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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재사(陵洞齋舍)

죽재권혁무 2007. 4. 14. 11:21
 능동재사(陵洞齋舍)
 중요민속자료 제183호(1984. 1. 10)로 지정된 안동권씨 능동 제사는 총 4동 49간의 구(口)자형 와가이다.
 고려 삼태사중의 한 분인 권태사의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사인데, 처음 효종 3년(1653)에 관찰사 우( )공이 종중(宗中)의 사람들과 의논해서 마루, 고방, 등 16간을 지었고, 그 뒤 숙종(肅宗) 9년(1683)에 관찰사 시경(是經)공이 누각 일곱 간을 추가로 건립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753년에 불이 나서 건물이 전소된 것을 중건(重建)했는데, 1896년에 다시 화재가 나서 당시 안채, 안사랑채, 사랑채, 대문간채, 별당, 곳간채 등 총 70여간의 건물이 모두 타버리고, 다만 임사청(任司廳)과 전사청(典祀廳)등 몇 칸만 남기고 모두 없어진 것을 건양(建陽) 1년(1899)에 다시 중건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사(齋舍) 건물로는 규모가 매우 커서 그 유래를 다른 대서는 찾기가 어렵다.
매년 한식과 10월 중정일(中丁日)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24세 세손 인(寅)공께서 쓴 재사기(齋舍記)를 보면 재사(齋舍)의 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시조 태사공의 의관을 갈무리한 곳은 안동부(安東府) 서쪽 천등산(天燈山)에 있으며, 안동 시내에서 불과 20리 가량 되는 가까운 곳이다.
 처음 묘(墓)에 표(表)가 없었으니, 세대가 멀어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자손 된 도리로 심히 송구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하던 바, 성화(成化) 연간(1470년경)에 16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해서 찾은 결과, 지석(誌石)을 찾아 바른 위치를 알게되니 곧 봉분을 가토(加土)하고, 자식에게 유언하기를 자신을 그 아래 묻어라 명하니, 이는 자신의 몸으로 시조의 묘역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매년 향불이 끊기지 아니하고, 멀고 가까운데 사는 많은 자손들이 모여들어 경건하게 성묘하며 정성을 다하니, 지나간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그리고 광해군(光海君) 때의 후손 영의정(領議政) 철(轍), 부사(府使) 소(紹)와 응정(應挺), 판서(判書) 극지(克智)와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서로 번갈아 가며 감사(監司)나 부사(府使)가 되어, 혹은 묘우(廟宇)를 신축 또는 중건하고, 혹은 묘정(廟廷)에 비석을 세우고, 혹은 묘역(墓域)을 넓히고, 혹은 제례(祭禮) 의식(儀式)을 제정(制定)해서 영구히 후손들에게 전할 방도를 정성을 다해서 도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잘 이루기 위해서는 재사(齋舍)가 마땅히 있어야 하므로 오래 도록 걱정하던 끝에, 효종(孝宗)4년(1653) 원손(遠孫) 우( )가 본도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성묘(省墓)하고 잔을 올리며, 종인(宗人)들과 상의해서 묘소 오른 쪽 빈터를 닦아서 재사(齋舍)를 창건하게되었으니, 그 일을 감독한 사람은 중정(中正)과 정(鋌)이었다.
 그때 처음 지은 재사(齋舍)의 규모는, 마루 4칸에 좌우 협실(夾室)을 각각 2칸으로 하고, 협실(夾室) 아래 3칸 집을 세우니, 위에 한칸은 출입하는 길을 통하게 하고, 아래 두간은  방과 마루로 하고 그 앞에 또 4간을 세워 곳간(庫間)을 만드니 모두 합해서 16칸이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묘역을 지킬 집이 있고, 제관이 밤을 지낼 방이 있고, 기구와 기물을 거두어 둘 곳이 있게되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장한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크지 못해서 매양 전회 때마다 협소해서 제관을  편안하게 수용하기 어려운 한이 있더니, 금상(今上) 8년(1682)에 원손(遠孫) 시경(是經)이 또한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묘소를 참배한 뒤 상석(床石)을 개조하고 향로석과 석인(石人), 망주석(望柱石) 등 석물을 더 세우기로 결정하고, 종인 중에서 인( )과 시망(時望)과 석우(錫禑) 등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게 하여, 다음해 봄에 친히 경내(境內)에 사는 종인(宗人)들을 인솔하고 고유(告由)한 다음 입석(立石) 했다.
 일을 마친 뒤에 종인(宗人)들과 의논하기를 재사(齋舍)가 협소해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가 매우 불편하니, 누각을 지어 제사 때 모인 제관(祭官)들이 편안하고 질서 있게 앉을 자리를 만들자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찬성해서, 곧 종인 가운데 호(灝)와 담( )과 두영(斗英)등으로 감독하게 해서 산중에서 재목(材木)을 배고 관비(官費)를 주어 보조하니, 그 역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가 후손이었다.

 그해 가을에 착수해서 그 다음해인 갑자년에 준공을 하니, 누각(樓閣)이 약 7칸으로 위에 무려 100여명이 앉을만하고, 아래에는 좌우에 곳간을 만들어 양곡을 저장케 하고 중간의 한간을 비워 통행하는 길을 만들고, 재사(齋舍) 동쪽에 신주(神廚) 3칸을 만들어 원장(垣墻)을 둘러치니 그 면모가 더욱 새로워 졌다. 
 듣는 자는 달리 듣고, 보는 자는 고쳐 보게되니 선조를 위한 성의와 용의 주도함을 어찌 다 말로 칭찬하리.
 그리하여 일가 모두가 두인(斗寅)에게 그 사실을 소상히 기록하기를 부탁하니, 사냥할 수 없어 문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시조의 위대한 업적은 이미 나라에 나타났고, 혜택은 백성에 미쳤으며, 향토에서 향사(享祀)를 받든지 800여년이 되도록 변함이 없음은 거듭 말 할 것 없으나, 그 평생의 덕의(德義)에 대한 상세한 것은 세대가 멀어서, 듣고 본 바가 없으니 어디에서 밝힐 것인가.
생각하건대 자신(自身)에 쌓아놓은 덕(德)이 크므로 경사(慶事)가 후손(後孫)에게 나타나며, 고려조(高麗朝)에서 이조(李朝)에 이르기까지 자손의 번성함과 관면(冠冕)의 성대함이 빛나고, 대단하여 세상에 비할 대가 없으니, 고관대작이 끊길 때가 없음은 물론이요, 때로는 문장도덕의 선비가 무성하게 나타나, 하나 둘로는 가히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아래로는 자손들 가운데 벼슬아치와 서민들까지 많고, 외손(外孫)된 자도 또한 많아서, 나라 안에 골고루 퍼져서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뿌리가 깊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셈의 근원이 멀면 흐르는 강줄기가 깊고 넓지 아니하겠는가.
아아! 훌륭한 일이로다.
 그런데 이 분묘를 오래도록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되고, 자손가운데 감사(監司) 혹은 부사(府使)가 된 사람이 대를 이러 성심껏 제사를 융숭하게 모셨으니, 이 모두가 하늘이 음으로 도울 것이며, 우리 시조의 선행(善行)에 두텁게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나.

 문득 두인(斗寅)은 이 일에 대해 느낀바가 있으니, 무릇 우리 안동 권씨가 시조이래 여러 파로 갈라지고, 많은 지손(支孫)이 생겨나서 여러 세대가 되고, 전국에 흩어져 천만인이 되어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나, 나무에 비유하면 비록 천가지 만 잎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있지만 한 개의 뿌리에서 나지 않은 자 없으니, 무릇 우리 종인(宗人)들은 다 각기 한 조상을 생각해서 서로 돈목(敦睦)함에 힘쓰고, 각자가 분수를 지키며 타고난 천성(天性)을 욕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신도(神道)에 예전에 비가 없었는데, 효종(孝宗) 여간(1659)에 원손(遠孫) 성원(聖源)이 영주 군수로 있을 때, 태사묘를 참배하고 마땅히 자기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풍기(豊基)에서 돌을 캐서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나 곧 관직을 떠나게되어 그 일을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뒤, 선산(善山) 부사(府使)로 부임하자 못 마쳤던 그 일을 마무리 지었고, 기묘(己卯)년 여름에 부사(府使) 성후이(成後 )가 재사(齋舍) 오른 쪽에 세우고, 제문을 지어 고유(告由)하니 성(成) 부사도 또한 외손이었으므로, 함께 기록한다.

 금상(今上) 13년 정묘(丁卯:1687)7월.24세손(世孫) 두인(斗寅)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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