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사공(太師公)의 선계(先系)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처음 성은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이다. 종성은 왕실(王室) 성씨를 지칭한 말이고 종실(宗室)이라 쓰기도 한다. 종성이란 말은 종족(宗族)의 성씨로 쓸 때에는 같은 겨레붙이의 성씨, 즉 성씨가 같은 일가붙이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라의 종성이라 하였기 때문에 국성(國姓), 즉 왕성(王姓)을 말한다. 신라의 국성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것이 김씨인데 고대에 경주와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두 김씨가 있었다. 경주의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여 퍼졌고 김해의 김씨는 가락국(加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여 퍼졌는데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는 김씨는 다 이 두 김씨에서 분적(分籍)되어 독립된 본관을 갖게 된 성씨들이다. 그리고 우리 안동권씨는 신라의 종성에서 권씨로 환성(換姓)하였으므로 또한 경주 김씨에서 분적된 것인데, 이를 분적이라고 이르지 않는 것은, 분적이란 그 성은 그대로 두고 본관만 바꾸어 독립할 때에 지칭하는 말이고 성과 본관을 다 바꿀 때는 완전히 타성으로 되어 통혼(通婚)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동성혼(同姓婚)을 안함에 있어 분적을 한 동성끼리는 좀체로 혼인을 안하지만 분적 환성을 한 성씨와는 구애없이 통혼을 하되 외가 성씨에 대해 친근한 정서를 갖는 것처럼 이를 더 선호하면 하였지 배척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신라 56왕 가운데 박씨 10왕 석씨 8왕을 뺀 38왕이 김씨인데 그 가운데 한 왕이 우리 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예조(藝祖)라 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여왕 3위는 후손이 없거나 있더라도 타성이 되었을 터이니 제외하고 남왕 중에도 14왕이 기록상 사왕자(嗣王子)가 없으며 말왕(末王) 경순왕은 태사공과 동시대인이니 제외하여 이들 18왕을 다시 빼면 태사공의 선조가 될 수 있는 임금은 20왕이 되는 셈이다. 김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난 서기 65년으로부터 태사공이 권씨로 득성(得姓)한 930년까지는 865년이 되고 미추왕의 즉위가 서기 262년이니 그로부터 930년까지는 668년이 된다. 사람의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계산하면 태사공은 미추왕으로부터는 22∼23세손이 되겠고 김알지의 28∼29세손이 될 것이다. 태사공과 동시대인인 경순왕이 김알지의 28세손이라 하니 대략 태사공도 알지 시조의 30세 이내로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
태사공의 태어나고 돌아간 생몰(生歿) 연대와 그 부친 및 배위(配位)에 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신라 왕실의 종성(宗姓)으로서 신분이 존귀하며 명망이 커서 당세의 관민(官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걸이었음을 미루어 알 뿐이다.
2. 태사공(太師公)의 득성(得姓)
태사공은 본래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서 성명이 김행(金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에는 성명이 권행(權行)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사관(史官)의 착오로 오기(誤記)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세전(世傳)의 기록이나 기타 모든 문적(文籍)에는 다 휘(諱)가 행(幸)으로 나오고 행(行)으로 나온 곳은 고려사 뿐이다. 혹시 태사공이 사성(賜姓)을 받아 성이 김씨에서 권씨로 되면서 휘도 행(幸)에서 행(行)으로 바뀐 것이나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으나 더 상서롭고 좋은 글자인 행(幸)을 버리고 행(行)을 취했을 이치가 없으니 환성(換姓)이 되면서 휘자(諱字)도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태사공이 덕업(德業)을 쌓고 공훈을 세워 사성(賜姓)과 작위(爵位)를 받은 일은 사서(史書)나 각 집안의 문헌에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수없이 많으나 그 대표적인 것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의 기록이다. 동사강목은 조선 영조(英祖) 때 안정복(安鼎福)이 아동의 교과용으로 지은 역사책으로 기자(箕子)에서부터 고려 말(高麗末)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송(宋)나라 주자(朱子 : 주희)의 통감강목(通鑑綱目) 을 참고하여 편술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3년 기축(己丑 : 929)[후당(後唐) 천성(天成 : 明宗 연호) 4년 견훤(甄萱 : 후백제) 38년 12월에 견훤이 고려(高麗 : 신라)의 고창군(古昌郡 : 안동)을 포위하니 고려 임금 건(建 : 왕건)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와 구원하였다. 경순왕 4년 경인(庚寅 : 930)[후당 장흥(長興) 원년 견훤 39년]에 고려 임금 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대파(大破)하니 동방(東方)의 주군(州郡)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고창을 구원하러 와 예안진(禮安鎭 : 안동시 예안면)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워 이롭지 못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상(大相 : 고려초의 문무관 2품)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말하기를,
"불리하면 마땅히 사잇길을 좇아 가야지 죽령(竹嶺)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하니 반드시 먼저 사잇길을 닦아야 합니다."
하였다. 장군 유검필(庾黔弼)이 말하기를,
"병(兵)이란 흉기(凶器)이고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니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 계책이 없은 연후에 가히 승패를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거늘 지금 적 앞에 임하여 싸우지는 않고 먼저 북으로 꺾일 것을 염려함은 어째서입니까? 만약 지금 고창을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3천여의 무리가 손을 맞잡아 읍하여 적을 맞아들일 터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신(臣)은 진군하여 급히 칠 것을 원합니다."
하니 고려왕이 이를 좇았다. 병술일(丙戌日)에 고려왕의 군대가 고을의 북쪽 병산(甁山 : 안동시 臥龍面 西枝里)에 이르렀는데 훤(萱)의 군대는 석산(石山)에 있어 상거가 5백보가 되자 드디어 접전하였다. 저물 때까지 격전을 벌였는데 검필(黔弼)이 경병(輕兵)을 이끌고 저수봉(猪首峰)에서 분격해 치니 훤이 패해 달아나는지라 그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고 백제군의 죽은 것이 8천여인이었다. 고려왕이 고창에 입성하여 검필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승첩(勝捷)은 경(卿)의 공이다."
하였다. 견훤은 장수를 보내 순주(順州 : 풍산)를 쳐 침략하고 인호(人戶)를 약탈해 가지고 갔다. 고려왕이 곧 순주로 행차하여 성을 수복(修復)하고 주(州)를 격하하여 하지현(下枝縣)을 삼고 원봉(元奉 : 성주)을 잡았는데 [백제에 항복했으나] 전에 세운 공이 있으므로 용서하였다. 고창성주(古昌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 : 고려 초기 문무관 1품)으로 삼고 김행(金幸)과 장길(張吉 : 장정필)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군을 승격하여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이에 영안(永安 : 풍산) 하곡(河谷 : 안동시 임하면) 직명(直明 : 안동시 일직면) 송생(松生 : 청송) 등 30여 고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는 이때 병력이 점점 강해지고 나라가 동쪽으로 넓혀져 바다에 연한 주군(州郡)과 부락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니 명주(溟州 : 강릉)에서부터 흥례부(興禮府 : 울산)에 이르기까지 총1백10개 성이었다. 김행(金幸)이란 사람은 나라의 종성(宗姓 : 왕실 성씨)인데 견훤이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는 말을 듣고 무리와 모의하기를,
"훤(萱 : 견훤)은 의리상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으니 어찌 왕공(王公 :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우리의 수치를 설해(雪解)치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
하고 권(權)씨로 성을 하사하였다. 끝
36世 혁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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