

그런 친구를 위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 따뜻한 손길을 받아들여 고마웠고 보듬을 수 있어 행복했다. 그가 지치면 내가 위로하고 내가 지치면 그가 와서 위로해 주었다. 모래논과 봇물같이 마른 논은 목말라 하고 목말라 하는 논에는 물을 가득 넣어주고픈 봇물이 되어 절절한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사실 봇물은 외로운 존재다. 끝없이 새어나오는 샘물과 그 물을 언제나 품고 사는 미나리꽝 같은 인연이라면 모를까, 휴작기가 있는 논을 사랑했기에 사랑 하는 만큼 기다려야 하는 봇물은 외롭다.

(고향에 이진대후배의 “봇물” 복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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