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씨자료.행사 59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병산동(屛山洞)에 있다.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유씨의 사학(私學)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鄭經世)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이다. 제향공간으로 존덕사(尊德祠)·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입교당(立敎堂)·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으며, 부속건물로 장판..

삼괴정(三槐亭) 경주

이방린(李芳隣) 자는 덕화(德華)요 호는 동호(東湖)이며 본관은 청안(淸安)이다. 고려 충원공(忠元公) 양길(陽吉)의 후손으로 장기현감 기(基)의 현손이며 참봉 세례(世禮)의 아들이다. 명종2년(1547) 지금의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多山里) 다치동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활소기 등 무예가 뛰어 났다.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훈련봉사(訓練奉事)에 제수되었다. 선조25년(1592)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퇴와 이유린(退窩 李有隣), 수와 이광린(睡窩 李光隣)과 더불어 의병을 이르켰다. 그 공(생략)으로 안동부판관(안동부판관)에 제수 되었다. 선조27년(1594) 상을 당하여 귀향. (참고자료) 慶州壬亂義士 倡義錄 2007년 음 4월 초8일 촬영

과안강증권사악(過安康贈權士諤)

(1)過安康贈權士諤(안강을 지나면서 권사악에게 드림) 客中逢冷雨-객지에서 차가운 비를 만나서 古驛獨登樓-옛날 역에 있는 누각에 홀로 올라가니 日月含妖祲-일월은 괴이한 햇무리를 머금고 山川餞晩秋-산천은 늦은 가을을 전송하니 望鄕無去路-고향을 생각해도 갈 길도 없으니 扶國有餘憂-나라를 도울 남은 근심이 있으니 豪士風流重-호사는 풍류를 중하게 여기니 恩君詠未休-임금의 은혜를 갚기 위해 노래는 쉬지 않네. 참고자료: 深谷公 張悌元 詩중에서발췌 (조선중기의 학자이고 선산 鳳林書院에 봉향) (2)충효의 고장 영천 영천읍성 탈환에 성공한 의병 지도자들은 영천복성에 대한 동고록을 맺고 보국 진충하여 왜적을 결단코 물리쳐 버리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진다. 여기에 참여한 의병 지도자들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천:..

상주 사벌왕릉(尙州 沙伐王陵)

도남서원 답사 후 돌아오는 가까운 길목에 사벌왕릉 답사(2007.5.30) 이곳에 펼쳐진 넓은 평야지대는 이 곳에 정치집단이 형성되기 용이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준다. 문헌에 나타나는 정치집단의 이름은 사벌국인데, 이 사벌국은 경상북도 상주지방에 위치하였던 삼한 소국 중의 하나로, 일명 사량벌국이라 고도 한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나라는 본래 신라에 속하여 있었으나 점해왕 때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귀속하였다 한다. 그러자 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덟 왕자 중 다섯 번째 왕자인 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 이라 칭하고 11년간 이지 역을 통치하였다. 그 뒤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을 받아 929년 패망하였다. 사벌국왕..

도남서원(道南書院)

도남서원(道南書院) 우리일행(김봉소, 김영, 송필완, 권혁무)은 화양서원(華陽書院) -화양계곡(華陽溪谷) - 우암송시열 묘소(尤庵宋時烈 墓所)를 답사하고 상주에 도남 마을을 찾아 굽이도는 낙동강 기슭에 영남의 수서원(首書院) 남쪽으로는 청룡산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은빛모래와 낙동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도남서원(道南書院)으로 찾아 같다. 그리고 관리인으로부터 설명도 듣고 9선생의 약사기도 받아 돌아와 촬영한 사진을 보면서 감이 선현들의 호와 휘을 올려봅니다. 포은정몽주(圃隱鄭夢周), 한훤당김굉필(寒暄堂金宏弼), 일두정여창(一?鄭汝昌), 회재이언적(晦齋李彦迪), 퇴계이황(退溪李滉), 소재노수신(蘇齋盧守愼), 서애류성룡(西厓柳成龍), 우복정경세(愚伏鄭經世), 창석이준(蒼石李埈) 九 先生님을 배향하는 서원이..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宋尤庵 神道碑 및 墓所)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宋尤庵 神道碑 및 墓所), 응봉병사(鷹峯丙舍) 유 형 : 도지정기념물 지정일 : 1976.12.21 시 대 : 조선시대 전 화 : 043-830-1544 관 리 : 송영달 주 소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1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는 조선중기의 정치가이자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선생의 자(字)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 인조 11년(1633) 사마시에 합격한 후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었고, 효종(孝宗)때 이조판서가 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현종(顯宗) 9년(1668)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후에 좌의정까지 올랐다...

괴산 화양서원(槐山 華陽書院)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 (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개심사, 해미읍성, 정순왕후생가,부석사(박물관)

= 개심사(開心寺) = 2007 국립대구박물관 3차 답사 후기 예향. 충절의 전통과 서해안 중심지로 살기 좋은 충남 서산을 찾아 5월 25일 대구박물관학회에서 조영길 회장님 인솔 하에 250명을 차량6대에 분산 승차하여 아침7시에 출발하여 개심사 오전11시15분에 도착. 해미면에서 6km쯤 떨어진 상왕산(307m)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개심사는 충남 4대 사찰 중의 하나다. 주차장에서 절 마당에 이르는 굽이진 산길이 호젓하고 아름다운데 봄철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난다고 해설사의 말씀이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개심사 오르는 입구 양쪽에는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라는 돌기둥의 뜻은 세속에 물든 마음을 깨끗이 씻고 오르면 마음이 열린다함 상왕산 개심사 해탈문 백일홍나무 = 해미읍성 = 성은 고려 말부..

매와 권사악(梅窩 權士악)

매와 권사악(梅窩 權士악) (1)경주 호계서사(慶州 虎溪書社) 공(公)의 휘(諱)는 권사악(權士악)이요 자(字)는 명언(明彦)이고 호(號)는 매와(梅窩)이며 중묘병진생(中廟丙辰生) 이고 통훈대부(通訓大夫)행울진현령(行蔚珍縣令)겸(兼) 강능진관병마절제도위(江陵鎭管兵馬節制都尉), 임진창의록훈(壬辰倡義錄勳) 행사천현감(行泗川縣監) 형조정랑(刑曹正郞) 선조임자졸(宣祖壬子卒)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유실기(有實紀) 정묘병오향호계사(正廟丙午享虎溪祠) 참고자료: 안동권씨대동보 1982년도발행 地228p (2)호계서사 향사 (虎溪書社 享祠) 제일시: 2007년양5월3일 中丁日 오전1시하루전일(5월2일) 전 제관 오전11시 27명 입실완료 권혁무 향사 참제후 사진..

송헌 권여정

송헌 권여정(松軒 權汝精) 자는 자중(子中)이요 호는 송헌(松軒)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고려태사(高麗太師) 행(幸)의 후손이고 사정(司正) 수해(壽海)의 현손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순천(順天)의 아들이다. 명종(明宗) 22년(1567) 연일(延日) 남면(南面) 물기동(勿耆洞)에서 출생하였다. 선조(宣祖)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표종(表從) 김현용(金見龍) 형재들과 연락, 의병을 이르켜 경주로 들어갔다.동 6월 9일 여러 의사들과 더불어 문천(蚊川)에서 회맹하고 7월에는 경주의사 권사악(權士?),손시(孫時), 최진입(崔震立) 등과 함께 영천봉성전에 참가하고 의병대장 권응수(權應銖) 막하에 소속하였다. 9월에는 경주성복성전에 참전, 많은 전공을 ..

능동재사(陵洞齋舍)

능동재사(陵洞齋舍) 중요민속자료 제183호(1984. 1. 10)로 지정된 안동권씨 능동 제사는 총 4동 49간의 구(口)자형 와가이다. 고려 삼태사중의 한 분인 권태사의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사인데, 처음 효종 3년(1653)에 관찰사 우( )공이 종중(宗中)의 사람들과 의논해서 마루, 고방, 등 16간을 지었고, 그 뒤 숙종(肅宗) 9년(1683)에 관찰사 시경(是經)공이 누각 일곱 간을 추가로 건립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753년에 불이 나서 건물이 전소된 것을 중건(重建)했는데, 1896년에 다시 화재가 나서 당시 안채, 안사랑채, 사랑채, 대문간채, 별당, 곳간채 등 총 70여간의 건물이 모두 타버리고, 다만 임사청(任司廳)과 전사청(典祀廳)등 몇 칸만 남기고 모두 없어진 것을 ..

성화보(成化譜 )

성화보(成化譜)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족보. 3책. 목판본. 당시에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성화연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 성화보라 부르며, 현전 하는 우리나라 족보 중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의정부좌찬성과 예조판서를 지낸 바 있는 권제(權 庶 )가 중국의 ≪ 소씨보 蘇氏譜 ≫ 를 모방하여 편찬한 것을 아들 권람 ( 權擥 )이 자료를 수집하여 보완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자, 권제의 생질인 대제학 서거정 ( 徐居正 )이 상주판관 박원창(朴元昌)과 대구부사 최호원 ( 崔灝元 )의 도움을 받아 다시 편집, 교열한 뒤 1476년 경상감사 윤호 ( 尹壕 )를 시켜 안동부에서 간행하였다. 그 뒤 1919년 경상북도 안동의 안동 권씨 능동재사..

안동권씨 시조 태사공 권행

1. 태사공(太師公)의 선계(先系)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처음 성은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이다. 종성은 왕실(王室) 성씨를 지칭한 말이고 종실(宗室)이라 쓰기도 한다. 종성이란 말은 종족(宗族)의 성씨로 쓸 때에는 같은 겨레붙이의 성씨, 즉 성씨가 같은 일가붙이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라의 종성이라 하였기 때문에 국성(國姓), 즉 왕성(王姓)을 말한다. 신라의 국성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것이 김씨인데 고대에 경주와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두 김씨가 있었다. 경주의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여 퍼졌고 김해의 김씨는 가락국(加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여 퍼..

문창공 영당

문창공 영당(文昌公 影堂) 대구 도동 분기점 경부 고속도로 밑으로 지나 우회전하여 약500mm 가면 경주최씨 고운 최치원 영당, 광정공(匡靖公), 참의공(參議公)제단비(祭壇碑), 경운재(景雲齋), 주변정화사업과 웅장한 재실을 아주 깨끗하게 잘 관리 하고 있었다. 그리고 100mm 더 들어 가면 달맞이 전원식당(053-983-0845)이 있다 식당에서는 10명 이상이면 시내까지 왕복으로 태워 주고 오리 고기도 맛이 있고 봄 나들이로 가 볼만한 곳이다. 2007.4.10